처음 읽는 여성 철학사
리베카 벅스턴.리사 화이팅 외 지음, 박일귀 옮김 / 탐나는책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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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생 시절에 도덕, 윤리 과목을 배우며 동서양 역사에 어떤 철학 사조와 철학자들이 있었는지 열심히 배웠지만 그 중 여성 철학자 이름은 어느 하나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공부를 게을리해서라기보다 교과서에 아예 여성 철학자가 소개되지 않았다시피해서인데, 사실 주목, 재조명하려 들면 수천 년 역사 중 여성 한 명이 없을 리 없습니다. 이 책은 그간 우리가 소홀히 봐 온, 위대한 여성 철학자들을 조명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소개한 글들마저 현역 최고의 여성 철학자들이 집필했습니다. 내용이나 형식 양면에서 올스타전 혹은 만신전(판테온)이라 할 만합니다. 


우리 나라 교과서만 그런 게 아니라 영국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가 봅니다. p7 저자 서문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시몬 드 보부아르 두 명만 등장한다.."며 정평 있는 어느 다이제스트 철학 대중서의 태도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말이 나오니 말입니다. 뭐 저 정도라면 우리 나라 책들도 안 빼놓고 언급하는 편입니다. 특히 보부아르는 근대 페미니즘의 아득한 조상님과도 같은 사람인데, 몇 년 전 프랑스 총리 마크롱이 공개석상에서 "페미니즘 같은 해로운 풍조가 미국으로부터 수입되어 프랑스의 지적 풍토를 어지럽히고..." 같은 말을 해서 엄청 웃은 적이 있습니다. 마크롱은 유구한 지적 토양을 자랑하는 프랑스 정계에서도 초 엘리트 출신으로 꼽히는 사람인데 저런 무지를 드러내다니... 물론 극성 페미니즘은 1960년대 미국 중심의 우먼 리브에서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긴 했습니다만.


이 책은 그렇다고 페미니즘 역사에 주제를 한정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보편적인 철학 사조의 유산에 여성들이 기여한 바가 얼마나 큰지를 밝히는 게 주 목적입니다. 물론 그들은 인간인 동시에 여성이었으며 그 빼어난 재능을 동시대 체제가 얼마나 억압했는지에 대해 뼈저린 아픔을 가졌겠으므로 이에 대해 그 저작 속에서 한 마디 안 할 수는 없었겠죠. 책은 중국의 역사가 반소, 그 오빠 반고의 저작 명의로만 보통 소개되는 <한서>의 공동 저자부터 논의를 시작합니다. 


현대 중국은 공산 혁명으로부터 시작했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여성에 대한 족쇄를 가장 과감하게 걷어내고 부부 사이의 평등을 화끈하게 추구한 나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p37을 보면, 허베이성 전통문화연구소 간부인 딩쉬안이라는 분이 연설한 내용이 일부 인용됩니다. 이분은 바이두 백과에도 다분히 조롱섞인 문구로 소개된 분인데, 이 책에는 안 나옵니다만(이 책뿐 아니라 어디에도 잘 안 나옵니다) 한자로는 丁琁(정선)이라고 씁니다. 21세기에 "처녀성"을 미덕(을 넘어 일종의 "지참금")으로 강조하고 그 외에도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했는데 공산혁명을 했다는 나라에서 저렇게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의 성의식이란 게 이 모양입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진보의 기치가 어느 정도나 허상에 가까운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후한의 역사가 반소를 첫 타자로 내세웁니다. 인종, 성별, 문화권에의 평등한 비중 할당을 의도한 결과이겠습니다. 우리 나라도 중국고전문화에 정통한 분들이 참 많지만 이상하게도 반고만 강조할 뿐 반소의 기여에 대한 언급이 매우 적습니다. 사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건 사서인 <한서>가 아니라 그녀가 쓴 실용윤리서인 <여계>인데, 이 책은 오늘날 여성들이 읽으면 무척 실망스러운 내용입니다. 마치 소혜왕후의 <내훈>을 연상케도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숨막힐 듯한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들이 시아버지, 남편, 시어머니의 등쌀 속에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남을지를 가르치는 일종의 생존 키트로 의의를 부여합니다. 한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유가가 다른 제자백가의 영향을 완전히 누르지 못한, 일종의 다원성이 살아 있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며 역시 긍정적 의의를 찾습니다. 또 저 정선, 즉 덩쉬안을 구태여 언급한 건 여전히 구태, 전근대성을 극복 못 한 중국의 현실 속에서 여성들이 과연 누구로부터 지혜를 찾아야할지를 상기하려는 의도였다고 저자가 스스로 밝힙니다. 달리 말하면 중국은 반소의 시대인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발전이 없었다는 뜻도 되겠네요. 


히파티아는 무슨 피타고라스라든가 시인 사포라든가 플라톤처럼 오래된 사람이 아니고, 저 반소보다도 200여년 뒤에 활동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녀의 죽음이 매우 끔찍했고 독립적 여성에 대한 반감도 죽음의 한 원인이 되었기에 이 순교자가 꽤 오래 전 사람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죠.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지만 이미 헬레니즘이 망한지 오래된 시점이었고 어쩌면 이 비참한 죽음이 그리스 고전 문화의 우아함 그 종말을 상징하는 바도 적잖이 있습니다. 여튼 "수학 잘하는 여성"이 멋있는 건 사실이며, 19세기 러시아의 여성 수학자 소피아 코발레프스카야 같은 이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히파티아를 소개한 의의는 물론 그녀가 철학자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당대 수학자들은 상당수가 철학자를 겸했죠. 


여성 사상가 하면 누구나 첫손에 꼽을 만한 인물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입니다만 이 책에서는 그분을 다루기 앞서 메리 애스텔을 소개합니다. 이분은 울스턴크래프트보다 무려 한 세기나 앞서 여성 인권을 테마로 다룬 논문을 썼다고 합니다(p67). 그녀는 귀족 출신은 아니었으나 부친이 석탄 소매업자였으므로 아마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으리라 짐작되며 저작들만 남아 있을 뿐 어떤 생을 살았는지, 금욕적이고 경건한 삶을 살았으며 자선에 헌신했다는 정도 외에 더 구체적인 정보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하는데, 이 역시 여성에 대한 시대의 홀대를 엿보게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페미니즘 분야 말고 일반 철학의 스탠스에서 이분이 취한 입장은 영국 전통의 경험론과는 반대 지점에 가깝다는 게 이 책의 평가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고교에서 배운 대로, 영국의 경험론 vs. 대륙의 합리론 중 후자, 즉 데카르트의 스탠스와 비슷하다는 거죠. 결혼에 대해서도 그녀는 회의적인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이분에 대한 글은 시몬 웹 박사(물론 여성 철학자입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울스턴크래프트에 대한 글은 산드라 베르제 부교수가 집필했습니다. 


천재로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과학자, 철학자를 보면 의외로 그 아내, 혹은 애인으로부터 영감을 크게 받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도 그랬고 존 스튜어트 밀도 그러했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여성 철학자, 행동가였던 해리엇 테일러 밀을 보면 성씨가 두 부분입니다. 첫째 남편이 활동가 존 테일러였고 둘째 남편이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이라서입니다. p101에 보면 존 스튜어트 밀은 저 책의 저작 명의를 놓고 원래 아내에게 특별히 크레딧을 하려 했으나 테일러 밀이 사양했다고 합니다. <자유론> 서문에도 당시 건강이 위중하던 아내에 대한 특별한 헌정사가 있다고 나옵니다. 


우리가 소설가로만 알고 있는 조지 엘리엇(이름도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 의도적으로 남성처럼 필명을 썼죠. 반면 저 앞의, 우리 시대 철학자 시몬 웹의 퍼스트네임은 Simone이므로 남성이 아닌 여성형입니다)도 이 책에 따르면 철학자로서의 업적이 크다고 합니다. 그 핵심은 "자기 인식", 즉 나 자신을 아는 일이 궁극의 평안을 가져다준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영국 소설은 문학적 성취는 잠시 별론으로 하고, 작품 속에 엄청난 사색과 철학이 녹아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데, 조지 엘리엇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필자 클레어 칼라일 박사는 <미들마치> 등 그녀의 작품 구체적 예를 여럿 들며 자신의 주장을 논증합니다. 책 조금 뒤에는 역시 우리가 소설가로 보통 알고 있는 아이리스 머독이 소개됩니다. 


이어 에디트 슈타인, 즉 독일에서 두번째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여성이며 후설(20세기 초 현상학의 대가, 한국에는 이남인 교수가 이 분야 전공자로 유명하죠)의 수제자였던 분인데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소개됩니다. 또 하이데거의 편협한 태도 역시 날카롭게 꼬집히고 있습니다. 이어 해나 아렌트(이 책의 표기에 따릅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소개되는데 이 두 분에 대한 글이 분량면에서 다소 짧다는 데서 개인적인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활동가로서 잘 알려진 앤젤라 데이비스가 "철학자"이기까지 한지는 아마 의견이 갈릴 수도 있겠습니다. 이 책 후반부에는 시대상을 반영하여 소위 "유색인종(책에서 그런 표현을 쓰는 건 아닙니다)" 철학자들을 독자들과 만나게 합니다. 특히 책 마지막은 아지자 알히브리라는 다소 낯선, 모슬렘 여성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아직 생존해 계신 교수님을 다루는데 이분은 모슬렘 법과 서양법 사이의 가교를 놓은 업적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혹은 진즉에 알았어야 했을, 여성 철학자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적어도 PC 면에서 균형을 잘 맞춘 듯 보입니다. 책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영미권에 선정이 다소 치우친 면이 있고, 독자에 따라서는 아직 여성 철학계의 공헌이라는 게 더 진전될 여지가 있구나 같은, 책의 의도와는 반대되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점 정도입니다. 페미니즘의 살아 있는 신화인 주디스 버틀러가 이 책에서 다뤄지지 않은 것도 의외라면 의외였습니다. 어렵지 않고 쉽게 쓰였으며, 다만 책을 읽으면서 따로 여러 군데를 찾아 보느라 서평 등록이 다소 늦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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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끝 소설 르네상스 12
한수산 지음 / 책세상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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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프 25기 7주차에 이 작가님의 <아프리카여 안녕>을 리뷰한 적 있습니다. 한수산 작가는 알려진 대로 197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소설가였고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아프리카여 안녕>은 젊은이, 20대 초반 정도, 아직 정신적으로 십대 티를 못 벗은 청춘들의 성장통을 다뤘는데 그 느낌은 시대의 한계가 있어서인지 매우 미숙해 보였다고 그 독후감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이 책은 한수산 작가의 단편집이지만 어떻게 된 게 지금 와서는 단편집 자체로 주목받는다기보다 "<대설부>라는 작품이 실린 책"이란 의의가 더 큽니다. 그만큼, 옛 독서인들한테서도 지금까지 안 잊히는 작품이 바로 <대설부>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죠. 


지금 이 작품 <대설부>는 한수산 작가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역시 시대가 많이 지났다 보니 그런 느낌을 아주 지울 수는 없으나, 적어도 왜 당시에 이분이 그렇게 인기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상당 부분 해소해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사는 젊은 세대 특유의 감각과 고민, 발랄함이 물씬 묻어나며, 그런 한편 장래에 대한 불안감, 이 젊음이 지나가면 설움을 어찌 달랠까 하는 애상이 잘 풍깁니다. 물론 요즘 MZ 세대는 재테크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느라 그런 고민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주인공은 한수산 작품이 거의 언제나 그렇듯 현실에 대한 감각이 흐릿하며 특유의 이상주의자 같은 기질로 여자가 잘 따르는 타입입니다(요즘 같으면 모쏠 되기 딱 좋은 조건). 이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연극에 심취해 계신 분인데 그야말로 돈안되는 것만 골라가며 몰두한다고나 하겠습니다. 주인공의 본업은 화학공학도이며 교수도 그의 장래를 유망하게 보고 지원도 해 주건만 저모양입니다. 이유는 어려서부터 무척 따르던 형이 주어서입니다.


어느날 주인공은 형의 방을 노크도 없이 찾았다가 <PLAYBOY>로고가 선명히 새겨진 알록달록한 잡지를 보고 있는 형을 당혹스럽게도 목도하게 됩니다. 이지적이고 현명한 줄로만 알았던 형이 그런 저질 매체를 즐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마! 남자를 흥분시키지 못하는 여자란, 그건 이미 폐물인 법이야."


이처럼 속물적인 면도 있지만 항상 이치에 밝고 자신의 문제를 잘 헤쳐나가던 형, 그가 갑자기 죽고 남은 건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 그리고 형이 생전에 사귀던 여성이었습니다. 이 여성에 주인공은 베아트리체의 심상을 투영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런 것처럼 이는 그저 당사자의 허상에 불과합니다. 주인공에게 형은 뭐랄까, 도스토옙스끼의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드미트리와 이반, 첫째 형과 둘째 형을 합쳐 놓은 사람입니다. 큰형은 야성적 충동과 정열을, 작은형은 면도날 하나도 들어갈 틈 없을 견고한 이성의 방벽을 쌓아놓고 사는 사람.


그리고 그 여성은 아마도 주인공이 여성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미덕을 합쳐 놓은... 것처럼 착시를 부르는 사람입니다. 허나 여성은 결국 주인공을 남자로 봐 주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는데 이는 당연합니다. 실험실에서부터 그를 졸졸 따르는 후배 여성도 하나 있는데 결국 형의 그 여자가 자신을 보듯, 자신도 그 후배를 끝내 여성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정념을 부르는 여름이 괴롭다면, 청춘은 차라리 만물이 시들고 난 겨울을 기다릴 밖에요. 제목은 그래서 겨울(=눈)을 기다린다는 뜻의 대설(待雪)부(賦)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은 MBC에서 단막극으로 만들어진 적 있는데, 대학원 여성 후배 역에 박순천씨, 주인공에 길용우씨가 나옵니다. 자신의 뜻을 안 알아주자 두 비커에 염산, 황산을 각각 담고와서 잔뜩 협박한 후 마셔버리는 장면이 재미있습니다. 물론 그런 강산용액이 아니라 탄산음료였다는 게 밝혀집니다. 교수 역에 이호재씨, 죽은 형 역에 당시 한창 주부층에 인기를 끌었다는 박영규씨, 형의 여인 역에 허윤정씨가 나옵니다. 세상 모든 일을 다 통달했다는 양 허풍을 치는 선배 역의 정한헌씨 연기도 볼만합니다. 저 시절 대학생들이란 유치하고 귀여운 맛이 있었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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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시조 이문열 중단편전집 2
이문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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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시조에서 "시(翅)"는 날개라는 뜻입니다. 받침인 支가 발음을, 깃털 羽가 뜻을 나타내는 형성자입니다. 국어사전을 찾아 보면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팔부중(八部衆)"의 하나라고 나오는데, 그럼 팔부중에는 무엇이 있는지 찾아 보면 여덟 개 중에 "금시조"가 또 없습니다.  같은 사전 안에서 설명이 완결되지 않는다는 건 사전의 품질을 의심케 하는 거죠. 물론 요즘은 사전보다 강력한 구글이 있어서 찾아 보면 나옵니다. 국어사전에도 팔부중 중 가루라를 들어 놓았는데 이 가루라가 금시조입니다. 금시조는 음역이 아니라 뜻으로 풀어 놓은 이름이라 하겠습니다. 


이 장편은 이문열 작가의 동인문학상 수상작이며 읽어 보면 과연 장중하고 심오한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가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대 분위기에는 좀 맞지 않는 듯한, 다소 정형적인 구조와 전개가 아닐까 하는 생각 떨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런 종류의 교훈과 미학적 효과는 올타임 리퀘스트에 속하며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메시지라는 건 뭐 틀림없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스승 석담은 예술이 도, 학, 삶과 유리된 채 존재할 수가 없다는 입장이며, 제자(주인공)은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고 예술은 어떤 입장이나 철학과는 따로 떨어져 그 자체의 존재 영역이 있다는 쪽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art for art's sake라고 하겠죠. 그런데 훨씬 앞선 시기,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 김동인의 단편들에 나오는 피상적이고 설익은 입장보다는 훨씬 깊이가 있습니다. 소설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의 깊이 있는 사색 그 결과를 담아야 그게 독자에게 어떤 감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이 정도 담론은 현대 독자에게는 이미 상식이 되었으므로 길게 재인용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장편을 읽으면서, 과연 예술의 가치는 누가 알아보며 누가 값을 매기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가 5년 동안 한국을 이끌어갈 대통령이 되는지는 평등하게 주어진 한 표에 따라 돈이 있건 없건 유식하건 멍청하건 간에 모두가 모여서 결정합니다. 주식의 가격은? 개미의 시시한 돈도 모이고 모이면 그 볼륨을 무시 못 합니다. 그러나 예술 작품을 "보통 선거"로 평가하면, 뒤샹의 <분수>는 단돈 이만원에 그 모든 가치가 결정되고 말 것입니다. 예술은 첫째 백아 곁에 종자기가 있었듯이 고독한 예술혼을 해례(?)할 수 있는 영혼의 교통자들이 있어야 그 가치가 비로소 밖으로 드러납니다. 둘째 그것에 고가를 매기고 손에 넣으려는 부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결정된 미적 감각이라는 게 과연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정직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저 돈 많은 호사가들의 변덕에 의해 좌우될 뿐일까요? 답은 알 수 없습니다. 부정적이라는 게 결코 아니고, 말 그대로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이 작품은 KBS에서 극화된 적이 있는데 석담 역에 신구씨, 고죽 역에 고 김흥기씨가 나와 볼만한 연기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신구씨 특유의 사람 갈구는 연기는 이게 배역이 배역이다 보니 설득력이 있지만 김흥기씨 연기는 사실 저 인물이 뭘 말하고자 하는 건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고 김흥기씨를 최고의 연기자로 평가하는데, 극이 저렇게 된 건 제 생각에 각본이 나빠서입니다. 원작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시각의 차이로 스승과 제자가 대립하는 건데, 드라마는 그게 아니라 두 인물의 신분 차이라든가 개인적 애증 관계에 초점을 맞춥니다. 뭐 그렇게 해도 하나의 (재)해석은 되는 건데, 문제는 원작 소설의 진행에서는 또 벗어날 수 없다 보니 드라마가 처음에 꺼낸 단서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야기가 흘러가는 거죠. 드라마만 보고 실망한 사람은 원작 소설을 읽어 보고 원작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할 필요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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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의 나성 - 윤흥길 대표중단편선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27
윤흥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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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작품에서 만약 로스앤젤레스, LA를 "나성"으로 표기한다면 그에는 아마 무슨 특별한 의도나 사정이 있겠거니 독자가 짐작하는 게 보통이겠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이 발표될 무렵(이 책이 출간된 시점이 아니라)에는 저런 표기가 보통이었으므로 그냥 독일(도이칠란트), 호주(오스트레일리아)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합니다. 윤흥길씨는 새삼 소개가 필요 없는, 중고교 교과서에도 작품이 소개되는 작가입니다. 


1970년대라면 한국에도 많은 회사가 들어서서 사무직 직원을 뽑았고, 소 팔고 논 팔아서 아들을 대학 보낸 부모들이라면 이런 버젓한 회사에 취업하여 자신들처럼 고생을 하지 않고 더 우아한 일을 하며 돈을 벌 것을 기대했겠습니다. 소설에 묘사된 대로라면 이 무렵부터 벌써 사내 정치가 만연하여 승진을 둘러싸고 치열한 줄서기, 모략, 음모가 판을 치며, 마치 몇 년 전 간부급 검사들(그 중 한 분은 장관이 된)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한 놀라운 일이 있었듯 이 소설 속에도 명색이 화이트칼라(당시로서는 선망의 대상이었을)끼리 아주 한심한 다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 역시 모두 시대상 단면들을 보여 줍니다. 


그 와중에도 주인공은, 어렵사리 회사에 들어가서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 고뇌를 합니다. 자신을 좋다고 따라다니는 젊은 여성도 있지만 무슨 생각인지 쉽게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이런 주인공을 자기 라인으로 끌어들이려는 과장도 있고, 그 과장이 타깃으로 삼는 부장도 있어서 막후의 싸움이 본연의 업무보다 더 불꽃튀깁니다. 이 와중에 부장은 그나마 고지식한 사람이라서 한눈팔지 않고 업무에만 전념하지만 다른 사원들은 그런 제스처 하나도 다 자신에게 유리할 대로만 왜곡합니다. 눈치싸움에 열심이라고 다 똑똑하게 구는 건 아니라서 외부에서 보면 저 인간들이 왜 저러나 싶게 삽질과 헛다리의 연속입니다. 


스트레스를 풀려면 근처 다방에 가서 마담이나 종업원들과 수다도 떨고 커피 한 잔에 담배 한 대(실내 흡연은 거의 필수)가 화이트칼라의 낭만입니다. 이 여자들도 다 시골에서 올라온 처지들인데 따지고 보면 영혼을 팔고 마음에도 없는 아부를 하는 사무직이라는 게 웃음을 팔고 몸을 파는 여성들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물장사 자리 장사라서 테이블을 오래 차지하고 게다가 커피 한 잔도 안 사며 죽치고 앉은 영감님이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는데 처음에는 전화 한 통화 쓰자는 영감님한테 친절했으나 두번째부터는 온갖 눈치를 다 줍니다. 나중에는 노골적으로 쫓아내다시피하는데 무슨 생각인지 주인공은 "점잖아 보이는" 영감님한테 그러지 말라며 역성을 들기까지 합니다. 고향에 있는 부친이 생각나서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꿈꾸는 자"는 그 영감님이고, 이 꿈꾸는 자를 동정하는 게 바로 주인공입니다. "나성"은 한때 희망을 걸었건만 결국 아무 소식도 없는 어떤 지향점을 상징합니다. 지금이야 특별한 다른 목적이 없다면 미국 이민을희망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1960년대에는 아메리칸 드림을 가진 이가 많았죠. 이 작품에도 그런 지난 시대의 흔적이 묻어나며, 영감님은 마침내 국제전화 걸기를 포기하고 발길을 버스터미널로 돌리는데 그 허탈한 웃음을 보니 아마 자살을 염두에 두는 것도 같습니다. 


이 단편은 TV 단막극으로도 만들어졌는데 영감님 역에 2개월 전(2022. 5) 지병으로 타계한 이일웅씨, 주인공에 <태조 왕건>에서 백두산 도인 역으로 나와 의도치 않게 큰 웃음을 준 강태기씨, 혼자서 검소하게 살다 엉뚱한 오해를 받은 소심한 회사원 역에 백윤식씨, 도시적인 미인 역으로 자주 나온 권기선씨, 음모를 꾸미는 못된 과장 역에 민욱씨(항상 그런 역만), 무덤덤한 부장 역에 문오장씨, 몇십 년 뒤 <사랑과 전쟁>에서 미친 시어머니 역으로 단골 출연한 젊었던 곽정희씨 등이 나와 볼거리를 선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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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교수는 1970년대~80년대 인기 작가였으며 소설, 시 두루 창작했고 특히 소설은 고전적 정제미가 돋보이는 작품 세계를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이 책에는 열 아홉 편의 소설과 시들이 실렸으며 <흙덩이와 금불상>, <처형의 땅> 등이 유명한 단편입니다. 그의 본령은 시(詩)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쪽은 그의 소설들입니다. 


이 책에 실린 중 특히 재미있게 읽은 건 <인형의 교실>입니다. 중의적인 제목이며 어떻게 보면 제목 속에 스포일러가 들어 있다고도 할 수 있네요. 향토색도 짙게 배어나고 휴머니즘, 참된 스승의 자세 등을 강조한 작품이긴 하나 읽기에 따라서 이 작품을 미스테리물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25기 13주차에 서영은의 <뱁새의 꿈>을 리뷰했었습니다. 그 작품도 젊은 여선생이 벽지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답답하고 발전 없는 현실의 장벽을 뛰어넘으려는 이야기였는데 지금 이 단편에도 도시 중산층 가정에서 귀하게 자라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여선생이 시골에 부임하며 겪는 사연이 나옵니다. 물론 <뱁새의 꿈>은 아주 가난한 도시 빈민 가정 태생의 여선생이었다는 점이 다르며 이후 진행되는 스토리도 생판 다르긴 합니다만 여튼 그런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서영은 작가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당대의 문호 김시종 선생과 특별한 관계를 맺기도 한 분인데 저 <뱁새의 꿈> 여주인공도 작품 속에서 돈 많은 재일교포 사업가와 연을 맺을 뻔한 게 어떤 연상을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큰 차이도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언급은 고인들께 실례가 될 수 있어 여기서 언급을 줄이겠습니다. 


여선생은 깡촌 어느 학교에 부임하여 그 나름 의욕적으로 교사의 직분을 수행하려 듭니다. 이상한 건 부임 첫날 수업 중 옆 책상에 벗어 걸어 둔 자켓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학생이건 뭐건 손버릇이 나쁜 애를 잡아 교정하는 건 교사의 임무이기도 하니 절도범을 색출할 만도 하겠건만 여선생은 그러지 않습니다. 옷 욕심이 많을 젊은 여성인데도 엄청 대범하고 어른스럽게 굽니다. "아이들을 범죄자로 몰고 의심하며 난리를 치기보다, 스스로 죄의식을 느끼고 물건을 돌려놓길 기다리자." 구태여 저렇게까지 안 해도 선생답지 않다고 비난할 사람은 없을 텐데 말입니다.


자켓은 돌아오지 않고 다음에는 모자가 사라집니다. 이제 선생은 어디 어쩌나 보자는 생각으로, 이것도 한번 가져가 보라는 식으로 스카프를 창틀에 걸어 놓습니다만 기대는 배반당하고 나중에는 펜, 반지 등 귀중품들도 사라집니다. 선생 본인의 입장에서나 작품 밖의 독자가 보기로나 이제는 구제불능의 악질 도둑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선생 물건을, 어쩌다 한둘도 아니고 아예 가산을 들어먹을 만큼(?) 가져가는 애들에게 뭘 기대하겠습니까?


이 학급에는 선배 여교사(시골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촌아낙인지 교사인지도 모를 외양입니다)의 어린 딸도 속해 있습니다. 이 아이만큼은 거짓말을 안 하겠지 하는 기대로 선생은 조용히 따로 불러 물어 봅니다. 그러나 얘마저도 "몰라요!"라 소리치며 도망갑니다. 이 장치는 치밀한 복선입니다. 이런 아이는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기 때문에 설령 악질 급우의 위협, 친분 같은 게 있더라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선생에게 진실을 털어놓지 않는 것입니다. 눈치빠른 독자는 여기서 사태의 진상이 무엇일지, 적어도 어떤 방향성을 띨지 감을 잡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한편 주변 인물들은 선생 주위에서 "이제 떠날 때가 되었나?"라며 계속 독자를 향해 암시를 줍니다. 물론 독자는 결말을 다 읽고 나서야 이런 대목들이 암시요 복선인 줄 깨닫습니다.


이 단편은 MBC에서 단막극으로 1980년대 중반에 제작 방영되었는데 시나리오 각색자가 장선우 감독입니다. 아주 젊었을 시절의 솜씨이겠으며 원작과는 차별화되는 여러 기법도 눈에 띕니다. 가령 끝까지 교사의 직분을 다하며 아이들과 한마음이 되고 싶었으나 좌절하는 대목에서, 선생은 마음 속으로 전학급이 자신의 모습을 화폭(초등용 스케치북)에 담아 선물하며 여태 가져간 옷, 물품 들을 모두 돌려 주는 감동적인 장면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는 끝내 그녀 마음 속의 환상인 게 드러납니다. 또 당시로서는 드물었을 장거리 전화가 서울 본가 모친으로부터 걸려와서 대기업 취직 자리, 혼처 등을 권하는 말을 들을 때 선생은 교직을 단념하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며 아이들 앞에서 교사인 자신이 거꾸로 벌을 서는 환각을 떠올립니다. 이런 장면은 교사로서의 좌절, 낙담을 하나의 시퀀스(일종의 극중 극이라고 할까)로 은유한 것인데 역시 원작에는 없는, 감독 장선우만의 이지적인 창의입니다(단막극 연출자는 다른 분이며, 장선우씨는 이 작품에서 각색만 했습니다). 아무튼 젊은날의 장선우 감독의 한 흔적을 이런 드라마에서 발견한다는 게 재미있는 체험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여주인공역은 젊었을 때의 김혜수씨가 나오는데, 1970년생이라고 되어 있는 김혜수씨가 드라마 제작연도인 1986년이라면 고작 열 여섯 살때입니다. 그런데도 교대를 갓 졸업하고(물론 2년제 졸업자 교사도 당시에는 많이 뽑을 때였으므로 더 어린 나이일 수 있지만)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역을 맡았던 것입니다. 어리긴 확실히 어린 모습이나 16세로 보기엔 또 숙성한 외모이기도 합니다. 극중에는 주인공이 거울을 보며 "참 예쁘긴 하지만 어리석게도 생겼구나" 라고 하는 대사가 있는데 이 역시 원작 소설에는 없습니다. 아마 장선우 각색자가 신인배우 김혜수씨를 보며 느낀 바 그대로를 대사 안에 담은 것일까요?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김혜수씨는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오히려 커버가 되지만) 10대때는 물론 20대, 30대 내내 특유의 얇은 목소리 때문에 뭘 말해도 좀 어색한 느낌이 들었는데 여기서도 대사연기만큼은 솔직히 국어책입니다. 그러나 그녀만의 엄청난 매력이 있어서, 극에 몰입하는 데에, 더군다나 여교사의 거의 1인극에 가까운 이 드라마에 집중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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