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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오리지널 초판본 고급 양장본) ㅣ 코너스톤 착한 고전 양장본 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미영 옮김, 김욱동 해설 / 코너스톤 / 2025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도 오리지널 초판본의 표지이며 양장본입니다. 제목은 프락투르 체로 인쇄되었는데, 특이하게도 저자가 에밀 싱클레어라고 나옵니다. 물론 우리는 싱클레어가 이 소설의 등장인물일 뿐, 작가는 헤르만 헤세임을 다 알고 있습니다. 발표 당시 싱클레어라는 젊은이가 자신의 수기를 썼다고 믿은 독자들은 과연 어떤 느낌으로 이 책을 읽어나갔을지 살짝 궁금해지기도 했네요.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헤르만 헤세가 이 소설을 지었을 때는 30대 초반의 나이였습니다. 부제도 따로 붙었는데 Die Geschichte einer Jugend입니다. 풀면, 어떤 소년기의 이야기입니다. 불어도 그렇지만, 독일어 Geschichte는 영어의 story도 되고, history도 됩니다. 출판사는 S. Fischer Verlag라고 나오는데 이 출판사는 지금도 있습니다. S는 설립자 자무엘 피셔의 퍼스트네임이며 Verlag이 출판사라는 뜻입니다.
데미안은 다소 무책임하게 싱클레어에게 악인의 특권이랄까 쾌감 같은 걸 들려 줍니다(p42). 카인은 부당하게 오명을 뒤집어썼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럼 친동생 아벨을 죽인 것도 누명인가? 그건 아니며 형제를 죽였는지까지는 확실치 않으나 강자가 약자를 죽인 사실 정도는 맞지 않겠냐고 예리하게, 일종의 신화비평을 시도합니다. 아무튼 카인의 낙인이란 기실 약자들이 집단으로 낙인찍은, 강자에의 저주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이 낙인은 강자를 강자라고 확인시킨 명예의 표장일 수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싱클레어는 처음으로 다른 세계로 건너온 듯한 뿌듯함이 느껴졌다는데, 왜 우리 한국의 남자애들도 마치 통과의례처럼 또래나 형뻘과 어울려 나쁜 짓을 마치고 비로소 어른이 된 듯 뿌듯해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그 중에는 명백한 범죄도 있으므로 보호자는 정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p65에 나오듯 크로머는 싱클레어의 소년기 특정 구간에 하나의 악몽처럼 다가왔으며 이 사건을 슬기롭게, 혹은 데미안의 도움을 받아, 잘 넘기지 못했더라면 아마 일생을 두고 그의 성장을 방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싱클레어는 그딴 시시한 불량배가 더 이상 아무 영향도 자신에게 미칠 수 없음을 잘 압니다. 글쎄,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 처음을 보면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라는 유명한 문장이 있죠. p70을 보면 싱클레어는 교실에 들어가면 마치 빈민구호소의 악취처럼 숨을 턱 막히게 했는데, 유독 데미안의 목덜미에서만 비누 향기가 났다고 말합니다. 이건 뭐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건데(대부분 못사는 집 애들+데미안의 특별한 출신 성분), 희한하게도 한 인간의 품격, 힘, 권위 등을 후각적 심상으로 요약한 멋진 예가 아닐까 생각되더군요.
소년이 멋진 여성에게 반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p100에서 싱클레어는 자신만의 베아트리체를 발견하는데 물론 단테의 그 고전에 나오는 이상화한 여성상을 가리켜서 대유적(代喩的)으로 베아트리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실 지상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여성이 정말로 베아트리체일 수는 없고, 심지어 단테가 예찬한 베아트리체 오리지널 역시 눈에 콩깍지가 잔뜩 씐 상태였기에 그 떠드는 말을 다 믿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대목에서 싱클레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고보니 단테의 그 고전에서도 주인공이 단테였고, 이 소설 역시 처음에는 에밀 싱클레어의 명의로 출간되었으니 묘한 공통점이 있네요.
피스토리우스는 p160에서 "내 소원은 성직자가 되는 것이었소."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헤세의 소설에서 이처럼 주조연 캐릭터들은 부분적으로나마 살짝씩 헤세 자신들입니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한스도 그러했고, 이 작품에서 싱클레어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장 거리가 먼 존재라면 바로 데미안입니다. 데미안은 그래서 영원한 헤세의 안티테제이며, 그가 한평생 극복하고자 했던, 생명력 넘치고 체제에 반항하는 매혹적인 악마지만, 동시에 헤세 자신이 결코 다가설 수 없던 금단의 영역을 태연히 지배하는 젊은 군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