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오리지널 초판본 고급 양장본) 코너스톤 착한 고전 양장본 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미영 옮김, 김욱동 해설 / 코너스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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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도 오리지널 초판본의 표지이며 양장본입니다. 제목은 프락투르 체로 인쇄되었는데, 특이하게도 저자가 에밀 싱클레어라고 나옵니다. 물론 우리는 싱클레어가 이 소설의 등장인물일 뿐, 작가는 헤르만 헤세임을 다 알고 있습니다. 발표 당시 싱클레어라는 젊은이가 자신의 수기를 썼다고 믿은 독자들은 과연 어떤 느낌으로 이 책을 읽어나갔을지 살짝 궁금해지기도 했네요.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헤르만 헤세가 이 소설을 지었을 때는 30대 초반의 나이였습니다. 부제도 따로 붙었는데 Die Geschichte einer Jugend입니다. 풀면, 어떤 소년기의 이야기입니다. 불어도 그렇지만, 독일어 Geschichte는 영어의 story도 되고, history도 됩니다. 출판사는 S. Fischer Verlag라고 나오는데 이 출판사는 지금도 있습니다. S는 설립자 자무엘 피셔의 퍼스트네임이며 Verlag이 출판사라는 뜻입니다.

데미안은 다소 무책임하게 싱클레어에게 악인의 특권이랄까 쾌감 같은 걸 들려 줍니다(p42). 카인은 부당하게 오명을 뒤집어썼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럼 친동생 아벨을 죽인 것도 누명인가? 그건 아니며 형제를 죽였는지까지는 확실치 않으나 강자가 약자를 죽인 사실 정도는 맞지 않겠냐고 예리하게, 일종의 신화비평을 시도합니다. 아무튼 카인의 낙인이란 기실 약자들이 집단으로 낙인찍은, 강자에의 저주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이 낙인은 강자를 강자라고 확인시킨 명예의 표장일 수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싱클레어는 처음으로 다른 세계로 건너온 듯한 뿌듯함이 느껴졌다는데, 왜 우리 한국의 남자애들도 마치 통과의례처럼 또래나 형뻘과 어울려 나쁜 짓을 마치고 비로소 어른이 된 듯 뿌듯해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그 중에는 명백한 범죄도 있으므로 보호자는 정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p65에 나오듯 크로머는 싱클레어의 소년기 특정 구간에 하나의 악몽처럼 다가왔으며 이 사건을 슬기롭게, 혹은 데미안의 도움을 받아, 잘 넘기지 못했더라면 아마 일생을 두고 그의 성장을 방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싱클레어는 그딴 시시한 불량배가 더 이상 아무 영향도 자신에게 미칠 수 없음을 잘 압니다. 글쎄,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 처음을 보면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라는 유명한 문장이 있죠. p70을 보면 싱클레어는 교실에 들어가면 마치 빈민구호소의 악취처럼 숨을 턱 막히게 했는데, 유독 데미안의 목덜미에서만 비누 향기가 났다고 말합니다. 이건 뭐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건데(대부분 못사는 집 애들+데미안의 특별한 출신 성분), 희한하게도 한 인간의 품격, 힘, 권위 등을 후각적 심상으로 요약한 멋진 예가 아닐까 생각되더군요.

소년이 멋진 여성에게 반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p100에서 싱클레어는 자신만의 베아트리체를 발견하는데 물론 단테의 그 고전에 나오는 이상화한 여성상을 가리켜서 대유적(代喩的)으로 베아트리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실 지상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여성이 정말로 베아트리체일 수는 없고, 심지어 단테가 예찬한 베아트리체 오리지널 역시 눈에 콩깍지가 잔뜩 씐 상태였기에 그 떠드는 말을 다 믿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대목에서 싱클레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고보니 단테의 그 고전에서도 주인공이 단테였고, 이 소설 역시 처음에는 에밀 싱클레어의 명의로 출간되었으니 묘한 공통점이 있네요.

피스토리우스는 p160에서 "내 소원은 성직자가 되는 것이었소."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헤세의 소설에서 이처럼 주조연 캐릭터들은 부분적으로나마 살짝씩 헤세 자신들입니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한스도 그러했고, 이 작품에서 싱클레어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장 거리가 먼 존재라면 바로 데미안입니다. 데미안은 그래서 영원한 헤세의 안티테제이며, 그가 한평생 극복하고자 했던, 생명력 넘치고 체제에 반항하는 매혹적인 악마지만, 동시에 헤세 자신이 결코 다가설 수 없던 금단의 영역을 태연히 지배하는 젊은 군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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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초판본 리커버 고급 벨벳 양장본)
헤르만 헤세 지음, 강영옥 옮김, 김욱동 해설 / 코너스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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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의 오리지널 표지 디자인이며 양장본입니다. SIDDHARTHA라는 제목 밑에 프락투르 체로 Hermann Hesse라고 쓰였습니다. 그 아래의 문양은 아마도 연꽃을 형상화한 것 같습니다. 바탕색이 브라운색이라서 더 고급스럽게 보입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26에서 싯다르타는 친구 고빈다와 대화를 나눕니다. "삼매가 무엇인가? 육체에서 벗어나는 게 무엇이지?" 참으로 근원적인 질문이라, 이 질문에 대한 해명이 된다면 그 사람은 이미 득도(得道)에 가까워진 경지이겠지요. 재미있게도 싯다르타는 청주나 야자유 몇 잔을 마셨을 때 이 비슷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람이 발효된 음료 몇 모금을 마시고 간을 손상해 가며 잠시 느끼는 황홀경이 과연 득도의 경지와 몇 걸음 사이의 가까운 거리일까요? 아직 미숙한 싯다르타는 이 순간 너무 과감한 것 같습니다(이건 그냥 제 느낌이고, 헤세는 벌써 이 나이에 싯다르타가 깨달음 근처까지 갔었음을 암시합니다). 

p94에서 싯다르타는 전에 가우타마(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의 설법을 듣고 스쳐갔던 바를 다시 떠올리며 삼매의 경지에 대해 숙고합니다. 역사적으로도 싯다르타는 고행, 단식 등을 모두 거쳐 보고 그 덧없음을 새삼 강조했다고도 하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도 여기서 그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역사상의 싯다르타는 크샤트리아 계급이었지만 이 소설에서는 브라만의 아들로 설정됩니다.

싯다르타는 과연 성인(聖人), 대각(大覺)의 자질을 지녔기에 소년 시절에도 절정의 깨달음 직전까지 갔고, 지금은 카말라 곁에서 부유층의 온갖 호사를 누리며 아랫사람을 부리는 법도 새로 배웁니다. 어떤 경우에나 그는 주변 사람들에 비해 자신이 무한히 우월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그게 끝이 아님을 감지하고 더 높은 경지를 목말라합니다. p88을 보면 싯다르타는 이 불쌍한 대중을 사랑하면서도 경멸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부처님이 대자대비(大慈大悲)했다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러나 아직 깨닫기 전 단계임도 감안해야 합니다. 왠지 저는 이 단계의 싯다르타는 부처님이라기보다 헤세 자신 같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소설에는 가우타마라는 대각 성인이 따로 나오고 이가 곧 붓다(p117)입니다. 싯다르타는 그를 흠모하고 따라배우는 열정적인 젊은이라서, 역사적인 그 싯다르타와 바로 동일시할 건 아니고 그냥 소설 속의 캐릭터로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부처님인 고타마 싯다르타를 구태여 이렇게 둘로 분리시킨 헤세의 태도가 특이한데, 불교에서 어차피 석가모니 앞에도 부처 여럿이 존재했다고 가르치므로 이게 그 나름 타당성이 있습니다. p117에서 그는 가우타마 같은 절대 성인에게서도 배우고, 한편으로 카말라에게 극한의 성적 환락과 카마스바미에게 상인의 치부술도 배운, 정말 특이한 삶을 살았다고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톨스토이의 <사람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를 보면 구두수선공 마르틴에게 낮에 나타났던 가난한 이들이 꿈에 신과 천사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그것도 나였어."라고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는 톨스토이가 기독교 신약 마태복음 25:40을 자신의 버전으로 문학화한 것입니다. p132를 보면 그저 평범한 뱃사공과 나그네 모두가 달관 해탈의 경지를 보이며 모두 닮아 보이는 장면이 있는데 이 역시 비슷한 주제 아닐까 싶습니다.

카말라는 싯다르타와의 사이에 낳은 아이, 그 이름도 역시 싯다르타인 소년을 데리고 과거를 뉘우치며 가우타마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의 완성에 가까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상인으로서의 소소한 즐거움을 못 누리는 스스로에 대해 미련이 남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에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내려와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가정을 이루는데 그 장면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싯다르타가 끊임없이 정진하고 다른 존재로 성장하는 과정, 마침내 그 모든 걸 초극하는 결말은 감동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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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 디자인) 코너스톤 착한 고전 시리즈 11
루이스 캐럴 지음, 존 테니얼 그림, 공민희 옮김, 양윤정 해설 / 코너스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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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캐럴이라는 필명을 쓰고 본명은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었던 19세기 옥스포드 수학과 교수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동화로 더 유명합니다. 사실 이 작품은 놀라운 상상력이 담긴 동화로 읽어도 매력적이지만, 영어를 좀 알고 원서로 읽으면 그 기묘한 언어 유희 때문에 더욱 재미있습니다. 이 오리지널 초판본은 본문 중에 영단어 원어의 이해가 필요한 대목에서는 일일이 주석을 달았기 때문에 독자가 부담 없이, 혹은 억지로 납득하고 넘어가는 척 할 필요 없이, 지적인 쾌감을 느껴 가며 읽을 수 있습니다. 또 초판본의 존 테니얼 삽화들이 그대로 실려 있어서 원작의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납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영어를 못 알아듣는 걸 보니 정복왕 윌리엄이랑 같이 온 프랑스 생쥐가 분명해(p32)." 19세기에 쓰인 이 작품 기준, 노르망디 공 기욤의 브리튼 섬 상륙은 1066년이니 무려 800년 전입니다. 앨리스다운 천진난만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페이지 하단 각주(역주)에도 나옵니다. 재미있는 건, 도지슨 본인도 "앨리스는 역사 지식이 부족하여..."라며 독자의 양해를 구한다는 사실입니다. p58을 보면 빌 더 리저드(도마뱀)가 굴뚝으로 내려가려는 그림이 나오는데 굉장히 사실적인지라 좀 징그럽기도 합니다. 저는 1997년 영화 <아나콘다>에서 마지막에 괴물이 긴 굴뚝으로 치솟았다가 폭파되는 장면이 혹시 여기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생각도 해 봤습니다.   

p86을 보면 그 유명한 "웃고있는 체셔 고양이(smiling cheshire cat)"가 나옵니다. 바로 다음 페이지에는 앨리스가 지구 자전축(axis of rotation) 이야기를 하는데 공작 부인이 잘못 알아듣고 도끼들(axes)로 말을 받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있는데 이 역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하면 바로 떠오르는 유명한 피처죠. p46을 보면 앨리스도 약간 말귀가 어두운 건 마찬가지라서 생쥐가 신경질적으로 Not!이라고 대꾸한 걸, 혼자서 매듭(knot)으로 착각하여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합니다.

공작부인은 플라밍고의 성질에 대해 혼자서 잘 안다고 착각하지만(p132) 사실은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물 수도 있죠(He might bite)."라고 (조심스럽게) 답하는 앨리스한테 "겨자나 플라밍고나 둘 다bite하다"는 유명한 대꾸를 합니다. bite는 완전자동사(1형식)인데, 맛이 얼얼하다(영어에서는 이게 동사입니다)라는 뜻, 문다는 뜻이 따로 있음을 이용한 언어유희(pun)입니다. 또 p138에는 tortoise(땅거북)와 taught us의 발음이 비슷한 걸 이용한 말장난도 나오는데 각주(역주)에도 그렇게 설명이 되어서 좋았습니다. p139의 가짜거북이(Mock Turtle)의 그림이 매우 사실적이라서 또 흥미롭습니다. 사실 "가짜 거북이"가 대체 뭔가 할 수 있는데, 가짜 거북이 수프라는 게 있었고 거기서 루이스 캐럴이 역성(逆成)해 낸 게 이 캐릭터입니다.

"반짝반짝 작은별"은 의외로 그리 오래되지 않은 노래이며 가사도 작사가가 분명합니다. 그걸 패러디해서 p105에는 "반짝반짝 작은 박쥐"가 나오는데 글쎄 영어 원어로 읽어도(노래불러도) 그리 라임이 잘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p166에 twinkle이란 단어를 이용한 언어 유희가 또 나옵니다. 수업이 왜 lesson이냐? p142에 나오듯이 처음에는 10시간, 다음에는 9시간 하는 식으로 점차 줄어들어서(lessen) 레슨이라는 건데 웃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물고기 대구는 원래 cod라 부르는데 <...앨리스>에는 그 종은 안 나오고 그 비슷한 물고기인 whiting이 나와서(p151) 언어유희의 소재가 됩니다. 

"광기와 무질서를 잔뜩 체험하고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마저 흔들리다가 귀환한 세상이 그럭저럭 살만하다는 걸 비로소 깨달은 앨리스"라는 양윤정 교수의 설명(p206)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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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오리지널 초판본 고급 양장본) 코너스톤 착한 고전 양장본 2
헤르만 헤세 지음, 박지희 옮김, 김욱동 해설 / 코너스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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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리지널 초판본 디자인으로 보니 뭔가 고풍스럽기도 하고 신비하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또 독일어 원제목도 상단에 보이는데 Unterm Rad, 생각보다 간단한 어구네요(생각해 보면 당연하지만).저는 이 책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 나이 또래에 고교에 입학하여 처음 배운 독일어 단어가 Fahrrad(자전거)였는데, 저 단어 뒷부분 어근인 Rad가 바로 "바퀴"라는 뜻입니다. 바퀴라고만 하면 무슨 뜻인지 잘 모를 수 있으니까 우리말로는 "수레바퀴"라고, 한스의 불쌍한 인생이 떠오르게 더 구체적으로 풀어 주는 게 보통이죠. unterm Rad는 단축형이며 unter dem Rad로 더 풀어쓸 수 있습니다. 단, 저 기벤라트라는 성씨의 "라트"라는 부분은 -rath입니다(발음은 똑같음).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플라이크, 물론 성실하고 장점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컨대 p58에서 보듯, 어린 한스에게 "그 목사를 가까이하면 신앙심을 잃을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무엇이 참된 신앙이라는 말입니까? 한스는 더군다나 그리스어를 배우기 위해 목사를 만난다고 했을 뿐입니다. 한스 스스로도 말했듯 최소한 저 목사는 그리스어를 매우 요령 있게 가르치는 유능한 인물입니다. 별반 성공적이지도 못한 자신의 인생에서 뭘 배울 게 있다고 어린 학생에게 저런 무책임한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당대의 기독교가 형식화하고 위선적 모습을 보였다면, 그건 그것대로 비판하면 됩니다. 본인도 신앙이 없으면서 애한테 너의 신앙을 잃을 수 있다니 그야말로 위선이고 거짓말이 아닙니까? 뻔뻔스러운 자기 투사, 자기 모순이라는 말을 들려 주고 싶네요.

(스포일러가 되겠으나) 비인간적이며 기성체제에 기계 부품처럼 봉사하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어린 학생에게 강요하는, 저 목사와 교장을 저는 차라리 두둔하고 싶습니다. 확실히, 나이 들고 나서 책을 읽으니 (작가의 의도와는 또 별개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지는 듯도 합니다. 만약 플라이크 씨가 어린 한스를 괜히 불안하게 하지 않고, 긴 인생에 리스크가 될 수 있는 경솔한 선택으로 이끌 수 있는 저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어린 소년의 죽음이라는 끔찍한 결과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교장과 목사도 한스의 감정, 개별성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었지만, 플라이크라고 달랐겠습니까? 힘만 없었을 뿐 그 역시 자신의 생각을 애한테 일방적으로 주입하려 들었던 건 마찬가지입니다. 한스는 그저 신학교에 진학하여 그 길을 걷는 게, 결국은 무난한 진로 선택 아니었겠습니까?

p123을 보면 고전라틴어 격언 differendum est inter et inter라는 말이 교장의 입을 통해 나옵니다. "직역하면 inter와 inter도 구분해야 한다" 정도인데, 아무리 봐도 같은 단어 inter인데 뭘 어떻게 구분합니까? 그러나 같은 단어도 문맥에 따라 용법이 다를 수 있으니 저 말은 역설 같아도 타당합니다. 교장이 한스더러 "분명 같은 너인데 다르게 보인다"라는 의도로 저 말을 쓴 건 적절한 원용이며 적어도 라틴어 감각이 상당하다는 건 알겠네요. 물론 우리도 입시에서 영어 속담 별의별 말을 다 외우듯(혹은 가르치듯), 들은 풍월로 그냥 기계적으로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p152를 보면 εὐθύς ἐπιγνόντες αὐτὸν περιέδραμον라는 고전 그리스어 문장이 나오는데 책에는 출처가 따로 안 나오지만 이게 기독교 신약 마가복음 6장 54~55절이죠. 한스가 헷갈려한 저 동사 1인칭 단수형은 περιτρέχω인데 아오리스트(일회적 과거) 시제에서 모습이 저렇게 바뀝니다. 접두어 περι-는 잠시 잊고, 어간인 저 τρέχω라는 동사는 고전 그리스어에서 아주 자주 나오는 편입니다. 뭐 공부를 많이 하다 보면 좀 헷갈릴 수도 있는데 한스가 너무 자책하지 말고 좀 자신을 추스리며 다시 일어났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마가복음의 저 대목에도 물 위를 걷는 예수를 "유령"이라며 사람들이 놀라워하는 대목이 (조금 앞에) 있죠. 이 책에서는 p153:20에 저 단어("유령")가 좀 다른 맥락으로 나옵니다.

코너스톤의 깔끔한 번역, 양장본 제본으로 이렇게 다시 읽으니 느낌이 새롭습니다. 범우사루비아문고판으로 고딩 때 읽고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한스 기벤라트가 저보다 더 똑똑하게 보였는데(비록 진학에 실패하고 죽었지만), 지금 보니 어학 재능이 저보다 부족하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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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이의 봄 책고래아이들 54
민승희 지음, 한담희 그림 / 책고래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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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이라는 가상의 어린이가 들려 주는 열여섯 꼭지의 이야기들입니다. 이름은 오월이인데 이야기의 배경은 봄에 한정되지 않고 여름, 가을, 겨울에 다 걸쳐 있습니다. 계절마다 네 꼭지씩 해서 모두 열 여섯 편입니다. 반려견을 데리고 사는 오월이는 아빠가 초등학교 선생님이라고 하네요..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렇게 일단 서평의 처음을 잡고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 내려 갔는데... 어 이거 뭔가 좀 이상하다 싶어서 (개 그림이 너무 많다거나, 애한테 어른들이 너무 심하게 혼을 낸다거나) 다시 꼼꼼히 읽어 보니, 주인공 오월이는 사람이 아니라 개였습니다! 뭐 개도 어린이가 없으라는 법은 없지만 이 동화의 화자는 제 느낌에는 나이도 제법 들어 보였습니다. 아무리 늙은 개라고 해도 사람들은 애 취급을 하기 마련인데, 그렇다고는 해도 몇몇 장면에서는 너무들 뭐라고 하는 것 같아서 좀 불쌍해 보였습니다(오월이가 먼저 잘못한 경우도 있긴 했습니다).

유난히 오월이를 잘 챙겨주는 어린이가 나리초교에는 한 명 있는데 이름이 민이입니다. 이름만 봐서는 모르겠는데 p19의 일러스트를 보니(한담희씨 작품인데, 작년 11월에 신비스러운 느낌의 <별 아저씨>를 제가 리뷰했고 이 책이 이분 솜씨였네요. 그림체가 역시 특유의 그 스타일입니다) 여자애인 것 같습니다. 지금 종이 쳐서 교실에 들어가야 하는데 운동장에서 민이, 오월이 사이에 레이스가 벌어져서 아이들이 창 밖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난리입니다. 쌤이 너무 각박하게 공부만 진행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가끔은 여유를 갖는 게 뭔가 인간다운 분위기네요.

음... 읽다 보니 오월이 얘도 문제가 좀 있네요! p26을 보면 "새 운동화"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봄 파트애서는 이게 마지막 사연입니다. 민이가 새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왔는데 그 냄새가 너무 좋아서 신발장에서 물고 나와 벚나무 밑에 놓아 두었습니다. 그런데 오월이 집 앞에서 아이들이 오월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나길래 가 봤더니, 신발 어쨌냐면서 막 뭐라고들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오월이가 민이 신발 물어가는 걸 보지는 못했는데, 선생님이 오월이 발자국이 남아 있다며 범인(!)을 지목했던 거죠(셜록 홈즈가 따로 없네요).

그런데 아이들이 몰려와서 막 따지자 오월이는 "무슨? 난 그런 거 몰라."라고만 하며 정신을 못 차립니다. 동물에게는 소유권 개념도 없고 뭘 잘했다 잘못했다의 범주가 아예 없습니다. 다만 아이들이, 민이가 운다고 하니(신발이 없어졌으니 당연히 그러겠죠) 그게 덜컥 걱정은 됩니다. 이것도 "나는 신발 냄새가 좋아서 물고 왔을 뿐인데 왜 민이가 울지?"처럼 오월이한테는 그저 불가사의할 뿐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뉴욕의 나비가 날갯짓을 했는데 왜 베이징에 폭우가 내리는가? 인간의 하찮은 과학 공식으로는 이를 도저히 알아낼 수 없습니다. 신(혹은 그 비슷한 존재)이 보기에는 그저 우리가 오월이 보듯 볼 밖에요.

여름 파트 마지막 이야기에는 할머니, 그 며느리인 어머니가 다 등장합니다. 할머니 안경이 없어져서 할머니는 오월이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혼 내기 직전이었는데 이불 안에서 이게 나오는 겁니다. 개가 이불 안에 들어간 적은 없으니 할머니 본인이 잘못한 거죠. 뭐 나이가 들면 다 정신이 없어지기 마련이니 개가 이해를 해야지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미안하다며 엄마 몰래 소시지를 갖다 주는 걸 보면 이건 할머니 희생은 아닌가 봅니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 며느리 계산으로 미안풀이를 하니 그 노친네 성격 한번 고약하다 싶었습니다. 더군다나 며느리는 이미 사정을 다 짐작하고 "어머니가 잠결에 어디 두신 것 같으니 잘 생각해 보세요."라고까지 미리 말했으니 평소에 애 좀 먹는 편이겠음이 짐작됩니다. 그래도 p40을 보면 차 안에서 토하는 점박이(얘네들은 오월이의 형, 누나들입니다)를 챙기는데 마음이 따뜻한 면도 있습니다.

p68에는 새로운 캐락터로 진석이가 등장합니다. 민이가 오월이를 좋아하니 관심을 뺏긴다 싶어 진석이는 오월이를 미워합니다. 이 책에는 전반부에 배불뚝이 아저씨부터 해서 뚱땡이들이 종종 나오는데 공통점은 오월이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p84를 보면 드디어 엄마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는데 건이가 새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순환과 오묘한 생로병사의 이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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