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 개정판
김우중 지음 / 북스코프(아카넷)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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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누구의 입에서 나왔건 간에 이 말은 참 타당한 언명입니다만, 한때는 말 그대로 세계 경영을 외치며 감히 한국인이 발 디딜 엄두를 못 내었던 시장을 개척하기도 했던 분이 주창했기에, 이 문구를 제목으로 단 책이 그토록 큰 호응을 얻었던 거죠. 그 책이 나온지 근 30년이 지났습니다만, 지금 출판사도 바뀌고 깨끗한 양장으로 새 옷을 입은 이 책을 다시 보아도, 여전히 텍스트에서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샐러리맨의 신화를 일군 분의 증언이고 회고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대우의 가족들은 비행기를 타고 외국 드나들기를 일상처럼 한다."(p76) 꼭 이 책 중이 아니라도 역시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사실 지금도 구(舊) 대우 소속 계열사(그룹 해체 후 여러 군데로 인수되었습니다만) 출신 직원들은 "대우맨"이었음을 자랑스럽게 회고합니다. 대기업 네임 밸류를 우습게 여기는 이들은 그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거기 속해 본 적 없기에 (오히려 경력 부족을 자백하는) 유치한 허세를 떠는 겁니다. 남 비난하기는 쉽고 남 탐욕을 단죄하기도 쉬우나, 정작 남들 하는 대로 뭔가 적극적인 성취를 일궈 보라면 아무도 자신 있게 손 들고 못 나섭니다.

김우중 회장은 정말 해외 출장 많이 다니기로 유명한 분이죠. 당시 아직 국적항공사가 대한항공밖에 없던 시절 한진그룹에 몰아준 돈만 해도 얼마이겠습니까ㅎㅎ. 너무나 피곤해서 어떤 때는 비행기 복도에서 누운 채 잠을 자기도 했다는군요. 당연 규정 위반이라 스튜어디스가 주의를 주기도 했는데, 그래도 갑질 소동이 일어났다든가 하는 후일담을 들어본 적 없습니다. 아주 예전 일이므로, 행여 열정과 번아웃을 가장해서 따라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전 일이므로, 심지어는 직원 회의를 하다 통금 시간을 넘겨 근처 여관에 집단 투숙하여 일정을 이은 적도 있다고 하네요. 이 당시 대기업 회장들은, 당시 나라가 다들 못살 시절이어서 그런지는 모르나 대개 매너가 소탈했습니다. 자영업자(요식업자, 숙박업자)들도 신분 차를 의식 않고 무람없이 대했습니다. 후계자들의 갑질이 횡행하는 요즘 같으면 사람의 급이 다르기라도 한지 감히 쳐다보게도 못하게 하겠지만 말입니다.

"일을 하면 활력이 솟는다." 참 불가사의한 소리인데 일도 그저 남 보란 시늉하듯이 하거나, (안타깝지만) 의무감, 성실성, 강박 관념 때문에 하는 이들은 건강이 쉬이 나빠집니다. 반면 이처럼 자기 일을 하면서 두뇌에 엔돌핀이 도는 분들은 건강이 참 좋더군요.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성취감으로 영양, 에너지원을 공급 받는 겁니다. 김 회장이 공개하는 또하나의 비결은,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습관입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편식 않는 분이 건강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건강이 좋아야 편식을 안 하게도 되는 듯합니다. 김 회장이 빼놓지 않는 이야기는, "밥을 잘 먹는 사람이 친구도 잘 사귄다"입니다.

김 회장이 그 전성기에 쾌속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던 건, 이처럼 놀라운 친화력 덕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리비아 카다피 국가 원수라고 하면 동아그룹 최 회장만을 떠올리는데, 김 회장도 그 친분이 매우 두터웠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직 베트남 등지에서 재기를 모색하는 것도(많이 힘들다는 전언입니다만), 역시 다른 사람이 좀처럼 흉내낼 수 없는 특유의 매력이 있기 때문이죠. 대북 사업 하면 고 정주영 현대 창업자만 연상하지만, 한때 삼성 이건희 총수는 "대북 사업에서 우리는 대우만 못하다"고 털어놓은 적도 있습니다. 이런 재능이 있었기에 그가 "세계 경영"을 한때 운위할 수 있었죠.

"기독교에서 청지기 의식이라는 게 있다. 사람이 죽어서 재물을 싸들고 저승에 갈 것도 아니고, 예수도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게 어렵다고 했다." 확실히, 대우 김 회장은 예컨대 지금도 간행되는 아카넷의 "대우 학술 총서" 사업이라든가, 각종 문화 재단 출범 같은 걸 다른 기업에 앞서 벌인 경영자입니다. 이미지 메이킹일 수도 있겠으나, 여튼 그런 제스처도 다른 대기업보다 더 앞선 시점에 시작했다는 자체가 어디겠습니까.

"도덕적으로 용납 못 할 일이 아니고서야 젊은이는 무엇이라도 해 봐야 한다." 그런 도전 정신이 있었기에, 젊은 나이에 김 회장은 남들이 고등고시나 안락한 전문직 자격 취득에 골몰할 때 배포 좋게 사업에 뛰어들 생각을 먹었던 거죠. 그는 교육 명문가 출신이었고 그의 형제들은 모두 학벌과 평판 좋고 존경 받는 직업을 지닌 이들입니다. 그의 친형 되는 분은 김대중 정부에서 장관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유독 그만 험한 사업판에 뛰어들어 고생을 자초한 겁니다.

"무슨 일이든 재주 있는 사람에게 그 일을 맡겨야 한다. 나는 돈 버는 재주가 있으나 쓰는 데에는 맹추이다." 이 말은, 문화 후원 사업을 할 때 자신은 적임자에게 전권 위임을 했을 뿐 일일이 간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말은 쉬운 듯 보이나 사실 CEO들은 괜한 아집 때문에 자신이 직접 만기친람형으로 나서거나, 쓸데없는 선입견으로 사람을 제자리에 쓰질 않습니다. 조직이 망하고 사업이 꼬이는 이유는 모두 이 때문입니다.

신상필벌이란 말이 있죠, 엄하게 할 때는 엄하게 하되, 잘하는 일에 대해선 상을 후하게 주라는 뜻입니다. 김 회장은 책 곳곳에서 이 말을 강조합니다. 자신은 대우맨들에게 반드시 업적을 평가하고, 후한 포상을 통해 모범적인 전례를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대우맨들이 지금도 회장의 재평가가 필요하다며 열심히 뛰는지도 모르고, 타 그룹에 비해 배신자가 적게 나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독자들도 우선 자신의 진정한 장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내어, 혼신의 힘을 다해 일로매진 하는 그 자세가 중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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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죄 : 프로파일링 심리죄 시리즈
레이미 지음, 박소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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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우리, 혹은 일본은 같은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이라고 해도 그 용례가 상당히 다릅니다. 네덜란드와 독일은 서로 바로 붙어 있는 나라들이고 언어의 뿌리가 그 이상 같을 수 없을 정도지만 여튼 아주 수월한 의사 소통은 잘 안 됩니다. 이는 각각의 나라가 서로 다른 특질의 기반 위에서 언어를 발전시켜 온 까닭인데, 사고(思考)가 그만큼 오랜 시간 동안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쳐 와서이죠. 이 책 제목 "프로파일링"만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 일본은 그냥 profiling이라 해서 영어를 그대로 갖다쓰는데, 중국어로는 罪犯側寫라고 합니다. 이 책에는 画像이라 했습니다만, 이 단어는 꼭 프로파일링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더 넓은 뜻을 본래 담습니다. 하긴 영어 profiling 역시 그저 범죄자 신원 추측 기법만 가리키는 게 원래는 아닙니다만(그런 뜻에서 중국어 원제 画像은 참 적절한 센스네요).

"너 역시 괴물이잖아?" 소설 서두에, 끔찍한 사진 자료를 보며 토하는 누구(학생입니다)는 주인공 팡무를 가리켜 비난합니다만, 지나친 태도죠. 소설 읽고 나서뿐 아니라 읽기 전에도 심지어는 말입니다.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어간다"고도 했습니다만, 세상은 본디 악의와 살의가 가득한 곳이죠. 적응 못 하면 죽는 게 자연의 이치인데, 투쟁 중에 강해진 사람을 두고 괴물이라고 싸잡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은 젊은 주인공 팡무가 세파와 그리 오래 싸우진 않았겠으나, 짧은 시간이라도 그 영민한 두뇌가 범죄자들을 향해 정신의 비수를 겨누고 있었다면, 그는 평범한 남들 몇 배의 인생을 이미 산 겁니다.

중원에 주유 같은 인뮬이 나고 또 제갈량이 났다거나, 셜록 홈즈의 당대에 모리아티 교수 같은 사람이 활약한 것처럼, 범상치 않은 인물은 반드시 자기 시대에 호적수를 또 맞이하기 마련입니다. 팡무(한자로는 方木이라 쓰더군요)는 특유의 예리한 두뇌, 혹은 일찍부터 "준비된" 프로파일링 마인드를 가동시켜 이 도시를 어지럽히는 연쇄 살인마의 모습을 그려 냅니다. 평소처럼("평소"라는 말에 어폐가 있습니다만...) 타이웨이가 찾아와서 자료와 증거(빈약한)를 설명하자, 그는 역시 평소처럼 특징적인 몇 가지 피처를 짚고 읊어 줍니다.

"그게 무슨 큰 도움이 되나? 어차피 범죄자란 대개 남성이며 40대를 넘긴 나이이고, 키 역시 그 정도 구간이 가장 흔히 발견되는 데다...." 이런 한계는 팡무 자신도 잘 압니다. 그러나 가장 흔한 중간값 구간에 범인이 반드시 속하라는 법은 없고, 예를 들어 7, 80%의 막막한 범위에서 다만 1, 20%만 표본이 떨구어져 나가도 수사는 진일보한 겁니다. 대개 범죄 수사란 게 얼마나 막막한 출발점에서 발걸음을 떼어야 하는지는 전문가 아니라도 잘 알거나, 이해하죠.

쿨하게 코트에서 우아한 포즈로 농구를 즐기는 팡무. 셜록 홈즈 같은 캐릭터는 복싱을 즐겼다고 소설 속에 나옵니다만, 대개 영리하게 두뇌의 작용을 조절하거나 가동시킬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는 운동 신경도 덩달아 민첩합니다(그 반대가 항상 성립하는 건 아니지만). 사실 이런 외모, 취향, 스타일의 탐정 캐릭터를 우리는 자주 봐 왔기에 조금은 식상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여튼 "중국인"은 또 독자로서 흔히 접해 온 출신, 소속이 아니지 않습니까. 녹스의 십계에는 탐정으로는커녕 주변 세팅으로도 등장시키지 말라는 훈시가 있습니다만, 흠.

"놈은 이 도시를 성폭행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우월감, 지배 본능을 충족시키려는 거죠." 과격하고 충격적 표현이지만 역시 뛰어난 두뇌에서 나올 법한, "무엇, 혹은 누구에 대한 규정"이 맞습니다. "이 정도 중형 도시에서 살인 사건은 흔한 일이다." 아니죠. 인구 2백만인 도시면 한국에도 몇 안 되는 인구 밀집지인데, 독재 아닌 자유 체제가 다스리는 행정 구역에서도 "살인이 흔한 일"은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너무 흔쾌히(?) 설정을 정한 듯합니다. J가 어딘지는 잘 모르겠으나, 소수 민족들이 다양히 들어 와 사는 곳이 그리 흔치는 않으니, 서로를 잘 이해하는 한족 절대 다수 구성에서 그런 사정이라면 보통 무서운 일이 아니네요. 하긴 그래서 팡무가 각별히 각오를 다지며, 또 두뇌를 풀 가동시켜 나서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놀랍게도 놈은 팡무가 재학 중인 학교에까지 들어와 종래와는 다른 패턴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다닙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빼어난 점은, 아직은 뭔가 어설픈 구석이 많고 나이도 젊은 탐정이, 자신과 맞먹는 듯한 재능(...)을 지닌 호적수를 만나 画像, 즉 프로파일링 능력으로 대결을 펼친다는 점입니다. 라이엔바흐 폭포에서 홈즈와 모리아티가 대적한 것처럼, 이들 역시 외나무다리에서 만나 "The World is not enough."를 외치며, 둘 중 누구 하나는 죽어야 종결이 될 싸움을 시작합니다. 범죄의 잔혹성, 엽기성도 흥미를 끌지만(끌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런 두 천재적 개성의 충돌과 시비, "엮임"의 치열함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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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MB재산답사기 - 안원구의 쇼미더머니 시즌1 도곡동 땅, 다스 그리고 BBK
안원구.구영식 지음 / 비아북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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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통령들의 비위, 직무 유기, 수뢰 등의 행태가 구속 수감으로까지 이어지는 등 한국 사회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국민 소득 3만불을 눈 앞에 두었으나 아직도 이런 후진적 행태가 만연하다는 사실 앞에, 많은 시민들은 크게 상심하거나 분노를 느끼는 중입니다.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은 그전부터 문제가 되었던 BBK 스캔들과, 저 법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주)다스 관련 투명하지 못한 회계, 자금 처리로 인해 천문학적인 액수를 추징받거나 장기간의 복역이 예상되기까지 하는 형편입니다. 투표장에 가서 그를 찍은 적 없는 국민도, 어쩌다 대체 일이 이 지경까지 왔는지 그저 안타깝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우선 BBK 스캔들에 대해 예전, 대략 4년 전쯤에 저는 네이버 블로그에다가 https://blog.naver.com/gloria045/100204819396 이런 서평을 남긴 적이 있었습니다. 서평의 결론은, "에리카 김의 주장은 무척 설득력 높고 매끄럽기는 하나, 확증은 없는 가설에 아직은 머무르고 있다."였었는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당사자 중 한 명의 증언이 이렇게나 구체적이라면 검찰이 재수사에 들어갈 만한 조건은 충분하지 않은가, 행여 정권이 바뀌거나, 심지어 정권이 안 바뀌어도 언젠가 한 번 큰 사건이 터지긴 터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당시에도 들었더랬습니다. 결과론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어느 정도 세상을 겪어 본 사람이면 다분한 정황 증거만 갖고도 진실에 대한 가늠이 어느 정도 오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안원구 구영식 두 분입니다. 구영식 기자도 <표창원, 보수의 품격> 같은 저서로 일반에 널리 알려졌고, 예전에 <사회 평론 길>이라든가, 월간 <말> 등에 몸 담았던 비판적 언론인의 모범과도 같은 분입니다. 월간 <말>은 지금 제가 과월호를 몇 권 소장하고 있습니다만, 그 서슬 퍼렇던 군사 정권 시절에 어쩜 이런 잡지가 간행될 수 있었는지 지금 봐도 놀랍기만 합니다.

아무래도 단연 눈길이 가는 저자는 안원구 전 대구지방국세청장입니다. 그는 그 어렵다는 행정고시 재경직 합격차 출신이고, 관료로서 요직을 두루 거친 정통파 경제 관료입니다. 이런 그가 2009년 뜻하지 않게 옥고를 치르게 된 건, 바로 MB의 석연찮은 재산 관리 사항을 지적하고 논란의 대상에 올렸다는 "괘씸죄" 때문이었습니다. 이 책은 구 기자가 질문하고, 안 전 청장이 그에 상세히 대답하는 형식으로 쓰여졌는데요. 비교적 중립적인 눈으로 봐도 안 전 청장의 진술, 팩트 지적, 추론, 전망 등이 워낙 구체적이고 논리 정연해서 반박 지점을 찾거나 의문을 새로 제기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독자로서 여튼 예단을 갖지는 않고(힘듭니다만), 혹시 그 주장에 허점이 없을까 꼼꼼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언론에 비교적 소상히 보도되었습니다만 외견상 비밀이 철저히 유지될 듯 보였던 (주)다스의 소유 지분 관계 균열은 2010년 이 전 대통령의 손아랫처남이자 재산관리인인 김재정 씨의 사망에서 비롯했습니다. 김윤옥 여사의 동생인 그가 사망함에 따라, 그의 부인인 권영미씨에게 전 지분이 상속되었는데, 유언 상속이 아닌 법정 상속이라면 본디는 그 자녀들에게도 상당 부분이 물려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자발적 상속 포기인지, 혹은 어떤 경위를 알 수 없는 채 권씨에게만 모든 지분이 돌아갔고, 이 부분이 상식에 맞지 않다는 데에서 의혹의 작은 씨가 틔워졌습니다.

안 전 청장은 대개 소유관계를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근저당권 설정이나 지상권(물권 보호를 받는, 더 장기의 임대권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이 등기되는 게 보통이라며, 김재정 씨의 부동산에 대해서도 원인관계가 불명확한 이런 물권이 설정된 게 이상한 점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뿐 아니라 "한국자산관리공사 직원이 방문할 시 이에 대응하기 위한 문건은 청와대가 아니고서는 결코 확인할 수 없다."고까지 안 전 청장은 의견을 개진합니다.

어떤 경우에 물납이 가능한가? 안 전 청장은 국내 최고 세무 전문가답게 그 요건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런 요건이 정해져 있다는 건 "원칙적으로는 세금의 물납이 꽤나 어렵다는 점"을 뜻하기도 합니다. 웬만해서는 물납을 받아 주지 않고, 비상장 등의 이유로 현금화가 쉽지 않은 주식은 국세청이 더군다나 까다롭게 취급합니다. 왜 여러 부동산으로 물납하지 않고, 구태여 주식(잘 받아주지도 않는)을 썼는가? 이 역시 부동산들의 실소유자가 사실은 다른 사람이었기에 물납이나 기타 매도 처분을 할 수 없었고, 상속자가 배우자 한 사람으로만 정해진 것도 관리의 편의를 위해서라는 설명입니다. 이 역시 재판 과정에서 진부 여부가 철저히 다퉈지겠으며,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이 이에 대해 어떻게 반박할지도 관심거리입니다. 안 전 청장은 "국세청이 꽤나 편의를 봐 준 듯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솔직히 독자 입장에서도 국세청이 얼마나 깐깐한지를 안다면 여기 동의하지 않기가 어렵네요.

본 사건과는 다소 거리를 두었으나, 안 전 청장이 이 책 중에서 여담처럼 들려 주는(물론, 꼭 여담만도 아닙니다) 사실에 의하면, 대기업들이 참 악랄한 행태를 통해 중소기업의 기술을 가로채거나 업체 자체를 탈취한다고 하네요. 뭔고 하니, 일단 하청을 주어 대량 주문을 맡긴답니다. 이러면 중소기업에서는 신이 나서 설비를 대거 늘려 앞으로도 이 정도 일감이 들어오겠구나 싶어서 대출도 받곤 한답니다. 그런데 대기업은 슬슬 그 업체의 기술력 실태를 파악한 다음, 다른 산하 업체를 하나 차려 그쪽으로 일감을 돌립니다. 영문도 모르고 꿈에 부풀었던 중소기업은 점차 주문이 줄고 설비는 유휴가 되고 자금은 경색되어, 끝내 헐값에 회사를 내놓고 대기업은 이를 사들인다는 거죠. 세상 돌아가는 게 다 이런 식이라면 어디 공정한 룰이 보장되는 자유경제체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현대자동차가 굴지의 대기업이 된 후, 이명박 전 회장 등 창업 초창기 멤버들에게는 "퇴사 후 부품 업체 하나 정도를 만들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전합니다. 그 자체는 문제될 것 없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금싸라기 부지 등을 관계자에게 우선 매도하고, 사회적으로 비난 받을 가능성이 크거나 세금 탈루 등을 위해 타인 명의로 위장하여 재산을 취득하는 행태가 만연했다는 게 문제입니다. "당시에는 다들 그렇게 했으므로" 혐의를 받는 많은 분들이 어떻게 혐의 사실을 구체적으로 반박하기보다, "억울하다, 보복이다" 등 추상적인 변명에 그치는 게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고작 그 정도로 형사소추를 모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는 꿈이 크다. 이제부터는 위험한 일을 하지 말라."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출마 몇 년 전 측근들에게 이런 지시를 내렸다고 안 전 청장은 전언합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이 전 대통령은 좀 더 이른 시기에 손을 떼셨거나, (기대하기 힘들 수 있지만) 아예 의혹이 낄 수 있는 불투명한 일에 착수를 않으셨어야 옳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꿈이 큰 분은, 주변에 한 점의 의혹도 없어야 그게 국민에 대한 도리입니다. 안 전 청장은 사견임을 전제하며, "mb는 아마 현대가와 맞먹는 재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고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청렴 결백해야 할 공직에의 야망과 그런 꿈 중, 둘 중 하나는 버렸어야 현명한(도덕까지는 차마 바라지 않더라도) 처신이 아니었을지요.

시대가 바뀌었으면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사업가, 학자, 공직자, 언론인, 나아가 평범한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윤리의식과 행동 준칙이 합당하게, 부응하여 바뀌어야만 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이는 공정한 재판을 받고 추상 같은 징벌 부과를 감수해야만 합니다. 이런 일이 설마 벌어지겠나 싶어서 일단 저질러 놓고 봤다는 식의 태도는 말이 안 됩니다. 며칠 전 모 증권회사 직원들의 "점유이탈물 횡령 사건"도, 어쩌면 우리 사회가 아직도 이런 미개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 참으로 개탄스러운 소회가 들게 한 어처구니없는 반면교사였습니다. 일주일 전 청와대 논평대로, "잊어버리면 이런 일이 또다시 반복된다"는 점 우리들 시민들부터가 모두 명심해야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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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
모에가라 지음, 김해용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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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단카이 세대"라고 불리는, 대략 1947년에서 1949년 사이에 태어난 그룹이 따로 있습니다. 특정 연도에 태어난 이들이야 어느 나라건 당연히 존재하기 마련이겠으나, 일본의 저 연령대를 일컬어 특히 "단괴(團塊)"라고 부르는 건 그 나라만의 사정이 따로 있어서입니다. 이분들의 자녀 세대는 "단카이 주니어(1971~74)"라고 부르며, 그 세대 바로 아래 그룹(1975~82)에 대해서는 "잃어버린 세대(失われた世代)"로 구획하는 게 보통이죠.

이 책 작가인 모에가라 씨의 연령에 대해서는 1973년생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소설을 다 읽고 보니 단카이 주니어에 넣기보다는 그 밑인 "잃어버린 세대"가 더 자연스러운 소속 분류 같습니다. 다분히 자전적인 주인공의 성격이나 행동, 사유 등은 너무도 나약하고 수동적인가 하면, 한편으로는 한 여인에 대한 순정을 고이 간직하며 평생의 지향점처럼 귀히 여깁니다. 처음에 트위터에 연재되던 소설이라고 해서 작가가 젊은 분인 줄 알았는데, 사회의 중견으로 곳곳에서 무거운 책임을 수행할 만한, 예전 같으면 원로 그룹에 속할 만한 나이이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 나이 지긋한 분이, 비록 남한테 해 안 끼치고 자기 앞가림만은 해 온 인생이겠으나, 너무도 맥 없이 보낸 청춘과 장년기의 체험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내용이어서, 적잖이 당황했던 게 사실입니다(이른바 젊은 프리터 족 이야기라면 여태 많이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소설가, 작가는 잘 세공된 언어를, 어찌보면 상품처럼 대중에게 판매하는 게 직업이고 본분입니다. 어떤 때는 그 상업적 본의가 너무 빤하게 드러나 거부감이 생기기도 하고(이런 책을 잘 걸러내는 게 우리 독자의 안목, 취향, 의무이기도 합니다), 작가지망생이랄까 어설픈 아마츄어들이 그런 나쁜 행태를 모방하여 짝퉁 외투처럼 걸치는 모습도 우리는 보곤 합니다.

헌데, 비록 광고업에 종사하는 분이라고는 하나 어찌보면 정통 광고맨도 아니고(광고맨은 어쨌든 언어를 다루는 직종이죠), 직업 작가는 더욱이나 아닌 분이 이처럼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끌어내는 작품을 썼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책을 읽기 전엔 이런 예단을 가졌었고, 막상 책을 다 읽어 보니 그저 자기 삶을 치열하게 산 분이구나, 남의 생각이나 글투를 흉내 안 내고 매 순간 자기 감정과 체험과 선택에 성실했던 분이구나, 그래서 절절한 자기 생각이 이처럼 선명하게 표현, 배출될 수 있었겠구나 하는 쪽으로, 독자인 제 느낌이 정리되더군요. 남한테 뭔가 보여 주기 위해 말을 지어내는 사람과, 그저 정직하게 자기 느낌과 사색으로 소통을 원하는 사람은 서로 이렇게 다릅니다. 또 독서 대중이 그런 차이를 정확히 알아보고 이런 심판, 포상을 내리는 거겠습니다.

부모님의 실수로 부잣집 애들만 다니는 학교에 잘못 배정되어 3년 내내 유령처럼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다는 주인공. 참 딱합니다. 출신 성분을 고칠 수도 없고 전혀 이질적인 집단에서 설움을 겪었던 그 신세가 딱하다는 게 아니라, 어쩜 그렇게 특정 상황을 완전히 고정된 운명처럼 받아들이고선, 변화를 줘 가며 적응해 볼 노력을 전혀 않을 수가 있을까 하는, 그 꽉 막힌 성격과 체질과 판단 기제가 딱하다는 뜻입니다. 아직 성장기 청소년이라고 해도, 그처럼이나 유약하고 체념적인 성향이라면 커서 어떤 어른이 될지도 눈에 훤히 보이지 않습니까. 유령, 왕따로 지내는 고통에 비하면, 뭐라도 해 보려고 노력하는 수고가 차라리 가볍게 느껴질 법도 한데 말입니다.

책을 잘 읽어 보면 주인공이 그리 가난한 집안 출신도 아닙니다. "당신들의 일은 워낙 성실히 한 덕에, 돈 걱정은 평생 안 하고 살았다."는 말이 있는 걸로 보아 말입니다. 하긴, 아들이 이런 성격이면 그 부모 되는 분들도, 마치 정해진 궤도만을 반복 운행하는 쳇바퀴 도는 다람쥐 같은 이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항상 자기 분수를 지키며 살기에, 급한 지출 용도가 안 생겨서라는 정도라면 그리 넉넉한 집안은 또 아니었겠지요. 여튼 주인공이 부모님께 아쉬움을 표하는 대목이라면, "너무 성실하셔서 나한테 신경 써 주실 여유가 부족했다" 정도입니다. 어째 한국의 중산층 출신 1970년대생들이, "아빠는 그저 돈 벌어오는 기계" 정도로 여기고 성장기를 보냈다는 평판의 데자뷔 같습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입시 지옥을 훨씬 앞서 벗어난 사회입니다만, 주인공이 고교를 졸업할 무렵은 여전히 전국 단위 시험 점수로 학생의 진로를 정하는 시스템이었나 봅니다. 공부하고는 담을 쌓고 유령처럼 고등학생 시절을 보낸 주인공이라서, 성적에 맞게 갈 만한 대학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시험 전형을 시행하는 곳에 원서를 넣었고, 졸업 후에는 작은 홍보 회사에 몸을 담아 성실히 근무했습니다. 조금 표현이 엇갈리는 대목이 있긴 했는데요. 대체로 정리해 보면 일감이 꾸준히 들어오는 편이긴 하나 업력이 짧아서 단가를 높게는 못 받는, 그런 작은 회사로 보입니다. 여튼 주인공은 부모님 닮아서 열심히 일합니다. 업무도 사랑도 일단 자기 일이다 싶으면, 그리 공격적이거나 특별한 재주를 발휘하지는 못해도, 열심히는 하는 분 같았습니다. 청년기건 장년기에건 말입니다.

허나, 주인공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 보십시오.

"잠시도 일탈을 꿈꾸지 않는 바른 생활이 어른들이 견지해야 할 바람직한 삶의 태도라면, 차라리 나는 철없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p41)

바로 이 구절입니다. 그를 부모님과 차별되게 만들어준 기질과 신조라면, 비록 무기력하게 성장기를 보낸 자신이긴 하나, 저런 알듯모를듯한 반항아의 단초가 영혼 한 구석에서 자라고는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반항은, 비록 세상을 향해 정면으로 승부를 건다거나 강자를 향해 도전하는 패기는 지니지 못했어도, "삶의 단조로움과 강요된 정형성"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하려는 몸짓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는 어설프고 정형화한 상업적 비판 멘트와는 다르고, 여튼 매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는 충실히 임하는 태도이기에 현실 회피와 무능 은폐를 위해 지어내는 핑계성 저항과도 엄연히 구별됩니다. 그런 자들은 한 여인만을 사랑할 줄도 모르고, 어설픈 에고의 만족을 위해 주제도 모르고 이 여자 저 여자를 기웃거리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찾아낸 삶의 이유, 베아트리체, 혹은 둘시네아가 바로 "가오리"입니다.

가오리는 주인공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리 모델 같이 잘 빠진 몸매도 아니고, 남들 눈에 확 띄는 용모도 아니었던 듯합니다. 젊은 시절 기준으로도 말입니다. 여튼 그런 가오리에게 주인공은 흠뻑 빠졌습니다. 뭔가 평범함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영혼이 주는 매력도 그러하고, 영혼의 빛깔이 서로 통하긴 하되 자신이 차마 현실을 향해 드러내지는 못하는 과감한 반항도 그녀는 더 거침없이 해 내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겠습니다. 주인공처럼 주변머리 없는 분이 어찌 총각딱지는 떼었겠으며 (한국이나 일본이나 참으로 흔한) 러브호텔은 생전 가 보았겠나 싶었는데, 이 가오리라는 분이 숙맥 같은 그에게는 참으로 구세주 같은 존재였습니다, 거참.

이 가오리상, 이분이야말로, 주인공에게는, 보잘것없는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더 위해 주고 싶은 존재였습니다. 열정과 과격함, 재능의 천재성 면에서 서로 극과 극이긴 합니다만, 마치 엄지에게 오혜성이 보이던 만큼이나 그의 애정의 순도는 강했습니다. 그러나 가오리 역시 어느 선은 넘지 않는, 행동 반경이 빤히 정해진 "얌전한 반항아"였고, 주인공은 그보다 몇 배는 더한 초식형이었기에 무슨 큰 사고는 안 생겼고, 세상이 그들을 향해 주목의 시선을 던질 일은 더군다나 없었습니다. 이 소설, 평범함의 미학과 깊이를 추구하는 소설이 히트를 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만원 지하철 안에서 "실수로" 친구 신청하기 버튼을 눌러,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후 다시 가오리상과 연이 닿았다는 그이지만, 또 언제나처럼 전철 안에서 무기력하게 이리 떠밀리고 저리 치이다 누른 게 맞겠지만, 어떻습니까? 과연 그의 실수가 실수라고만 볼 독자가 있을까요? 이분은 이처럼, 아닌 듯하면서 은근 자기 의도대로, 세상의 정해진 흐름을, 아주 소극적이고 제한적 범위에서나마 바꿔 보려는 발칙한 생리가 작동하는 분입니다. 그런 기질이, 그 나이를 먹도록 여태 도쿄의 번화가 한복판에서, 평범한 샐러리맨으로든 뭐든 그를 살아남게 한 비결입니다. 주인공보다 더 유능하고 한때 더 잘나간 사람도, 어느 한 고비에서 몰락하거나 더 이상 못 버티고 도피한 이들도 많습니다. 그의 생명력을 유지시켜 준 건, 첫째 실체가 무엇이든 그가 그의 순정을 투영한 가오리였고, 다음으로는 결국 진실과 변화와 성실을 동시에 추구한 그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루저의 선정성 고백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영혼의 치열한 생존기이자 진지하고도 깊이 있는 "사랑 탐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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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총사 청소년 모던 클래식 3
조정훈 편역, 알렉상드르 뒤마 원작 / 구름서재(다빈치기프트)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고전 <삼총사>는 그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설렙니다. 본디 프랑스어 원어로는  <Les Trois Mousquetaires>이며, 영어 번역어도 대개 비슷합니다만, 왠지 소지한 무기 기종에서 연원한 저 이름에서는 "총사"가 풍기는 자긍심 넘치는 환기가 안 생길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며, 우선 한자어로도 寵士가 아닌 銃士(거의 직역에 가깝죠)이므로 선입견과는 달리 사실은 좀 살벌한 뜻입니다.

또, 무엇보다 이 책을 직접 읽으시면 알 수 있듯, 불어 mousquetaires(영어로는 musketeers)에도 어원과는 무관하게, 오랜 언중의 사용 속에서, 맥락 속에서 추가된 감성적 뉘앙스가 또 따로 있습니다. 아니라면, 왜 다르타냥(이 책의 표기를 따르며, 또 이 표기가 규정상 맞습니다)이 그처럼 "총사" 타이틀(과 신분)에 목을 매겠습니까? 신분적 특권과는 무관하게, 그 이름은 그저 음성의 울림만으로도 한 청년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청년이 혹시, 아주 욕망과 허영심에 찌든,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속물이라면, 파리라는 번화한 도회에서 한몫 잡아 보려는 찌들어빠진 동기에만 사로잡혔다면, 총사란 타이틀은 그저 신분 상승의 구차한 욕구를 상징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우리가 다르타냥을 좋아하는, 혹은 좋아해 왔던 이유는, 그런 건 전혀 따지질 않고 돈키호테처럼 자신이 믿는 대의와 자존을 위해 그냥 미친 듯 몸을 던진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작품보다 세르반테스의 그 고전이 훨씬 이전에 나왔지만, 세르반테스의 그 고전이 다분히 풍자적 의도에서 쓰여진 반면, 이 작품이야말로 후대인들에게 "진짜 기사도"가 무엇인지 일단은 알려 주겠다고 작심한 양, 가장 순일하고 호탕한 남자들의 계산 없는 우의와 순정을 잘 표현하는 예이기도 합니다. 물론 훨씬 이전 시대의 그야말로 판에 박힌 스타일의 기사도 예찬이야 아닙니다. 사조로서의 낭만주의를 정확히(의도이든 아니든 간에) 표방하며, 인간 감정의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면까지를 드러내며, 귀족과 그에 기생하는 간악한 무리들의 이중성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그런가하면 내내 거악(巨惡)의 본산일 줄만 알았던 OOOO와 나중에 총사들이 타협하는 결말을 제시함으로써, 뜻밖의 리얼리즘까지 독자들에게 일종의 반전으로 선사하는 플롯 기법상의 성숙함도 지녔습니다. 이런 점에서, 세르반테스의 안티테제였던 "그 흔해빠진 기사도물"과는 차원이 다르며, 세월이 이만큼이나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전으로서, 또 어쩌면 장르문학으로서, 대중들에게 사랑 받고 평론가들의 분석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아버지 뒤마)에 대해, 이른바 공장형 창작의 원조였다면서 호되게 비판하는 일각의 움직임이 있고, 또 그런 비판의 상당 부분은 사실로 보입니다. 허나 설령 작가 명의에 의혹이 있고, 작가의 착취적 상업적 행태가 비판 대상이 되어도, 작품만을 놓고서는 정당한 평가가 이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뒤마의 공장에서 혹사당하며 재능을 갈취당한 그 무명씨(그런 사람이 정말 있다면요)를 대신 예찬한다 해도 말입니다. 아무리 배경이 미심쩍어도, 작품이 재미있고 여전히 사람 설레게 만드는데야 어쩌겠습니까? 우리 독자가 원하는 건 이야기의 재미, 건전한 감동, 완독 후에도 적정 수준으로 우리 감정을 정화할 여운 등이겠는데, 이 <삼총사>는 그런 점에서 완벽한 읽을거리입니다. 이 <삼총사>는 너무나 재미있고 유익하기까지 하며, 그래서 새로운 감성의 현대적 번역이 끊임없이 이뤄져야 할 이유를 다시 확인시키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상당 대목에서 이른바 homosocial 분위기를 풍기기도 합니다. 게이 코드라는 뜻이 아니라(그렇긴커녕 극과 극이죠), 남성들끼리만 통하는 어떤 의기투합과 공감대로 문제를 해결하고 주제를 부각하는 작품 내 분위기를 뜻합니다. 이론상으로는 "여성들끼리"로 정반대 분위기를 잡을 수도 있고, 실제 문예나 영화에서 그런 예가 많이도 발견됩니다, 이제는요.

어쨌든 이 책 p172에서, 아토스가 다르타냥에게 여성에 대한 회의, 혐오적 견해를 드러내며, 자신의 친구에 얽힌 실화(?)를 들려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고귀하기 짝이 없는 혈통의 귀족(자기 아니고 자기 친구 얘기랍니다 ㅋㅋ)이었는데, 여자 하나 잘못 만나 신세를 망칠 뻔하고, 호된 방식으로 교훈을 배운 후, 다시는 색욕에 눈도 안 돌렸다는.... 다르타냥은 시골 출신의 순박한 청년이라(저기 2011년 영화에서 로건 레먼 버전의 다르타냥은 너무 뺀질뺀질하게 묘사되었죠), "큰형님" 아토스의 이 말을 기냥 곧이곧대로 100% 접수하고 치를 떨기까지 하죠. 이걸 보고 아토스가 하는 말 들어 보십시오. "요즘 젊은 놈들은 도대체 술 마실 줄을 몰라. 하지만 이놈(다르타냥)은 그중 괜찮은 녀석이지." 이런 실감 나고 캐릭터 개성이 그대로 구현되는 에피소드가 풍성하기에, 우리는 여전히 매혹되며 이 작품을 읽는 것입니다.

아버지 뒤마의 소설을 보면, "밀레디"니 "밀로드"니 하는 표현이 자주 나오죠.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아예 "밀레디"가 캐릭터의 이름처럼 쓰입니다. 영국은 근대에 와서만 강해진 게 아니라, 백년 전쟁에서도 알 수 있듯 본디 대륙에 하나의 근거, 지분을 가지고 깊은 영향력을 행사해 온 나라입니다(단, 다들 국민국가는 아직 아닐 시절이지만). 그러니 대륙의 하층 계급에게 저런 용어들을 상용 어휘로 만들어 낼 만큼 유력자의 왕래가 잦았다는 뜻이죠(마이 레이디, 마이 로드와 같습니다). 이 고전에서 밀레디 캐릭터는, 다르타냥이나 삼총사 못지 않게 독자에게 엄청난 인상을 각인한 불멸의 존재입니다. 2011년 영화에서는 밀라 요보비치가 맡았죠. 팜 파탈의 아득한 원조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원저를 보면 분량이 상당한데 이 책은 다소 슬림합니다. 이유는 원작의 수많은 에피소드 중, 진주인공 다르타냥의 행보, 동선에 맞추어 발췌역을 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영화를 즐기기 위한 선행학습 독서라면 구태여 완역본을 볼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원작이 구태여 진주인공 다르타냥을 젖혀 두고 "삼총사"로 이름을 단 것도, 시대배경이나 총체적 영웅담, 음모, 정치적 활극을 전달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다르타냥과 삼총사의 활약에만 초점을 둔다면, 이 발췌역본으로 대의를 파악해도 큰 지장은 없습니다. 어색한 한자어가 없고, 뜻이 선명하게 통하는 문장이라 가독성도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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