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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 (양장, 조선시대 삽화수록 에디션)
존 번연 지음, 김준근 그림, 유성덕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천로역정은 기독교, 그
중에서도 프로테스탄트 청교도들의 고전입니다.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막상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이 설파, 전개되었는지 물어 보면
대답 못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전은 유구한 시대의 시련을 이겨 내고 그 자리에 오른 텍스트라서, 따분하고 지루하겠다는 막연한,
근거 없는 선입견과는 달리 실제로는 꽤나 흥미진진한 경우가 많습니다. 의인화와 풍유를 적절히 섞어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이 책을
읽어 보면, 의외로 옛 이야기처럼 흥미진진한 발상과 소재가 많아서 오히려 우리들 현대의 독자들이 놀라게 됩니다.
꿈은
우리에게 많은 현시(顯示)를 전달할 때가 있습니다. 이 책 역시 기이한 형상과 생경한 이미지를 접한 이들이, 과연 이 낯선
조우를 어떻게 해석할지 몰라 갈팡질팡일 때, 현명하고도 사려 깊은 "해석"을 통해 지혜를 일깨우고,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소모적인
불안이나 경거망동에 정력을 빼앗기지 않도록 돕는 위대한 정신의 활약이 등장합니다. "꿈과 그의 해석"은 기독교 성경에도 여러 번
등장하는 모티브인데, 무엇보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 기가 막힌 꿈 해몽으로 입신 출세한 위인이기도 합니다.
천로역정은
17세기 후반, 영국이 아직도 정치적 불안과 격랑에 휩싸였을 때 창작, 출간된 고전이지만, 이 책에서 쓰인 여러 기법은 그보다
훨씬 후대에 이르러서도 다양한 영역에서 차용되어 쓰였습니다. 또 대화체로 논지와 서사가 전개되는 모습은 당대 유럽 여러 저술에서
드물지 않게 보던 스타일인데,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 유럽을 강타했던 파문의 저서 <대화>(갈릴레오 갈릴레이) 역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의심의
성", "절망의 거인", "자애", "믿음", "수다쟁이" 등 이름만 들어도 흥미롭고 강한 개성을 띤 인명, 지명은 독자들에게
친근감을 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비유를 통해 어리석은 민중에게 깊은 가르침을 전달했듯, 저자 번연(버니언) 역시 포맷부터를
이처럼 편안하게 잡아서 독자와의 보다 효율적인 소통을 시도합니다.
이
책만의 단연 뛰어난 특장(特長)은 구한말 지석인인 김준근 선생이 직접 그린 삽화의 소개입니다. 구한말 우리 민족이 맞이했던
시련은 그저 외세의 침탈뿐이 아니라, 민족 자체가 구심점 없이 종래(전근대)의 나태하고 무지몽매한 셍활 패턴을 아직도 못 벗어난
탓도 큽니다. 그래서 안창호 선생 같은 분도 무실, 역행 등의 덕목을 그토록 강조한 건데, 김 선생은 기독교 정신으로 민족 전체가
각성하여, 근면 성실을 통해(청교도 정신의 핵심입니다) 부유하고 품위 있는 겨레로 거듭나길 기원하며 이 고전에 주목했던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 민족과 <천로역정>이 이처럼 오래 전 시점에 흥미로운 교차점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자체가 설레고 기쁜 체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