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기억하라 - 징비록
정종숙 지음 / 북스타(Bookstar)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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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건 집단이건, 과거의 치명적인 실수를 자각하고 그로부터 소중한 교훈을 얻어, 다시는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내면화된 후라야, 그 개인(혹은 집단)에 비극적인 운명이 거듭 닥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허나, 우리 주변의 많은 이들은 이런 가르침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back in the habit, 인간 좀 되라고 베푸는 충고와 훈육에, 못난 에고는 "이대로가 뭐 어때서?"라고 발끈해하며 오히려 종전보다 더 어리석고 자멸적인 오류로 깊이 빠져듭니다. 사람이건 집단이건 배배 꼬인 못난 심사가 거의 예술의 경지에 달한 모습입니다. 못나게 살아온 과거,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현재를 모두 왜곡하고, 그도 부족해서 손상된 두뇌, 형해화한 기억(이미 썩어 문드러져 기억이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으로부터 말도안되는 거짓을 지어내어 사실인 양 고래고래 떠들기까지 합니다(현실이 아닌 망상 속에서만 사는 인간이죠). 개인의 경우라면 명예훼손과 무고죄를 걸어 감옥에 보내 교화를 이룬다고나 하겠습니다만, 집단의 경우는 대체 어떻게 해야 정신을 버쩍 들게 하여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 거듭나게 도울까요?

서애 유성룡은 미증유의 전란을 맞아 민족 전체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인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우선순위를 매겨 가며 난제를 해결했고, 저마다 제각각의 목소리를 내는 대소신료들간의 불협화음을 조울했으며, 점령군보다 까다롭게 구는 명 측의 장수들을 일일이 달래고 어르느라 자신이 모시는 나라님보다 더 노심초사하던 7년을 지새웠습니다. 국망의 순간을 넘겼으나, 현명한 그의 시선으론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해 또다시 구태(舊態)로 회구하는 주변을 보고, 가슴에 사무치는 기록을 남겨 당대와 후손 그 마음가짐을 단단히 추스리게 해야겠다는 결의를 가졌습니다. 그 징표가 바로, 국보 132호로 지정된 <징비록>이며, 지금 리뷰하는 이 책은 방송작가 정종숙님이 쓰신 그에 대한 친절한 해설서입니다. 정종숙 저자님은 한솔교육 등에서 출간된 여러 어린이용 도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분입니다.

유성룡의 <징비록>은 우리 조선에서뿐 아니라, 명과 일본에서도 널리 읽힌 "당대의 화제작"이었습니다. 정종숙 저자님은 책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 노량에서 이순신이 적의 흉탄에 맞아 유명을 달리할 무렵, 서애 역시 탄핵을 당해 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구체적으로는 이후 북인의 영수로서 정국을 전횡하다 인조반정(일단 "반정"이라고 하죠)때 대숙청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정인홍이 직무태만을 이유로 그의 태도와 능력을 걸고넘어졌기 때문입니다. 정인홍 역시 공과 과가 뚜렷한 인물이긴 하나, 이 대목에서의 국력 소모, 국론 분열은 참으로 부적절한 처신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억울한 죽음을 맞긴 했으나, 어찌 그 쌓인 죄과가 적었다고 하겠습니까?

여튼 이 때문에 서애는 영영 벼슬을 잃었고, 뉘우치기도 잘하는 선조가 그를 다시 조정에 불렀으나, 사양하고 내내 자택에 칩거하여 깨끗한 이름을 지켰습니다. 심기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간곡한 언사를 통해, 이미 병을 얻은 노구의 처신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진정어린 사의(辭意)를 임금께 전달한 과정이 따로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일종의 흥정이나 "몽니"를 부리는 소이라면, 이는 중대한 불충이자 뼈대 있는 사대부 출신 원상으로서 오히려 부끄럽고 격 떨어지는 처신에 해당합니다(밑바닥에게는 아예 이런 개념이 없죠). 그가 노년에 칩거한 고장은 오늘날 "하회마을"로 유명한 안동이며, 본관은 풍산이고 출생지는 인접 의성이지만 외가가 안동입니다. 그의 직계 후손인 탤런트 류시원 가족이 소유한 고택(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십여 년 전 방한했을 때 신을 벗고 마루에 올랐죠)이 안동에 자리한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처럼 한 발짝만 걸어도 자랑스러운 조상들의 흔적이 곳곳에 스민 경상도 해당 지역민의 높은 긍지는 번거롭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실패한 과거, 부끄럽고 부족한 자신,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오, 현재까지도 관리에 실패하여 파탄이 난 환경, 이런 것들을 왜곡하고 윤색하고 제 편할 대로 꾸며댄다면, 그런 영혼은 구제불능으로 타락하여 영원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원문 그대로는 아니고 독자인 제 기억에 의존했습니다) 이런 저주받은 나쁜 습성은 대개 타인에 대한 얼토당토 않은 중상모략, 뻔한 거짓 망상으로까지 이어지는 게 보통이라, 경솔하고 천박한 처신이 얼마나 중대한 결과(전과자가 된다거나)로 이어질 수 있는지 우리는 가까운(혹은, 이제 곧 가까워질)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시 내각을 이끈 최고위직 관리의 반성문이자 국난 극복의 역사 철학서". 바로 이 구절에서, 우리는 저자의 역사 인식이 얼마나 정확히 현실을 꿰뚫고 민족의 올바른 각성을 정당히 촉구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당대 관념으로 왕이 수도를 비우는 그 자체가 이미 망국의 신호탄이요, 몽진의 행렬이 국경을 넘는 그 순간 국권이 포기되었음을 선언함이나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때로부터 800년 전 당 현종이 안사의 난을 맞아 서방으로 피신했을 때도, 아들 중종에게 보위를 물려준 후에야(완전한 자의는 아니었지만) 비로소 발길을 떼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무능하고 우유부단하며 때로는 대책 없는 독선에 빠져 자신과 주위를 모두 위기에 몰아넣었던 부족한 군주였다고는 하나, 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거물 왕족의 사저에서 금지옥엽처럼 자란 분이 이처럼이나 모진 고초를 겪은 것도 안타깝기는 한 일입니다.

명이 이여송, 조승훈 등을 앞세워 참전했다고는 하나, 왜의 강력한 역공을 겪은 후에는 전의를 상실하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동병을 회피했습니다. 서애는 이런 이여송에게 간청도 하고, 국토 수복을 조선 조정이 이룸이 바로 명 제국의 안보에도 직접 기여하는 전략적 선택임을 정연한 논리와 빈틈없는 근거를 대며 설득에 나섭니다. 허나 탐욕과 비겁함으로 점철된 그의 인격은 이런 탁월한 통찰에 눈과 귀를 막았으며, 충무공은 이 와중에도 해전에서 왜를 연전 격퇴하는 전공을 올려, 침략군이 보급을 받고 원기를 회복하는 길을 원천 차단했습니다. 만약 이때 해상이 무방비로 뚫렸다면, 무능한 장수 이여송은 세 길로 진군하는 왜의 협공을 받아 평양성에서 궤멸했을 수도 있고, 재정이 부족하고 내정이 불안했던 명은 군사를 물려 한반도를 포기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 경우, 풍신수길이가 전 중원을 먹는 오타쿠 만화에서나 볼 법한 사연이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남에서 군사력으로 왜의 혼을 빼 놓았던 분이 충무공이었다면, 북방에서 내정과 외교를 통해 왜가 망상을 못 품게 동분서주한 분이 바로 서애입니다. 이 책은 이처럼, 남과 북의 두 영웅이 조국을 피땀흘려 구한 간절한 사연을 텍스트로 곱게 수놓고 있습니다. 왜와 명이 서로 눈치를 보며, 힘 안들이고 반도를 반분할 흉계까지 꾸미던 와중, 서애께서는 피눈물을 흘리며 명의 한심한 장군들을 설득하고, 이 강토가 비참하게 열강의 손에 분할되지 않게 만전의 노력을 기했습니다. 이때로부터 200여년 후, 호언촐러른, 합스부르크, 로마노프 세 제실(帝室)의 농간에 의해 폴란드가 과분된 역사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번 휴지기를 맞은 전쟁은 풍신수길의 진노(심유경이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 게 폭로된 탓입니다)로 인해 다시 재연되기에 이릅니다. 서애의 비통함은 이 시점에서 극에 달합니다. 그러나 한심한 소인배들이 국정에 참섭하여 나라를 망쳐간다 쳐도, 자신까지 의욕을 잃고 손을 놓아 나라를 파탄지경에 방치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서애의 위대한 인격은 이 지점부터 그 본연의 빛을 발합니다.

책의 문장이 참 빼어납니다. 본래 작가님이 문장력이 좋은 덕분이겠습니다만, 이 임진란과, 사건을 다룬 소재인 <징비록> 원문, 그리고 집필자 서애의 철학과 인품에 일일이 저자가 공명 공감하며 글을 쓴 이유가 더 크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나의 조선과 당신의 대한민국이 대체 다른 게 무엇인가?"
서애는 지면을 통해 우리 후손들에게 이처럼 준엄한 가르침을 내리고 있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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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그리고 이후 500년 - 16세기 유럽부터 21세기 한국까지
라은성 외 지음 / 을유문화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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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살려 주시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사람이 그 생명의 위기를 맞았을 때, 성인, 절대자, 조상님, 혹은 의지하고 싶은 그 누구에게라도, 간절히 이름을 외치며 "이 고비만 넘게 해 주시면" 뭐라도 하겠다며 존재를 건 소망을 부르짖는 건 과연 인간의 통성일까요? 안 그런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통감하며 에고를 송두리째 버리고 무엇의 발밑에 매달리는 건, 어떻게 보면 평정심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일단 평정심을 잃은 이라면, 자신이 처한 위기를 냉정하게, 현명하게 빠져나올 가능성은 더욱 낮아질 수 있습니다. (참고로, 해당 종교에서는 불완전한 피조물의 오만, 교만을 버린다는 뜻에서, 절대자의 권위를 오롯이 의지하고 겸허해지는 저런 심적 상태를 오히려 권장합니다만 저는 일단 종교를 떠나 평범한 상식인의 관점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 점 관련, 신앙을 가진 분들의 양해를 일단 구하겠습니다)

이런 무력감과는 반대로,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며 행여 무지와 소양부족이 들통날까 신경질적인, 거의 광기 직전의 작위적 분노 상태로 자신을 몰아가며 과잉방어를 일삼다 코믹하게도 자기 발등을 찍는 것도, 저런 철저한 무기력과는 설혹 그 방향이 서로 반대일지는 모르나 어리석음의 극치를 폭로하는 행태라는 점에서는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 혹은 조직 개성의 됨됨이란, 그래서 엄혹한 잣대를 들이대어 본 후에야 그 진가가 드러나기 마련이기도 합니다. 이 잣대는 또한 세월의 검증까지도 포함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자신이 근무하던 대학의 한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 건 것이 1517년입니다. 역사는 이 사건을 두고, "종교 개혁(Reformation)"의 시초점으로 삼습니다. 올해를 두고 종교 개혁 500년 기념의 해로 삼는 건, 바로 이 위대하고도 역사적인 "선언, 고발, 혁명의 단초"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로부터 무려 500년이 흘렀습니다. 개혁교회(개신교)는 당시 자신이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던 로마 가톨릭과 그간 얼마나 다른 길을 걸었을까요? 혹시 500년 전 자신이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대적(archenemy)과 서서히 닮아가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았을까요? 타락하고 부도덕한 "대상"이 굳건히 버티고 있더라도, 그를 비판, 타매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도덕성이 절로, 또 지속적으로 담보되는 건 아닙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성찰과 거듭남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초창기 여리고 약한 씨앗이 대지로부터 갓 솟아날 때 자신의 약함을 채 돌볼 여유가 없었다면, 이제 오백 년의 세월을 버텨낸 거목으로서 자신의 나이테가 동그라니 올바르게 형성되는지, 거울에 비추어 스스로를 반성할 때입니다. 이 책 p185에도 헤겔의 변증법이 잠시 언급되어 있습니다만, 자체 개혁을 멈추고 자기 만족에 빠지는 그 순간, 정신이든 육체든 건강한 생리 작용, 대사가 멈추고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제가 이 서평 맨처음에 인용한 저 외침은, 마르틴 루터가 그의 나이 열 아홉 살 때 어느 한적한 숲 속을 지나다 느닷 험악한 폭풍우에 직면하고는, 그 생명에의 위협을 느끼며 한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황제와 교황, 둘은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도 이 일개 시골 사제인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정풍 운동에 대해서는, 더 파장이 커지기 전에 조기 진압해야 한다면서 서둘러 손을 잡았습니다. 그 험난한 과정에서 지혜롭고 정의로울 뿐 아니라 용감무쌍하기까지 했던지라 어떤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맞선 이 개혁가였건만, 어린 시절 어느 외진 곳에서 맞은 일개 자연 현상의 격변 앞에서는 저만큼이나 약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정말로 성 안나의 가호라도 있어 그 순간(과연 위험한 상황이었는지의 여부조차 불확실합니다만 - 주관적으로 과장된 공포였겠지요)을 계기로 큰 각성을 이룬 후, 진실되고 튼튼한 확신으로 자신의 정신을 재무장, 이후 보다 "큰 인물"로 거듭나는 계기로 삼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진실로, 마르틴 루터 만큼이나 소신과 진리, 신앙에 대한 열망 하나로, 오직 신만을 바라보며 한길을 걸은 신념의 인간이, 인류 역사상 몇 명이나 있었을지, 그 지난 행적을 돌이켜보면 그저 아찔해질 뿐입니다. 그의 신조와 사상에 동의를 하건 않건 무관하게, 이런 굽힘 없는 지조와 절개의 순일성에 대해서는 그저 고개가 숙여지는 게 당연합니다. 동양에서는 신체가 찢기는 아픔, 구족(을 넘어 십족)이 멸해지는 극한 상황에서도 "의견을 철회하지 않았던" 호유용 같은 이가 이에 비길 수 있겠습니다(그런 이의 분투가 있었기에, 권력의 탄압 앞에서도 유학의 정맥이 끊이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죠. 여러 모로 루터에 견줄 만합니다).

"루터는 로마 감독들이 결코 베드로의 계승자들이 아닐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그 어떤 다스리는 권한도 부여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p39. 단, 몇 개 조사와 관형어는 리뷰어인 제가 임의대로 첨가했습니다[두 개밖에 안 되고 아주 사소한 변형입니다^^]. 책 원 인용문 중 "감독"이란 단어는 이 책에서 가톨릭 측의 "주교"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입니다. 특히 이 대목에서는 그냥 주교도 아니고 "교황"을 가리키는데, 로마 대주교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저런 용어례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이 대목은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로마 가톨릭측 대변자 격인 에크(라틴어명 에키우스)와, 마르틴 루터 사이에 열린 그 유명한 논쟁 직전의 상황을 요약한 구절입니다. 교황 자신이 신성 불가침의 권위를 내세우기도 하고, 어리석은 민중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절 저런 대담한 주장을, 다른 동기가 아닌 양심과 내적 확신에 의해 도도히 펼칠 수 있었다는 자체가 경이롭고도 경이롭습니다. 이 챕터의 서술은 일일이, "가톨릭"이 아닌 "로마가톨릭"으로 필자께서 용어 채택을 하시는데, 아무것도 아닌 듯 보여도 표기 하나에조차 심각한 신학상의 "입장 표명"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챕터 말고 다른 저자들께서 담당하신 대목에는, 그런 원칙이 완화되어 있습니다^^. 저자마다의 다른 성향이 단어 하나의 사용에서도 다 짐작되죠)

종교개혁사에서 루터가 가장 중요한 인물임에는 틀림 없습니다만, 이 책은 종교개혁의 시원뿐 아니라 이후 전개된 500년사를 개관하는 성격이므로, 분량은 매우 잘 균형 잡혀 각 토픽에 적절히 할애되었습니다. 칼뱅에 대해서는 그간 그의 강경하고 타협 없는 태도만 부각되었습니다만, 저자는 시야와 논의의 밸런스를 잘 조정하여, 이를테면 "병을 달고 살았던 허약한 체질", "제네바에서 줄곧 불체자로 살았던, 알고보면 취약하기 짝이 없었던 정치적 지위" 등을 거론합니다. 세르베투스를 활활 타오르는 형주에 묶어 이단자의 최후를 쏘아본다든가 하는 공포 독재자의 이미지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취지이겠습니다. <기독교 강요(綱要)>는 (이 책에서 친절히 설명하는 대로) 생의 후반부에 그가 심혈을 기울여, 개인(위대한 개인, 지도자로서)의 관점과 신앙의 바른 태도와 교의 등을 한 권, 단 한 권에 압축해 넣은 저서인데, 책 한 권에 자신의 원대한 입장을 모두 담은 이는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이라라는 게 필자의 평가입니다.

저는 특히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대목이 흥미로웠습니다. (서평 앞부분에서도 적었습니다만) 사람은 그가 입으로 무슨 주장과 긍지를 내세우건 간에, 죽음에 이르는 위기 앞에서도 초연히 그 스탠스를 견지할 수 있느냐를 놓고 참된 인격적 가치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북미를 주유하며 풍랑이 몰아치는 중 여러 차례 항해의 위험을 겪으면서도 태연한 모라바 교도들을 보고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무섭지 않으십니까?"
"주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기에 무섭지 않습니다."

남자들뿐 아니라 여성, 어린이들까지 이런 태도를 가진 걸 보고, 웨슬리는 "자신에게는 없고, 그들에게는 있는 무엇인가에 대해(p162)" 깊이 성찰하게 됩니다. "선행적 은혜, 믿음을 통한 개인적 구원" 등은 그때까지의 정통파 개혁교회의 입장과는 거리가 꽤 먼 것들이었습니다. 이 챕터 저~ 앞부분에 보면 저자께서 중세 교회의 위기를 거론하며 "스콜라 학파의 보편 아닌 개체 경도"를 언급하신 대목이 있는데, 이 "개인적"이란 말뜻을 그 맥락과도 연결시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에도 한번 말했습니다만 특히 종교학 서적의 어휘들은 추상적이면서도 일상,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는 usage가 많아, 정확한 독해는 맥락을 떠나서는 전혀 이뤄질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제가 이 대목에 특히 흥미를 가진 건, 어떤 회심의 계기가 꼭 이런 자연 앞(그들에게는 "신"을 연상하기 충분한)의 작은 존재감 앞에서 이뤄진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p165에 보면 조지 화이트필드 이야기가 나오는데, 전설적인 대 부흥사로서 2마일 밖에서도 그의 설교를 듣는 이들이 있었다는 대목이 있죠. 3.2km면 조깅이나 걷기 운동 코스로도 무난한 거리인데, 아무리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특별한 개인이라고는 하나 과연 그만한 범위까지 자신의 음성을 식별력 유지하며 전달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이 책에 전혀 언급이 없지만, 우리가 잘 아는 고전 <프랭클린 자서전>에 벤자민 프랭클린 자신(그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죠)이 실험을 통해, 특별한 지형적 조건 등 여러 제약 하에서 재현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적 있습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까지 손수 실험 장비를 갖추고 뭘 증명하려 든 성의와 열정에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죠.

1부의 비중이 나머지 2, 3부를 합친 분량보다 더 많습니다만 이는 이 책의 성격, 주제, 목표가 "종교개혁사 500년의 개관"인 만큼 당연하고 타당한 태도입니다. 개혁교회 각 계파의 입장은 실로 구절양장입니다. 로마 가톨릭이 그 안에 해방신학(이단시됩니다만), 참여 노선, 고루한 정통 교리 고수 등 다양한 생각이 혼재하는 현실을 봉합하고 여튼 단일 교단, 공식 도그마를 유지하는 것과는 달리, "구절양장"이란 고사성어가 무색하지 않게, 개신교단의 각 입장은 너무도 세분화하고 각자의 고유한 교의를 표방하므로, 과연 "개혁교회"란 한 타이틀 안에 묶일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교파마다의 세밀한 입장 차이를, 이 책 1부는 매우 요령껏 준별하여 서술했으며, 또 읽어나가다 보면 (비록 필자분의 선명한 주관이 간혹 두드러지긴 해도) 재미가 납니다. 레퍼런스로 활용해도 좋고, 이야기처럼 읽어가며 사항 정리를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2부와 3부는 한국 개신교회를 다룹니다. 2부는 한국 개신교회의 지난 이력과 발전사이며, 3부는 현 시점 교회의 위상과 성취, 문제점과 과제 등을 집중적으로 분석합니다. "근대적 선교 운동"의 의의에 비로소 눈 뜨며, 그 이전 시대가 주로 구교측 예수회 선교사들이 세계를 누린 것과 대조적으로, 19세기부터는 선교사 하면 대뜸 "개신교 선교사"를 연상케 될 만큼 해외 신앙의 불모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2부 처음에 윌리엄 캐리가 논의되는 건 이러한 배경 때문이며, 다만 로버트 토머스 등은 조선 선교와도 직접 연관이 있습니다. 책의 설명은 정확하게도 "중국 내지(inland) 선교의 일환으로 조선에도 그 영향이 미쳤다"고 하는데, 개신교 용어와 인명 음차 상당수가 아주 낯선 한자어들인 건 이런 사정에서 연원합니다.

2부는 이어서 일제 강점 하의 조선 민중, 아동, 여성을 계몽하고, 신사 참배 등을 거부하며 민족 해방과 신앙 노선을 용감하게 수렴시킨 교계 지도자들과 신도들의 노력에 대해서도 조명합니다. 이 역사는 한국 개신교가 어디다 내놓아도 자랑스러울, 말과 신념과 행동이 일치가 된 긍지와 보람으로 가득찬 궤적입니다. 남한은 아니고 저 북한 일대에 국한된 사실이긴 하나 1907년에 있었던 평양 대부흥도 세계 교회사(史) 전체를 놓고도 매우 특기(特記)할 만한 이정표라 할 수 있죠.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군인 출신 위정자들이 연이어 등장하며 권위주의 개발독재를 이끌 때 이에 민주주의 정신을 내세우며 항거한 역정에 개신교가 빠지면 또 될 말이 아닙니다. 개혁교회의 역사는 이처럼, 종교개혁의 발흥지로부터 지구 반 바퀴를 돌 만큼 멀리 떨어진 극동에서도 여전히 자랑스럽고 거룩합니다.

3부는 현황의 점검과 반성입니다. 매우 진솔되고도 정확한 진단이 정제된 문장 속에 독자의 문제의식을 자극하니 꼭 한번 읽어 본 후 숙고할 만합니다. 그러지않아도 종교인 과세 이슈가 현재 입법 단계에서 여러 논쟁을 부르는 현실입니다. 이 책에서는 이른바 "메가교회"와 "기가교회"를 거론하며, 신도 수와 세력과 재산이 1: 99(못 가진 교회와 가진 교회의 격차)의 분포를 이루는 충격적인 현상도 지적하며, 왜 "교회론"이 아닌 "교회 성장론"만이 화제가 되어야 하는지, 신실한 회개와 영성이 메인이 못 되고 숫자와 위세가 관심사의 복판에 놓이는 안타까운 현실을 지적합니다. 필자는 ("이웃 종교의 지도자")프란치스코 교황을 예로 들며, 소탈하고 격의 없는 자세로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그들과 달리, 왜 개신교(한국, 세계를 두루 염두에 둔 듯합니다)에는 이만한 인사가 최근 배출되지 않느냐는 불안감을 표시합니다.

독자로서 제 생각은, 그 답은 "마르틴 루터"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쪽입니다. 개혁은 땜질 처방이나 시늉이 아닌 본질을 향한 것이어야 하며, "restorative"스러운 게 아닌 초심으로의 회복(ad fontes)이라야 합니다. 개혁은 멈추면 그게 이미 개혁이 아닙니다. 중단 없는 회개와 개혁이야말로 신에 가까워지는 가장 바른 길임을 이미 루터는 오백 년 전에 우리에게 가르친 바 있습니다. 답은 바로 루터가 이미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안나! (절) 살려 주시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자신이 죽고사는 갈림길에 놓였음을, 정확하고 겸허하게 꿰뚫고 수용했다면, 이미 그 사람은 절반쯤은 답을 찾아 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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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MD : 브랜드 편 - 대한민국 최고의 슈퍼 MD가 알려주는 브랜드 큐레이션의 모든 것! 패션 MD 시리즈 2
김정아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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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에 편집숍("멀티샵, 셀렉샵"이라고도 국내에서 부릅니다) 브랜드 체인(일본의 "빔즈")에 근무하는 여러 직원들의 "집 이야기"를 묶은 책(제목은 <136명의 집>)을 읽고 서평을 남긴 적 있습니다. 현재 한국형 편집숍을 직접 운영하고 업계 원톱으로 일컬어지는 저자님의 책 1권(당시 1권이라고 제목이 붙진 않았으나 이렇게 2권이 나왔으니 이제 1권이 된 셈입니다)을 몇 년 전에 읽었는데, 길에서 별 생각없이 보고 지나쳤던 부띠끄의 경영과 활황 뒤에 그런 숨가쁜 노고와 고도의 센스가 녹아 들었다는 걸 알고 많은 생각이 들기도 했었지요. 당시 그 책을 읽으면서 "바잉(buying) 실력" 같은 낯선 용어를 접하고, 업계마다 천양지차인 논리와 법칙, 수완이 지배한다는 점 실감했습니다.

브랜드는 명품 마켓에서만 위력을 발휘하고 관련 종사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는 건 당연히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심지어 떡볶이가게, 보쌈집도 그 나름의 브랜드를 설득력있게 구축해야 매뉴팩처들의 실력,연구의 보람이 살아나는 법이지요. 브랜드는 현대 마케팅에서 고객, 대중과 접촉하는 유일한 채널이요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미디어이자, 제품의 기능과 효용을 한몸에 압축하는 화체 이상의 실체이며, 차라리 "모든 것(everything)"입니다. 그래서 현재 가장 잘나가는, 최상의 감으로 업계를 쥐락펴락하는 슈퍼MD가 자신의 비결, 노하우를 털어놓는 책은, 어느 대목에서건 자기 일에 활용할 수 있는 영감을 얻을 수 있게 마련입니다. 저는 적어도 그런 기대를 갖고 책을 펼쳤네요.

이 2권의 주제는 "브랜드"인데,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트렌드를 만드는 브랜드, 브랜드를 만드는 트렌드"가 보다 세부화한 캐치프레이징이겠습니다. 브랜드 안에 집약되어 있는 시장의 모든 법칙을, 이성뿐 아니라 세련된 감성으로 탐구하되, 무모한 일반화보다는 신중한 귀납으로 결론과 미래를 도출, 예측해 보자는 의도겠습니다. 말이 이렇다뿐 일상에서 그래도 친숙히 접하는 브랜드의 흥망성쇠를 통해 마케팅과 경영의 이치를 더듬자는 것이니 꽤 재미있고, 좀 심하게 말한다면 보기만 해도 설레는 패션 브랜드(따라서 상당수는 크레이에터인 디자이너의 이름 그대로인)를 컬러사진과 함께 페이지 쇼핑하는 과정이니, 그냥 지면으로 눈호강한다 여기고 일단은 책장만 넘겨도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저자(이자 MD)가 어떤 의미심장한 표현과 어구로 가이딩을 해 주건, 그로부터 뭘 얻는지는 독자의 능력이겠지만 말입니다.

p74에 보면 베라 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가 <보그>에서 그 어린 나이에 편집자로도 명성을 떨쳤다는 건 처음 알았고, 그녀의 컬렉션에 3만원짜리 드레스도 있긴 하다는 것도 몰랐던 사실입니다. 저자는 그 약점으로 "지나치게 갈래를 친 라인업이 전체 아이덴티티를 흐뜨린다"고 지적하는데, 동양인 특유의 야무지게 시장 전(全) 셰어를 갈무리하려는 습성의 표현이라고 저는 봅니다. 패션 관점에서는 못마땅하겠으나, 혹 패션 자체의 논리와 시장의 생리가 분기하는 대목이 있다면 좀 더 지켜봐야겠습니다.

저자분 개인의 회고와 여담도 재미있는데, 로즈로코 뉴욕(책에는 해당 백화점에서 철수했다고 나오지만 다른 곳에는 [사세가 많이 위축되었는지는 모르나] 여전히 영업 중입니다)이, 한국 전체가 외환 위기로 망국의 고통에 접근해 갈 때 쌩쌩히 잘나간(명품 바람이 분 건 이때부터입니다. 중산층이 날린 재산의 흐름이 고스란히 극소수에 유입될 무렵이죠) 과거를 잠시 언급하시네요. 베라 왕 이브닝드레스의 성급한 국내 론칭으로 이 샵이 치명타를 입었다는 분석이신데, 확실히 시장보다 반 발짝만 앞서가라는 조언이 여기서도 타당한 듯합니다. 여기서, "아름답고 세련된 용모의 대표"님은, E대를 나오신 그 U님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승자의 여유가 느껴지는 서술이라 흥미롭기도 했습니다.(헉)

편집숍은 그냥 명품 부띠끄인가 보다 하고 넘어갔습니다만, 그 "편집"에는 엄청난 내공과 센스가 녹아있어야 하며, 앞의 베라 왕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지면이든 웹이든, 매체이든 샵이든 간에 그 의미가 다르지도 않다는 점 새삼 배울 수 있었네요. 앞으론 그저 무심히 지나치지 말고, 저래서 저 랙에 저 브랜드가 놓여졌나 보다 하고 꼼꼼히 그 배후의 센스, 심리, 세계관을 관찰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긴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게 돈의 흐름과 수입, 승부에 관련된 문제인데 그저 최종의 과시 소비 욕구를 푸는 장소로 안이하게 생각한 자체가 큰 어리석음이죠.

너무 고가의 명품에는 눈이 잘 못 가고, 아무래도 본문 텍스트 중 "가성비"란 단어에 유의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당연히 전 남자지만 이런 건 여친한테 뭘 사줄 때에도 필히 유념해야 할 사항 아니겠습니까?) 이브닝드레스의 또 하나 심연(돈 없는 소비자에게)은, 그 화려한 의상의 구조 때문에, 다른 기회와 장소에서 두 번을 착용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저자는 지적합니다(글켔죠). 그래서 가성비의 미덕이 다시 강조되는 거겠지만요. p79에 보면 타다시 쇼지(의 브랜드)가 소개되는데(책에는 "다카[하]시 쇼지"라고 오식이 나오는데 그분은 가수죠),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레이스(의 디자인)은 물론 패브릭조차 돌체앤가바나 라인의 500~600만원선 작품(아이템)에 못지 않다고 하십니다. 제 막눈으로는 모르겠는데, 탁월하신 대표님께서 그렇다고 하시니 아주 잘 명심해 뒀다가 요긴하게 써먹겠습니다.

저자는 책 곳곳에서 "스트리트웨어 정신"을 강조하는데, 저는 이야말로 창의력과 기묘한 저항 정신이 결합해 "아큐파이 더 스트리트"로 사업적 성공을 거두기까지 한 놀라운 혁신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락&펑크가 샤넬 라인 한 모서리를 점유하기까지 하는 현실(이건 아이덴티티의 희석이 아니라고 저자는 판단하시나 보죠?ㅎ)은, 비유를 하자면 현재 KB가 부동산 앱에까지 진출해, 좋게 말해 고객을 속속들이 만족시키는 스트로잉 브랜칭 아웃, 나쁘게 말해 문어ㅂ.... 여튼 뭐 고객 입장에서야 걸치기 예쁘고 가격 착하면 된 거죠 뭐. 30년 전 쓰레기 취급이나 받던, 소외된 독자층 상대로 코 묻은 돈이나 빨아들인다고 비난의 대상이 되던 B급 문화는 이제 어엿이 주류로 편입하여 당당한 독자적 장르를 개척하기에 이르기도 했는데, 이런 패션 트렌드와도 결코 무관치 않습니다. B급 코믹스 폭력 문화 일부가 북유럽 신화 일부를 싸구려로 차용하여, 도시 하류층에 단단한 팬덤을 구축하기도 했는데(따라서 그런 컨텐츠는 원전이 아니라 2차 가공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재 족보를 세탁하고 블록버스터로 둔갑한 영상물은 대단한 신분 상승을 이룬 거죠. 이런 게 무작정 끌린다며 얼토당토않게도 신화 원전과 연결하는 네티즌이 있다면, 그 취향의 근원이 가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하겠습니다.

과거에는 유니섹스라고 했습니다만 젠더리스 컨셉은 여전히 현대에도 두루 무난하면서도 젊고 도회적인 분위기를 창출할 수 있는 유효한 외양이라 생각합니다. 저자는 자신의 샵에 어울리지는 않아 바잉은 염두에 안 두지만(역시 저의 감각으론 속속 납득이 안 되는 평가이십니다), 다른 편집숍(더 젊은 층을 염두에 둔- 아 그런 뜻이였군요 이제 겨우 접수)에는 코너에 따라 훌륭한 서브 밸런스를 구현할 수 있으리라는(요 대목은 그냥 저의 표현입니다) 조언을 베푸시는군요.

저자는 스테판슈나이더(브랜드)를 소개하며 "전형적인 유러피안 감성의 파스텔 컬러 팔레트로 똑떨어지는 스타일을 보여준다"고 하십니다. 잘은 몰라도 왠지 그럴 것 같습니다. 저자는 앤 드뮐미스터(우리나라에선 이렇게들 쓰는데 정확히는 "드묄러메스터"입니다. ee는 "이"가 아니라 "에"의 장음이라서요)와 이분이 학교 동기라는 점까지 거론하시는데, 이 책에서는 드뮐미스터를 독립 항목으론 안 다룹니다.

"트래디셔널 미니멀룩이야말로 트렌드나 유행에 관계없이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이다." 저자가 이 책 곳곳에서 펴는 지론 중 하나입니다. 결론은 "(그렇기 때문에) 좋은 브랜드의 고급스러운 룩을 구매하라"는 겁니다. 이런 좋은 충고가, 돈도 없는 주제에 잔돈푼 월급 모아 지가 걸칠 명품만 자나깨나 생각하는 정신 빠진 인간 좋으라고 하는 말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빅토리아 베컴을 두고 "코스의 의상은 예쁘다. 그러나 진정한 럭셔리 라인의 미니멀리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2%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고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착한 가격이 거의 모든 사소한 불만족을 용서할 수 있다는 말씀도 좀 씁쓸하게 공감되는군요.

책에서는 역시 대세를 충실히 반영하여 스칸디나비안 룩을 따로 한 챕터 분량의 분석,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중 앤 소피 백(안 조피 바크)은 꽤 긴 역사를 자랑하는 브랜드입니다만 저자께서 지적하시는 대로 "지적이고 스타일에 신경 쓰면서도 혁명적인 이미지를 좋아하는" 여성들에 의해 (여전히) 선호, 지지되는 디자이너의 작품들입니다. 책의 바로 직전 편 "아방가르드"에 분류되었어도 잘 어울릴 성격이었죠. 필리파케이, 타이거 오브 스웨덴 등 유서 깊은 명품이 있는가 하면, 세실 코펜하겐 등 "어린(저자의 표현)", 그리고 패기넘치는 컬렉션도 있습니다. 바이킹의 시대가 저문 지 천 년이 지났어도 유럽 게르만의 아득한 원류, 순혈이라는 고유의 혼과 자부심이 있기에 이토록 긴 역사를 면면히 이어 오며, 1차 산업과 가공업 외에도 이런 고부가가치 산업의 한 핵심을 영위해 나가는 거죠.

저자는 영어 이름을 Anya로 쓰신다고 하는데, 이름이 같은 가방 브랜드 중 안야 힌드마치라는 곳이 있는가 봅니다. 전세계에 여섯 곳만 운영되는 매우 희귀한 스토어인데, "고객이 자사 제품과 함께 자신이 그린 그림 혹은 손글씨를 가져 오면 장인이 그 자리에서 수를 놓아 주거나 새겨 준다(p391)"고 하는군요. 이 브랜드가 특히 인기 높은 곳이 일본인데, 저자는 그 이유를 "장인과 고객을 이어주고자 하는 브랜드의 노력을 알아주는" 분위기 덕분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보니 우리 소비자들은, 브랜드나 디자이너만 떠올리지 만드는 장인의 수고는 그리 염두에 안 두는데, 소비자뿐 아니라 브랜드에서도 다들 장인을 그리 각별히 대접하는 풍토인 것만도 아니라고 봅니다. 책에서는 그 점을 환기시켜 주어 유익했습니다.

에필로그에는 역시 멋진 말씀이 많이 나오네요. "패션은 살아 있는 생물이다." 이 말은 한국에서는 어느 정치인이 자신의 종사 분야인 정치를 주어 삼아 코인한 구절인데, 직업인 모두가 명심해야 할 사항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해진, 아주 제한된 범위만 딱 설정해 놓고, "조거 이상 일하면 내가 손해"라며 딴짓이나 하다간 반드시 퇴출됩니다. 목표는 언제나 살아 숨쉬며 종사자를 리드하고, 마치 헬라 신화의 프로테우스처럼 모습을 수시로 바꾸며 관찰자의 눈을 어지럽히기 마련입니다. 고착되어 과거만 주시하는 자는 반드시 낙오합니다. 저자께서 지적하듯 현재 유통 빅 3(현대, 롯데, 신세계)가 주도하는 업계의 재편 전망도 이런 맥락에서 관찰될 필요가 있겠고, 역시 저자도 시사하듯 단 한 순간도 시장의 동향으로부터 주의를 놓지 않고 연구하다, 골든 타임에 혁신의 결단을 내린 과정이 쌓이고 쌓여 이 지점에 이른 겁니다. 단, 현재 중국 시장에서 롯데와 신세계는 철수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인데, 유통과 패션이 결국은 (저자의 지적대로) 한 몸의 지체와 본체처럼 돌아가는 구조를 생각하면, 과연 결과가 어떠할지 주시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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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키퍼스 와이프
다이앤 애커먼 지음, 강혜정 옮김 / 나무옆의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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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구약에 보면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 사람의 이기적인 생존만을 도모한 게 아니라, 식용에 직접 기여도 못 하는 각양각색의 동물들까지 모두 큰 배에 싣고 "종 다양성"이라도 수호하겠다는 양 사명감에 불타는 노아의 모습은 현대인에게까지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합니다. 우리가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그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 일부이기도 하지만, 그를 넘어 "동물에게도 연대 의식을 가짐으로써, 인간에 대한 근원적 애착과 존엄을 더욱 다지게 한다"는 목적이 더 크게 작용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폴란드에 본래부터 유대인들이 많이 살기는 했습니다만, 이 책의 주인공 얀과 안토니나 부부는 유대 혈통은 아니었습니다. 부유하고 명성 높은 가문 출신이었고, 나이도 아직 젊었던 터라 조국 폴란드가 언제나 외세로부터 든든히 독립해 왔던 양 긍지와 애국심도 대단했죠. 이민족의 탱크와 폭격기가 강토를 짓밟고, "슈, 슈 하는 거친 치찰음과 낯선 말투, 어휘가 내가 살던 고장을 가득 메울 줄은" 전혀 짐작 못 했던, 외국의 침략은 역사 교과서에나 나왔던 일일 뿐 나와 내 이웃에게 실제로 닥칠 줄이야 꿈에도 몰랐던, 그저 선량하고 자신의 일상을 충실히만 살아 오던 이들이었습니다.

얀과 안토니나는 진심으로 동물을 사랑하며, 자신이 돌보던 동물들에게 세심한 주의를 베풀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일생을 두고 가꾸던 동물원은, 1939년 9월 1일 나치가 국제법이란 깡그리 무시하고 폴란드의 국경을 무단히 넘음으로써 처참히 망가졌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동물들 역시, 여태 평화로이 거주하던 터전이 철저히 파괴되고, 생전 겪어 보지 못하던 혼란과 결핍, 굶주림에 시달리며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전쟁통에 피난 행렬을 떠나는 난민들에 대해서는 무심히 눈길을 주는 데에 그치지만(지금도 진행형의 현실 아닙니까? 아프리카 각국이나 시리아 같은 데서요), 난데없이 폭격을 받은 동물원 안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공황 상태에 빠진 동물들을 놓고는 그 상상 만으로도 측은함이 솟습니다. 어떤 사람은 동정을 베푸는 듯하면서, 경멸감과 쾌감까지 드러나며 빈곤과 전쟁의 참상을 비웃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나치나 공산주의 잔당처럼이나 비뚤어지고 타락한 심성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도 자기 감정을 다룰 때는 추한 눈물을 지어가며 자기 연민에 빠지죠. 싸이코패스보다 몇 배는 더 저질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얀과 안토니나의 조국은 무참하게 짓밟혔습니다. 히틀러는 참으로 가증스럽게도, 명시적으로 "폴란드의 문화, 인종, 관습, 이익 등 모든 것을 철저히, 서서히 말살하라."고 명령까지 내렸다고 합니다. 자기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려다 부수 피해를 입힌 것도 아니고(설령 그랬다 해도 용서가 안 되지만), "레벤스라움"을 마련하려고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선 제노사이드를 획책했다니 이런 나쁜 놈이 또 어디 있습니까.

저자는 다분히 풍자적으로, 히틀러가 노린 건 "사람의 레벤스라움"뿐이 아니라,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그의 미친 순혈주의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식물 종에 대해서도 같이 적용되었는데, 이런 걸 보면 무지하고 비뚤어진 인간의 광신이, 어느 정도까지나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자신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불쌍한 보르수니오!" 가족 같던 어린 것이 겁에 질려 문 앞에서 애원했을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아팠다.(p74:1) 가업을 동물원 경영으로 삼고 사람보다 더 자주, 더 속 깊게, 동물들과 소통했을 자빈스키 부부가 꼭 아니라도, 우리 독자들 역시, 갑자기 하늘에서 날벼락을 맞고 이러저리 분주히 뛰어다니며 생존을 도모했을 동물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지죠. 상상만으로도 너무 불쌍합니다. 혹시 동물들도 궁지에 몰려 다 죽어가는 인간을 보면, 자신의 생존에 어느 정도 여유가 확보된 후라면, 도와 주고 싶은 마음이 들까요?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냉정하게 그런 사정을 주판알 굴려 가며 계산한 후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불쌍하니까 도와 주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인간임"을 확인합니다. 자, 그리고, 이제 다시 히틀러가, 유대인, 집시, 불구자 등에게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지 떠올려 보십시다.

루츠 헤크는 이 논픽션 저작 속에서 양가적인 성격을 띤 인물입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생각할 여지도 베풀 필요 없는, 또하나의 극악무도한 나치"로 여겨도 무방합니다. 저자도, 또 자빈스키 부부도, 그 판단을 크게 다르지 않게 내립니다. 여튼 이 논픽션은 꽤 공정하기에, 그의 외견상 신사적이고 품위 있는 처신(속에 무엇이 들었든 간에)까지도 상세히, 또 인상적으로 묘사합니다. 아이히만이나 히믈러, 괴링 같은 자들도 취향은 꽤 고상하고, 반려동물을 특히나 아끼고 사랑하는 면모를 보인 이들이었음을 고려하면, 이 헤크란 자의 다분히 모순적인 개성은 그리 놀랍다거나 충격적인 것도 아닙니다. (숨은 동기로는, 이 서평 저 위에서 언급한 대로, "게르만 동물의 레벤스라움"을 마련할 작정이었다는 걸 저자가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저자의 연구는 참으로 폭 넓어서, 식민주의자들의 공통 습성 중 하나가 새로이 식민한 지역에 기존 거주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이식하고 싶어한다는 것도 날카롭게 짚습니다) 자빈스키 부부는 유대인도 아니고, 해당 지역에서 오랜 시간 기반을 다지며 풍족한 생활을 영위한 계급이기에, 헤크는 "같은 중산 계급의 동질감"으로 이들을 정중하게 대우합니다. 일단은요.

민간어원설에 불과하겠지만 폴란드라는 나라 이름이 히브리어로 "포 린", 즉 여기서 쉬라(이 책 p22 중간쯤)는 뜻과 통해서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이 이 지역에 광범위하게 거주했다는 이야기가 전할 만큼, 폴란드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히틀러에게는 가뜩이나, 독일인의 거주 공간을 침훼하고 드는 슬라브인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차에, 유대인들까지 바글바글하니 얼마나 못된 침략 야욕을 합리화하기에 좋은 여건이었겠습니까.

"지엔 도브리!" 폴란드는 제법 떨어진 프랑스의 문물 영향도 폭 넓게 받았지만(유럽에서 안 그랬던 국가가 없긴 하지만요), 기본적으로는 슬라브 민족이기에 러시아 문화와 닮은 점이 꽤나 많습니다. 이 책 저자는 "독일"에 대해 그처럼이나 오랜 기간 동안 침략당하고, 점령되고, 무시, 능멸당한 역사를 언급합니다만, 사실 폴란드를 직접적으로, 더 자주, 더 길게 괴롭힌 건 당연히 러시아입니다. 저 인삿말도, "도브리 지엔(디엔)!"이란 러시아어 인사와 어순만 차이 날 뿐 거의 같은 구성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레지스탕스라고 하면 비시 정부와 나치 직접 통치 지역에서의 프랑스에서 이뤄진 저항 활동만 압니다. 그러나 이 책은, 폴란드인들이 나치에게 야만적인 기습 침략을 당한 후 생활 터전이 초토화한 후에도, 얼마나 치밀하고 효율적으로 사보타지, 소규모 공격, 정보망 가동, 위조 증명서 발급 등으로 후방에서 나치를 괴롭혔는지 자세히 묘사합니다. 폴란드 레지스탕스가 이토록 영웅적인 활약을 펼친 줄 소상히 확인하는 것도 책을 읽는 큰 재미와 보람 중 하나였습니다. 세계 역사가 이런 줄기찬 노력을 너무 과소평가해 온 듯하고요. 폴란드는 1980년대 레흐 바웬사의 자유 노조 운동을 통해 공산주의의 압제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저항을 벌였습니다. 이런 노력이 아니었다면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일은 없었거나, 훨씬 늦게 일어났을 겁니다. 2차 대전사를 읽다 보면 폴란드 망명 정부(김광균 시인의 <추일 서정> 중 어느 구절 때문에 친숙하기도 하죠)의 분투, 영국군에 조력하며 펼친 활약이 지나치게 폄하, 푸대접 받는 대목에서 분개하기도 했는데, 이 책을 읽고 그런 사항들이 더 단단한 맥락을 갖추게도 되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선 지금도 바그너의 곡들을 공개장소에서 연주하는 게 금기시된다고 합니다. 사실 독일은 인류 문명 창달에 기여한 바가 너무도 큰, 뚜렷한 문화 민족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 부부가 급박한 상황에서 "독일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p361 중간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독일어로는 슈텐트헨. 도이치넘버 889)"를 연주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곡은 아주 고품격의 클래식이라기보단 (너무 자주 들어서 그런지) 민요처럼 궁상맞은 느낌도 없지 않은데, 여튼 정치와는 전혀 무관한 순수 예술 작품도 이처럼 후손들의 실책과 과오에 따라 흉측한 빛깔이 덧씌워지는 건 참 안타깝죠.

자빈스키 부부의 영웅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몇몇 동료는 게슈타포에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두 열강의 싸움판 가운데에 끼어 피해를 입는가 하면, 마침내 소련군의 진주에 의해 이뤄진 바르샤바 해방은 진정한 해방도 아니었습니다. 책에 자세히 서술된 대로, 독일인들은 폴란드인에게 너무도 낯설게 들리는 이방의 어휘, 언어를 구사하며 나치 군의 행진에 뒤이어 "살 터전(레벤스라움)"을 찾아 몰려와선, 이곳저곳에서 식민지를 일구고 살려 들었습니다. 강점기에 일인들이 보였던 행태와 비슷하죠. 이러던 게, 소련의 진주와 함께 썰물처럼 휩쓸려 나가고, 구 동프로이센이나 오데르 나이세 동안(東岸) 같은, 전통적인 독일인 거주지 일부에서조차 독일인들이 대거 쫓겨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 땅은 폴란드에 고스란히 귀속되었으나, 소련은 대신 폴란드 동부 영토를 집어삼켰는데, 소련은 폴란드의 민족 감정을 철저히 억누르고 탄압했습니다.

"감히 전쟁(2차 대전 발발, 나치 침략) 전의 독립을 찬양하거나, 독립을 되찾기 위해 봉기에 참여하여 싸웠던 이들을 영웅시하는 행위는, 반동적이고 어처구니없는 것으로 위험시되었다(p391에서 재인용)..." 자신의 의지와 주견을 자유롭게 펴면서 살 수 없는 어떠한 개인, 집단, 민족도, 마치 야생의 본능을 억압당하며 동물원에 갇혀 박제된 생을 연명하는 신세와 다를 바 없음을, 이 책은 예외적이고 온정적이며 정의로웠던 개인들의 실제 삶을 통해 잘 보여줍니다. 왜 우리는 자빈스키 부부의 사연을 지금에서야 알게 된 걸까요? 억압자 소련과 사실상 타협, 공모하여 약소 민족의 명예와 권익을 무시한 미국의 의도 때문이라고 해도 그리 과장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제국주의 세력의 야욕과 만행 때문에 크나큰 상처를 입은 처지이기에, 이런 슬픈 역사를 접하고 얻는 감회가 더욱 남다를 수밖에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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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안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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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단거리보다는 장거리 달리기에 더 특화된 종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라토너들 못지 않게 100m, 200m 등 단거리 선수들에게도 큰 환호를 보내며, 광고 시장 등에서의 "상품 가치"는 이들 단거리 선수가 더 높이 매겨지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에는, 인간의 눈 앞에 더 바싹 다가선, 더 높이 세워진 한계, 장벽에 도전하는 모습이 더 아름답고 장쾌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있겠습니다.

폭발적인 스피드를 내려면 물론 근력도 갖춰져야 하고 (이 책 중간쯤에도 언급이 있는 대로) 유연한 리듬감도 배양되어야 만족스러운 기록이 나올 것입니다. 테니스 같은 스포츠와는 달리 육상 단거리는 10대 시절에 전성기를 맞기 어려운 까닭이기도 한데, 여러 이유로 동아시아인의 신체 특성은 백인이나 흑인 등에 맞서 겨루기 어려운 한계도 지녔죠. '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쾌거를 이룬 류샹 선수가 당시 크게 화제가 된 건 그래서 당연했습니다.

이 소설 속에서처럼, 아직 어린 청소년이, 우리 동아시아인에게 영원히 아득한 목표처럼 여겨지는 육상 단거리에서 빼어난 기록을 세우고, 전국민(나아가 세계인)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다면 참 신나는 상황일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작품 속 1인칭 주인공 "강단"은, 매니저 스티브의 실수로 금지약물을 복용하고 도핑 테스트에서 적발된 탓에, (이 작품 속 표현을 그대로 따르자면) 한순간에 "국민영웅에서 국민 쓰레기로" 전락한 형편입니다. 악플에 시달리고 비전도 사라진 채 막막한 신세가 되어도 이 소년이 버텨낼 수 있는 건, 피 한 방울 안 섞였음에도 불구하고 친동기간보다 더 사이가 좋은, 창던지기 선수 지태, BJ 연아, 이 둘과 영원한 삼총사로 즐겁게 지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견뎌낼 수 없는 일도, 나의 분신, 혹은 alter ego라 할 또래 친구들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고통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세 소년소녀는 각각 다른 가정에서 자라다 한순간에 고아가 되었는데, 아이들을 모두 입양해 자신의 친자녀처럼 키운 고마운 "엄마"가 한 분 계십니다. 무작정 사랑을 베풀고 매사에 양보를 해 줘도 사춘기 아이들이라는 게 마냥 착하게 굴지만은 않는 게 차라리 당연한데, "어떤 일"을 계기로 이 아이들은 엄마가 얼마나 고마운 분인지 깨닫고 정말 화목한 가정을 이룹니다. 이런 배경 사정은 회상과 대화 중에 지나가듯 언급될 뿐이고, 소설은 막을 엶과 동시에 거의 막바로 초대형 테러의 발생으로 서울, 우리가 사는 바로 그 도시, 전철 1~8호선과 몇 종류의 노선이 더 복잡히 얽히며 운행되는 그곳에서, 커다란 혼란이 빚어진다는 급박한 전개로 돌입합니다.

전철 테러는 픽션에서 드문 소재가 전혀 아닐 뿐더러, 아직 애들이다 보니 세 주인공들의 감정선이 지극히 단순한 터라(단, 여자애인 연아가 꽤 똑똑하고 예리한 편입니다), 처음에는 별 기대가 안 되었던 게 사실입니다. 대개 이런 영 애덜트 대상 SF 판타지(단, 이 소설이 판타지에도 무난히 분류될지는 좀 생각을 해 봐야겠습니다)에서 설정은 매우 참신하고 거창하게 벌여져도,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결국 참신한 초기 세팅이 재미의 전부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 소설은 반대였습니다. 갈수록 설정 밀도가 높아지고, 서서히 드러나는 진상도 충격적으로 꾸며졌습니다. 캐릭터들도 처음에는 "그저 애들"로 여겨졌는데, 이야기가 흥미진진 전개될수록 각자의 개성을 더 굳혀가더군요. 천진난만하면서도 의심이 많고, (요원 기현국의 노림수대로) 설익은 영웅주의에 쉽게 휩쓸리지 싶으면서도 영악하고 이기적인 면모도 드러내는 터라, 실감과 입체감이 돋보였습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육상 기대주였다고는 하나 능력, 인격, 감성 모든 면에서 성장 도상에 놓인 아이들일 뿐이고, 그나마 다른 두 아이는 평범한 자질일 뿐입니다. 또 자신의 세계가 붕괴 직전의 위험에 놓일 때, 그저 익다 만 "달리기 재능" 하나로 어떻게 만인을 구원하겠습니까? 물리적 능력은 물론 정신적 준비도 채 갖춰지지 않은 이들은 그래서 아직 영웅으로 부상할 마음도 안 먹은 상태이며, 당장 이 재난으로부터 자신들과 "엄마"부터 살리기나 하고, 이후에는 "하와이(그저 국외 세상의 은유로 보입니다)" 등으로 이주하여 자신들을 푸대접한 한국과 절연할 생각마저도 품습니다(특히 지태). 이 책은 앞으로 장대히 이어질 <스프린터> 시리즈의 첫 권인데, 이처럼이나 주인공들은 어설프고 무력합니다. 앞으로 길게 이어질 후속 사연에서 우리 독자들은 이들이 "커 나가는 과정" 그리고 죄 많은 세상이 어떻게 정화될지를 지켜 봐야 하겠지요.

[이하 내용 누설이 있으므로 주의해서 읽으십시오. 가능하면 안 읽는 편이 낫습니다]

타락하고 음흉한 정치인인 박정근 대통령, 주한미군 사령관, 국정원장, 에너지공단 이사장(ㅎㅎ) 등은 거의 절대악처럼 보입니다. 이들은 남산(과거 중정에 의해 여러 만행이 저질러져 탄압과 압제, 음모의 대명사처럼 불리기도 한) 아래에 "노아"라는 거대한 지하 공간을 건설합니다. 여기서 권력은 노숙자들, 실직자들, 혹은 4류 코미디 영화에서 참된 자아상을 발견하는, 테러리스트를 닮은 부적응 호구 등을 대거 끌어들여 생체실험을 하는데, 기본 전제는 "이 좁은 지구에 사람이 너무 많이 산다"는 겁니다. 다수는 생산에 기여도 못 하고 그저 다른 이의 짐이 될 뿐인데, 그렇게 의미 없는 연명을 할 바에야 마루타 노릇으로 동시대인과 후손에 좋은 일이나 좀 하라는 거죠. 과학자들은 인체를 통해 핵에너지를 능가할 만한 엄청난 근원적 힘을 뽑아낼 수 있게 되는데(소설 속의 표현에 따르면, 이 배터리를 일렬로 세워 미 대륙을 횡단하게 할 경우 일시에 폭발시켜 지각 전체를 다 날려버릴 수 있다네요), 이들 노숙자들이 항구적 바이오매스처럼 포박된 채로 지상의 거주자들을 위해 싼 값으로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한다는 식입니다.

이 과정에서 괴생명체인 프로젝트 피조물 하나가 중요한 구실을 하는데, 얘 이름이 "신야"입니다. 정체가 계속 가려져 있다 후반부에 간신히 모습을 드러내는데 마치 폴 버호벤의 <토탈 리콜>에서 반란군 지도자 쿠아토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사실상 하등 종족으로 고착화한 노숙자나, 그곳 화성의 방사능 오염 돌연변이 족속이나 닮은 점도 많은데, 여기서의 신야는 섬뜩한 늙은 추물인 쿠아토와는 달리 중성적 외양의 꼬마이며 독립 신체를 지니고 잘 돌아다닙니다. 잘 돌아다닐 뿐 아니라 염력으로 비언어적 소통을 자유롭게 행하는데, 쿠아토뿐 아니라 <맨 인 블랙 III>에서의 그리핀과도 비슷한 능력입니다. 아니면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에 나오는 그 누구하고도 좀 닮았죠.

여기서 압권인 건 국정원 요원 기현국이 아이들 셋의 행방을 드론으로 파악한 후, "빨간 버튼을 눌러" 모두를 구하라고 이중의 거짓 설득을 하는 장면입니다. 자기 딴에는 철두철미한 양심의 발로로써, 윗선의 (더 잔인하고 야비하며 파렴치한) 지시까지 생까고 짠 계획인데, 이 말을 들으면 우리의 주인공들은 다 죽게 됩니다. 이들이 위기를 모면하는 과정은 직접 책을 읽어 보고 확인하시고요. 근데 신야가 너무 사기 유닛이라 능력치 밸런스가 좀 안 맞기도 합니다. 신야는 모든 것(못나고 유한하며 어리석은 인간들[동시에 자신의 창조주이기도 한]의 탐욕, 감정 따위)를 이해하지만, 그 천박함과 빤함에 질렸는지 내내 냉담하고 태연하며 무관심한 표정입니다. 이런 캐릭터의 매력과 개성이 앞으로 이 긴 사연을 이끌어 갈 하나의 동력이기도 하겠습니다.

p280이하에 보면 철덕을 자처하는 어느 네티즌(이렇게 평범하고 이름없는 선의의 시민들이 모여, 아직은 어설픈 주인공들을 도와 악한 세력의 음모를 분쇄한다는 게 주제의식 이해에 필수인 사정이죠)이, "이 테러가 참으로 이상한 게, 그렇게 특정 구역만 클리어 커팅하듯 파괴하는 폭파가 현 기술 수준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웹에 올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대목의 상세한 설정은 작가의 심도 있는 연구가 선행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서술이었을 겁니다. 그저 기발한 상상만으로는 SF가 현대 독자의 구미를 사로잡을 수 없는데, 이런 성의와 설계상의 치밀함이 읽으면서 참 좋았습니다. 다만 용병대장 뭐 이런 캐릭터는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뿐, 이런 극비의 프로젝트에 뭘 한몫 낀다는 게 좀 현실감이 떨어지지 않나 싶었고, 작가도 그 점을 의식했는지 의심을 받고 발끈하는 모습을 삽입하기도 합니다. 2부가 여튼 많이 기대되네요. 투자비 많이 들여서 한국형 헝거게임이 영화 포맷으로 또다른 한류 열풍을 일으켰으면 하는 응원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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