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신이 되는 날 - 싱귤래리티가 인류를 구한다
마츠모토 데츠조 지음, 정하경.김시출 옮김 / 북스타(Bookstar)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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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책입니다. AI의 성과가 고대의 신탁처럼 기능할 수 있는 세상. 그런데 일단 특이점에 도달한 후 인류의 삶이 이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라니요.

AI가 문명의 기초를 위협할 수 있다는 예측은 꼭 상업적인 SF 영화에서만 나온 게 아니라, 예컨대 스티븐 호킹 같은 정통파 석학들도 (전공 분야는 다르지만) 간헐적으로 몇 마디씩 한 적 있습니다. 도구로서의 AI가 일상의 다양한 분야에 요긴히 쓰일 수 있다는 전망은 총론으로서는 드물게 나오는 편인데, 이는 아직도 어떤 패턴 어떤 개념의 AI가 상용화 실용화될지 분명한 전망이 서지 않아서입니다.

한편 인공지능의 진단이 마치 신탁처럼 취급되며, 실체를 알 수 없는 권위(그 누구도, 어떤 경로로 그런 결론이 도출되었는지 모르기에)에 의해 휘둘리는 사회를 상정하며 음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이들도 있었는데 저 개인적으로 대중서를 통해 접한 범위에선 주로 일본 학자들의 의견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책 저자는 방향성을 다르게 잡은 셈입니다. 방향성도 다를 뿐 아니라 상상의 전개 폭도 훨씬 넓습니다.

저자는 나이가 지긋한 중견 기업인이며 직종도 컨설팅 분야이지만, 마치 망가를 즐기는 오타쿠라든가 천진한 중학생처럼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는 필치입니다. 제 주위에는 "너무 황당한 논의 아닌가" 같은 반응도 있었습니다만, 논의의 단계가 넘어가는 모습이 흔한 잡담과는 달리 치밀한 상상(논거까지는 아니라도)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습니다.

AI가 지배하는 디스토피아(마치 영화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이 장악한 미래처럼)에서도 소수의 인간이 반란군을 조직하여 과거의 자유를 꿈꾸는 몸부림을 벌인다... 이는 인공지능의 위력을 과소평가한 빈약한 공상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빈틈없는 논리연산체계를 구축하고 완벽한 추론 능력을 갖춘 그들에게 통치력의 누수지점은 없으며, 이런 그들이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인간이라는 종에게 보호 장치를 통해 근근한 생존을 가능케 하거나, 절멸시키거나, 아니면 다른 계로부터 도달한 또다른 AI에 의해 멸망한다거나 하는 세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게 그저 기계적으로 경우의 수를 나눈 게 아니라, 그가 경영인으로서 관측한 현 시점의 AI의 기술적 완성도를 놓고 추론한 결과이므로, 예컨대 그들(?)이 레지스탕스의 봉기를 허용하는 시나리오는 과감히 배제도 할 수 있었던 거죠.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공산주의라는 이념 체계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목표를 전혀 달성 못 한 채 현실의 비능률과 자체 모순에 의해 붕괴했습니다. 저자는 일각에서 이는 "기본 소득제" 옹호를 놓고, 인공지능이 초래한 일자리 감소가 전혀 의도치 않게 공산주의 사회의 원형에 사회 구조를 수렴케 하는 결과를 낳는다고도 합니다.

저자는 흥미롭게도 과거의 종교사를 잠시 개관하며, 어떤 경위로 종교라는 신념 체계가 발흥했으며 어떤 이유로 현재의 거대한 4대 종파가 살아남았고, 역사상의 어떤 고비를 넘다 교세가 쇠퇴하거나 반대로 급격한 발전을 보았는지에 대해 잠시 되짚습니다. 여기서 제가 흥미롭게 본 건 불교에 대한 개관이었습니다. 불교는 일체의 종교 허례 허식을 배제하고, 만사가 공(空)이라는 초월적 결론으로 신도를 이끄는 매우 고차원적이고 소수 엘리트의 입맛에 맞을 만한 교리를 내세웠으나, 그만큼 일반 대중에게는 진입 장벽이 높았다고도 합니다. 이러던 게 이슬람 교 무장 세력의 침략으로 사원과 승려와 경전이 대거 파괴, 사상(死傷), 소실되어, 인도 아대륙에서는 교세를 잃은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고 하네요. 기존의 정설과 크게 다른 점은 없으나 강조하는 포인트가 미묘하게 다른 점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저자가 느닷 종교를 끌어대는 이유는 뭘까요? AI가 바로, 인간의 내면이 끊임없이 갈구해 온 종교적 욕구를 풀어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AI는 첫째 현세의 의문을 놓고 그 압도적인 정보 처리 능력으로 상당 부분을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현세 기복에 대해서는, 어차피 고등종교가 이 needs를 해결 못하고 그저 정신적 위안에 그치는 현실에 비추어, 일정 신뢰만 마련되면 넉넉히 종교를 대체하리라 봅니다. 그럴싸한 추정입니다.

저자는 또한 현대 문명이 근본적인 모순점을 안고 있다 봅니다. 현재까지는 요행 혹은 파멸에의 두려움 때문에 전면 충돌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나, 핵무기란 인류라는 종의 기본 생존을 위협하기에 충분한 거대 변수, 아니 상수입니다. 뿐 아니라 민주주의, 자본주의 역시 정치적 포퓰리즘, 자원 배분 구조의 취약점 때문에 과연 올바로 지속될 수 있을지 큰 의문과 우려가 생기는 형편입니다. 이런 모순과 위기는 현생 인류의 지혜로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이며, 사적 욕망도 없고 감정에 흔들릴 가능성도 없는 AI가 올바른 해법을 도출해 줄 것으로 저자는 기대한다는군요.

AI가 미래를 지배하게 된다면, 이 산업이나 학문 영역에서 주도권을 쥔 국가가 미래를 주도해 나가는 게 당연합니다. 그 유력 주자로 저자(다시 강조하는데, 일본인입니다)는 중국을 꼽습니다. 전망이 불확실한 각종 산업에의 투자는 민간에 그 시행과 도전의 기회, 성공의 과실과 실패의 리스크를 전가할 수 있지만, 이런 중추적 과제는 전국의 영재(얼마나 인구가 많은가요)를 뽑아 단일 기관에다 체계적으로 배치하여 연구를 진행시킬 수 있는 중국이 현재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점입니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고, 이 이슈와는 무관하나 최근 원숭이 복제를 성공시킨 뉴스가 전파를 타기도 했기에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AI가 인간의 두뇌 기능을 대신하면 과학을 포함 모든 지적 영역에서 인간은 물러나는 수밖에 없고, 대신 육체를 이용한 활동이 새로이 주목받으리라고 전망합니다. 문명이 대뇌 피질상의 진화를 통해 도약을 겪은 이래 정반대의 방향 전환을 맞는 셈이지요.

ㅎㅎ 너무 과감한 상상과 추론이 잔뜩 펼쳐지지만, 어떤 건 정말 공감되기도 했습니다. 사람은 보수뿐 아니라 일에서의 성취감 때문에 그 직무에 전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특히 과학이나 공학 쪽에서 하는 일마다 판판이 AI보다 저성과를 낸다면, AI가 다가와서 "넌 그거밖에 못하니?"라며 무시하지는 않겠으나 당사자의 모멸감이 얼마나 크겠냐는 겁니다ㅋㅋ. 총이 무장 수단으로 일반화되었을 때 검술의 대가들은 사회의 주류에서 완전히 밀려나 좋았던 과거를 회상하지만, 감정적 선호를 목청 높여 표시한다고 시대의 도도한 흐름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거죠. 어떻습니까?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근본 결함"에 대한 견해도 경청할 가치가 있었습니다. 과학책도 아니고 경영 서적도 아니지만, AI가 부른 거대 체제 담론상의 시끄러운 동요에 대해 한번 조감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네요. 이 저자의 주장을 추종하라는 게 아니라, 이 발랄한 주장을 경청하고 독자들이 각자 자신의 생각을 따로 발전시킬 촉매제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중지(衆智)가 모아지면 세상은 더 살만한 곳이 되어 가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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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크 DNA - 쓸모없는 줄 알았던 정크 DNA의 비밀
네사 캐리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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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와 불필요, 주류와 비주류의 분류만큼 과학 본연의 태도에서 벗어난 건 없습니다. 이야말로 인간의 가치 판단이 가장 선명하게 개입하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근자에 들어서 과연 "적자 생존"의 적자(the fittest)가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강력히 제기되는데, 당연, 자명하다고 여겼던 분야가 알고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새삼스러운 각성은, 거대한 진리의 체계 앞에서 인간의 인지 기능이 얼마나 (아직은) 미미한지 그 슬픈 한계를 깨닫게 합니다.

불필요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게 아니었다, 뭐 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주객 전도의 지경까지 갔던 거라면 학자들의 충격도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대체 "매우 미묘한 방식으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수 세기 동안 거대한 크기의 천체는물론 자그마한 지상 물체의 사소한 낙하까지 거의 모든 물리현상을 설명해 왔던 뉴튼 역학은 미시 세계의 기괴한 작동을 대면하고부터는 그 유효성이 심각한 회의의 도마에 올랐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른바 복잡계의 속성을 거론할 때 항상 대표로 꼽히는 기상 현상 예측의 어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2000년 클린턴이나 토니 블레어 등 세계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성과가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만, 인간을 대상으로 한 줄기세포 연구 규제와는 무관하게, 여전히 많은 유전병 연구에서 그로부터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단계에까지 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해명이 이뤄져야 할 분야가 여전히 미지의 베일에 싸여 있어서인데, 대체 98%의 정보가 "쓸모없다"고 분류되었다면 그를 바탕으로 한 연구가 과연 얼마나 큰 실용의 영역으로 이어질지는 넉넉히 짐작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 책을 읽고 느낀 건, 그저 발상의 전환으로 시야의 맹점을 보완하는 데에 그칠 게 아니라, 아예 패러다임 자체를 바꿀 계제가 되지 않았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고작 "유행의 변덕" 같은 천박한 시선으로 파악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과학은 여튼 나선형으로 상승하는 지성의 몸부림 그 역정이며, 어떤 비천하고 열등한 정신이, 그저 무엇 하나가 축의 양방향을 진자처럼 발전없이 왕복한다고 자기 수준에 맞춰 왜곡, 단순화하는 것과는 달라도 크게 다르죠.

저자 네사 캐리는 과감한 비유와 명쾌한 설명으로 그간 독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온 축복받은 두뇌입니다. 어떤 이들(제 가까운 지인 중 그래도 신뢰할 만한 식자에 낄 법한 누구)은 "쉬운 말로 문외한에게까지 납득이 가게 설명하지 못하면 그 전문가라는 사람의 이해도도 의심해 봐야 한다"고도 하던데, 아, 그건 진짜 아닙니다. 자기 머리 속에는 선명히 그려지고 응용 가능성도 시원시원히 떠오르긴 해도, 전혀 모르는 문외한에게 3원색의 채도마냥 이해시키는 건 또다른 과업이요 도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류 대중서 저자와 본격 과학도의 위상을 겸한 네사 캐리는 진정 축복받은 두뇌입니다. 이 깔끔하면서도 유익한 대중서를 읽은 후 종전의 그런 느낌, 인상을 더욱 굳히게 되었습니다.

짐작은 쉬운데 증명은 어렵고, 심증은 흔하나 물증은 귀한 법입니다. "정크 반복 DNA(얼마나 부당한 이름이었는지는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통렬히 깨닫게 됩니다)"는 대개 덩치가 크고, 어쩌면 그 이유 때문에 더 손쉽게 부당한 오명을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지금껏 종전 대중서의 오도 때문에 지성 용량이나 자원을 낭비했다고 여기진 마십시오. 올바른 최신 지식의 업데이트는, 오히려 당신이 종전 지식을 더 열심히 공부했으면 했을수록 더 빠르게 더 정확히 이뤄지는 법입니다. 공부하느라 들인 수고는 결코 무위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지식은 언제나 전복, 대체, 반박되게 마련인데 이런 걸 두고 지식의 획일화 타령을 하는 자는 그저 학창 시절의 개인적 악몽을 한심히 호도, 합리화하려는 새빨간 거짓말 외에 다른 의도가 없습니다.

학자들이 "단순 서열 반복"이라 부르는, 저보다 훨씬 작은 반복 단위들은 인간 유전체 중 약 3%를 차지(p67)한다고 합니다. 이 분야뿐 아니라 어떤 학문의 영역에서도, 미지의 패턴 그 정체를 밝히는 과업은 출현 빈도가 높으면서도(용이한 일반화 가능), 개체마다 뚜렷한 대조가 가능한 단서에 의해 결정적 도움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 대목을 언급하며 저자(뿐 아니라 모든 일류 연구자)가 느낀 환희와 스릴, 영감이 어떤 것인지 생생히 전해 오는 문장입니다. 입증의 문제는 과학 영역에서 가설의 타당성 검증 뿐 아니라, 공교롭게도 범죄의 과학 수사에서 용의자의 유무죄를 실제 입증하는 데 요긴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전혀 다른 영역의 성과를, 비유적으로건 실체의 설명으로건 교묘히 연결하려 버무릴 줄 아는 게 (학자 스탠스를 잠시 떠나) 순수 글쓰기 재주꾼으로서만의 자질이겠습니다.

p134를 보면, 좀 놀라운 일이지만 "한 종류의 긴 비암호화 DNA는 그 수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물론 네사 캐리를 포함한 학자들)가 이 종류의 분자를 무시해 왔다"는 정직한 고백, 혹은 자성의 한 마디가 나옵니다. 사실 무시했다기보다는 자 이용할 자신이 없어서 외면했던 단서라고 해야겠습니다. 먼 훗날 자신들보다는 더 유리한 정보 여건에서 연구를 진행할 후배들에게 미루면서 말이죠. "긴 비(非) 암호화 RNA가, 신뢰도가 높은 수준으로 감지되지 않았는데, 이는 필요한 기술의 감도가 충분히 높지 않아..." 역시 보십시오. 또, 어느 분야에서나 나타나는 측정의 신뢰도, 그리고 통계상의 표본 처리 신뢰도 문제입니다. 두 이슈가 독립적이지 싶어도 결국은 같은 말입니다. 이 책에서 수도 없이 자주 등장하는 감도, 감도... 감도가 향상되면 deviation의 significance를 따질 필요가 줄어듭니다. 이 세부적 국면에 한정해서라면, 패러다임은 교체된다기보다 더 정교화하는 겁니다. 단지 해석의 병목 현상때문에 기존 패러다임이 더 이상 안 통한다고 많은 이들이 착각할 뿐이죠.

"하지만 긴 비암호화 RNA는 단백질 암호화 유전자처럼 뚜렷한 서열 표지가 없으며 종들 사이에서 잘 보존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캐리 교수의 결론은 "인간 유전체에서 기능적으로 연관이 있는 서열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라는 겁니다. 캐리 교수처럼 명철하고 의욕 가득한 학자도, 구절양장과도 같은 경우의 수, 수형도의 분기(分歧) 앞에서 이처럼 "인간적인 주저함"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 가장 활발하게 조절되는 건 아주 오래된 긴 비암호화 RNA들이고, 이것들은 대부분 발달 초기에 관여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 우리와 우리의 친척들은 모두 발생을 시작할 때 비슷한 경로를 사용한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 다음 문단의 한 줄이 의미심장하죠. "이들 '정크' RNA를 암호화하는 서열들은 단백질을 암호화하는 서열보다 훨씬 빨리 진화하고 있다." '정크'에 벌써 따옴표가 붙었고, 일부 저자들의 주장이라고 한정하긴 하며, 바로 다음 문단에서 저자 개인의 유보("지나친 단순화일 수 있다...")를 피력하지만, 이런 입장을 (공정히?) 소개한다는 것부터가 저자의 내심을 어느 정도는 드러내는 흔적입니다. 물론, 저자는 유보적 입장의 논거 중 하나로, "염기 서열은 종들 사이에 보존되지 않더라도, 3차원 구조는 보존될 수 있다"고도 하지만 말입니다. 이 마지막 인용구 같은 시원한 반박(혹은 암시) 덕분에 네사 캐리 교수의 책이 빛나는 것이기도 하고요.

"긴 비암호화 RNA의 발현은 본질적으로 방관자 사건이다." 다시 필요-불필요/메인-정크의 소모적인 논쟁으로 들어옵니다. 방관자 사건이란 말은 바로 뒤 문장에 나오듯 "부산물"과 거의 같은 뜻입니다. 더 구체화한 설명은 다음 페이지에 나오는데, "... 특정 지역의 유전자들이 발현될 때 억제가 완화된 결과로 나타나는 부수 현상...."이란 거죠. 이에 대해 반대하는 측은 물론 모든 현상에는 이유가 있다고 하며, 이들을 가리켜 저자는 "정크 마니아"라고 다소 우스꽝스럽게 부릅니다. 저자는 두 입장의 대립 속에서 절충을 하려는 듯 보이나, 잘 읽어 보면 그래도 어느 한쪽에 조금은 선호가 기울어 있습니다. "성급한 범주화"에는 언제나 무리가 따르며, 새로이 출현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보다 어설픈 범주화에 맞춰 왜곡할 위험이 크다는 이유를 드는데, 이런 교훈은 비단 분자세포생물학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서 더욱 울림이 깊어요. 범주, 정의, 이름표가 중요한 게 아닌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편의대로 붙여 둔 "우상"에 먼저 매몰되곤 합니다.

"프래더- 윌리 증후군 환자 중 25%는 완전히 정상인(결손 부분이 전혀 없는) 염색체 2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p184)" 문제의 15번 염색체를 부모 양쪽에서 물려받은 게 아니라, 둘 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사실에 학자들은 주목합니다. 이런 패턴은 오직 각인의 맥락에서 바라봐야 바른 해답이 나온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학자들을 어렵게 만드는 건, 대체 왜 그럼 다른 문제에서는 각인 패턴이 아닌 다른 원리, 가설을 적용해야 쉬운 설명이 가능하냐는 건데, 이처럼 다양한 맥락의 통일적 적용, 우선순위까지 남김없이 해명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연구결과가 축적되어야 할지 아무도 모르니 그저 아찔하기만 합니다. 이때 "각인"은 콘라드 로렌츠의 그 각인과 철자가 같습니다만, 이 저자 네사 캐리 등이 근자에 혁명적으로 발전시킨 후생유전학(우리는 네사 캐리라는 이름을 이 성과 때문에 지금 아는 거죠)에서는 전혀 다른 뜻을 갖습니다. 네사 캐리의 다른 히트작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 배운 적 있습니다.

"먼저 시동을 걸기나 해야 무슨 작동이란 게 일어나는 법이다." 생각해 보면 아찔할 만큼 복잡하고 어려운 이론인데, 예컨대 "프로모터", "인핸서" 같은 용어도 교과서를 펼치며 공부하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이처럼 일반화한 말- 프로모터니 인핸서니-로 이름이 붙으면 더 어렵게 다가와요). 허나 이처럼 부가티 베이론(이런 고급 승용차를 사려면 돈을 얼마나 벌어야 할지- 캐리 교수님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분이라서인지 아니면 본인이 자동차 마니아라서인지 유독 이런 비유가 잦네요)을 들어 비유를 하시니 조금 긴가민가하면서도 일단 독자들은 큰 개념을 쉽게 잡을 수가 있습니다, 감사하게도요. 암튼 프로모터나 인핸서(라고 이름 붙은 구역들)나 예전에는 다 "정크"로 간주되던 학자들의 불청객이었습니다.

정크가 알고보니 특정 기능을 요긴히 강화한다는 것도 놀라운데, 어떤 인핸서는 그냥 인핸서가 아니라 슈퍼인핸서라고 합니다(p215. 다능성 줄기세포의 엄청난 의의에 대해서 혹 생각이 안 나시면 앞 p143으로 다시 돌아가 복습해 보십시오). "마스터조절인자는 배아줄기 세포에서 아주 높은 수준으로 발현되지만, 전문화한 세포에서는 그보다 아주 낮은 수준으로 발현된다." '아주'라는 부사가 문장의 전반부, 후반부에서 두 번 다 사용되었다는 데에 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저 상대적 경향성만 지적하려는 게 아닌 의도죠. "많은 질환들을 치료할 대체 세포들을 만들 가능성"에 학자들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006년의 이 대발견은 네사 캐리의 전작 대중서(같은 해나무 출판사에서 이충호 선생의 번역으로 나와 있습니다)에도 언급이 있습니다.

RNA 분자들에서의 기묘한 스플라이싱(p315) 예를 설명한 대목을 보며, 우리는 지금 순수 자연과학이 확실히 전세기, 전전세기와는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실감치 않을 수 없습니다. 단지 단백질 암호화와 무관하다는 이유 하나로 그간 무시되었던 이 수많은 정크야말로, 그간 해명되지 않던 무수히 많은 난제에 접근할 열쇠였음을 발견하는 이 과정은, 특정 학문의 방법론적 성과, 혁신을 넘어, 해변에서 조개 껍데기와 조약돌을 주으며 노닐던 인류가 어떻게 저 광대한 대양을 주시해야 하는지 그 겸손한 자세를 새삼 일깨웁니다. 물론 모든 정크가 알고보니 귀금속 벌크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FSHD 단백질을 발현하는 근육세포들을 환자 자신의 면역계가 파괴하는 것일 수 있다는 가설은, 이 특권적 위치(캐리 교수만의 독창적 표현)의 단백질을 면역계가 낯설어한 나머지 위협적 외부 요소처럼 간주해서일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정크는 이처럼 오작동(?)할 때 특정 질환을 결정적으로 발병시킬 수 있는데, 그건 얘가 정크라서가 물론 아니라 우리가 이 정크(아니지만)의 하는 일을 제대로 파악할 때 오히려 특정 질환의 예방과 질환에 결정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고마운 단서 구실을 합니다.

과학자들의 앞길에 놓인 보다 근원적 난제는, 어느 인과 관계가 최우선순위에 놓일 결정적 원리이며, 어느 인과 관계들이 대등한 자격에서 비슷한 비중으로 가중치를 받으며 결합 작용하는지를 결정하느 것입니다. 정크가 정크 나름대로 독자 기능을 함이 분명히 밝혀지면 새로 이름표를 붙여 주면 끝입니다. 그게 아니라 (정크인지 정크 아닌지도 모를 녀석들이) 상위 다층의 프로세스에서 미묘한 기능을 숨어서 행하는 경우가 골치를 썩이는 겁니다. 이걸 언제 다 분류해서 길들여가며(생텍스의 어린왕자처럼) 인간의 인식 우주에 제 자리를 찾아줄지, 그저 아찔하기만 하지만 이처럼 정크(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에 의미를 부여해 가는 우리 인간의 자태와 노력은 여전히 아름답기만 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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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량으로 투자하라 - 개정판
버프 도르마이어 지음, 신가을 옮김 / 이레미디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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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량으로 투자하라!" 무슨 뜻일까요?

현재 가장 많은 학부생들이 애독하는 투자론 교과서인 Bodie, Marcus 등의 책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대다수의 교재들도 "어디까지나 가치 투자"라는 모토 아래에서 모든 논의를 전개합니다. "무엇이 가치 투자"인지는 명확히 밝히지 않지만(불가능하죠), 회사의 참다운 가치와 시장이 매긴 가격 사이에 분명한 갭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이후의 그 방대하고 치밀한 분석과 논의를 시작하는 겁니다.

워런 버핏 역시 오늘의 자신이 있게 된 건 가치 투자에 철저하고도 일관되이 집중했기에 가능했다고 토로합니다. 요약적 결론만 (보기 좋게) 그리 내세운 게 아니라 <스노볼> 등의 자서전에서 생의 어느 대목(기로)에 성공적인 가치 투자의 결행을 이뤘는지 자세히 밝히고도 있습니다. 타인들이 간과한 알짜 기업을 미리 알아보고, (흔한 말이지만) 쌀 때 사서 비쌀 때 파는 전략을 유지한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흠 잡을 데가 하나도 없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거래량 팩터"는 사실 따지고 보면 저 "가치 투자" 기조에 반드시 모순되는 건 아닙니다. 이 책을 (저 때문에) 읽은 제 주변 분들도 종종 오해를 하시던데 저자는 "가치 투자는 개에게나 줘 버리고, 거래량 분석에 올인하라"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런 말을 보세요. "기술적 분석가들은 펀더멘털 분석이 주가 분석에 있어 두드러진 역할을 한다는 걸 분명히 인정한다." 그러게요. 가치 투자와 (저자님의) 거래량 포커스 투자는 얼마든지 공존, 병행, 시너지가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왜 당신들은 가치 투자 같은 추상적 주관적 요소에만 주목하고, 보다 손쉬우며 객관적인 징후에는 눈을 감는가?" 같은 안타까움을 통해, 작심하고 자신만의 노하우를 이처럼 자세하게 풀어 놓은 의도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네요.

여튼 저자는 이런 말도 분명히 서문에서 하고는 있습니다. "앞으로의 시장이 1980년대나 1990년대처럼 그 탐색이 손쉬우리라고 기대하는가?" 확실히 판은 바뀌었습니다. 기존의 방식 중 맞는 건 살리고 틀린 건 버리자는 정도의 미적지근한 대응이 아니라, 아예 송두리째 폐기처분해야 한다는 파괴적 혁신론이 힘을 얻는 것도 무리가 아니게 말입니다.

저자는 이런 말도 합니다. "펀더멘털 분석은 가치가 어떻게 주가에 반영되는지를 분명히 주목한다. 그러나 매도 시기, 매수 시기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 주지 않는다." 사실 중요한 건 언제 치고들어갈지 언제 빠질지의 타이밍인데, 현재 펀더멘털 분석이 위주인 많은 정통파 스탠스의 교과서들에선 이런 언급이 상대적으로 (양, 질 모두) 빈약합니다. 이런 지적에 대해 속 시원히 받아칠 수 있는 전문가나 학자도 제 생각에 별로 없지 싶습니다.


잠시만 학계 주류 입장(을 넘어 거의 상식) 중 하나인 Treynor와 Mazuy의 분석틀에서 타이밍 팩터를 어떻게 다루는지 짚어 보겠습니다. 이분들은 상수항을 a, 시장포트폴리오와 안전자산 이자율 사이의 차에  붙은 계수를 b(젠슨의 식에서 베타로 취급되는), 그 이차항의 계수를 c(이 부분이 다른 학자들의 식에 없었죠)로 각각 두고 저 c를 "타이밍"으로 규정합니다. 알파와 베타 이야기는 자주 하는데, 학자는 물론 실무가와 애널리스트들도 저 Treynor의 c는 드물게 언급합니다. 타이밍은 그만큼 계량화하기 어려운 이슈라서입니다. 그리고 펀더멘털 분석의 "실속"을 가장 초라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우량주라도 천년만년 끼고 있어야 어느 시점에서 궁극적 헤택을 준다면, 당장 돈이 아쉬운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차입 투자를 해야만 하는 이들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나 마찬가지인 충고지요. (과도한 레버리징은 절대 금물이며, 뭐 여튼 안정된 여윳돈으로 투자하는 게 정석임은 언제나 타당합니다만) "해당 주식이 장기 보유종목이라는 치욕스러운 이름으로 분류되어 그 업종 전체나 해당 기업이 상승할 때까지 손해를 보면서도 보유해야 하는" 결과를 통렬히 개탄하는 저자의 말 역시, 반박할 말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타당한 지적입니다. 추세가 이처럼이나 변덕스러운 시대에, 예를 들어 시스코 시스템즈 株를 거론하며 보유 기간에 따라 65%의 손실, 64%의 이익이라는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면 더욱 허무해지는 게 "가치 투자 예찬론"입니다.

번거로운 말 다 생략하고, 이 책 저자님이 주장하시는 요점이 뭔지 정리하겠습니다. 캔들 차트를 보되, 첫째 주가 변동 곡선이 어떤 모양을 띠는지에 주목해서, 둥근 바닥인지 둥근 천장인지, 다이아몬드 톱인지  역머리어깨형인지 그 심상치않은 모양에서 "징조"를 분명히 캐치하라는 겁니다. 조런 모양들이 나타나면 앞으로 어느 기간 안에 폭락이 발생할지, 상승이 갑자기 나타날지, 향후 상당 기간 동안은 가격의 회복을 기대하기 힘들지, 이 모든 걸 예측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둘째 거기만 봐서는 안 되고, (이 책 제목이 뭔지 다시 확인하십시오) 차트 하단의 거래량 부분을 들여다본 후, 거래량과 가격 등락이 어떤 패턴으로 상관하는지까지 함께 주목하라는 겁니다. 실제로 뭐가 강세깃발이고 뭐가 페넌트인지는 차트 상단만 봐선 쉽게 판별 안 됩니다. 아래의 거래량 패턴까지 함께 고려해야 지금 이게 저자의 분류 중 어느 타입에 해당하는지 가려낼 수 있습니다.

마치 관상이나 풍수지리와도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무슨 상 무슨 상 하며 기본 카테고리는 명쾌히 나뉩니다만, 실제 인물의 상이나 지형이 그 중 어디에 정확히 포섭될지는 해당 분석을 행하는 이의 공력에 크게 좌우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전혀 그 형태가 안 보이는데도 용케 개형을 잡아내어 무슨무슨 분류에 집어넣는데, 이게 억지인지 핵심을 정확히 짚었는지는 오로지 결과가 말해 주는 거죠. 책을 보면서도 "왜 이게 손잡이가 있는 컵이지?"라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그림만 보지 말고 텍스트에서 저자가 말하고자는 의도를 면밀히 숙고해야 하며, 다시 말하지만 하단의 거래량 부분을 함께 봐야 합니다.

거래량도 그냥 거래량이 아닙니다. 일중 주가 변화(혹은 종가 변화)를 반영한 것, 틱 거래량, 거래량 토대 주가매집, 각종 지표에 의해 수정된 것, OVB, VZO, WAD 등 다양합니다(더 앞선 시기에 레전드들이 이미 개발해서 업계에서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것들이죠). 왜 이렇게 저자는 거래량에 주목하라고 권하는 걸까요? 소박하게 말하면, 정확하게 국면을 본 큰손이나 기관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게 여튼 개미 입장에서 무시할 수 있는 조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작전에 속는 건지 아니면 진정한 변화를 반영한 시그널을 캐치한 건지는 정말로 신중히 분별해야 하는데, 그에 도움을 주는 자료들, 기준들이 (저자의 말에 의하면) 차트의 저런 심상치 않은 조형들이란 거죠.

좀 어렵다는 반응이 제 주위엔 많았습니다. 공부할 때도 중간 진도에서 헤매는 건 기초 개념을 충실히 학습하지 않아서입니다. 저는 특히 pp. 98~113에서 저자가 잡아 준 기본꼴 바(bar)들이 갖는 함의, pp. 122~140의 "추세"에 대한 힘 있는 개념 제시를 정독하시길 권합니다. 후반부는 이 논의가 확실히 이해되면 큰 무리 없이 따라갈 수 있는 논의들입니다. 읽어 보면 너무 좋은 내용들이 많아서, 정말 차트만 보고(물론 아니지만) 기술적 분석만으로 실패 없는 투자가 가능할 수도 있갰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만화에서나 나올 법하던 게(아니면 룸쌀롱에서의 실없는 허풍) 현실에서도 진지한 논의가 슬슬 시도되는 셈인데, 대단히 흥미로운 게 사실입니다. 단, 거듭 말씀 드리지만 정석은 어디까지 가치 투자, 펀더멘털 분석임도 잊지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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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6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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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에서 나눈 대화 - 귄터 그라스, 파트릭 모디아노, 임레 케르테스… 인생에 대한 거장들의 대답
이리스 라디쉬 지음, 염정용 옮김 / 에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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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환상이 사라진다."

마케팅 (혹은 어느 부서라도) 담당자들이 치밀한 기획 끝에 소비자, 시장의 심판을 받는(선택이 되느냐 안 되느냐) 바로 그 순간을 두고 "moment of truth"라고도 부르죠.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다들 희망 섞인 관측도 하고, 대박 치면 앞으로 뭘 하겠다느니 잔뜩 부푼 포부를 재미 삼아 털어놓기도 합니다. 잘 될 수도 있지만 안 되는 경우도 많고, 이때 환멸이 깨진다는 이유에서 저런 말을 쓰는 건데, 여튼 인간은 누구라도 자신의 삶에 대해 작건 크건 환상을 품고 삽니다. 반면 남의 삶에 훈수를 둘 때에는 그렇게 현실적이고 정확할 수가 또 없습니다.

이 책은, 우리 같은 범속한 이들이 아나라, 나이 지긋이 드신 작가분들께서, "인생에 대한 환상이 서서히 사라져갈 무렵" <ZEIT>誌와의 인터뷰에 응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갖가지 속 깊은 상념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랫말처럼,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는" 법이지요. 생의 후반기 온갖 영욕과 쓴맛 단맛을 다 겪고 "무엇인 인생인지"에 대해 담담한 관조가 가능한 문인들의 말씀이기에, 설혹 젊은 독자들이 읽어도 깨우치는 바가 많을 뿐 아니라 심금을 울리는 진정 가득한 명언이 많은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늙는 것은 죄악이다." 하 이런! 예전에 문인 전혜린은 "서른 그 추함을 어떻게 견딜까."라는 명언을 남기고 죽음을 택하여 전설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늙건 젊건 범속한 우리들은 "Life goes on."을 되뇌며 각자의 일상에 그래도 그 나름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저 말을 (인터뷰에서 한) 쥘리앵 그린은 프랑스 태생 미국인 소설가입니다. 인터뷰 중 부친에 대해 언급하며 "남북전쟁(미국 내전) 참전"이 나오기도 하는 건 이 때문이죠. 유난히 전쟁과 정치, 강대국의 횡포에 대한 평가가 많이 나오는 인터뷰 중 "이라크" 이야기는 2003년 부시 행정부 관련이 아니고 1990년의 걸프전을 환기하는 의도이니 우리 독자들은 오해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린은 1998년에 이미 타계한 분이니까요. 참고로 저 말은 늙음에 대한 경멸과 가치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죄악"이 과연 무엇인지를 놓고 재고해 보자는 촉구에 가깝습니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늙으면 죽어야 한다"와, "사는 게 다 죄지요." 중 후자에 더 가깝다고나 할지요.

"Kehrdiannix!" 행동주의 문학을 옹호한 페터 륌코르프는 "당신이 이 말을 이해할지 모르겠지만"이란 전제를 달며 자신의 "초연함, 냉담함"을 표현합니다. 역주에 "신경쓰지 마"라는 독일 북부 방언이라고 친절한 설명이 있죠. 더 상세하게는 이게 니더작센에서 자주 들리는 표현입니다. 이거 원 말은, "Kehr dich(2인칭 친칭 명령) an nichts!"죠. 빨리 말해서 저리 들리는 걸 아예 관용어로 굳게 한 건데요. 우리말로 하면 글쎄... "쫄지마" 정도? 영어로 하면 Back off from nothing 쯤 될 겁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컨테이너선은 갈수록 배의 모습과 거리가 멀어지고, (사회의 부속으로 편입되는) 우리들은 점차 인간의 모습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진다.(p71)" 음울하지만 삶의 씁쓸한 요체를 제대로 파악했지 싶은 그의 명언이더군요.

"영어는 동사, 독일어는 명사, 러시아어는 형용사" 안드레이 비토프는 세류에 휩쓸리기를 거부하고 변함없는 모성으로서의 러시아적 정신 탐구에 헌신한 작가입니다. 인터뷰는 푸틴 체제가 슬슬 제 꼴을 갖춰갈 무렵인 2004년입니다. 단 저 말은 비토프 본인의 창안이 아니라, 세간에 그런 평가가 있다는 걸 떠올려 주면서 자신이 그에 대해 열렬한 동의를 보낸다는 걸 재확인하는 멘트입니다.

인터뷰어 이리스 라디쉬의 "의견, 평가, 정리"가 더 의미심장한데, 그녀는 "... 그 말씀은, 유럽은 이미 수명이 다했고 러시아는 아직 살아갈 날들이 남았다는 뜻인가요?"라고 묻습니다(p97).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앞에서 비토프가 무슨 말을 했기에 저런 질문이 나오나 하실 수도 있겠으나, 비토프의 규정이 무엇이었든 관계 없이(!) 의미심장한 통찰이라고 보지 않으십니까? 이는 "러시아가 옳고 유럽이 그르다." 같은 가치 판단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러시아는 도스토예프스크의 맥락에서 여전히 "타락하고 추접스러운 나라"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오로지 쇼펜하우어적 의미에서(혹은 니체) "생명력"이란 기준으로 하는 말입니다. 다시 이 책 제목을 들여다 보십시오. "삶의 끝에서 나눈 대화" 삶은 정의롭고 가치로 가득찬 것이어서 오래 지속되고, 죄의 응보 때문에 돌연 종지부를 찍는 게 아닙니다.

조지 타보리도 예전 분이긴 하나 이 인터뷰는 04년에 이뤄졌고 이분이 워낙 오래 산 분이라서인지 글과 (우리 한국 독자 사이의) 감성적 갭이 그리 크지 않게 느껴지더군요. "OO 말인가요? 우리는 그 말을 아무데서나 함부로 내뱉지만, 본래 의미와는 전혀 관련이 없지요(이거는 제가 중학교 때 국어쌤도 그런 말을 하던데). 나에게 친척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아흔 둘의 나이에 아이를 만드는 일을 저질렀답니다." 이 말을 인터뷰에서 할 당시의 타보리도 비슷한 나이였습니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독일식 햄 요리가 맛이 끔찍하다고 불평하시네요. 우리도 요즘 굴라시 메뉴를 취급하는 레스토랑이 늘고 있습니다만 이분이 헝가리 분입니다. 젊어서 얼마나 풍미 이슈에 까다롭게 구셨을지도 짐작이 가고 말이죠.

"나는 히틀러를 직접 보았습니다. 1933. 1 빌헬름 슈트라서의 어느 발코니에 서 있던데 무척 슬퍼 보이더군요.(p117)." 누군가의 표정이 어둡거나 밝거나 단호하거나 불안하거나 한 건 제 생각으로 대체로는 보는 사람 마음에 달린 겁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두고만큼은 타보리의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습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슬픈" 사람이 아니었겠습니까? 세계와, 자신과, 보편과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스스로의 운명을 잘 알았기 때문에 말입니다. G E 레싱의 <현자 나탄>에 대해 말하며 (그 앞에서) 느닷 TV의 의의에 대해 논하는 건(타보리와 라디쉬 모두), 이분이 본디 텍스트와 공연예술 모두로서의 "연극"에 엄청 열정을 쏟은 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루라도, 혹은 잠시라도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나는 나의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닌지 절망에 빠지고 두려워집니다." 문인에게 있어 집필뿐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우리들 역시 익숙한 루틴의 그 무엇이 빠져나가면 잠시라도 당혹감에 압도됩니다. 데리다, 베케트, 롤랑 바르트, 조르주 바타유 등의 작품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저런 공황 상태에서 특히 그랬다는 뜻이겠죠?)고 고백하는 마이뢰커는 우리가 그의 작품을 읽으며 으레 그런 분이겠거니 짐작했던 대로 섬세하고 상처 입기 쉬운 마음의 결을 인터뷰에서 무시로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질문이 꽤 재미있습니다. "(그럴 때) 글을 쓰는 건 당신인가요, 당신의 자아인가요?" 라디쉬는 저 위(이 책 맨처음) 쥘리앙 그린의 말("내 글은 누군가의 말을 받아적은 것들이다")을 상기하며, 이 질문을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린의 인터뷰는 1990년대 중반에 이뤄졌고 지금 이 만남은 04년 중에 이뤄졌습니다(간접으로 차이트 지의 연륜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죠. 이제 중견을 넘어 거물 대접을 받는 라디쉬는 저때만 해도 30대 아니었겠습니까). 이 질문에 마이뢰커는 "나도 에른스트(에른스트 얀들)이 내 귀에서 속삭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나이로는 (아직도 생존해 계신) 마이뢰커가 얀들보다 한 살 위입니다. 아쉽게도 얀들과의 인터뷰는 이 책에 없습니다. 이 이슈는 마치 18세기의 괴테가 말한 "데몬"을 떠올리게도 하네요.

이 책에서 우리 한국 독자들이 가장 유의깊게 볼 만한 대목은 귄터 그라스와 마르틴 발저의 조인트 인터뷰입니다. 두 분이 동갑이고 문예나 사회 활동에서 (누구나 다 알듯) 평생의 동지로 살아왔습니다. 책에는 2015년 그라스의 서거를 회고(우리 한국에서도 당시 큰 반향이 일었죠. 80년대 학번 어르신들에게 특히 의미 깊은 문인이며, 1989년에 드디어 해금된 영화 <양철북>도 많이들 아실 겁니다)하는 라디쉬의 건조한 듯 의미심장한 감회가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참 멋진 말씀이, "아우슈비츠가 도덕적 곤봉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입니다. 아니, 그 전에, 도덕이 곤봉 노릇을 하면 이미 그건 도덕도 아닙니다. 간혹 우리는 엄혹한 위기의 시대에는 정작 숨어서 뭘 했는지 모를 사람이, 투쟁과 고난을 거쳐 다 이뤄진 밥상에 날선 목청만 높이며 숟가락만 올리려는 경우를 보곤 합니다. 논리의 비약도 심하고 매사가 견강부회인데다 인성도 참으로 거칠고 나쁜, 그러면서도 간악한 거짓말쟁이더군요. 악을 악으로 갚으려는 시도는 대개 도덕과 무관한, 추악한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는 비뚤어진 영혼의 흉계가 그 이면에 깔려 있기 십상입니다.

책은 (섬세한 기획의 결과물이니 당연한 결과일지 모르지만) 정말로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 할 연령의 문인들만 만나, 치열한 언어와 투명한 통찰로 그들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라디쉬의 "맹활약"이 오히려 더 볼만합니다. 인터뷰 앞에는 라디쉬 본인의 "회고, 감상"이 일일이 정성스레 쓰여졌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라디쉬의 책이라 불러도 될 듯합니다. 인터뷰의 질은 인터뷰어의 공력과 천재성에 전적으로 좌우된다고 봐도 되는데, 이 책은 정말 흔한 인터뷰의 범주를 넘어선, 그 자체로 힘찬 미학과 지긋한 교훈, 멋진 감성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한번 읽어보시길 삼가(그러나 자신 있게)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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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지막 대륙
미지 레이먼드 지음, 이선혜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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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나오는 대로 1979년 "에어뉴질랜드901"이라는 비행기가 재난을 당한 적은 실제로 있었습니다만, 오스트랄리스라는 이름의 남극 크루즈 여객선이 정착빙에 부딪혀 715명의 사상자를 낸 대형 참사가 빚어진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처럼 남극이 "책임 있는 관리 당국"이 부재한 채로 방치되며, 게다가 남극 조약이 종료되기까지 하는 몇 십 년 후에 이른다면, 이런 사고가 언제든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여튼 역자 후기에 나오는 대로 이 소설은 이른바 "재난 장르"는 아닙니다. 남극 대륙이라는 예외적 환경에서 다양한 아종의 펭귄들, 그 밖의 동식물군에 정을 붙이며 생업에 정열을 쏟는 어느 전문직 여성이, 여느 통상의 대륙에 사는 남들처럼 개인적인 사랑, 직업상의 갈등, 관계 속에서의 마찰과 유대를 두루 거치며 생의 일정 시점에서 어떤 겨결론에 도달한다는 사연입니다. 사람은 남극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환경 속에서도 인격 파탄과 완전한 안식 중 어느 지점에도 도달할 수 있는, 감정과 상상을 통해 존재 방식을 결정하는 유일한 동물입니다만, 누구에게는 그 배경(무대)가 하필 남극이라면 마치 사막의 구도자가 맞는 특별한 운명처럼 우리는 그이의 유별난 운명과 행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인공은 1인칭 시점으로 내내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데보라 가드너입니다. 대개 5년 전 "그 참사"가 빚어졌던 언저리에서 과거 회상이 주를 이루는 어조이지만, 많은 대목에서 시제는 현재를 취하며(엄연히 5년 전 과거인데도요), 아주 간혹 십수 년 전 대학원생 시절로 돌아가기도 하다가, 결말에서는 본 주소를 내내 두고 있었던 오리건 포틀랜드(남극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도 집은 여기를 삼았습니다)에서 이야기를 마무리짓습니다.

남극 같은 극한의 원격지에서 수 개월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이들에게는, 현지에서 부부처럼 "커플(해당 대목에서는 이 흔한 단어에 특볗한 의미가 주어지더군요)"로 지내다가, "원 대륙"으로 복귀해서는 본연의 가족에게 자연스럽게 소속되곤 하는 관계가 종종 생기나 봅니다. 그럴 만도 하겠다 싶어도, 다시 생각해 보면 뭠가 거북한 느낌이 드는 게 또 당연합니다.

주인공 데보라 가드너는 아직 미혼인데다 본인 표현(p217)에 따르면 남자를 진지하게 사귀어 본 적이 없습니다. 대학원생 시절에는 채드, 데니스 등이 생각나는 정도이며, 그 중 전자와는 제법 깊은 사이까지 진행되었는지 임신까지 한 적도 있지만 출산은 하지 않았습니다. 중반쯤에 보면 "다시 관계가 복원된" 켈러 설리번에게 청혼을 받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호칭이 "미스 가드너"입니다. 한 번도 결혼을 하지않았으니 당연하며, 이런 까닭에 그녀는 별반 께름칙한 느낌 없이 어떤 이성과도 가벼운, 혹은 진지한 관계를 만들 수 있지만 그녀가 사람 고르는 데 까다로운 편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유년기에 그녀가 부친의 부정(不貞)을 뜻하지 않게 눈치챈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친의 생일보다 한참 앞선 시점, 하트가 그려진 축하 카드를 아빠가 쓰는 걸 훔쳐봤는데, 이 일을 기억한 그녀가 몇 달 후 엄마에게 주어진 카드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한 걸 지적하며 가정은 결정적으로 파탄이 났던 거죠. 그 전부터 이 부부는 어린 딸의 눈에도 꽤 어색한 관계였는데, 이 악몽 같은 기억 때문에 뎁 가드너는 내내 소극적인 대(對) 이성 자세를 가지게 되었나 봅니다.

그녀는 학창 시절 내내 그리 여성스럽지 않은 모습을 유지했고(지금 키가 180cm에 가까우니 저 시기에도 작은 키는 아니었겠죠?), 친하게 지낸(그녀의 평가에 의하면 "정말 괜찮은") 친구 알렉이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남사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알렉은 우리 독자들이 빤히 눈치챌 수 있지만 남성 동성애자이며, 이런 그와 깊은 공감을 나눴다는 고백으로 미루건대 그녀 역시 적잖은 혼란을 겪었음도 감지할 수 있겠네요. 물론 그녀는 우리가 봐서 알듯 이성애자입니다.

켈러 설리반은 변호사 자격도 가졌었고 실력도 좋았지만 더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나서다 석사 학위를 세 개나 단기에 추가하는 등 뛰어난 지성을 갖춘 사람입니다. 한 번 결혼에 실패했고, 그래서인지 뎁에게도 조심스러운 태도였지만(뎁은 본래가 조심스럽고요), 결국 다시 본격적으로 가까워지고 뎁은 (아마도) 두번째의 임신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관광객 케이트- 리처드 아처 부부를 알게 되는데, 리처드 아처는 젊은 나이에 여러 사업에 손을 대어 큰 돈을 번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책 뒤표지에는 이런 대화가 인용되었는데요.

"남극 대륙에 온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아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과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는 사람이로요."
"이곳은 저한테 마지막 대륙이에요. 전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셈이네요. 당신은요?"

사실 이 대화는 p248에서 케이트와 뎁 두 여인이 주고받는 내용이 살짝 바뀐 것입니다. 해당 대목에서 케이트는 "남극은 나의 일곱 번째 대륙"이라고 합니다. 넉넉한 형편에 육대륙을 다 다녀 봤다는 자랑으로도 들리는데(그렇게 듣는다면 물론 오해입니다), 뎁은 "여긴 저의 세번째 대륙이지만 마지막 대륙"이라며 "마지막"이란 말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합니다.

(이하 약간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설령 더 이상 숨을 곳도, 갈 곳도 없는 이들이 우연이건 필연이건 택한 행로가 남극이었다 해도, 반드시 그곳에서 물리적 파국을 맞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객선 오스트랄리스는 정말로 백 년 전  저 북극해 근방의 타이타닉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는데요. 이 과정에서 아깝게도 켈러 설리반과 딕 아처가 목숨을 잃습니다. 약간은 위험 중독 증상이 있는 아처는 (맞는 진단인지는 의심스러우나) 뱃멀미 때문에 부착한 패치형 약 때문에 극한 상황에서 판단력까지 잃습니다. 여튼 두 남성 모두, 그들이 각각 사랑했던 여성들 "앞(물리적 거리는 다소 납니다만)"에서 평소보다 더 품위 있는 대처를 하려 애썼음은 분명합니다.

켈러나 뎁이나 남극의 생태에 워낙 애정이 깊다 보니 해당 분야의 지식과 현황에 아주 밝으며 특히 펭귄에 대해서는 그 지식의 깊이나 애정의 강도를 누가 따를 수 없습니다. 남극에서는 분해자의 활동조차 극한의 저온에서 억제되다 보니 죽은 생물의 사체를 포함 무엇도 썩지 않고 흉한 모습 그대로 방치되며, 그 와중에도 특수 박테리아나 전염균은 펭귄 등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어 전문 인력의 특별한 방역 조치가 항상 뒤따릅니다. 이 과정에서 승객들과 크고작은 마찰도 따르게 마련이고요. 무심한 행동 속에 환경을 오염시키거나 생태계에 작은 위험이라도 전파하는 관광객들에 대해 이들은 항상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직무상 의무라는 이유 말고도 그들에겐 "다른 대륙에서 받은 상처"를 이 마지막 대륙에 대한 애정으로 대신 치유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나 짐작되기도 합니다.

급작스러운 결말에서 뎁은 많은 상처를 입었으나 결국 살아남고, 켈러의 딸을 출산한 후 그 특별한 이름을 가진 고양이를 키우던 집 주인 닉과 결혼하게 됩니다. 여기서 독자들은 약간 놀라게 되는데, 아마도 바다를 보지 않으면 역으로 멀미가 나던 그녀의 증상도 5년이나 지난 지금 많이 나아지지 않았을지, 더불어 관계의 진전에 대한 부담과 공포도 사고로부터의 호된 그 경험을 통해 (역으로) 적잖은 치유가 되지 않았을지 기대도 해 보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마지막 대륙은 다시 첫 대륙으로 전환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법이니요.

"세상의 끝, 만물의 기원"이라는 소설 마지막 문장은, 저 앞 p25의 "fin del mundo, principio de todo"라는 스페인어 어구와 같은 뜻입니다. 이 구절을 모토로 삼는 우수아이아는 아르헨티나의 "땅끝마을"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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