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개의 산
파올로 코녜티 지음, 최정윤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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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강, 거침없이 달리는 평원, 자연을 맴도며 자신만의 생명력을 발산하는 숱한 생명체들 속에서 자라야 큰 인물이 나온다고 어른들이 종종 말씀하시곤 합니다. 꼭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역대 한국 역사를 바꿔 놓은 굵직굵직한 인물들을 보면 과히 틀린 말도 아닌 듯싶습니다. 설령 속세의 풍진 묻은 대소사를 개척한 인물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사와 우주의 깊은 비의를 속된 인간들에게 깨우쳐 주는 대문호들 또한 그런 이들이 많았습니다.

피에트로는 본디 산이 싫은 도회의 아이였습니다. 많은 아들들이 그런 길을 걷습니다만, 대개는 자신의 부친과 일부러 다른 길을 걷고 싶고, 그래서 엄연히 맞는 말을 깨우쳐 주시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발버둥칩니다. 안전한 전철을 밟는 게 본인에게도 유리한데, 왜 이처럼 어린, 젊은 아들들이 오기를 부리는지는 여전히 잘 알 수 없습니다. 멀고 가까운 역사나 혹은 평범한 가정의 많은 비극들은 부친과 아들 들 사이의 갈등에서 작은 단초가 싹텄습니다. 그리고 그 싹은 차마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비극과 불행을 홍수처럼 밀고 들어오는, 인간의 감정과 지혜가 차마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한 볼륨으로 연약한 영혼을 덮칩니다.

영화나 소설을 보면 언제나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이런 불화하는 부(父)와 자(子) 사이의 대결 아닌 대결은, 그윽한 산 속에서 절정을 맞거나 아니면 극적인 화해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합니다. 아들이 장년의 초입에 채 들어설 무렵 맞게 되는 아버지의 죽음은 그래서 대개 더 가슴 아픈 체험인데, 피에트로는 아버지의 유산 하나가 바로 그 산 안에 머무르고 남겨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유산이 경제적으로 가치가 커서가 아니라. 아버지와의 마지막 화해를 위한 계기가 거기 같이 있음을 알고 산을 찾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다시 만난 산"은, 알고보니 존재의 의문을 해결하고 공허를 메워 줄 모든 것을 가진, 운명의 둥지와도 같았습니다. 보다 빨리 이뤄졌더라면 더 좋았을 화해를, 때늦게나마 이 산이 마련해 준 겁니다.

산이 거기 있어 산을 오른다는 어느 유명한 산악인의 말도 있었지만, 실제로 산은 거기 머무르지만은 않습니다. 산을 이해 못 하는 인간이 꾸준히 산을 침노하고, 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이 산에 상처를 남깁니다. 산에게 이유 없는 생채기를 낸 인간들은, 도회로 복귀하여 다시 자신들끼리 부단한 투쟁에 돌입합니다. 산의 입장에서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패배한 인간이든 승리한 인간이든 산을 다시 찾고, 비뚤어진 자아를 투영하며 다시 탐욕의 기세를 돋웁니다.

꾸준히 "자연인..." 같은 프로그램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건, 도회가 아닌 산이야말로 우리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 줄 수 있으리라는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기대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사악한 이, 상처를 씻을 자격이나 준비가 안 된 이의 사정은 산도 어찌해 줄 수 없습니다. 이 소설은 이탈리아 경제 위기가 배경인데, 이탈리아는 바로 얼마 전만 해도 그곳에서 발원한 위기가 세계 전체를 위태롭게 하리라는 어두운 전망이 일어났던 적 있습니다.

피에트로는 산 속에서 방랑함으로써 자신의 과거와 돌아가신 아버지와 다시 화해하려 들지만, 사실 우리 독자들은 그의 문제가 말끔히 해결 안 된 채 도피구처럼 산을 찾았음도 눈치 챕니다. 자신이 책임 져야 할 가족들과 불화하는 피에트로를 보며, 어쩌면 그가 그의 부친이 디딘 궤도를 나쁜 쪽으로만 답습하는 게 아닌지 불안감도 느낍니다. 그러나 피에트로에게 마냥 따가운 시선만 보낼 수도 없는 게, 저 피에트로가 안고 있는 고뇌란 기실 우리 독자 모두의 그것과 빛깔을 같이함을 어느새 책을 읽으며 절감, 동의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잔잔하면서도 현실의 문제를 툭툭 던지듯 잔뜩 돌려 이야기하듯 깨우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인간 존재의 본연이 도회와 자연 중 어느 편에 더 깊은 발을 담그었을 지 다시 숙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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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본 살인사건 스코틀랜드 책방
페이지 셸턴 지음, 이수영 옮김 / 나무옆의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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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건 전철 객차 안에서건 책에 푹 파묻혀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여성은 아름답고 호기심을 끕니다. 무슨 책을 읽기에 저리도 몰두할까? 책 속 말고 다른 세계에는 저처럼 빠져들어 본 적 있는 분일까? 헌데 알고 보니 집안 내력, 개인적 취미 등 모든 면에서 "책벌레 그 이상"의 사연을 지닌 분이라면 더 큰 흥미가 생기는 게 당연합니다.

에든버러는 브리튼 섬의 북부 스코틀랜드 문화 최정수의 깊은 역사를 한 몸에 다 품은 유서 깊은 고장이지요. 책방에는 여태 이 도시가 찍어낸 모든 문제의 책들, 문화의 압축판이 다 소장되어 있을 듯하고, 주인공 딜레이니는 철가루가 자석에 이끌리듯 고서점의 굽이진 서가 속으로 향합니다. 이 고서점과 그 오랜 세월의 풍파를 내내 함께했을 듯한 주인 에드윈의 주름살 역시 역사의 비밀을 굽이굽이 간직했을 것만 같습니다.

책 속의 인물이 말을 걸어오는 듯한 환각인지 아니면 대서양 너머 이방의 고서점에서 반드시 겪을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인지, 혹은 미국에서 내내 희구했던 모험과의 운명적 조우인지, 믿을 수 없는 체험과 살인사건이 부르는 공포와 좌절, 그러면서도 스릴과 흥분을 동시에 느끼는 딜레이니를 보며, 우리는 오즈 한복판에 느닷 떨어진 도로시를 만나는 듯도 합니다.

고서가 부르는 마법이란 흔한 마녀의 장난질이 일으키는 파문과는 깊이와 격이 다르다고나 할까요. 하필 그녀가 잠시 열띤 눈길을 준 청년의 이름은 "햄릿"이기까지 합니다. 이처럼이나 유서 깊은 고서점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박물관이기도 한데, 고서점이 간직한 희귀한 판본 하나를 두고 끔찍한 범죄가 벌어질 만한 소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금전적 가치도 가치이거니와, 마치 기독교의 성배 전설처럼, 상징은 많은 이들에게 상징 이상의 효능과 마력을 지닙니다.

깊은 사연을 간직한 가문에서 벌어지는 동기간의 갈등은 사실 일반인의 시선으로는 이해가 안 될 만큼 격렬한 양상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마치 1년 전 방영되었던 영국 드라마 <셜록>을 연상시키는, 알고보니 남들이 함부로 짐작 못할 골치 아픈 알력으로 점철된 에드윈 씨네 집안 사연이 이 딜레이니의 머리를 더 아프게 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막다른 골목에 이를 때 언제나 장애물로 앞길을 막는 건, 책, 책, 책이었습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도 주인공 도로시가 어떤 특별한 자질이 있어 그 숱한 곤경과 마법의 질곡을 헤쳐 온 게 아님을 우리는 잘 압니다. 도로시가 믿었던 건 자신의 착한 마음, 불의와 모순은 반드시 해결되고 바로잡아져야 한다는 정의감, 그리고 친구와의 연대감 등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고판본 하나가 빚은 끔찍한 살인이, 천재적 능력 아닌 선의지와 정의감으로 그 진상을 드러내는 과정은 통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세상을 지키는 건 평범한 우리들의 의지임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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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 그리고 사람들 - 영화의 첫인상을 만드는 스튜디오 이야기
이원희 지음 / 지콜론북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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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포스터는 영화 전체의 압축판입니다. 스토리와 컨셉과 주제와 매력(관객을 상영관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단 한 컷에 모두 녹아 있습니다. 상업적 계산 때문에도 이를 허술히 제작할 수 없고, 작품이 만들어진 지 수십 년이 지나도 그 영화의 개성 전체를 상징하는 증명사진으로 남습니다. 제작 측의 입장에서도 그러할 뿐더러, 우리 팬들 쪽에서도 성장기, 혹은 각별한 추억이 아로새겨진 시점에서 누군가와 함께 관람한 영화는 대개 그 포스터가 내게(우리에게) 남긴 인상과 영원히 함께 남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래서 포스터나 팸플릿 등을 작정하고 수집하기도 하는데 모으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각별한 추억의 세공 작업(컬렉션)이라 그 결과물을 누구와도 바꿀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짧을수록, 함축적일수록 이상적입니다." 이는 포스터 제작자의 특권이자 동시에 무거운 책무이기도 합니다. 감독은 단편물 연출에 특화된 이가 아닌 이상 가능하면 섬세하고 성의 있게 자신의 사연을 풀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포스터의 기능은 이처럼이나 바라는 방향이 다릅니다. 피그말리온은 물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 괴이한 외모와 취향의 조각가입니다만, 이 책에서는 우리 동시대 한국의 포스터 제작 집단인 '피그말리온'을 가리킵니다. 어떻게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 잘 아는 대로 GB 쇼의 유명한 희곡과 오드리 헵번 주연의 그 영화와는 어떤 사연의 지점을 공유하는지, 대담자들은 포스터 제작의 고충과 보람을 논하면서 쫄깃한 뒷담화를 늘어놓습니다.

요즘은 아예 다양성 영화라고 해서, 상업적 메인스트림으로부터 거리를 둔 주제와 분위기를 마음껏 표현하는 멋진 영화들이 표현의 장을 따로 마련하기도 합니다만 아직 인지도도 낮고 최근에는 또 그 나름의 변형된 상업성을 추구하는 경향마저 있죠. 여튼, 믿고 보는 토드 헤인즈의 작품 <캐롤>의 국내판 포스터 제작에 얽힌 재미난 사연들이 독자의 바쁜 시선을 잠시 멈추게 했습니다. 주연배우 케이트 블란쳇, 루니 마라 두 여인의 익숙하고도 깊이 있는 표정, 눈빛이 대두되었습니다만 손에 쥔 "담배"가 사라졌다는 게 팬들 사이에서 논란을 불렀다는군요. 희한하게도 국내 TV 방영 릴에서는 일일이 흡연 씬이 흐릿하게 처리되는데 어색하기도 하고 과연 국제 추세에 부응하는 규제인지도 고개가 갸웃해질 때가 많습니다. 이 역시 남성 중심의 흡연 문화, 타인 비배려, 사회의 보편적인 건강권 강조 등의 추세와 맞물려 한때 진보적인 발걸음으로 평가되었습니다만 지금 이렇게 예술 섹터의 제작자들은 "불편함"을 운위합니다. 뭐가 맞을까요. 혹은 어디서 타협점을 찾아야 할지요.

영화 감독과 그래픽 디자이너는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작업하나요? 이처럼 "질문"이란 우리 독자들의 공통된 의문을 대표로 나서 시원하게 긁어주는 시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애 대한 답은 다소 에두르는 식이나, 김광철씨의 대답은 두 가지 점에서 아주 명쾌합니다. "영화를 보지 않고 포스터를 만들 수 없다. 영화 해석의 자유는 우리 디자이너 들에게 주어져야만 한다." 마치 얼마 전 발매된 음반 디자인 그룹 힙노시스의 고백, 혹은 마니페스토와도 비슷하게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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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미래를 예측할 것인가 - 역사 속 시그널을 읽으면 미래가 보인다
자크 아탈리 지음, 김수진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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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예측하는 것과 예언하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이성에 의한 계몽을 강조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간은 정체불명의 권위에 기대어 불확실한 미래상이 어떤 양상으로 펼쳐질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무려 19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간헐적으로 수상술과 점성술이 큰 유행을 타기도 했다는 저자 아탈리의 지적은, 우리가 의지하는 이성과 과학의 권위가 얼마나 짧은 연혁만을 지녔는지 새삼 실감케 합니다.

"불행으로부터 보호 받으려면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수밖에 없다." 애처롭게도 무기력하고 어처구니없을 만큼 무대책으로 남았던 건 비단 저들 서양인들의 사정뿐이 아닙니다. 우리 동양인들도 겉으로는 괴력난신을 이야기하지 않고, 현세에서의 삶에 최선의 집중을 다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자연에 치성을 드리고 조상신에 의지하며 현재의 난국을 헤쳐나가려 안간힘을 썼을 뿐입니다. 그나마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은 이런 미신, 초자연적 이치에 관심을 가지는 이가 적고, 가능한 한 합리적인 방식으로, 입수한 정보에 의거한 논리적 결론을 내리려 다들 애쓰는 모습입니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말은 간단해 보여도,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인지만 명쾌히 정해도 세상사 의문이 상당수 해소된다는 건 두 번 강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개는 비슷한 패턴으로 되풀이되는 게 세상사이기에, 인과를 확정할 수 있으면 미래사의 상당수 예측이 커버 가능합니다. 아탈리가 드는 예는 레온티예프의 "자료의 평행진화"입니다.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는 건 미래 중에서도 재화와 물질의 향배입니다. 연이어 저자는 레옹 발라와 케인즈의 업적을 평가합니다.

저자는 폰 노이만이 창안, 촉발한 연산 방식의 혁명을 잠시 거론하다, 미래구조연구, 변동확률연구, 상관관계 연구 등 경제학의 세 방향을 지적하며 인류의 지성이 필사적으로 더듬어 온 결정적 미래 변수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독자들에게 환기합니다. 사실 주식시장, 원자재 시장, 경기의 장기 변동 등만 훤히 꿰뚫으면 사람은 미래에 대해 불안한 시선을 비출 이유가 없습니다. 안정되고 고립된 낙원 같은 무인도에서 평생을 거주할 보장만 있으면 사람은 미래뿐 아니라 그 무엇에 대해서도 지혜를 짜낼 동기가 안 생깁니다. 단 무인도를 최초로 차지하는 자들에게는 각별한 용기와 지혜가 필요했을 텝니다.

감정적 예측과 계획적 예측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게으름은 예측에게 최악의 적이다. 반면 예측은 자유의 최고 동맹이다." 길어야 백 년인 인간의 삶에 있어 기이하게도 영생이나 염두에 둔 듯 우리는 끝없이 미래를 알기 위해 애 쓰고, 그 미럐를 예측하는 능력을 동료(인간들)로부터 인정 받기 위해 분주합니다. 미래의 성공적인 예측도 좋으나, 우리는 그에 앞서 무엇이 본질이고 곁가지인지 선명히 규정하고 자신을 반성적으로 회고하는 철학적 존재입니다. 존재 규정과 미래 예측이 합리적으로 결부되어야 비천한 생존 모색 과정에 매몰된 미물의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이 대석학은 예리하게 충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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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신이 되는 날 - 싱귤래리티가 인류를 구한다
마츠모토 데츠조 지음, 정하경.김시출 옮김 / 북스타(Bookstar)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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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책입니다. AI의 성과가 고대의 신탁처럼 기능할 수 있는 세상. 그런데 일단 특이점에 도달한 후 인류의 삶이 이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라니요.

AI가 문명의 기초를 위협할 수 있다는 예측은 꼭 상업적인 SF 영화에서만 나온 게 아니라, 예컨대 스티븐 호킹 같은 정통파 석학들도 (전공 분야는 다르지만) 간헐적으로 몇 마디씩 한 적 있습니다. 도구로서의 AI가 일상의 다양한 분야에 요긴히 쓰일 수 있다는 전망은 총론으로서는 드물게 나오는 편인데, 이는 아직도 어떤 패턴 어떤 개념의 AI가 상용화 실용화될지 분명한 전망이 서지 않아서입니다.

한편 인공지능의 진단이 마치 신탁처럼 취급되며, 실체를 알 수 없는 권위(그 누구도, 어떤 경로로 그런 결론이 도출되었는지 모르기에)에 의해 휘둘리는 사회를 상정하며 음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이들도 있었는데 저 개인적으로 대중서를 통해 접한 범위에선 주로 일본 학자들의 의견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책 저자는 방향성을 다르게 잡은 셈입니다. 방향성도 다를 뿐 아니라 상상의 전개 폭도 훨씬 넓습니다.

저자는 나이가 지긋한 중견 기업인이며 직종도 컨설팅 분야이지만, 마치 망가를 즐기는 오타쿠라든가 천진한 중학생처럼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는 필치입니다. 제 주위에는 "너무 황당한 논의 아닌가" 같은 반응도 있었습니다만, 논의의 단계가 넘어가는 모습이 흔한 잡담과는 달리 치밀한 상상(논거까지는 아니라도)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습니다.

AI가 지배하는 디스토피아(마치 영화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이 장악한 미래처럼)에서도 소수의 인간이 반란군을 조직하여 과거의 자유를 꿈꾸는 몸부림을 벌인다... 이는 인공지능의 위력을 과소평가한 빈약한 공상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빈틈없는 논리연산체계를 구축하고 완벽한 추론 능력을 갖춘 그들에게 통치력의 누수지점은 없으며, 이런 그들이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인간이라는 종에게 보호 장치를 통해 근근한 생존을 가능케 하거나, 절멸시키거나, 아니면 다른 계로부터 도달한 또다른 AI에 의해 멸망한다거나 하는 세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게 그저 기계적으로 경우의 수를 나눈 게 아니라, 그가 경영인으로서 관측한 현 시점의 AI의 기술적 완성도를 놓고 추론한 결과이므로, 예컨대 그들(?)이 레지스탕스의 봉기를 허용하는 시나리오는 과감히 배제도 할 수 있었던 거죠.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공산주의라는 이념 체계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목표를 전혀 달성 못 한 채 현실의 비능률과 자체 모순에 의해 붕괴했습니다. 저자는 일각에서 이는 "기본 소득제" 옹호를 놓고, 인공지능이 초래한 일자리 감소가 전혀 의도치 않게 공산주의 사회의 원형에 사회 구조를 수렴케 하는 결과를 낳는다고도 합니다.

저자는 흥미롭게도 과거의 종교사를 잠시 개관하며, 어떤 경위로 종교라는 신념 체계가 발흥했으며 어떤 이유로 현재의 거대한 4대 종파가 살아남았고, 역사상의 어떤 고비를 넘다 교세가 쇠퇴하거나 반대로 급격한 발전을 보았는지에 대해 잠시 되짚습니다. 여기서 제가 흥미롭게 본 건 불교에 대한 개관이었습니다. 불교는 일체의 종교 허례 허식을 배제하고, 만사가 공(空)이라는 초월적 결론으로 신도를 이끄는 매우 고차원적이고 소수 엘리트의 입맛에 맞을 만한 교리를 내세웠으나, 그만큼 일반 대중에게는 진입 장벽이 높았다고도 합니다. 이러던 게 이슬람 교 무장 세력의 침략으로 사원과 승려와 경전이 대거 파괴, 사상(死傷), 소실되어, 인도 아대륙에서는 교세를 잃은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고 하네요. 기존의 정설과 크게 다른 점은 없으나 강조하는 포인트가 미묘하게 다른 점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저자가 느닷 종교를 끌어대는 이유는 뭘까요? AI가 바로, 인간의 내면이 끊임없이 갈구해 온 종교적 욕구를 풀어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AI는 첫째 현세의 의문을 놓고 그 압도적인 정보 처리 능력으로 상당 부분을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현세 기복에 대해서는, 어차피 고등종교가 이 needs를 해결 못하고 그저 정신적 위안에 그치는 현실에 비추어, 일정 신뢰만 마련되면 넉넉히 종교를 대체하리라 봅니다. 그럴싸한 추정입니다.

저자는 또한 현대 문명이 근본적인 모순점을 안고 있다 봅니다. 현재까지는 요행 혹은 파멸에의 두려움 때문에 전면 충돌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나, 핵무기란 인류라는 종의 기본 생존을 위협하기에 충분한 거대 변수, 아니 상수입니다. 뿐 아니라 민주주의, 자본주의 역시 정치적 포퓰리즘, 자원 배분 구조의 취약점 때문에 과연 올바로 지속될 수 있을지 큰 의문과 우려가 생기는 형편입니다. 이런 모순과 위기는 현생 인류의 지혜로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이며, 사적 욕망도 없고 감정에 흔들릴 가능성도 없는 AI가 올바른 해법을 도출해 줄 것으로 저자는 기대한다는군요.

AI가 미래를 지배하게 된다면, 이 산업이나 학문 영역에서 주도권을 쥔 국가가 미래를 주도해 나가는 게 당연합니다. 그 유력 주자로 저자(다시 강조하는데, 일본인입니다)는 중국을 꼽습니다. 전망이 불확실한 각종 산업에의 투자는 민간에 그 시행과 도전의 기회, 성공의 과실과 실패의 리스크를 전가할 수 있지만, 이런 중추적 과제는 전국의 영재(얼마나 인구가 많은가요)를 뽑아 단일 기관에다 체계적으로 배치하여 연구를 진행시킬 수 있는 중국이 현재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점입니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고, 이 이슈와는 무관하나 최근 원숭이 복제를 성공시킨 뉴스가 전파를 타기도 했기에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AI가 인간의 두뇌 기능을 대신하면 과학을 포함 모든 지적 영역에서 인간은 물러나는 수밖에 없고, 대신 육체를 이용한 활동이 새로이 주목받으리라고 전망합니다. 문명이 대뇌 피질상의 진화를 통해 도약을 겪은 이래 정반대의 방향 전환을 맞는 셈이지요.

ㅎㅎ 너무 과감한 상상과 추론이 잔뜩 펼쳐지지만, 어떤 건 정말 공감되기도 했습니다. 사람은 보수뿐 아니라 일에서의 성취감 때문에 그 직무에 전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특히 과학이나 공학 쪽에서 하는 일마다 판판이 AI보다 저성과를 낸다면, AI가 다가와서 "넌 그거밖에 못하니?"라며 무시하지는 않겠으나 당사자의 모멸감이 얼마나 크겠냐는 겁니다ㅋㅋ. 총이 무장 수단으로 일반화되었을 때 검술의 대가들은 사회의 주류에서 완전히 밀려나 좋았던 과거를 회상하지만, 감정적 선호를 목청 높여 표시한다고 시대의 도도한 흐름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거죠. 어떻습니까?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근본 결함"에 대한 견해도 경청할 가치가 있었습니다. 과학책도 아니고 경영 서적도 아니지만, AI가 부른 거대 체제 담론상의 시끄러운 동요에 대해 한번 조감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네요. 이 저자의 주장을 추종하라는 게 아니라, 이 발랄한 주장을 경청하고 독자들이 각자 자신의 생각을 따로 발전시킬 촉매제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중지(衆智)가 모아지면 세상은 더 살만한 곳이 되어 가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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