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경제학 -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생활밀착형 경제학 레시피
유성운.김주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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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라고 하면 그 처음부터 끝까지 난해한 수식과 도표의 장구한 행진일 것만 같아도, 그 실상은 평범한 개인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수없이 많은 선택과 결정들의 합리적인 진행을 돕는 매뉴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매뉴얼이나 계획안에의 충실한 의존만으로 언제나 최상의 결과가 나오지는 않아도, 충동과 감정에만 쏠린 어리석은 행동을 피할 수는 있다는 점에서, 원리와 원칙은 언제나 유익한 플랫폼입니다. 또, 원리가 도출되는 과정을 면밀히 살피면,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상식의 범주 안에 드는 것들이 대부분, 아니 절대다수입니다.

이런 원리와 법칙들을, 우리들 대부분이 관심과 애정으로 지켜봐 왔던 연예인들의 부침사나 우여곡절, 성공담과 스캔들에 빗대어(적용하여) 설명한다면, 경제학 소양이 전혀 없는 평범한 독자 입장에서 꽤나 재미있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사실, 독자들이 정말로 일상에서 겪는 예를 들어 설명하면, 머리는 수긍해도 가슴이 맹렬하게 거부하던 저마다의 아픈 기억이 해당 교훈과 결부되기 때문에, 오히려 반감만 키우고 그냥 넘어가는(=해당 원리를 결국 이해 못한 채 남겨두거나 종래의 오해를 교정 못하는) 일도 잦습니다. 서술을 너무 "생활밀착형"으로 진행해도 효과를 못 보는 책들이 이래서 나오는 거죠.

그러나 멀찌감치 떨어져 그저 환상과 선망의 대상으로만 남는(남아야 할) 연예인들의 사례에 견주는, 이 책과 같은 설명이라면 대개는 (특히 아재팬들 사이에서) 공감과 의견 일치가 잘 이뤄집니다. 오빠부대와 달리 삼촌팬들은 특정 그룹에 대한 충성도가 약할 뿐 아니라(읽어보니까 저자분들- 한 분은 중견기자, 다른 한 분은 데이터 엔지니어-도 마찬가지, 아니 더하더군요ㅋ) 서로 다른 팬덤 사이에서도 상호 이해와 교감이 비교적 잘 이뤄지는 편이니 말입니다. 저자 두 분은 책에서 대개 소녀시대 팬의 관점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이어가지만, 소녀시대 팬이 아닌 독자들도 얼마든지 책의 기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건 이 때문입니다. 아재들에게는 정치 이야기만 안 꺼내면 대개는 바보 같은 싸움이 잘 안 나는 편이죠.

제목이 "걸그룹 경제학"이니만치 정말로 95% 정도는 걸그룹 이야기만을 논의의 단초로 삼습니다. 보이밴드 이야기도 가끔 나오고, 정말 가끔이긴 해도 정치 이야기 역시 등장합니다. 지난 조기 대선에서 승자가 된 문 대통령이 이 책을 읽어 줬으면 한다는 소박하고 솔직한 바람도 표현되고, 우회적인 표현이나 행간의 뉘앙스로 정치 현실에 대한 풍자도 간간히 이뤄집니다. 앞서 말한 대로 경제학이란 비합리적이고 후회가 따르는 선택을 사전에 가급적이면 피해 보자는 취지로 고안된 학문이니만치, 현실에서 자주 목도되는 우행의 여러 패턴에 대한 (언론인다운) 비판이 끼어드는 건 주제나 기획 의도에 비추어서도 당연하긴 합니다.

문 대통령에 대한 호감이 서술 대목 곳곳에서 드러나긴 해도, 예컨대 pp.67~77에서처럼 "자유 경쟁"에 대한 옹호가 선명하게 주창되는 등 마냥 진보적인 기조를 유지하는 건 아닙니다(하긴 걸그룹 삼촌팬들이 쓴 책에서 너무 진지하길 기대하기란...). 다만, 어느 챕터 중에서도, 그 예시 사항이 다양한 영역에 걸친 것들이라(저널리스트 특유의 장기가 드러나는 대목이죠) 지루하지도 않고 (이런 이슈에 그리 밝지 못했던 독자들에게라면) 상식도 읽어가며 덩달아 늘겠다 싶었습니다. "메기 효과"를 설명하면서 1) 1998 대일 문화 개방 조치, 2) 이케아 상륙 후 오히려 더 높아진 국내 가구제조업체의 경쟁력, 3) 카카오뱅크 돌풍 이후 국내은행들의 수수료 인하 경쟁 등 다방면의 예증을 시도하는 게 특히 그렇습니다.

링겔만 효과를 설명하면서 한 그룹에 무작정 (개개인으로서 다 뛰어나기는 한) 여러 맴버를 투입만 한다고 그에 비례하여 팬 수나 음반, 음원 판매량이 늘어나지는 않는다는 예거가 흥미로웠습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1) 동기부여의 문제 2) 역할 조율 문제 두 가지로 비효율의 원인을 세분하는데, 본디 경제학의 묘미는 사실의 건조한 기술에 그치는 게 아니라 동인의 세분화한 분석을 절묘하게 이어가는 데에 있죠. 예컨대 왜 가격이 내려가면 수요가 증가하는지를 놓고서도, 대체 효과와 소득효과를 준별하듯이 말입니다. 이 현상은 한계생산 체감의 법칙으로도 일단 커버가 가능했겠지만, 저자들처럼 링겔만 효과를 거론하는 편이 훨씬 논의가 풍성해지고 설명력도 강해지는 것 같네요(동시에, 걸그룹이나 축구 국대에서 왜 스타들 간에 화학적 결합이 잘 안 이뤄지는지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뒷담화"가 가능하고 말입니다).

마이클 포터의 포지셔닝 이론을 원용하며, 선명한 개성을 대중에게 부각한 걸그룹이 (멤버 개인의 기량과 매력과는 원칙적으로 무관하게) 시장에서 더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결론도 흥미롭습니다. (이 이론과 대립하는 "케이버빌리티 파"를 또렷이 거론해 주는 것도 센스네요) 단 과도한 컨셉, 잘못된 포지셔닝은 그저 대세 추종 전략보다도 훨씬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주장은, 해당 전략이 "어디가, 왜 과도하고 잘못되었는지, 시대를 어느 정도나 앞서갔다는 것인지"를 명확히 짚지 않아, 흔한 결과론에 머물렀다는 아쉬움도 들었습니다. 하긴 이 파트에서 예거된 어느 걸그룹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가는 필경 정치 논쟁으로 빠져들기 십상이니 저자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겠다는 짐작도 들긴 합니다.

파레토 법칙이 걸그룹 판도, 시장이라고 해서 적용 안 되는 예외가 아님을 저자들은 짚고 넘어가는데, 데뷔를 한 걸그룹들은 우리가 일일이 꼽거나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많지만 절대 다수가 미미한 인지도로 고생하다가 누구의 뇌리에도 못 남고 해체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상기하게 됩니다. 실제로 TV 예능 프로를 보다 보면 진행 보조 역할 비슷하게 양념처럼 등장하는(아니면, 책 후반부에 언급되는 일선 군 부대 공연 전문인) 몇몇 젊은 여성들이 있던데 상당수가 걸그룹 단위로 활동하는 이들입니다. 이들 중 몇몇은 이후 큰 무대 데뷔에 성공하기도 하고, 그룹 컨셉화의 패착이나 이미지 노후화 등의 이유로 다시 개별 멤버 레벨에서 재도전 재발견 기획에서 스타로 떠오르기도 하지만, (80%가 아니라 거의) 98% 이상이 꿈을 못 이루고 쓸쓸히 퇴장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책 후반부에서, 저자들은 "일반인의 일상으로 복귀했다고 해서, 아직 젊은 그녀들의 선택이 딱히 실패라거나 잘못되었다는 동정, 판단을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라며 괜한 고정관념을 버릴 것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타당하죠.

경제학의 가장 주목 받는 분야 중 하나가 게임이론입니다. 존 내쉬 등이 1994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고, 2002년에는 그의 생을 소재로 삼은 영화가 오스카에서 성과를 거둠으로써 일반에게도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죠. 저자들은 몇 년 전 이른바 "컴백"을 앞두고 라이벌이라 할 만한 상대 그룹의 동정을 살피다가 결국 전략적으로 연기할 것을 결정한 기획사들의 예를 들며 "죄수의 딜레마"를 설명합니다. 죄수의 딜레마는 개개인(플레이어)들이 자신의 고립된 이익 극대화를 꾀하다가(그 나름으로는 합리적 선택) 결국 최선의 균형점을 피해가고 만다는 결론인데, 이 경우는 두 기획사가 모두 "연기"를 택함으로써 현명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했다는 평가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최상의 균형점은 "간격을 둔 순차 컴백"이지 기약 없는 연기 결정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조금 동의하기가 머뭇거려집니다.

p247에서는 빅맥지수를 설명하며 왜 걸그룹의 활동주기에만 7년차 징크스라는 게 끼어드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이 나옵니다. 이는 저자분들 스스로 솔직히 털어놓길, 주제(걸그룹)에 대한 애정과 "덕력"에 올라앉아 자연스럽게 빠져든 고민이라 더 집요하게 분석도 되고 그 과정이 즐겁기도 했다는 고백이, 매 문장마다 뚜렷이 그 진정성이 (특히)드러나는 파트이기도 해서, 읽으면서 여러 번 웃음이 나왔습니다. 저자들이 이르게 된 결론은 그룹의 1인 집중도가 얼마나 낮으며 고르게 비중이 분포되었느냐와 결정적 상관관계가 있다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최후통첩게임 이론으로도 아주 자연스럽게 논의가 넘어가는데, 지금 이 글을 쓰는 중에도 TV에서 모 맥주 광고에 A그룹 S양이 등장하는 터라 묘한 감흥을 주는군요.

S 기획사에서는 소속 연예인(특히 걸그룹과 보이그룹)들에게 절대 주류 광고에 등장하지 말것을 철칙으로 삼는다는 서술에서, 저자들은 장난스럽게 "그럴 만도 하겠다"며 뼈 있는 한 마디를 곁들이는데, 이는 아마도 몇 년 전 빈발했던 과실 특정 위법 사실(저도 이렇게만)을 염두에 둔 듯합니다. 근데 그런 범주의 위법(과실)은 그 회사 연예인들만 저지른 건 아니라서.... 걸그룹이 피크를 지나 점차 쇠락하는 과정을 정치인의 레임덕에 비유한 건 좀 그렇기도 했지만 여튼 읽으면서 재미는 있었습니다. 이 대목은 본문 텍스트에 마냥 따르기보다는 p230의 언급량 순위 도표를 직접 보고 독자들도 자신만의 결론을 내 보는 게 훨씬 흥미로울 수 있겠네요.

"프로듀스 101"은 이 책 여러 챕터에서 다양한 이슈 설명의 근거로 자주 등장합니다. 저자들은 실제로 투표에 참가도 하고 지인들과 열띤 대화의 소재로 삼기도 해서 이 프로그램에 대한 여러 감회가 (아직도) 남아 있나 봅니다. 좀 억지다 싶은 대목도 있었으나 여튼 프로그램 하나를 갖고 이처럼 다양한 논의의 단초를 끌어내는 게 대단했으며, 좋아서 하는 일에는 능력의 한계를 거론할 필요가 없다는 진리도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걸그룹은 대중성, 보이그룹은 덕후성"이라는 결론에까지 흔쾌히 동의한다면 그 독자는 이 책을 최고의 효율과 몰입도로 읽어낸 것입니다. 책 말미에 실린 "걸그룹 세력도"는 물론 실제 지정학 판도(?)를 반영한 건 아니고 단순 면적 환산일 뿐입니다만 십 년 간 어떻게 시대의 선호와 트렌드가 변했는지 한눈에 살필 수 있어서 한동안 넋놓고 주시했습니다. 쉽고 친근한 서술, 상식에 벗어나지 않은 편안한 논의가 술술 이어지는 재미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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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에코기술 교과서 - 전기차 · 수소연료전지차 · 클린디젤 · 고연비차의 메커니즘 해설 지적생활자를 위한 교과서 시리즈
다카네 히데유키, 김정환, 류민 / 보누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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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다카네 히데유키 저자가 쓰신 <친환경 자동차의 최전선>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친환경 기술이 적용된 자동차야말로 미래 모든 나라들이 자국의 시민 건강과 지구 환경 보존을 위해 선택이 아닌 필수로 도입할 유망 분야임이 틀림 없습니다. 인간은 또한 한정된 신체 능력 때문에 자동차를 "모빌리티 보강 수단"으로 고를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이 두 변수를 결합하면, 자동차 에코 기술은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기업에게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창의적 진로를 개척해야 하는 개인에게나 모두 초미의 관심사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 책의 후편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책은, 전편(?)과 달리 자동차 컨셉에 대한 논의를 생략하고(전작에서 충분히 다뤘으므로), 순전히 첨단 기술(물론 환경 친화적 범주에 속하는 것들)에만 논의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차에 관심깨나 기울이시는 많은 애호가분들도 기술의 각론으로 논의가 옮겨가면 많은 대목에서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자동차공학이 커버하는 범위와 응용 기술이 얼마나 다양하며 깊이를 갖습니까. 현기차 그룹 등에 근무하는 전문 엔지니어들이 다루는 분야를 다 알면 일반인과 전문가가 차이가 안 나겠지요. 아무튼 이 책도, 이론과 실제를 두루 통달한 진짜 도사님의 솜씨라서 읽으면서 공감도 많이 되고, 이런 현상은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하는구나 같은 각성의 소재도 많이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 저자님의 다른 저서들도 그렇지만 보누스의 모든 책들이 독자 눈높이에 맞춘 깔끔하고 화려한 편집으로 유명하죠. 이 책 역시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최대한 쉽게 풀어준 친절한 서술 방식도 고맙지만, 무엇보다 유익하고 (텍스트 내용에 적실한) 도판, 도해, 사진, 일러스트가 풍불해서 책을 넘기는 내내 그림책 구경하듯 눈이 즐거운 독서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기술 분야 서적은 대중서든 전문서적이든 도판의 보조가 없으면 내실 있는 학습이 불가능하다는 점 다시 확인하게도 되었고요.

지난 서평에서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만 지금 전기자동차나 하이브리드로 가장 앞서가는 공업국 중 하나가 중국인데, 시범 주행 과정에서 자동차 주행 특유의 소음이 전혀 나지 않아 오히려 교통사고의 위험이 높아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 적 있습니다. 보행자가 도로를 횡단할 때 아무리 보행자의 통행이 권리로 보장된 상황에서도 주위를 잘 살피게 되고, 시야가 커버 안 되는 곳은 청각의 도움을 입어 모든 정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게 이미 우리 몸에 밴 습관입니다. 헌데 갑자기 소음이 없어지면 도로변 거주자나 업무자, 학생 들은 조용해져서 좋겠지만 일단 보행자 안전 이슈도 다시 거론되는 게 자연스럽죠.

저자는 전작에서도 같은 원리를 강조했습니다만, 소음의 발생이란 기관이 웒활히 작동하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물리학의 기초 원리 중 하나가 에너지의 변환(와중에서도 총량이 보존된다는 원리)인데, 소리 역시 에너지 변환의 한 형태이므로 소음이 시끄러이 난다는 건 연료를 소모하여 발생시킨 에너지가 제 채널로 가질 않고 중도 손실이 그만큼 빚어진다는 뜻이죠.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휘발유가 가진 에너지를 최대한 구동력으로 만들기 때문에(p36)" 소음이 적어진다는 설명 역시 전작과 이어지며, 연비 절감이란 목적부터가 친환경 그랜드 컨셉의 일환입니다. 다만 토요타 프리우스의 경우 최상의 옵션으로 디자인되지는 않았으므로(뭐 당연하죠), 발생하는 주행음은 별개의 방음, 흡음 장치를 통해 해결한다고 합니다.

몇 년 전 희토류 때문에 중-일 사이에 큰 외교 통상 분쟁이 빚어지고 일본의 굴욕적인 패배로 마무리된 일이 있었죠. 특히나 하이브리드 차에 장착되는 엔진은 고성능 자석을 채용하므로 이 과정에서 반드시 희토류가 원료로 쓰여야 합니다. 희토류가 안 들어가는 현대 공업 픙프로세스가 거의 없음을 실감하는 대목인데, 그런 외교적 충돌이 빚어진 후에는 특히 일본 업계에서 희토류가 불필요한 모터 개발 연구에 따로 착수하여 현재 성과를 보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하이브리드에 쓰이는 모터는 자력의 원리를 최대한 채용했기 때문에, 기존의 엔진 구동 방식과 달리 기관과 부품 사이에 빚어지는 충돌, 마모가 최대한 회피되었다는 점에서도 차별화됩니다. 가솔린 엔진은 효율이 좋은 회전수 영역이 따로 있지만(이 점은 자동차 특히 신경써서 관리하시는 애호가들이 반드시 염두에 뒀었죠), 하이브리드의 모터는 그렇지 않아서 어지간해선 토크가 일관되다는 게 큰 장점 중 하나죠. 이 역시 운전자들이 자동차의 어떤 기능, 장점을 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사항인데, 현재 시대정신이 연비 등 에코, 환경 친화 쪽으로 굳었으므로 정부 정책, 규제 여부를 떠나 메이커들도 그쪽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베터리가 요즘 같은 추운 날씨에서 효율이 떨어지는 건 스마트폰이나 자동차나 다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저자는 가솔린 차의 경우 난방에 엔진이나 파워컨트롤 유닛의 열(부산물)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이 역시 주어진 에너지 변환 현상 그 한계를 최대한 선용하려 든 구 자동차 공학의 멋진 아이디어 중 하나였습니다), 하이브리드나 전기차는 난방에도 배터리 전력을 쓸 수밖에 없으므로, 연속 주행 거리가 크게 짧아질 우려가 있다고 합니다(p88). 참 궁색하고 난감하지만 결국 겨울에 난방을 자제해야, 도로 한복판에서 완전 방전으로 차가 멈춰서는 끔찍한 일을 피할 수 있다는 결론이죠. 이는 전기차가 태생적으로 지닌 구조적 약점이므로 (저자는 그런 말씀을 안 하시지만) 어떤 기술적 극복이 당분간은 힘들 것 같습니다. 책 좀 뒤에 보면(p96), 가솔린 차와는 달리 별개 차체의 배터리를 바로 연결하면 화재의 위험이 매우 크다고 합니다. (영화 아드레날린 속편의 한 장면이 생각나네요)

앞에서 자동차에 선호하는 기능, 특장이 시대에 따라 다 다르다고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속도를 중시하는 운전자들이라면 이 전기차가 가솔린 차량에 비해 영 못하지 않냐는 선입견을 떨칠 수 없습니다. 당연히 그런 수요와 불만을 업계에서 모를 리 없고, 이는 모터의 성능 개선으로 어느 정도는 극복이 가능한 영역이므로 향후 좋은 소식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습니다. 2017년 기준(이 책의 장점은 이처럼 최신 업계 사정과 데이터가 반영된 것도 있습니다) 벤추리의 VBB(물론 일반에 파는 모델은 아니고요^^)가 기록한 576km/h가 최고라고 하는군요. 이 정도면 나머지 문제는 그저 운전자의 "기분 탓"일 뿐 유의미한 개선이 거의 완성 단계 아니겠나 싶습니다. 단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배터리 여럿을 세로로 탑재해 공기 저항을 줄인 데서 큰 덕을 본 건데, 구조상 우리가 일상에서 몰고 다닐 자동차를 저런 꼴로 제조할 수 있느냐는 조금 의문이 듭니다. 하긴 앞으로 자율주행이 보편화하면 과연 개별 운전자에게 속도를 즐길 상황이 얼마나 주어질지 의문은 듭니다만.

가솔린 차 많이 연구(?)하신 분들은, 공기가 스로틀(throttle) 밸브를 통과할 때 흡기 포트의 인젝터가 분사한(p156) 연료가 이에 섞여들어가서, 연소실로 들어간다는 점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이게 근 한 세기 동안 자동차 작동 원리에서 거의 불변의 진리, 상식이었는데, 책에서는 이제 에코카 컨셉의 새로운 시대를 맞아, 실린더 내 직(直) 분사 방식이 보편화할 것으로 예언, 선언합니다. 이런 걸 보면 한 시대의 특정 국면 개성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예를 구경하는 셈이라 감개무량하기도 하죠.

이런 직분사 방식은 기화열(물론 기체가 액체로 바뀌면서 주위의 열을 흡입하는 과정입니다)로 연소실 내부를 냉각하기 때문에, 덤으로 노킹까지 방지된다고 합니다. 반면 기존의 포트 분사는 연료를 더 분사해서 냉각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이중으로 연료가 낭비되죠. 이건 역시 지난시절에는 기술의 한계 때문에 "원래 그런 것"하며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사항이었는데, 기술의 근본 혁신이 일어나고 그랜드 컨셉 자체가 바뀌니까 마치 부산물처럼 자동 해결 방법이 찾아지는 놀라운 현상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책에서는 직분사의 경우 인젝터의 반응성과 정확성이 높아야 하기 때문에 "생산 비용"이 높아지는 면이 있다고 하나 이는 그야말로 시간이 지나면 극복이 되는 이슈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저런 인젝터의 고성능이 "뉴 노멀, 새로운 표준"으로 당연하다는 듯 자리할 겁니다. 미연소 흑연 잔량의 문제도 제가 듣기로는 기술적 해법이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현대는 일부 폐쇄적인 엘리트 전용의 의사 결정 구조 시스템이 아니라, 모든 시민과 소비자가 생산 과정에도 건설적 의견으로차 참여할 수 있고, 이런 절차를 거쳐 생산자 역시 시장의 니즈가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하며 소모적인 마케팅 비용도 줄여나가는 게 대세입니다. 깨어 있는 소비자와 시민이 입을 모아 친환경을 옹호하면서 기업과 정부, 정치인도 그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고, 그 작은 움직임이 모이고 모여 거대 산업의 지향점 자체를 이처럼 바꿔 놓은 거죠. 자동차 애호가라면 내가 모는 자동차의 내부 구조와 원리를 배워 가는 과정이 재미도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이유와 과정을 통해 친환경이 친환경이 되는 건지 근본 이치를 깨달아야 바른 실천이 가능합니다. 보누스의 이  시리즈는 그래서 똑똑한 소비자 되는 건전한 흐름에 바른 방법으로 참여하게 돕는 "유익한 교과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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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선집 - 종교개혁자 루터의 에센스 세계기독교고전 35
마르틴 루터 지음, 이형기 옮김, 존 딜렌버거 편집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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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다 보니 마르틴 루터의 사상과 종적을 되새기고 기념하는 책이 많이 나옵니다. 루터는 위대한 개혁가이고 사상가이기도 했지만 빼어난 문장력을 통해 주옥 같은 저술을 많이 남긴 문필가이기도 했는데요. 정작 그의 본거지였던 독일에서도 "전집" 출간이 아주 활발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존 딜렌버거 학장은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인데 오래 전에 루터의 전집 출간을 뜻깊게 기획한 분이고, 이 책은 그 일부를 한국어로 정성스럽고 정확하게 번역한 "선집"입니다(전집은 전집대로 있고, 이 책은 처음부터 "선집"의 성격으로 간행되었습니다). 그 두께도 상당하지만 폰트 크기도 꽤 작은 편이라서 완독하는 데 제법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번역은 이형기 교수님의 솜씨입니다. 워낙 저술, 변역 활동이 왕성하신 분이지만 어딘가 낯익다 싶은 느낌을 받는 분도 있을 텐데, 1994년에도 이 책은 제목을 달리하여 출간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다이제스트 社의 사명도 바뀌었고 이곳에서 출간하는 고전 시리즈도 산뜻한 디자인으로 새 옷을 갈아입는 중이라 새로 한 권을 소장하는 것도 뜻깊지 싶습니다. 예전 텍스트다 보니 예컨대 p16: 밑에서 아홉번째 줄을 보면 "아이제나하" 같은 표기가 눈에 띄긴 합니다(현행 표기법대로라면 "아이제나흐"). 외래어 표기법뿐 아니라 용어 사용례도 다소 예스러운 느낌이 드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정확한 옮김을 더 선호하는 편이라서 오히려 반가웠습니다.

본문(물론 마르틴 루터 본인의 저술) 중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고, 저자 서문에서도 다시금 강조되듯, 루터는 참으로 강직하고 한번 형성한 신념을 완강히 내세우는,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었습니다. 이런 인물들이 흔히 그렇듯, 적과 비판자를 많이 낳기도 했는데, 서문에서는 상세하지는 않아도 그런 적수들이 그에 대해 어떤 평을 했는지도 잠시 짚습니다. 저자의 평가는 그들을 신랄히 공격하지는 않아도, "이제는 교조적인 태도에 불과하다"는 정도로 평가합니다. 돌려말하면 "판에 박힌, 이미 설득력을 잃은(루터 지지자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재반박됨으로써)" 지적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뜻이죠.

신학의 본고장에서는 구교든 신교든 혹은 제3진영이든 과거의 낡은 공방은 이미 발전적 타협이나 상호 승복이 많이 이뤄진 편이고, 대립보다는 화해와 포용이 더 강조되는 분위기이며 이 책도 그런 기조를 상당 부분 반영합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예컨대 칼 바르트 같은 이가 "독일 특유의 이교적 돌출로서 20세기의 히틀러 숭배 현상과 비견할 만한" 같은 언명을 한 건, 읽으면서 매우 당혹스러워지는 대목이었습니다. 이런 언사가 지나치다는 건 두말할 나위 없지만, 한편으로 당시의 종교개혁이 민족주의적 색채를 일정 부분 반영했다는 일말의 진리를 분명히 지적한 셈이니 말입니다. 물론 책의 기조는 (당연히) 극단적으로는 이런 견해도 있다는 정도의 취지입니다.

루터는 그저 자신만의 단색적 확신에 가득찬 평면적 지성에 그친 인물이 아니라, 대단히 명료하고 논리적인 사고로 기독교 신학에 커다란 방법론적 기여를 남긴 천재형에 가까웠습니다. 예컨대 그는 교황청 측과 오랜 공방을 거치면서 논박하기를 "교회가 성경과 동일한 위계의 권위를 갖지 못할 뿐 아니라(이른바 sola scripta), 그 공의회 문서라는 것들도 서로 일관성을 지니지 못하여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폅니다. 물론 문헌이란 문언(Wortsinn) 자체만 놓고 볼 게 아니라 그 맥락과 해석을 어떻게 파악하는지가 또한 중요한데, 상대의 주장을 공박하며 자체 모순을 지적하는 건 그가 광폭의 지지와 설득력을 얻어가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질이었습니다.

편자 딜렌버거 박사는 루터의 저술을 현대적 의의로 해석함에 있어(해석일 뿐 아니라 독일어에서 영어로의 번역이기도 합니다) 루터 고유의 용어례를 여러 다른 개념으로 적절히 치환하여 수용할 것을 권하는데, 이를테면 "칭의"보다는 "은혜"와 "자유"로 바꿔서, 혹은 확장하여 받아들이자는 제안 등이 그렇습니다. 이런 제안은 본문이 아니라 편집자 각주(이 책의 원주)에서 등장하는데, 물론 본문 격인 서문도 딜렌버거 박사 본인의 저술이므로 그 기조는 서로 같습니다. 이에 대해 찬반 양론이 갈릴 수 있지만, 루터 역시 성서 그 자체의 권위를 지닌 위인은 아닌 만큼 후대인들이 얼마든지 시대 상황에 맞게 포용적으로 재해석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편집자의 주장에 찬성하는 바입니다.

서문은 이 선집 출간 기획을 주도한 딜렌버거 박사의 서문도 있고, 마르틴 루터가 생전에 이미 나왔던 라틴어판 "전집(물론 자신의 저술)"에 붙인 서문도 따로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그 유명한 라이프치히 토론의 맞수였던 에크(에키우스)의 태도와 거동에 대해 개인적 평가와 회고를 잠시 펼치는데, 개인적 만남이나 토론장에서의 공식적인 회동에서나 그에게 그리 좋은 인상은 못 받은 듯합니다. 여튼 그는 토론에서건 한 인간으로서 당당한 처신으로건 신학적 입장의 완결성에 관해서건 자신의 승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딜렌버거 박사가 루터 저술 속의 "자유"가 뜻하는 바에 대해 간략하고 간접적으로나마 재정립의 의도를 표현했지만, 루터 본인이 "과연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명료하고 시원하게 답한 논문도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또한)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루터 자신도 메타적으로 언급하듯 이 두 문장은 외연상 서로 모순되는 언명입니다. 허나 이미 루터의 사상(나아가 그리스도교 전체의 노선)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이 두 명제가 전혀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신묘한 일치를 이룸을 잘 납득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적절하게도 빌립보서(이하, 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 2장을 인용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과 종의 형상을 입은" 자유자이자 동시에 종이었다며 자신의 결론을 보다 선명히 밝힙니다.

루터는 위대한 주석가이기도 해서 기독교 성경 본문에 대한 그의 해석과 설명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고 학습의 주요 참조 교재 노릇을 합니다. 그가 신도와 독자들에게 특히 주목하기를 청하는 세 요소는 첫째가 믿음이요 둘째가 그리스도, 셋째가 전가(轉嫁. imputation)입니다(p159). 마지막 요소 "전가"에 대해서는 책 저 앞 p49, 라틴어 전집 서문에도 잠시 언급됩니다. 이 세 요소가 서로 따로 떠돌아서는 안 되며, 언제나 참된 믿음 안에 하나로 결합해야 함을 그는 누누이 강조합니다.

이성이 권위와 무지몽매를 극복하고 대중의 계몽으로 나아갈 것을 주창하던 시대 또 한 명의 거물이었던 에라스무스(에라스뮈스. 이하 이 책의 표기를 존중합니다)와 주고받은 공방, 혹은 루터가 일방적으로 그에게 퍼부은 날선 공박도 이 선집에 실려 있습니다. 편집자도 수시로 상기시키듯 뛰어난 지성을 지닌 에라스무스였지만 교황이나 황제, 혹은 귀족들과의 대립각 세우기를 매번 회피해온 게, 온순한 성정을 타고난 그의 선택이었습니다. 물론 강한 권세와 무력을 지닌 진영뿐 아니라 붓으로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한 루터 같은 매서운 논객과의 대립도 그는 가능하면 피하려 들었는데요, 이 논문은 소극적 자세로 일관하는 그에 대해 자존심을 정면으로 자극하여 논쟁의 장으로 유도하고, 나아가 썩은 구체제의 혁파 대열에 동참할 것을 권하는 목적이었겠습니다.

여기서 그는 형식상으로 에라스무스의 저술 <자유의지론>에 대한 논박 구조를 취하며 준열하게 자신의 논지를 전개합니다. 본디 "누구의 어떠한 책에 답하다" 같은 포맷은 고대 그리스 이래 뛰어난 사상가들이 즐겨 취해온 저술의 한 형태입니다. 특이하게도 이 논문의 제목은 "노예 의지론"인데, 물론 노예에게 의지가 있을 리 없으므로 신랄한 패러디 기법의 일환이겠습니다. 마치 마르크스가 푸르동의 책 <빈곤의 철학>에 대해 <철학의 빈곤>을 써서 통박한 사례나, 하이에크의 <노예에의 길>에 얽힌 전후 사정도 함께 떠오르는 듯하고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확신에 찬 주장을 기뻐하여야 한다!"라든가, 로마서 10장과 마태 복음을 인용하며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confess)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며" 같은 문장에서의 "시인"과 이를 같은 맥락으로 연결합니다. 책에는 그런 말이 안 나오지만 관련 구절에는 "(반대 개념으로) 부끄럽게 여기며"도 나오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확신이 부족하면 이는 곧 자신의 믿음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뜻(시인?)이나 마찬가지라는 함의도 은근 담는 구절입니다. 루터의 숭고한 확신은 물론 존중되고 높이 받들어져야 마땅하나, 이를 현대인의 여타의 비 신앙적 지적 소통과정에 무비판적으로 도입하는 것도 또한 매우 곤란한 일입니다.

루터 하면 또 야고보서에 대한 회의적 태도가 유명하죠. 이와 관련 그는 저술에서 "이전에 나는 야고보서를 거부하였지만 이제는 높이 평가하며 가치있는 것으로 본다"고 표방하여, 혹시 (그럴 리가 만무하지만) 이 문장이 일종의 recantation이 아닐까 잠시 눈을 비비고 열독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니었고요. 그는 근본적인 입장의 수정 없이 "사도적 입장의 저작으로 볼 수 없다"는 선언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여러 교양서에서 읽어 알듯, 그는 이 책이 칭의를 "행위"에 의한 것으로 돌리는데 이는 성서의 다른 교의와 상치된다고 판단합니다(물론 그의 입장이며, 현재는 프로테스탄트 쪽에서도 많은 견해와 해석상의 변화가 자리잡았습니다). 둘째로 그는 이 책이 부활, 수난, 성령에 대한 가르침이나 그 어떤 회상을 담지 않았다고 비판합니다. "어떻게 고립된 이 한 사람의 기자(記者)가 성서 전체와 바울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라며 포효하는데, 솔직히 사도 야고보가 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바빌론 유수(이 책에서는 "포로"라는 표현을 씁니다)를 빗대어 루터는 로마 교황청의 성경에 상치되는 독단적 교리가 믿음의 성도들을 타락하고 사악한 로마의 포로가 되었다는 뜻으로 준엄한 비판을 내놓습니다. 물론 이보다 앞선 시기에 있었던 "아비뇽 유수"도 같이 떠오르죠. 이 글에서 루터는 로마 교회의 7성사를 조목조목 비판하며 그 타당성과 권위를 공격하는데, 바로 이 과정에서 야고보서 5:15가 언급되며 이 범위 안에서 그가 야고보서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도 마련되지 않았겠습니까.

세속의 권세에 대한 복종의 문제는 참으로 민감한 이슈입니다. 편자 서문에서도 언급되지만 그는 농노 해방이나 사회적 계급 철폐에 대해서는 단호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는데, 편집자의 해설(또, 우리 시대의 중론이기도 하지만)로는 사회에 전적인 무정부상태가 도래하는 결과를 막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어떤 진리가 앞에 놓여 우리의 눈을 밝히는 건 물론 엄청난 축복이지만, 어디까지가 정의와 자유를 위한 확신이며 어디서부터가 광신, 독선인지 판단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루터의 지혜가 가득 담긴 이 책이 우리에게 그런 한 이정표를 마련해 주길 기원하며, 먼저 어리석은 우리 자신들의 정신이 개안(開眼)되어야 마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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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서문
버크.베카리아.니체 외 27인 지음, 장정일 엮음 / 열림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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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이 위대하다고 해서 반드시 본문(과 결론)까지 위대하라는 법은 없지만, 서문이 시원찮으면 그 뒤의 내용은 읽어볼 필요도 없이 무가치한 내용이라는 게 이 책 편자 장정일 작가의 주장입니다. 장정일 작가는 그간 많은 독자(열혈 독서가이기도 한 자신을 포함하여)들이, 서문은 상대적으로 소홀히하고 본문에만 치중한 독서를 하지는 않았는지, 지도(map이든, 혹은 guide이든[한자로는 서로 다르지만]) 없이 무작정 모험에 뛰어드는, 그래서 극적인 감흥보다는 오독이라는 함정에 빠질 위험이 무척이나 큰 여정을 자초하지는 않았는지, 더 즐거운 여행("독서")과 더 진지한 탐독에의 길을 권하기 위해 이 책을 펴낸다는 취지를 밝힙니다. 물론 이 책의 "서문" 중에서지요. 이 "서문"은 그간 왜 장정일 작가의 신작 신저 활동이 뜸했는지에 대해서도 약간의 암시를 그의 팬들에게 줍니다.

장정일 작가에 의해 선정된 여러 "빼어난 서문"들은, 그저 서문이 빼어나다고 해서 뽑혀 나온 게 아니라 그 서문이 담긴 책 자체가 위대한 명저라서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책을 이끄는 단서, 비밀번호가 얼마나 그 본체의 위대함에 걸맞게 위대하게 쓰여졌는지를, 이 책을 읽고서 확인해 보라는 뜻입니다. 이 책이 그 서문들이 실린 위대한 저작은 모두 30권인데, 이름난 고전들이긴 하나 역시 우리 독자들이 제목을 들어봤다는 사실만으로 잘 안다고 착각하고 넘어간 저술들이 꽤 많을지 모릅니다.

책을 읽으며 놀란 건, 어느새 이런 위대한 저술들이 한국어로도 꾸준히 번역되어, 장정일 작가 같은 분에 의해 "발견, 편집"되어 이처럼 책 한 권으로 그 서문들이 엮일 정도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번역자들의 면면도 뛰어난데, 독서 환경이 이쯤이나 갖춰졌는데도 여전히 고전들이 미답 미독 상태라면 그건 독자의 게으름을 어지간히 타매하고도 남을 만하다 하겠습니다. 이 책은 편자의 의도대로 위대한 서문이 얼마나 그 본문을 잘 요약, 예고, 압축하는지"를 확인하는 의의도 있겠지만, 채 읽지 못한 고전들의 흥미진진한 teasing을 즐기고 나아가 공부한다는 효과도 매우 클 듯합니다. 책 뒤에는 장 작가가 저본으로 삼은 원저들이 일일이 소개되었고, 저 역시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이들 중 몇 권을 대출, 구입해서 꼭 완독할 생각입니다. 정말로 서문만 읽고 어디가서 아는 척을 한다면, "위대한 서문"에 감화받은 보람조차 없는 위선자나 속물이 아니겠습니까.

명저의 서문이라고 해서 반드시 독자의 무지와 비겁함을 신랄히 꾸짖거나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질책만 담긴 건 아닙니다. 반대로 (장 작가도 그런 말을 합니다만), 권력자와 부호에 굽신거리며 책을 출간하게 해 준 재정적 후원과 검열 과정상의 관용에 과도한 감사와 아부를 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여튼 우리는 그런 민망한 언사와 관행을 통해서도 당대 사회상의 일면을 엿볼 수 있고, 현재 우리가 누리는 출판과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재삼 확인, 각성하게 됩니다.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는 군사학 교본에서 마치 클라우제비츠의 여러 교리나 명언들처럼 자주 인용되는 명언을 남겼는데, 바로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 서문은 황제에 대한 굴신이나 아부가 아니라, 언제나 유력한 장군들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황제의 심기를 최대한 편안하게 하고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하면서 애국심과 우국충정 가득한 조언을 상주하는 뜻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우아한 표현이나 비범한 천재의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은 채" 자신이 그간 변방에서 복무하며 후임자나 동료에게 매뉴얼로 전수할 만한 유익한 군사 교리를 간명하고도 실용적으로 정리한 본문에 앞서 그 취지와 목표를 서술한 이 서문은, 위대한 장군의 문장과 말솜씨가 어떤 미덕을 갖춰야 하는지 잘 드러내보인다고 하겠습니다.

바보들이 타고다니는 배는 용도나 구조가 그리 운명지워졌기에 바보 아닌 현자는 절대 태울 수 없습니다. 바보들은 바보 배를 타고다닐 때 자신이 바보라는 사실을 깡그리 잊고, 같은 바보들 사이에서 열등감을 희석하며 세상의 표준과 천도를 전복하며 바보 특유의 쾌감을 만끽합니다. 현자 제바스티안 브란트는 장 작가의 해설에 나오는 대로 에라스뮈스나 보카치오에 앞서 풍자 정신의 정수를 선보인 선각자였는데, 다만 권력자나 위선적 성직자만 풍자한 게 아니라 바보 특유의 본성으로 질서를 어지럽히고 허풍과 참언, 궤변을 일삼는 하층민 무지렁이 바보들에 대해서도 통렬한 조롱을 퍼붓습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에라스뮈스의 격언집 서문에는, 16세기 네덜란드인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고전 그리스어 어휘가 난무합니다. 하긴 동로마 제국이 망하고 인문학 서적과 학자들이 대거 아드리아해 이서(以西)로 유입, 망명해 온 사정을 그대로 반영하기도 하며, 본인 자신이 그리스, 라틴 고전에 막힘 없이 달통한 석학이었기에 어떤 논지를 펴고 문헌을 분석해도 이런 황홀한 방법론을 마음껏 과시, 적용할 수 있었겠죠. p51 중간쯤에 나오는 <수다 사전>은, 그 바로 옆에 로마자 철자가 병기되었듯이 Suida(Suda도 맞는 표기입니다)라고 쓰며, "수다 떤다"고 할 때 그 수다가 아님은 명백합니다^^ 이 서문에서 저술되는 다양한 예문, 예증과 이론은 사실 서문이라기보다 그 자체로 완결, 독립된 훌륭한 수사법(rhetoric) 강의입니다.

서문의 중요성을 재확인, 절감하게 된 계기 중의 하나로 장 작가가 중요하게 거론하는 책은 열한번째로 등장하는 사드 후작의 <사랑의 범죄>입니다. 장 작가는 행여 일탈적 극단적 유미주의에 자신이 혹 일말이라도 동조나 한다는 오해를 피하고 싶었는지, 이런 괴물의 지향에 조금이라도 공감해서 이 서문을 발췌한 게 아니라, 그의 문학적 족적에 왜 그리도 많은 프랑스 지성인들이 소중한 시간과 정력을 기울여 관심을 쏟았는지 "그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는 의도를 (역시 서문에서) 밝힙니다. 이 대목뿐 아니라 책에서 인용한 모든 "서문"들은, 그저 텍스트만 인용된 경우도 있고, 원주와 역주가 함께 실린 경우도 있는데, 후자의 경우 권말에 후주 형태로 모두 빠진 편집입니다.

p357(의 재인용 원주)에 보면 사드 후작은 펠루티에의 <켈트 족의 역사>의 한 대목을 거론하며 헤라클레스의 어원이 켈트어에서 왔음을 주장합니다(특이하게도 이를 일반명사, 혹은 직분의 명칭으로 새기고 있네요)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의 거의 일치된 결론, 정설은 "헤라의 영광"이라는 그리스어가 그 어원이라는 쪽이니 행여 현대 독자들이 읽고 오해는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 사드 후작이 원용하는 펠루티에는 역사학자 시몬 펠루티에이며, 사드 후작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생존,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장 자크 루소는 위대한 계몽주의 사조가 완성되는 데 큰 기여를 한 불멸의 지성이지만 정작 자신은 주장하던 신조와 현저히 다른 삶을 살아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 모순적 인물이었죠. 책에서는 그의 대작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서문을 뽑아 놓았는데, 한 줄 한 줄에 통찰과 위엄과 권위와 총기가 서린 문장도 최고지만, 역시 후주에 보면 그가 특별히 이런 어휘, 표현을 쓰게 된 배경 분석이 잘 나옵니다. 제네바는 "프로테스탄트의 로마"라고 불릴 만큼 유명한 신학자들이 활동했고, 상업적으로도 크게 번성한 "위대한 도시"였습니다. 당시 제네바의 정치사회적 구조가 어떠했는지를, 이 서문과 주석을 통해 우리 독자들은 흥미롭게 엿볼 수 있습니다.

장 작가가 개인적으로 매우 매혹되었을 법한 보들레르의 <악의 꽃(들)> 서문도 실렸습니다. 시집의 서문답게 역시 시의 형태인데, 이에 대해서는 역시 이 책 서문 중에 장 작가가 자신의 지론(?)을 간략히 언급한 대목이 있으니 꼭 되돌아가서 참조할 필요가 있네요. 막스 뮐러의 소설 <독일인의 사랑> 서문은 매우 짧지만 소설의 서문이 어떤 구실을 해야 하는지 이보다 더 의미심장하게 일깨우는 모범도 드뭅니다. 과학자의 저술은 어디까지나 본문의 논증과 상술에 그 진가가 놓인다고 여기는 이들이라면, 장 작가가 작심하고 뽑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얼마나 품위 있고 유려하며 짙은 인문 향취를 풍기는지 확인할 수 있겠네요.

장 작가는 서문에서 그런 말을 합니다. "서문을 꼼꼼히 읽으면 이후 집필 과정에서 저술가가 당초의 계획과 이후의 성취가 어느 지점에서 미묘히 어긋나는지 알 수 있다." 우리들의 다짐이나 작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의 것이라도 초심은 순수하고 "위대"하지만, 중간 과정과 결과는 누구보다 스스로가 창피해 똑바로 응시할 수 없을 지경이죠. 위대한 지성의 발걸음은 그나마 이 정도밖에 초심과의 유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겸허히 옷깃을 여밀 수 있고, 동시에 사람인 이상 완벽한 초심에의 회귀, 완성 수렴은 있을 수 없음을 알고 마음을 놓을 수도 있습니다. 위대한 고전의 통로로 우리를 이끄는 이 서문들을 세밑에 읽어 내고, 내년에는 고전 완독의 당찬 포부를 다져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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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패리시 부인 미드나잇 스릴러
리브 콘스탄틴 지음, 박지선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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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영화로 바로 만들어도 엄청 빨려들어가듯 보게 될 것 같아요. 시점 전환이 한 번(정확하게는 두 번) 일어나는데 이를 어떻게 처리해도 몰입감 최고인 "반. 전" 드라마가 뽑아져 나오지 싶습니다.

이 소설은 어느 캐릭터(주인공.. 일까요?)의 대사 딱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곧 알게 될 거에요."

"그럼요. 최고의 전문가에게 배운 걸요?"

책 표지에 보면 <퍼블리셔스 위클리>誌의 서평 한 구절을 인용하여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 있는 미스터 리플리>라든가 아이라 레빈의 <죽음의 키스> 등과 이 작품을 비견하는 문장이 나옵니다. 교활하고 타산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사이코패스 만신전("복마전"이 더 맞겠죠?)에 우리 앰버 님도 이름을 올릴 만하다는 건데, 사실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 늘어놓으면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그 평론가나 일개 독자인 저나 그 정도까지밖에 말을 못 하겠지만, 사실 리플리 군과 버드 콜리스의 내공과 자질과 성취(...)에는 이 앰버가 한참 못 미치죠. 뭐 탐 리플리나 버드나 결국 실패자들이라는 점에선 별반 '텔런티드"하지도 못했지만 말입니다. (아이쿠 이거 두 장르물 고전을 한꺼번에 스포일링하다니)

장르물에서 사이코패스들은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처음부터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비열하게 약자들을 갉아먹고 사는 유형이며(이 정도나 되면 차라리 괜찮은데 머리가 워낙 멍청한 탓에 지가 되레 뒤통수를 맞고 이불킥하는 찌질이도 있죠), 다른 하나는 인간성과 양심을 애저녁에 포기한 채 사회적 신분 상승 사다리를 필사적으로 기어오르며 사기극을 벌이는 유형입니다. 전자는 아니고 전자 기분을, "흉내를" 내어 보려는 저능아들 중에 지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이 후자의 유형에 억지로 세팅하고 찌질한 쾌감을 느껴 보려는 저능한 유형도 있는데, 그 중에 몇은 후자한테 잘못 걸려 돈도 털리고 전과자가 되는 극히 한심하고 처량한 운명을 맞기도 합니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누구하고 누구가 정확히 여기에 해당하지는 않지만(만약 그렇다면 이 서평은 몹쓸 스포일러죠), 여튼 두 유형의 잘못된 인간이 외나무다리에서 조우할 때 어떤 비극, 아니 코미디가 벌어지는지 잘 보여 주는, 근래 양산되는 사이코패스물의 뻔한 궤도를 지적으로 비틀어 독자에게 쾌감을 안기는 작가의 재치가 빛나서 좋았습니다.

앰버(일단 이 이름으로 부르겠습니다)는 외모나 자질 면에서 아주 선택받은 사기꾼 재목(...)은 못 됩니다. 물론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하고 (후반부에 나오는 누군가의 평가를 빌리자면) 자기 도취에 빠진 면이 있어서 일을 어설프게 하면서도 자신은 꽤 잘한다고 착각하는 타입 같습니다. 혹은, 심리학 용어를 빌리면 "투사(projection)"라고 해서, 지가 그러면 남도 덩달아 그런 줄 알고 자신의 미숙하고 모자란 생각을 남의 것으로 엉뚱하게 전가하는 습관, 자다가 봉창 뜯는 헛소리 잠꼬대에 물든 타입이기도 합니다(그래서 그 나름 꽤 그럴싸한 재주를 지닌, 위 고전 두 캐릭터와는 나란히 놓으면 좀 곤란하다는 거고요). 앰버는 그리 성공적인 사기꾼이 못 되었는데도(못 되었기 때문에 이런 늦은 라운드까지 밀린 거죠) 예의 자기도취에 빠져 인성은 인성대로 망치고(잘못된 인간이긴 하나 아직 한 조각 양심이 남아 있고 오히려 그것때문에 더 초라하게 보입니다) 어설픈 계획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겁니다.

반면 그녀가 등쳐먹으려는 대프니는 우리 독자들이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는 고상한 인물입니다. 무난한 성장 과정을 거쳤고 양친도 다 훌륭한 인품을 지닌 분들이어서, "저분 참 괜찮군." 같은 평가를 유보 없이 망설임 없이 내려도 되는 착한 여인이죠. 서양의 명명 방식과 숨겨진 뜻에 쥐뿔도 모르는 얼치기의 단견으로는 전혀 짐작을 못했겠지만(근본 없는 싸구려 상식을 함부로 갖다붙이는 억지 견강부회야말로 이 땅에서 속히 peish되어야 할 적폐입니다), "대프니"라는 이름부터가 전형적으로 이 소설 속의 대프니 같은 우아하고 착한 여인을 상징하는 일종의 기호입니다. 짧은 상식과 천박한 속물 심리에 쩔어 있는 인간은 짐작도 못할 사항이죠.

OOO은 과연 사이코패스인가? 사실 이 작자가 아주 악질인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빈틈없이 치밀한 두뇌를 지니고 뭘 벌이는 타입은 못 되는 것 같습니다(현실에서 종종 목도되는, 이 축에 끼지도 못하면서 뭘 흉내낸답시고 돌아다니는 저열한 종자들에 비하면 거의 신이지만 말입니다). OOO은 그저 분수에 넘게 풍족한 환경에서 버릇이 잘못 들어 자신을 지옥에 빠뜨린 좀 모자란 위인으로 해석하는 게 더 정확할 듯합니다(그러니 자식들도 하나같이 복제품 만들듯 그따위로 키우는 거죠).

놈은 앞에서는 위선과 가식으로 과장된 예의를 차리다가(상대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한없이 낮은 사람입니다, 라고 한다면 절대 날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는 반어법 주문을 강제하는 건데, 본인이 한없이 낮은 인간이라는 건 본인이 너무도 잘 안다는 뜻도 되죠ㅋ), 뒤로 돌아서면 온갖 험담과 지저분한 폄하를 일삼는, 거의 정신병 수준의 이중인격자입니다. 이중인격도 무슨 구체적 목적이나 있어서 부리는 수작이면 누가 뭐라고 할 건 못 되는데, 그것도 아니고 제 존재를 엄습하는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을 망각해 보려는 반사적 몸부림의 산물에 불과하니 딱하고 불쌍하다는 말이 나올 밖에요.

OOO은 여튼 미국 부유층들의 습관은 충실히 모방하여 미술품, 문학 등에 대한 폭 넓은 소양을 자랑하긴 하며, 유창한 프랑스어 구사가 신분 유지에 필수 조건임을 강박적으로 내세우는 등 무슨 흉내를 내어도 제대로는 내어 보려고 애씁니다. 허나 일부 졸부의 자식들은 어디서 배워도 밑바닥 사기꾼 흉내를 어설프게 익혀 그딴 걸 세상사 스킬이나 구사하는 듯 착각을 하니 이걸 보는 입장에서야 그저 아연실색할 밖에요. 개탄을 해야 하는지 하염없는 동정을 베풀어야 하는 건지 원.

잠시 우리의 앰버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앰버는 물론 뭘 열심히는 합니다. 구경꾼들이 보기에 눈물겹도록 말이죠. 하지만 사고 방식이 너무도 미숙한데(사기를 치려면 최소한 본인 자신은 냉철하고 객관적인 판단이 확실히 서야 합니다), 예컨대 아무 잘못 없는 부친을 성폭행범으로 팔면서 "자기 세탁소에 애들 일 시킨 건 아동 학대 아님?" 같은 터무니없는 합리화를 일삼습니다. 이런 논리라면 부모는 아이가 성장한 후 18년 동안의 학비와 분윳값을 청구해야 마땅할 겁니다. 그런가하면 본인은 섹시한 자태를 뽐내며 호구로 물으려 든 잭슨 패리시에게 고혹적인 셀카를 보냈다고 착각하지만, (책 한참 뒤에 나오는 OOO의 반응은) "그 생쥐 같고 촌스러운 화이트 트래시(책에서는 적절한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일 뿐입니다. 사람이 어설픈 자기 도취에 빠지면 이처럼 실상이 안 보이게 마련이죠.

1부를 읽으면서 독자들은 대프니에 대해 엄청 동정할 수도 있고, 반대로 경멸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너무 착한 것도, 악인의 먹잇감이 되어 사화악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좋지 않다." 이 두 반응은 모두 타당하며, 관점이 다른 독자들이 결말에 가서 두루 (각자의 방식으로) 만족하게 만드는 게 작가의 센스고 재능이었습니다. (구체적인 건 직접 읽어 보고 판단해들 주시고요)

(입이 근질근질해서 조금만 스포하겠습니다. 곤란한 분들은 이 아래부터는 보지 마시고요)
좀 이상하지 않던가요? 세상 어떤 여자가 자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그럭저럭 약은 데다 적절히 볼 만은 한 다른 여자한테 그렇게나 "많은 자리"를 내어줄지요. 한편으로는 "자기 자리가 만족스럽지 않아서 그냥 내주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가지고 노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의도대로 일이 척척 풀리면 뭔가 의심을 좀 해 봐야 하는데 그냥 낙관에 빠져 즐기기만 하는 걸 보면 앰버가 참 어설픈 "소셜 클라이머"인 건 분명하지 싶습니다. 무조건 자기 편할대로만 생각하고 싶어한다고 할까. 1부를 보면 (이후) 그렇게나 잦게 찾아온 위기 징후가 그녀의 눈에는 조금도 감지 안 됩니다. 완전한 맹인과도 같습니다. 이래 갖고 누굴 등쳐먹겠습니까. 정작 동정을 받아야 할 쪽은 대프니가 아니라 이 앰버인지도 모릅니다.

앰버는 수법이 참 빤하고 판에 박힌 타입이기도 합니다. 늙은 비서 배틀리를 사직하게 꾸미거나, 식모 마틸다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도 지나고 나서 보면 다 불필요한 음모이고 소동인데, 이런 단계에 이처럼 공을 들이는 걸로 보아 하층민 근성은 좀처럼 떨칠 수 없나 봅니다. <오디세이아>를 인용하며 자신의 처지를 텔레마코스에 비기는 것도 혀를 내두를 만한 무지인데, 속으로 (그 나름 공부 좀 했을) 잭슨도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만 본인만 눈치 못 챈 거죠. 그레그가 잭슨에게 나이 어린 걸로 한 방 먹인다 어쩐다 하며 본인만의 의미 부여, 과잉 해석을 열심히 시도하는데 이게 다 사기꾼으로서는 결격입니다. 그야말로 자기 세계에 빠져 혼자서만 허우적대는 거죠. 사이코패스는 철저히 상대방을 물건처럼 대해야 하는데 잭슨에게 감정적으로 너무 빠져 버린 것도 그녀의 자질 하자(?) 중 하나겠습니다.

아무튼 결말에서 상식적인 독자에게 통쾌감을 선사하는 것도 좋고, 은연중 뉴잉글랜드 귀족들의 다채로운 생활상을 묘사하며 독자에게 구경거리를 안기는 작가의 여유와 풍부한 상식도 돋보였습니다. 사이코패스물로도 읽을 수 있지만,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랐으면서도(안 그런 앰버는 정상참작의 여지라도 있다고 하겠으나) 제 감정과 인격 하나를 못 추스려 스스로를 저런 지옥에 빠뜨린 버릇 나쁜 속물의 행각을 통해, 자본주의의 구리고 축축한 이면을 풍자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아, 재미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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