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린터 - 언더월드
정이안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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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단거리보다는 장거리 달리기에 더 특화된 종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라토너들 못지 않게 100m, 200m 등 단거리 선수들에게도 큰 환호를 보내며, 광고 시장 등에서의 "상품 가치"는 이들 단거리 선수가 더 높이 매겨지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에는, 인간의 눈 앞에 더 바싹 다가선, 더 높이 세워진 한계, 장벽에 도전하는 모습이 더 아름답고 장쾌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있겠습니다.

폭발적인 스피드를 내려면 물론 근력도 갖춰져야 하고 (이 책 중간쯤에도 언급이 있는 대로) 유연한 리듬감도 배양되어야 만족스러운 기록이 나올 것입니다. 테니스 같은 스포츠와는 달리 육상 단거리는 10대 시절에 전성기를 맞기 어려운 까닭이기도 한데, 여러 이유로 동아시아인의 신체 특성은 백인이나 흑인 등에 맞서 겨루기 어려운 한계도 지녔죠. '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쾌거를 이룬 류샹 선수가 당시 크게 화제가 된 건 그래서 당연했습니다.

이 소설 속에서처럼, 아직 어린 청소년이, 우리 동아시아인에게 영원히 아득한 목표처럼 여겨지는 육상 단거리에서 빼어난 기록을 세우고, 전국민(나아가 세계인)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다면 참 신나는 상황일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작품 속 1인칭 주인공 "강단"은, 매니저 스티브의 실수로 금지약물을 복용하고 도핑 테스트에서 적발된 탓에, (이 작품 속 표현을 그대로 따르자면) 한순간에 "국민영웅에서 국민 쓰레기로" 전락한 형편입니다. 악플에 시달리고 비전도 사라진 채 막막한 신세가 되어도 이 소년이 버텨낼 수 있는 건, 피 한 방울 안 섞였음에도 불구하고 친동기간보다 더 사이가 좋은, 창던지기 선수 지태, BJ 연아, 이 둘과 영원한 삼총사로 즐겁게 지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견뎌낼 수 없는 일도, 나의 분신, 혹은 alter ego라 할 또래 친구들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고통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세 소년소녀는 각각 다른 가정에서 자라다 한순간에 고아가 되었는데, 아이들을 모두 입양해 자신의 친자녀처럼 키운 고마운 "엄마"가 한 분 계십니다. 무작정 사랑을 베풀고 매사에 양보를 해 줘도 사춘기 아이들이라는 게 마냥 착하게 굴지만은 않는 게 차라리 당연한데, "어떤 일"을 계기로 이 아이들은 엄마가 얼마나 고마운 분인지 깨닫고 정말 화목한 가정을 이룹니다. 이런 배경 사정은 회상과 대화 중에 지나가듯 언급될 뿐이고, 소설은 막을 엶과 동시에 거의 막바로 초대형 테러의 발생으로 서울, 우리가 사는 바로 그 도시, 전철 1~8호선과 몇 종류의 노선이 더 복잡히 얽히며 운행되는 그곳에서, 커다란 혼란이 빚어진다는 급박한 전개로 돌입합니다.

전철 테러는 픽션에서 드문 소재가 전혀 아닐 뿐더러, 아직 애들이다 보니 세 주인공들의 감정선이 지극히 단순한 터라(단, 여자애인 연아가 꽤 똑똑하고 예리한 편입니다), 처음에는 별 기대가 안 되었던 게 사실입니다. 대개 이런 영 애덜트 대상 SF 판타지(단, 이 소설이 판타지에도 무난히 분류될지는 좀 생각을 해 봐야겠습니다)에서 설정은 매우 참신하고 거창하게 벌여져도,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결국 참신한 초기 세팅이 재미의 전부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 소설은 반대였습니다. 갈수록 설정 밀도가 높아지고, 서서히 드러나는 진상도 충격적으로 꾸며졌습니다. 캐릭터들도 처음에는 "그저 애들"로 여겨졌는데, 이야기가 흥미진진 전개될수록 각자의 개성을 더 굳혀가더군요. 천진난만하면서도 의심이 많고, (요원 기현국의 노림수대로) 설익은 영웅주의에 쉽게 휩쓸리지 싶으면서도 영악하고 이기적인 면모도 드러내는 터라, 실감과 입체감이 돋보였습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육상 기대주였다고는 하나 능력, 인격, 감성 모든 면에서 성장 도상에 놓인 아이들일 뿐이고, 그나마 다른 두 아이는 평범한 자질일 뿐입니다. 또 자신의 세계가 붕괴 직전의 위험에 놓일 때, 그저 익다 만 "달리기 재능" 하나로 어떻게 만인을 구원하겠습니까? 물리적 능력은 물론 정신적 준비도 채 갖춰지지 않은 이들은 그래서 아직 영웅으로 부상할 마음도 안 먹은 상태이며, 당장 이 재난으로부터 자신들과 "엄마"부터 살리기나 하고, 이후에는 "하와이(그저 국외 세상의 은유로 보입니다)" 등으로 이주하여 자신들을 푸대접한 한국과 절연할 생각마저도 품습니다(특히 지태). 이 책은 앞으로 장대히 이어질 <스프린터> 시리즈의 첫 권인데, 이처럼이나 주인공들은 어설프고 무력합니다. 앞으로 길게 이어질 후속 사연에서 우리 독자들은 이들이 "커 나가는 과정" 그리고 죄 많은 세상이 어떻게 정화될지를 지켜 봐야 하겠지요.

[이하 내용 누설이 있으므로 주의해서 읽으십시오. 가능하면 안 읽는 편이 낫습니다]

타락하고 음흉한 정치인인 박정근 대통령, 주한미군 사령관, 국정원장, 에너지공단 이사장(ㅎㅎ) 등은 거의 절대악처럼 보입니다. 이들은 남산(과거 중정에 의해 여러 만행이 저질러져 탄압과 압제, 음모의 대명사처럼 불리기도 한) 아래에 "노아"라는 거대한 지하 공간을 건설합니다. 여기서 권력은 노숙자들, 실직자들, 혹은 4류 코미디 영화에서 참된 자아상을 발견하는, 테러리스트를 닮은 부적응 호구 등을 대거 끌어들여 생체실험을 하는데, 기본 전제는 "이 좁은 지구에 사람이 너무 많이 산다"는 겁니다. 다수는 생산에 기여도 못 하고 그저 다른 이의 짐이 될 뿐인데, 그렇게 의미 없는 연명을 할 바에야 마루타 노릇으로 동시대인과 후손에 좋은 일이나 좀 하라는 거죠. 과학자들은 인체를 통해 핵에너지를 능가할 만한 엄청난 근원적 힘을 뽑아낼 수 있게 되는데(소설 속의 표현에 따르면, 이 배터리를 일렬로 세워 미 대륙을 횡단하게 할 경우 일시에 폭발시켜 지각 전체를 다 날려버릴 수 있다네요), 이들 노숙자들이 항구적 바이오매스처럼 포박된 채로 지상의 거주자들을 위해 싼 값으로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한다는 식입니다.

이 과정에서 괴생명체인 프로젝트 피조물 하나가 중요한 구실을 하는데, 얘 이름이 "신야"입니다. 정체가 계속 가려져 있다 후반부에 간신히 모습을 드러내는데 마치 폴 버호벤의 <토탈 리콜>에서 반란군 지도자 쿠아토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사실상 하등 종족으로 고착화한 노숙자나, 그곳 화성의 방사능 오염 돌연변이 족속이나 닮은 점도 많은데, 여기서의 신야는 섬뜩한 늙은 추물인 쿠아토와는 달리 중성적 외양의 꼬마이며 독립 신체를 지니고 잘 돌아다닙니다. 잘 돌아다닐 뿐 아니라 염력으로 비언어적 소통을 자유롭게 행하는데, 쿠아토뿐 아니라 <맨 인 블랙 III>에서의 그리핀과도 비슷한 능력입니다. 아니면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에 나오는 그 누구하고도 좀 닮았죠.

여기서 압권인 건 국정원 요원 기현국이 아이들 셋의 행방을 드론으로 파악한 후, "빨간 버튼을 눌러" 모두를 구하라고 이중의 거짓 설득을 하는 장면입니다. 자기 딴에는 철두철미한 양심의 발로로써, 윗선의 (더 잔인하고 야비하며 파렴치한) 지시까지 생까고 짠 계획인데, 이 말을 들으면 우리의 주인공들은 다 죽게 됩니다. 이들이 위기를 모면하는 과정은 직접 책을 읽어 보고 확인하시고요. 근데 신야가 너무 사기 유닛이라 능력치 밸런스가 좀 안 맞기도 합니다. 신야는 모든 것(못나고 유한하며 어리석은 인간들[동시에 자신의 창조주이기도 한]의 탐욕, 감정 따위)를 이해하지만, 그 천박함과 빤함에 질렸는지 내내 냉담하고 태연하며 무관심한 표정입니다. 이런 캐릭터의 매력과 개성이 앞으로 이 긴 사연을 이끌어 갈 하나의 동력이기도 하겠습니다.

p280이하에 보면 철덕을 자처하는 어느 네티즌(이렇게 평범하고 이름없는 선의의 시민들이 모여, 아직은 어설픈 주인공들을 도와 악한 세력의 음모를 분쇄한다는 게 주제의식 이해에 필수인 사정이죠)이, "이 테러가 참으로 이상한 게, 그렇게 특정 구역만 클리어 커팅하듯 파괴하는 폭파가 현 기술 수준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웹에 올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대목의 상세한 설정은 작가의 심도 있는 연구가 선행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서술이었을 겁니다. 그저 기발한 상상만으로는 SF가 현대 독자의 구미를 사로잡을 수 없는데, 이런 성의와 설계상의 치밀함이 읽으면서 참 좋았습니다. 다만 용병대장 뭐 이런 캐릭터는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뿐, 이런 극비의 프로젝트에 뭘 한몫 낀다는 게 좀 현실감이 떨어지지 않나 싶었고, 작가도 그 점을 의식했는지 의심을 받고 발끈하는 모습을 삽입하기도 합니다. 2부가 여튼 많이 기대되네요. 투자비 많이 들여서 한국형 헝거게임이 영화 포맷으로 또다른 한류 열풍을 일으켰으면 하는 응원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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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선비들 - 광기와 극단의 시대를 살다
함규진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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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극단의 시대를 살다."

선비들이 가장 처세하기 어려운 시기라면 당연 정치권력의 지평이 급변하는 때이겠습니다. 교활한 상인들이나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저 새로운 질서에 영합하여 잇속을 취하거나(참으로 가증스럽지만 본디 천한 장사치들의 생리가 그러하니 탓할 일도 아닙니다), 가뜩이나 주리던 배를 혼란기에 더 곯지나 않게 생존에의 고민에 정력을 쏟으면 그만이죠. 하지만 특히 동아시아 전통 유학의 가르침에 지조와 지성을 바친 이들이라면, 육신을 지닌 인간이기에 물리적 생존도 꾀해야 하고, 공부한 게 아까워서라도 입신 출세의 길을 곁눈질도 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닦은 정신의 칼날이 아까워서라도 아무에게나 충성을 바칠 수는 없고, 여러 모로 고민의 겹이 두터울 수밖에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뼈대 있는 가문에서 자라 남달리 총명하단 소리를 듣고 자란 이들이, 하필 이런 난감한 시절을 만나 극단의 번민과 훼절을 일삼거나, 혹은 반대로 대쪽 같은 지조를 지키다 한생을 마치는 과정은 그래서 남다른 감회를 부릅니다.

이 책에는 주로 구한말, 일제 강점기를 시대 배경으로 삼아, 다양한 이력과 평판을 지닌 이들의 생애가 압축되어 실렸습니다. 모두 스무 명의 "선비" 열전인데, 이들 중 상당수는 (당연하지만)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름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유방백세, 어떤 이들은 유취만년, ... 그들이 몸 담고 분투한 분야는 다양해도, 이처럼 "선비"라는 범주 하나에 공통적으로 묶일 수도 있다는 점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선비의 생을 압축적으로 소개했다지만, 다들 익히 알려진 인물들이기에, 사항 나열이나 행적 요약에 그치는 또하나의 책 아닌가 생각도 잠시 했었으나, 전혀 그렇지 않더군요.

매 장은 저자의 개성적인 관점이 충분히 녹아 있고, 그간 전해 오는 정보를 비교문헌 방법론이나 일반 고증을 통해 비판한 대목도 많으며, 무엇보다 문장이 명쾌하고 유려합니다. 그런 반면 현재 한국의 정치판을 어지럽게 더럽히는 진영 논리(어느 편이건 간에)가 최대한 절제되어 있어, 어떤 편향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심지어 친일 성향이 두드러진 인물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인간적인 번민이라든가, 권력과 총칼 앞에 누구라도 약해질 수밖에 없는 이치를 고려하여, "인간을 인간으로 본 시선"이 다분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완용 같은 구제불능의 악질은 (그가 혹여 선비적 소양이 매우 뛰어난 면 있었다 쳐도) 아예 논의의 대상이 안 됩니다.

친일파의 대척에는 당연히 우국지사의 지조 높은 삶이 서 있겠으나, 이 책은 무능하고(선비로서야 탁월했겠으나, 관료로서 지도자로서 한없는 결함을 노출했던) 유약한 선비들 못지 않게, 그들의 꽉 막히고 융통성 없는 사상적 경향, 나아가 시대에 뒤떨어진 사대, 모화사상까지도 짚고 넘어갑니다. 모든 선비는 그 나름의 이유에서 비판 받을 이유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남다른 재능이나 의기, 집념으로 이룬 학문적 성과를 또 따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고지식한 훈구 척사 진영이 있는가 하면, 양심과 쓸개를 모두 팔아넘기고 일제에 들어붙은 이들도 있는데, 그 중간에 서서 추상같이 민족 반역자를 타매함은 물론, 시류를 무시하고 고지식하게 옛 질서에 집착한 이들까지도 싸잡아 비웃은 매천 황현 역시, 저자는 그만이 범했던 독특한 오류를 지적하며 비판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물론 뛰어난 점은 그것대로 선명히 짚고요. 이처럼 오로지 근대성의 관점에서 모든 인물을 재해석하기에, 유치한 선과 악,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이 독자를 호도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최익현은 일생을 두고 흥선대원군과 척을 진 사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물론 대원군 개인에게 증오의 초점을 두어서라기보다, 그가 지향하는 정통파 유학의 이상향을 구현하는 데 이하응이 일일이 장애물 구실을 해서였을 겁니다. 척화비를 세우는 등 대원군이 필요 이상의 강경노선을 걸었던 것도, 이들 최익현으로 대표되는 정통파 유림과 선명성 경쟁을 벌이다 보니 원치 않던 선을 넘은 것도 있겠지요.

중반부 박제순 항목에 지나가듯 언급되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 외국의 외교관들이 그를 평가하길, 말귀를 잘 알아먹으면서도 강경하지 않아서 좋다고들 했다..." 이 말은 뒤집어 새기면, 말귀도 못 알아먹고 무조건 대책없고 비현실적인 강경론만 고집한 이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도 됩니다. 물론 박제순은 뛰어난 어학 실력을 자랑하는 유능한 관료였겠으나, 이 책에서도 뼈아프게 지적하듯 강단도 없고 의기도 부족하고 긴 시야로 시국을 내다보지도 못한 채, 그저 무력과 협박에 굴복하는 걸로 처신의 전부를 채운 불쌍한 친일파였습니다. 이 점에서, 저 혼자 신이 나서 친일과 매국의 풍악을 울린 이완용과는 구별되죠. 또 책 뒤에 나오듯 마음으로부터 일본의 문물을 사모했으면서 정작 세상이 바뀔 때 훈작이나 금품을 챙기지도 못한 이인직(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빈선랑을 두고 저자는 전국시대의 세객 장의와 비교하는 탁견을 제시하네요) 같은, 어리석고 둔한 친일파와도 다릅니다. 김윤식은 어떤 포지셔닝을 하기가 좀 모호한 편인데, 유명한 불가불가(세 가지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되죠) 코멘트가 그의 흐릿한 개성을 잘 대변합니다(저자께서는 이 일화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입니다). 여기 잠시 등장하는 외부 교섭국장 이시영은 물론 우리가 잘 아는 권투선수... 가 아니라 초대 부통령인 바로 그분입니다.

유길준과 김옥균은 이들과는 또 빛깔이 많이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는, "양반 권귀 가문의 엘리트들은 물론, 상놈(책에 나온 표현 그대로입니다) 출신, 궁녀 할 것 없이 그가 내세운 대의에 공명하여 죽음도 개의치 않고 거사에 동참했다"고 하시는데, 그가 예사로운 인물 같았으면 결코 이런 헌신적인 동지들이 따르질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일본에 망명하여 파당적 활동에 몸 담는가 하면, 특유의 풍류 거사 기질을 못 버리고 한가하게 로맨스를 벌이기도 하죠. 저자는 특히 "마지막 몇 달만 참았던들 오히려 정계 중심에 화려하게 복귀할 수도 있었다"며 정치적 안목에 대해 낮은 평가도 하는데, 제 개인적 생각으론 결과론적 성격이 없지 않다고 봅니다. 여튼 흥미로운 견해이긴 합니다.

김옥균 못지 않게 부유한 태생이었으면서도 유교의 정통 교리에 충실하기 위해 "극단적 청빈"을 택한 선비로는 전우라는 분이 있습니다. 사실 서양의 초기 기독교도 그랬고 특정 가르침에 문자 그대로 충실하며 엘리트의 가치를 지키려 든 이들은 대개 물질과 물욕을 아주 크게 배격했습니다. 전우의 사례는 좀 의아한 면이 없지 않으나, 그가 가르친 제자들 중 김병로, 백관수 등이 모두 빼어난 인재로 성장한 걸 보면 은둔자로서의 그의 생이 참으로 보람에 가득찼다고밖에 평가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평안히 다지고 정신의 평형을 찾았기에 당시로서는 극히 장수한 편인 팔십수를 누린 것이겠고요.

최익한 역시 뼈대 있고 가세도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총기로 유명했는데, 다만 저자는 특유의 예리한 분석으로 "그저 암기력이 출중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놀랄 만한 기재를 뽐냈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한 마디를 하시네요. 어느 편이든 간에 종래의 유학 경전 암송, 과거 급제, 출세의 루트가 유일한 인생의 목표였던 세상이라면, 이분은 의심의 여지 없는 신동 반열에 올랐을 겁니다. 대개 신중한 성품이었던 그는, 스승이자 아버지와도 같았던(저자의 표현입니다) 곽종석이 일제의 모진 처사로 목숨을 잃자, 그때부터 거침없는 실천가, 혁명가로까지의 노선 전환을 보이며, 나중에는 사회주의자, 맑시스트로까지 변신합니다. 이 챕터 끝에는 이목구비가 선명하고 풍채가 근사한 젊은 날의 김일성이놈도 보이고, 그 뒤를 백범이 걸어가는 귀한 사진도 실려 있습니다. 아마 저자의 의도는 이 남북협상단의 일원으로 최익한이 참여했음을 독자에게 상기시키려는 거겠지요. 백범은 본인 자신이 유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므로 어느 기준에서도 "선비"에는 못 끼는데, 책에는 유림의 유(儒)가 겁쟁이 유(懦)와도 통한다더냐?라고 비웃던 그의 일화도 나와 있습니다. 백범은 이 책에서 여러 대목에 등장합니다.

심산 김창숙이나 단재 신채호처럼 그야말로 굽히지 않는 절조와 강단으로 일생을 채운 분들도 나오는데, 저자는 특히 "해방 후 점령군처럼 느닷 성균관을 장악한" 심산을 두고 여러 소회가 엇갈리시나 봅니다(모교의 창설자이시기도 한데). 이처럼 비범한 기개와 총기를 자랑한 분이 있는가 하면(다수죠), 머리가 그리 좋지 않아 이십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진로를 고민한 이병헌 같은 선비의 일생도 우리 독자에겐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백범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만년에는 무도한 약육강식의 풍조에 염증을 느껴 "유교의 종교화"만이 모두가 살 길이라는 결론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는 사실 성균관이 지금까지도 말끔히 해결 못 한 난제이고 고민이기도 하죠. 선비들의 고뇌와 번민에 가득찬 행보를 보며, 우리 민족이 이 근세를 얼마나 힘들게 통과했는지 더듬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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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버스에 돌을 던지다 - 작은 손들의 반격 성장이 어떻게 번영의 적이 되었는가
더글라스 러쉬코프 지음, 김병년.박홍경 옮김 / 사일런스북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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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제 - 사회 전 분야에 도도히 밀어닥치는 뉴 메가트렌드를 "4차 산업혁명"이라 일컫습니다만, 수십 년 전에도 (오늘날에 와서) "3차 산업혁명"이라 (재)규정될 만한 흐름이 분명 있었습니다. 경제, 산업 현상은 그 독자논리로 설명되면 충분하지만, 사회학자, 인문학자들은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인문적(혹은 다른 패러다임적) 의미 부여를 하려 들었습니다. 정보화의 물결은, 필연적으로 불특정 다수 사이에 다량의 정보가 공유되는 결과를 낳고, 이것이 민주주의, 탈 중앙집권, 경제 민주화 등을 차례로 유발한다는 게 그간 많은 이들(적어도 진보 진영)이 막연하나마 품어 왔던 기대였습니다. 실제로 그런 기대는 그간 적지 않은 부분이 충족, 실현되기도 했고, 아랍의 봄이니 유로마이단이니 하는 대사건들이, 모두 정보의 민주화라는 분명한 대세의 덕을 입은 게 확실합니다.

이 책은 크게 보아 마르크스적 진보 패러다임을 적잖이 계승하고(물론 현대적 재해석과 비판도 다분히 개진합니다만), 현재 폭풍처럼 밀어닥치는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이, 역사의 진보, 민주주의의 확산, 자본의 착취적 작동 기제 완화(내지 폐지)와는 상당히 먼 목표와 결과를 향해 달려감을 꼬집은 내용입니다. 저는 처음에 제목만 보고 일부 (IT) 기업의 이기적, 반사회적 행태를 고발한 내용일 줄 알았는데, 그보다 다루는 범위와 주제가 훨씬 크더군요. 매우 원대한 비전과 분석을 담은 책이므로, 경제학, 사회학의 세부 어떤 분야에도 부교재 비슷하게 쓰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전 어르신 세대 같으면 사회과학 동아리에서 발제용 텍스트로 대번에 선정되었을 성격입니다. 물론 효용이 다한 고리타분한 이념 타령이 아니라, 소재가 철저히 "우리 시대"에 벌어지는 경제 구조적 모순, 비위, 혹은 불건강한 혁신 등에 초점을 두었기에, 과거의 이념 추이에 대해 전혀 몰라도 읽어 나가는 데에 부담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쪽에 소양이 있는 독자들이 이 책을 훨씬 재미있게 독파할 것입니다. 마치 오래 전에 끊긴 시리즈물이 뜻밖의 시점에서 속편을 내놓은 양 말이죠.

자연이 편안히 제공해 주는 정도 분량의 식량으로는 도저히 감당 못할 만큼 종족의 머릿수가 늘어남에 따라, 우리들 인간은 일정한 체제를 구성하여 생존을 위한 경제활동을 꾸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화폐 경제, 시장 경제는 본디 아주 소박한 기원을 잡고 시작되었습니다. 저자는 귀금속류와 "영수증"류가 어떻게 해서 금속 화폐, 지폐로 탈바꿈을 했는지 매우 직관적이고 재미있게 설명하시는데, 좀 지나친 단순화라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많은 초보 독자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서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튼, 저렇게 소박하게 시작한 시스템이, 어떤 무오류나 영속적인 특성을 본질로 그 안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자연히 모순이 발생하고, 수시로 기름칠을 해 주지 않으면 반드시 부작용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수시로 표현되는 대로, "꼬리가 개를 흔드는" 역작용은 바로 성장 제일주의, 물신주의, 시장 만능에 대한 근거 없는 맹신 따위 때문에 발생합니다. 이 책에서 가장 핵심에 놓여지는 키워드는 "자본 수익률과 실물 경제 성장률 사이의 간극, 괴리"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실물의 성장, 생산은 속도가 느릿한데, 오로지 자본만이 쉴 새 없이 과실의 증식(쉽게 말해 이자 상환)을 독촉하니, 사람이고 사회고 공동체고 그 등쌀을 배겨내겠냐는 겁니다. 저자께서 탁월한 입담, 빈틈없는 논지로 이런 주장을 펴시니, 책을 읽는 중 독자들은 "아, 성장은 원칙이 아니라 예외에 불과했구나."처럼 절로 설득이 안 될 수가 없더군요.

이러던 게, 중세 이후, 또 1차 산업혁명 초창기를 거치며 착취적 체제의 특성을 더욱 고착시키다 보니, 산출이 늘어나고 생활이 풍족해질망정 사람이 행복해할 시간은 역으로 갈수록 줄어드는 결과가 발생하는 거죠. 이제 이 왜 책 제목이 "구글 버스에... "인지로 다시 눈을 돌리겠습니다. 리뷰 서두에 "정보화와 민주화는 함께 가는 친구"란 기대가, 지식인들이나 IT 업계 종사자들 사이에서 만연했다고 썼습니다(물론 이 책을 읽으며 얻은 사항의 요약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그런 나이브한 기대가 작금의 본격 4차 산업혁명을 맞으며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통렬히 고발한 책이라고 해도 됩니다. 오히려 부의 편재는 가속화되며, 경쟁에서 승리한 기업의 독점은 더욱 공고해지고, 사람들은 (이미 여러 미디어에서 경고 섞인 보도를 해 온 대로) 일자리를 도처에서 잃어갑니다. 마르크스 이래 여러 사상가들이 지적해 온 바대로, "일에서, 경제에서, 생산에서, 사람이 소외되어서는 안 되며, 사람은 언제나 최우선의 가치를 점해야 마땅한데" 최근의 추세는 그와는 정반대로 간다 이 소리입니다. 물론 이 책은 그런 예리하고 탁월한 결론의 제시에만 장점이 있는 건 아니고, 그런 결론을 도출하기까지 원용, 정리, 분석된 방대한 사례들을 또 눈여겨 봐야 합니다.

이미 1940년대에 노버트 위너는 사이버네틱스의 시원적 아이디어를 체계화한 적 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위너가 무슨 말을 꺼낸 건지 이해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을 텝니다. 우리는 지금 그가 예견한 사회상이 거진 다 실현되어가는 "미래"에 살고 있기에, 이 예견이 얼마나 너른 지평을 마련했었는지, 또 그 지엽적 희망 일부가 어떻게 역설적이고 파괴적인 결말로 수렴해 가는지, 민망하게도 일일이 관찰해 가는 처지입니다.

MIT의 브리뇰프슨과 맥카피는 "대 분리(great decoupling)"이란 개념을 규정하는데(이 책 p72), 이건 쉽게 말해서 혁신과 성장(실물 성장이 유지되는 기간에서조차)은 성장대로 따로 놀고, 사람들의 만족이나 행복, 일자리 수 등은 그것대로 감소, 퇴락, 하향세를 따로 그린다는 겁니다. decoupling이란 말 자체가, 과거 한때에는 동조화를 이루던 때도 있었음을 암시하지 않겠습니까? 자본주의가 한때 맹렬한 찬사의 대상이 되었을 때는 "커플링"이 매우 희망적 추세를 보였을 시절입니다. 자본은 증식하고, 부자는 당연히 돈을 벌고, 노동자도 덩달아 풍요를 누릴 수 있던 "호시절"말입니다. 정보화 사회가 추세를 가속화하고 새로운 동력으로 떠오르면, 이런 장밋빛 희망은 더욱 농도가 짙어졌으면 짙어졌지, 그 빛이 퇴색하지는 않으리라는 기대가 분명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대는, 일부 이기적이고 타락한 경영 윤리, 생산 방식을 가진 기업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다는 게 저자의 논지입니다.

저자는 화폐의 발달사에 대해서도 대단히 흥미로운 점을 우리 독자 앞에 능란한 화술로 부각합니다. 그에 따르면, 본디 화폐는 "로컬"한 성격이었으나, 이를 중앙 정부가 권력 집중 과정에서 발행권까지 독점하려 들었고, 현대인들이 너무나 당연히 여기는 상식처럼 "중앙 정부 아닌 그 어떤 단체가 발행하는 화폐란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범죄"라는, 정반대의 통념이 자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요즘 시민사회단체 일각에서 지방화폐 보급 운동을 열심히 펴 나가는 추세가, 이 관점대로라면 더 의미심장해지기도 하죠. 그게 별난 게 아니라, 이제서야 정상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겁니다. 영어에 seigniorage effect란 말이 있는데, 이 용어가 처음 코인되었을 때에는 발행자 측의 부당한 횡포를 꼬집는 의미가 더 강했습니다. 저자는 특히, 부당한 생산성 강요의 행태, 강제 기제가 이미 중앙 정부의 법화 발행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고까지 합니다.

저자가 이 긴 논의를 꺼내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연히 비트코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목에서 그 점까지 유추한 후 기대를 품고 책을 열어 본 독자는 거의 없지 싶은데, 이 책은 (사실)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당연히 비트코인 이야기도 제법 많습니다. 비트코인은 앞서 말한 대로, 중앙정부가 부려 대는 화폐 독점 발행권의 횡포를 전면 제거하고, 지방화폐의 공간적 제약도 극복하며, 인쇄기술의 복잡한 잔재주도 부리지 않은 채 이중거래, 부정거래, 조작을 원천 차단할 수 있는 빼어난 기술입니다.

그럼 이 착취적 시스템으로부터 경제적 약자를 해방시킴과 동시에, 거래의 편의도 증폭하고, 거래비용도 0에 수렴하게 만드는 자유와 진보의 벗이 비트코인일까요? 저자는 "그 희소성(아직은 아니나 이제 곧 직면하겠죠)"이 바로 민주주의의 적이 될 핵심 독소라고 지적합니다. 비트코인에 투자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언제든 그 대안이 나올 수 있다고 하면서요(또, "비트코인은 본디 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고도 합니다. 마치 도사님의 예언 같습니다). 저자의 통찰은 참으로 예리한데, 왜 월스트리트가 갑자기 이 가상화폐 투자에 2013년부터 열을 올리기 시작했냐는 겁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중국인들이 부쩍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쪽에서도 일종의 보험이나 헷징 삼아 물량 확보에 나서기 시작했다는 거죠.

3장은 아예 노골적으로 지역 화폐 이야기입니다. "돈은 동사이지 명사가 아니다." 거참, 진짜 멋진 말 아닐까요? 우리말 "돈"은 어원상 돌고돌아서 돈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저자야 당연 그런 사정을 알 리 없지만 돈은 기본적으로 무제한의 유통을 보장해야 한다는 거죠. 돈은 결코 그 자체가 가치를 표상해서는 안 되며, 어디까지나 교환과 유통을 촉진하는 수단에 그쳐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이 생각을 조금만 더 확장하면 모든 투자를 투기로 볼 수 있고, 생산된 재화나 용역은 최종 소비자의 직접 효용 창출에만 쓰여야지 결코 딴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건데 조금만 더 나아가면 공산주의 맞습니다^^ 하지만 본디 약과 독은 배합에 따라 용도가 갈릴 뿐 같은 스펙트럼상에 있지 않습니까? 개혁과 혁신, 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3장은 후반부에서 지역화폐의 활용에 대한 정책 대안이 꽤 구체적이므로 정말 일독할 가치가 있습니다.

4장은 혹시 정말로 공산주의 아니냐는 오해를 훨훨 떨어내기 위해(?), 금융의 탈개인화, 탈중개화가 어떤 식으로 투자 효율화를 가져오는지, 크라우드 소싱 방식이 얼마나 사업자의 위험과 부담을 체계적으로 덜어내었는지를 논증합니다. p281을 보면, "... 망(net)이 제대로 활용되기만 하면, 자금 제공자는 중개기관을 거치지 않아도 되고, 신속한 엑시트(exit)를 위해 한창 진행 중인 생산을 접을 필요도 없어지며... "란 대목이 나옵니다. 제 생각엔 저 뒷부분이 진짜 포인트인데, 순전히 채권자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발생하는 엄청난 개인적, 사회적 비효율과 낭비가 원천적, 이론적으로 차단된다는 함의 아니겠습니까? 진짜 성장과 번영, 행복, 일자리가 "커플링"되어 행진할 수 있다는 벅찬 결론도 되고요.

저자의 결론은 결국 "탈 권력의 분산경제"입니다. 이 분산경제를 그동안 여러 뜻있는 운동가들과 개혁가들이 이루려 했으나, 그 제도적 뒷받침이 미비했고, 그 이전에 약탈적 시스템의 폐해와 모순도 제대로 간파 못 했던 거죠. 디지털은 잠시의 초기 착시를 통해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꿰뚫게 도와 줬고, 현재 일부 기업들이 독점을 통한 파렴치한 오용을 꾀하긴 하나 이런 움직임 역시 깨어 있는 시민들에 의해 간파되어 간다는 겁니다.("오클랜드 시민들, 구글 버스에다 돌을 던지다!") 돈 몇 푼에 내 자존과 자유를 팔지 말고, 무한히 열린 가능성을 보다 생산적이고 윤리적인 방향으로 선용하자는 게 결국 저자의 바텀 라인입니다. 절대 어려운 책이 아니니 꼭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좋은 말만 가득 쓰인 책보다 이처럼 이론적 분석까지가 치밀히 이뤄진 책이 훨씬 유익한 자산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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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 다오스타
정선엽 지음 / 노르웨이숲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지중해 세계는 이 소설에서 커버하는 대목에서 큰 격변기를 맞이했습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아나톨리아를 잃었고, 이 오랜 로마의 텃밭 통치에 대해 확고한 자신이 아직은 없었던 셀주크 투르크는 킬리지 아르슬란의 통치권을 사실상 허여합니다. 이 소설 p148에도 잠시 언급되는 대로죠. 이 소설에서 클르츠(책에는 클로츠라고 표기되네요) 아르슬란은 꽤 매력적인 청년 군주로 묘사됩니다. 볼모로 끌려와 어려웠던 시절 자신과 친하게 지낸 무흐타디를, 술탄위(位)에 오른 후에도 여전히 격의 없이 대하고, 이런 오빠의 성품을 공유해서인지 여동생(공주) 예나도 꾸밈없이 소박한 매력을 드러내더군요. 늙은 피노카 장군의 충성을 이끌어 낸 것도 결국 젊은 군주 자신의 덕망이 주 원인이었습니다. 이런 일화는 다분히 동양 사서에 나올 법한 것들과 매우 닮았는데, 어차피 투르크인들도 동아시아에서 발원한 족속들이란 점을 감안하면 별 어색할 것도 없습니다.

소설의 제목은 "비야 다오스타"이고, 이 이름을 단 청년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전체 내용을 놓고 볼 때 아주 비중이 크지는 않습니다. 이 장편의 마지막은 청년 비야가 자신의 출생 그 근원과 기어이 마주하게 되는 감개무량한 장면으로 장식되지만, 대강은 그 내력을 짐작하는(혹은, 사연 전개를 통해 명시적으로 알게 된) 독자들은 아주 큰 충격을 받거나 하지는 (당연히) 않습니다. 비야는 용감하고 지혜롭지만, 자신이 처한 환경과 가르침 받은 교리의 타당성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고민 많은 청년입니다. 이런 점은 이 스케일 큰 장편 소설의 프로타고니스트들이 대개 공유하는 편이라서, "대체 왜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믿음을 달리한다는 이유로 이웃들과 사생결단을 내어야만 하는가?" 같은 회의와 갈등에 시달립니다. 선량하고 현명한 이들은 공존과 화해를 모색하고,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이들은 피를 끝내 보려 들거나, 터무니없는 횡재를 꿈 꿉니다.

배경이 중세이긴 하나 우리가 대뜸 떠올리는 기사도, 수도원, 숨막힐 듯한 교회 도그마의 독선 따위가 주된 소재는 아니고요(이런 것들도 선명하게 소설 속에서 등장, 제 구실을 합니다만), 리뷰 서두에 적은 대로 동지중해를 둘러싼 인물, 세력, 국가들 사이의 다툼과 음모, 애정, 포용 등이 독자의 감성에 호소하는 기나긴 사연입니다. 이 직전 시기에 그레고리우스 7세가 교황청 질서를 잘 다져 놓아, 그 다음 다음 후임자인 우르바누스 2세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십자군 소집령을 내려 천하에 위세를 떨칩니다. 우르바누스 2세는 여기서 편협하고 근시안적이며 광신적인 면모를 지닌, 명백한 안타고니스트로 세팅됩니다.


반면 이런 서유럽 라틴 - 게르만 - 가톨릭 연합 패권에 저항하려는 쪽은 "로마 제국"인데, 물론 우리가 아는 비잔티움 제국입니다. 소설에선 아무 위화감 없이 내내 "로마 제국"이란 명칭이 쓰이는데, 해당 국가 단위가 존속 기간 내내 그리 자신을 부른 게 사실입니다. 제국의 통치자는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인데, 노련한 외교술로 외침을 현명히 콘트롤한, 성공한 통치자로 꼽힙니다. 여기서도 권신(원로)들을 어르고 달래는 수완이 돋보이지만, 단 소설 속에서는 율리아노스, 아이노스 등 교활한 원로(세나투스, 혹은 Γερουσία를 가리키는 듯합니다)들이 국익은 아랑곳않고 더러운 정치 게임을 벌이느라 황제의 뒤통수를 치죠. 황제가 지중해 해적 세력, 아르메니아의 허약하고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여군주와 연합하려 들면, 기민하게 연락망을 가동하여 낌새를 미리 알아챈 후 선수를 놓는 술책이 일품입니다(그런 게 바람직하다는 게 아니라 소설적 재미가 잘 고안되었다는 뜻).

세상이 참 좁은지 아르메니아의 여성 군주와 지중해를 벌벌 떨게 하는 해적 두목 포네로스(아르메니아 인이 왜 헬라식 이름을 지녔는지는, 여전히 국제 공용어 중 하나로 통하던 게 그리스어라는 사정을 감안하여 이해해 주면 되겠죠)는 친동기간이라는 게 결국 드러납니다(스포일러는 아닌 게, 독자 누구나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을 리드하는 여러 젊은 남녀 주인공 중 이 사내다운 해적 두목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요소입니다. 단, 문제의 야생(?) 소녀 소피아(혹은 첼로시아)가 이처럼이나 많은 인물들과 혈연, 입양 관계로 얽혔다는 건 좀 작위적이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이 무렵 서방의 야만인들이 겁도 없이 무연고의 고장을, 제멋대로의 종교 명분을 내세워 침범해 들어온 건, 셀주크의 패권이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기에 "힘의 공백"이 생긴 면도 분명 있습니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유명한 말도 있듯, 또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드러나듯, 한 국가의 위세가 쇠퇴하면 리더십이 흔들리는 지역을 놓고 반드시 "땅따먹기 경쟁"이 촉발되기 마련인데, 우르바누스 2세는 한편으로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강한 견제구를 던지고, 다른 한편으로 정력은 넘치고 먹을 건 부족하던 야수 같은 서유럽의 봉건 제후들에게 좋은 미끼를 던져 세력 재편을 시도한 겁니다. 이 소설에도 잘 묘사되듯 "로마 제국" 역시 만성적인 내홍에 시달리던 터라 이런 건방진 도전에 정면 대응은 자제하고, 대신 (앞서 말한 대로) 노련한 정치 술책을 써서 국력 소모 없이 정치적,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는 선택을 합니다. 단 이 소설 중에는 직접 언급이 없고, 아이노스의 반란군(제국군)이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를 침공한다는 대목이 상세히 묘사됩니다. 이 무렵 역사가 항상 그러했듯, 점령군의 현지 약탈, 부녀자 강간 등이 끔찍히 벌어지고, 이런 무도함을 징벌하는 건 무공이 뛰어난 프로타고니스트들의 활약입니다.

종교, 외교 등이 주된 화제를 이끌어나가긴 해도, 이 소설의 주역들은 한결같이 검술과 격투의 달인들로 설정되어, 마치 무협지를 읽어나 가듯 인물들 간의 일합 대결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독자들은 극중 세계에서 과연 누가 무공 랭킹 1위, 2위인지 가려 보는 맛을 거부할 수 없을 겁니다. 여기서 돋보이는 건 야생소녀 소피아가 탑 1, 2를 다툰다는 사실인데, 타고난 혈통도 혈통이거니와 워낙 막강한 실력자들에게 어려서부터 무예를 전수받은 터라, 날고기는 남성 전사들도 함부로 범접하기 힘든 판입니다.

누가(루카)의 복음서 14:23에 보면 실제로 그런 말이 나옵니다. Coge intrare... 그런데 이 말은 원치도 않는 이들을 강제로 내 집에 납치, 감금하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분수에 안 맞는다며 초대를 사양할, 낮고 가난한 이웃들을 강청이라도 해서 배를 채우게 하고 기쁨을 나누라는 뜻이지, 양심을 모독하고 신념을 강제하라는 뜻이 아니죠. 사랑과 구원의 명분을 허울 좋게 건 뒤 자행하는 온갖 간악한 범죄에 대해, 작가는 이런 등장인물들의 위선과 우행을 통해 신랄히 풍자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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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개와 인간의 마음 -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마음의 비밀
대니얼 웨그너 & 커트 그레이 지음, 최호영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정말 멋진 책입니다. 편제도 우아하고, 예거(例擧)되는 샘플들도 적절 참신하며, 문장도 유려합니다. 결정적으로, 점근해 가는 결론과 주제의식도 보편 공감을 끌어낼 만큼 타당합니다(책을 완독하고 좀 더 생각에 잠기면, 참으로 심오하기까지 했다는 판단입니다). 저자 중 대니엘 웨그너는 아직은 활동을 더 이어가실 연령이었으나 4년 전에 아깝게 타계했다고 하죠. 제자인 커트 그레이의 공헌이 이 책에서 어느 정도인지는 우리가 알 길이 없으나, 앞으로 이런 멋진 저술(후속작이 꼭 나왔어야 했는데요. 작금 이 분야 연구가 점점 가속 진행되는 상황을 고려하면)을 또 독자들이 만날 수 있겠을지를 떠올리면 참으로 아쉽습니다.

제목을 보십시오. "신과 개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극상, 최하, 평균을 가리키는 건가? 글쎄요. 저는 그보다는, 이 책의 원제에 좀 주목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마인드 클럽". 클럽이라고 해도 다양한 성격과 구조를 가졌겠습니다만, 이 클럽은 일단 "마음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가입 가능합니다. 클럽에 못 끼는 이들이라면, 채소 같은 걸 일단 저자는 듭니다. (ㅎㅎ 그러나 속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갓난아이는? 고양이는? 죽은 자의 영혼은? 회사, 기업은? 세번째 것에 대해서는 그 존재를 확증 못한다뿐, 혹 그런 게 있기나 하다면 대번에 가입을 시켜야 하지 않나 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영이라는 게, 생전의 기억도 다 잃었고 관계 일체도 상실했다면, 그래서 그저 부유할 뿐이라면, 과연 "마음"을 가졌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죠. 네번째가 차라리 더 복잡한 문제입니다. 일찍이 기에르케 같은 학자는 "유기체설"을 주장한 바 있고,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거론한 니부어를 꼭 상기하지 않더라도 기업에 속한 개인은 순수 개인적 가치관과는 또 별개의 논리와 목표로 움직이는 법입니다. 마케팅 학자들은 "기업에는 반드시 독자적인 논리와 개성과 정신이 스며있어야 하며 그렇지 못한 기업은 영속하지 못한다"고도 했으니 어찌어찌 ㅎㅎ 앞뒤가 맞아떨어져 가기도 하는군요! (농담입니다)

동물이 고차 사고 능력을 못 갖췄다는 데에는 많은 이가 동의하겠지만,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어난 여러 사고나 범죄 등에 대해 "그들"이 책임을 져야 옳을까요?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현재 사고를 일으킨 동물 등에 대해서는 관련 법규가 살처분 따위를 강제하지만, 그게 그 동물들에 책임을 묻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지은 죄에 대해 벌을 내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대개는 입법 목적이, 같은 위험을 재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인간과 사회를 방위할 의도로 그런 조치를 집행하는 거죠. 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도, 인간에게만 이행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동물은 그럴 자격조차도 없는 겁니다. 아동, 심신상실자, 지적 장애인, 만취자(단, 여기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예외가 적용되나 근래 근본적인 재고가 이뤄지는 편이고, 독일에서는 예전부터 정상인이나 거의 같게 취급합니다[하도 술을 많이 마시니 봐 줄 수가 없음]) 등에 대해 법이 책임 감경을 지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몇 해 전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장애인이 어린 아이를 창 밖으로 던져 숨진 사고가 일어났고, 바로 며칠 전 맹견이 어느 한식당 대표를 물어 사망케 한 끔찍한 일도 있어서 더욱 실감이 나기도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목청을 높이고, 자신의 과오를 합리화하기 위해 또 엉터리 구실을 지어내는 인간도 이와 같다고나 할까요? 여튼, 어떤 경우에도, 개한테 "책임"을 묻는다면 그건 오히려 인간의 품위를 훼손하는 겁니다. 선반 위에서 무거운 다리미 등이 떨어져 발을 다쳤다고 치고, 그 다리미를 마구 때리거나 부품 해체 하는 식으로 "벌"을 내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습니까? 다만 그 도구가 꽤 보기 싫다거나, 재발 방지를 위해 보관 장소를 바꾸거나 아예 갖다 버리거나 할 뿐입니다. 개도 마찬가지죠. 법에 의해 물건처럼 처분(도살 등)될 뿐이지만, 정말로 "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런 분들은 진짜 개한테 마음이 있고 선악을 분별할 능력이 있다고 믿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뭐 누가 알겠습니까? 사정이 진짜 그럴 수도 있고, 이 책의 흥미로운 탐구 방향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진짜 압권은 물론 우리 "인간 마음"에 대한 분석입니다. 저자는 행위자(agent)와 수동자(patient. 이 단어를 이런 용법으로 쓰는 게 혹 독자에게 낯설까봐, 책에서는 우리의 당혹을 다 이해한다는 듯 친절한 설명부터 베풀고 시작합니다. 참으로 공감 능력이 뛰어난 저자들!ㅋ)로 대별하고, 다시 이를 선과 악 두 상황으로 나눠 2x2 매트릭스 프레임으로 논의를 전개합니다. 결론만 말씀 드리면, 우리 인간의 마음은 일단 타인(그러니 분명 사람입니다)을 평가할 때, 이 네 가지 범주 안에 일단 편입시킨 후, 경우에 따라 대단히 부당한 평가도 내리곤 한다는 겁니다. 히틀러 같은 악의 행위자를 무작정 단죄(심지어 그가 아주 어린 시절 한 일이라든가, 극히 드물겠지만 부분적 선행을 했다고 쳐도)하는 건 뭐 그러려니 합니다만, 테레사 수녀 같은 "영웅"에게도 우리는 그녀의 고통에 대해서는 매우 둔감해진 채, 부당하게 의무와 과업을 지우려 듭니다. 이게 너무나 재밌다는 겁니다. 긍정/부정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이런 타입에 대해 감정의 투사를 안 하려 든다는 거죠. 이를 두고 우리의 마음은 "행위능력은 상당하지만 경험 능력은 없다고 판단한다"는 게 저자의 관점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기제가 무엇인지, 또 지각 대상에 따라 각각 어떤 다른 기제가 발동되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입니다. 이 용어들은 타 분야 용례와 매우 다른 성격이므로 주의해서 읽으셔야 합니다. 특히 "행위능력"은 법학에서의 쓰임새와 전적으로 무관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그 유명한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의 말을 인용하는군요.

p134에 보면 환각사지통증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걸 두고 전에는 "유령 감각(원어의 직역에 가깝습니다)"이라고 했으나, 요즘 번역서에는 이처럼 더 기술적 정확성을 기한 번역어가 쓰이더군요. 이미 사지(의 일부)가 잘려 나갔는데도, 왜 어떤 이들은 여전히 그 부위에 대한 아픔을 호소할까? 심리학과 의학이 만나는 기묘한 지점이자 연구 과제이며, 이 책은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제법 구체적인 해명을 실고 있기도 합니다. 플라시보 효과, 노시보 효과 등은 그저 무해하거나 우스운 착각이 아니라, 이런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고통 경감의 수단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최후 통첩 게임은 경제학에서도 다루는 이슈인데, 확실히 근년에는 심리학과의 콜라보가 밀도 높게 이뤄지는 경향이죠. 본디 경제학이란 게 "개인의 합리적인, 또 가장 효용(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이 높아지는 선택"을 탐구하는 데서 시작했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논리적 귀결입니다. 이 말이 왜 나오나 했는데, 저자는 "마음의 부정성 편향"을 논증하며, 왜 우리가 어린아이, 오래 사용한 낡은 기계가 내 뜻대로 말을 안 들을(?) 때 더 마음씀을 강화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학문상 난제를 이처럼 일상의 쉬운 예와 결합해서 풀어 주는 게 이런 대중서의 과제이긴 합니다만, 이런 저자의 놀라운 언변과 연상 능력을 보며 그 자체가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우리는 "기계(꼭 컴퓨터가 아니라도 됩니다)"의 마음이 무엇인지 무의식적으로나마 헤아리는 우리 자신(바보스럽죠)을 메타인지하게 됩니다. 적절한 예시의 항연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만 우리 모두가 기억은 하는 "다마고치" 열풍이 또 빠질 수 없습니다.

몇 달 전 <기억이 사라지는 시대>라는 책(이 책은 "기억의 외주화"라는 개념을 씁니다)을 읽고 리뷰를 남기기도 했습니다만, 이 책에서는 정통 심리학의 성과와 개념을 통해, 날이 갈수록 심화하는 기억의 미디어 의존 현상을 두고 "교류적 기억(transaction memory)" 같은 확립된 범주화를 더 빈도 높게 시도합니다. 그저 내 머리에만 기대는 게 아니라, 두뇌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른 매체에 연상의 끈만 걸쳐 놓고,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할 때는 더듬어 찾아들어간다는 겁니다. 당연, 인터넷이나 웹이 생기기 전에도 인간은 이런 방법을 썼으며, 부부라든가 친밀한 관계에 놓인 "사람"에게도 이처럼 기억의 편린을 위탁합니다. "당신 말야. 그 ..... 뭐였더라?" "아 .... 말이지?" "맞아!" 아주 사이가 나쁜 실패한 부부 아니라면야 일상적으로 보는 풍경이죠. 친구 사이의 추억 공유도 이와 같기에 우리는 그 "기억"을 분담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를 본 친구를 자주 불러내어 감정적 협업을 이루는 겁니다. 혼자 추억에 잠기는 것과 효용이 차이날 뿐 아니라, 기억 자체가 나눠져 있기에 혼자서는 감흥에 온전히 젖을 수도 없죠.

선전이나 세뇌 과정에서 적으로 삼아야 할 인간을 객체화, 대상화할 때, 우선 "이 자는 감정이 없다. 자비심이나 동정 따위가 없고 우리와 공유하는 바가 전혀 없는 동물과도 같은 존재다" 같은 왜곡된 관점을 주입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래야 적에게 사정 없는 공감 결여(그러니, 반대로, 공감 결핍이란, 그런 왜곡을 하거나, 그런 거짓 선전을 듣고 잘못된 판단을 한 이의 특징이죠)의 공격을 퍼부을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꼭 누가 시켜서 그러는 것만도 아닙니다. 남을 공격하고 싶을 때 딱히 근거가 없으면, 자신의 동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멍청한 인간들도 워밍업이나 하듯 습관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르기도 하죠. 대체로 아주 유치한 자충수에 가깝기 때문에 악행과 어리석음의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만. (생각없는 동물도 여튼 살처분은 당합니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튜링 테스트, 고대인들이 일찍부터 발견해 낸 "마음, 아니무스", 전두엽 절제술 등 대중서에서 자주 접한 "마음의 전통적인 토픽"들을 다시, 다만 저자의 개성적이고 신선한 관점으로 재핵석된 채로, 만나게 됩니다. "마음"은 꼭 깨어 있고 명징한 의식하고만 연결되는 걸까요? 저자는 수면 중의 마음(?), 뉴런이 어느 정도 활발히 작동하는지는 서술하며 "마음"의 알쏭달쏭한 실체에 한 걸음 더 파고들어갑니다. p222에서도 다른 책들에서 종종 접하던 "최소 의식 상태" 등이 낀 스펙트럼 도식화가 보이는데, 아는 내용이라고 해도 저자의 설명이 워낙 유려하여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자폐아에 대해 우리가 그처럼 관심(물론 저자, 혹은 독자로서 인식적 관심이지 동정이나 공감은 아니겠습니다만....)을 쏟는 이유는, 이 환자, 수동자의 정확한 상태를 파악함으로써 역으로 우리 자신의 의식, 마음에 대해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첵 원제가 "마인드 클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진짜 "클럽" 이야기가 나와줘야겠는데, 이 책 7장에서는 개인 단위가 아닌 집단 레벨에서 어떤 다른 차원의 인식(혹은 왜곡)이 이뤄지는지, 혹은 개인의 능력을 떠나 다소는 신비의 영역에 접근하며 어떤 깨달음에도 이르게 되는지(상당수는 신빙성이 크게 떨어지나, 저자의 관심은 타당성 여부가 아니라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규명 쪽입니다)에 대해 흥미진진한 논의가 펼쳐집니다. 마녀사냥, 음모론 등은 아주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조금만 신경을 집중하면 오류라는 걸 금세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에 가담하여 갖가지 광기를 연출하는데, 이런 사람들도 사석에서 만나서 말을 하면 "자신이 가담 안 한 음모론, 집단 광기"에 대해서는 태연히 비판을 한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대개는 참된 자존감이 크게 떨어지는 미숙한 인격이라, 집단 심리에 휘둘려 순간 자신의 에고가 크게 확장되는 양 착각을 하곤 그 맛을 못 잊어 어리석은 충동에 자꾸 빠지는 거죠. 저자는 "링겔만 효과" 등 다양한 개념화를 통해, 집단 속에 빠짐으로서 자신 개인의 (못나고 초라한) 마음을 잃고, 대신 난폭하면서도 거대한 "집단의 마음"을 거짓 이식하는 어리석음을 신랄히 분석합니다.

"신 헬멧은 가장 심오하고 가장 강렬한 종교적 경험이 어쩌면 뉴런의 과잉 자극에서 비롯한 것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여기서 신 헬멧이란 마이클 퍼싱어라는 과학자가 고안한 장치로서, 종교적 법열이라는 게 일개 전기적 자극의 유도 결과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뒷받침합니다(종교를 전혀 안 믿는 이에게도 전기적 조작을 통해 비슷한 환희를 느끼게 할 수 있음). 이 역시 내심으로는(속"마음"으로는?), 우리 모두가 다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꼭 종교가 아니라도 궁극의 경지 비슷한 게 있다고 기대를 걸어 온 이들에게는 참 맥빠지는 결론이지만 말입니다. 신의 마음이란 결국, 마음에의 침잠을 통해 유한성을 극복하려 발버둥친 우리 불쌍한 인간들의 간절한 희구를 가상으로 투영한 개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죠.

"우리가 지금까지 다룬 모든 마음 중에, 신에 대한 물음은 아마도 가장 논란의 소지가 클 것이다.... (중략).... 그러나 결국은 두번째로 흥미로운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마음만큼 흥미로운 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을 연결다리로 삼고 저자는 마지막 10장에서 "인간 자신의 마음"을 웅대하게 정리합니다. 사후 정당화, 실행 의도, 의무 장치, 몰입 등 역시 전통적인 심리학 개념, 장치 등을 통해, 저자는 이처럼 심오한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가 가진 건 지각뿐이다. (부처님의 말처럼) 사물은 그 보이는 것과 같지도 않고, 또 다르지도 않다."

심리학이 의심의 여지 없는 전통 과학의 본령이면서, 또 왜 우리에게 그토록 유용한 도구인기도 한지 잘 확인시켜 주는 멋진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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