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1 - 문학사를 바탕으로 교과서 속 문학 작품을 새롭게 읽다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1
채호석.안주영 지음 / 리베르스쿨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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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백범 김구 선생은 이렇게 말씀한 적 있습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의 영역 중 가장 빛나는 하나가 바로 "문학"입니다. 백범의 동시대에도 이미 한국(조선)의 문학은 재주 뛰어난 이들에 의해 그 아름다움을 활짝 뽐내었고, 그 찬란한 성과물들은 이 책에 이처럼 함뿍 그 정수가 녹아 있습니다.

p27에는 "마지막까지 일본 제국주의와의 타협을 거부한 진정한 지식인 현진건"이란 제목 아래 여러 컷의 사진이 제시됩니다. 좀 독특한 외양을 하셨던 염상섭과는 달리 현진건의 실제 모습은 다른 책(참고서류)에서 좀처럼 찾기 어려웠는데, 이 책은 그간 독자들이 자주 접하지 못했던 자료들을 이처럼 넉넉히 소개해 줍니다. 레퍼런스북에 작가 이름과 작품의 개요만 앙상하게 나오면 그 작품의 참된 의도나 주제를 이해하기도 힘들고 매 순간이 고역인 암기과목으로 전락하기 일쑤입니다. 헌데 이처럼 작가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함께 만난다면, 작품은 부호가 아닌 생명을 지닌 스토리로 독자들에게 진정성 갖춘 만남으로 와 닿을 수 있죠. 이 책은 여기 말고 다른 파트에서도, 예컨데 백석을 설명한 p223 등에서도 "게다가 얼굴까지 번듯했지요." 같은 친근감 있는 서술로 독자와의 거리를 좁힙니다.

진정한 천재성이란 특정 기법의 구사에서만 제한적으로 기량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전부터 확립되어온 모든 지식의 기반을 충실히 닦고, 그 위에 자신만의 고유한 기여를 더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피카소는 이미 유년기부터 라파엘로처럼 데셍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만약 그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작정 입체파의 생경한 기교만을 추구했다면 일개 광인 이상 취급을 못 받았을 겁니다. 클래식이 먼저 있고 그 격(格)을 파괴(극복)하는 창의가 설 수 있는 건데, 백석은 영어, 러시아어 등 다국어에 고루 능통한 진정한 천재였고 그의 시대에 이뤄진 성과를 모두 흡수한 성실한 학습자였음이 책에도 잘 나옵니다.

"이런 것도 소설이 될 수 있냐?" 박태원의 작품 <소설가 구보 씨의 ...>가 발표되었을 때 대중의 반응은 대뜸 이런 식이었습니다. 헌데 세월이 80여년 가까이 흐르고 어느덧 고전의 한 모범으로 작품을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마저, 이 작품을 접하고 받는 느낌은 이런 게 대부분 아닐까요? "시험에 나온다니까 공부하는 거지 뭐 이런 걸 소설이라고...?" 바로 이런 거리감과 낯섦을 극복하고, 시대를 앞서간 재사(才士)의 감성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게 공부의 핵심이고 목표입니다. 왜 구보씨는 배울 만큼 배웠으면서도 군중 사이에서, 매일 찾는 "다방"에서조차 알 수 없는 겉돎에 빠져들까요? 이는 어쩌면 학생들이, 이미 정평이 난 고전과 만나서도 마냥 친해지거나 그 장점을 바로 알아볼 수 없는 당혹감과 서로 통한 감정일 수도 있습니다. 책은 쉽고 직관적인 문장으로, 왜 박태원과 그의 분신인 작품 속 자아 구보 씨가 작중에서 이런 느낌 이런 행동을 보이는지 독자에게 친절히 설명해 줍니다, 캐릭터 구보 씨가 거닐었던 1930년대 경성의 풍광도 함께 사진으로 제시하여 그의 감미롭거나 쓰디쓴 고독의 연원이 무엇이었을지도 짐작하게 돕고요.

"일반적으로 '타고 남은 재'는 사물의 끝을 의미합니다..." 책 p111에 나오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한용운의 작품 세계에서 이는 사랑과 열정과 숭고한 이상의 새로운 시작을 뜻하기도 하는데, 시인이 우리가 다 잘 알듯 스님 신분이고 거의 모든 작품이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쓰여졌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불교적 세계관에서 완전한 끝은 어디에도 없고, 오히려 모든 단계나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자 완결입니다.

p27에는 20세기 초의 복식을 한 여성 네 분이 물레를 잣거나 다듬이질을 하는 듯한 사진이 나옵니다. 여성은 많은 차별을 받았고, 일제의 혹독한 식민 지배 체제에서 이는 이중의 질곡으로 작용했습니다. 신소설 작가 이해조는 (이 서평 앞부분에서 논한 여러 작가들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활동했는데, 그는 물론 친일 성향으로 많은 지탄을 받았지만 대표작 <자유종>에서만큼은 분명히 자리잡은 진보적 여성관으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까지 찬성과 지지를 이끌어 냅니다. 바로 앞에는 "... 오늘날처럼 TV 프로그램이 없었던 때라서 관민(官民) 공동회 같은 행사를 통해서나..." 백성들이 최신 지식과 시사 동을 접했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이처럼, 작품 속에 제시된 여러 상황이나 주제는 그 시대의 제약과 한계를 인식하지 않고는 참된 의미를 파악 못 할 때가 많습니다.

pp. 19~23에는 다소 이색적인 작가의 작품이 나옵니다. 이해조 이인직 등과 함께 신소설 창작자의 대표로 언제나 거론되는 안국선의 <금수회의록>인데, 뜻밖에도 동물들이 풍유화한 캐릭터로 등장하여 인간사회의 온갖 모순과 비리를 성토한다는 내용이죠. 이 작품은 조선(정확하게는 합병 직전의 대한제국) 당대의 문제를 꼬집었다기보다 표면상으로는 동서양 불문하고 문명 국가 제반의 타락상을 비꼬았는데, 도둑이 제발저린다고 이 책은 통감부에 의해 판금조치가 내려집니다. 책에는 1909년으로 시점이 나오는데 다 알다시피 경술국치 1년 전이죠. 책에서는 "기독교에 의존하여 사회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 드는 아쉬움"을 지적하는데 제가 학창 시절 이 작품을 처음 만났을 때는 아쉬움이라기보다 "낯섦, 생경감"이 느껴졌습니다. 꼭 안국선이 그랬다는 게 아니라 당시 애국 계몽 운동 계열 지식인 중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많았고, 현세기복 풍조가 일절 배제된 청신하고 금욕적이며 보편적 박애주의로 충만한 건실한 프로테스탄티즘이었다는 점에서, 기풍이 타락한 구태를 일소하고 대신 지도이념으로 기능할 자격이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의 <날개>를 소개하며 마지막 장면의 배경으로 미쓰코시 백화점, 현재의 서울 중구 신세계 백화점 사진을 실어 둔 게 눈에 띕니다. 저도 1년 전에 핸드폰 바꾸러 저기 갔다왔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 노른자땅 한복판에서 시대의 유행과 멋을 단면으로 상징하며 위용을 뽐내는 모습이 흐뭇하네요. 이처럼 잘 알려진 천재의 작품이나 작풍(作風)이라 해도 그 배경이 된 건물, 분위기를 친절한 설명과 함께 제시하는 건 어느 독자에게나 유익한 도움을 주고, 새로운 지평에서의 이해를 촉진합니다.

p126에는 "현대 희곡의 설레는 출발"을 설명하는데, 이 책은 여기서뿐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모든 장(章)에 지도를 곁들입니다. 문학사를 해설하는 책에 지도가 왜 끼어야 하는지 의아해할 분도 있겠으나, 중국, 소련(어느새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소련으로 바뀌었네요)., 일본 열도 사이에 낀 한반도(물론 아직 분단 이전)의 위치를 보여 줌으로써, 시대의 변천과 지정학적 제약 사이에서 문인들이 느낀 갈등과 현실 초극의 의지를 보여 주는 데 이만큼 효과적인 상기 장치도 없는 듯합니다. 간혹 원산 총파업, 6. 10 만세 운동 등 이정표적인 사건도 관련 지역과 함께 표시됩니다.

우리에게는 <문장강화>로 유명한 이태준의 수필집 <무서록>에 실린 한 작품인 "물"에서, 그는 노자적 세계관인 "상선약수" 즉, 물보다 더 선한 것은 없다는 초연한 철학을 드러냅니다. 유유무언이라는 성어도 나오고, 능인자안이라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식민치하라는 혹독한 조건 아래에서도 어쩼든 지식인은 지식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며 시대의 질곡도 헤쳐 내어야 한다는 그만의 결기와 고뇌를 잘 드러냈다고 하겠습니다.

요즘은 스토리텔링과 이미지 중심의 학습이 대세입니다. 파편화한 암기와 지겨운 기계적 반복만으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응 못하고 낙오하는 인생이 되기 쉽다는 각성 덕분이겠지요. 스토리텔링과 이미지의 성공적인 내면화, 창조적 이식이 이뤄졌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무척 간단합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재미있게 한 편의 이야기를 마쳤다는 뿌듯함이 들면, 또 이를 바탕으로 나도 나만의 이야기가 하나 생겼다는 성취감이 생기면 그 독서는 성공입니다. 학생들뿐 아니라 성인, 학부형들도 혹시 자신의 학창 시절 아주 괴롭고 따분하게 문학, 국어 시간을 "때워야" 했다는 분들 있으시면, 이 산뜻한 책으로 새로 시작해 보시는 건 어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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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닐. 앨범. 커버. 아트
오브리 파월 지음, 김경진 옮김 / 그책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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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많은 음반 애호가들에게, 앨범의 컨텐츠를 창조하고 연주하는 뮤지션 본인들만큼이나 레전드로 추앙받았던 앨범 커버 디자이너 그룹 힙노시스에 대한 책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판 수집하는 동네 형 누나들 집에 놀러가면, 사실 겉치레 폼으로 남들 하니까 따라서 모으는 분들도 있고(그런 유행도 한때 있었거든요. 요즘 애들은 모르겠지만) 컬렉션은 그들에 비해 좀 양적으로 빈약해도 내공이 그윽한 "진짜 수집가" 형들이 또 따로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들어야 배울 게 생기는데, 이런 분들이 항상 폼 잡고(아니지만) 꺼내는 이야기가 힙노시스의 커버 타령이었습니다.

힙노시스 하면 핑크 플로이드 이야기가 또 자연 따라나옵니다. 요즘은 컨텐츠 믹스, 퓨전 미디어를 아예 치밀한 기획 하에 줄줄 엮어내는 게 대세이지만, 핑크 플로이드는 그 예전부터도 공연, 음반 포맷 등이 하나하나가 정성이 깃든 총체적 기획자들에 가까웠죠. 역설적이지만 참 상업적이라는(죄송합니다) 느낌도 들 만큼 말입니다. 허나 예술적 감각도 없으면서 팬들(호갱) 지갑만 노리고 별 필연성도 없는 타이-인  매체를 마구 찍어내는 것과, 핑크 플로이드처럼 내 예술은 이런이런 미디어들에서 이 정도 완성도로 동시 구현, 제작되어야 미학적으로 떳떳하게 완성된다며 분명히 선언하는 경우는 물론 구별되어야 합니다. 여튼 한국에서는 핑크 플로이드 팬들도 많았고, 레드제플린(소개가 필요하겠습니까?), 스콜피언즈(이분들이 인지도는 한국에서 더 높았겠죠?), 데프 레퍼드(한국에서는 1990년대 초반에 많이 사랑받았습니다), 앨런 파슨즈 프로젝트, AC/DC(지금은 많이 잊혀졌죠) 등의 지지자, 추종자들이 많았습니다. 이 그룹들의 앨범에 모두 힙노시스가 간여했으니 음악을 건성으로 듣지 않고 레코드판 표지까지 꼼꼼히 보고 어루만지고 말 그대로 완상하던 열성 팬들은 사실 디자인의 최소공배수(어쩌면 최대공약수?)가 무엇인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던 형편입니다.

왜 이제서야 나왔을까? 이런 만시지탄에 가까운 느낌보다 더 절실한 건, 토머스&헛슨의 하드커버 초판이 나오고 불과 몇 달 되지도 않아 한국에서 이처럼 빨리 번역서가 출간되었다는 반가움입니다. 출판사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상업성이나 당장의 수익을 보지 않고 오로지 컨텐츠의 가치만을 보고 가겠다는 다짐은 많은 출판사들에서 표현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곳은 매우 드뭅니다. 가격도 이 정도면 딱 적정 수준이라 생각합니다. 경제학에서 가격차별화 원리라는 게 있죠. 대중적으로 엄청 많은 판매고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면 아예 강한 수요(소장 욕구)를 가진 층(어쨌든 사고야 말 사람들)을 겨냥하여 확 높은 가격을 책정하는 게 하나의 전략인데, 제 느낌으로 자신들의 청춘 낭만 한 자락을 소중히 추억하며 souvernir를 챙기고 싶은 분들에게는 십만원대를 불러도 기꺼이 구입하지 싶거든요. 그런데 누구에게나 이 가격이라니.

저는 개인적으로 힙노시스의 모든 작품이 하나하나가 높은 예술성을 지녔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여튼 그들의 재능과 천재성은 크리에이티브와 컨셉 창조 쪽이었으며, 개별 작품은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해당 아티스트들과 제작사 쪽과의 어떤 타협이 개입할 수밖에 없습니다(이런 지존들에게는 제작사가 노터치라고는 해도 말입니다). 앨범 커버는 어디까지나 커버일 뿐이며, 대중(미술 팬들도 아니고 팝 뮤직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overture(좀 심한가요?)이며, 힙노시스 자신들의 "솔로 엑서비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며 핑크 플로이드의 "위 돈 니드 노 에듀카이션(다들 아시다시피 문법적으로 틀린 영어죠)"를 흥얼거리던 분들, 운 좋게 공연 영상의 한 자락까지 함께 구경할 수 있던 분들은 이게 단지 노래 한 곡 듣는 체험이 아닌, 영화 같은 종합 예술의 감상, 나아가 일종의 제의(祭儀)에 참가하는 양 어떤 포괄적인 정화, 전율을 체험했을 겁니다. 일종의 영혼 씻김굿이나 한 양 멍한 느낌을 맞고, 이 감정의 상태를 혹 사진 한 장으로 찰깍 찍어둘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감성의 자락은 일기장에 개인적으로 자기 언어로 포착할 수 있습니다. 허나 그걸 구상으로 캡처한다면 이건 다른 재주를 부려야만 가능할 텐데 그걸 대신해 주는 게 앨범이면 자켓 디자인이고 공연이나 행사면 포스터입니다. 그게 일종의 당위이고 그걸 못 하면 해당 디자이너가 무능한 거죠.

이걸 거의 한 번의 실망도 없이 "사전(事前)" 시각 독후감샷을 대신 만들어 준 게 (누구누구의 팬들에게는) 바로 힙노시스였습니다. 그러니 그 세대에 속하는 분들 중, 힙노시스가 누군지 전혀 모르겠다고 하는 이들은 벌써 불행하게도 성장기의 결핍 진한 한 줄 상흔이 마음을 긋고 지나간 셈이라고까지 한다면 어떨까요, 좀 지나칠까요? 사실 진짜 딱한 분들은, 해당 음반을 모았으면서도 거기 힙노시스 이름자가 박혀 있는 줄도 모르고 넘어간 분들입니다. 커버는 그냥 포장지인 줄 아는, 선물 할(받을) 때도 포장지까지 함께 정성을 들이는(간직하는) 생의 묘미를 모르는 나무토막 같은 무정함이죠.

일단 저자 명의는 오브리 파월입니다. 서문은 피터 게이브리얼이 따로 쓴 게 실려 있고요. 이런 책에서 그냥 그들의 그 장구한 세월 빛나는 작품들만 구경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음반 디자인을 이루는 방법"까지 니와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초보자도 따라하다 30일만에 도사되는 노하우!" 같은 천박한 상업적 눈속임과는 천양지차이며, 어떤 점에서 이 역시 그들의 회고록 편린에 가깝습니다. "우린 이런 식으로 했다." 재능도 없고 남의 재능을 싼 값에 카피할 헛된 욕심만 가득한 비천한 정신이 감히 따라할 수도 없는 경지, "노닒".

저는 예를 들어 니노 로타라든가, 엔니오 모리코네라든가, 존 윌리엄스, 한스 지머 같은 이들이 영화 제작에 참여할 때 과연 해당 작품을 꼼꼼히 보고 그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후에 작곡을 하는지, 아니면 그저 평소에 떠올랐던 근사한 악상, 멜로디에 적절히 재가공, 재활용 작업만 부가해서 내놓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거장이라고 해도 모든 프로젝트에서 그 태도나 자세가 일관되지는 않을 겁니다. 헌데 이 책을 보면서 놀란 건, 힙노시스(중에서도 오브리 파월)의 작업(크리에이션) 마인드는, 여튼 음반을 완전 몰입 완전 통독(?) 한 후에 자기들끼리의 난상 토론을 거쳐서 작품을 뽑아낸다는 겁니다. 오히려 겸손하게도 파월은 "앨범 커버는 해당 앨범의 일부일 뿐 우리 자아의 반영, 고집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취지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의 작업이기에, 우리 팬들은 커버에서 "같은 팬, 감상자의 자격으로" 힙노시스와 공감하며 때로는 감상의 가이드라인까지 시각적으로 제공 받는 겁니다. 마치 영화 테마 음악이 그 작품의 잔향을 압축 요약하듯이 말입니다. (이런 앨범 커버 디자인과는 방향성이 정반대인 셈이죠. 시각을 청각으로 치환, 요약하는가, 반대로 청각 체험을 시각으로 압축하는가)

왜 음악인들의 정규 작업 결과물을 "앨범"이라고 부르는지 깊이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유력한 근거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힙노시스 같은 예술가들의 참여와 기여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앨범은 동시에 우리 팬들의 추억 구축에도 힘차게 아름답게 이바지하는 셈이고요. 이 "힙노시스 전집"은 이제 그들이 한 시대를 마무리하며 팬들(어느새 그들의 팬까지 되어 버린 우리들)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앨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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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갈래 길
래티샤 콜롱바니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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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잘못이 아닌 시스템의 모순과 타인들의 악의 때문에 부당한 고생을 해야 하는 여성들, 사회 하부 구조의 오물, 배설물을 피땀 흘려 코를 막아가며 치워야 하는 가장 안타까운 희생양들의 사연 세 꼭지가 이 소설 속에 담겨 있습니다. 책을 펴들 때도 안타까웠고, 책을 덮을 때도 여전히 마음이 무겁습니다(사실 잠시나마, 혹 통쾌한 반전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말이죠).

현실은 여전히 다양한 방법으로 한계에 내몰린 여성들을 괴롭힙니다. 만약 전혀 다른 곳에 떨어져 있는 이들 약자들이 함께 손을 잡을 계기가 마련되면 혹 이들에게 희망이 생길까요? 일단 이런 가정 자체가 현실화하기 아주 어려운 가능성입니다. 현실은 고사하고 소설 속에서, 특히 프랑스 여성 작가 래티샤 콜롱바니의 이 장편 속에서라면, 어째, 좀 희망이 보일까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왠지 그럴 낌새도 좀 보여서 기대를 품었습니다만, 결말은 "역시나"였습니다.

소설 속에는 완전히 분리된 공간 안에 각각 배치된(던져진) 세 여성의 삶이 소개됩니다. 나이는 서로 비슷한 또래인 듯하고 (캐나다의 사라가 좀 많은 편일까요?), 시대도 거의 같은 구간처럼 보이지만 여튼 이런 사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셋은 한 장소에서 만나기는커녕 서신 교환(혹은 요즘처럼 가상 네트워크가 발전한 세상에 어떤 매체를 통한)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이 지구 반대편 어느 구석에 살았었다는 사실도 모를 겁니다.

이탈리아와 인도는 멀지 않아! 거의 같은 대륙이라고 해도 되지. 음... 물론 유럽과 아시아가 통으로 붙은 땅덩어리이긴 합니다만 멀긴 꽤 멀죠. 항공편을 통해서건 혹은 어떤 다른 기준을 들이대더라도 말입니다. 줄리아(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 북미 어느 나라에서도 이처럼 흔한 여자 이름이 또 없겠네요)네는 가발 공방을 차려 제법 넉넉한 벌이와 명성을 유지하며 시칠리아(세상에, 더군다나 여긴 여튼 "대륙"은 아닙니다)에서 살아온 집안입니다만, 그 부친이 쓰러져 의식불명이 된 후에는 파산 직전인 상태입니다. 생계가 어려우니 줄리아는 원치 않는 남편감에게 "취집"이라도 당장 해야 할 판인데, 자기만의 소중한 꿈을 가꿔 온 그녀로서는 하루하루가 죽을 지경이고 절망입니다. 시칠리아 전통 요리 칸놀리(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많이 건너온 미국에서는 "캐놀리"라고 발음하는)를 맛보는 순간에도 "다음 덮쳐오는 파도는 나를 봐주지 않고 바로 삼켜버릴 거야." 같은 불안한 심경은 그녀를 떠나지 않습니다.

스미타의 처지는 더 안타깝습니다. 그녀는 인도 북부의 우타르프라데시에 거주하는 유부녀, 불가촉천민인 달리트 출신인데, 해가 저물 때까지 대변 치우는 일을 합니다. 배설물의 처리는 어느 농경 문화권에서도 정해진 방식이 있었고 천민 계급도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했지만 이 둘이 질기게 폐습에 의해 결부된 건 중요 문화권 중에서는 인도 말고 다른 예가 많겠나 싶습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21세기인데, 농경 사회가 배설물 문제 하나를 슬기롭게 시스템상으로 처리 못 한다는 게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이런 분들이 흔히 그렇듯 집안에서는 폭군 같은 남편에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학대를 받는데, 어린 딸(소설에도 나오지만 저 반대편 라자푸르에선 출산 직후 "쓸모없는 딸들"은 생매장에 가깝게 유기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네요)과 함께 뭔가 탈출구를 찾아야 합니다. 어떤 삶도 지금 이 지경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이 두 여성과는 전혀 극과 극의 삶을 사는 화려한 커리어 우먼이 바로 사라입니다. 미모도 출중하고 여태 살면서 좌절이란 겪어 본 적 없는 무적의 커리어를 가꿔 온 그녀입니다. 희한하게도 남자가 이런 삶을 살면 그저 공포와 존경의 대상일 뿐일텐데, 사라가 여자다 보니 그저 자기 일만 열심히 하는데도 만인을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보는 앞에서는 굽실거리며 최상의 존경을 표하는데, 그럴 만한 자격과 가치가 충분한 성공의 연속이었죠. 다분히 통속적이기는 해도 어차피 우리네 삶 자체보다야 더 통속적이겠습니까만 사라는 덜컥 암 진단을 받습니다. 지금까지 두 번 결혼에 실패하고 그 흔적(결실?)인 아이도 있습니다만 내내 외형상 쾌속으로 질주해 온 그녀의 앞길에 처음으로 빨간불이 켜진 겁니다.

사라가 뒤통수를 맞는 과정이 인상적인데, 그녀가 평소에 잘 키워줄 후계자로 점 찍어 놓은 이네스를 우연히 병원에서(본인은 모친의 병 때문에 들렀나 보죠) 마주친 거죠. "상어떼 근처에선 피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된다." 머리 회전이 빠른 그녀는 곧바로 이네스를 포섭하여 온갖 특혜를 주기로 전략을 짜지만 이미 한 발 늦었습니다. 혹 시도했더라도 과연 먹혀들었을지는 의문인데, 일을 이름값으로 하는 게 아니듯 지금부터 침몰할 게 뻔한 배에 아무리 일등석이라 한들 누가 올라타겠냐는 거죠. 안 보는 새 이네스는 로펌 핵심 포스트에 소문을 퍼뜨려(표면상으로는 걱정하는 척 "요즘 어쩐지 전에 없던 실수를 하시더라니,... 아프셨던 거에요 글쎄.") 사라의 운명을 막다른 곳으로 벌써 몰고갔습니다. 그녀의 가장 나쁜 적수이자 성차볇주의자에게 말입니다.

"기적이 일어났다." 헌데 기적은 그런 운명의 반전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삶을 다른 각도에서 볼 한 가지 가능성이 그녀들의 심안 앞에 열렸다는 뜻 정도죠. 하지만 진짜 인생 역전 따위보다는, 마음이 새로운 평안을 찾고 자신을 조용히 성찰할 새로운 여유가 생기는 게 진짜 기적 아닐까요? 줄리아네는 가발 제조 원료(물론 사람의 잘린 모발입니다)를 들여올 새로운 루트를 찾는데 그게 인도입니다. 스미타는 신전 앞에서 머리를 모두 밀고 앞으로 딸과 개척할 새 삶의 길을 모색합니다. 항암 치료 때문에 머리가 몇 웅큼씩 빠지는(더불어 자신의 인생 지반도 급속히 침하하는) 사라는 쿨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아마도 줄리아네가 새로 개척한 해외 시장 수출품일 수도 있는) 가발 하나를 사서 착용합니다. 그 전에 사라는 머리를 짧게 자르는데, 지금껏 영혼 없는 경쟁 사회에서 꼭두각시마냥 폭주한 자신의 인생이 어쩌면 진정한 가발, 위장이 아니었는지 씁쓸히 반추하는 중입니다. 이 순간에도 vulture처럼 그녀를 노리는 사나운 스캐빈저나 포식동물들은, 가장 잘나가는 로펌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꿰차고 앉았던 그녀를 급습하려는 의도로 눈빛을 번득입니다만, 이제 처음 어른이 된 사라는 태연히 창 밖을 응시합니다.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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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영휴
사토 쇼고 지음, 서혜영 옮김 / 해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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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알다가도 모를 신비한 사연이 많이 있습니다. 여튼 인간은 상식에 어긋나는 사태와 마주하여 보이는 반응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추방(p289)"이며 다른 하나는 "설명"입니다. 많은 경우 (시간이 좀 걸릴망정) 다양한 신비는 과학의 발전으로 해결을 보곤 합니다.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릴 수 없을 때 성급한 우리 인간들은 다른 방법으로 설명을 시도합니다. 그건 종교 담론일 수도 있고, 신화일 수도 있고, 전생이니 빙의니 예지력이니 하는, 알고보면 그저 달콤한 몽상의 미로일 수도 있습니다.

시험삼아 한번 죽어 볼까? 루리라는 이름의 연상녀가 어느날 비디오가게 대여점 알바 대학생에게 찾아와 들려 준 이야기입니다. 이 유부녀는 워커홀릭인 같은 또래 남성과 결혼하여 딱히 부러울 것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남편은 덩치도 크고 두뇌회전도 빠르고 성실하며 집념, 의지, 리더십 등이 탁월한, 어느 기업에서도 탐낼 만한 인재입니다. 루리가 불만을 가질 이유는 외적 조건 중에서는 없습니다만, 그녀는 마음 깊이 어떤 불안과 상실감에 시달립니다. "이 남자는 나를 진정 사랑하긴 하는 걸까? 미리 정해 놓은 타임라인에 맞춰 강박적으로 과시적으로 살아가는 인생에 한 부속품처럼 나를 이용하는 건 아닐까?" 루리 씨의 이 의심이 맞았다면,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이 마사키 씨(남편 이름입니다)는 저주 받은 속물, 속은 빈껍데기인 허수아비 인생을 여태 허우적거리며 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읽는 우리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고.... 루리 씨는 딱 두 번, 그 알바 대학생의 숙소에 와 같이 잠을 잡니다. 나중(p309)에 나오지만,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맞닥뜨려서, 마사키 씨가 보인 반응은 충격과 경악이나 참회나 부끄러움이 아닌, 복수심과 분노였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리 좋은 사람 같지 않아 보이더군요.

환생과 불륜과 기이한 3자대면. 통속 소설에 딱 어울릴 만한 소재이지만 이 작품은 그리 흔한 장르물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익숙한 소재를 쓰면서도 대체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꾸려질지 궁금해서 페이지를 계속 넘기게 만듭니다. "다음 이야기가 어떨까가 궁금하다"기보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어쩌면 이처럼 기괴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여튼) 사연을 따라가게 만듭니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늦으막한 나이 오사나이 씨를 아연하게 만든 건 당연하고, 식당 종업원조차 놀라서 주문 받는 일을 까맣게 잊게 할 정도입니다. "이 꼬마는 누구인가? 책가방도 못 들 자그마한 체구를 하고선 어른들이나 쓸 법한 말을 하고 지나치게 성숙한 감정까지 안색에 띄우는 건 대체 무슨 까닭일까?" 사태를 피상적으로 봐도 충분히 당혹스럽습니다. 허나 오사나이 씨는 꼬마가 자신의 과거사를 줄줄 읊어대고 버릇 없는 충고까지 던져대는 통에 혼이 나가버릴 지경입니다. 그 정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조차 독자 눈에 대단하게 보이더군요.

알고 보면 평범한 이야기라고 해도 묘하게 순서를 섞어 놓으면 의외의 참신함과 신비감이 느껴지곤 합니다. 하물며 (그게 가능하다면) 순서대로 상식에 맞게 재구성한다고 해도 기괴한 사연이라면, 듣는(읽는) 이들 입장에서 과연 어떻겠습니까. 유한하고 짧은 생에 비해 너무도 많은 감정을 키우고 부여잡고 살다 죽게 되는 우리들이니만치, 한 번 살고 재로 화하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여겼는지, 전생이니 후생이니 하는 관념, 가상을 잘도 멋대로 만들어 요리조리 꼬아서 공유하고 위안하고 때로는 이용(악용?)합니다. 소설은 여러 인물들, 대체 전생이라면 서로 어떤 인연으로 얽혔을지 모를 여러 "영혼들"을 등장시켜, 과거에 곤란하게, 때로는 달콤하게 엮이던 과정에 남긴 한과 상처를 서로 보듬거나, 혹은 할큅니다. 전생이니 영혼 따위는 안 믿을, 정상적이고 합리적이며 각자의 삶을 힘들게 부대끼는 분들이라 더 공감을 할 만한 모습들입니다. "아 그러시면 안 되죠. 전생에 누구누구였다는 누구의 말이잖아요. 왜 거부(추방?)하고 그러세요?" 답을 뻔히 아는 우리 독자들도 세계의 바깥에서 마냥 이리 답답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우주에 이런 황당한 사건이 벌어지면 당연히도 저리들 나올 줄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p181엔 그런 말이 나옵니다. "신은 인간에게 두 가지 옵션을 주고 선택하게 했다. 나무처럼 자신의 씨앗을 틔워 후손이 계속 명맥을 잇게 할 건지, 아니면 달처럼 차고 이지러지며 거의 사라졌다가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계속 반복할지." 제목의 "달의 영휴"는 이 모티브와 관계가 있고, 이런 신화를 믿는 루리 씨는 정말로 나무가 아닌 달의 삶(죽음)을 선택합니다. 루리 씨의 죽음은 전철에서의 사고사였는데, 그녀의 죽음을 신문에서 접하고 안, 전에 그녀와 두 번 몸을 섞은 비디오 가게 알바생은 이것이 자살이었음을 직감합니다. 이 알바생은 이후 일본 굴지의 회사에서 한 번의 멈춤도 없이 출세 가도를 질주하는 일류 직장인이 되는데, 이력서에는 단 한 줄, 청년기 1년 간의 공백이 있습니다. 바로 비디오 가게 알바생 시절 루리 부인과의 만남과 관련된 기간입니다. 자주 만나거나 짙은 감정의 교류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단 두 번이었습니다. 남은 시간은 그저 "기다림"으로 채워졌습니다.

(이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루리의 생전 남편이었던 마사키 씨 역시, 이후 알바생(미스미 군)의 인생처럼 직장에서 잘나가던 엘리트 사원이었으나, 아내의 자살이 무심코 던진 자신의 모욕적인 언사 때문이었다고 여기고 한동안 폐인처럼 지내게 됩니다. 그러다 새 직장을 구하고 인정도 받고(그의 능력을 과분하게 여겨야 할 회사) 타고난 기질과 몸에 밴 성실성이 있는지라 곧 예전의 안정된 생활로 복귀하게 됩니다. 그의 생(두번째 생?)을 다시 산산히 파탄낸 건 어느 꼬마였습니다. 사장의 여덟 살 먹은 딸 노조미는 어느날 마사키 씨를 찾아와, 전생에 그녀가 루리였음을 도무지 의심할 수 없게 하는 몇 마디를 던집니다.

사실 저는 읽으면서 조금 고개가 갸웃해지기도 했는데, 생전에도 순종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부인이, 지금 환생(빙의?)하여 어린이의 몸을 하고서는 날카로운 계산과 상대의 심리를 훤히 읽는 능력으로 마사키 씨와 거래를 시도하는 장면이 조금은 어색했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착하고 순박한 영혼도 지독한 배신과 환멸을 겪은 후엔 마치 헐리웃 영화에 나오는 악녀들처럼 험한 세상에서 판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걸까요? 직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마사키 씨도 만만치 않아서 노조미 양(...)의 페이스에 마냥 말려들지는 않습니다. 그 결과는....

인생은 뜻대로 안 풀렸다고 해서 한 번 판을 접고 리셋할 수 있는 게임 필드가 아닙니다. 그런 불성실한 마음("이번 생은 망했고 다음부터 잘 하지 뭐.")을 품은 것만으로도 다음 생(그런 게 있다면)에서 형벌을 받을 구실이 충분해질지도 모릅니다. 생전 미신이나 초자연적 현상을 믿고 살 인물 자체가 아니었던 마사키 씨는, 착한 아내에게 몹쓸 말을 내뱉은 죄과로 (도피한 다른 무대에서조차) 결국 몹쓸 변을 겪게 됩니다. 성실하고 유능하게 부품 같은 몸놀림에 능숙하다고 해서 사람으로 할 의무를 다하는 건 아닐 겁니다. 나는 혹 내 곁의 선하고 정 깊은 이들에게 무심한 중 말로 행동으로 눈빛으로 무관심으로 큰 상처를 입히지나 않았을까요? 소설에 따르면, 그런 업보는 생의 경계를 달리해도 쉽사리 씻기는 게 아닌 듯합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삶의 매 단계에서 진짜 신경 써야 할 미션은 따로 있었다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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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이야기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5
제프리 초서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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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와 친구는 오래될수록 가치가 높다는 말이 있죠. 많은 이들이 여기까지는 동의하시겠지만, 이 격언의 주어에 "이야기책" 하나를 포함시키면 어떤 반응들일까요? 전 개인적으로 포도주와 친구보다 더 앞선 서열에 고전 소설을 놓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바로 이 책 <캔터베리 이야기> 같은 책 말입니다.

이 예쁜 책 맨 뒤 역자 서문에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순간적인 대작'들의 맹공을 받고 있다...." 과연 그렇습니다. 맹렬히 회전하여 "본전"을 뽑아내지 않으면 호된 운명을 맞는 자본의 논리가 이를 강요하기에, 작가나 작가를 빙자한 간교한 장사꾼들도 자신의 작품을 실제 가치 이상으로 뻥튀기하여 대중의 관심을 못 끌면 바로 시장에서 도태됩니다. 우리들 소비자(독자) 역시 그런 상업화한 대작에 이끌려 세뇌된, 부정직한 소비를 강요당하기 일쑤고, 유행 상품을 맛본 감상을 유쾌하고 유창하게 털어놓지 않으면 친교나 생업에서 소외되기 십상입니다. 어쩌면 초서.... 까지 거슬러올라가진 않아도, 셰익스피어, 라신, 샤토브리앙, 뒤마, 괴테의 시대에도 "순간적인 대작"들이 시장에 나와 대중의 눈을 현혹시켰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월의 시련을 견뎌내고 장구한 시간이 흐르도록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은, 그런 사이비 대작들이 한 줌 먼지와 곰팡이 사료로 변했을 때 의연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고전"의 명예를 지킵니다.

역자 서문에도 나오지만 제프리 초서의 이 <캔터베리 이야기>는 머나먼 이탈리아의 문필가 보카치오의 작품 <데카메론>의 영향을 많이 받은 흔적이 뚜렷하죠. 재미나게도, 엄청 많은 사람들, 기사, 하급 기사, 종자, 수사, 탁발 수사, 상인, 서생, 변호사, 의사, 소지주, 선장, 본당 신부, 방앗간 주인, 면죄사, 여관 주인, 소환리, 장원 청지기, 식료품 조달인 등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진 이들이 여관에 함께 모여, 각자의 이야기를 마구 쏟아내는 형식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형식만 놓고 봤을 때도 두 작품은 차이가 적지 않습니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이런 주변 액자 파트에서는 조금 재미와 다채로움이 떨어지지만, <캔터베리 이야기>는 화자들이 자신과 상대방의 이야기에 간혹 끼어들어 품평을 하기도 하며, 특정 직업을 가진 상대와 시비가 붙기라도 하면 그런 직업을 가진 주인공이 망신을 당한다든가 우스운 꼴이 되는 이야기를 곧바로 들려주는 식으로 받아치는 등 프레임 밖도 더 활성화된 모습이죠. 이후 세월이 많이 지나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를 보면 "들려지는 이야기들"보다 액자(이미 액자가 아닙니다만)가 무대의 중심에 부각되는 근대성이 드러나는데, 이 점에서도 <캔터베리...>가 <데카메론>보다 더 발전된 픽션이라고 하겠습니다.

초서는 어쩌면 10장 마지막 고별사 파트를 통해, 이 흥미진진한 픽션의 세계에 (캐릭터로까지는 아니겠으나) 작가 신분으로 한 발을 들여놓았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고별사는 아직 출판의 자유가 채 확립 안 되었을 무렵 검열 당국의 눈치를 보고 자신의 저작 명의로 된 책을 펴내어야만 했던 고충을 반영한 "작품 외적 정보"에 가깝지만, 이상하게도 순수 자신의 창작임을 자랑하기보다는 그 역시 소중히 전해 들은 장구한 스토리를 다만 자신이 가다듬어 세상에 내어놓는다는 투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다면 미처 드러나지 않은 여관 손님 중 한 명으로 그가 참여하지 않았다는 보장도 없는 거죠. 역주 중에도, 예를 들어 p383 같은 곳을 보면 형식은 "선장의 이야기"이지만 본문은 "우리들 여자들은... " 처럼 이상한 주어가 끼어들죠. 역자께서는 이런 걸 두고 "... 원 <캔터베리 이야기>에는 없던 내용을, 작가 초서가 임의로 삽입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독자들에게 귀띔합니다. 혹은 본디 "베스의 여인"이 화자였던 걸, 편집 과정에서 순서가 뒤바뀌어 엉뚱한 자리를 잘못 찾았을 수도 있고요.

등장 인물 중에는 공부에만 전념하느라 영양을 충분히 보충 못 하고, 육체 노동에는 한 번도 종사 못 해 비쩍 말라비틀어진(책 중 표현입니다) 옥스포드 서생도 등장합니다. <데카메론> 등과 달리 이 책에서는 이런 대학생이 액자에서건 구수한 사연 속에서건 중요 인물로 자주 등장하는데요. 사실 혈기 넘치는 나이에 배운 건 배운 대로 많고 재기도 발랄할 이런 신분이 펼쳐 보이는 이야기가 꽤 재미있으리라는 기대는 당연히 우리 독자 입장에서 가질 만하지 않겠습니까? 욕심 많은 식료품 조달자나 농부 등과, 이들 학생들이 지역 사회에서 충돌하는 광경은 꽤 우습고 유쾌하며, 지성인을 지향하지만 아직도 품성과 가치관이 미진한 이들 젊은이가 젊은 처녀들(혹은 유부녀들)과 눈이 맞아 벌이는 소동은 독자들이 쫓아가기에 아슬아슬하면서도 스릴이 넘칩니다.

변호사가 들려 주는 이야기 중 로마(비잔티움을 뜻합니다. 아직 메메드 2세의 손에 멸망하기 훨씬 전이니까요) 황제의 고명딸 콘스탄스 공주의 이야기가 있죠.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운명의 장난 때문에 온갖 고난을 다 겪지만 이를 헤쳐나가며 마침내 행복을 찾는 위대한 여성의 사연인데, 저는 개인적으로 <데카메론> 이틀째의 일곱 번째 이야기(판필로가 들려 주는)에 나오는 알라티엘(Alatiel)이 생각 났습니다. <데카메론>과 이 <캔터베리 이야기>가 결정적으로 차이 나는 대목이 바로 이런 곳들입니다. 데카메론은 이상하게도 착한 여성들이 (그녀들의 의사에 반해) 일찍 순결도 잃고 여러 남자 품을 거치며(뭐 어쩌겠습니까....) 독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반면, 이 <캔터베리 이야기>는 더 많은 우연과 행운의 개입으로 이 연약한 귀공녀들의 신변과 안전이 많이 배려된다는 게 차이입니다.

<데카메론>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등장 인물들은 너무도 타락하고 방종하거나 극악무도한 성격을 가진 이들이 많습니다. 반면 <캔터베리 이야기>는 짖궂고 심술맞을망정 마냥 미워할 수 없는 개구쟁이 같은 캐릭터들이 더 많은 편입니다. 결말도 대체로는 독자 안심하라고 더 온화하게 마무리되기도 하고요. <데카메론>의 별칭이 "human comedy"이듯 원래는 기분 좋게 끝이 나야 하는데 읽어 보면 그게 아니죠. 반면 <캔터베리 이야기>는 우여곡절이 많고 분량도 고른 길이이면서도 엔딩은 훈훈합니다. 읽고 나서 기분이 정화되고 유쾌해집니다. 이런 형식과 주제가, 진정한 낙천성과 인간 정신에 대한 긍정이 아닐지요. 또 르네상스를 예비하는 참된 인문주의의 정수이기도 하고요.

인문주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캔터베리 이야기>에는 시시콜콜한 지식이나 당대 과학(어설픈 단계지만)에 대한 강의식 언급도 자주 등장합니다. 이야기는 그저 재미만 추구해서는 안 되며, 청자 혹은 독자에게 교양도 가능하면 전수해야 한다고 여긴 출판업자나 작가들의 당대 의식 단면을 엿보는 듯합니다. 이런 태도는 리처드 F 버턴(역시 영국인입니다. 한참 후대이지만)이 정리한 <아라비안 나이트>에서도 우리가 만난 적 있죠. <아라비안 나이트>와 또 닮은 점이라면, 종교 교의가 (당대 독자 아무도 듣길 원하지 않았을ㅎㅎ) 어느 구석에서 제한적으로나마 장황하게 설파된다는 점입니다. 이 책이라면 본당 신부 이야기 파트가 그렇죠. 반면 탁발 수사나 면죄사 이야기는 정반대로 흥미진진하기 짝이 없는데, 이는 초서 자신의 풍자 정신이 은근 스며든 설정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 <데카메론>에서 보카치오는 그런 삼가는 기색이 전혀 없고 수사, 신부, 수녀 가리지 않고 저속한 음담의 소재로 비참하게 추락시키는 노골적 성격을 대담하게도 보입니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데카메론>보다 공간적 배경이 훨씬 넓고 소재도 다양합니다. 특히 두드러지는 건 그리스- 로마 신화나 아서 왕 주변의 기사들을 연상시키는 모티브가 많이 소개된다는 점입니다. 첫째 장 아르시테와 팔라몬의 이야기가 특히 그렇죠. 기사가 들려주는 이 사연은 아예 아테네의 테세우스 왕이 주요 인물 중 하나입니다. 두 젊은이는 테베 출신인데, 영국 기준으로는 아찔할 만큼 멀리 떨어진 극남의 고장이며 , 그리스는 아일랜드(브리튼 섬의 바로 이웃)를 "히베르니아", 즉 극북의 변경으로 불렀을 만큼 두 나라는 서로를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초서보다 이백여 년 후에 활동한 세익스피어가 (자신은 한 번도 못 가봤을) 덴마크나 스페인, 이탈리아 곳곳을 자유롭게 작품 무대로 활용했듯, 초서 역시 그리스 신화를 작품 속에다 우아하게도 편입합니다.

앞서도 잠시 말했지만 <데카메론>에서 여성들이 그저 음담패설의 양념처럼 노리개로 취급되는 것과 달리, <캔터베리 이야기>에서는 더 밝고 주체적이면서도 긍정적으로 묘사됩니다. 토머스 불핀치의 <The Age of Chivalry>를 보면 2부 가웨인 경의 모험담(결혼 골인 성공기?)에 그런 대목이 있습니다. "여성이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인가?" 이걸 알아맞혀야 가웨인 경은 아내를 얻을 수 있는데, 답은 "남편을 자기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남자들끼리 하는 말로, 암탉 울면 집안 망한다는 식으로 아내들의 전횡을 흉보는 농담거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캔터베리 이야기>에서는 사뭇 다릅니다. 이 말 역시 비꼬는 반어가 아니라, 정말로 "현명한 아내 말 잘 듣는 남편치고 인생 잘 안 풀리는 사람 못 봤다"는 식으로 교훈이 전달됩니다. 못된 놈들도 많지만 대개는 아내를 귀여워하고 극진히 위하면서도 자기 앞가림은 확실히 해 주는 멋진 사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요즘 페미니즘의 지탄 대상인 "과장된 기사도"하고도 또 다릅니다. 이뿐 아니라 "여태 여덟 번도 넘게 남편을 바꾼 나이지만, 그게 어떻다는 거냐?"라며 진취적으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표방하는 여성도 등장합니다. 이상에서 보듯, 초서는 심지어 여성관 면에서도 시대를 많이 앞서간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은 무엇보다 아동, 청소년에게 마음 놓고 읽힐 수 있기도 해야 합니다. 이 책은 어떨까요? <데카메론>과 달리 저속한 성 묘사가 적고 세계관이 건전하고 낙천적이며, 사연들은 유쾌하고 발랄하면서도 일정한 교훈을 품습니다. 성인들은 혹 기차나 비행기에서 긴 여행을 할 때, 구수한 민담 듣는다고 생각하며 이 두꺼운 책에 마음 놓고 호기심 가득한 정신을 맡겨도 좋을 겁니다. 이런 고전의 장점은 일단 재미나게 술술 읽히며, 그 와중에 은근 정신의 개운한 정화도 부수적으로 챙길 수 있다는 데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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