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멋진 발견 - 빅데이터가 찾지 못한 소비자 욕망의 디테일
김철수 지음 / 더퀘스트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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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빅데이터의 시대입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데이터의 광막한 바다 속에서, "맥락"과 "정보"와 트렌드와 "가치"를 찾아내는 작업을 두고 "데이터 마이닝"이라 부릅니다. 기업의 혁신이나 R&D가 거의 한계에 달한 시점에서, 빅데이터는 수익 창출의 돌파구를 찾을 유일한 원천으로까지 일각에서 여겨집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식, 즉 "직관과 통찰"에 의해 트렌드 예측이 가능하다고 여전히 믿는 분들도 많으며, 왠지 우리들도 그런 입장에 더 마음이 끌립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빅데이터에 매몰되지 말라." 사실 매몰되지 않으려고 해도, 또 이 새로운 가능성의 바다를 신봉하며 마음껏 항해하려 들어도, 워낙 양이 방대하다 보니 매몰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저자가 말씀하시는 바는, "빅데이터가 전부인 양, 그 안에 모든 답이 있는 양 맹신하지 말며,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건 어디까지나 당신 자신의 밝은 눈임을 잊지 말라"는 취지이겠습니다.

저자는 물론 빅데이터의 중요성도 결코 소홀히 취급하지 않습니다. "...마케팅 활동으로 쌓이는 거대한 데이터는 앞서가는 기업으로서의 자부심이며,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보험과도 같다...." (p35) 저는 여태 관련 도서들을 읽으며, 빅데이터의 의의를 정리한 문장 중에 이처럼 깔끔하고 공감 가는 표현은 처음 접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업들은 한편으로 ".... 얽히고설킨 데이터의 덩굴 속에 갇혀 기회의 줄기를 찾지 못하고 있는(p37)" 게 국내외 막론하고 정직한 업계의 현실입니다.

요즘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단연 핫한 직업이 바로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입니다. 경영학을 연구하는 중진 교수님들은 학생들더러 "너희들 열심히 빅데이터 연구해라. 그걸로 평생 먹고살 수 있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작 교수님 자신들도 여태 실무(산학 협동 과정)에서 노다지를 여럿 캐신 듯 보이지는 않고, 기업들 역시 심봤다는 듯 빅데이터애서 발견한 "가치"로 돌파구를 찾았다는 사례도 많이는 언급 안 됩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 현재의 데이터 활용 능력으로는 그것(고객의 맥락과 의도)을 명확히 파악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은 게 솔직한 진단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씀 하시는 저자 역시 SK 등 국내 유수의 대기업에서 최고의 경력을 쌓으신, 이 분야 국내 최고의 전문가 중 한 분이십니다.

저자는 또한 날카로운 지적을 하십니다. ".... 사람들은 기업이 자동으로 추천하는 일방적 행태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 물론 우리는 이른바 "결정 장애" 같은 상태에 곧잘 빠집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마음에 드니 뭘 골라야 할지 모를 행복한 순간도 있고, 반대로 모든 선택지가 다 시원찮아서 심드렁하거나, 경우에 따라 위험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전문가(그것이 AI이든 뭐든)가 척 하고 권위 있게 추천해 주면 좋을 듯도 하지만, 아직은 시스템에 대해 그런 신뢰가 생기질 않고, 내가 권위를 부여 하는 누군가(물론 사람)가 내리는 판단이 더 믿음직하다 여깁니다. 반면, 자신이 조금이라도 소양을 쌓고 친숙히 여기는 분야나 대상에 대해서는, 설령 결과에 후회가 있을망정 내가 내 소신, 내 감각에 따라 내리는 판단이 훨씬 뿌듯합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기계적으로 내리는 예측과는 달리, 아무리 추천 시스템이 정제된 후의 미래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취향과 선호 기제에 더 큰 가중치를 둘 것이라는 저자의 말씀은 그래서 공감이 갑니다.

저자는 또한, "젊은 층일수록 시스템에 그저 끌려다니기보다, 시스템과 '협력'하면서, 자신만의 옵션을 매번 행사하는 편을 더 선호한다"고 합니다(p37). 사실 독자인 제 생각으로는 노년층이라고 해서 어디 AI의 자동 추천 기제에 마냥 추종들만 하시겠나 싶습니다만, 여튼 이 패턴의 주된 소비자로 떠오를 젊은 층마저 마냥 손쉬운 데이터 마이닝 타깃이 되지 않으려 든다면, 이 채굴의 전망은 가뜩이나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나다를까 p42에는 어느 노년 고객의 이런 반응도 소개되네요. "저 아직 그렇게 늙지 않았어요. 나이가 훨씬 더 들면 써 볼 수도 있겠네요." 요즘 광고에 나오는 "2000년대 액션물 중 UHD로 나온 것 찾아줘" 같은 건, 당장 제목이 생각 안 날 때 요긴하게 의지할 수는 있는 시스템이겠으나(그 모델 분도 그 정도 용도로 쓰신 거겠죠), 사람의 복잡미묘하고 변덕스럽기까지 한 취향을 완전히 대체, 분석할 수는 없습니다. 혹여 여기에 자신의 일상 패턴을 송두리째 맞추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첨단 기기를 능숙히 활용하는 현대인이 아니라(남들 눈에 그렇게 보이고 싶었겠지만), 기업 마케팅의 호흡에 자신의 영혼을 길들이는 모자란 백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해서도, "이는 일자리를 걱정하는 소극적 혁명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원하는지 깊은 맥락까지 모두 찾아내어 어떻게 니즈를 만족시킬지를 밝히고 성과를 거두는 적극적 혁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백번 맞는 말씀인 게, 혹 일자리만 잔뜩 축소시키고 소비의 포텐셜을 갉아먹는 "혁명"이라면, 애초에 그 추진 동력을 무엇으로부터 마련하겠습니까. 자기 설 자리를 스스로 붕괴시키거나, 그리스 신화의 에뤼직톤처럼 제 살 깎아먹기 식의 혁명이라면, 그 혁명의 성과가 애초에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저자는 대체 앞으로 전개될 4차 산업혁명이 지향하는 바가 뭔지부터 한번 살펴 보라고 권합니다. 과거 산업화 시대에는 카리스마적이고 통찰력 있는 지도자의 방침에 따라, 생산이든 소비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대량 생산 대량 소비 패턴이 행진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허나 지금은 소비자 각 개인이 모두 취향과 선호를 달리하며, 기업은 이런 세밀한 흐름을 어떻게 찾아내어 니치 시장을 발견, 공략할지가 사활이 걸린 과제입니다. 아예, 모든 시장이 니치 마켓이 되어 가는 게 작금의 추세이며, 이런 미세 트렌드까지 재빨리 파악하여 비즈니스 모델(저자는 "관점"이란 표현을 쓰십니다. p51)로 연결 시킬 수 있을까? 이는 저자의 단언에 따르자면, "빅데이터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겉으로 드러난 팩트가 아니라, 보다 깊은 곳에 존재하는 본질과 새로운 관점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생각의 기술"이 가장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는 "한두 번의 학습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며, 일상 속에서 꾸준히 습관화하여 몸으로 체득할 때 비로소 얻어지는 역량(p51)"이라고 하시는데, 사실 앞으로 잠시 돌아가면 "고객의 체험과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기업이 고객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시선으로, 그들의 체험하는 동선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하여야, 이런 통찰과 감각이 생긴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전통적인 분류 방식대로, 고객의 니즈에는 표현 니즈가 있고 잠재 니즈가 있습니다. 또, 잠재 니즈는 다시 감성적, 사회적, 문화적 니즈의 세 층위로 나뉘어지는데, 물론 이 셋은 정도와 방향에 따라 표현 니즈 영역에도 몇 발을 걸칩니다. 그런데 벌써, 감성, 사회, 문화의 층위와 범주가 등장한다면, 도대체 모바일 앱이 열심히 모아들인 각종의 데이터로부터 이런 추상적, 비정형적 맥락이 쉽게 포착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설령 빅데이터로부터 이런 맥락이 잡아져도, 이를 공식화, 표면화, 비주얼화하는 건 벌써 사람의 안목이고 통찰이며인문적 해석이지 빅데이터의 공로가 아닙니다. 말끔히 다듬어진 싱싱한 회 한 접시가 우선은 셰프의 솜씨이지, 거칠고 무심한 바다에 대고 감사할 게 아니듯 말입니다.

고객은 모릅니다. 자신이 진정 뭘 원하는지 모르고, 단지 목이 말라 찾아 헤맬 뿐입니다. (이를 일일이 아는 고객이라면 그 사람은 똑똑한 소비자이기 이전,  이미 현명하게 자기 생을 꾸려 나갈 줄 아는 선택 받은 소수라고나 해야겠습니다) 이처럼,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니즈를 먼저 알아채고 "이거 말씀이시죠?" 라며 눈치 빠르게 서빙하는 직원처럼, 그래서 "나 여기 말고 딴데 안가" 같은 고객의 자발적 충성을 확보할 줄 아는 기업이라야,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살아남는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그저 싼 값에 많이만 찍어 내고, 세뇌 같은 광고 공세로 소비자를 길들이려는 무지막지한 기업은 설 땅이 없습니다. 벌써 소비자는 광고라고만 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빅데이터에서 고작 광고 거리만 찾아내서 잔뜩 확성기로 떠들 생각이나 갖는다면 그 이상 시대착오적 발상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내 맘을 나보다 먼저 알아 뭘 제안해 오는 기업이라니 그게 바로 감동 아니겠습니까.

그런 상품, 그런 기업, 그런 엔터테이너(이미 이런 기업은 기업이 아니라 연예인과도 같습니다), 그런 호스트가 있냐고요? 이 책을 읽으면 몇 챕터에 걸쳐서 그런 성공 사례가 줄을 이어 행진합니다. 클라우스 슈밥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를 코인하기도 전에, 이미 이들은 채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먼저 살고, 또 선도했던 셈입니다.

해외의 다채로운 사례 소개도 좋지만, 저자는 한국인이시고 한국의 가장 치열한 경쟁의 장, 혹은 가장 앞선 소비자들이 거주하는 부촌(富村)에서 직접 피부로 맞닥뜨린 여러 사례를 개발, 정제(?)하여 독자들과 공유하시는 게 참 만족스러웠습니다. 여러 에피소드가 있으나, 그 중에서도 선릉역 앞에서 저자가 목격한 트럭 상인의 실례가 아주 흥미롭게 소개되는데요.

1) 트럭 상인과 고객(시니어 쇼퍼) 사이에 자신들만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재미있는 언어 소통이 이뤄진다.

2) 큰 봉투를 준비해서 양껏 채워지게(다 사가게) 미리 세팅한다. 고객의 이름도 모르면서 열심히 메모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다음 번에 판매할 상품은 여튼 성의껏 준비한다.

3) 어차피 마트나 몰에 가서 쇼핑을 즐길 젊은 층은 배제하고, 철저히 시니어 쇼퍼의 눈높이와 정서에 집중한다. 중요한 건, 이들의 구매력이 장난 아니라는 사실.

4) 경쟁심을 처음부터 치밀하게 자극하는 선착순 판매 방식을 고집한다(애초에 고객 주문을 메모하는 건 그저 제스처였을 뿐)

5) 그러면서도 판매 중의 소통은 철저히 개인화하고, "덤"은 필수이다. 타겟층의 정서에 철저히 융화.

이런 전략을 몸소 개발, 실천하는 사장님은 50대이며, 이분으로부터 물건을 사는 분들은 6, 70대 할머니들이 대부분인데, "아가씨" 등으로 호칭하며 구수한 반말로 상대해도 그렇게들 좋아하시더랍니다. 마치 책 저 앞에서, 동네에 우물을 파 주었건만 인도의 젊은 주부(며느리)들이 외면하더라는 그 사례와도 맥락이 통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기계적 편의가 아니라, 문화적 니즈가 반영된 총체적 체험이며, 이런 고차원, 심층의 심리를 알아내려면 인문과 일상의 반복적 수련이 필수라는 게 이 책의 멋진 결론입니다. 요즘처럼 값싼 정보화, 디지털 만능론의 시대에 이런 참신하면서도 효과적인 제언이 담긴 책을 만나본다는 자체가 쉽지 않은 행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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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 삶의 군더더기를 버리는 시간 배철현 인문에세이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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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로 이 순간을 낚아채십시오!"

우리는 보통 라틴어 격언 중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대사 덕분에 유명해진 Carpe Diem을 두고 "지금을 즐겨라"로 번역하지만, 사실 동사 carpo(carpere)에는 그보다 더 적극적인 뜻이 담겨 있습니다. 풀을 쥐어뜯듯, 혹은 꽃을 꺾듯(...) 좀 강렬한 동작을 본래는 언표하는 동사(verb)지요. 무심히 흘려 보내는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한 느낌 등이, 사실은 돈, 명예, 쾌락보다 훨씬 중요한 보물이고 축복임을, 우리는 흔히 잊고 삽니다. 저자 배철현 교수님의 강력한 권고는 바로 그런 절실한 외침을 표현합니다.

누구나 무대에서 가장 부각되고 싶고, 중요한 역할을 맡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고, 안타깝지만 가장 빛나는 주연 하나를 위해 나머지는 봉사하는 조연, 단역에 머물러야 합니다. 무대는 각자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때 큰 박수를 받고, 이때 느끼는 성취감은 주조연과 단역이 따로 없습니다. 예전에 이준구 서울대 교수님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군가(아마 타 교수의 TA였던 듯)가 뻘뻘 땀을 흘리며 기자재를 나르자, "그래,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아니겠어?"라며 격려하시던 모습도 생각 납니다.

저자는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성탄제 연극을 하며, 마음 속으로는 요셉 역(아마 남자아이가 맡을 역 중에는 가장 중요했겠죠?)을 하고 싶었기에, 고된 나귀 가면을 문득 벗어던지고 친구의 주연을 대신 차지하고 싶던 충동이 일던 당시를 떠올립니다.

"만약 그때 내가 느닷 일어서서 요셉 연기를 했더라면, 연극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가요. 꼭 주일학교가 아니라도 무대에 서서 다른 친구들을 빛내 주는 역할을 땀흘려 해 내던 체험은 누구나 있을 겁니다. 운동회 때 고싸움이나 차전놀이 같은 것도 비슷한 기회 아니었겠습니까. 이때 자신에게 일단 주어진 역을 무시하고 벌떡 일어나서 주인공 노릇을 하겠다며 돌출 행동을 보인다..... 사람인 이상 갑작스러운 충동이나 주목 받고 싶은 욕구는 누구나 갖게 마련입니다. 허나 우리는 심지어 그 어린 나이에도, 타인에게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경우 없이 주인공 행세를 하겠다고 설치면 얼마나 꼴사나울까 같은 (뜻밖에 대견스러운) 자제심 때문에, 돌출 행동으로 전체 무대를 망치는 사고는 저지르지 않습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이 그런 짓 하는 것도 자주 겪지 못 한 걸 보면, 이처럼 자기 역할에 충실하여 전체의 앙상블을 제고하려는 의무감도 사람에겐 하나의 천성인가 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꼭 보면, 나잇값 못 하고 자신이 무슨 탤런트나 영화 배우나 된 양, 혹은 사방의 각광을 받고 데뷔나 한 양 유명 작가의 환영에 사로잡힌 얼띤 광대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행여 길거리에서 나를 알아보고 느닷 캐스팅이라도 되어 신분 상승이 일거에 이뤄지기라도 할 것처럼, 도대체 현실 감각이 없고 분수를 모릅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온갖 막장 드라마가 근본을 잃고 뒤섞여 썩은 짬뽕의 난장판을 이루며, 마침내 남편과 자식에게도 버림 받은 채 가축보다 못한 늙으막을 보내며 궁핍에 찌든 일상에 침몰할 뿐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나답지 못한 것을 과감히 버리십시오!" 거짓된 아바타는 버려야 합니다. 머리통(그런 걸 머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으로부터 군내나는 남의 짬뽕사리를 솎아낸 후, 빈약하고 허술하나마 자신의 시냅스를 채워 넣여야 합니다.

Nunquam ponenda est pluralitas sine necessitate

이 말은 윌리엄 오캄이 그 출전으로서, 진리를 구명하거나 논증할 때 가능하면 가장 단순하고 명쾌한 방법이 최상이라는 뜻에서 표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컴의 면도날"이란 더 업축된 표현으로도 이 원칙을 잘 알고 있죠. 경영학 중 마케팅론에서,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디자인은 그저 외관의 꾸밈이 아니라 그 기능성의 가장 압축적인 표현"이라고 합니다. 군더더기가 없고 간단 명료하되, 본연의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하는 모양새야말로 최상의 디자인이란 뜻입니다. 만약 앞의 예에서, 나귀가 행여 요셉 같은 주인공의 역할을 탐내지는 않았다 쳐도, 혹시 주연에의 미련 때문에 연기 중에 쓸데없는 추임새나 시늉을 넣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역시 연극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위험 요소로는 손색이 없습니다. 잉여의 동작이나 부품은, 그저 불필요한 게 아니라 위해(危害) 요소인 것입니다. 보헤미아의 종교개혁가 후스는 자신의 화형대에 장작을 지고 나르는 노파를 보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O sancta simplicitas!" (아, 저 성스러운 단순함이여!)

제 할 일을 말 없이 해 내는 나귀 같은 노파, 이 노파의 잔손길로 화형주에 묶인 후스는 곧 처참한 죽음을 맞을 운명이었으나, 이 성인은 그 와중에서도 진리의 일각을 나꿔챈 것입니다. 책 서문의 "지금 이 순간을 나꿔채십시오!"라는 말은 그래서 더욱 울림 깊게 들립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문법(그람마. γράμμα)은 단순히 단어를 배열하는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전략적으로 단어를 배치하여, 같은 배열 속에서도 이중삼중으로 의미가 해석되게 하여, 마침내 독자에게 가장 선명한 의미와 심상만을 남기는 고도의 지성적인 작업이었던 셈이죠. 저자는 말합니다. "그람마는 곧 최적의 배열이며, 그래야 글이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저자는 하버드대에서 라틴어, 헬라어, 그리고 인류 최초의 언어 중 하나인 수메르어를 가르치는 톨키드 야콥슨 교수의 강의를 기다리던 그 설레는 순간을 기억합니다. 이처럼, 최고의 스승은 역시 최고의 스승에게 배운 분이라야 그 적통(適統)의 맥을 잇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자신이 강의를 듣던 그 방, "룸-G"에서 책들마다 고유의 냄새를 풍기던 그 묘한 감회를 다시 떠올립니다. 책들은 저마다의 역할과 개성으로 그 오랜 세월의 더께를 자신의 몸에 입혀 왔습니다. 책들은 "자신 아닌 것"의 부호와 개성을 과감히 떨쳐 내고, 대신 "자신 다운 개성"만으로 내면을 채웠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수련, 정진"의 효과입니다. 그 본체는 "나 아닌 다른 잡스러운 걸 제거하고, 온전한 나로 되돌아가는 노력"입니다.

저자는 앞에서 "체조 선수의 근육에는 불필요한 부분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그의 몸은 아름다우며, 동시에 그 몸이 빚어내는 동작 역시 아름답다"고 쓰셨습니다. 우리도 야구를 볼 때, 홈런을 예사로 쳐 내는 강타자의 스윙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는 걸 느낍니다.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필요 이상의 사치나 호사는 모두 잉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컨대 백화점에서 과도한 소비를 하며 남보란 듯 무분별한 투전(投錢)을 일삼는 자는, 사실 내면이 빈 열등감을 만회 못 하여 일부러 쇼를 하는 중입니다. 그런 자에게는 그 어러석음의 대가로 반드시 하늘에서 천벌이 떨어져 소정의 시련을 치르게 할 것입니다.

시련이란 무엇입니까? 저자의 말에 따르면 불필요한 군살과 잉여 근육을 몸에서 제거하여, 혹독한 훈련 끝에 마침내 흉한 살이 모두 커팅되고 연기에 필요한 근육만 남은 그 운동선수의 아름다운 상태를 만드는 게 바로 시련이라고 합니다. 그는 고된 훈련을 견디다, 어느새 자신이 겪는 시련을 보다 초연한 자세에서 관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실패자로서 주저앉느냐 아니면 다른 존재로 거듭나느냐의 갈림길입니다. 이를 두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페이라조(πειράζω)"라고 불렀는데, 저 어미(語尾)에 붙은 -ω나, 라틴어 carpo의 -o나 모두 1인칭 직설법 현재를 뜻합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들은 수련의 장으로 들어옵니다. 군더더기를 제하고, 허상과 허풍과 거짓을 솎아내고, 오롯이 우리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안식과 마음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근육은 부단히 수련해야 하며, 훈련 없는 근육은 마침내 무감각에 이른다. 환각은 자신을 훈련하지 않은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 그는 점차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헛것'을 추구하는 환각에빠진다." 얼마나 무서운 결과입니까. 인생이 싸구려 막장극과 근본 없는 판타지의 혼합으로 추락하지 않으려면, 저런 망상을 버리고 부단한 수련(修鍊)에 집중해야, 우리네 생이 수련(睡蓮)처럼 아름답게 거듭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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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 혼 - 성공은 시간이 아니라 깊이다
최우형 지음 / 더난출판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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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의 혼(魂)! 많은 분들은 영업사원이라고 하면 그 불안정하고 변수 많은 위상 때문에, 행여 혼담이라도 나올라치면 손사래부터 치곤 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주변에 남들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성공 사례도 많이 나오고, 어차피 어느 직장이건 평생 봉직할 만한 여건이 안 되고 보니 뭔가 재평가가 이뤄지는 듯도 한 분위기랄까요.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에 보면 캐릭터 한병태는 대기업 취업을 마다하고 세일즈의 길을 택하는데, 유능한 인력이면 처음부터 이쪽으로 승부를 걸지 그 위태롭고 사상 누각 같은 직장에는 안 들어간다는 소신을 밝혀서 1980년대(혹은 그 이후) 독자들을 의아하게 만듭니다. 어쩌면 자본주의의 꽃은, 실력 있고 잘나간다는 전제 하에, 세일즈맨이란 직종일지 모르며, 이 직역에서 통하는 교훈이라면 다른 어느 분야에서도 명심할 교훈으로 두루 적용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탑 세일즈맨이 쓰신 책들을 자주 읽는 편입니다.

많은 성공자들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만, 직장도 처음 입사해서 3개월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하죠. 입사 후에 좀 부족한 건 느긋이 차근차근 배워 가면 될 듯해도, 이 첫 3개월에 어떻게 자신의 주형(鑄型)을 빚느냐에 따라 평생이 결정된다는 게 저자 최우형 대표님의 말씀입니다. 첫 3개월의 수련 기간을 알차게, 독하게 보내야겠다는 각오도 각오입니다만, 벌써 안 되는 사람은 "나중에 하지, 대충 하지" 같은 생각으로 회사에서 허투루 시간을 보낸다는 게 또 문제입니다. 이 첫 석 달이 내 평생을 좌우한다는 각오이면, 어찌 하루하루가 마치 내무반에서처럼 바짝 군기 든 채 보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나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라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p65). 제가 개인적으로 예전에 읽은 어떤 책에는 "나는 성공할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성공을 다 해두었다는 마인드셋으로 나가라고도 하는 걸 봤습니다. 이 말은, 성취해 둔 바도 없으면서 얼토당토 않은 환각에 젖어 요행을 바라고 주변에 사기나 치면서 지내라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성공의 과실만 몽롱하게 탐하지 말고, 정말 성공한 CEO들이 하루하루를 긴장감과 책임감으로 무장하며 지내듯 이미 전쟁터의 실감으로 자신을 무장시키라는 소립니다. 이걸 실천에 옮겨 보면 사람 자체가 벌써 달라져 있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몸이 다 뻐근해 옵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허겁지겁 그 당면 문제의 해결 과정에만 파묻히곤 한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건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다." (p49) 주된 원인을 파악 못 하고 땜질식 처방에만 그치면 이는 문제가 언제나 재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두는 셈입니다. 저자는 비유를 들며 "배에 물이 새어들어올 때 양동이로 빨리 퍼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출발 전에 물이 새지 않게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시야의 차이가, 세일즈맨(혹은 다른 어떤 직종이라도)의 성공과 실패를 가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제가 세일즈맨만큼 장래가 불확실한 직업도 없다는 게 우리 사회의 통념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p41에서, "보통의 성실한 사람들이 선택했을 경우, 50% 정도는 반드시 성공하는 게 이 직업"이라고까지 말씀하시네요. 이어서 저자는 "그만큼 정직한 직업이며, 땀을 쏟은 만큼 반드시 성과가 나오는 게 이 일이다"라고까지 강조합니다. 그런데 대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저성과자로 몰리는 걸까요? 답은 역시, 기본을 안 지켜서입니다. 문제가 터지기 전에 미연에 방지를 하지 않고, 허겁지겁 고식지계, 언발에 오줌 누기 식으로 대응하니, 당장은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모르나 시일이 지나면 미봉해 둔 문제가 오히려 더 커집니다. 우리 속담에 "게으른 농군이 해거름에 바쁘다"라는 게 있는데 딱 그 격입니다.

정말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오는 게 세일즈인가? 그저 화려한 말빨과 겉치장, 혹은 뒷돈 거래로 성패가 결정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야말로 사회 생활을 제대로 해 보지도 않은 채 섣부른 피해의식과 부정적 사고부터 먼저 가동하는 실패자들의 공통된 관점입니다. 저자의 말씀에 따르면, "정기적이고 체계적인 활동과 스킬, 지식이 결합된 집합체이자, 종합 예술과도 같은 고도의 전문 직업"이라고 합니다. 사실 아무리 모바일 앱 구매가 일상화한 4차 산업 혁명 시대에도, 꼭 그 웨어를 다루는 사람을 보고 나서야 구매를 결정짓고 싶은 게 있기 마련입니다. 제6의 센스가 발동되어야 일이 잘 풀리는 직업이야말로 전문직의 특성이고, 그러면서도 정직한 노력이 결실을 보고야 마는 직종이라는 게 놀랍습니다. 여튼 저자는 이 관점에서 세일즈 프로세스 7단계를 제시합니다. (p42)

step 1 가망 고객 확보 (processing)
step 2 전화 접근 (tel-approach)
step 3 초회 면담 (approach), 사실과 느낌의 발견 (fact finding)
step 4 상품 설명 (prersentation)
step 5 거절 처리 (objection) 및 체결 (closing)
step 6 보험 증권 전달 (policy delivery. 책에는 오타가 난 듯해서 바로잡았습니다)
step 7 가망 고객 소개 (referral leads)

저자는 책 곳곳에서 감동적인 말씀을 자주 꺼냅니다. 예를 들면, "선택이야말로 인생의 특권"이라는 겁니다(p117). 아무리 소소한 체험이라도 내가 선택하고 내가 골라 내가 가꿔나가는 건 남다른 성취이며 축복입니다. 반면 아무리 화려하고 부러운 시선을 받더라도 내가 고른 게 아니라 그저 남에 의해 부여된 거라면 이는 노예의 금장식 족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자는 설령 맛나고 값비싼 음식을 먹어도 내가 고른 메뉴가 아닌 이상 가격만큼 효용이 느껴질 리 없다고 말합니다.

반면, 내가 고른 모든 선택이 최선이었나요? 현재 다니는 직장은 내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일터였습니까?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해 부정적인 답변을 할 것입니다. 저자는 이처럼, 최선 다음에 차선을 고르는 프로세스 역시 인생을 슬기롭게 살아가는 필수 지혜라고 강조합니다. 처음부터 원하던 진로는 아니었으나, 신중하고 체계적으로 목표에 접근해 가다 보면 어느새 내가 가장 원하고 적성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일터가 되어 있는 것, 이를 두고 저자는 "준비된 선택이 접근적 선택으로 진화해 가는 과정"으로 부릅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1) 신중, 2) 결단력, 3) 갈망과 열정 등이 필요 조건으로 골라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계획 없이 닥치는 대로 일을 고르면 커리어가 망가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사회의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다고 합니다(p119). 저자는 이 대목에서 한국의 어느 자동차 수리 명장의 예를 드는데, 그는 소리만 듣고 원인을 찾아내는데,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인생을 입체적으로 관리하며 치밀하게 설계해 온 이라야, 이런 장인, 달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가 세계 각국의 자동차 엔진을 자비로 구해 일일이 독학으로 그 구조를 공부하고, 행여 해외에 나가 연수할 기회라도 생기면 반드시 백 퍼센트 활용하여 자기계발의 밑천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인생 전반에 대한 알뜰한 배려와 전략적 사고가 있어야만 이런 경력 구축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언제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는가? 언제나 직업인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줄 알아야 합니다. 저자는 때로 정해진 틀에 안주하지 말고, "파괴적 성장"에 도전해 보라고 권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니, 목표는 동일하게 잡고 평소처럼 노력을 했으나 의외로 성과가 저조할 때가 있으며, 반대로 평소를 훨씬 상회하는 실적을 거두기도 합니다. 이는 실제로 진지하게 일을 해 본 사람이면 한두 번은 느꼈을 법한데, 그 비결(혹은 실패의 원인)을 두고 저자는 "열정의 차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진짜 잘나갔는데, 지금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 이런 말은 우리 주변에서 너무도 흔히 듣죠. 그런데 세상 살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지고 사회가 팍팍해져서일까요? 저자는 단언컨대 "노"라고 합니다.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전히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변한 건, 일상에 길들여져 무사안일주의로 흘러 버린 당신의 마인드셋, 혹은 퇴색한 열정입니다.

결국 열정을 자신의 일에 쏟을 수 있느냐 아니냐가, 모든 크고 작은 과업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요소란 게 저자의 말씀입니다. 다시 책 제목으로 돌아가 보니 "세일즈 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미쳐야(狂) 미친다(到)는 말도 있고, 예전 인텔의 CEO였던 앤드류 그로브는 "편집광이 될 정도라야 성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무엇인가야 오롯이 나 자신을 바치는 체험은, 어쩌면 종교보다도 더 큰 희열을 본인에게 안기고, 덤으로 세속에서의 짜릿한 성공도 가져다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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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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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디킨스와 톨스토이의 손길이 일본에서 살았던 한국인 가족에 스며든 (놀라운) 작품이다."

위의 평가는 이민진 미국 변호사의 이 작품을 두고 소설가 게리 쉬테인가드가 내린 것입니다. 확실히 가장 정확한 평가인 게, <올리버 트위스트>나 <어려운 시절> 등 대작에 묘사된 가장 힘든 계층의 고단하고 치욕적인 삶이 잘 드러났을 뿐 아니라, 그런 시련의 와중에도 오히려 빛을 발하는 인간애와 연대 의식이 페이지마다 스며 있기 때문입니다. 글쎄요, 우리 한국의 독자들은 예컨대 <토지>라든가, 선우휘 선생의 <노다지> 등 장편을 통해 일제 강점기 하 겨레의 수난을 픽션 속에서 여러 번 접해 왔고, 주변에는 아직도 그 시절을 가장 아프에 살아 오신 분들이 여럿 생존해 계시기까지 하죠. 그래서 "또 그 얘긴가?" 같은 반응이 혹시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안될 일입니다. 이런 민족 전체의 수난사에는 어떤 "면역 단계"란 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일본이 그 국왕이나 정부 차원에서 허리 굽혀 통절한 사과를 한 후에도, 우리는 이런 수난과 모욕의 역사를 영혼에 각인시키고 미래를 펼쳐 나갈 의무가 있습니다. "용서는 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는 유대인들의 유명한 경구처럼 말입니다.

배경은 1930년대 전반 식민지 조선의 경상도 해안 지방입니다. 착하고 힘도 세지만 언청이에 몸이 비틀린 불구로 태어난 훈이는, 그 장애의 인자가 후손에까지 물려질까 두려운 이웃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혼사도 치르기 어려운 처지입니다. 하지만 그 양친이 너무도 사려 깊은 분들이고, 이처럼 알차게 인생을 살아온 분들에게는 어떤 식으로건 선행과 성실에 대한 보답이 이뤄지게 마련입니다. 양진이라는 선하고 심지 굳은 여인과 결혼하고, 그 사이에서 순자라는 딸을 낳습니다. 이 1권은 대체로 순자의 일생 전반, 즉 목사 백이삭과 결혼한 후 오사카로 건너가 그곳에서 겪은 온갖 질곡과 시련 가득한 여정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종종, 식민지 시절에 경제는 오히려 괜찮았다는 왜곡된 평가를 듣곤 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일단, 그 시절을 몸으로 살아낸 산 증인의 말을 우선 청취하고 뭘 평가해도 평가해야 합니다. 이민진 변호사가 물론 그 오래전 시절에 자신의 생 한 구간이라도 닿을 나이는 아닙니다만, 이렇게 생생한 묘사가 가능하려면 직접 증인에게 사연을 들었어야 가능하지 않았겠습니까?

창작 동기는 1989년 예일대의 어느 강연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내내 따돌림당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느 학생의 사연을 들은 일이라고 나옵니다. 이 사건은 워낙 유명했고 당시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켜 KBS에서 특집 드라마로 제작, 방영하기도 했죠(이 변호사께서 강연을 들은 건 1989년이지만, 사건은 그보다 몇 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이 경험은 이 변호사가 아직 법대생 시절이었을 적이고, 이후 그녀는 일본계(이 점이 너무도 중요하군요) 미국인 남편(금융인 전문직)을 만나 일본에 건너가 살게 되고(오사카는 아니고 도쿄라고 하네요), 이후 관련자의 증언, 취재를 통해 이 장편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계라고 하면 우리는 아무 상관 없는 민간인에다가 괜한 증오의 시선을 보내는 못난 태도를 종종 봅니다만, 미국 사회 속 동아시아계 국외자로서 이 변호사 부부는 서로 결정적이다 싶은 정체감을 공유했겠으며, 대개 일본계 이민자들이 그러하듯 모국(고국)의 불의하고 추악한 과거에 대해 "미국 시민 다운" 공분을 느끼는 게 보통입니다. 이 소설에 보면 곳곳에, "이해심 깊고 마음 좋으신 부모님을 만난 복으로..' 같은 구절이 나오는데, 이 변호사 역시 그녀의 양친, 남편 등 해서 주변에 참으로 선량하고 교양 있는 인맥을 둔 게 진정 축복으로 보입니다.

현대 한국인들은 강점기의 일본인이라 하면 예컨대 헌병 경찰이나 서슬 퍼런 차림새를 한 공권력 집행자 등만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은 말 그대로 심을 식 자 백성 민 자를 쓴, 식민지에서 새 기반을 마련하려 든 민간인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이 이방인들이 우리 터전에서 주인 행세를 하며 조선인을 노예처럼 부리고 차별 대우를 일삼으니 우리 조상들이 느꼈던 심회가 어땠겠습니까. 이런 환경에서는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립, 번영할 수가 없죠. 또, 설령 입신 출세가 가능하다 해도 바로 동족이 저런 노예 상태에서 신음(이 표현은 카이로 선언에도 나옵니다)하는데 양심이 있다면 이를 외면할 수 없었겠고 말입니다.

이 장편을 읽는 독자들은 아마 마음이 많이 무거워질 듯합니다. 사실 디킨스의 장편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은, 물론 산업 사회가 빚은 고유의 모순 때문에 고통을 겪긴 합니다만, 그 중에는 누구의 탓을 할 수 없는 본인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든가, 혹은 아예 자신이 저지른 악행, 우행, 비행의 대가를 치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헌데 이 작품에선, 많은 이들이 순전히, 야만적인 이민족의 가혹한 통치 때문에 고생을 하고 모욕을 당합니다. 일본은 근대화의 명분을 내세우며 조선을 개화하겠답시고 이 반도에 상륙을 했으나, 그들이 여기서 자행한 건 상식을 벗어난 수탈과 저질스러운 지배 욕구의 충족 뿐이었습니다.

마치 심훈의 <상록수>처럼, 이 작품에도 다소 전형적이라 할 여러 순수한 사명감을 품은 개성들, 기독교 신앙에 충만하여 어렵고 딱한 이들을 구해 보려는 이상주의자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 단연 주목이 가는 이는 젊은 목사 백이삭입니다. 키도 크고 순수한 열정을 지닌 멋진  청년이지만, 이 당시 불치병으로 통했던 결핵을 앓는지라 그리 오랜 생을 누릴 수는 없는 불운을 안고 있습니다. 마치 <벤허>에서 나병이라고 하면 모든 이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듯, 이 시절에는 결핵이 그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하늘의 저주처럼 받아들여졌나 봅니다. 허나 현실의 그런 가혹한 족쇄가 자신을 옥죌수록 백이삭 목사는 더욱 자신이 믿는 종교에 순명합니다.

앞서 등장한 언청이(소설 속 단어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니 혹시 불쾌해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의 딸 순자는,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무책임한 늙은이에게 욕정 해소의 수단이 되어 아이를 배게 됩니다. 가뜩이나 불구자 집안에서 태어나 시집을 가기 어려운데 이런 일까지 생겼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데, 백이삭 목사가 이런 말을 합니다. "아이들은 모두 신이 주신 축복입니다." 거 참. 목사는 또 이 아이(아직 태어나지는 않았으나)와 여인을 구원할 방법은 자신이 바로 여인과 결혼해서 뭔가 떳떳한 신분을 마련해 주는 게 유일한 길임을 알고, 지체 없이 실천에 옮깁니다. 이렇게 해서 백이삭은 오사카행 배에 오르게 되는데, 아무리 자이니치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고장이라고 하나 근본적으로 이곳 역시 일인들의 땅입니다.

번듯한 외모 덕분에 일단은 존중을 받으나, 입 한 번 떼는 순간 바로 조선인임이 들통 나 지독한 취급을 받는 현실. 이 와중에도 일인인 척 시늉하며 약삭빠르게 적응해 가는 조선인들도 많고, 그리 쉽게 속아넘어가는 일인들을 보며 그들이 기댄 우월감의 기반이 얼마나 허약한지 조소를 보내게도 됩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행실로 조선인 전체가 욕을 먹지 않게 하라. 한 기독교인의 실수 때문에 전체 교단이 비난을 받지 않게 하라." 한국에서는 사정이 다르지만(이 변호사의 부친은 함경도 출신인데 이곳 역시 해방 전에는 기독교세가 강한 곳이었죠), 일본에서는 기독교가 마이너리티에 지나지 않고, 하물며 조선인이기까지 하다면 그 대접이 어떠했겠습니까. 고달픈 역정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하지만 여튼 함께 속죄(그동안의 무심함)하는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겨 가겠습니다. (2권 리뷰로 이어짐)

문학사상사에서 낸 책은 일단 호감을 갖고 읽는 편인데, 오탈자가 거의 없고 표지 디자인이 깔끔하며, 번역하신 분이 원 저자의 의도를 가장 잘 알 법한 분인 만큼 마치 처음부터 한국어로 쓰인 양 자연스럽고 토속적인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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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산업혁명 시대 성공적인 여성조직 50가지 노하우 -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책!
손석주 지음 / 북스타(Bookstar)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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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어느 조직이나 여성분들이 많이 진출하여 남성 인력이 쉬이 대체할 수 없는 업무에 종사들 하는 모습입니다. 이미 지긋한 연령대의 여성들께서 관리직에 올라 조직을 이끄는 풍경도 드물지 않게 봅니다. 다소 껄그러운 분위기가 생길 수 있는 건, 여전히 종전 분위기에 익숙한 (연세 지긋하신) 남성분께서, 마치 학교 남선생님이 학급의 철없는 여학생들이나 대하듯 조직의 직원들을 이끌고 나가려 들 때입니다.

사실 어린 여고생 여중생이라고 해도 담임 교사가 얼마나 섬세하게 그 마음들을 각각 헤아려서 대해야 하겠습니까. 하물며 회사라면, 2차 집단이라고 해서 무작정 합리성을 앞세우거나 철의 규율로 밀고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엄연히 직장인 곳에서 마냥 정의(情誼)로 일관할 수도 없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직장에서 버젓이 자기 자리 잡고선 똑부러지게 자기 일 척척 해 내는 여성들이 그런 걸 요구하지도 않겠고 말입니다.

저자께서는 보험, 금융 영업, 컨설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쌓은 중견 남성 경영인입니다(성함만 보고 혹시 여성 저자인 줄 착각하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은 자서전도 아니고, 논문도 아니며, 이론서도 아니"라고 먼저 밝힙니다. "만약에 내 아들이 여성(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직의 리더로 발령이 나면 나는 무슨 충고를 해 줄 것인가?" 같은 문제 의식을 갖고 집필을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공교롭게도 출간 시점에서 사회 전체에 미투 열풍이 거세게 불어, 각양각색의 조직에서 관리직을 맡은 중년 남성들이 그 처신에 당혹감과 두려움을 느낄 법도 한 작금이기에 더욱 시의적절한 면도 있습니다.

남자가 사회를 알고 조직을 아는 건 군 복무 경험 속의 여러 깨달음이 그 처음입니다. 군에서는 입대 직후 가장 막내, 신참으로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하지만 규율과 복종이 가져다주는 불편과 낯섦을 극복하고, 이후에는 차츰 계급이 오른 후 마침내 소집단의 리더로서 존경과 책임을 떠맡게 됩니다. 이 과정이, 성인 남성의 인격을 성큼 성장하게 만드는 게 보통입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쉽지는 않으나, 막상 한 코스가 끝나면 뿌듯한 보람을 남기게 마련이며, 개인적으로도 최근에 제대한 저의 후배(...) 역시 완전히 어른이 되어 돌아왔다는 점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헌데 저자께서는 "혈기왕성한 30여명의 청년 사병을 지휘하는 것(소대장이시라는 걸로 보아 저자는 장교로 전역하신 듯합니다)보다, 불과 8명의 여성 직원을 상급자로서 리드하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지" 꽤 오래 전 일인데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고 토로하십니다. 그 후 시행 착오를 겪어, 이제는 오히려 여성 조직 지휘의 대가가 되어 그 절실한 노하우를 이처럼 책으로 만들어 엮기도 하셨고 말입니다.

"권한 위임은 전폭적으로, 시스템적으로, 공명정대하게 하라" 특히 저자는 이 점을 강조하는데요. "누구도 인정하지 못하고 조직의 리더만이 평가하는 단순 능력별 권한 이양은 조직의 실패나 몰락을 가져온다."(p78:1) 이 점은 비단 여성 조직뿐 아니라 어느 회사에서도 통할 법한 말씀이라 각별히 유념해서 읽어 보았습니다. 저자는 은행 지점 창구를 예로 드시는데, 이 직급, 직렬이야말로 1970년대 이래 여성 인력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죠.

"예금 통장 개설은 지점장이나 차장급 전결 사항이면 그대로 이행되어야 한다." 전결 사항이 참 애매한 면이 있습니다. 말그대로 전결이면 수임자에게 전권이 이양되어야 하는데, 혹 문제가 생기면 상급자가 감독을 게을리했다고 또 욕을 먹는 경우가 있으니 말입니다. 예전 YS 정부 때 박 모 장관이 "그건 과장 전결 사항이라서 자신은 모른다"고 변명 했던 게 엄청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죠. 창구 직원 중 어떤 이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통장 개설을 허가해 주고, 어떤 이는 당분간 보류시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게 왜 문제인가. 독자인 저는 처음에 "남자라면 그런 조치를 이해하고 자기 능력을 입증할 때까지(혹은 윗선에서 이해할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 있으나, 여성이라면 분심을 품고 토라지거나 완전히 의욕을 잃고 인적 자원으로서의 기량이 쇠퇴할 수 있겠구나" 뭐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헌데 책을 더 읽어 보니 그런 취지가 전혀 아니시더군요. 저자의 말씀을 잠시 인용해 보면 1) 혼자서 능력 위임 받은 분이 자칫 왕따가 될 수 있다. (유능한 직원을 오히려 죽이는 결과) 2) 반대로 이 직원에게 동료들의 일감이 모이거나, 오히려 줄을 대는 식으로 공식 조직의 위계가 무너질 수 있다. 특히 2)의 경우 조직이 공식적으로 표방한 질서와 "실세"가 따로 놀게 되어, 그야말로 망하는 조직의 전형적인 루트를 밟게 된다는 겁니다. 이 대목을 읽고, 연세 높으신 저자보다 오히려 젊은 축인 제가 더 고루하고 답답한 편견을 여성에게 가졌던 듯하여 부끄러워졌습니다.

앞에서 제가 "전결 타령하다가 오히려 감독관리 소홀이라며 더 큰 책임 추궁을 당할 수 있다"고 했는데, 과연 저자께서는 "넘기지 않아야 할 권한은 끝까지 자신이 보유"하는 게 원칙이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저자는 평소에 잘 봐 오던 여직원이 머리도 좋고 유능, 현명해서 끝까지 그녀를 신임했으나 심지어 이런 직원에게도 최종 인감은 넘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과연 이런 칼 같은 원칙 준수 덕분에 어느 조직에서든 승승장구하신 게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업무에서 가능한 한 권한은 이양을 해야 조직 내 불만이 안 생기고 잠재력도 최대한 발휘될 수 있다며 자신의 지론을 강조합니다.

어떤 이는 혹시 이 책을 두고 "남성 우월적인 관점에서 소견 좁고 단순한 여성 잘 다루는 방법"을 가르치는 내용 아닌가 지레짐작하는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부처님 눈엔 부처님만 보이고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본인 스스로가 비틀린 관점을 가졌으면 다른 분의 선의도 일일이 곡해하기 마련이고, 이런 사람이 조직에 얼마나 큰 해를 끼치는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일 뿐입니다. 이 책에는 이런 일화가 다 나와 있습니다. (p85 이하)

어떤 여직원이 영수증 불출(拂出), 회수 등 업무를 맡았는데 잔실수가 많아 매번 D등급이고 전국 지점 중 꼴찌 수준이라, 지점장이던 저자에게 관리과장이 이 여직원을 교체해 달라는 요청을 해 오더란 겁니다(이 당시에는 업무 자동화가 안 되어 일일이 수기[手記]로 처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자께서는, 일 못하는 여직원이라면 아예 퇴사를 시키면 모를까 다른 지점으로 보낸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한 후, 관리과장의 평가에 무관하게 일단 그 여직원의 업무 행태나 능력을 지켜보기로 하셨답니다. 그 결과, 이 여직원은 본연의 업무인 영수증 불출 등에 도저히 전념을 못 할 만큼, 커피, 복사 심부름에 도대체 시간을 낼 틈이 없었고, 사용 후 영수증 제출 등을 미루고 이 여직원을 고압적으로 대하는 영업 사원들의 태도도 큰 문제더라는 겁니다.

저자는 일단, 손님 접대, 커피, 복사 등 잡무를 일절 금지시키고, 지점장인 자신부터가 솔선수범함으로써 잔심부름 강요라는 폐습을 끊어내려 애 썼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어느 여직원인들 자기 일을 제대로 해 낼 수 있겠냐는 거죠. 저자분 말을 들어 보십시오. "직급이 아래라고 이런 일을 시키는 건, 70, 80년대 군대에서나 있을법한 일이다." 아! 윗사람이란 무릇 이래야 합니다. 본인 스스로가 군에서 소대장을 지낸 분인데, 그런 관행이 1990년대 민간 조직에서는 결코 통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스스로 갖고 계시다니. 읽으면서 정말 감동했습니다.

이 책에는 그런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만, 독자인 우리는 사실상 이 지점에서 관리과장 S를 필두로, 특정 여직원에 대한 "직장 왕따"가 이뤄졌음을 눈치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유력 하급자가 실상을 왜곡하여 상신한 내용을, 상급자가 별 생각도 검토도 없이 실행에 옮긴다면, 조직의 기강과 분위기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 나라에는 이상하게 몇몇 성질 나쁘고 아첨, 중상 모략 즐기는 못된 놈들 몇이서 꼭 조직을 망치는 이상한 전통이 있습니다. 이 책에선 그러나 객관적으로 드러난 팩트만 서술할 뿐, 그 관리과장이 나쁜 사람이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추정적 힐난은 또 하지 않습니다. 한번 잘못된 처사를 바로잡았으면 뒷말은 일절 싹 거두는 게 또 듬직한 리더의 자세입니다.

페스트푸드점에 가면 "이달의 모범사원"이라고 해서 팻말을 거는 관행을 흔히 봅니다만, 손님 중 아무도 관심 없고 직원들에게도 동기 부여가 되는 바는 전혀 없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과연 그럴 것 같습니다. "칭찬도 야단치기도 언제나 1:1로 하라"는 게 저자의 지론입니다. 만약 칭찬/혼내기의 전과 후가 변함이 없다면 아예 이런 식의 소통을 할 필요가 없죠. 또 직원을 혼 내는 건 그녀를 직장에서 쫓아내기 위한 게 목적이 아닙니다. 일을 잘하는 직원으로 만들기 위해서이죠. 1:1 방식의 강조는 바로 여기에 원인과 장점이 있습니다. 어떤 여성 직원(그냥 직원이 아니라 소장)을 야단치는데, 말은 듣지도 않고 계속 울기만 해서 저자께서는 크게 당황했다고 합니다. 남자 대하듯 여성을 대해서는 결코 안 되겠다는 각성을 하시게 된 건 이 사건도 크게 한몫을 하지 않았나 독자로서 생각도 해 봅니다.

저자께서는 다양한 사건들을 회고하며, 어떤 경우는 "내가 성공적으로 야단 잘 친 기억"이라며 뿌듯해하시는 심회를 피력합니다. 성공적이라는 건 야단을 친 상급자도 상급자지만, 야단 맞은 사람이 "그전과는 다른 직원, 직장인"으로 거듭나야 제 효과가 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혼난 하급자가 이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였다면, 결국 상급자의 경력에도 작은 흠집이 나게 될 수 있을 뿐 아니라(경우에 따라서는 말이죠), 개인의 감정 풀이가 우선이 아닌 만큼 무엇보다 조직의 성과와 장래에 악영향이 남을 뿐입니다. 여성을 섬세하게 배려하는 신사로서의 품격이 드러날 뿐 아니라, 남자다 여자다 편가르기를 떠나 조직이라는 큰 그림을 보고 매사를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는 인격자의 가르침이 곳곳에 스며 있어서 좋았습니다. 조선 시대에 태어나셨다면 과거 급제 후 명 판관 명 사또가 되시지 않았을까 생각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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