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의 종말 - 평균이라는 허상은 어떻게 교육을 속여왔나
토드 로즈 지음, 정미나 옮김, 이우일 감수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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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개인생의 힘." 진정 이 책의 주제와 박력, 진정성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폴레옹이 이른바 근대 국민 국가를 표방하며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게 보통 교육이었습니다. 이 제도의 실시 덕분에 아무리 머리가 부족하고 환경이 열악해도 학교에서 훈련 받은 대로만 따라하면 최소한 기본은 누구나 흉내내게끔 되었습니다. 문제는, 기본 이하의 인력을 평균까지 끌어올린 건 좋은데, 모든 학생(나중에 성인이 되어 온전한 사회 성원의 몫을 해 내어야 할)의 정신과 능력, 개성까지를 획일화하여 천편 일률적인 꼴로 왜곡시켰다는 데에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개개인의 창의적인 기여를 요구합니다. 이제 "천편일률적인" 계산이나 노동이나 단순 반복 작업은 기계가 대신합니다. 저 역시 낮에 간단한 계산을 할 일이 좀 있었는데, 백 년 전이라면 이 정도 일을 해 내는 사람 하나를 기르기 위해 교사 등이 애를 얼마나 썼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오십 명(그 이상일 수도 있었겠죠) 정도 되는 학급에서 단 한두 명의 올바른 인력을 키워 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어떤 경우에는 자신도 똑바로 못 하면서 그저 열등생을 윽박지르기만 한 사이비 교사들도 얼마나 많았을지 하고 말입니다.

사실 저는 근 10년 동안 한국에서, 일부 학부모(중에서도 어머니)들이 지나치게 자녀의 정신 건강에 대해 염려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이(그 중에서도 아들)가 좀 학습이 부진하다 싶으면 무조건 ADHD로 몰고가며, 도대체 ADHD 아닌 애가 없는 것만 같더군요. 그런데 평균적으로(ㅎㅎ) 그렇게 흔한 질병이라면 과연 그게 병이 맞을지 하는 의심도 들었더랬습니다. 자신에 대한 애정이 지나친 몇몇 분이 건강 염려증이란 "병"을 달고 살듯, 아들 걱정이 지나치다 보니 웬만하면 친한 의사한테 가서 처방을 받아 오시더군요. 그렇게 해서 호감 있는 의사를 어머니가 친하게 곁에 두고 싶으셨던 게 본래 의도 아닐까 의심(?)도 들게 말입니다. ㅎㅎ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도 마찬가지로 이 병 아닌 병 ADHD에 대한 인지도(그 실체가 과연 있든 없든 간에)가 꽤 높습니다. 심지어는 전혀 갖다붙이지 말아야 할 곳에도 일단 자기가 아는 게 그 말이니까 함부로 적용(?)시키고는 웃어댄다거나 말이죠. 병명이 이처럼 경솔하게 농담 소재로 사용되는 걸 보아 향후 이 병이 재평가될 날도 그리 멀지만은 않은 듯합니다.

이 책의 저자이신 토드 로즈 교수는 하버드대 교육대학원에서 한 연구소의 중책을 맡고 계신 분입니다. 어떤 이가 박사학위를 따고 세계 최고 학부에서 이름난 연구자, 그것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학 분야에서 명성을 얻었다면, 우수한 두뇌 못지 않게 그 교육자로서의 인격과 품격에까지 자연스러운 존경심이 바쳐지기 마련입니다. 성장 과정 역시, 내내 모범생이었으며 교사와 동료 학생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반듯하고 안온한 꽃길을 걸었을 듯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우리의 에상과는 정반대로, 중학생 때 ADHD 장애 판정을 받았고, 결국 적응을 못 해 고교를 중퇴했다는 게 그 충격적인 이력입니다. 검정고시, 야간 학교 등록이라면 대개 한국 사회에서도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게 당연하다는 듯 여겨집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권위자 중 한 분이, 성장기 주요 지점을 이런 식으로 통과했다고 합니다.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가 맹렬히 질타하고 싶은 건, 이른바 "평균주의"라는 괴물을 통해 개인의 발랄하고 자유로운 가능성의 싹을 짓눌러 온, 교육계와 일반의 어리석은 통념입니다. 책 p47이하부터 계속 언급되는 케틀레는, 평균주의 사조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벨기에, 프랑스 등에서 위인으로 추앙되었고, 일본, 한국에서 통계학의 시조, 천문학에의 대표적 공헌자 정도로 알려진 인물이죠. 이분이 태어나던 해가 나폴레옹이 막 권력자로 부상할 무렵이고, 이분이 커리어를 다져 가던 시기는 나폴레옹이 초석을 둔 시스템이 프랑스에서 한창 제 가동을 하며 근대주의, 평균주의의 위력을 더해 갈 시절이었겠습니다.

아무튼 케틀레는 1830년 7월 혁명 때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벨기에에서 행정과 통치의 기반이 되는 여러 자료를 정리하는 데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자연의 오류로 빚어진 그 모든 오차는 바람직하지 못하고 오로지 평균만이 우아하며 아름답다." 사실 어느 정도는 그럴지도 모릅니다. 우리 인간의 미의삭은 가장 평균적인(모호한 표현입다만) 인간의 아름다움을 고루 딴 얼굴에 가장 큰 호감을 느낀다고도 하니 말이죠.

케틀레는 (이 책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사회물리학계의 뉴턴"이 되어 보려는 야심에 가득찼던 사람입니다. 저자가 파악하는 케틀레는 타고난 자연스러운 천재성을 발판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게 아니라, "이런 지향점을 타겟으로, 이런 수단을 쓰면 나도 뉴턴같이 유명해지겠지" 같은, 어떤 불건강한 공명심에 들떴던 타입 같습니다. 하긴 이런 잣대로는 라플라스 같은 이름난 수학자, 천문학자 역시 비판을 면할 수 없었겠지만 말입니다.

"사회물리학"이란, 그 전까지 완전한 혼란에 휩싸였던 우주에서 놀랍도록 정연한 법칙, 질서를 찾은 뉴턴의 업적처럼, 자신 역시 불순분자, 모자란 머리, 범죄자, 실직자, 자신을 상류층 출신이라고 착각하며 근거 없는 환상에 빠져 사는 늙은 거짓말쟁이, 하루종일 불평불만만 늘어 놓는 부적응자 따위로 가득찬 이 사회에서, 전체를 통제, 관리할 어떤 질서와 틀을 발견한다면 그야말로 뉴턴에 비견할, 아니 그를 능가할 위대한 업적이 아니겠는가 하는 뜻에서 쓴 말이겠습니다. 물론 케틀러의 실체가 그랬다기보다, 이 저자분의 해석, 시야를 대변하는 개념이겠습니다.

저자는 이런 논의 속에서, 생명 없고 존엄을 결한 우주, 천체라는 일개 대상과, 아무리 추한 부적응자이며 거짓말쟁이이고 직장에서 전혀 환영 받지 못하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하나도 이해 못 한 채 길거리 캐스팅만 기다리고 앉은 낙오자라고 해도 여튼 인간인 이상 최소한의 존중은 받아야 할 어떤 무엇을, 무리하게, (또 책의 표현에 따르면) 논리적 비약을 저지르면서까지, 동일시했던 케틀레의 오만을 사정 없이 질타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평균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우리 모두는 그런 평균에서 벗어나는 이단아들이다!" 사실 평균에서 이탈한다는 그 자체가 미덕은 아니고, 대부분의 우리들은 평균에서 떨어지는 분자를 경멸하는 게 보통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평균 이하는 고사하고 심지어 평균을 넘어서는 분자까지 평균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옭아매려는 폭력은, 사회 진보의 일체를 가로막는, 그야말로 전근대적인 구태요 폐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장 평균적인 아리아인의 외모를 찾아내어 체제 선전의 장에 활용하려던 나치의 한심한 시도를 무겁게 풍자한 작품으로는 게오르규 신부의 <25시>가 있었죠. 이처럼, 전형이니 평균이니 하는 말은 그 자체로 환상에 지나지 않는데다, 심지어는 전체주의의 폭력과도 연관됩니다. 과거 스탈린식 체제 역시 스타하노프 같은 허상의 노동자를 앞에 내세워, 평균 이하일 수밖에 없는 숱한 근로 대중에게 열등감과 죄의식을 안기고 착취를 일삼았습니다.

"평균"이라는 사고에 숨은 가장 무서운 요소는, 집단 구성원 사이의 서열화를 은근 획책하는 것입니다. 나은 사람이 있고 못한 사람이 있다는 사고 만큼, 사회와 공동체의 분열을 획책하는 위험 요인이 또 없습니다(아니면 반대로, 가장 극단적인 전체주의 독재의 발흥을 부추기든지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등수를 매길 게 아니라 개인들이 가진 다양한 가능성의 진작, 육성에 초점을 두는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지하고 어리석고 폭력적인 평균"이 휘두르는 가당찮은 독재의 주먹부터 먼저 깨끗이 청산하고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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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슬라와 아마존을 알면 데이터 금융이 보인다
김민구 지음 / 성안당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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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슬라와 아마존을 알면 데이터 금융이 보인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난 후, 독자인 제가 전에 보지 못하던 많은 시야가 새로 트였다는 건 분명합니다. 사실 책 제목으로부터 조금은 그 내용이 어렵지 않을까 짐작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고요. 또, 혹 내용이 쉽다면 다 읽고나서 남는 게 없지 않을까 지레짐작하는 분들도 있겠으나 실제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여러 모로 반전(?)도 있었고, 그러면서도 유익한 독서였습니다.

저자께서는 닉네임이 "밀린 신문"입니다. 신문 구독자가 신문이 밀리며 아까운 컨텐츠를 폐지 수집하는 할머니들께 밀어 넣는 건 아주 흔합니다(어렸을 때 학습지 밀리던 생각도 나네요). 그런데 당일자에서 심드렁하게 보고넘긴 기사가, 몇 년 혹은 몇 달 후에 우연히(저자님처럼 의식적으로는 아니고) 다시 만나면 의외의 깊은 뜻을 지녔다는 걸 깨닫는 수가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의 닉 "밀린 신문"에도 공감하게 되었고, 검색의 생활화로 보석 같은 정보와 인사이트를 얻어내야겠다는 다짐도 굳히게 되었습니다.

책을 처음 펼치면 마치 어린이 학습지에나 나올 만한 천연색 그래픽의 4지선다 퀴즈가 실려 있습니다. 쉽다고 여길 수 있으나 막상 풀어 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자가 구태여 이런 어린이형 포맷(내용과 난이도는 전혀 그렇지 않지만요) 퍼즐을 책 앞에 배치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테슬라와 아마존을 알면 데이터 금융이 보인다." 성인 독자라고 해도 테슬라가 뭔지 아예 모르는 분들도 아직 수두록할 겁니다. 데이터 금융? 캄캄하죠. 카카오 뱅크에 계좌 개설하고 스티커 이모티콘이나 받으면 할 일 다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실 개념만 정확하게, 또 가장 필요한 사항부터 잡고 들어가면,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아무리 어려운 주제라도 끝까지 정복 못 할 바 없습니다. 아마 저자는 이 점을 독자에게 강조하고 싶으셨던 듯합니다.

예전에 고단했던(물론 지금도 고단하지만요) 직장인들이 자주 입에 올리던 유행어구 중에 "TGIF"라는 게 있었고 이를 그대로 딴 외식업체 체인도 있었죠. 2009년 즈음 아이폰이 처음 나왔을 때 워낙 많은 이들이 (출시 훨씬 전부터 애플이 간헐적으로 흘리는 뉴스를 다 접하고선) 이 혁신 아이템에 열광했으며, 이때만 해도 윈도, PC 등과 호환도 안 되는 맥 시리즈에 대한 집착(디자인 작업에 특화는 되었으나 대중성이 떨어진다며)으로 온갖 욕을 다 먹던 애플은 위상이 급격히 바뀝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구글은 거대 포털 야후에 검색 엔진이나 제공하던 신생 중소기업이었는데, 여튼 이 무렵부터 "위 아 더 퓨처"를 당연하게 외칩니다. TGIF는 바로 트위터, 구글, 아이폰, 페이스북을 일컫는 미래 트렌드의 약칭이었습니다.

"누가 글을 길게 쓰나? 인터넷 시대에 간단히 140자면 끝이지." 이런 말 하면 아직도 그거 통할 만하다며 섣부른 공감 보내는 이들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트위터는 지금 너무도 고전하고 있으며, 의도는 아니겠으나 엉뚱하게도 트럼프가 빈사 상태인 이 회사를 먹여살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이후 FANG, 즉 페이스북, 아마존, 넷플릭스, 구글 4대 거인이 질주하다가, 현재는 AAAF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끈다고 저자는 소개합니다. 다른 건 같고 구글이 알파벳(구글의 지주회사)으로 바뀐 겁니다.

퀴즈는 앞의 세트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본문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이거 풀 수 있으신지 자가 테스트 해 보십시오. 이 퀴즈는 이제 책의 본 주제와도 직접 닿아 있으니까요.

다음 중 전기 자동차 전문 기업(독자가 혹시 모를까봐 이런 친절한 설명을....) 테슬라에서 생산한 "모델 S"의 특징이 아닌 것은? (p59)

① 자율 주행 기능
②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로 성능 향상
③ 평생 데이터 무료
④ 짧은 엔진 오일 교환 주기
⑤ 사라진 시동 버튼

"평생 데이터 무료"에는 음과 양의 효과가 다 있으며 마냥 반길 건 아니겠고요. 답은 ④입니다. 전기 자동차는 엔진으로 구동되는 게 아니라 모터에 의존합니다. 따라서 ⑤, 즉 시동을 미리 걸 이유도 없는 거죠. 과거 가솔린 엔진(디젤 엔진도 그렇지만)이 처음 나왔을 때 얼마나 열렬한 환영을 받았겠습니까만 현재는 그저 에너지 효율이 형편 없고 환경이나 오염시킨다며 이처럼 퇴물 취급에 그치는 겁니다.

이 문제도 한번 풀어 보십시오.

다음 중 인공지능의 성능을 결정 짓는 4대 핵심 요소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p67)

① 데이터
② 알고리즘
③ 사물 인터넷
④ 컴퓨팅 파워
⑤ 딥 러닝

사물 인터넷(IoT)도 물론 미래 일상을 결정짓는 중요 프레임웍 중 하나입니다만(그 정도도 아니고 엄청 핵심적인...), 인공지능과 직접 원리적으로 관계되는 건 아니죠. 물론 사물인터넷의 센서들이 부지런히 모은 데이터를 전송 받아야 제 할 일(어느 부문에서건)을 해 내겠습니다만.

사소한 나만의 습관도 모이고 모이면 그 중에서 어떤 유의미한 데이터, 결정적인 의료 정보가 나와서 환자들에게 큰 도움을 줄지 아무도모르는 일입니다. 저자는 "코골이 습관"을 모으고 모아 한국인의 수면 패턴이나 건강 정보에 대해 어떤 혁신적인 연구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빅데이터가 그래서 무서운 건데요. 대개 기업이나 연구자들은 어떤 목적 의식을 갖고 데이터에 접근하지만, 눈 밝은 사람은 그전에 전혀 염두에 안 두던 부작용으로부터도 놀라운 법칙을 캐냅니다. 우리는 흔히 페니실린의 발견을 두고 그저 "우연의 효과"라고 하지만, 눈 어둡고 무능한 연구자는 그런 행운도 자기 스키마에 안 들어온다고 무심히 지나치거나 심지어 무시합니다. 열린 마음 창의적인 두뇌라야 "지나가는 중요한 진리"가 우연이든 뭐든 캐치되는 거고, 따라서 세상에 우연, 행운이란 없으며 다 개인의 능력입니다.

예전에 마이클 크라이튼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세탁기가 발명되어 주부의 일손이 덜어졌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세상이 뭐가 바뀌었는가?"를 질문했지만, 저자는 전혀 생각이 다르십니다. "기술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도어가 많아지면 무엇이 좋을까요. 깜빡 잊은 빨랫감을 도중에 넣고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 안 해도 되는 게 좋습니다. 저자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모든 아파트에는 세탁기, 냉장고 등이 들어갈 자리가 미리 준비되어 있고, 따라서 가전의 규격이란 처음부터 정해졌을 뿐 어떤 개선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계속 새로운 제품이(고칠 틈이 어디 있다고) 나오는 걸 보면 정녕 개발자가 존경스럽다." 맞는 말입니다. 혁신에의 의지는 그래서 무섭고 개인의 이기심을 자극해 모두의 복리를 이끄는 자본주의의 위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데이터를 어디에 활용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백세시대에 잡텐을 가지라고 합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사람은 이제 한 가지 직업만 갖고는 밥벌이도 제대로 힘들 수 있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직장은 사람을 그리 오래 머물게 하지도 않습니다. 체제가 사악해서가 아니라, 특별한 이유 없이 한 직원을 계속 부리는 구조가 이미 그 회사를 시장에서 못 버텨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직업은 80세가 되어서도 현역이 될 수 있지만, 직장은 80세가 되면 그들의 소비자가 됩니다."

이 문장이 책 p182에 나오는데, 후반부는 아마 "그 자랑스럽던 직장이 무슨 내게 금전적 혜택을 주는 게 아니라 그저 내 돈으로 수입을 올리는 기업에 불과하다"는 뜻인 듯합니다.

책은 따스한 마음이 느껴지는 서술입니다. 저자는 어느 대목에서 "결혼 전에는 관심사가 자동차와 스마트폰이었지만, 결혼 후에는 냉장고와 세탁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가정 주부의 수고를 이해하는 저자의 생각과 문장이라면, 그 어느 독자의 마음 속 깊은 곳과도 소통할 수 있을 듯합니다. 4차 산업혁명의 파고가 온통 뒤덮을 미래라 해도 우리는 사람 사는 근본 이치를 잊어선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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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습
김용운 지음 / 맥스미디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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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이론은 어떤 의미에서 탈근대의 상징입니다. "A라는 원인이 있으면 B라는 결과가 생긴다." 뉴턴이 만유 인력 법칙 등 우주의 신비를 벗기는 노력의 초석을 놓았을 때, 이런 선형적(線形的) 세계관은 이성 만능의 희망과 비전을 계몽주의자, 지식인들에게 심어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사백여년이 지난 지금, 이 근대적 패러다임은 곳곳에서 도전을 받는 중입니다.

한국이 자랑할 만한 대석학 김용운 교수님의 이 책은 이른바 카오스 이론을 바탕으로, 작금의 도도한 세계 역사 물결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사실 저의 이 표현은 카오스 이론의 본질에 비추어선 어폐가 있긴 하죠), 원대한 통찰과 비전으로 우리 독자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내용입니다. 박사님께선 1927년생, 우리 나이로 아흔의 고령이신데도, 이 방대한 신저를 저술하셨고, 이 책에는 바로 몇 달 전에 터진 샬로츠빌 사건이라든가,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 IS의 과격 행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 양상 최근의 사정,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 외세가 끼어들어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게 된 시리아 내전 등 최신의 정보가 모두 반영되기까지 한 내용입니다.

책을 이렇게 쓰시려면 CNN 등 외신까지 모두 실시간으로 접하고 정보를 업데이트해야 가능한 경지입니다. 새파란 젊은이인 저도 정력과 시간이 부족한 과업을, 연부역강하신 이 대석학은 마치 숨쉬기 운동이나 하시듯 쉽게 해 내십니다. 심오한 통찰을 담은 저술이야 박사님 같은, 하늘이 낸 극소수 천재 두뇌라야 가능하겠으나, 외신을 보고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우리 같은 평범한 이들도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더욱 부끄러워지는 겁니다. 읽고서 정말 너무도 감탄스러웠습니다.

카오스 이론은 무작정 "미래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과는 궤를 달리합니다. 그보다는 결과의 확률분포적 도출이라든가, 단순계에서 통하던 법칙이 이 복잡계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전혀 예상 밖의 결과가 평지돌출할 수 있음을 언제나 명심하여 의사 결정하라는 충고에 그 맥락이 더 가깝습니다. 복잡계에 적용되는 카오스 이론 중 몇몇은 이미 실용적으로 높은 효율을 증명까지 해 냅니다. 기술이나 산업 분야를 넘어, 역사와 현금의 국제 정세를 살필 때에도 이 이론을 적용해 보자는 게 박사님의 제언입니다. 또, 단순 인과율을 통해 모든 미래가 예측 가능하다는 근대적 오만을 이제는 폐기할 때가 되었다는 뜻도 됩니다.

어떤 지도자가 극히 무능하고, 거듭된 실책과 비위를 저질러 자격을 상실했다는 것과, 그 지도자가 권좌에서 비참하게 끌려내려온 사실, 이 둘 사이에 항상 직접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악인은 즉시 천벌을 받아 죽어야 하며, 악함과 약함이 별개가 아닌 동일 결함일 수 있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어느 실직자는 그 순간 자신의 실체를 파악하고선 자살에 이르러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고, 이들 중 상당수는 멀쩡하게 그 부조리한 행태를 이어가며 민폐를 끼칩니다.

여튼 어떤 분은 그 자리에서 내려욌는데(=끌려내려졌는데), 이 역시 저자께서는 복잡계의 예측 불능이란 본성이 현실로 화한 예라고 보시는 듯합니다. 저자께서는, 아마도 뒤에서 웃고 있을 미스터 X의 존재도 슬쩍 언급하시는데, 세계 지도자 중 이니셜이 x로 시작하는 이가 그리 많지도 않습니다(^^ 물론 그저 미지의 존재라는 뜻으로 X를 거명하셨을 수도 있죠. 누가 감히 박사님 같은 대석학의 진의를 감히 일도양단으로 추단하겠습니까. 이 역시 카오스 법칙에 따라 감히 몇 가지 가능성을 거론할 뿐입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사실 역시 기존의 여론 조사 기법이나, 언론 기관 등의 통찰, 기대 등으로는 전혀 감 잡을 수 없었던 의외의 결과였습니다. 브렉시트는 또 어떻습니까? 근대 이후 세계는 이성과 뚜렷한 목적을 가진 이들이 때로는 무력으로 충돌하고, 때로는 현명한 지도자들이 자국민을 설득하고, 때로는 국민 의사를 선제적으로 대변하여 과감한 선견지명으로 국정을 이끌고 세계 정세를 안정시켰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독재국가는 물론 소위 민주 선진 국가들에서도, 어떤 군중 심리나 대중 추수, 선동적 술수에 리더들이 즐겨 의지합니다. 의지한다기보다 그들 역시 국가와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도 모르면서 미친 곡예를 이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에측이 안 됩니다. 지도자의 자질도 부족하고, 그 전에 시대의 성격이 바뀌어 더 이상은 과거 방식으로 통제가 안 된 세상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박사님은 특히 대중의 한(恨)에 주목하십니다. 종래 한(恨)의 정서는 우리 한국(韓國)인들 고유의 품성과 무의식으로 여겨졌으나, 박사님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불특정 다수, 혹은 특정 종족이나 인종이 품은 resentment(단, 책 어느 한 군데에서는 s가 두 번 겹쳐진 오타가 발겭됩니다. 다음 판에선 교정되길 기대합니다)가 작금의 세상을 움직이는 큰 동력 중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흑인은 신대륙에 노예로 끌려와 수백 년 간 경멸과 차별 받아 온 한이 있습니다. 반면 백인 중 상당수는 1960년대 민권 운동 이래 일부 흑인들이 정치적으로 협잡을 일 삼아 부당한 특권을 챙겼다며 역 차별에 대한 깊은 분노를 품었습니다. 샤를로츠빌의 대립상은 "헤이트(너희가 싫다!)와 카운터헤이트(우리 역시 그런 너희가 싫다!)의 극명한 충돌"이라는 게 박사님의 규정입니다.

이슬람 역시 한을 품었습니다. 석유로 인해 챙기는 막대한 이익 중 상당 부분은 미국과 유럽 백인 자본이 이유 없이 자기들에게서 뺏어간다는 피해의식입니다. 현세가 고단한 일반 민중은 지금의 생과 사가 큰 의미 없고, 교리에 충실하다 죽은 자에게 허여되는 천국행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살 테러가 그리도 빈발한데, 당사자에게는 멸사봉공 이념의 장엄한 실천이므로 아무 회한이 없습니다. 이러니 지구촌에 편안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 등의 거룩한 희생을 기리며 교육을 받았으므로 이런 현상에 대해 마냥 냉연한 반응으로 일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성과 대화와 타협으로 갈등이 종식될까요? 종래의 진보 좌파 진영은 이른바 "정치적 공정성"을 내세우며 그런 이상을 제시합니다. 보수 진영은 힘의 논리를 앞세워 이른바 sham peace가 부른 불건전한 교착 상태를 일거에 타파할 것을 주장합니다. 해결책과 비전은 서로 극과 극이지만, 이들 양 진영은 이미 효용이 다한 어떤 근대 사관, 세계관에 기반했다는 게 다릅니다. 그러나 박사님은 이미 미래의 패러다임인 카오스 이론에 깊이 천착하시어, 저 같이 새파랗게 젊은 독자층이 간신히 인식 기반으로 기대는 근대 합리주의를 이제는 폐기할 때가 되었다며 담대한 선포를 하십니다. 박사님의 견해가 맞고 아니고를 떠나, 사고와 철학의 근본 지평 설정에 이처럼 유연하실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놀랍습니다.

원인이 복잡하고 인풋(input)부터가 측량이 어려울 만큼 다발적인데, 어떻게 단순한 결론을 뻔뻔스럽게 도출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변했으면 우리들의 사고와 관점 역시 변해야 합니다. 경영에서는 이미 모든 것을 바꾸고 폐기, 전복하라는 파괴적 혁신이 대세입니다. 복잡계의 관측, 혹은 참여는 복잡계의 본성(이 말도 사실 어폐가 있습니다만 일단요)에 맞추어야 한다는 게 이 심오한 대저로부터 우리 평범한 독자들이 암시받을 수 있는 한 가닥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근대, 근대, 혹은 탈근대 중 어느 지평에 발을 디디고 있습니까? 겸허히 자문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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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연 토익 950 최상위 문제 실전 모의고사 유수연 토익 실전 모의고사
유수연 지음 / 사람in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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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익의 LC에서는 대개 그리 어렵지 않은 단어, 문장, 대화들이 제시, 사용되므로 응시자들이 아주 큰 부담을 느끼지는 않습니다만, 현재 수준에 머무르고 발전 못하는 이들은 딱 거기서 멈추기 때문에 점수가 오르지를 못 합니다. "나도 좀 하는데?"같은 어설픈 자기 만족이 아니라, 못 푸는 문제는 왜 못 푸는지를 알고 좀 번거롭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부숴 나가야만 합니다. 이런 책을 누구한테 보여 주면, "이런 건 몰라도 돼."라든가, "실제 토익은 이렇게 안 나와(더 쉽게 나온다는 뜻)."라든가, 만점 맞을 생각 말고 딱 여기까지만 하라는 등, 아주 전형적인 중위권 그룹의 물귀신 멘트가 꼭 나옵니다. 그런 말 듣는 사람들도, 어차피 공부는 하기 싫고 자기 한계를 계속 마주치는 고통도 느끼기 싫고, 얼씨구나 하고 저런 싸구려 팁(만)을 수용하기 때문에 도통 그 점수에서 발전을 못하는 거죠. "껍질이 깨지는 아품 없이는" 그 어떤 성취도 이뤄질 수 없습니다.

이 책은 확실히, 종래 자신이 계속 도전하다 미끄러지던 그 지점의 난점이 무엇인지 분명히 짚어서 보여 줍니다. "당신은 이 이유 때문에 900. 950점의 벽을 못 넘었던 것이다."라고나 하듯이요. 그 약점을 객관적으로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는데, 이 책은 극복의 방법까지, 혹은 지름길까지 가르쳐 줍니다. 유수연 시리즈만의 탁월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끔한 지적에 그치지 않고(그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솔루션까지 반드시 제공된다는 게, 언제나 느끼는 바이지만 참 대단하십니다.

LC 테스트를 위한 음성 파일은 일단 http://www.saramin.com  에 가셔서, 페이지 왼쪽 아래 영어 자료실에 들어간 후 이 책 제목인 <유수연 토익 950....>을 클릭한 후, 압축 포맷을 받아야 하는데 회원 가입을 꼭 해야 합니다. 파일은 mp3 포맷 세 개인데, 책에 테스트가 세 개 세트이므로 그에 따라 나눠 놓았습니다. 따라서, LC 파트를 통으로 모두 진행해야 하며, 구간별(문항별) 분류가 없으므로 적절히 눈치껏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파일 하나 크기가 40Mb 후반대입니다.

실전처럼 LC가 다 나오고 RC 파트가 다 끝난 후, 답만 먼저 알려 주고 그 뒤에 해설이 실렸습니다. 제가 이 책 보면서 느낀 건, 답이 맞다고 해도 그걸로 만족하지 마시고, 뒤에 실린 해설을 꼭 읽어 보십시오.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저자의 인사이트가 풍성하고, 이런 고수의 팁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실력이 늡니다.

고난도 문제 엄선이라고 하나 모든 문제가 다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 예로 TEST 1의 1번 같은 건 평이합니다. 해설을 보면 "포괄적인 설명이 대개 답이다." "그림에 없는 단어가 들리면 곧바로 소거하라"(사람이 안 보일 경우에)같은, 토익의 전통적인 팁이 여럿 실려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유수연 책이라고 해서 딱히 뭐가 다를 바 없죠.

4번에서 "조명기구가 설치 중이다"가 틀린 이유는, 현재 진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치는 이미 앞선 시제에 이뤄졌기에 현재완료 같은 게 무난하겠고, 만약 is being ~ed 같은 단어 하나하나가 명확히 안 들린다면 이걸 정답으로 잘못 고를 분들도 꽤 많을 듯합니다. 천장에 조명 기구가 있다는 자체는 사실이기 때문이죠. 그 앞의 2번은, 반대로 be being ~ed가 언제나 정답이 되는 경우는 그럼 언제인지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근거가 확실하므로 듣기에만 그저 멋있는 설명이 아니라, 실전 문제 풀이에 분명 도움이 됩니다. 단 6번의 경우, 두 사람이 사진에 등장하는데 과연 등을 지고 걷는지, 얼굴을 보인 상태인지 좀 모호하다는 게 아쉬웠습니다.

7에서 31까지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장 올바른 걸 고르는 형식인데, 고난도 문항 pool이니만치, 처음에 다소 동문서답 같이 들려도 "우회적 답변"으로 볼 수 있는 걸 고르는 유형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우회적 답변에 포함될 만한 게 사실 무한정이겠으므로, 핵심은 명백한 오답을 먼저 제거해 나가는 겁니다. 이 유수연 시리즈는 "명백한 오답"울 소거하는 요령 제시가 아주 탁월합니다.

8번에서 사실 저렇게 짧은 답은 대개 정답이 아닐 수 있지만 통념의 허를 찌르는 출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질문은 현재 진행형인데 답이 과거가 될 수 없다는 게 저자의 해설입니다. 그러나 많은 응시생들은 "일시 장애가 있었으나 지금은 해결되었다는 투로 답할 수 있지않을까?" 같은 의문을 가질 겁니다. 만약 그런 의도라면 but으로 연결되는 반대 사실 멘트가 아마 이어지겠습니다.

"신규 프로젝트 예산 건은 아직 승인되지 않았나요?"
"이사님이 막 그것을 받았습니다."

이 역시 우회어법으로 정답이 되는 케이스인데, 일단 "이사님"이란 분이 "승인"의 주체입니다. 따라서 상황이 근접되고, 승인되었나 아니냐를 물었으나 책임자의 수중에서 지금 진행 중이라는 뜻의 답변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따라서 답변의 비정형성을 원망할 게 아니라, 이런 유형에 마인드를 적응시켜야 옳겠습니다. 실무 영어에서도 예스 노 식의 초등학생 답변, 대화만 오가는 게 아니듯 말입니다. 우회어법에는 통상보다 좀 더 나아가서, "회피성 답변(테스트 1의 16번)"도 이에 포함될 수 있다는 점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반문 답변(27번 등)", "대안 제시(29번 등)"도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동일 어휘가 그대로 들리면 일단 답이 아니다, 연상 어휘도 마찬가지이다, 발음이 비슷하지만 다른 단어일 때 일단 제외시켜야 한다, 등도 토익 수험가에서 많이들 지적해 왔던 팁들입니다. 그래도 유수연 책에서 보니까 뭔가 권위나 믿음이 느껴집니다.

테스트 1의 RC 149번에서 이 안내문이 발견될 만한 곳은 "공공장소"라고 나오는 게 답인데, 지문에는 시립 공원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인 장소 제시가 한 단계 위에서 포함될 만한 유개념을 고르는 게 포인트입니다. free of charge가 no admission fee와 단어 하나도 일치 않으면서 정확한 rephrasing이 되기에 답이 이것밖에 없다는 점,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테스트 2 RC에서 101번이 어렵습니다. 명사가 동명사보다 우선이란 점에서 losing보다는 losses가 와야 한다는 게 책의 해설입니다. 그러나 긍정문에서 "어떠한 ~라도"의 뜻인 any 뒤에, 이 문제의 보기(이며 정답)인 losses 같은 복수형이 올 수 있냐는 게 고민거리입니다. 이 때에는 "losses arising"을 하나의 명사어구로 보고, 전체를 단수 취급하는 게 어떨까 생각합니다. 원칙들이 충돌하는 경우이므로 우선 순위가 잘 납득 안되는 분들은 꽤 고민이 될 겁니다. 102번 같은 경우 few도 좋으나 수 일치가 안 되어서 오답입니다. 가능성이 최소라고 했지 전무한 게 아니지 않냐는 어느 수험생의 항변도 있던데, 문법이 의미보다 더 선순위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104번 같은 경우 참 어렵습니다. 형용사 앞에는 부사가 와서 annoyingly가 꼭 정답 같지만, rattling noise가 하나의 명사어구를 이루니 역시 형용사 annoying이 와야 한다는 겁니다. 이걸 이해 못 하는분도 많습니다. "아니 왜 꼭 그렇게 파악해야 하는가?(평범하게 형+명으로 볼 수도 있지 않냐는 취지)" 이에 대한 답은 사실 없고, 원어민들의 감각이 더 우선이란 말 말곤 사실 논거가 없습니다. 그래도 (a)가 정답이라는 책의 태도는 백퍼센트 타당합니다. 105번에서 어떤 분은 "여자가 세상의 절반인데, 왜 primary인가? 절반이 바로 최우선이 되는가?" 같은 항변을 합니다. primary는 여기서 "중요한, 주요한, 무시 못 할" 정도로 해석해야 하겠습니다. 


test 2의 106번에서 본문 중 Jade will rapidly moved... 중 moved는 move로 고쳐져야 합니다. 뒤의 해설 파트에서는 바르게 move로 되어 있습니다.

test 2에서 rattling noise를 두고 이른바 "종류 형용사"로 규정하여, 이런 것은 다시 다른 형용사가 앞에서 수식할 수 있다는 명쾌한 설명이 나왔더랬습니다. test 3의 102번(물론 RC) 같은 것도, living relative에서 living이 "종류 형용사"이기 때문에 그 앞에는 sole이 아주 자연스럽게 위치합니다.

test 3 RC의 104번 같은 건, 일단 firm's board committee(혹은, 그 안에서의 변화)가 "약속"의 주체이지 객체가 될 수 없으므로 답은 능동태라야만 하겠습니다.

106번은 답이 (b)인 걸 쉽게 알 수 있으나, 압권인 건 그 뒤의 해설입니다. of 같은 건 앞의 section과 뒤의 division 모두 "부서"를 나타내므로 답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 설명이 혹 아니라도 이걸 답으로 고를 분은 거의 없겠으나, 이 전치사의 성격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는 계기가 분명 되었습니다. 이처럼 친절하고 정확하고 자세한 설명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연구가 선행되어야 가능한 건지요.

107번은 sinificance와 authoriry 사이에서 고민하는 분들이 꽤 될 겁니다. 저자는 collocation으로 접근하여, 뒤의 over라는 전치사가 전자와는 쉬이 안 어울린다고 설명합니다.

110번 같은 경우 목적어에 주목하라고 해설에서는 주문합니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estimate, verify 같은 동사를 두루 포괄하는 게 assess이므로 이걸 답으로 골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122번 해설을 보면 "허가로 책자에 있는 본문과 사진이 제공되었다"고 해석했으나, 저는 "사진과 본문이 제공된" 게 아니라, "사진과 본문에 허가가 제공되었다"고 해석해야 정확할 것 같았습니다. 우리말로는 그게 그거라고 여길지 모르나, 타 영어 시험이나 수업 시간에 에세이 쓸 때 이런 문법을 안 지키면 바로 감점이더라구요.

128번에서 "접속부사는 어디까지나 부사일 뿐 결코 접속사가 아니다" 같은 해설은 참으로 탁월합니다. 생긴 게 비슷하다고 하는 일까지 동일한 건 아니죠. 특히 문법적으로는요.

129번은 물론 답은 (a)지만, (d)가 혹 to the contrary였다면 이것 역시 답이 될 수 있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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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순종 세계기독교고전 59
앤드류 머레이 지음, 김원주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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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은 기독교인의 가장 아름답고 성스러운 덕목입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은 유독 이 "순종'이란 덕목을 놓고 여러 주옥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저자인 당신께서 철저히 행동에 옮긴 미덕이기에 그의 글을 읽는 교인들이 더욱 신실한 마음으로 교화되는 게 아닐지 저는 생각합니다.

같은 저자께서 쓰신 다른 저작 <순종의 학교>가 있습니다. 온유하고 덕망 높으신 선생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녀들에게 조용히 가르치는 덕목이 바로 "순종"이며, 이 거친 세파에서 온갖 불합리를 겪으면서도 "섭리에는 더 깊고 오묘한 어떤 계획이 있으려니" 하며 그를 따르는 우리들이 바로 학생이고, 생생한 교훈을 삶 속에서 배우게 하는 세상은 바로 "순종의 학교"가 아니겠습니까. 혹은, 성도들이 모인 교회 역시 순종의 학교라 불려 백번 타당하고요.


앤드류 머레이의 청신하고 울림 가르침 중 단연 새겨들을 만한 부분이, 이를테면 이런 구절들입니다. "양들이 순종하려고 애 쓴 후에 양순해지던가요? 또, 늑대가 사나워지려고 잔뜩 용을 쓴 후에 비로소 포악해지던가요? 아닙니다. 순하건 포악하건, 이는 모두 그들의 천성일 뿐입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대번에 우리는 마음에 동요가 일어납니다. 어떤 분은 "그럼 나는, 과연 양인가, 이리인가?" 양을 자처하자니 그간 숱한 고비에서 불순종했던 거칠고 모진 행실이 떠오릅니다. 그렇다고 늑대인가? 물론 나는 이웃에게 불성실하게, 냉정하게, 잔인하게 대한 적이 많겠습니다만, 그렇다고 악한 처신 하나로 일관한 것도 아닙니다. 여튼 완전한 늑대가 아니라서 안도하기도 하지만, 지금 "완전한 순종"을 가르치고 계신데 양을 온전히 닮지도 못한 게 또 분명하니, 우리 마음은 여전히 불편합니다.

"왜 우리는 굳이 수고를 들여야 양처럼 순종할 수 있나요? 하나님의 자녀되기에 많이 부족해서입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우선 우리는 누가 뭐래도 자랑스런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한편,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는 그간 완전한 순종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천성으로 양처럼 순종하기엔 또 늑대를 상당히 닮았습니다. 이제 양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건 알았습니다만, 그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머레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합니다."

이게 결국은 모든 답을 대신하고, 그 자체가 해답입니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율법 일체의 번거로움을 폐하고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너희에게 새 계명, 언약을 줄 테니,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유일한 계명이다."

얼마나 간명한 가르침입니까? 또, 사랑은 진정 모든 증오와 갈등과 번민과 탐욕을 일시에 잠재우는 특효약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사랑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역시 우리는 온전한 양이 아니므로, 수고가 그 길을 걷는 데에 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안타까운 건, 우리가 아무리 혼자 수고를 들여도 그 길이 쉬이 찾아지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이 책 역시 거듭남(중생. 重生)의 오묘한 이치를 거듭 강조합니다. 머레이 목사께서 펴드시는 성경 대목은 바로 로마서 7장입니다. "하려고 하는 뜻이 내 속에 잇으나, 하려고 해 보면 할 수 없음을 나는 안다." 어떻습니까? 마음은 구름 같습니다. 의지는 충만합니다. 그러나 신의 일개 피조물인 내가 너무도 미미한 존재이기에, 매번 우리는 땅에 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께 기대어야 하는 겁니다. "아버지, 제가 이처럼이나 힘 없고 미미하니 저를 살려 주소서.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나이다." 바로 이런 깨달음으로 인해, 장 칼뱅은 구원 역시 인간의 행위가 개재되는 게 아니라, 절대적으로 신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다고 단언하고, 교리로서 이를 정립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물론 우리는 육신의 삶, 세상의 삶을 떨쳐 내고 주님 안에서의 정결한 생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온전한 양(羊)이 아니기에, 그저 가만 앉아서는 경건한 삶이 불가능합니다. 허나 노력만 한다고 다 이뤄지지 않는다는 게 또 문제입니다. 바로 이때 성령의 은혜가 모든 것을 마무리짓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기도에 내려주시는 주님의 응답입니다. 내가 양의 천성에 가까워지려 수없이 울부짖고 어버이께 기댄 끝에, 예정된 구원을 주께서 비로소 내려 주는 겁니다. 구원은 다른 게 아니라, 우리 마음이 양처럼 어린이처럼 깨끗해지는 겁니다.

"착해지기만 하면 다인가요? 돈도 벌고 똑똑해지고 남들 보란 듯 살아야죠."

바로 그게 틀린 사고방식입니다. 물론 잘산다고, 많이 배웠다고 죄악이 되는 건 아닙니다(그나마 대부분은 잘살지도 못하고 배운 바도 거의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딴청이나 피우고 허세나 떨면서 정작 중요한 언약과 계명은 내팽개치는 게 이들 간악한 무리의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미 간단하면서도 본질되는 길을 이미 가르쳐 주셨는데 우리는 이를 모른 체 한다는 게 우습다는 겁니다.

"왜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못합니까? 왜 완전한 순종이 힘듭니까?"

이는 질문과 답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벌써 순종이 어렵고 힘들다는 투정 속에, 불순종의 죄가 슬슬 꼬리를 드는 겁니다. 한편, "그렇다. 순종이 답이다. 순종하면 성령께서 어느새 임하시고, 믿음과 사랑도 덩달아 내 안에 풍성해진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벌써 길이 보이는 겁니다. 머레이 목사님 말씀은, 어리석은 우리들이 제 길을 찾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서, 지름길 하나를 넌지시 알려 주는 겁니다. "안 보이면, 힘들면, 일단 순종부터 시작하는 게 어떤가?"

과연 명답입니다. 구약의 욥이, 그 부지런하고 유능한 분(욥 자신)의 신상에 온갖 재앙과 불운이 닥칠 때, 어떻게 했습니까? 물론 그는 이런 일을 당할 이유가 조금도 없는 현인, 선인이었기에 처음에는 원망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속으로 욥이 이런 원망도 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구약은 그럴 경우 못난 우리들이 너무도 절망(도저히 우리는 욥 같은 성인의 경지를 못 따라하겠으므로)할까 싶어 이를 적절히 배려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입니다. 여튼 그래서, 욥은 어떻게 했나요?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욥은 잃었던 걸 모조리 찾고 더 번영했을 뿐 아니라, 신의 가장 사랑하는 자녀가 되었고, 무엇보다, 이게 중요합니다만, 악마를 철저히 부숴 버린 승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렇게 하셔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우리 죄를 씻으려면, 대신 씻어 주시려면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그때 대속해 주지 않으셨으면 벌써 이천 년 전에 다 죽었을 겁니다. 그 크신 사랑 덕분에 아직도 생을 이어가고, 그 와중에도 또 죄를 짓고 방자하게 굽니다. 이제 다시 순종 없이는 예수님의 희생이 무위로 돌아갈 판입니다.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순종이란 이처럼이나 중요합니다. 어리석고 한심한 우리는, 예수님이 그처럼 쉬운 말로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말을 말로 꼬고 비틀고 청개구리 짓을 합니다. 사랑이 어려우면 어떻게 할까요? 앤드류 머레이는 다시 쉬운 말로 바꿔 주는 겁니다. "주님께 순종하라." 과연 탁월합니다. 곤경에 부닥치면 어떻게 합니까? "순종합니다." 어떻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성령이 임해서입니다."

순종을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지 마십시오. 정말 마음이 있다면 일단 순종부터 하고 보는 겁니다. 이 작은 순간에도 성령은 이미 임하시어 우리를 돕습니다. 순종은 알고 보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쉽습니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숨 쉬는 게 가장 어렵고, 우리가 순종 못 하는 이유는 바로 영혼에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요 병은 우리가 못된 마음을 품는 사이에 사탄이 몰래 씨를 뿌리고 간 겁니다. 어째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은 저 구석에 버려 두고, 사탄이 던져 준 달콤하고 해로운 사탕만 입 안에 고이고이 굴리면서 자발적으로 건강을 해칩니다.

우리는 보호를 받습니까? 양은 목자의 보호를 받습니다. 선한 마음은 그 자체가 무한한 축복이나, 늑대의 이빨에 그 자체로 대항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늑대가 찢는 건 고작해야 양의 살갗이며 그 마음까지 침노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순교자들은 모진 형벌을 받아가며 죽음을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죽는 건 고작 육신이나, 사는 건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베드로서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둘째는 믿음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이런 보호는 오로지 온유하신 주님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에서 비롯합니다. 주님은 심지어 우리의 반항과 일탈까지도 우리의 자유에 일임합니다. 이처럼 그의 사랑이 무조건적이기에, 우리도 그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겁니다.


순종, 오로지 순종입니다. 시늉만으로는 안 됩니다. 이 책 제목을 다시 보십시오.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완전한 순종" 순종에는 티끌만한 사심도 계산도 위선도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 역시 주님께 온전히 순종한다는 착한 마음이, 내 영혼을 완전히 감싸고 돈 후에야 제 자리를 잡습니다. 머레이 목사님은 다시 갈라디아 서를 인용합니다. "육신에 따라 살지 말고, 오로지 성령에 의지해 살라." 그러나 어리석은 우리들은 성령의 임재하심을 눈 먼 듯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을 의지할 수 있습니까? 바로 순종입니다. 무조건으로 복음과 말씀과 주님께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절로 성령이 우리 미천한 피조물들의 갈 길을 알려 주십니다. "완전한 순종", 이 위대한 신학자는 믿음의 본체를 이처럼이나 알기 쉽고 실천에 바로 옮길 수 있는 덕목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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