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 철학자 황제가 전쟁터에서 자신에게 쓴 일기 현대지성 클래식 1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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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처음에 공화정으로 출범한 정치 단위입니다. 다스리는 영역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합의와 타협을 일일이 개재시키기가 쉽지 않아 제정으로 이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정치적 실력자들이 알력을 빚기 십상이었습니다. 군인황제들의 대립 항쟁으로 인한 혼란기도 자주 등장했고, 잔학한 독재자들의 전횡도 역사를 얼룩지게 했습니다.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가 연달아 출현하여 로마의 정치를 안정시킨 건 그나마 큰 축복이었습니다. 이 "오현제"의 재위 그 황금 시기를 마지막으로 장식한 분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입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애독한 고전이라고도 평하는데, 어쩌면 미국이 최상의 전성기를 보내고 서서히 국운이 가라앉기 시작한 것도 그의 재임기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정치 단위나 개인이라도 전성기를 지나고 나면 다음에는 내려갈 일만 남았는데, 이때 당사자는 차분한 마음으로 하강의 시기를 관조하고, 인간사의 상승과 하강 국면 뒤에 숨은 이치를 냉연히 통찰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왜 노련하고 유식한 정신들이 서투르고 무지한 정신들에 의해 낭패를 당하는가.(p104)" 실제로 우리의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런 곤란이나 치욕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파견한 관리나 측근 혹은 지인이 그런 곤경에 처한 걸 보고 떠오른 상념일 수도 있고, 자신이라든가 자신의 선임자들처럼 현명한 정치를 편 황제들이 다스린 제국이, 어인 까닭으로 매번 변방의 만족에게 어려움을 치르는지 납득이 안 되어서 나온 코멘트일 수도 있습니다.

여튼 그의 결론은 "시작과 끝을 알고 모든 존재에 대해 알고 있고, 정해진 주기를 따르는 영원한 순환 속에서 우주 전체를 다스리는 이성, 이를 아는 정신이다."입니다. 심오하기도 하고 다소 느닷없는 비약처럼도 들립니다. 전통적인 헬라 철학의 결론처럼도 보이고, 아직 기독교 공인 200년도 훨씬 전이라 그 교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을 황제 본인의 (지독한) 주지주의 표백으로도 느껴집니다. 여느 중국 황제 같으면 "천자(天子)"인 자신의 고독에 대한 푸념을 늘어 놓았을 텐데 구태여 인간 보편의 자질인 "이성"을 거론한 건 역시 교육 받은 사람 답기도 합니다.

"욱신은 당당하고 단정해야 하며 움직일 때나 가만 있을 때나 흐트러짐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정신이 지혜롭고 기품이 있으면 그것이 얼굴 표정에 드러나듯이, 우리의 육신 전체에도 정신의 품성이 그대로 바반영되게 해야 한다." (p144) 황제로서 위엄 있는 처신과 태도를 유지해야 했던 고충이 어느 정도는 드러나며, 사실 황제는 외양의 기품만으로 뭇 대중과 신하, 잠재적 경쟁 세력을 압도해야 할 피로감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삼국연의>의 조비 역시 맹달 같은 풍신 좋은 이를 구태여 곁에 두려 했던 것도, 그저 눈에 보이는 위신의 중요성이 현실 정치에서 떨치는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현인이, 허세와 진정한 내면의 힘 그 반영을 서로 혼동했을 리 없고, 바로 안체 나온 여러 심오한 통찰은, 위세와 위엄이란 어디까지나 내면의 품격과 강인함의 반영이어야 한다는 점을 (우리 후세의 독자들에게) 여실히 깨우칩니다.

"감각을 방해하는 건 동물적 본성에 해롭고, 충동을 방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p164)" 여기서 "동물적 본성에 해롭다"든가, 방해된다든가 하는 구절의 뜻이 다소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개인의 수상록이지만, 동시에 윤리와 수신의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동물적 본성 등이 무엇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면, 이를 내 주위에서 떨쳐내어야 한다는 걸까요, 아님 그 반대일까요? 답은 그 다음 구절에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성은 그 자체로 우주적 완전체이기 때문에, 어떤 방해 작용에 의해서도 동요, 오염되지 않고 혼자서 제 기능을 잘 수행한다."

그렇습니다. 동물적 본성이든 감각이든 주변의 교란 요소에 의해 언제든 원활한 작동에의 장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중 간혹 나의 판단에 큰 도움을 준 "직감, 촉" 따위야 얼마든 기능 저하(?)를 겪어도, 이성은 그런 기복이 없으니 얼마나 듬직한지를 강조하는 취지입니다. 다른 말로, 무릇 황제라면 자신의 이성을 잘 단련하여 통치의 자질로 능숙히 부릴 정도가 되어야 하며, 이 습성이 몸에 배지 않은 자는 감히 자리를 넘볼 엄두도 내지 말라는 일종의 선포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삶의 원리들을 활용해서 현실에 적용시킬 때에는, 검투사가 아니라 격투기 선수를 본받아야 한다. 검은 언제나 신경 써서 자신의 손에 챙겨들어야 하지만, 격투기 선수야 그저 주먹을 오므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p232)." 저는 요즘 모바일 기기가 마치 삶, 신체의 일부가 되어 모든 이들의 손에서 떠나지 않는 풍속도도 이 구절에서 바로 연상되었습니다. 필요한 정보와 자료 따위는 모바일 기기를 통해 바로 구할 수 있으며, 일종의 지식 외주 장치처럼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머리 속 웨어하우스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 머리 속의 여유 공간을 창의력이나 무궁무진한 상상 등 새로운 자원으로 메울 수 있으면 더없이 좋은 일이겠으나, 불행히도 많은 이들의 경우 자기계발의 경지가 그에까지 이르지를 못합니다.

정전, 방전, 기타의 이유로 기기(device)와 분리되었을 때, 내 머리와 가슴에 남은 게 그저 중독자의 금단 증상이 빚은 불안뿐이라면, 기기는 나에게 편의를 준 게 아니라 오히려 정신을 피폐시킨 것뿐입니다. 참된 소통과 관계 형성은 얼굴을 맞대고 정직한 감정을 교류할 때에만 가능하며, 입에 발린 메시지 교환이나 형식, 타성에만 매몰된 이모티콘 남발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 신체와 내 두뇌에 내 것으로 온전히 남는 판단, 감정, 이성(아무나 못 가지겠지만요ㅎ), 지식 등을, 평소에 더 큰 애착을 갖고 존재의 일부로 만들려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경주해야 할 듯합니다.

"한 사람에게 주어진 그 어느 구체적 상황 속에서도 가장 바르게 말하거나 행할 수 있는가?(p205)"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예컨대 신앙을 위해 죽은 순교자라든가, 학자, 지사적 소신을 위해 처참한 죽음도 마다지 않았던 방효유, 사육신 등이 떠오릅니다. 신상에 별 위해가 안 닥칠 때 큰 소리로 떠들며 소신을 가장한 아집이나 허세를 부리는 건 누구라도 가능합니다. 정말 "누구"에게라도 가능하다는 건 주변에서 여실히 확인 가능하며, 기가 막히거나 어안이 벙벙할 때조차 있어 사람의 내면 그 성실성(integrity)와 목소리의 크기란 정확히 반비례한다는 점까지 절감하는 요즘입니다.

문제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육신에 직접 고통과 위해가 침노했을 시, 도대체 어디까지 그 저항이 가능하냐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어떠한, 구체적" 등의 한정어를 써 가며 사실상 "극한 상황"까지를 암시하는 중이죠. 어떻습니까? 나의 소신은 과연 그런 극한의 압박 속에서도 굴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원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육신이 걸레짝이 되고 난 후에도 끝까지 유지된 소신은, 이제 현상의 존재와 분리되고 난 후에도 어떤 의의를 지니겠습니까?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현세의 쾌락을 더 중히 평가하기에, 이 점에 대해서 그리 큰 의의를 두지 않는 듯합니다. 공자의 도그마를 옹호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이들에 대해 제한적으로 경배를 바치는 관행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원통이라고 해서 언제나 그 생긴 모습대로 고유의 회전 운동을 어느 지면 위에서나 이어갈 수 있지는 않고, 불이나 물을 비롯한 자연이나.... 어느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만큼은 그렇지 않아서..... 변하지도 않고 그 어느 장애물도 쉽게 돌파할 수 있다.(p205)" p164에 이어, 아니, 사실상 이 책 어느 구석을 펼쳐 보아도 이성의 순일성과 항구성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하긴 하지만, 다시 이성에의 온전한 의존을 강조하는 구절입니다.

철인 황제답게 일생을 두고 감정의 절제와 궁극의 평온을 추구한 흔적이 책 곳곳에 배어납니다. 제국도 쇠망하기 마련이고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야 반드시 육신이 쇠하고 넋과 혼백도 간데없이 마모되기 마련입니다. 허나 이 명저는 저술된지 2천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식자층의 손을 떠나지 않고 애독됩니다. 책의 내용에 위화, 생경함을 느끼는 건 수양 안 된 짐승 같은 소인배나 거짓말쟁이들 뿐입니다. 내가 갖지 못한 미덕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은 위인보다 더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그들에게 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성과 수양과 아파테이아란 그래서 불멸의 경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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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인재를 만드는 4차 산업혁명 멘토링
권순이 외 지음 / 북캠퍼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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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의 거센 파고가 사회 전체에 큰 파장을 끼치리라 예측되는 요즘입니다. 유치원, 초등, 중등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현재 우리가 영위하는 직업군 중 상당수가 사라진 세상에서 자기 포부를 펴고 자아실현을 꿈꾸겠으나, 아이들이 그렇게 미래를 가꾸도록 교육시켜야 하는 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슨 직업을 지망하며 종사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비전과 진로를 제안해 줄 수 있을까요?

이 책은 우선 어린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향후 전개될 4차 산업혁명을 설명한 책이지만, 어차피 우리 어른들도 미래의 기술 구조나 사회의 기본 틀에 대해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한국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이 쓰신 이 책을 어른들이 먼저 읽고, 아이들에게 권해 준 후, 내용 이해를 지도한다기보다는 함께 고민하며 진로를 모색하는 쪽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은 눈치가 빨라서 어른들이 아무리 아는 척 시늉을 해도, 정말 알고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저 체면치레나 하는 중인지 바로 알아들 봅니다. 진솔하게 마음을 터놓고 행하는 소통은 그 어떤 "교육"보다 아이들의 정신적 성숙에 도움이 됩니다.

1장은 여태 전개되어온 산업혁명들의 역사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습니다. 지금 예상되는 트렌드가 "4차"라면, 그에 선행하는 "전편"들이 뭔가 있어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산업혁명이란 게 1차, 2차, 3차,.. 하고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부자가 생겨나고 반대로 종전의 부를 잃은 채 몰락하는 계층이 있었을 뿐 아니라, 사회가 작동하는 모습 자체가 달라지곤 했습니다. 변화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작든 크든 일어나는 게 세상의 이치지만, "혁명"이 벌어지면 뭔가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한다는 뜻이죠.

책에는 어린 학생들은 물론 어른들조차 혼동하기 쉬운 개념의 분명한 정리가 아주 명쾌하게 이뤄집니다. 우선

1) 4차 산업혁명이란 말은 유독 한국에서만 자주 쓰는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변에서 입에 자주 올리면 그게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표준적으로 반복되는 줄로만 알고, "한국식 관행"이나 "콩글리시"를 경우에 맞지도 않게 쓰다 망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물론 클라우스 슈밥이 이 용어를 처음 대중화시킨 것도 맞고, 외국에서도 상당히 잦은 빈도로 이 개념이 쓰이기도 하나, 이 새로운 트렌드를 과연 "4차 산업혁명"이라고"만" 불러야 할지에 대해선 아직 유보적인 태도라는 겁니다(명칭이나 개념 파악으로서 다른 대안들도 있음). 예컨대 독일에서는 이것 관련 플랫폼을 두고 "인더스트리 4.0"이라 부르고, 일본에서는 "소사이어티 5.0"으로 명명합니다. 이처럼 이름은 다르지만 그것들의 외연은 대개 같습니다("내포"까지 같은지는 조금 머뭇거려지지만).

2) 놀랍게도 저자분(특히 이 첫 파트를 서술한 박재용 선생)께선 클라우스 슈밥 이전에도 이 "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를 쓴 예를 여러 개 찾아 독자에게 제시합니다. 어느 사회학 논문에 보면 무려 1940년대 후반에, 정확히,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이란 용어가 나온다는 겁니다. 제가 진짜 놀란 건 우리가 <엔트로피>의 저자로 잘 아는 저널리스트 겸 사회학자 제리미 리프킨도 "3차 산업혁명"이란 용어를 중점적으로 코인시켜 결과적으로 이 "4차 산업혁명" 용어의 대중화에 간접으로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3) 과연 4차 산업혁명이 무엇인지 그 내용에 대해서도 학자들, 기업들의 의견이 저마다 갈릴 뿐 아니라, 심지어 어떤 분들은 "4차" 개념 자체에 회의를 갖고 "3차"에 포함시키기도 한다는 게 책에 나옵니다. 저는 솔직히 성인용 저서들 속에서도, 주제 개념어에 대해 이처럼이나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비판적 고찰을 하는 책을 거의 못 봤습니다. 독자로서 의문을 품긴 여러 번 했어도 서평에 그런 주관적 느낌까지 다 쓸 수는 없어서 그저 당연한 공리려니 하고 저자의 기조에 거의 무조건 동조하듯 말한 게 보통이었죠.

허나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래 이게 정확한 지적이다. 이게 솔직한 현실이지 지금까지의 담론은 과장된 면이 너무 많았다"는 느낌에 속이 다 시원해지더군요. 여튼 우리가 지구 온난화 이론 구조에 다소 미심쩍인 면이 있어도 "어차피 환경 보호의 대의 자체가 타당하므로" 너그럽게 넘어가듯, 이름이야 뭐가 되었든 종전의 산업 판도 자체가 근본적으로 뒤집어지는 건 분명하므로 그런 논의들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해서 뭐 손해 볼 것이야 없습니다.

아이들 책이라고 해서, 아직 학자들이나 업계에서조차 완전한 합의가 안 이뤄진 걸 중간 논의 생략하고 주입식으로 강요하는 건, 그야말로 "반(反)" 4차 산업혁명적 발상이 아니겠습니까? 전 저자분들의 이런 꼼꼼하고 신중한 태도가 오히려 믿음이 가서 좋았습니다. 어른들도, 본인들도 잘 모르는 걸 그저 당연하다는 듯 애들 앞에서 밀어붙이실 게 아니라, 저자들과 함께 토의, 토론이나 하듯 공부를 해 간다는 자세로 아이들에게 읽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장에선 맨처음 인공 지능 담론이 나옵니다. 여기서도 우리 성인들이 지금껏봐 오던 내용과는, 관점이나 제안의 구체성 면에서 많은 차이가 납니다. 서로 다른 입장의 저자들이 각각 별개의 맥락에서 이야가하던 파편적 정보를 이어붙인 책들과는, 설득력과 진정성 면에서 확 다르게 다가옵니다. 어차피 기능적인 지식에 불과한 어학, 회계학, 법학 등이라든가, 미술에서도 테크닉의 습득에 의해 재현 가능한 영역은 기계에게 그냥 전담케 하고, 인간은 예컨대 상처 입은 타인의 감정 치료 등 다른 영역의 직업에 진출하게 하자는 겁니다. 이 아티클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이른바 머신 러닝, 즉 다양한 사례의 학습을 통해 기계가 자동으로 그 패턴을 찾아내어 수행하게 하는 원리에 대해 아주 직관적으로, 쉽게 설명해 주셨다는 겁니다. 기본소득제에 대한 언급 등 독자로서 개인적으로는 찬동 않는 부분도 많지만, 그런 문제는 부모님들이 아이들의 (혹시 갈릴 수 있는 다른)의견도 존중해 가며 함께 토의하도록 하시고, 무엇보다 인공지능 관련 각종 개념 설명이 명쾌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단연 추천할 만합니다.

다음에는 자율주행차와 드론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인용 대중서에는 이 둘을 별개 토픽으로 분리하는 게 보통인데, 아이들 시야를 고려하여 한 주제로 묶은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2018년 평창 올림픽 식전 개막 행사에서 선보인 여러 사례도 소개하는 등 최신 정보가 반영되어 있고, 바로 앞 파트에서 설명된 인공지능과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어린 독자의 흥미를 돋우는 설명 순서도 참 보기 좋았습니다. "엔진이 따로 필요 없으니, 앞쪽이 튀어나오고 브레이크도 따로 밟아야 하던 예전차와는 모양새도 다르고, 버튼 하나로 다 움직일 수 있어 너무 좋은" 게 전기차라는 설명인데, 어떻습니까? 쉽고도 간단한 한 마디로 핵심과 본질을 전달하지 않습니까? 이건 전기차에 대한 설명이고 자율주행 토픽은 그 앞뒤에서 상술되는데, 이렇게 주제를 쉽고 능숙하게 풀어 주는 책을 전에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그러면서도 개념의 정확성을 훼손 않고, 오히려 웬만한 성인 대중서보다 더 꼼꼼히 따지고 든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빅데이터 설명입니다. 이 역시 제가 개인적으로 요즘 학부 교과서 몇을 골라 여러 권 진행하는 중인데, 오히려 이 책 한 권을 읽고 새로 눈이 틔워진 대목이 더 많았습니다. "그게 그런 소리였나?" 이렇게 말하면 "애들 책 치곤 너무 어려운 것 아닌가?" 하실 분도 있겠는데, 마치 명강사가 연단에서 아둔한 청중들 자극해 가며 설파하는 열변을 듣는 투입니다. 안 어렵고, 오히려 내가 모르는 부분 자극 받아가며 더 긴장 챙기면서도 쉽게 와 닿습니다. 쉬운 설명은 들을 때에만 편하지 다 듣고 나면 남는 게 없는 경우가 많죠. 헌데 이 책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먼저 학부형들이 읽어 보시고, 본인들이 뭔가 확실히 각성된(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다음 자녀들과 함께 읽어 보세요. 이런 책은 개인적으로 처음 보는 듯해서, 이처럼 기분 업된 서평 뿌듯하게 남깁니다. 별 열 개도 아깝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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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산업 전략 보고서 - 중국을 뛰어넘고 4차산업혁명을 이끄는
이근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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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의 파장과 전망에 대해 논의가 분분하고 무성합니다. 대체로는 "종전의 고루한 사고방식, 건전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입에 밴 넋두리 같은 판에 박힌 불평, 노력 없이 자릿세만 받아먹으려는 직함 위주의 사고 방식으로는 현재의 직장도 유지하기 어려움" 정도에 결론이 모아지는 듯도 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각 산업에서 어떤 노력을 해야 미래의 산업상에 대한 적응이 용이할지는 별 대안과 논의가 나오지 않는 듯합니다.

이 책은, 여튼 가까운 시일 안에 쉬이 위축이나 후퇴, 심지어 퇴출이 벌어지지는 않을 듯한, 또 현재 많은 이들에게 큰 부가가치를 벌어다도 주는 구체적인 각각의 산업군에서, 현재의 업황이 어떠하며, (꼭 4차 산업의 여파가 아니라 해도) 근시일 안에 업계의 지향이 어떤 쪽으로 변할지에 대해, 각종 통계와 지표를 근거로 매우 구체적인 전망과 제언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직 기틀도 마련 못 하거나 첫걸음도 떼지 못 한 추상적인 직업, 산업에 대한 공상 가까운 논의도 아니고, 믿을 만한 논거와 자료에 기대어 직간접 관련자들을 위한 충고를 상세히 풀어 놓았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듭니다.

그저 장밋빛 미래만 듣기 좋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읽다 보명 "허 참 이런 일을 다 겪고도 여태 몰랐단 말인가"하며 분노가 치미는 대목도 있고, "큰일 났군. 개별 국민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앞으로 뭘 해먹고 살까" 처럼 눈 앞이 캄캄해져오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FDR의 말처럼, 업황과 미래상이 아무리 암담하다 해도 괜한 호들갑으로 직업인들의 사기까지 꺾어 놓을 이유는 없습니다. 현실을 정확히 알아야 적실한 대비책도 마련되기 마련이므로, 독자들은 최고의 전문가들이 정리한 현황, 분석한 대안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읽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을 외면하고 망상에 젖지만 않으면, 뭐라도 돌파구가 생기기 마련이며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인들은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도 극복해 낸 적 있습니다.

1장은 단 한 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었는데, 저자 명의는 못 찾았으나 아마 이근 교수(학부 때 개인적으로 제 지도교수님이시기도 했던 ㅎㅎ)님 저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이 아티클은 책 전제를 요약하거나, 이 기획의 성격과 의의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글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아무리 암울한 현실이라도 정면으로 시선을 준 후 돌파구를 찾으려 들면 못 할 일이 없다고도 했습니다만, 곁에 버티고 서서 불쾌한 선택(사실상 선택도 아니지만)을 강요하는 중국과 앞으로 어떻게 관계를 형성해 나갈지는 깊은 고민을 쏟아부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1) 대립각을 세우고 이해가 계속 상충하는 경쟁자로 대할 수도 있고 2) 대등한 관계를 설정한 채 약은 호혜 관계를 이어가는 협력자가 될 수도 있으며 3) 마치 대기업과 중소기업처럼 원-하청 관계로 수직적 분업을 일굴 수도 있는데 사실상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도 3)이며 한국인이 악몽으로 간주하는 시나리오도 3)입니다. 2)는 그저 3)의 현실을 호도하는 우회어법이나 겉만 그럴싸한 가림막일 수도 있습니다. 과거 네덜란드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영리한 생존 방법을 모색하며 한때 무역 제국을 건설한 적도 있었으나, 나폴레옹이 득세할 때는 프랑스에, 호언촐레른 황실이나 나치가 판을 칠 때는 독일에 각각 먹힌 바 있습니다.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경로는 사실상 매우 협소한 몇 가지 길뿐이나, 여튼 겨레 전체와 경제인들의 지혜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하겠습니다.

2장의 첫 글은 게임 산업에 대한 전망과 진단입니다. 영화 <대부>를 보면 비토 코를레오네와 탐 헤이건이 마약 산업(?)에 대한 견해를 주고받는 장면이 있는데, 결론은 "우리가 설령 손을 안 대어도 누군가가 발길을 내디뎌 거기서 나온 수익으로 판을 다 쓸어 버릴 테니, 이 장사야말로 '미래'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는 대사에 잘 녹아 있습니다. 엄연히 합법의 영역인 게임 산업을 두고 "마약"에 비유하는 건 좀 어폐가 있지만(그 정도가 아니라 그 많은 게임 팬들이 몰려와 항의할 일이지만), 산물 혹은 서비스가 다분히 향유자의 "중독성"에 기인하는 바 크고, 사회 일각(주로 노년층)으로부터 우려, 의심어린 시선, 심각한 질타를 사기 일쑤라는 점에서 닮은 구석이 아주 없지도 않습니다.

정서 순화와 인문 마인드 함양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통속 문학류 역시 장르에 빠져드는 중독자 양성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고, 설령 인문 고전이라고 해도 아주 속물적 맥락에서만 인용하거나, 일일이 막장 코드로 (자기 수준에 맞게 변환하는) 저질 독자(독자라기보다는 중독자라고 해야 마땅할)가 유식한 척 떠들어대는 풍조에 비기면, 게임 팬들이 특정 캐릭터를 거론하며 일상의 대화 소재로 삼는 분위기는 하나도 비난할 것 없습니다. 오히려 미래의 담론은 게임 스토리와 배경, 캐릭터들이 주된 비중을 차지하며 인문과 픽션을 주도할 것입니다. 게임보다 무대도 협소하고 창의력도 훨씬 덜한 웹툰이 현재 젊은이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점하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서브컬처와 주류 고급 문화는 서서히 경계가 사라져갈 뿐 아니라, 후자의 경우 어차피 취향이 고급으로 태어나거나 환경 속에서 길러진 이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뇌 대신에 짬뽕만 가득한 돌머리가 어설프고 코믹한 흉내를 낸다고 달라질 문제가 아니죠.

2008년 이전에는 중국 게임 업계와 시장이 혼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국내 업체가 참신한 스토리와 깔끔한 비주얼로 진출만 했다 하면, isbn를 받아와라 뭘 보강해라 심사를 거쳐라 시간만 질질 끌고 허가를 내어 주지 않다가, 어느새 저질스레 짬뽕 같은 헛소리를 늘어 놓는 치매 걸린 노파처럼 짝퉁이 먼저 시장에 깔려 유저들을 선점하기 십상이었습니다. 2008년 이후 저작권 보호를 강화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공정한 경쟁이 이루지기에는 미흡한 실정이며, 몇 주 전 EU 국가들이 입을 모아 그 심각한 실정을 지적도 한 바 있습니다.

국내 업계도 고질적인 문제점과 타성을 개혁해야만 앞날이 긍정적일 수 있으며, 중국이 맹추격한다고는 하나 여전히 우리가 경쟁력을 (다소나마) 보유한 AR, VR 플랫폼에서 비교 우위를 강화해야만 합니다. 가장 우려되는 건 아직도 국가나 사회 단체에서 "유해물"의 범주에 이 게임을 넣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 생각에는 공대에서 가장 우수한 두뇌가 이 AR, VR 섹터에 집중 투입되고, 최고의 인력이 게임사에 영입되어 승부를 걸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일부 마니아층만 접근 가능한 인터페이스가 아니라, 노래방에서 피로를 풀듯 중노년층도 거리낌 없이 향유하는 게임 시장의 외연 확대가 절실하고, 이 저력을 바탕으로 우리가 세계 시장을 석권하는 비전이 절실합니다.

노령 인구가 증가하는 21세기는 누가 뭐래도 건강 산업이 가장 각광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중국 스마트 의료의 현황을 점검하는데, 이 대목에서 사실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더군요. 인구가 워낙 많다 보니 환자나 서비스 수요층도 별의별 사람이 다 나오기 마련이고, 이에 대응하며 기업의 체질이 단련되는 속도나 양상도 차원이 다릅니다. 게다가 중국의 정부는 애초에 정책의 기조가 흔들릴 걱정이 없기에, 알토란 같은 프로젝트를 잘 가꾼 후 (독재든 뭐든) 밀어붙이기만 하면 되니, 민간의 창의가 혹여 부족하다 해도 진척과 발전이 두드러집니다.

특히 중국의 경우 지역이 워낙 광대하다 보니 원격 의료에 대한 수요도 크고 발전의 유인도 강하게 작용합니다. 한국도 무의촌 무변촌(변호사 없는 마을) 문제가 심각하지만 영원한 장기 과제로 남은 반면 중국에서는 여튼 불편의 타개를 위해 뭐라도 몸부림이 이뤄진다는 게 중요합니다. 치료와 진단이 원격으로 이뤄질 뿐 아니라, 의약품의 판매, 배송도 동일 메커니즘인데 한국에서는 현실과 법제적 제약 때문에 상상히 힘든 풍경이죠.

"스마트 헬스 케어"의 경우 가장 총명하고 교육 잘 받은 인력이 대거 모여드는, 마치 1980년대 미국 실리콘 밸리를 연상케 하는 단계라고 합니다. 민간의 의욕이 충만하고, 그 인적 자원의 품질도 높을 때 산업의 전망이 밝은 건 당연하며, 반면 우리는 젊은이들이 공무원 채용에 최고의 열을 올리니 나라의 장래가 우려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료와 직접 관계가 없는 회사들도 대거 진입하여 이 시장의 무궁무진한 과실을 탐하며, 자신들 역시 스타트업으로 시작하여 대기업으로 우뚝 선 텐센트, 알리바바 등이 이제 새로 시장에 진입한 타 스타트업들을 후원하며 엑셀러레이터 노릇을 하는데, 저자는 IBM, 구글 등보다 훨씬 양질의 사회적 책무(동시에 자사의 장기적 이윤 추구)를 행하는 이들 기업의 밝은 안목에 경의를 표하는군요.

농업은 그저 전근대 산업으로만 인식되었으나, 저는 3년 전쯤에 "6차 산업"으로서의 농업 그 비전에 대해 상세한 설명과 비전을 담은 남상일 선생의 저술(https://blog.naver.com/gloria045/220382039684)을 읽은 적 있습니다. 한국에서만 지지부진이지 이 분야에서도 다른 선진국이나 심지어 중국조차 엄청난 투자를 하며 미래를 준비하더군요. 사실 중국이야말로 태생에서부터 농업으로 출발의 기반을 잡은 나라이며, 거대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다른 인프라까지 구축한 농경 문명권과, 그저 소수 엘리트 전사의 무력에만 의지하는 유목 문화권의 대결 구도에서 항상 긴장을 곤두세우던 나라가 또 중국입니다. 심지어 공산주의 혁명이란 본시 공장 노동자가 생산의 주체로서 각성하여 일으킨다는 게 공산주의의 정통 교리인데, 마오쩌둥이 스탈린과 일일이 대립해 가며 이 도그마를 자국 현실에 맞게 수정까지 한 역사도 있습니다. 중국은 3농 문제로 대국으로의 발돋움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데, 이른바 스마트팜의 개척으로 여러 사회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겠다는 포부라고 하는군요.

국가가 야심차게 계획을 마련해도 민간의 의욕, 창의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소용 없습니다. 스마트 팜의 비전에 기대어 민간에서도 이 분야 투자에 매우 열성이고 관련 기술 인프라에도 많은 자본이 투입되는데, 이 분야 기술을 가리켜 "어그테크"라고 부른다는군요. 우리는 첨단 미래 산업 중 하나인 바이오 시뮬레이션에 대해서도 그저 간간히 회젯거리가 되는 게 고작인데, 중국에서는 이처럼 미래 아젠다 하나하나가 실제의 화두로 부각될 뿐 아니라, 민간의 자금이 제 출구를 알아 보고 몰려들기까지 한다는 게 정말 부러웠습니다. 이름이 "6차 산업"인 게 괜한 명칭 인플레가 아니어서, 산업 간 융합이 선행 필수 조건인데 이 점에서 전통 제조업, 서비스업 체질이 튼튼한 편인 한국은 기회가 꽤 열려 있는 편인데도 근시안적 틀에 갇힌 마인드가 아쉬울 뿐입니다.

바이오 시밀러는 4차 산업혁명이다 뭐다를 떠나서, 이미 십 년 전부터 "이 분야야말로 국가간 승패가 갈리는 최후의 격전장"이라는 점이 이미 합의에 이르렀다 할 만큼 각광 받는 분야이고, 삼성 이재용 회장도 이미 십 년 전부터 자사의 미래로 언급한 적 있습니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2012년에 삼성은 미국의 바이오젠과 합작사를 설립하여 착실히 기반을 다져 왔습니다. 요즘 여기저기서 전망 좋다며 자주 거명되는 (주)셀트리온의 모범적인 R&D와 전략도 책에 자세히 소개되었습니다. 사실 여기서도 규제 문제가 또 말썽인데, 중국에서 현재 크리스퍼 기법이 잠시 서유럽을 추월한 것도 애시당초 윤리나 인권 관련 규제가 전무한 중국 특유의 무식한 분위기가 한몫 한 겁니다. 근데 생명윤리및안전에관한법률이 한국에서는 매우 엄격한 규제로 자리하며, 앞서 언급한 대로 게임 역시 온갖 규제와 비우호적인 분위기 때문에 산업으로서 온전한 발전을 도모할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책을 읽다 보니 한국에서는 이른바 오픈마켓이라고 불리는 C2C 섹터가, 가뜩이나 시장도 좁은 터에 발전하기가 여러 모로 힘든 조건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본디 열악한 생존 조건 하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발전시킨 베두인 족, 노르만 족, 몽골 족 등의 사례가 있긴 합니다만, 공통적인 다른 성장 촉진 요소는 뻬어난 리더십과 효율적인 조직 문화가 개개인의 성취욕, 승부욕을 돋우어 주는 구조였습니다. 한국은 이 중 과연 무엇을 갖추고 있습니까? 또, 이제는 모든 면에서 최우선의 고려 요소가 되어 버린 중국이 갖춘 강점은 무엇입니까?

성장이다 혁신이다를 논하는 것도 중요하고, 사실 이 책의 저술 팀에 속한 저자의 면면에서는 대개 이런 기조로 논의를 이어 왔습니다(전작들을 보면 알 수 있죠). 그러나 이 책은 결론 파트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 하나를 던집니다. 어차피 물적인 성장도, 또 국가가 마련한 혁신의 인프라도 이제 중국과 정면으로 견주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중국이 보유한 물적 기반이 우리보다 월등하고, 심지어 지도층의 혁신 의지나 장기 비전,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는 전술 역량도 우리보다 앞섭니다. 무엇으로 중국과 붙어야겠습니까? 무엇을 들이밀어야 중국이 애초에 우리와 경쟁이 안 되는 강점으로 항구히 의존하고 체질화할 수 있겠습니까?

저자들이 제시하는 답은 "인간 중심 경제 구조"입니다. 스마트팜이나 혁신의료, 핀테크, 게임과 AR, VR 등도 자세히 보면 중국은 서유럽, 미국에서 일단 기본 이론과 프레임을 베낀 후 무식하게 물량을 투입해서 밀어붙이는 매우 단순한 전략뿐입니다. 명목은 사회주의를 내세우면서 사람 값이 개값만도 못한, 천민 자본주의의 전형입니다. 텐센트 같이 멋지게 살아남은 스타트업도 있지만 이 하나를 띄우기 위해 비참하게 떨려나간 패배자, 도산 기업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거리를 다니다 그저 공안의 눈에 밉뵈어 범죄자 신세로 떨어져 남편도 자식도 없이 모르모트 취급 당하는 짬뽕 같은 인생은 일일이 거명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한국은 인권 사정이 이 정도는 아니며, 운전기사에 대한 오너 가의 가혹 처우까지 일일이 문제가 되는 걸로 보아 국민들의 자의식과 명예욕이 어느 나라 못지 않게 높습니다. 저자가 제언하는 건 사회 친화적인 기업, 소비자를 배려, 공감하는 인간적인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하여, 비인간적인 산업 구조의 경쟁자들을 자연스럽게 따돌릴 수 있는 우리만의 경쟁력을 갖추자는 쪽입니다. 현 대통령의 지난번 선거 캐치 프레이즈 중 하나가 "사람이 먼저다"이기도 했던 만큼, 실천에 옮겨지기만 한다면야 이 험악한 경쟁의 장에서 그야말로 최후의 결정타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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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멋진 발견 - 빅데이터가 찾지 못한 소비자 욕망의 디테일
김철수 지음 / 더퀘스트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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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빅데이터의 시대입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데이터의 광막한 바다 속에서, "맥락"과 "정보"와 트렌드와 "가치"를 찾아내는 작업을 두고 "데이터 마이닝"이라 부릅니다. 기업의 혁신이나 R&D가 거의 한계에 달한 시점에서, 빅데이터는 수익 창출의 돌파구를 찾을 유일한 원천으로까지 일각에서 여겨집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식, 즉 "직관과 통찰"에 의해 트렌드 예측이 가능하다고 여전히 믿는 분들도 많으며, 왠지 우리들도 그런 입장에 더 마음이 끌립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빅데이터에 매몰되지 말라." 사실 매몰되지 않으려고 해도, 또 이 새로운 가능성의 바다를 신봉하며 마음껏 항해하려 들어도, 워낙 양이 방대하다 보니 매몰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저자가 말씀하시는 바는, "빅데이터가 전부인 양, 그 안에 모든 답이 있는 양 맹신하지 말며,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건 어디까지나 당신 자신의 밝은 눈임을 잊지 말라"는 취지이겠습니다.

저자는 물론 빅데이터의 중요성도 결코 소홀히 취급하지 않습니다. "...마케팅 활동으로 쌓이는 거대한 데이터는 앞서가는 기업으로서의 자부심이며,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보험과도 같다...." (p35) 저는 여태 관련 도서들을 읽으며, 빅데이터의 의의를 정리한 문장 중에 이처럼 깔끔하고 공감 가는 표현은 처음 접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업들은 한편으로 ".... 얽히고설킨 데이터의 덩굴 속에 갇혀 기회의 줄기를 찾지 못하고 있는(p37)" 게 국내외 막론하고 정직한 업계의 현실입니다.

요즘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단연 핫한 직업이 바로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입니다. 경영학을 연구하는 중진 교수님들은 학생들더러 "너희들 열심히 빅데이터 연구해라. 그걸로 평생 먹고살 수 있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작 교수님 자신들도 여태 실무(산학 협동 과정)에서 노다지를 여럿 캐신 듯 보이지는 않고, 기업들 역시 심봤다는 듯 빅데이터애서 발견한 "가치"로 돌파구를 찾았다는 사례도 많이는 언급 안 됩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 현재의 데이터 활용 능력으로는 그것(고객의 맥락과 의도)을 명확히 파악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은 게 솔직한 진단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씀 하시는 저자 역시 SK 등 국내 유수의 대기업에서 최고의 경력을 쌓으신, 이 분야 국내 최고의 전문가 중 한 분이십니다.

저자는 또한 날카로운 지적을 하십니다. ".... 사람들은 기업이 자동으로 추천하는 일방적 행태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 물론 우리는 이른바 "결정 장애" 같은 상태에 곧잘 빠집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마음에 드니 뭘 골라야 할지 모를 행복한 순간도 있고, 반대로 모든 선택지가 다 시원찮아서 심드렁하거나, 경우에 따라 위험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전문가(그것이 AI이든 뭐든)가 척 하고 권위 있게 추천해 주면 좋을 듯도 하지만, 아직은 시스템에 대해 그런 신뢰가 생기질 않고, 내가 권위를 부여 하는 누군가(물론 사람)가 내리는 판단이 더 믿음직하다 여깁니다. 반면, 자신이 조금이라도 소양을 쌓고 친숙히 여기는 분야나 대상에 대해서는, 설령 결과에 후회가 있을망정 내가 내 소신, 내 감각에 따라 내리는 판단이 훨씬 뿌듯합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기계적으로 내리는 예측과는 달리, 아무리 추천 시스템이 정제된 후의 미래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취향과 선호 기제에 더 큰 가중치를 둘 것이라는 저자의 말씀은 그래서 공감이 갑니다.

저자는 또한, "젊은 층일수록 시스템에 그저 끌려다니기보다, 시스템과 '협력'하면서, 자신만의 옵션을 매번 행사하는 편을 더 선호한다"고 합니다(p37). 사실 독자인 제 생각으로는 노년층이라고 해서 어디 AI의 자동 추천 기제에 마냥 추종들만 하시겠나 싶습니다만, 여튼 이 패턴의 주된 소비자로 떠오를 젊은 층마저 마냥 손쉬운 데이터 마이닝 타깃이 되지 않으려 든다면, 이 채굴의 전망은 가뜩이나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나다를까 p42에는 어느 노년 고객의 이런 반응도 소개되네요. "저 아직 그렇게 늙지 않았어요. 나이가 훨씬 더 들면 써 볼 수도 있겠네요." 요즘 광고에 나오는 "2000년대 액션물 중 UHD로 나온 것 찾아줘" 같은 건, 당장 제목이 생각 안 날 때 요긴하게 의지할 수는 있는 시스템이겠으나(그 모델 분도 그 정도 용도로 쓰신 거겠죠), 사람의 복잡미묘하고 변덕스럽기까지 한 취향을 완전히 대체, 분석할 수는 없습니다. 혹여 여기에 자신의 일상 패턴을 송두리째 맞추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첨단 기기를 능숙히 활용하는 현대인이 아니라(남들 눈에 그렇게 보이고 싶었겠지만), 기업 마케팅의 호흡에 자신의 영혼을 길들이는 모자란 백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해서도, "이는 일자리를 걱정하는 소극적 혁명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원하는지 깊은 맥락까지 모두 찾아내어 어떻게 니즈를 만족시킬지를 밝히고 성과를 거두는 적극적 혁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백번 맞는 말씀인 게, 혹 일자리만 잔뜩 축소시키고 소비의 포텐셜을 갉아먹는 "혁명"이라면, 애초에 그 추진 동력을 무엇으로부터 마련하겠습니까. 자기 설 자리를 스스로 붕괴시키거나, 그리스 신화의 에뤼직톤처럼 제 살 깎아먹기 식의 혁명이라면, 그 혁명의 성과가 애초에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저자는 대체 앞으로 전개될 4차 산업혁명이 지향하는 바가 뭔지부터 한번 살펴 보라고 권합니다. 과거 산업화 시대에는 카리스마적이고 통찰력 있는 지도자의 방침에 따라, 생산이든 소비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대량 생산 대량 소비 패턴이 행진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허나 지금은 소비자 각 개인이 모두 취향과 선호를 달리하며, 기업은 이런 세밀한 흐름을 어떻게 찾아내어 니치 시장을 발견, 공략할지가 사활이 걸린 과제입니다. 아예, 모든 시장이 니치 마켓이 되어 가는 게 작금의 추세이며, 이런 미세 트렌드까지 재빨리 파악하여 비즈니스 모델(저자는 "관점"이란 표현을 쓰십니다. p51)로 연결 시킬 수 있을까? 이는 저자의 단언에 따르자면, "빅데이터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겉으로 드러난 팩트가 아니라, 보다 깊은 곳에 존재하는 본질과 새로운 관점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생각의 기술"이 가장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는 "한두 번의 학습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며, 일상 속에서 꾸준히 습관화하여 몸으로 체득할 때 비로소 얻어지는 역량(p51)"이라고 하시는데, 사실 앞으로 잠시 돌아가면 "고객의 체험과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기업이 고객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시선으로, 그들의 체험하는 동선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하여야, 이런 통찰과 감각이 생긴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전통적인 분류 방식대로, 고객의 니즈에는 표현 니즈가 있고 잠재 니즈가 있습니다. 또, 잠재 니즈는 다시 감성적, 사회적, 문화적 니즈의 세 층위로 나뉘어지는데, 물론 이 셋은 정도와 방향에 따라 표현 니즈 영역에도 몇 발을 걸칩니다. 그런데 벌써, 감성, 사회, 문화의 층위와 범주가 등장한다면, 도대체 모바일 앱이 열심히 모아들인 각종의 데이터로부터 이런 추상적, 비정형적 맥락이 쉽게 포착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설령 빅데이터로부터 이런 맥락이 잡아져도, 이를 공식화, 표면화, 비주얼화하는 건 벌써 사람의 안목이고 통찰이며인문적 해석이지 빅데이터의 공로가 아닙니다. 말끔히 다듬어진 싱싱한 회 한 접시가 우선은 셰프의 솜씨이지, 거칠고 무심한 바다에 대고 감사할 게 아니듯 말입니다.

고객은 모릅니다. 자신이 진정 뭘 원하는지 모르고, 단지 목이 말라 찾아 헤맬 뿐입니다. (이를 일일이 아는 고객이라면 그 사람은 똑똑한 소비자이기 이전,  이미 현명하게 자기 생을 꾸려 나갈 줄 아는 선택 받은 소수라고나 해야겠습니다) 이처럼,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니즈를 먼저 알아채고 "이거 말씀이시죠?" 라며 눈치 빠르게 서빙하는 직원처럼, 그래서 "나 여기 말고 딴데 안가" 같은 고객의 자발적 충성을 확보할 줄 아는 기업이라야,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살아남는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그저 싼 값에 많이만 찍어 내고, 세뇌 같은 광고 공세로 소비자를 길들이려는 무지막지한 기업은 설 땅이 없습니다. 벌써 소비자는 광고라고만 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빅데이터에서 고작 광고 거리만 찾아내서 잔뜩 확성기로 떠들 생각이나 갖는다면 그 이상 시대착오적 발상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내 맘을 나보다 먼저 알아 뭘 제안해 오는 기업이라니 그게 바로 감동 아니겠습니까.

그런 상품, 그런 기업, 그런 엔터테이너(이미 이런 기업은 기업이 아니라 연예인과도 같습니다), 그런 호스트가 있냐고요? 이 책을 읽으면 몇 챕터에 걸쳐서 그런 성공 사례가 줄을 이어 행진합니다. 클라우스 슈밥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를 코인하기도 전에, 이미 이들은 채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먼저 살고, 또 선도했던 셈입니다.

해외의 다채로운 사례 소개도 좋지만, 저자는 한국인이시고 한국의 가장 치열한 경쟁의 장, 혹은 가장 앞선 소비자들이 거주하는 부촌(富村)에서 직접 피부로 맞닥뜨린 여러 사례를 개발, 정제(?)하여 독자들과 공유하시는 게 참 만족스러웠습니다. 여러 에피소드가 있으나, 그 중에서도 선릉역 앞에서 저자가 목격한 트럭 상인의 실례가 아주 흥미롭게 소개되는데요.

1) 트럭 상인과 고객(시니어 쇼퍼) 사이에 자신들만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재미있는 언어 소통이 이뤄진다.

2) 큰 봉투를 준비해서 양껏 채워지게(다 사가게) 미리 세팅한다. 고객의 이름도 모르면서 열심히 메모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다음 번에 판매할 상품은 여튼 성의껏 준비한다.

3) 어차피 마트나 몰에 가서 쇼핑을 즐길 젊은 층은 배제하고, 철저히 시니어 쇼퍼의 눈높이와 정서에 집중한다. 중요한 건, 이들의 구매력이 장난 아니라는 사실.

4) 경쟁심을 처음부터 치밀하게 자극하는 선착순 판매 방식을 고집한다(애초에 고객 주문을 메모하는 건 그저 제스처였을 뿐)

5) 그러면서도 판매 중의 소통은 철저히 개인화하고, "덤"은 필수이다. 타겟층의 정서에 철저히 융화.

이런 전략을 몸소 개발, 실천하는 사장님은 50대이며, 이분으로부터 물건을 사는 분들은 6, 70대 할머니들이 대부분인데, "아가씨" 등으로 호칭하며 구수한 반말로 상대해도 그렇게들 좋아하시더랍니다. 마치 책 저 앞에서, 동네에 우물을 파 주었건만 인도의 젊은 주부(며느리)들이 외면하더라는 그 사례와도 맥락이 통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기계적 편의가 아니라, 문화적 니즈가 반영된 총체적 체험이며, 이런 고차원, 심층의 심리를 알아내려면 인문과 일상의 반복적 수련이 필수라는 게 이 책의 멋진 결론입니다. 요즘처럼 값싼 정보화, 디지털 만능론의 시대에 이런 참신하면서도 효과적인 제언이 담긴 책을 만나본다는 자체가 쉽지 않은 행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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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 삶의 군더더기를 버리는 시간 배철현 인문에세이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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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로 이 순간을 낚아채십시오!"

우리는 보통 라틴어 격언 중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대사 덕분에 유명해진 Carpe Diem을 두고 "지금을 즐겨라"로 번역하지만, 사실 동사 carpo(carpere)에는 그보다 더 적극적인 뜻이 담겨 있습니다. 풀을 쥐어뜯듯, 혹은 꽃을 꺾듯(...) 좀 강렬한 동작을 본래는 언표하는 동사(verb)지요. 무심히 흘려 보내는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한 느낌 등이, 사실은 돈, 명예, 쾌락보다 훨씬 중요한 보물이고 축복임을, 우리는 흔히 잊고 삽니다. 저자 배철현 교수님의 강력한 권고는 바로 그런 절실한 외침을 표현합니다.

누구나 무대에서 가장 부각되고 싶고, 중요한 역할을 맡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고, 안타깝지만 가장 빛나는 주연 하나를 위해 나머지는 봉사하는 조연, 단역에 머물러야 합니다. 무대는 각자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때 큰 박수를 받고, 이때 느끼는 성취감은 주조연과 단역이 따로 없습니다. 예전에 이준구 서울대 교수님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군가(아마 타 교수의 TA였던 듯)가 뻘뻘 땀을 흘리며 기자재를 나르자, "그래,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아니겠어?"라며 격려하시던 모습도 생각 납니다.

저자는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성탄제 연극을 하며, 마음 속으로는 요셉 역(아마 남자아이가 맡을 역 중에는 가장 중요했겠죠?)을 하고 싶었기에, 고된 나귀 가면을 문득 벗어던지고 친구의 주연을 대신 차지하고 싶던 충동이 일던 당시를 떠올립니다.

"만약 그때 내가 느닷 일어서서 요셉 연기를 했더라면, 연극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가요. 꼭 주일학교가 아니라도 무대에 서서 다른 친구들을 빛내 주는 역할을 땀흘려 해 내던 체험은 누구나 있을 겁니다. 운동회 때 고싸움이나 차전놀이 같은 것도 비슷한 기회 아니었겠습니까. 이때 자신에게 일단 주어진 역을 무시하고 벌떡 일어나서 주인공 노릇을 하겠다며 돌출 행동을 보인다..... 사람인 이상 갑작스러운 충동이나 주목 받고 싶은 욕구는 누구나 갖게 마련입니다. 허나 우리는 심지어 그 어린 나이에도, 타인에게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경우 없이 주인공 행세를 하겠다고 설치면 얼마나 꼴사나울까 같은 (뜻밖에 대견스러운) 자제심 때문에, 돌출 행동으로 전체 무대를 망치는 사고는 저지르지 않습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이 그런 짓 하는 것도 자주 겪지 못 한 걸 보면, 이처럼 자기 역할에 충실하여 전체의 앙상블을 제고하려는 의무감도 사람에겐 하나의 천성인가 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꼭 보면, 나잇값 못 하고 자신이 무슨 탤런트나 영화 배우나 된 양, 혹은 사방의 각광을 받고 데뷔나 한 양 유명 작가의 환영에 사로잡힌 얼띤 광대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행여 길거리에서 나를 알아보고 느닷 캐스팅이라도 되어 신분 상승이 일거에 이뤄지기라도 할 것처럼, 도대체 현실 감각이 없고 분수를 모릅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온갖 막장 드라마가 근본을 잃고 뒤섞여 썩은 짬뽕의 난장판을 이루며, 마침내 남편과 자식에게도 버림 받은 채 가축보다 못한 늙으막을 보내며 궁핍에 찌든 일상에 침몰할 뿐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나답지 못한 것을 과감히 버리십시오!" 거짓된 아바타는 버려야 합니다. 머리통(그런 걸 머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으로부터 군내나는 남의 짬뽕사리를 솎아낸 후, 빈약하고 허술하나마 자신의 시냅스를 채워 넣여야 합니다.

Nunquam ponenda est pluralitas sine necessitate

이 말은 윌리엄 오캄이 그 출전으로서, 진리를 구명하거나 논증할 때 가능하면 가장 단순하고 명쾌한 방법이 최상이라는 뜻에서 표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컴의 면도날"이란 더 업축된 표현으로도 이 원칙을 잘 알고 있죠. 경영학 중 마케팅론에서,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디자인은 그저 외관의 꾸밈이 아니라 그 기능성의 가장 압축적인 표현"이라고 합니다. 군더더기가 없고 간단 명료하되, 본연의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하는 모양새야말로 최상의 디자인이란 뜻입니다. 만약 앞의 예에서, 나귀가 행여 요셉 같은 주인공의 역할을 탐내지는 않았다 쳐도, 혹시 주연에의 미련 때문에 연기 중에 쓸데없는 추임새나 시늉을 넣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역시 연극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위험 요소로는 손색이 없습니다. 잉여의 동작이나 부품은, 그저 불필요한 게 아니라 위해(危害) 요소인 것입니다. 보헤미아의 종교개혁가 후스는 자신의 화형대에 장작을 지고 나르는 노파를 보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O sancta simplicitas!" (아, 저 성스러운 단순함이여!)

제 할 일을 말 없이 해 내는 나귀 같은 노파, 이 노파의 잔손길로 화형주에 묶인 후스는 곧 처참한 죽음을 맞을 운명이었으나, 이 성인은 그 와중에서도 진리의 일각을 나꿔챈 것입니다. 책 서문의 "지금 이 순간을 나꿔채십시오!"라는 말은 그래서 더욱 울림 깊게 들립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문법(그람마. γράμμα)은 단순히 단어를 배열하는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전략적으로 단어를 배치하여, 같은 배열 속에서도 이중삼중으로 의미가 해석되게 하여, 마침내 독자에게 가장 선명한 의미와 심상만을 남기는 고도의 지성적인 작업이었던 셈이죠. 저자는 말합니다. "그람마는 곧 최적의 배열이며, 그래야 글이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저자는 하버드대에서 라틴어, 헬라어, 그리고 인류 최초의 언어 중 하나인 수메르어를 가르치는 톨키드 야콥슨 교수의 강의를 기다리던 그 설레는 순간을 기억합니다. 이처럼, 최고의 스승은 역시 최고의 스승에게 배운 분이라야 그 적통(適統)의 맥을 잇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자신이 강의를 듣던 그 방, "룸-G"에서 책들마다 고유의 냄새를 풍기던 그 묘한 감회를 다시 떠올립니다. 책들은 저마다의 역할과 개성으로 그 오랜 세월의 더께를 자신의 몸에 입혀 왔습니다. 책들은 "자신 아닌 것"의 부호와 개성을 과감히 떨쳐 내고, 대신 "자신 다운 개성"만으로 내면을 채웠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수련, 정진"의 효과입니다. 그 본체는 "나 아닌 다른 잡스러운 걸 제거하고, 온전한 나로 되돌아가는 노력"입니다.

저자는 앞에서 "체조 선수의 근육에는 불필요한 부분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그의 몸은 아름다우며, 동시에 그 몸이 빚어내는 동작 역시 아름답다"고 쓰셨습니다. 우리도 야구를 볼 때, 홈런을 예사로 쳐 내는 강타자의 스윙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는 걸 느낍니다.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필요 이상의 사치나 호사는 모두 잉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컨대 백화점에서 과도한 소비를 하며 남보란 듯 무분별한 투전(投錢)을 일삼는 자는, 사실 내면이 빈 열등감을 만회 못 하여 일부러 쇼를 하는 중입니다. 그런 자에게는 그 어러석음의 대가로 반드시 하늘에서 천벌이 떨어져 소정의 시련을 치르게 할 것입니다.

시련이란 무엇입니까? 저자의 말에 따르면 불필요한 군살과 잉여 근육을 몸에서 제거하여, 혹독한 훈련 끝에 마침내 흉한 살이 모두 커팅되고 연기에 필요한 근육만 남은 그 운동선수의 아름다운 상태를 만드는 게 바로 시련이라고 합니다. 그는 고된 훈련을 견디다, 어느새 자신이 겪는 시련을 보다 초연한 자세에서 관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실패자로서 주저앉느냐 아니면 다른 존재로 거듭나느냐의 갈림길입니다. 이를 두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페이라조(πειράζω)"라고 불렀는데, 저 어미(語尾)에 붙은 -ω나, 라틴어 carpo의 -o나 모두 1인칭 직설법 현재를 뜻합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들은 수련의 장으로 들어옵니다. 군더더기를 제하고, 허상과 허풍과 거짓을 솎아내고, 오롯이 우리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안식과 마음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근육은 부단히 수련해야 하며, 훈련 없는 근육은 마침내 무감각에 이른다. 환각은 자신을 훈련하지 않은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 그는 점차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헛것'을 추구하는 환각에빠진다." 얼마나 무서운 결과입니까. 인생이 싸구려 막장극과 근본 없는 판타지의 혼합으로 추락하지 않으려면, 저런 망상을 버리고 부단한 수련(修鍊)에 집중해야, 우리네 생이 수련(睡蓮)처럼 아름답게 거듭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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