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은 어떻게 최고의 엔터테인먼트가 되었나 - 리테일 비즈니스, 소비자의 욕망을 읽다
석혜탁 지음 / 미래의창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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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은 어떻게 최고의 엔터테인먼트가 되었나" 정말 그러게나 말입니다. 뭔가 스트레스가 쌓이면 대개들 "나에게 선물한다" 등등의 핑계를 대며 무엇인가를 "쇼핑"합니다. 소비하고 싶은 게 많고 누려 보고 싶은 게 워낙 많은 세상이니, 쇼핑은 어찌 보면 엔터테인먼트 그 이상의 "어톤먼트(atonement):"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풀다니 참으로 나쁘게 든 버릇이라며 호되게 나무라려 들 분도 있겠으나, 이 책에서는 그런 걸 따지지 않습니다. 회사 그만두고 편의점 차리는 게 어느덧 아주 흔한 풍속도가 된 현실에서, 작금의 한국 리테일의 구조와 생리와 내밀한 소비 심리(소비자들 자신도 정작 모르는)가 어떠한지 간파하는 건 이제 보편적인 관심사, 숙제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기에, 이 책에서 들려주는 이런저런 이야기는 귀가 솔깃해지는 게 많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결국 리테일 비즈니스는 가장 중요한 산업이 될 것이다. 만사'유통(流通)'의 시대이다(p6)." 4차 아니라 설령 두 자리로 차수가 넘어가더라도, 사람이 특정 재화를 소비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고, 순간이동 기술이 개발이라도 되지 않고서야 특정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그 무엇을 다른 곳에서 들여와야 할 필요는 있으며, 이 중에서도 센스 있는 리테일러는 동네 사람들 자신도 모르는 기호를 미리 알아채고 근사한 셀렉션을 남들보다 앞서 꾸립니다. 소비 센스는 그저 친구들에게 부러움 받는 정도지만, 리테일 센스는 시장에서 최종 승자로 살아남아 남들보다 앞선 재력을 갖추게 돕는 산업적 무기이기까지 합니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는 이런 말까지 했다고 하는군요. “이 한 권에 유통뿐만 아니라 여러 산업의 근본적인 생존 전략이 담겨 있다.(책날개와 띠지)”

저자는 유통업계가 고려해야 할 근본적인 지형 변화 다섯 가지를 우선 꼽습니다.

①인구의 감소(특히 대도시)
②고령화
③여성의 사회 진출 증가 및 1인 가구 증가
(이 둘이 한데 묶인 이유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주부층" 감소를 설명하기 위함이겠죠. 이 항목에서 저자는 "독신"과 "싱글턴"의 차이도 언급합니다)
④국내 유통업체의 해외 진출
⑤모바일 커머스의 성장

백화점은 전통적으로 그 나라, 사회의 화려한 소비 수준 척도를 알려 줄 만한 공간이었습니다. 책에서는 1980년대부터 서서히 세를 불려 나간 현대백화점의 경우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이해를 얻기까지 무척 어려운 과정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신세계의 경우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설립되어(미쓰코시. 三越)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직영점 체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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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바웃 스타워즈
가와하라 가즈히사 지음, 권윤경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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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에 대해 뭐라고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존 윌리엄스의 유명한 테마와 함께 세계의 영화 팬들의 뇌리에 영원히 기억될 만한 걸작입니다... 라고 말하기엔 약간 어색하거나,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기까지 하는, 묘한 마력(아주 헐하게 평가한다 쳐도)을 지닌 프랜차이즈이자, 이 책 저자의 표현에 따르자면 "현재 진행형으로 (아직도) 형성되어 가는 중인" 슈퍼 브랜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 이십 년 가까이 조지 루카스가 본편의 제작을 미루던 기간 중에도, 미국, 서유럽, 일본 등지에서는 이의 팬덤이 지속적으로 성장세였고, 그토록 오래 별러 왔던 "에피소드 원"이 1998년 드디어 공개되었을 때 열성 지지자들은 마치 제의나 거행하는 마음가짐으로 상영관(사실 미국에선 3D 프로토타입이라 불릴 만한 특수 시설이 갖춰진 곳들에서 제한적으로 상영되는 곳이 많았습니다)을 찾았지요. 영화 관런하여 이른바 "굿즈"라 불리는 관련 기념품, 장난감 등이 이만큼이나 많이 제작, 판매되는 컨텐츠도 유례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팬픽이나 팬아트의 볼륨도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다른 브랜드가 그저 그 판권을 소유한 제작사의 전략적 고려에 따라 거창하게 붐업되거나 (마땅한 이유도 없지 싶은데) 오래 동면 상태인 사정과는 천양지차라고 할 수 있죠.

사실 몇 년 전 에피소드 7의 경우, 열성 팬이 아닌 중립적 관객 입장에선 다소 실망스럽다는 느낌을 표현하는 층이 많았습니다. 에피소드 넘버링이 이어지고 전작들의 세계관이 그대로 이어지니 그저 전형적인 속편 기획일 뿐, 이걸 두고 "리붓"이라 부를 수는 결코 없습니다. 리붓은커녕 이전 에피소드의 여러 매혹 요소를 별반 진지한 고려 없이 그대로 답습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죠. 팬이 아닌 일반적인 영화 애호가 입장에서, <스타워즈> 같은 이례적인 브랜드가 세월의 침식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턱도 없을 듯 보였던 "에피소드 7, 8, 9"의 약속을 지켜 가는 과정, 세월이 변하고 세대가 바뀌어도 여전한 호응 등은, 그저 구경만 해도 마음이 흐뭇한 경사스러운 분위기에 가깝습니다. 그런 호의적인 시선을 기본으로 깔고 보았건만, 적어도 <깨어난 포스>는 그리 만족스러운 수준의 "약속 이행"은 못 되었습니다.

반면 작년에 개봉한 에피소드 8 <라스트 제다이>는 꽤 호응이 좋았고, 이보다 앞서 만들어진 <로그원>도 흥행에 성공한 편이었죠. 이런 저력은 조지 루카스 사단의 죽지 않는 창의력, 활력에 기댄 바도 있겠으나, 신기할 정도로 충성을 바치는 팬덤의 견고함, 응원의 덕택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신기한 "현상"의 증거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책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책은 스타워즈의 팬이라면 일단은 한번 집어들고 내용을 일별하고 싶은 마음이 꼭 들만한 구성이고, 진짜 팬이라면 제목에 "스타워즈" 네 글자가 들어가기만 해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겁니다. 이번에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 개봉 과정에서도 자막 오역이 문제가 되었는데, 저자는 <스타워즈>의 일본어 자막을 감수한 경력이 있습니다. 해당 언어에 대해 정확한 지식과 감각, 종합적 구사 능력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팬들(글로벌 시대에, 이미 영어 정도는 자유롭게 이해하고 말하는 이들이 많죠)의 까다로운 요구도 만족시키면서 "가슴에 와 닿는 번역"을 하려면 "시리즈의 팬임"은 아마 필수 자격일 것입니다.

"사가(saga)"라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리기도 힘든 게 스타워즈 연작입니다. 2016년 드디어 에피소드 7이 공개된다고 했을 때, 해리슨 포드나 캐리 피셔, 마크 해밀 등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직접 출연한다는 소식에, 시리즈 팬이 아닌 저 같은 사람도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릅니다. <대부>도 3편만 좀 잘 만들어졌다면 이에 버금가는 "에픽, 사가" 소리를 들었을지 모르는데, 4편 나온다 소리가 십 몇 년 전부터 소문만 무성하고 기어이 성사가 안 되는 것만 봐도, 이 스타워즈 팬들이 얼마나 순수한 열정에 불타는 이들인지 짐작 가능합니다. 스타워즈 연작이야말로 진정한 "사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리붓" 규정은 당치도 않고요)

스타워즈의 성공 비결에 대한 분석은 여태 여러 번 이뤄졌고, 그 중 "웨스턴과 동양식 무술 전수 등 이색적인 요소가 SF와 미래의 옷을 입고 절묘하게 결합되었으며, 기본 서사 구조는 아주 익숙한 패턴, 즉 버려지고 미숙한 주인공의 성장을 통해 원수를 갚고 신분을 되찾으며 일신의 이익이나 명예가 아닌 모든 이들의 자유와 권익을 옹호하는.... 등등의 단순함에 기대었다" 같은 말이 정설처럼 통하며, 그 정설의 타당성에 대해서도 우리 대중들이 "익숙하게" 받아들입니다. 이 책 역시 그런 통설적 입장에서 별반 벗어나지 않고, 차분하고 겸손하게 모두의 컨센서스를 되풀이하는 편입니다. 사실 스타워즈 팬들은 파격적이라거나 과격한 주장, 해석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키지도 않습니다. <매트릭스> 등의 팬덤(물론 상대도 안 되지만)과는 이런 점에서도 차이가 크게 나죠. <스타워즈>의 기본 서사 역시 어떤 기발한 굴곡이나 트위스팅은 없습니다. 이른바 "내가 네 애비다."가 당시 영화팬들에게 충격이라면 충격이었지만(특히 이 책 p45의 서술을 참조하십시오), "사악한 부친과 대립하는 버려진 아들"의 화소 자체는 문예 전반을 놓고 볼 때 아주 오래 전부터 개발되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스타워즈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이처럼이나 성공하고, 반 세기가 지나도록 활력을 유지하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이 브랜드는 더욱 신비함을 더하는 겁니다. 하도 이전 세대부터 스타워즈 스타워즈 해 대기 때문에, 미국의 젊은이들도 크게 위화감을 갖지 않고(오타쿠나 나잇값 못하는 꼰대처럼 보일 수 있다는 의식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이 즐겁고 뭔가 권위까지 풍기는 컬트에 기꺼이 동참하는 겁니다. <스타워즈>에 대해서는, 이게 더군다나 SF 장르인데도 (미국 기준) 전혀 시대에 뒤처졌다거나 특정 세대 소속이란 느낌이 없습니다. 미국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에서도 관련 "굿즈"를 모으거나 담론에 참가해도 별로 촌스럽다는 느낌이 안 들고, 반대로 뭔가 글로벌 트렌드에 합류한 듯한 뿌듯함(착각일 수도 있으나)마저 공유하는 듯합니다.

스타워즈는 그저 특정 크리에이터의 지적 재산도 아니고, 이상 열기를 이어가는 특수층의 편협한 기호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문화"인데, 서브컬처로 보기에도 그 스케일이 너무도 거대합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10억인의 유대감"으로 표현하는데, 이를 연인원으로 계산한다면 50억으로 잡아도 된다고 저 개인적으로는 평가합니다. 아주 솔직히 말해서, 3편(즉 에피소드 6) 상당수 시퀀스에서 민망할 정도의 유치함을 느꼈고, 일부 장면에는 불필요한 선정성까지 가미되었으며, 시원격인 에피소드 4에도 명백한 구성, 촬영상의 구프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이런 여러 이유 때문에 팬덤 참가(유무형 불문)라든가 열성 지지층에 낀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스타워즈만이 빚는 이런 "문화 현상"이 더 대견(?)하고 경이롭게 다가오는 겁니다.

2부 전반부에는 "스타워즈" 개별 연작을 떠나, 대체 대서사시형 흥행작이라든가 블록버스터가 어떤 과정을 통해 제작이 결정되고, 역사를 남을 히트를 치거나 반대로 대재앙에 그치는지 제법 심도 있는 분석이 이뤄집니다. 독자로서 저는 이런 분석도, 영화 산업 전반이나 미학적 구조에 대한 일반론 이해가 선행된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스타워즈> 개별 컨텐츠에 대한 애정이 워낙 깊다 보니 상위 영역에 대한 소양까지 절로 형성된 소산이라고 봅니다.

저자는 "한정적인 일본 문화의 영향"이라고 규정하지만, 사실 조지 루카스 본인부터가 공공연한 재퍼노파일인데다, 제다이들이 걸치고 다니는 헐렁한 도복(?)하며 멀쩡한 강력 화기 놔 두고 광선검으로 설쳐 대는 설정 하며, 아무리 인정하기 싫어도 일본 풍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건 너무도 명백합니다. 이걸 얼버무려 "동아시아 스타일"로 호도하려 들어도 그(조지 루카스)의 작가적 배경(p161)이 너무도 뻔하기에 반박 근거가 취약합니다.

저자 가와하라 가즈히사 씨는 자신이 소속한 세대도 그렇고(본래 이쪽 팬 1세대는 이만큼이나 나이 드신 분들입니다. 개인적 체험에 바탕하여, 할 이야기를 많이 풀어 내려면 넉넉한 중산층 이상 집안에서 성장해야 했겠고요) 거쳐 온 경력도, 딱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다 할 만한 분입니다. 이쪽 산업의 뒷이야기도 잘 아실 만하기에, 처음에 잘못된 결정을 내려 (결과적으로) 큰 손해를 보았다가 드디어 정신 차리고 이번의 후 3부작 제작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디즈니 사의 전략적 선회에 대해서도 자세한, 그리고 믿을 만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분량이 길지는 않고 스타워즈 팬들이라면 다 알 만한 화제들이긴 하나, 역시 진짜 팬들이라면 들은 이야기 듣고 또 들어도 여전히 흥겹지 않겠습니까. 소장할 만한 아이템이고, 일반 영화팬들에게도 전문가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통찰이 자주 보여 유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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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읽는다 지리와 지명의 세계사 도감 1 지도로 읽는다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노은주 옮김 / 이다미디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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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구체적인 지형과 지명, 지리 속에서 펼쳐진, 지난시절 인간들의 생존을 향한 분투의 기록입니다. 추상적인 명분, 가치와 의미의 부여나 따분한 인명의 나열만으로는 그 참모습을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상세한 지도와 정확한 지명이 함께 제시되고, 간혹은 그 시대의 개성과 특질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나 조형물이 함께 책 안에 실려 있다면, 학생들뿐 아니라 성인들도 훨씬 역사를 재미나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특히 이 점을 강조합니다. "... 인간이 살고 있는 역사와 세계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 19세기에 체계화된 유럽 중심의 세계사나, 20세기를 지배한 미국 중심의 세계사를 가지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그 역사가 가슴 깊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 여기서 저자의 의도는 "역사를 가슴 깊이 느낌" 부분에 잘 드러난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건조한 지식의 나열이나 암기, 재생은 참된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뜻이죠. 다시 저자 서문을 보면, 앞부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지중해를 여행한 적이 있다. 누구는 무모한 일이라며 말렸지만, 오히려 얻은 것이 많아서 지금까지도 최고의 선택이었다며 스스로를 칭찬하는 데 망설임이 없을 정도다..."

그러니 저자께서는 (보통 그렇게들 하듯) 역사를 텍스트로 시작해서 지도, 지명, 지리를 보강한 게 아니라 그 반대 순서로 접근하고 공부한 셈입니다. 헌데, 어쩌면 우리는 이 저자분처럼, 구체적인 지리, 지명을 먼저 배운 후 그 속에서 활약한 인간들의 족적을 따라갔어야, 훨씬 생동감 있는 역사의 이해, 나아가 (저자의 표현처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 역사"를 만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저자는 역사를 크게 4단계로 파악합니다.

1단계: 4대 문명의 탄생과 전 지중해로 확대되는 문명
2단계: 유럽과 아시아의 중계 무역으로 이슬람이 세계 주도
3단계: 대항해 시대 이후 세계를 압도한 유럽의 팽창주의
4단계: 변화를 강요 받은 중국과 인도 등 "전통 세계"

이 중 재미있는 건, 중국과 인도는 세계사 전체를 개관할 때 그 폐쇄적인 지형 덕분인지, 잦은 분쟁과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휘말리기보다  자립적이고 독자적 성격을 강하게 유지한 문명권으로 분류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헤겔 등의 규정처럼 "발전이란 게 없고 오랜 시간 같은 패턴 속에 갇힌 정체 상태"로 보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저자는 "지속성이 강하다"는 말로 이들 세계의 강한 생명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종래 학계에서 즐겨 의지하던 프레임과는 달리, 이 책은 "지리, 지명에서 시작하여 역사를 바라보는 방법론"을 착실히 견지하여, 구체적인 공간으로부터 유리된 추상적인 역사는 존재할 수가 없음을 분명히합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지명 중심, 지리 중심으로 읽고 이해하는 역사는 재미가 납니다. 지리 중심의 역사가 필연적으로 "도감"이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당연한 듯합니다. 우리 독자들 모두는, "역사책"보다는 "도감"을 훨씬 재미있어하지 않습니까?

이 책은 제목(과 서문)이 밝히고 있는 대로, 텍스트 속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지명에 그 기원(어원)을 철저히 밝혀 둡니다. 처음에는 중요한 도시나 강, 산맥 등에만 그런 설명을 다는 줄 알았으나, 정말로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지명만 나왔다 하면 어김없이 기원을 밝혀 두고 있었습니다. 이런 정성과 서술 원칙의 일관성을 보며 독자로서 감탄도 하게 되고, 이 책을 역사 공부의 의도 외에 여행 가이드로 써도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도 절로 들었습니다. 하긴 저자께서도 본래 여행 중의 각성으로부터 집필 계획을 마련했다고 암시도 하시니 말입니다.

예루살렘은 보통 기독교의 성지로 잘 알려졌지만 현지에서는 유대 정치인들이 방문했을 때 큰 소동이 일어나곤 합니다. 그 이유는, 현재 너무나 세속화하여 성지 (순례)가 큰 의미를 갖지 않는 기독교인들에게와는 달리, 이슬람 교도들에게는 여전히 이스라엘이 그들의 신앙에 있어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해당 종교의 교리상 예루살렘이 이슬람(에게도) 성지라는 사실 자체도 모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p68을 보면 무함마드가 이곳 바위 돔에서 승천했기에 성지로 그들에게 기념된다고 나옵니다.

현재도 호기롭게 미국에 대항하는 이란은 아득한 고대부터 가장 왕성한 문명을 건설한 대제국의 후예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페르시아, 바빌론에 잡혀왔던 유대인들을 해방한 구약의 제국은 아케메네스 조(朝)인데 p70을 보면 그 판도가 지도로 잘 표시되었습니다. 이처럼 깔끔한 지도와, 요령껏 잘 편집한 범례(legend), 텍스트 설명이 멋진 조화를 이루는 게 이다미디어에서 나온 도감들의 큰 장점입니다.  

지중해 세계는 혹독한 겨울이 없고 풍경이 아름답기에 일찍부터 문명이 발달했습니다. 구약뿐 아니라 신약에서 자주 등장하는 지명들이 이곳에 밀집했습니다. 시돈, 티루스 등의 지명이 어디서 유래했으며 비블로스(작은 언덕이라는 뜻. 현지어로는 바알 신과 연계) 항구를 통해 거래된 파피루스가 이 지명과 연관하여 그리스인들에게 아예 그 이름으로 바뀌어 불렸다는 점을 가르쳐 줍니다. 바이블이란 말도 여기서 유래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이 책은 각종 지명들, 심지어 보통명사들의 흥미로운 어원까지도 잘 정리해서 알려 주는 게 매력입니다.

지중해 연안이 고대부터 크게 번성한 것과는 달리 사막의 베두인 족은 척박한 환경에서 초라한 방식으로 연명할 뿐이었습니다. 이러던 게, 예언자 무함마드가 AD 7C에 이 지역에 갑자기 등장하여 그들의 종교적 열정과 정복욕을 일깨우는 바람에 덜컥 대제국 하나가 건설되었습니다. 물론 로마 제국과 아케메네스 조가 소모적인 대립을 지속하다가 후자가 붕괴하는 바람에, 이 지역에 힘의 공백이 발생한 까닭도 크지만 말입니다. 책은 여기서도 메카(마카)의 어원을 친절히 설명합니다.

"바그다드는 인공적으로 건설된 도시(p146)"라는 책의 간명한 규정이 눈에 띕니다. 다마스쿠스는 지중해 무역이 번성할 때 자연스럽게 그 유리한 지리적 여건에 힘 입어 우마이야 왕조의 중심으로 우뚝 섰지만 바그다드는 그에 비하면 다분히 계획적으로 형성되었죠. 마치 콘스탄티누스가 세운 비잔티움(p187)처럼 말입니다. 물론 두 도시 모두 그럴 만한 곳에 세워져 오랜 동안 제 기능을 다해 왔다는 사실은 공통입니다.

영국은 작은 섬나라에 지나지 않지만 그 민족 구성이 매우 복잡하고 이것이 어느 정도 계급 대립으로까지 현대에 계승된 면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복잡해졌을까에 대해 책 p174 이하에 재미있고 요령껏 설명됩니다. 이 부분은, 축구 좋아하는 이들이 왜 영국만 4개 축협으로 나누어 FIFA 월드컵에 출전하는지 그 근원적인 유래에 대해서도 좋은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앵글로색슨이 대거 침입해 왔을 때 켈트 족 일부가 도버 해협을 건너 반도에 정착했는데 브르타뉴(작은 브리튼)이란 이름이 여기서 기원했다고도 책은 가르쳐 줍니다.

어떤 전쟁이라도 그것이 순수하게 종교적 동기, 혹은 대의명분(정당한 상속이라든가) 때문에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커다란 경제적 목적이 눈에 띄기에 세력들이 이를 새로 차지하려고, 혹은 지키려고 대판 싸움이 붙는 것입니다. 영불의 귀족 간에, 결국 프랑스 땅의 와인과 모직물의 향방, 귀속을 두고 분쟁이 일어나 그토록 오랜 전쟁이 이어진 것이죠. 급기야 현지의 민중까지 조직화하자 영국은 적지에서의 싸움이 더욱 불리해졌고, 프랑스 왕실은 그들대로 민중의 기세가 왕권까지 넘봐서는 안 되겠기에 적절히 타협하고 싸움을 마무리짓습니다. 사실상 플랜태저넷 왕조는 그 방대한 프랑스 영지를 모두 잃은 부작용으로 망하고 맙니다.

해외에서 큰 횡재를 하여 전에는 꿈도 못 꾸던 사치를 누릴 때까지는 좋았으나 이것이 미래 세대를 위한 재투자로 이어지지 못하고 퇴폐와 낭비로만 귀착되었기에 이베리아의 제국들은 전성기가 길지 못했습니다. 거품이 꺼진 후에는 극심한 인플레이션, 다시 대침체가 찾아와 나라에는 완전히 망조가 들었으며 두 나라는 이후 영영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욱일승천하던 기세가 한번 꺾이면 이처럼 비참한 신세가 되는데 20세기 후반 세계를 집어삼킬 듯하던 일본도 부동산 버블이 터진 후 저처럼 고전 중입니다. 플라자 합의로 느닷 국부가 세 배로 불어났으나 이것이 건강하게 재분배되지 못한 탓인데, 16세기 이베리아 제국들의 말로와 너무도 닮았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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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인물 열전
소준섭 지음 / 현대지성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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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세계 그 어느 문명권보다 유장한 역사를 가진 고장입니다. 역사가 길면 해당 역사가 배출한 인물 또한 많은 게 당연합니다. 이 무수한 인물, 인걸 들 중, 어느 누구에 특히 주목하여 현재에 되새기고 현창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지는, 안목 있는 전문가의 도움을 따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천여 년 전 세계 최고(最古)라 할 체계적 역사서를 집필한 사마천의 경우, <열전> 파트를 따로 두어 고금의 인물 중 그 찬연한 족적 또는 흉악한 죄업으로 후대인들에게 각별한 경각의 대상이 될 만한 인물들의 생애를 멋진 필치,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체제에 맞춰 정리한 바 있습니다. 이 모범을 근간으로, 후대의 정사서 집필, 편찬진들 역시 반드시 "열전"을 기전체 사서의 필수 요소로 편입하여, 살아 있는 역사의 핵심 추동력인 "인물"을 집중 조명하곤 했습니다.

현대에는 중앙 정부가 역사 편찬에 간여하여 정(正)과 사(邪)의 관점과 체계를 가르지는 않습니다만, 역시 신뢰할 수 있는 필자의 솜씨로 정제된 "열전"이 필요하다는 사실만큼은 불변으로 남습니다. 소준섭 선생의 이 책은 제목에도 "열전"이란 어구가 들어갔을 뿐 아니라, 내용과 형식, 혹은 인물을 엄선하는 안목 역시 역대 중국 정사서 저자들의 그것에 비해 손색이 없다 할 명저입니다. 단 한 권으로 중국 인물사 퍼레이드를 일별, 조감하기에 이보다 더 요긴하고 권위 있는 참고서도 아마 찾기 힘들 듯합니다.

"유(儒)"란 무엇인가? 저자는 너무나 친숙하면서도 그 뜻이 모호하게 다가오는 이 개념을 두고, "중국 고대시대에 일정한 문화지식을 소유하고, 예(禮)를 이해하고 있으며, 관혼상제 등의 의식을 돕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을 총칭"한다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민간 서민으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한참 후대 한 고제 유방이 항적과 겨룰 무렵 유자(儒者)를 멸시하며 "썩은 선비"라고 일갈했을 때도 바로 이 직업 집단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을 텝니다. 헌데 저자는 이 유림을 살피는 과정에서 공자, 맹자, 그 이전의 주공 등을 분석하며 비할 데 없는 사상적 탁월함도 짚지만, 시대정신으로서 한계도 똑바로 응시합니다.

"刑不上大夫 禮不下庶人"

"형벌은 위로 대부에까지 미치지 않고, 예법은 밑으로 서민들에게 이르지 않는다." 예가 서민에게 이르지 않음은 첫째 평민들에게는 번거로운 예법을 준수할 의무를 면한다는 뜻도 되고, 동시에 예법을 지키지 않는 서민에게 합당한 존중을 베풀 필요도 없다는, 계급 차별 의식의 선포이기도 합니다. 공자 자신은 서민들에게도 예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p66), 후대의 유교는 법의 융통성을 빙자한 자의성(姿意性)을 오히려 강화함으로써 시대에 역행했다고 저자는 비판합니다. 저는 이처럼, 중국사의 전형적, 통속적 관점에 전혀 맹종하지 않고, 현대 한국인의 비판적 시선으로 중국사를 통찰하는 저자의 주체적 안목이 참 존경스럽더군요.

항룡유회(亢龍有悔). 지위가 높이 오른 자는 반드시 근심이 있다는 뜻인데, 명문 거족 출신으로 학식도 높고 재능도 뛰어났던 자로서, 진 효공의 눈에 들어 인신으로서 누릴 수 있는 극한의 영화를 모두 맛봅니다. 허나 일찍이 그 후계자인 태자 영사에게 밉뵌 바 있어, 혜문왕 즉위 후 비참한 도망자 신세가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다 마침내 자신이 강화한 통행법 규율의 희생자가 되고, 급기야는 거열형에 처해집니다. 중국 역사는 이처럼 엄혹한 실정법을 중시하느냐, 아니면 유가의 다소 느슨한 규율, 융통성을 따르느냐의 갈림길에 선 적이 많은데, 법가의 추종자들이 대개 말로가 좋지 못합니다. 마치 현대사에서 파벌을 형성하여 반대파의 축출, 탄압에 열심이던 장칭 같은 이가 법정에서 치욕적 선고를 받고 몰락한 예와 비슷하죠.

사대부가 몰락하는 것도 한순간이라서, 예컨대 "중국 최초의 과학자"로 평가 받는 장형(張衡)의 경우 본디 명문가의 핏줄이었으나 부친 대에 급락한 가세 때문에 초년 고생이 매우 심했다고 하는군요. 이 시대 지식인들이 보통 그렇지만 장형 역시 (후대인들이 주목하는) 과학 분야에만 정통한 게 아니라 사장의 창작에도 특출한 소양을 보였으며, 몰락한 가세에도 불구하고 효렴 추천을 여러 번 받을 만큼 문인으로서의 자질, 사회 지도층으로서의 행실 등에서 매우 빼어난 인재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과거제 같은 선발 시험이 도입되기 오백 년도 훨씬 전입니다. 다산이 경전, 시문뿐 아니라 기계 제작에도 능했던 것처럼, 장형 역시 설계와 발명 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뽐냈는데, 이를 가리켜 중국인들은 목성(木聖)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허섭쓰레기가 주제도 모르고 과학을 사칭하며 허황된 낭설을 늘어놓는 요즘, 참으로 만인의 귀감이 될 만한 위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한 문제의 치세에 총애를 받아 무려 화폐 주조권 같은 큰 직책을 사사로이 점하고 전횡할 수 있었던 등통이란 자의 행적도 재미있습니다. 업무에 무능하고 오로지 윗사람에게 어설픈 아첨을 늘어놓는 외에는 아무 재주도 없던 등통은, 황제들이 종종 앓던 피붓병인 종기를 두고 자신의 입으로 고름을 직접 빨아내는 단세포식 과잉 충성을 즐겨 보였습니다. 그 결과는? 그 한심하고 속보이는 처신에 염증을 느낀 후계자 경제의 즉위 후 바로 가산을 적몰당하고 내쳐져 하늘 타령이나 일삼는 실업 거지로 떠돌다 목숨을 잃는 한심한 꼬락서니였죠. 요즘도 이런 사람은 드물지 않게 보곤 합니다.

당 태종이 위대한 이유는 바로 방현령이나 위징 같은 명신을 곁에 두고 국정의 핵심 인재로 부릴 수 있었던 그 큰 도량과 안목에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당 태종 이세민이 천하를 통일한 후 창업과 수성 중 어느 편이 더 어려운 과제인지를 두고 두 명신과 의견을 주고받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방현령은 창업을, 위징은 수성의 어려움을 더 강조했죠. 솔직히 이런 질문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가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모든 이가 "그 정도는 나도 생각해 둔 바 있다"며 논의에 끼어들 만큼 대중적인 주제이며, 잡된 실직자조차 사마천을 거명하며 한 마디 정도는 거들 수 있기에 소모적인 논쟁이 그치질 않는 거죠. 당 태종은 과연 거인, 명군 답게 딱 적절한 시점과 단계에서 논의를 종합하고 일을 마무리합니다.

당 현종은 저자의 평가에 따르면 기이하게도 명군과 암군의 면모가 동시에 존재하는 묘한 군주입니다. 초기 28년은 "개원의 치"라 하여 그보다 더한 태평성세가 없을 만큼 매끄러운 정치가 이뤄졌는데, 이후 양귀비와 그의 척족이 득세한 후에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망국 직전까지 나라가 몰렸습니다. 일개인의 처세도 가장 잘나갈때 발걸음을 조심헤야 후환이 없다고도 하며, 이런 패턴은 이때로부터 약 180년 전 양 무제의 통치 기간 중 추세 변화와도 비슷합니다. 초반에 극히 안정된 정치가 이뤄지다 급속한 몰락이 뒤따르는 건, 일단은 통치자의 자만과 방심에 기인합니다. 다음으로는 한번 정착하고 안정된 시스템이 이후의 상황 변화에 대응을 못 할 만큼 낡았는데도 관료층이 이를 간과하는 탓이 큽니다. 책에서는 전반기의 세도가 이림보의 부덕한 행실에 비판의 초점을 맞춥니다.

당이 몰락한 후 오대(五代)가 중원의 패자로 군림했으나 어느 하나도 중국인의 자존과 위신을 세우지 못하고 지리멸렬했습니다. 그 중에는 여러 임금을 섬기고 심지어 성씨가 다른 조정도 누대로 섬긴 풍도 같은 인물도 있었는데, 왕안석은 이후 그를 두고 "살아 있는 부처"라고까지 평했으나, 현대 중국인들, 또 저자의 평가는 천하에 둘도 없는 간신이자 민족 반역자라는 쪽입니다. 우리 역시 저런 주관 없는 처신으로 제 몸을 욕되게는 하지 않는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하다 하겠죠. 풍도처럼 출세나 축재나 다 이루고서 욕을 먹어도 먹으면 그나마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말입니다.

조광윤은 그가 섬기던 군주(후주의 시[柴] 세종)의 아들 종훈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권좌에 올랐습니다. 대개 양위는 피의 숙청을 동반하는 게 중국사의 정석이다시피했으나 이 왕조 교체는 어떤 정치 보복도 뒤따르지 않은, 거의 미담에 가깝기까지 한 모범 사례입니다. 조광윤은 또한 전대의 당나라가 절도사들의 할거 발호로 망국에 치달았음에 착안, 이른바 배주석병권을 통해 부하들의 무력을 성공적으로 해제시킨 고사로 또 유명합니다. 이처럼 송나라의 초반은 덕을 바탕으로 한 정치가 최고통치자의 솔선수범으로 인해 가능했습니다.

각각 구법과 신법의 옹호자인 사마광과 왕안석은 어느 하나를 선하고 악하다 분별하기 어려울 만큼 그 나름의 위대성을 갖춘 인물들입니다, 먼저 책에서는 6대 신법을 도입하여 적폐를 청산하고 국가의 재정을 일신한 왕안석의 개혁을 소개합니다. 한동안 그의 개혁 행보는 나라를 망친 주범으로 지탄받았으나, 무려 천 년이 지난 후에야 그의 혜안이 사가들로부터 새삼 주목받는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책 앞에서도 그런 서술이 있지만, 맹자는 유가의 오랜 계보 중에서도 혁명 지향, 개혁 성향이 유독 강한 인물입니다. 사마광은 이 맹자에 대해서조차 지나친 면이 있다며 다소 꺼리는 기색도 노출할 만큼 보수 성향으로 기울었습니다. 명저 <자치통감>의 저술이란 업적도 퇴색게 할 만큼 유감스러운 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 태종에게 방현령과 위징이 있었다면 천 년에 한 번 나오기가 힘들다는 칭기즈칸에게는 야율초재가 있었습니다. 몽골 관리들이 중원 일대를 초원으로 만들고 중국인들을 도륙하자고 했을 때, 그는 극간하기를 농경 인구를 살려 두고 그들로부터 조세를 징수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논거를 들어 참사를 피했습니다. 야율이라는 성씨를 봐도 알 수 있듯, 그는 멀리 요나라 시절부터 왕족의 혈통이었고 여진족의 금나라 조정에서도 그의 선대들이 승승장구했을 뿐 아니라, 이제 몽골의 천하가 열리자 다시 자신의 인품에 칸이 반하게 만들어 세계사의 큰 줄기를 바꿔 놓기까지 한 것입니다.

마오는 일본과의 항쟁에서 불굴의 투혼을 보였으나, 막상 통일된 인민 공화국을 일군 후에는 대약진운동, 문혁 등 파멸적인 행보를 취해 국가를 오히려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런 마오의 과오를 보완한 인물이 바로 저우언라이 같은 명재상이고, 그 뒤는 덩샤오핑 같은 실용주의자가 이념에 눈 멀지 않고 똑바로 현실을 본 후 오늘날 G2로 일컬어지는 대국 도약의 발판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처럼 뛰어난 인걸들이 즐비하게 이어져 오늘의 영화를 만든 중국사는 확실히 남이 쉽게 넘보지 못할 어떤 저력 같은 게 돋보입니다. 우리는 첫째 강대국 중국의 본질과 생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의무가 있으며, 둘째 숱한 인물들의 명멸과 부침 속에 무엇이 인간 처세의 바른 길인지 냉철히 검토할 절실한 필요가 또한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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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씽킹 - 개정판, 기독교 세계관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기
유경상 지음 / 카리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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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으로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지를 놓고 보다 진지한 고민이 많이 이뤄지는 요즘입니다. 저자 유경상 대표는 "생각하는 기독교인"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책 서문에서 꼽는군요.

1) 날마다 자신의 생각과 삶을 점검한다.
2) 날마다 자신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는다.
3)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꾼다. , 즉 하나님이 내 자신을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사용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일상이 감격으로 벅차오른다.
4) 생각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실천한다.
5) 무엇보다 나 자신의 생각과 삶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성령임을 알고 언제나 기도한다.

신앙생활은 주일 하루 교회 안에서만 열심히 하고, 일상은 주 6일 내내 세상에 물들어 철저히 다른 사람으로 산다면 이는 그리스도인으로 올바로 영위한다고 볼 수 없는 삶의 태도입니다. 신앙과 일상이 혼연일체가 되기 위해, 우선 내 자신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두고, 이 책은 저자의 치열한 고민과 사색, 그리고 기도와 실천의 흔적을 담아낸 듯합니다. 한 번이라도, "나, 이런 식으로 살아도 과연 괜찮은 걸까?" 같은 고민을 한 사람이라면, 이 책에 담긴 한 문장 한 문장에 공감을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1907년은 한국 기독교사에서 특별한 의의를 갖는 해였습니다. 그때로부터 어언 111년이 흘렀지만, 기독교 신앙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서 저때처럼 강렬한 각성과 영적 부흥의 몸부림이 일었던 때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다시 1907년의 기적이 찾아올 수 있을까요? 교회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어느때보다 높고,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들도 드높지만, 정작 그런 비판 속에는 현실을 개선시킬 "대안"이 부재했다는 게 저자의 지적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우선 개개인 차원에서, 성경에 구체적으로 이리이리하라는 식의 가르침이 나오지는 않는 문제를 놓고서는, 일상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신앙인으로서 가치관은 평소에 어떻게 잡아 나가야할지를 고민해 보자는 취지입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지 130년이 훨씬 지났으니, 이제는 표준적인 한국 기독교인의 처신과 신조가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하는지 어떤 모범적인 결론이 나올 때도 충분히 되었습니다.

저자는 1장에서 "카멜레온 크리스천" 유형을 분석합니다. 읽어 보시면 마음이 뜨끔한 분들이 많을 텐데요. 신앙은 개인적인 영역이고, 일상은 공적인 영역이며, 따라서 일상에서 기독교 신앙을 드러내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식으로 비 기독교인들과의 마찰을 피해가는 유형이라고 저자는 정리합니다. 일상과 신앙을 분리하되, 일상에 더 큰 비중을 두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가급적 숨기고 살아갑니다. 이 자체도 문제지만, 그 다음 단계는 거의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게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사향소 크리스천" 유형은 흔히 "문제될 게 아니라 오히려 모범적으로 사는 사람들 아닌가? 다만 저리 살 것 같으면 너무 피곤하니까 차라리 카멜레온처럼...." 같은 생각을 평소에 하게 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 역시 자신만의 고립된 영역을 언제나 고집하며, 결국 세상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는 경로를 걷는다는 점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삶과 신앙이 별개"라고 생각한다는 점인데, 이는 결코 예수께서 가르친 바 아니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p35(한철호 미션파트너스 대표의 글로부터 재인용)에는 노예 매매선 선장의 우화가 실려 있습니다. 노예로 잡은 여인 하나를 부하가 데려와서 잠자리를 함께할 것을 권하자, 선장은 화를 벌컥 내며 "십계명의 간음하지 말라는 구절을 잊었느냐?"고 외칩니다. 부하가 물러가자 그는 기도를 올립니다. "주여, 오늘도 유혹을 뿌리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사향소 크리스천이 문제인지 여실히 보여 주는 예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일상과 철저히 분리된 신앙의 영역에서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에, 자신이 영적 영역보다 한 차원 낮게 보는 세상의 실무에서 어떤 끔찍한 죄를 저지르는지 전혀 "센서가 작동하지 않았던(저자의 표현)" 것입니다. 이런 사향소 크리스천은 카멜레온형만큼이나 반 그리스도적인 삶을 산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서문에서도, 또 본문 1장에서도 저자는 "점점 주일학교 출석 인원수가 줄어드는 현실"을 지적합니다. 자녀들이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다른 삶을 살고, 다른 곳으로부터 즐거움을 찾는 게 현실이라면, 어찌 부모로서 기독교인 다운 삶을 살았으며, 그 본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로서 자녀에게 모범을 보이고, 온전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으로 복귀하려면, 먼저 기독교인로서의 바른 생각을 머리 속에 자리잡게 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 책 제목도 "크리스천 씽킹"이며, 2장 이후부터 자세한 각론이 이어집니다.

올바른 세세한 생각이 자리잡으려면, 먼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바른 가치관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1) 이 세상의 기원과 목적은 무엇인가?
2) 이 세상의 고통과 문제는 무엇 때문인가?
3)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올바른 생각이 작동하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세 가지 다른 렌즈가 모두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1) 하나님에 대한 생각
2) 죄에 대한 생각
3)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

이 셋은 저 위의 세 가지 근본 문제와 정확히 하나하나가 매칭됩니다. 세 가지 "렌즈"가 모두 필요할 뿐 아니라, 세 가지 렌즈는 하나로 통합된, 그리스도인 다운 정신과 세계관 안에서 작동해야 합니다. 앞서 저자가 지적한 "카멜레온형"과 "사향소형"은, 이 중 몇 가지 렌즈가 바람직하지 못하게 분리되거나, 아예 결여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랑의 통로가 되기 위해 창조되었다."

피조물이라 함은 조물주의 도구가 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누군가의 큰 수고가 부여된 각종의 편의를 누리며 살고 있고, 이는 내가 속한, 혹은 직접으로 속하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이웃을 구성하는 다른 공동체에 대한 감사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매사에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자세가 하나의 특징이죠. 그 바탕에는 "이 모두가 하나님의 설계에 의한 것"이란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러나 인간이 저지른 죄로 인해 불완전해졌습니다. 사람 마음 속에 두려움이란 녀석이 돌아다니는 건, 바로 사람 스스로 저지른 죄 때문이라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숭배하게 되는 모든 것은 바로 우상인데, 마음 속의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우상을 숭배한다면 이는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덧대어 저지름입니다. 이 우상을 감연히 마음 속에서 모두 떨쳐 내고, 그 자리에 사랑과 하나님을 자리하게 못 한다면 이 죄의 영원한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르게 살기 위해 신앙을 갖는 게 아니라, 주일헌금이나 몇 푼 던지고 일종의 액막이, 푸닥거리를 하는 양 세속의 더러운 가치를 보전하려는 수단으로 삼습니다. 그냥 세속의 논리대로 사는 이들보다 더 큰 죄를 짓고 사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뉴에이지를 경계하는 건 이 흐름이 힌두이즘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고,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는 비뚤어진 영적 가르침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절대적 진리"를 배척한다는 점에서 현대에 등장한 기독교의 가장 큰 적 중 하나라고 파악합니다. 낙태를 예사로 여기고 "그저 해파리 하나를 떼어내는" 정도로 간주하는 충격적인 움직임도, 현대에 들어와 각별히 타락한 인간 관계의 파괴적 트렌드 중 하나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는 "꿈꾸는 사람들"이 사라진 가장 불쌍한 시대입니다. 물론 돈을 더 많이 벌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자녀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는 세속적인 꿈을 꾸는 이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시는 참된 꿈은, "나만 생각할 게 아니라 나보다 더 큰 존재를 지향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그래서 신앙의 불모지에 찾아와 전도에 힘 쓰는 이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삶 속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쓰신다"는 경건한 깨달음과 희열 역시 자리할 데가 없습니다.

교회나 기독교는 은둔처나 개인적인 안식처 정도가 아닙니다. 삶이나 일상이나 세속으로부터 유리된 곳이 아니라, 정반대로 세상의 온갖 문제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해결하는 곳이라야 합니다. 또 올바른 생각이 아무리 자리한 후라도, 이것이 일일이 실천에 옮겨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역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입니다.

책 끝에는 기독교인을 위한 CTT 계획서가 나옵니다. CTT는 "크리스천 씽킹 툴"의 약자인데, 6단계에 걸쳐 18쪽에 이르는 아주 상세한 매뉴얼입니다. 진지하게 나 자신의 생활 태도를 돌이켜 보고, 무엇이 여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했는지 성찰해 볼 일입니다. 그 다음에는 소그룹 스터디 가이드도 나오는데, 이런 매뉴얼을 실천에 옮길 때 꼭 필요한 게 신앙상의 동지입니다. 혼자 머무르면 아무리 확고한 소신도 유혹과 시련에 들기 마련이니, 반드시 뜻을 같이하는 여러 성도들이 모여 하나하나 체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마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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