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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4월
평점 :
유구한
역사를 지닌 중국의 도읍은 그 긴 시간 동안 한 지점에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실 새겨 보면 당연한 게, 기후와 지형의
변천 때문에라도 단일한 저자[市]가 중추 기능을 계속 수행할 수 없죠. 또 중원의 개방된 지형 때문에 여러 정치 진영이
부침(浮沈)울 거듭하는 과정에서, 각 세력이 터잡고 일어난 중심지가 타 세력의 거점을 빈번히도 대체, 압도, 파괴했습니다. 사람의
수명은 기껏해야 백 년이지만, 거대한 중원의 호흡과 맥동은 오천 년 시간을 넘어다 보았습니다. 여섯 서울이 번갈아가며 으뜸
자리를 쟁패하는 사연이란, 차라리 세계사, 지구사의 압축이라고 불러 아깝지 않습니다.
책
처음에는 시안이 나오는군요. 우리말에서도 "장안"은 보통명사 서울, 수도와 거의 동의어처럼 입에 올려질 때가 있습니다. 이
장안은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秦) 나라의 수도 함양이 항우의 무도한 손길에 의해 멸(滅)해지고, 새로 한나라가 선 후 차분히
터전이 닦인, 중국에서 제국의 중심으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고도(古都)입니다.
저자께서는
서주의 호경, 풍경, 진의 함양과 한의 장안을 모두 이 시안(서안, 西安)의 범위에 포함시켜 보십니다. 하긴 뉴욕이나 일본의
도쿄도 어디까지를 시계(市界)로 잡을지 모호한 면이 많습니다. 부심, 인근 광역 위성 도시까지 모두 포함시키는 행정 체계도 있고
그렇지 않은 구획을 잡는 나라도 많죠. 중요한 건 저자의 지적대로, 이곳이 일찍부터 서역과 문물을 주고받는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시안의 이런 역사적 맥락이 현재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와도 핵심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책에서는
재작년 프랑스와 세계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대통령에 취임한 에마뉘엘 마크롱의 시안 방문(올해 1월)까지 지적합니다. "서쪽에는
로마, 동쪽에는 시안"이란 말로 요약된다는 과거의 영화가 이제 부패와의 전쟁을 시작한 시 주석의 비전과 함께 과연 되찾아질 수
있을지요.
책에서는
동북 공정을 비롯하여, 역사를 바라보는 특정 프레임만 강요하는 획일적 흐름에 대해 매우 경계하는 시선이 역력히 감지됩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관점에서 안중근 의사는 일개 테러리스트였을 뿐입니다. 저자는 묻습니다. "56개 소수민족이 모여 거대한 중국을
형성했다지만, 만약 내가 위구르 족, 광서 장족, 혹은 티벳 인으로 태어났다면 과연 어느 편에 섰겠는가?" 획일은 곧 강압이요
독선이고 불의입니다. 영웅은 그 어떤 이념과 지향을 표방하든 결국은 또하나의 압제를 타자에게 부과하는 악(惡)입니다. 저자는 다시
강조합니다. "영웅이 없는 역사라야 참된 평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를 수 있다." 1000년을 넘어 3000년의 아득한 전망을
허리춤에 찬 시안을 답사하고 저자가 느낀 바는 이처럼 비장한 감개와 경탄, 미래와 역사에 대한 건강한 우려 등이 뒤섞인 복합적인
사유와 감정이네요.
UN에서
근년 들어 부쩍 자주 세계문화유산이란 걸 지정하는 모습입니다. 이 "명예"를 가장 많이 지닌 나라는 중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이라고 하죠. 시안의 흥교사는 명승 현장이 통솔, 수련하던 시절 원측과 규기라는 빼어난 제자 승려를 또한 배출하였으며, 특히
원측 스님은 신라 역사에서 유식 불교 관련으로 반드시 중등 교육 과정에서 다루는 항목이기도 합니다. 라이벌 규기는 이른바 삼거
스님이라 하여 불교에서 금기로 삼는 세 가지를 모두 거느리고 다닌 행태로 유명한데, 저자께서는 이 재미난 일화를 소개하며 찬영의
기록 인용을 통해 후무(厚誣), 즉 "엄청난 무고"라는 반대 의견도 소개합니다.
여튼,
문화 유산이란, 빛이 나면 나는 대로,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자신의 참된 모습을 꾸밈 없이 표현해야 가치 있는 법인데, 중국
당국에선 UN 문화 유산 등록을 위해 점수 평정에 도움이 안 되는 시설을 대거 철거하려 들다 엄청난 반발에 직면했다고 합니다.
윤색과 개칠로 오히려 조상들의 긍지와 업적에 먹칠을 하는 격인 후손들의 이런 어리석은 시도 앞에, 삼천 년 내력의 도읍이 과연
어떤 참담한 마음으로 이를 바라볼지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장안도
아니고 시안이라고 하면 심지어 현대 한국인들에게조차 대뜸 떠오르는 게 "시안 사변"입니다. 장학량(아명 장샤오량 혹은 이 책의
표기대로 장쉐량. 張學良)이 그 절체절명의 순간 장중정(장개석)을 납치하지 않았더라면 대륙의 주인은 국민당이 되고,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지 않았을지, 저자는 흥미로운 가정의 연속을 이어갑니다. 물론 현재 중국 당국에서는 시안 사변(영웅적인 장학량의
결단)을 계기로 공산당이 기사회생했고, 궁극적으로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대륙을 지켜낼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시안 사변이
아니었다면 중국은 고작 일제의 식민지로 떨어졌으리라는 거죠. 뭐 생각하기 나름입니다만 저는 행간에 비치는 저자의 견해에 찬성하고
싶습니다. 그쪽 동네에선 이런 상상, 생각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저자의
상상은 이에 그치지 않고, 명 태조 주원장이 남경에서 이곳 시안으로 천도를 계획했었으며, 태자 주표에게 이 기획을 맡겼으나 그가
병사함에 따라 모든 포부를 접었다고 합니다(대규모 토목 공사는 또한 국력의 엄청난 출혈을 뜻하기도 하죠). 부질없는 if 놀이가
아니라, 만약 이때 시안 천도가 이뤄졌다면 북경은 어쩌면 아득한 예전 연나라의 도읍 시절을 제외하곤, 고작 몽골 족 치하의
대도(大都)란 이름으로 그 영화의 끝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이후 여진족이 그대로 중원을 침노했다 쳐도 기존의 수도를 존중하지,
구태여 뭐하러 북경 천도 따위를 고집했겠습니까. 여기서 대략 제1장 시안 파트가 끝나는데, 이 1장(여섯 도읍 중 한 곳의
사연)이 전체의 40% 가량을 차지합니다. 읽고 나면(혹은, 중국 역사에 정통한 독자라면 읽기 전이라 해도) 과연 그럴 만했다며
흔쾌히 이런 편제에 동의할 만합니다.
장안이
서도이면 낙양은 동도입니다. 우리 말에도 "낙양의 지가를 올리다" 같은 용례에서 서울과 동의어처럼 쓰이지만, 일찍이 姬氏가
견융에게 쫓겨 동천(東遷)할 때 새로 터잡은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뿐 아니라 광무제 유수가 폐허가 된 장안을 떠나 나라의 중심을
새로 정한 곳도 이곳이며, 한국의 독자들도 <삼국연의>의 배경으로 너무나도 눈에 익은 고도이죠. 저자가 손수 답사한
여러 유적의 면면에서도 드러나듯, 장안이나 이곳이나 당나라 치세 이래 널리 수입된 서역과 인도 문물의 흔적인지 사찰이 참
많습니다.
백마사에 얽힌 다양한
사연(과연 고찰이라서인지 너무도 많은 이야기가 곳곳에 서려 있군요)들을 보면 후한 명제(현종. 顯宗) 시절 불교와 도교가 한판
승부를 내려 든 일화가 그 중 있습니다. 저자께서는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상식적으로도 불교의 수입은 남북조
시대의 일이며, 도교의 성립 역시 제자백가의 노쟝 사상을 그 원형으로 설령 치더라도 "도사" 같은 계급, 직역이 등장한 건 한참
후대의 사실이란 점에서 백번 타당합니다. 영평 14년(AD 71)에 초왕 유영이 자살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바로 몇 페이지 뒤
초한 쟁패 스토리가 나와서 독자들이 혹 헷갈릴 수 있지만 이때의 "초왕"은 유씨 성 가진 황실 출신 제후왕입니다. 오초 칠국의
난을 생각해 보시면 되죠.
뤄양에는
또한 불교 예술의 극치를 보여 주는 한 모범인 용문석굴이 있는데 이곳의 마하가섭상이 20세기 초 약탈된 후 흘러흘러 캐나다까지
갔으나 문화재 반환의 국제 전례가 미비하여 불의한 현상이 계속 유지되었죠. 캐나다는 이 와중에 자발적으로 중국 측에 가섭상을
반환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적이 있으며 저자는 이를 두고 "양심과 책임과 품격을 입증"했다고 평가합니다. 그리스의 사례를 들며
엘긴 마블스의 이름도 언급하는데, 보통 Elgin은 "엘진"이라 읽지만 이 사람에 한해 "엘긴"이 맞는 발음이죠. (이 책에 나온
대로요)
유명한 관운장이 여몽의 손에
죽고 그 머리가 조조에게까지 바쳐졌는데 그의 무덤이 바로 이 뤄양(낙양)에 있습니다. 저자의 말씀대로 중국 역사상 제후 혈통이
아니면서 묘소에 "림(林)"자가 붙은 경우는 오직 공자, 관우 두 분의 예뿐이죠. 조조 역시 관운장을 제후의 예로 장사지냈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처럼, 워낙 오랜 기간 동안 중원 문명의 중심지로 기능하다 보니 온갖 인걸의 자취와 잔향이 도시 곳곳에 배어나는
겁니다. 더군다나 동과 서의 두 도읍은 중국 문명 황금기에중책을 맡은 고장이 아니었습니까.
카이펑은
한자로 개봉(開封)이라 쓰는데 이미 전국시대에도 삼진(三晉) 중 하나인 위(魏)나라의 수도였죠. <사기 열전> 등에
보면 "대량(大梁)을 무찌른다"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바로 이곳입니다. 대량은 다른 이름으로 변량(卞梁)이라고도 불렀는데
변경(卞京)이란 이름도 송나라(趙宋) 시절 널리 쓰였습니다. 개봉부 부윤의 면면을 보면 범중엄, 구양수, 사마광, 소동파 등
참으로 놀라운 명사들의 대행진입니다. 저자께서는 바로 포공사로 이동하시는데, 이곳은 절[寺]이 아니라 우리도 잘 아는 포청천의
사당[祠]입니다.
국화의 도시가 마침내 진[落] 것은, 문약한 조송의 조정이 기질 드센 호족의 세력을 당해내지 못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송 휘종의 아홉째 아들인 조구가 임안(臨安), 즉 항저우[杭州]에 도읍해서 세운 새 조정이 바로 남송입니다. 천당과도 비견할 만한 멋진 풍경과 넘쳐나는 물산 덕에, 송나라 조정은 남천을 한 후에도 오히려 세수가 줄지 않고 이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북쪽의 금나라와 상당 기간 호각지세를 이뤘습니다.
이곳 역시 불교 문화가 발달했는데, 저자는 그 중 지금은 공원으로 바뀌었다는 호포사를 찾습니다. 이 사찰이 자랑하는 홍일대사는 속명이 리수퉁(이숙동)으로,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한 20세기 초반의 인물입니다. "자질구레한 일상에서 그 온전한 맛을 음미할 수 있고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의 진면목을 관조할 수 있다"며, 마치 조선 시대 우리 선조들도 즐겨 노래한 안빈낙도의 깊은 뜻을 설파합니다. 소동파도 그 개인은 고려를 매우 혐오하였다지만, 이처럼 정서의 깊은 곳이 서로 닿아 있으니 어찌 중국의 문호, 법사 등의 저작과 기록을 가까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난징으로 다시 내려오면 역시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 주원장의 사연과 조우해야만 합니다. 이 도읍은 멀리 삼국시대부터 강남의 중핵으로 기능했고, 책에서 규정하는 대로 5호 16국의 혼란을 피해 동진한 진(晉) 황조 역시 몸을 의탁한 "육조 문화의 꽃을 피운 곳"입니다. 도읍이 선 곳이니 행정 수도에서 입신 양명해 보려는 과거 응시자들의 애환도 여기저기에 밴 게 당연합니다. 역사 시간에 홍수전(홍수취안)이 얼토당토않게 "태평천국"이란 걸 내세워 난을 일으킨 사실은 배워서 알지만, 과거 낙방자 출신인 그의 내력과 반란의 거점을 이곳 남경으로 삼은 점을 이렇게 연결시킨 건 확실히 저자의 탁월한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중국의 국부(國父) 손문(쑨원) 역시 이곳을 그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으니, 불의에 저항하고 민중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려는 역사의 거센 물줄기가 이 고도를 중심으로 세차게 흐르는 모습,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뛰죠.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대학살의 만행 역시 이 남쪽 수도의 아픈 역사 한 자락을 붉게 물들입니다.
그리고 북경. 쿠빌라이칸도 유목민 수장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중원의 천자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이 대도(大都)를 깊이 사랑하고 품었습니다. 조카의 황위를 뺏은 삼촌 주체의 거점이 여기였음은 이미 책 전반에서 자세히 다뤄졌지요. 청나라는 이자성이 야기한 대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입성(入城)하여 오히려 제국 통치의 기반을 더 세심히 다졌고, 자금성 내 원명원은 동양의 베르사유(아니, 그 이상이었겠죠) 궁전이란 찬사까지 들었지만 양이(洋夷)의 전화(戰禍) 앞에 잿더미로 화(化)하고 말았습니다. 북경은 이후 중일전쟁의 참사, 천안문 사태의 유혈 비극, 그리고 올림픽의 대성황까지도 모두 굽어보았습니다. 그의 뜻이건 아니었건 간에.
여섯 도읍은 거대한 중국사의 물줄기를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가로지르며 온갖 영욕의 사연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은 지리의 증인입니다. 도읍들을 돌아보며 생생한 대륙사의 체취를 맡다 보면, 밉건 곱건 그 긴 세월을 우리 겨레의 지척에서 함께 부대껴 온 거대한 역사의 엄청난 무게에 새삼 한숨이 나올 만도 합니다. 역사를 그저 글과 책으로 접하는 것과, 이처럼 대도시의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그 생생하고 가쁜 호흡을 공유하는 건, 각성의 정도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중국의 이런 과거와 현재를 가식과 거품 없이 이해, 수용할 때, 우리 자신의 활로도 함께 트이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