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7년 1월
평점 :
# 소수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의 사회.
국가의 시대에 추장의 마음으로 대한한국을 읽는다.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고추로 담은 장과 관련된 책인줄 알았다. 고추장으로 세상을 어떻게 말하지? 라는 의아한 생각으로 책을 보았었는데, 저자의 성에 부족사회의 추장이 결합된 단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대표라는 직함대신에 부족사회의 명예직이자 권력을 늘 가지고 있지 않았던 추장이란 단어를 좋아하는 저자가 소수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의 모습과 그가 읽은 책에 대한 소개가 2부로 나뉘어 실려있다.
머리말에 등장하는 그가 책을 구분한 4개의 잣대에 동의한다. 세상을 변혁하는 책과 세상을 해석하는 책, 세계를 반영하는 책과 세계를 낭비하는 책으로 나누는 구분속에서 이 책은 양극화, FTA, 이라크전쟁 등의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그 뒤에 숨겨진 함의를 해석하고, 작은 외침으로 세상을 변혁하는 책이다. 2003년부터 06년까지 저자가 매체에 기고한 글과 책을 엮으면서 새로 추가한 글이 모인 책이다. <수유 + 너머>의 집단을 좋아하거나, 주류의 시선이 아닌 소수의 관점을 받아들일 여유가 있는 독자에게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책이다.
# 고추장! 책 속으로 뛰어들다.
그린비에서 나온 리라이팅 클래식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저자이기 때문일까. 자유, 행복, 도덕, 기억, 역사, 사실, 여성, 기술, 화폐, 선물, 사회, 인권, 국가, 혁명 14개의 주제와 연관된 저자가 읽어낸 책 이야기가 실려있다. 인문학에 무지한 내게는 저자가 소개한 책들이 생소했지만, 저자의 논리적인 글솜씨에 저자가 이야기하는 주장에 동의하고, 저자가 소개한 책을 읽어싶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현실을 살아가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생을 살아가는 자신의 가치관에 큰 틀을 잡아줄 수 있는 주제와 관련된 책들, 그리고 책의 본문의 내용이 좀 더 많이 소개된 고추장의 독서메모 를 마지막에 붙여 저자의 이야기를 좀 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에피쿠로스의 <쾌락>,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등 그냥 책의 제목만 들었을 때는 읽을 엄두도 나지 않는 책들이다. 하지만 저자의 메시지 안에서 그의 글에 공감이 가면서, 소개된 책들의 내용도 이해할 수 있는 틈을 얻게 된다. 자유는 선택이 아닌 능력이고, 인간은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이며, 건강한 신체와 멀쩡한 정신만 있다면 누구도 행복에 대한 스승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 선과악이란 인간 자신의 생각과 이익에 맞추어 판단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자연 전체로는 선악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 기억력과 함께 기억증도 있다는 말, 치열한 '기다림'의 실천의 중요성, '사실'을 추려내는 역사학자들의 작업과 한 목소리의 위험성, 여성을 대하는 남자의 미숙함 등과 저자가 추구하는 코뮨주의의 근간을 살펴볼 수 있다.
# 고추장,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다.
세상의 소수자와 연대하기.
제목이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 책에서 지식인이란 노동자 등의 생활인들의 욕구를 대변하는 존재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노동자가 생존의 시위를 하기 이전에, 현실을 읽고 부조리한 부분을 글로 세상에 알리고 소통하는 책무가 지식인에게 있다고 할까. 지식사회로 가면서 지식과 개인의 안위가 연결되고, 세상과 유리되어 세상을 게임처럼 객관적 시선에서 풀려고 하려는 이들이 많은 가운데, 고추장, 저자는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고 있다. 최저생계비의 현실화를 요구하다 쓸쓸히 죽어간 최옥란씨, 비가 통계적으로 오지 않아 장애인의 날이 된 4월 20일을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로 주장하자는 목소리, 폭력을 조장하는 언론과 경찰,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의 현실, 빈곤의 투쟁과 빈민들의 정치세력화의 당위성, 한미FTA를 반대하는 이유, 마을이 무너지고 있는 농촌사회의 현실, 학자와 교수의 관계, 미국 대학원으로 전락한 서울대의 모습, 국가보안법 철폐, 이라크 전쟁, 한일 극우주의의 해법 등 주류의 시선에서 벗어난 소수의 시선에서 바라본 한국 사회의 모습을 글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신문에서 소개되어 양쪽의 주장을 살펴보지만 마음속의 울림으로 다가오지 않던 이야기들이 저자의 글을 읽으니, 소수자의 불편한 현실들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 원인 뒤의 철학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고 할까. 실제 보이는 현실의 지표들이 아닌, 좀더 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 이런 시선들을 외면하고 그냥 내 안위를 위해 살아가다 보면, 주류들의 시선에 의해 무기력해지고, 한탄만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각하게 느끼지 못했던 사안들의 중요성을 느끼게 된 것만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던 점에 만족한다. 깊이있게 다가서고 싶지만, 부족한 지식으로 어렵게 다가왔던 철학적 내용들도 저자의 글을 통해 편하게 다가설 수 있었다. 현실의 문제를 외면해 버리면 결국 피해보는 이는 서민과 비주류일 뿐이라는 현실도 느껴진다.
에필로그에 실린 '돈 없이 살 궁리'를 하는 저자의 모습에 색다른 감동을 느꼈다. 연구자들이 서로 각출해서 연구도 하고 마음의 정도 나누는 관계. 70년대 다들 없이 살았던 시대의 따뜻한 인정의 모습을 보는 느낌이라 할까. 연대를 하기 위해서는 모두의 연대의 필요성과 그에 걸맞는 노력과 책무가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돈을 벌려 노력하는게 아니라, 더 적게 자본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삶, 꿈처럼 생각은 몇 번 해 보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존재할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온 세상에 돈만 없는 부자들로 가득 찬 세계, 나 역시 그런 날이 오기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