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인생은 아름다워


'혹시'라는 말을 툭 하고 내뱉고 나면 그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일들이 무작정 술술 풀려나갈 듯하고 없던 행운도 갑자기 생겨날 듯해서 괜스레 기분이 좋아집니다. 나는 그렇게 들뜬 기분으로 4월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내가 기시감 멧돼지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돌아온 이후 전국의 멧돼지들이 들고일어났던 것입니다. 시국선언이니 뭐니 하면서 나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가 하면, 이런 뒤숭숭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나에 대한 지지율마저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세계 22개국 리더 멧돼지들에 대한 '아침 상담(morning consult)'의 조사에서 나는 19%로 압도적인 꼴찌를 했던 것입니다. 예전부터 나는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함으로써 겉보기엔 혹은 대외적으론 대범한 척, 뒤끝이 없는 척 연기하고는 있지만 소심한 나의 성격상 그렇게 될 리가 없습니다. 병아리 오줌만도 못한 낮은 지지율이 나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닙니다. 마음에 상처도 크게 남고 말입니다.


나는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대구를 찾곤 합니다. 이제는 젊은 멧돼지들이 모두 서울로 떠나고 나이 든 멧돼지들만 남아 폐허처럼 무너져가는 도시를 겨우 지탱하고는 있지만 대구의 멧돼지들은 언제나 나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해 주곤 합니다. 배알도 없이 말입니다. 이번에도 나는 대구를 찾아 '들판의 공(野球)' 개막을 알리는 행사에서 기분 좋게 공을 던졌고, 그곳의 한 전통시장에서 열렬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나는 차라리 대구 경북의 리더가 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지역의 멧돼지들은 나를 싫어하는 감정이 얼굴에서 역력히 읽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리더인데 내 앞에서는 적어도 그런 표정은 짓지 말아야 하는 게 예의가 아닌가 싶을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들도 오죽하면 그리 하겠습니까마는.


엊그제 나는 부산의 모 횟집에서 술과 음식을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나의 수족이라고 할 수 있는 '동운' 멧돼지를 포함하여 나를 리더로 당선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던 여러 똘마니들이 한 자리에 모였던 것입니다. 내가 밖으로 나오자 뒷골목 세계의 관례에 따라 양쪽으로 도열하여 나를 맞았고, 나는 그 가운데로 당당히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나라의 곳간이 무너지든 말든, 나의 지지율이 바닥으로 떨어지든 말든 나는 모처럼 기분 좋게 취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 뒷골목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던 것입니다. 게다가 나의 지지율 하락에 일조했던 강원도와 충청북도의 짱 멧돼지도 나를 보기 위해 부산까지 달려왔던지라 기분은 최고조로 치솟았습니다. 산불이 나서 멧돼지들이 타 죽고 있는데 골프를 치고 술을 마셨던 강원도 짱 멧돼지, 나의 친일 행각을 지지하며 '나는 기꺼이 친일파가 되겠다'고 외쳤던 충청북도의 짱 멧돼지 역시 산불이 번지던 그 시기에 술판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모두 나를 닮고 싶었던 탓이겠지요. 나를 지지하는 똘마니들과 술을 마셨더니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습니다. 나는 이번 달 말에 세계 최강 날리면 멧돼지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날 예정입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렙니다. 역시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봄꽃이 만발한 오늘의 풍경처럼 말입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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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행자 - 돈·시간·운명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는 7단계 인생 공략집
자청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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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멀다 하고 자기계발서가 쏟아지는 세상에서 좋은 책을 일삼아 골라내는 것도 힘든 노릇이다. 그렇다고 아무 책이나 잡히는 대로 읽자니 그것 또한 마뜩잖은 일이고 말이다. 물론 범람하는 책의 물결과 더불어 추천도서를 선별하여 준다는 사이트나 사람들도 비례하여 늘어나고 있으니 잘만 이용하면 시간도 아끼고 돈도 아낄 수 있겠거니 생각하겠지만 바쁜 현대인들이 그들 사이트를 일일이 검색하여 자신의 취향과 적성에 맞는 사이트를 찾아내는 것도 말처럼 쉽지만은 않을 터, 그러다 보니 좋은 자기계발서를 만나는 게 그야말로 복불복 게임에서 자신의 운을 점치는 일이 되고 말았다.


유튜브 채널 <라이프해커 자청>의 운영자이자 사업가로 널리 알려진 자청의 저서 <역행자>를 읽었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행자> 역시 수많은 자기계발서 중 한 권인 원 오브 뎀(one of them)에 불과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별 기대도 없이 집어 들었던 책은 어느 순간 삐딱하던 나의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들었다. 허투루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역행자>는 이제 수많은 자기계발서 중 특별하지 않은 한 권, 말하자면 원 오브 뎀(one of them)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저자의 논리와 설득력으로 인해 수많은 독자들 중 한 명이었던 내가 특별한 독자로 남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인간은 돈 버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다. 자의식이 가로막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의 성공 사례에 나온 사람들은 이미 역행자가 되기에 충분히 준비된 상태였다. '나는 돈이 없다. 그리고 돈이 필요하다'라고 인정함으로써 이미 자의식 해체가 끝나 있었다. 그래서 자신보다 대단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서 돈을 내고 배우려고 했다. 돈을 버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믿고, 미래 가치에 투자했다. 또한 그들은 의식하지 않았지만 7단계 모델을 따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p.258)


위의 인용문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는 '자의식 해체'를 특히 강조한다. 세상과 나를 구분하는 경계, 나와 타인을 구별하는 경계는 바로 자의식(혹은 에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계를 허문다는 건 일견 두려운 일일 수도 있다. 자신의 고정적인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구축된 자기만의 안전하고 익숙했던 세상에서 벗어나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일종의 도전이자 모험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자의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쌓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드라마틱하게 바꾸는 일이 변화의 2단계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들은 왜 연애에 실패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많이 안 해봤기 때문이다. 별로 경험도 없으면서 마음속에는 판타지와 자기만의 룰로 가득 차 있다. 연애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관심과 자원을 주고받는 일인데, '나'라는 존재가 너무 소중한 이들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받아주는 데 서투르다. 옷자락을 적시지 않고 물놀이를 할 수 없듯이, 자아에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으면서 연애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상처 입지 않는 것만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  (p.72)


그러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시대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과제로 남는다. 우리에게는 조심성 강한 유전자가 과거로부터 꾸준히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유전자는 변화가 많지 않았던 원시 시대에는 유리하게 작동했겠지만 지금처럼 빠른 변화가 요구되는 시대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자유 박탈'이라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변화를 기피하는 유전자 오작동을 의식적으로 이겨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3단계이며 4단계에서는 권투 선수가 운동을 통해 신체를 최적화하는 것처럼 뇌를 최적화하여 '자동 수익'에 이르도록 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경제적 자유와 돈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진정 말하고 싶었던 주제는 행복이다. 만약 내가 행복에 대한 책을 썼다면 사람들이 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돈이라는 주제를 미끼로 행복해지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가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진정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경제적 자유를 이룬 덕분이다. 누구도 돈 자체를 위해 살지는 않는다. 돈은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중요하다."  (p.287)


저자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역행자의 지식을 따르라고 말한다. 자신의 운명이나 본성에 맞서 역행자로서의 삶을 살라는 뜻이다. 돈을 버는 근본 원리인 "상대를 편하게 해 주기" 혹은 "상대를 행복하게 해 주기"를 꾸준히 실천함으로써 패배를 통해 성장을 지속하라고 권유한다. 실패를 해야만 '레벨업' 버튼을 누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둑에도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 원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도 경제적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성공의 비법이 존재한다. 그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원리와 비법만 안다고 모든 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승리의 경험과 자신감이 나를 더 높은 단계로 밀어 올리며 그와 같은 과정은 다른 어떤 분야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이 책을 더욱 집중해서 읽었던 까닭은 저자가 강조하는 바가 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과 융합하기 위해서는 자의식 해체가 필수이며 꾸준한 독서와 글쓰기가 성공의 밑거름이라는 생각. 우리는 어쩌면 자의식 과잉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까닭에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한 발 양보하거나 융화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온통 적대시하며 불행을 자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 산을 오르고, 틈틈이 책을 읽고, 메모를 하거나 글을 썼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려운 것은 자의식을 해체하는 일이다. 아무리 제 멋에 산다지만 자의식을 버리고 새로운 정체성을 세우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오늘도 나는 자의식의 프레임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겨우 3월이 가고 있는데 들에는 벌써 이른 봄꽃이 피었다 지고 산천엔 온통 신록이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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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끌리는 사람들, 호감의 법칙 50 - 그 사람은 왜 또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걸까?
신용준 지음 / 리텍콘텐츠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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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어 봐서 아는데..."로 시작하는 말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다. 정작 말을 하고 있는 당사자는 이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이 말을 처음 시작하는 시기와 맞물려 자신은 이미 남들이 혐오해 마지않는 '꼰대' 대열에 동참했다는 것이며, 인정하기 싫겠지만 주변 사람들의 기피 대상 1순위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며,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여 이전과 다른 새로운 인격체로 재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알라.'로 통칭되는 무지에 대한 자각이 무감해졌음을 의미하며, 지금까지의 경험 이외의 다른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 어린애가 된다'는 말도 이런 뜻이리라. 다른 이의 충고나 조언은 무시한 채 오직 자신의 고집 대로 행동한다는 것.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말하는, 마치 어렸을 때 경험했던 답답하기만 한 학교 담임선생 같은 사람을 우리는 '꼰대'라고 표현한다.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면 꼰대 취급받는다."  (p.274)


비즈니스 강의 분야에서 수강생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명강사이자 기업교육 전문회사 에듀콤 교육연구소 대표이사인 신용준 강사의 저서 〈괜히 끌리는 사람들, 호감의 법칙 50〉에는 상대에게 호감을 얻는 방법부터 관계를 발전시키는 법, 좋은 인상을 남기는 대화법 등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다. 말하자면 불편한 인간관계 때문에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이에 대한 다양한 연구 결과와 사례를 들어 집필한 심리학 자기계발서인 셈이다. 사실 인간관계에도 어느 정도의 연습이 필요하지만 학업을 마친 후 취업과 동시에 맞닥뜨리게 되는 다양한 인간관계에 의해 지치고 불편한 감정이 지속되다 보면 나의 단점을 개선하여 호감도를 높여야겠다는 생각보다는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만 증가하게 된다. 즉 자신의 단점보다는 타인의 단점만 부각된다는 것인데, 이와 같은 인식으로 인해 틀어진 인간관계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상대방에 의해 촉발되었을 뿐 나와는 무관하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 불평한다. 성공한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있다고 말이다. 여기에도 호감의 법칙이 존재한다. 호감이 가기 때문에 같이 일하고 싶어지고, 일을 맡겨도 마음이 편하다. 실력이 월등히 차이 나면 물론 기회는 실력 좋은 사람에게 간다. 하지만 실력은 일반적으로 긴 시간 동안 반복하여 익히면 누구나 일정한 수준에 올라갈 수 있다. 실력이 엇비슷한 상황이면 역시나 호감 가는 사람에게 일을 주고 싶다는 뜻이다. 결국은 실력이 비슷해지면 호감 가는 사람이 더 잘나간다."  (p.17)


삶은 90퍼센트 이상이 인간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무인도에서 홀로 살지 않는 한 인간관계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좋은 삶이란 좋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인간관계로 상황이 유리해질 수도 불리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결국 삶에 있어서 호감이라는 전략무기를 갖출 수만 있다면 다양한 상황 속에서 좀 더 좋은 혜택을 얻을 수도 있고 좀 더 깊은 만족감을 경험할 수도 있음을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생(一生)을 살고 있다. 딱 한 번뿐인 인생이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 말하지만 한평생 살며 무언가 이루어 놓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자신 인생에 대한 예의라 생각한다. 꼭 대단하고 시대를 흔드는 것이 아니어도 된다. 적어도 남들 앞에 열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에게 호감이 가는 법이다."  (p.224)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그동안에 쌓은 자신의 경험에 의해 인생에 필요한 지식을 모두 습득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내가 겪어 봐서 아는데..."와 같은 말투는 자신의 경험에 준거해서 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인 양 일반화하는, 소위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오류를 인지하지 못한다면 배움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에게 남는 것은 오직 아집과 불평뿐이다.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무수히 많고, 내가 아는 것이라곤 티끌처럼 아주 작고 미미하다는 생각이 선행되어야만 저자의 충고 또한 유효하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자신의 매력을 끌어올리는 방법부터 다른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 방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사회적 네트워크 구축 방법, 자신의 인간관계를 개선하는 방법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서 자신의 매력을 발휘하는 방법까지 책에서 제시하는 여러 호감도 증진 방법에 대해 한 수 배워보겠다는 생각이 책을 읽는 독자의 바른 자세일지도 모른다. 인간관계에도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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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고 싶은 기분 - 요조 산문
요조 (Yozoh) 지음 / 마음산책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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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혹은 몇십 년 동안 해왔던 자신의 직업에 대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마치 어떤 사명감이나 직업의식 나아가서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인류애의 발현인 양 포장하는 사람들을 볼라치면 피식 웃음이 나곤 한다. 사명감이나 애국심 혹은 개별 직업인의 소명 의식은 그렇게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전력의 직원이 매일 아침의 출근길에서 '나는 오늘도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원활한 전기 공급을 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하겠다.' 다짐하며 기쁜 마음으로 출근할 리도 만무하며,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는 군인들 역시 '오늘도 나의 목숨을 바쳐 국가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겠다.'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다짐하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라고 본다. 그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일상이며, 오늘 퇴근하면 무엇을 할까? 생각하거나 근사한 휴가 계획에 들뜰 뿐이다. 99%의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일 뿐인 까닭에 사명감이나 소명 의식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발생하지 않는다. 예컨대 '블랙아웃(대정전)'이나 전쟁과 같은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직업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포장 기술은 그 지위가 높을수록,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이 클수록, 그리고 개인의 학력과 재산에 비례하여 높아진다. 말하자면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 높을수록 자신이 마치 특별한 사명감으로 그 일을 해왔거나 지금도 하고 있는 양, 개인의 영달이나 재산 축적의 목적이 아닌 오직 직업적 소명의식과 희생정신으로 힘들지만 하루하루를 버텨낸다는 식으로 번지르르하게 포장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와 같은 양태가 대한민국의 지도층 인사를 불신하게 되는 근본 원인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과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이토록 다를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벌리고 있는 나에게 친구가 덧붙였다. "기업들 보면요, 어떻게든 세금 덜 내려고 발악을 한단 말이에요. 그래놓고 불우이웃 성금 보내면서 좋은 기업인 척하고, 저 같은 사람에게는 그런 게 얄미워 보이는 거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보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p.240)


뮤지션이자 작가이며 동시에 책방 주인이기도 한 요조의 산문집 <만지고 싶은 기분>을 읽는 동안 나는 불현듯 화가 났던 것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은 물론 자신 주변의 이웃들과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에 감사할 줄 아는 저자의 따뜻한 마음씨가 고스란히 담긴 이런 책은 세상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고, 평생을 검사로 살았다는 어느 권력자의 회고록은 베스트셀러 상단에 버젓이 이름을 올린 걸 보면 울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검사 재임 기간 동안 피의자를 협박하고, 온갖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에 편승하였던 그가 자신이 마치 정의와 공정의 화신이었던 것처럼 쓰고 있는,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된 구린내가 진동하는 책을 그렇고 그런 이들이 서로 짬짬이로 돈을 보태 베스트셀러가 되도록 만드는 일은 우리 사회의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에 비하면 요조의 글은 얼마나 소박하고, 아름답고, 따뜻했던가.


"내가 무너졌을 때 일으켜준 책과, 내가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게 도와준 음악을 생각한다. 예술과 대화할 때, 예술과 나, 우리 둘은 차 안에 있다. 나는 아스팔트에 감탄하면서 운전을 하고, 우리는 꼭 필요한 침묵 속에 있다."  (p.105)


나도 이제 퇴직 이후의 삶을 계획해야 할 나이가 되고 보니 가까운 친구들 중 몇몇은 이미 명예퇴직을 하고 다니던 직장에서 완전히 떠나버렸다. 몸은 여전히 쓸 만한데 딱히 쓸 데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도 남들처럼 회고록이나 써볼까?' 하는 유혹이 간혹 드는지 지나가는 말로 슬쩍 운을 떼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슨 말이냐며 펄쩍 뛴다. 그럴 시간이면 차라리 농촌에 가서 봉사활동이나 하라고 이른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야 할 사람은 쉽게 잊힐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게 좋다. 회고록이랍시고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사람들의 잊을 권리마저 빼앗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요조처럼 작고 힘없는 존재에게 더 많은 애정을 쏟는 이의 글이 지금보다 더 많이 출판되고, 그로 인하여 독자들 또한 그렇게 변해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 이 세상을 살다 간 지구인의 의무인지도 모른다.


"이슥한 밤길, 아까 받은 촉촉한 백설기를 조금씩 뜯어먹으며 느릿느릿 올라가는 언덕길이 조금 심심하길래 나의 칠순 잔치를 한번 상상해보았다. 홍대 앞 공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이제 '칠순 잔치'는 지울 수 없는 글자가 되었으니, 이렇게 된 거, 몇십 년 뒤 우리가 칠십 세가 되는 시절에 정말 아름답고 신나는 칠순 잔치들로 홍대 앞을 정신 없이 만들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258)


우리 욕심의 얼룩이 마치 자본주의의 원래 문양인 듯 착각하며 살고 있는 요즘, 세상은 온통 회고록이라는 이름의 거짓 명함들이 서점을 장악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의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요조와 같이 작은 목소리의 주인들은 점차 자신의 설 자리를 잃고 골목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서로 힘을 합쳐 세상을 향해 외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식들은, 우리의 손주들은 미세먼지 가득한 대기와 방사능 오염수 가득한 바다를 보며 세상을 떠난 우리들의 무능과 비겁함을 끝없이 원망할지도 모른다. 작고 욕심 없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외면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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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라는 시간에 샅바를 걸고 으라차차 용을 써보는 하루, 오늘을 허리 위로 높이 들어 모래판에 시원하게 메다꽂는 들배지기 한판승을 기대하였지만, 비와 황사를 핑계로 모처럼 아침운동을 거른 나는 아침부터 헤롱헤롱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들배지기 한판승은 커녕 경기 개시도 전에 GG를 선언하고 만 것이다. 오늘 나의 모습은 일본을 방문했던 우리나라 대통령의 모습과 흡사했다. 그렇다고 나는 폭탄주로 러브샷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게 나라냐?'는 분노에 찬 질문과 함께 우리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가르쳐야겠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사 과목은 그저 수능이나 취업을 위한 귀찮고 어려운 암기 과목 정도로만 생각했던 어른들이 우리나라 대통령의 뻘짓 덕분(?)에 우리부터 반성하고 제대로 공부해보자는 결기를 보이는 것이다. 내가 몸 담고 있는 회사에서도 '한국사 바로 알기 동호회(가칭)'를 구성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단순히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중요 포인트만 달달 외우고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모두 잊어버리는 그와 같은 헛된 공부를 지양하고 하나를 배우더라도 제대로 공부해보자는 취지는 동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듯했다.


봄비가 그친 뒤의 청량한 공기를 기대했는데 황사의 습격으로 목이 칼칼하다. 오늘이라는 시간에 샅바를 걸고 으라차차 용을 써보는 하루. 시간이 마냥 더디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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