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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무법자
크리스 휘타커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평점 :
우리의 의식이 상식과 비상식의 넓은 영역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정상과 비정상의 드넓은 영역 그 어디쯤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의 영역을 지나치게 고집하다 보면 나를 제외한 그 어떤 사람도 상식적이거나 정상적인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다. 마치 우리가 자신의 자아가 성숙하기도 전에 새가 뜬 눈으로 보았던 세상과 세상 사람들의 삶이 모두 비정상적인 것처럼 느껴졌던 한때의 기억을 누구나 갖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삶의 기준이 구름과 먹구름 사이의 경계만큼이나 모호하다는 걸 이해할 나이가 되면 완벽한 듯 보였던 나의 삶도 실수투성이의 순간순간들로 이루어졌을 뿐 삶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음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 역시 남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됨으로써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애처로워하는 것만큼 나를 제외한 타인에 대한 연민의 감정도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영국 작가 크리스 휘타커가 쓴 <나의 작은 무법자>를 읽는 동안 나는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사이의 갈등을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와 같은 혼란은 책을 다 읽고 며칠이 지난 시점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책의 원제는 <We begin at the end>인데 역자는 왜 <나의 작은 무법자>를 책의 제목으로 삼았을까? 하는 의문으로부터 작가는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이 책을 집필했을까? 하는 질문에 이르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으로 인해 나는 정작 책을 읽는 데 투자한 시간보다 책을 이해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야 말았다. 500쪽이 훌쩍 넘는 비교적 두꺼운 책이지만 작가는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 너무 서둘러 끝을 맺으려 했던 게 아닌가? 하는 나름의 주관적인 판단도 여러 질문들과 함께 뒤섞였다. 그리고 읽게 된 작가의 결문. '나오며 - 한국독자들에게'로 시작하는 네 쪽의 글 속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었다.
"이 글은 지극히 광범위한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극도로 사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복수와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들여다보는 범죄소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죠. 그것은 첫사랑, 자기희생, 선악의 개념과 그 중간의 회색지대에 관한 책입니다. 하루하루 분투하며 살아가는 여자아이와 과거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경찰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실수에 관한 이야기, 다시 일어나서 한 걸음씩 발을 내딛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p.571)
그러나 이 기나긴 이야기에 대한 작가의 짧은 설명만으로는 이 소설에 대한 의미 부여를 명쾌하게 내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이 서두의 첫 문단에 기록한 내용이다. 특별할 것도 없지만 소설의 두 축인 40대의 워크 서장과 열세 살 소녀 더치스 중 어느 쪽의 시각에서 바라보냐에 따라 이 소설은 지극히 복잡할 수도, 지극히 단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소설의 역자인 김해온 작가는 결국 더치스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이해하겠다는 선언으로서 <나의 작은 무법자>를 책의 제목으로 정한 것으로 보였다. 아직 자아가 완성되지 않은 더치스의 입장에서 세상은 온통 비상식과 비정상의 틀로 짜인 듯 보였을 테고 구성원의 절반을 차지하는 어른들은 하나같이 더치스의 기준에서 벗어난 비정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 위험한 세상에서 더치스 자신과 자신보다 훨씬 어리고 연약한 남동생 로빈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짜 놓은 기준과 틀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그야말로 '무법자'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가 뒤로 돌자 더치스가 작은 몸으로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서 있었다. 더치스는 파편의 삐죽삐죽한 쪽을 높이 들어 그의 목을 조준했다. "난 무법자 더치스 데이 래들리다. 네놈은 바에 들락거리는 겁쟁이 놈팡이고. 내가 네놈 목을 깔끔하게 날려주마." 더치스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동생의 외침을 들었다. 스타는 딸의 손목을 잡고 딸이 유리 조각을 떨어뜨릴 때까지 흔들었다. 다른 남자들이 와서 그들 사이에 끼어 소동을 가라앉혔다. 공짜술이 한 바퀴 돌았다." (p.70)
술과 약에 취한 채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고 팁을 받아 생계를 이어가는 더치스의 엄마 스타 래들리는 얼굴이 예쁘장한 싱글맘이라는 이유로 주변 남자들의 유혹의 대상이 된다. 한적한 시골 마을인 케이프 헤이븐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서장 워크는 스타의 오랜 친구이다. 동갑내기인 그들은 십대 시절 스타와 빈센트 킹, 워크와 마사가 짝을 지어 어울렸었고, 빈센트 킹이 스타의 동생인 시시 래들리를 차로 치어 죽게 함으로써 그들은 각자의 길로 뿔뿔이 흩어졌었다. 그러던 어느 날 30년의 형기를 마친 빈센트가 고향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타가 자신의 집에서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되는데... 사건 현장에 있었던 빈센트는 현행범으로 체포되고, 그의 결백을 확신하는 워크 서장은 변호사를 선임할 것을 주장하지만, 빈센트는 십대 시절 워크의 연인이었던 마사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변호사로 지명하지 않겠다고 버틴다. 결국 워크는 마사를 찾아가게 되고, 졸지에 엄마를 잃은 더치스와 로빈은 몬태나에서 농장을 하는 할아버지 핼에게 보내진다. 그러나 디키 다크의 소유였던 케이프 헤이븐의 술집에 불을 질렀던 더치스로부터 화재 영상을 받아 보험료를 청구하려던 다크는 더치스를 쫓게 되고, 자신들을 돌보지 않았던 할아버지에 대한 나쁜 감정이 있었던 더치스는 언제나 핼과 대치하지만 결국 핼의 진심을 알게 된 그로부터 총 쏘는 법과 말 타는 법을 배우게 된다. 평온한 날이 이어질 것 같던 몬태나의 삶에 균열을 깬 것은 다크의 등장과 핼의 사망이었다. 더치스와 로빈은 위탁 가정을 찾게 되지만 복수를 결심한 더치스는 케이프 헤이븐으로 향하는데...
"어쩌면 빈센트는 교도소 생활에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그냥 자신이 너무 미워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기보다는 사형당하는 쪽이 낫다고 여기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의문이 너무 많았다. 그는 자신이 진실과는 다른 색을 칠했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뼛속 깊이 느꼈다. 빈센트 킹은 죄가 없었다. 그리고 워크는 그걸 우연에 맡기지 않을 작정이었다. 더는 아니었다. 그는 이미 멀리까지 왔고, 자기 영혼을 대가로 지불해야 한대도 끝까지 갈 작정이었다." (p.466~p.467)
소설은 개연성을 확보한 채 물 흐르듯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어른의 시각에서 바라본 나만의 판단일지도 모른다. 더치스도, 로빈도 그들만의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때까지 어느 정도 어른들의 도움과 보호가 필요할 테지만 세월이 흘러 그들 역시 한 사람의 인격과 자아를 갖춘 성인이 되었을 때 어린 시절 그들과 연관되었던 여러 사람들에 대한 판단과 이해는 세상의 보편적인 기준을 향해 수렴할지 아니면 그 반대 방향으로 흐를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작은 무법자들이 세상의 악과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그것이 곧 그들의 판단 기준이 되지 않도록 보살피고 도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할 뿐이다. 그것이 곧 소설을 읽는 근본 이유로 이어질 수 있기를 <나의 작은 무법자>를 읽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바라 마지않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핼이나 워크처럼 혹은 돌리처럼, 이름은 서로 달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