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서용선의 일상을 따라나서다
고진예 지음 / 희종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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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화가와 관련된 책을 자주(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읽게 된다. 얼마 전에는 독일 화가 안젤름 키퍼를 다룬 책 <숲과 강 그리고 안젤름 키퍼>를 읽었고, 그때의 느낌이 워낙 특별해서 지금까지도 여전히 인상 깊게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읽은 <화가 서용선의 일상을 따라나서다> 역시 특별했다. 그러나 책을 읽기 전에 나는 화가 서용선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었다. 고진예 작가가 쓴 이 책은 화가 서용선의 일상에 더하여 화가와 작가의 대화 내용을 함께 수록함으로써 화가의 생각과 사상이 녹아들게 하고 있다.


"그는 역사화는 서울대학교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교수진에서는 민중화나 역사화를 그린 분이 없었고, 앵포르멜 이후의 세대와 그의 이전 교수진들을 포함해서 그런 류의 그림을 그린 분이 없었다. 그가 그린 조선시대의 그림은 역사에 관심을 두게 된 시점에 접근 방법을 시도해 본 그림이라고 한다. 비록 그가 민주화 투쟁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역사의식은 투쟁이 아닌 지적 사고의 발현으로 그림에 표출된 것은 아닐까. 또한, 그에게 역사화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신문 연재로 읽던 역사 소설에 연이 닿아 있다고 한다. 역사 소설은 화가인 그가 문학적 텍스트를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계기로서 친근하게 다가온다."  (P.183~P.184)


2007년부터 약 1년 동안 매주 경기도 양평에 있는 화가의 문호리 작업실을 찾아 화가와 대화를 나누고, 변해가는 바깥 풍경을 기록하고, 화가가 던진 사유의 조각들을 조용히 맞춰 왔다. 책을 읽는 독자는 먼저 그의 그림에 눈길이 간다. 단순하고 직선적인 골격에 강렬한 원색의 굵은 터치는 마치 8,9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의 걸개그림과 닮은 듯하다. 2000년대 이후 동학농민운동과 단 관련 역사 서사를 주제로 그가 그렸던 그림들은 여러 점의 자화상과 더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강렬한 인상을 받게 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역사적 운명에 대한 반항일지도 모른다. 역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현실은 또 다른 역사가 되어 후손에게 전달될 것이다.


"문학이나 예술은 영원성이 있어.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도 예술을 통해 그들이 말하려 했던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해. 물론 행동도 좋으나 문학을 하는 사람이면 문학으로서 깊이를 가져야 한다는 거야. 만약 시간이 많이 지나 역사적 상황을 경험하지 않은 앞으로의 세대가 그들의 글을 읽었을 때, 글에서 깊이보다 작가의 울분과 신경질만 느껴진다면 훌륭한 글이 아니라는 거지."  (P.28)


서용선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화가가 그림만 잘 그리면 되지 공부가 뭔 필요야.' 하는 생각은 애저녁에 사라지게 된다. 그림의 깊이는 결국 화가의 사유와 깨달음의 정도에서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용선의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 대부분이 서로 비슷한 느낌과 감동을 공유하는 걸 보면 화가 본인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사유의 깊이가 그림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화가의 진정성이나 현실을 바라보고 재해석하는 화가의 가치관이 그림과 함께 투명하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흐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의 그림 속에서 삶의 진실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저자인 고진예 작가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서용선 화가의 작품을 아끼는 까닭은 일반 민중의 현실과 삶의 진실이 그림을 통하여 가감 없이 전달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가 본인도 천형처럼 느껴지는 삶의 고단함이 역사의 은유 속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자신의 그림에 담으려고 애쓴 듯하다.


"문자는 이미 음성적 속성을 갖지. 우리가 문자를 눈으로 읽을 때 본다는 것은 빛의 파동에 의해 시각적인 형태로 감지되잖아. 그래서 문자를 읽는다는 것은 파동을 인지한다는 거야. 그것은 이미 소리 형태를 보인다는 거지. 미술에는 이미지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미지는 이미 현실이고 실체가 있는 거지. 왜냐하면 우리가 그림을 그릴 때 이미지는 재현적이지만, 이미 현실에 놓인 공간 안에 존재하기에 실체가 있는 현실적 이미지라는 거야. 우리는 실체가 없는 그린다고 하지만 그림이라는 것은 늘 공간 안에 놓이고 공간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인 거지."  (P.155)


오늘 아침,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등산로에는 안개가 자욱했었다. 그 시각에도 어디론가 일을 하러 나가는 사람들이 보였고, 그들의 얼굴에는 삶의 고단함이 허연 버짐처럼 더께더께 피어나고 있었다. 그림에는 영 소질이 없는 나로서는 그 한컷의 장면을 그림으로 남길 수는 없었지만, 화가 서용선의 핏발 선 눈빛의 자화상이 처진 어깨를 한 그들의 무거운 발걸음을 내내 노려보고 있는 듯했다. 삶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었다. 끊이지 않고 힘겹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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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에 시린
김보겸 지음 / 사람과가치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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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는 말은 감정의 폭의 크지 않다는 걸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볼 때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은 자신의 감정 표현에 솔직한 사람일 수도 있다. 예컨대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두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와는 반대로 아름다운 노을에 하염없이 빠져들거나 일출의 장관에 감동의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예술가가 느끼는 감정의 진폭을 다른 정상인의 기준으로 판단할 때 일반적으로 정상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기준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인은 예외로 한다는 규정 또한 갖고 있지 않다.


김보겸 작가의 에세이 <서른에 시린>을 읽는 내내 나는 그와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것은 MBTI 성격유형검사에서 T나 F로 분류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결코 아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T로 분류되는 모든 사람은 어떤 예술가도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서란 다소간의 성향적 특성은 있을지언정 칼로 무 자르듯 그렇게 명확하게 나눌 수는 없다. 누구나 같은 인간이라는 공통의 범주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말로 표현되면 현실을 정의하는 것 같아 숨을 쉴 수 없던 것을 나는 시로 썼고, 시를 쓰며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시를 쓴 까닭은, 내 마음을 움직였던 여운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크다. 시가 주는 언어로 삶을 바라보는 노력은 사람들이 쉼을 갖고 싶을 때 하나의 답이 될 거라고 전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다."  (p.52)


제목에 나이를 뜻하는 어떤 단어가 포함된 책이나 노래를 만날 때가 더러 있다. 그럴 때 나는 그 제목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나의 기억 회로가 제목이 의미하는 정확한 나이대로 되돌아갈 수 없는 까닭에 텅 빈 머릿속이 한동안 멍한 상태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김보겸 작가의 <서른에 시린>도 다르지 않았다. 나이에 'ㄴ' 받침이 들어가는 첫 순서이기도 한 '서른'이라는 나이가 아득히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서른, 마흔, 쉰, 예순... 우리는 그렇게 나이가 들고 시나브로 성숙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른이 넘어가면서부터 잔잔한 파동을 좋아한 것 같다. 사람들로 가득 찬 술집보다는 테이블이 몇 안 되는, 사장님의 손때가 묻은 식당이 편하고 정이 간다. 직접 담근 된장으로 끓인 찌개와 아침에 새로 한 듯한 김치, 사장님만의 특수 간이 되어 있는 삼겹살을 지글지글 구우면 술을 마시기 전인데도, 그 정경이 참 맛있게 느껴진다. 식당을 오고 간 지 십여 년은 되었는지, 자연스럽게 주방을 드나들며 반찬을 가져가는 단골손님의 넉넉한 웃음마저 정겹다."  (p.133~p.134)


사람의 마음도 나이가 듦에 따라 수분을 잃고 푸석푸석 건조해지게 마련, 다들 동안의 육체를 부러워하는 것처럼 촉촉한 감성을 유지하는 동심의 마음을 부러워했으면 좋겠다. 천천히 늙는다는 건 그 사람의 정서에 여전히 생명의 물기를 머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한 까닭이다. 젊은 사람들이 매우 논리적이거나 바른말만 하는 어른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정서 역시 타인의 감정에 녹아들지 못한 채 점점 메말라가는 것이다.


"때마침 노을이 졌고, 노을 끝에 닿은 아내의 표정이 맑아 마음에 담았다. 생각해 보니 맑은 사람을 꿈처럼 담는 일에도 여러 감정이 요동쳤고, 그럼에도 그 감정의 끝에는 아내가 있었다. 시간에 무뎌지면 마땅히 느껴야 할 계절조차도 사전에 박힌 이름처럼 건조하게 지나갈 때가 있는데, 아내를 만나 마르지 않은 계절들을 보냈다. 한 사람을 내 안에 담는 일이, 한 세상을 담는 일만큼이나 소중하다는 것을 안 후로 한 걸음씩 하루를 놓는 일에 늘 다정하려 애쓴다. 시린 마음의 끝에서도 변하지 않고 아내의 손을 잡는다. 그대 잇기에 한순간 꿈처럼 빛날 수 있었다."  (p.45~p.46)


지난 3월에 군을 제대한 나의 아들은 4월 9일에 출국하여 유럽 전역을 돌고 있다. 서른의 끝자락에 선 작가가 이렇게 흔들렸던 것처럼 홀로서기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 아들 역시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복학 준비를 하고 멀지 않은 미래에 '서른'이라는 나이를 경험하겠지만, 그것 역시 남들과 다르지 않은 통과의례라고 말해주고 싶다. '서른을 아끼고 싶은 마음에 서른이 시리다'고 썼다는 작가는 어쩌면 10년이 훌쩍 지난 어느 시점에 '마흔에 시린'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그리워진다. 우리는 그렇게 불가능한 어떤 것에 끝없이 매달린다. 우리의 삶이 다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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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살게 하는가
김종구 지음 / 위커리어북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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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알고 있는 '나'와 타인이 파악하는 '나'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다. 예컨대 '나'는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이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괴리는 개인의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관계가 넓어짐에 따라 그 폭이 점차 축소될 수는 있지만 나의 관점과 타인의 시선이 완벽하게 일치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에 대한 정의는 그 기준이나 조건에 따라 매우 가변적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최근 우리는 이마저도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AI의 발전이 가져온 이러한 혼란으로 인해 우리는 존재에 대한 믿음마저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만약 '나'를 내 행동 패턴, 선호, 반응의 총합으로 정의한다면, AI는 분명 나보다 나를 더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나'를 지금 이 순간 경험하는 것, 무언가를 의미있다고 느끼는 감각, 무엇을 위해 살겠다고 선택하는 의지로 정의한다면 AI는 나를 예측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알 수는 없다."  (p.26)


파사컨설팅그룹 대표이사이자 20년간 산업 현장의 변화 한가운데에서 영업, 마케팅, 조직 리더십의 본질을 탐구해 온 김종구 작가는 자신의 저서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살게 하는가>를 통하여 AG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부상하는 기술에 매몰되거나 그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은 채 나를 지키고. '나다움'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스스로에게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며, 어떤 과정을 거쳐야만 굳건한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 쓰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AI의 출현 이전부터 제시되었어야 할 문제이지만, 언제부턴가 기술의 발전이 우리의 예상을 늘 앞서가는 까닭에 AI가 보편화된 이 시점에 문제를 직시하고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나섰던 것인지도 모른다. 한참 뒤늦은 감은 있지만 말이다.


"효율성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세계에서, 효율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사는 것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빠르게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천천히 하는 것, 최적화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를 깊이 돌보는 것, 생산적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허용하는 것. 이것들이 비효율이 아니라 인간적인 삶의 조건이 된다."  (p.302)


인간은 기본적으로 욕심이 많고, 게으르며, 끝없이 편한 것을 추종한다. 우리가 구축한 자본주의 체계는 이러한 인간의 기본 정서를 끝없이 이용한다. 자본주의 윤리는 근본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의 욕구를 이용하여 부를 창출하는 과정에서 넘지 말아야 할 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에 부응하여 가상현실(VR)이나 검색 기술은 이미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지 오래되었고, 언제든 명령만 내리면 AI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물론 실제와 같은 영상도 뚝딱 만들어내는 시대가 되었다. 그에 비례하여 인간의 가치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AGI가 완전히 실현된 세계에서, 모든 것이 편리해졌는데도 여전히 직접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AI가 더 잘해줄 수 있는데도 굳이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았다면, 지금 당장 그것을 더 많이 살아가는 것이다. 잃지 않기 위해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삶의 중심이 되도록.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중심이 단단한 사람은 휩쓸리지 않는다."  (p.102)


경쟁이란 오직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인식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바둑기사가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결에서 연전연패하는 모습을 보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던 시점부터 우리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경쟁보다 더 위험한 경쟁이 존재한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능력이란 게 참으로 보잘것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토록 추락한 인간 가치를 고양하고 AGI 시대에도 변함없이 '인간다움'의 자부심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38개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하는 궁극적인 질문에 닿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갈수록 패턴화되는 대중 속의 '나'가 아니라 나만의 특성을 지닌 '1/80억'의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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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네 - 2025 일본 서점대상 1위 수상작
아베 아키코 지음, 이소담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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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달 5월을 맞는 사람들의 심리는 복잡하다. 차라리 어지럽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은 물론 스승의날까지 모두 5월에 몰려 있는 것은 물론 기념일로 정해지기는 했지만 성대한 행사 없이 지나가는 바람에 국민 대다수가 모르는 성년의날이나 부부의날까지 포함하면 5월은 그야말로 가정의달이 아니라 기념일의 달이 되고 만다. 이렇게 많은 기념일이 있으니 5월은 매일매일이 기쁨으로 가득해야 하겠지만 사람들의 속내는 복잡하기만 하다. 얄팍한 지갑에 비해 지출해야 할 돈은 꽤나 버겁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 몰라라 하기에는 왠지 낯 뜨거운 시선이 부담이 될 듯하다. 물론 지나고 나면 모든 게 추억이 될 수 있겠으나 현실은 그리 녹녹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래도 5월을 맞는 마음만큼은 언제나 따뜻하다. 아베 아키코의 소설 <카프네>처럼.


"저기, 카프네라는 회사 이름의 의미를 아시나요?" "포르투갈어로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어 빗겨주는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죠. 일본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뉘앙스라고 하던데요."  (p.268)


소설은 사십 대의 중년 여성 가오루코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남들처럼 자식을 낳고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소망했지만, 거듭된 불임치료에도 불구하고 끝내 실패하였던 그녀는 결국 남편인 기미타카로부터 이혼 제안을 받게 되고 끝내 이혼하고 만다. 이혼 후의 일상은 쉽게 무너져 내렸다. 매일 저녁 술에 의지하여 잠이 들었고, 집안은 온갖 쓰레기로 점령당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토록 다정했던 12살 차이의 남동생 하루히코마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하루히코가 죽기 전에 유언장을 남김으로써 상속이 복잡해졌다는 점이었다. 한때 결혼까지 거론되었던 하루히코의 여자친구 세쓰나에게 상속 재산의 일정액과 아가베 베네수엘라 화분을 남겼던 것. 가오루코는 동생의 유언을 수행하기 위해 세쓰나를 만났지만 어쩐 일인지 그녀는 한사코 상속을 거부한다. 가오루코와 세쓰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된다.


"5월이 됐다. 설명서에 적힌 대로 비료를 주고 흙이 마르면 물을 듬뿍 주면서 돌본 아가베 베네수엘라가 여러 겹 포개진 통통한 잎 사이로 빛깔이 옅고 소박한 새잎을 피웠다. 돌봐도 아무 변화가 없었던 식물이 갑자기 보여준 생명의 힘을, 가오루코는 쪼그리고 앉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p.259)


일상이 무너진 사람들에게 청소와 요리 등 가사 대행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업체 '카프네'에서 요리를 담당하고 있는 세쓰나는 갑작스러운 이혼과 남동생을 잃고 일상이 흐트러진 가오루코의 집에 우연히 들렀다가 먹음직스러운 요리를 뚝딱 해놓고 떠난다. 겉으로는 마냥 무뚝뚝하지만 마음은 더없이 따뜻한 세쓰나에게 감동한 가오루코는 '카프네'에서 주말마다 하고 있는 가사 대행 봉사 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책임감이 강했던 가오루코는 다른 건 몰라도 청소와 정리정돈만큼은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그 실력을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가오루코와 세쓰나는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일상이 무너진 여러 가정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북돋워 준다.


"집은 청소해도 금방 지저분해지고 음식도 먹으면 사라지죠. 그래도 괜찮아요. 고작 이삼일 정도라도 평소보다 집이 지내기 편해지고, 애써 뭘 만들지 않아도 이미 맛있는 밥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그런 환경만 있다면 사람은 아주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어요. 살아가기 위해 행동할 기력을 가질 수 있어요. 이게 카프네를 시작한 이유예요."  (p.103)


수수께끼로 남았던 하루히코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세쓰나의 기억과 하루히코가 봉사활동을 하면서 방문했던 몇몇 가정의 가족들을 통하여 그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난다. 하루히코 역시 가오루코처럼 '카프네'에서 봉사활동을 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쓰나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새롭게 알게 된 세쓰나의 성장 배경과 삶의 고단함으로 인해 가오루코가 단단히 마음먹게 된 결심은 독자들로 하여금 감동의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블루데님 작업복에 투박한 블랙 컴뱃 부츠를 신고 머리는 만두처럼 묶은 채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타나는 세쓰나는 '전투기 정비사가 일을 마치고 기지에서 훌쩍 나온 듯한 분위기'이지만 그 마음은 누구보다도 따뜻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독자들 역시 세쓰나의 매력에 풍덩 빠져들게 된다. 사람은 겉모습만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과거의 자신을 구하며 어떻게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도키코가 일상을 살아가는 데 질식할 것 같은 사람들을 구하려는 것처럼, 기미타카가 상처받은 아이들을 구하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삼는 것처럼."  (p.331)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과거에 저당을 잡힌 채, 때로는 과거라는 쥐덫에 갇혀 옴짝달싹 못한 채 현재를 살아가는 경우가 더러 있다. 과거의 그림자가 현재의 내가 갖고 있는 생명력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꼴이 되는 것이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라고 물었던 한강 작가의 질문처럼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나의 과거가 나의 현재를 돕고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어쩌면 자신의 의지가 빚은 하나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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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를 넣은 빵 - <장정일의 독서일기 1-7>에서 가려 뽑다
장정일 지음, 김영훈 엮음 / 마티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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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블로그를 읽는 일과 타인의 서평집을 읽는 일은 비슷한 동기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일종의 증상이 심하지 않은 관음증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독서에 취미가 있는 나와 같은 사람이 어느 독서 블로거의 블로그를 방문하는 일과 책으로 출간된 타인의 서평집을 읽는 일은 그 형태만 다를 뿐 목적은 서로 동일하다. '다른 사람들은 과연 어떤 책을 읽고 있는가? 어떤 책에 감동하고, 또 어떤 책에 혐오를 느꼈는가? 내가 읽어보지 못한 책 중 그가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은 과연 어떤 게 있을까?' 이와 같은 목적의 범위를 책이 아닌 다른 일상으로 넘겨 보면 우리가 겪는 관음증의 징후는 훨씬 심각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다른 사람은 어떤 집에서 거주하고, 어떤 물건을 소비하고, 어떤 음식을 탐닉하고... 관음증의 끝판왕은 어쩌면 여행 관련 분야가 아닐까 싶다. 예전부터 가고 싶었지만 나는 갈 수 없었거나(제반 비용이나 기타의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서), 그닥 가고 싶지는 않지만 타인의 경험은 몹시 궁금했던 어느 블로거의 사진과 여행기를 읽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건 우리 안에 내재된 관음증의 발현이 아니고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런 까닭에 비슷비슷한 내용의 수많은 여행 에세이가 제목만 달리 하여 지금도 여전히 출간되고, 그와 같은 책을 읽는 독자가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 걸 보면서 나는 여행만큼 우리 안에 내재된 관음증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분야는 다시없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행위를 통하여 유익한 정보를 얻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 책은 절판된 『장정일의 독서일기 1-7을 재가공해 만들었다. 지난 몇 달 이 책들을 천천히 여러 번 읽으며 새겨둘 문장에 줄을 쳤고 모아 문서로 정리했다. 애매한 표현이지만 이 작업은 온전히 『독서일기』를 읽은 나 개인의 판단만으로 이루어졌다. 중립적인 원칙과는 거리가 있다. 소설을 팠던 작가는 역사에 빠져들다가도, 현실사회나 인문.철학에서 서성이기도 한다. 그 세월 속에서 작가와 세상 사이 생긴 불화의 대목도 있다."  (p.7 '『이스트를 넣은 빵』을 엮으며' 중에서)


1994년 범우사에서 처음 출간된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애초에 1년에 한 권씩 나올 예정이었지만, 출판사를 바꾸어가며 같은 제목으로 2007년 7권까지 출간되었다. 시인으로 등단하여 희곡작가로, 소설가로 변신했던 장정일은 '독서일기'를 통해 그의 독서가다운 면모를 여실히 드러냈다. 작가란 모름지기 책과 가까운 사람들이지만 자신이 선호하는 일정 분야의 책을 고집하게 마련인데, 장정일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책을 읽는 것은 물론 짧게나마 자신의 평을 남김으로써 다른 이의 독서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한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한 권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수긍하겠지만 장정일은 훌륭한 작가이기 이전에 훌륭한 독자였던 셈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작가이다. 그의 소설도 좋지만 나는 그의 이력이 좋다. 그래서 뻔히 알고 있는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을 읽기 전에 번번이 그의 약력을 다시 읽는다. 그래서 몇 달 전에 읽었던 아쿠타가와 문학상 수상작품전집을 통해서는 그의 취미가 모던 재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귀중하게 여겨지는 그 사실은 한국에 번역된 다른 책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다. 뜻밖에도 이번에 읽은 『밤의 기별』에서는 재즈가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건 소설적 정황에서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기질적으로 재즈와 잘 어울릴 사람이고 함부로 취미를 바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p.180)


전에도 몇 번 말했었지만 이런 종류의 책을 읽는 것의 부정적 효과는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이 한계치 이상으로 증가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추리고 추려도 일정 기간 내에 읽을 수 있는 책의 권수를 훌쩍 넘기고 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지도 못한 채 반납하는 소위 '책을 산책시키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만다. 서평집을 읽은 후에 찾아오는 깊은 후유증이다. 이러한 후유증은 단 한 번도 예외가 없었던 중증의 질병이다. 나에게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는 장정일의 독서 감상 외에 1996년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희곡과 소설 등의 작품 구상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내 소설은 쓰레기"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지금도 생각은 그렇게 한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한 10여 년쯤 하고 보니, 내 소설만 아니라 사람까지 쓰레기가 되는 거였다. 소설은 그 사람의 인격이고 평가 기준이 되는 건가, 아니면 자기 문학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총알받이로 삼는 건가?"  (p.355)


내가 유튜브에 올라오는 동영상을 자주 보는 건 아니지만 나는 아직도 먹방 동영상을 보는 사람들의 심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타인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무엇이며, 그것에서 어떤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것이다. 단순히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즐겨 먹는지 궁금한 것이라면 그가 많이 먹건 적게 먹건 상관이 없는 문제이니 굳이 많이 먹는 사람을 찾아볼 일도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이것만 보더라도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장정일의 글을 읽어 보면 그도 역시 다른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흥미로운 사람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어느새 4월도 끝을 향해 가고 있다. 한낮 기온이 초여름처럼 더워졌고, 연녹색의 새순이 차츰 색을 더하여 녹색으로 바뀌고 있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어렵게 맞은 이 한낮의 여유를 가만가만 느껴보고 있다. 아파트 공터에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의 한숨처럼 가늘게 흐르는 바람이 불고 있다. 아이들의 모습이 궁금해서 베란다 창문을 열고 내려다본다. 눌러두었던 관음증이 다시 도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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