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송사리 하우스
기타하라 리에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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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했다'는 말은 타인에 의해 내려지는 칭찬 성격의 판단인 동시에 이따금 나 스스로의 자기 검열에 의해 내려지는 뿌듯한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개인의 성장은 타인과의 관계에 의하거나 자신의 결단이나 의지에 의해 그 결실이 맺어지곤 한다. 자신의 인생에 반드시 넘어야 할 성장의 계단이 숫자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 각자는 '성장했다'는 말과 함께 한 고비를 넘기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개인의 성장이나 깨달음이 일정한 조건이나 환경에 부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삶에서 우연처럼 주어지는 삶의 선물과 같은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인간이란 망각의 동물이다. 즐거웠던 기억도,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다. 물론 모든 것을 잊는 건 아니지만 완벽하게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순간도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 덕분에 살아갈 수 있는 거다. 제아무리 깊은 슬픔에 휩싸여도 인간이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건 '잊는다'는 기능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p.68)


기타하라 리에의 소설 <어서 와 송사리 하우스>는 외모도 성격도 직업도 제각각인 네 명의 여성이 한 집에 모여 살게 되면서 겪는 여러 에피소드를 가벼운 터치로 묘사한 청춘 드라마라고 하겠다. 말하자면 일명 '송사리 하우스'로 불리는 여성 전용 셰어 하우스에 세 들어 사는 네 명의 입주민이 주인공인 짧지만 강렬했던 셰어 라이프라고 하겠다. 막연히 도쿄를 동경하여 대학을 졸업한 후 도쿄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규슈 출신의 평범한 여성 엔도 하루카, 삼류 배우에서 일류 배우로의 도약을 꿈꾸지만 노출을 고민하는 배우 미야타 나치, 여성 직장인으로서 원대한 꿈이 있지만 결혼 앞에서 갈등하게 되는 오야이즈 가에데, 대기업 사장의 딸이자 송사리 하우스의 주인이지만 가정사로 인해 불운한 성장기를 겪었던 이쿠시마 유즈, 이 네 사람이 살고 있는 '송사리 하우스'는 역에서 걸어서 2분 거리에 있는 입지 좋은 곳이지만 재개발 구역으로 선정되는 바람에 그들에게 남겨진 시간은 고작 1년. 소설은 그 1년여의 여정을 아이돌 출신의 작가 기타하라 리에의 섬세한 필체로 담아내고 있다.


"나치 말대로 인간이라는 나약한 생물은 혼자 살아가기보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때 더 강해질 수 있는지도 모른다. 지킬 것이 있어야 더 강해질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중요한 것을 나는 성인이 된 후 잊고 있었다. 팀원들을 위해 이를 악물었기에 그 여름의 일본 제일이 될 수 있었는데, 사회의 거친 풍파에 시달리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단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힘을 낸다는 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일이다."  (p.166)


소설은 '송사리 하우스'의 입주민인 네 여성이 겪는 꿈과 사랑, 현실적인 고민과 그들 나름의 적절한 해결책 등을 제시하며 억지나 왜곡이 없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어 나간다. 인기 아이돌 그룹의 리더이자 멤버였던 키타하라 리에에게 이와 같은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는 건 소설을 읽는 독자로서도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하루카가 미팅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남자 친구 마사야를 어느 날 몸이 아파 일찍 귀가하게 된 날 나치의 방에서 보게 된다는 설정은 현실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동방예의지국인 대한민국에서 성장한 나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그런 일이...'라고 의문부호를 달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소설은 마지막 순서인  이쿠시마 유즈에게로 옮겨진다. 부동산 회사의 사장인 유즈의 아버지는 그녀가 어렸을 때 이혼한 후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이로 인해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원망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결국 이복동생인 쇼다이가 '송사리 하우스'에 찾아와 서로 인사를 하게 되는데...


"앞으로 송사리 하우스에서 보낼 시간이 그리 길진 않다. 하지만 이 집에서 보낸 시간이 확실히 존재했던 것은 흔들림 없는 사실이다. 그 사실이 있다는 것만으로 인생은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언젠가 끝나 버리기 때문에 다들 소중히 여기는 게 아닐까. 아무것도 없는 나라서 더욱 남아도는 공간에 흘러들어 와 준 사랑스러운 시간들. 나는 이 집에서 보낸 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내게는 가족이 있다. 혈연관계는 아니고 말로 확인한 적도 없지만 확실히 이곳에 있다."  (p.246)


국내에서의 취업이 어려워 국내 구직 활동을 접고 일본에 가서 1년 남짓 셰어 하우스 생활을 하며 고생을 하다 돌아온 청년을 알고 있다. 한국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자격증도 있었던 그는 일본인과의 간단한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셰어 하우스에서 사는 동안 입주민들과의 대화는 거의 없었다고 했다. 사는 게 빡빡하고 힘들었던 탓인지 함께 어울리는 일도, 서로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시간도 일절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감옥과도 같았던 셰어 하우스에서의 1년을 매우 끔찍하게 여기는 듯했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의 셰어 하우스 입주민들은 마치 한 가족처럼 서로를 돌보고, 고민을 나누고, 즐거운 일을 함께 하고자 한다. 어쩌면 행운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속에서 겪는 고통이나 즐거움을 통해 깨닫고 성장하는 것도 전혀 다를 테지만 말이다. 유난히 바빴던 한 주. 벌써 주말이다. 한낮 기온이 초여름처럼 덥게 느껴지는 걸 보니 여름이 멀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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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태수 지음 / 페이지2(page2)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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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나 우울은 우리에게 아늑함을 선사한다. 우리가 느끼는 기분에도 각기 다른 무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없이 가벼운 기쁨에 비해 우리가 느끼는 슬픔의 무게는 상당하다. 슬픔의 무게로 인해 우리는 끝없이 침몰한다. 그리고 기분이 닿을 수 있는 가장 아랫부분, 기분의 밑바닥에 가까울수록 안온함의 향기는 더욱 짙어진다. 우리는 그렇게 슬픔에 취한다. 품이 넓은 슬픔과 우울에 안겨 안온한 휴식을 취한다는 건 삶이 빚어내는 또 다른 아이러니다. 적극적으로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하면서도 슬픔에서 맛보았던 달콤한 안식을 결코 잊지 못한다는 것. 우리는 어쩌면 회오리와도 같은 삶의 이중성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행복하기에 앞서 쉽게 불행해지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즐겁기 이전에 별 탈 없는 삶을 이어가길 바란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여름철 모기마저 수행이라 버텨내는 사람이 아니라, 꼼꼼히 방충망을 치고 모기향을 켠 뒤 잔잔한 밤을 보낼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p.284 '에필로그' 중에서)

에세이스트 태수가 쓴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슬픔이나 우울의 무게라고 하겠다. 작가는 일상에서 건져 올린 습습한 우울의 단상들을 자신의 일상에 표 나지 않게 덧붙여 들려준다. 당신의 힘듦이나 우울이 작가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이 겪는 일상이며 결코 당신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위로한다. 그렇게 가벼운 우울의 세상에서 안온한 휴식을 취한 후 툭툭 털고 일어나 아무 일 없었던 듯 다시 새로운 일상을 살아가라고 권한다.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찌릿함보다는 안도감에, 특별함보단 일상적임에 더 가깝다. 아무 탈 없이 일할 수 있어서, 아픈 곳 없이 가족과 통화할 수 있어서, 희망은 없어도 절망도 없이 내일을 또 살아갈 수 있어서 행복할 수 있는 게 지금의 내 삶이다. 누군가는 그토록 조용한 인생에서도 행복을 발견할 수 있냐고 묻겠지만, 물론. 조용함은 웃을 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울 일이 없는 상태니까. 기쁜 일이 없는 하루가 아니라 나쁜 일이 없는 하루니까."  (p.228~p.229)

제1장 '다정함은 체력에서 나온다', 제2장 '잘 자는 것도 능력이야', 제3장 '똑똑한 우울증보단 행복한 바보로 살래', 제4장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의 소제목으로 구성된 이 책은 태수 작가만의 감성적인 언어를 통해 독자를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운다. 무엇보다도 작가 스스로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 중 한 사람으로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물론 한 꼭지 한 꼭지의 글도 그와 같은 소시민이 일상에서 생각하고 겪을 수 있는 일을 일기 형식으로 전달함으로써 공감과 현실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도록 한다.

"미련해서 꾸준한 게 아니라 흔들리지 않아서 꾸준할 수 있다. 무언가를 남겨야 해서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낭비하고 싶지 않기에 열심히 산다. 그렇기에 꾸준함이란 미련함이 아닌 단단함이다. 요란한 세상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내 삶을 사는 튼튼한 태도다."  (p.169)

어제는 오후에 볼일이 있어 차를 갖고 외출했다가 차를 빼지 못해 한참을 지체했었다. 꽃구경을 나온 한 행락객이 내 차 앞에 이중주차를 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차 좀 빼 주십사 전화를 하고 30여 분 하염없이 기다리는 동안 슬슬 짜증이 나고 분노가 치솟기도 했지만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사과의 말을 건네는 아주머니를 보며 나도 결국 가벼운 목례와 함께 자리를 떴다. 태수 작가는 책에서 '다정함은 지능이다. 그래서 의외로 가장 똑똑한 사람은 다정한 사람이다. 다정하다는 건 표정이나 말투, 속마음처럼 보이지 않는 감각까지 헤아릴 줄 아는 능력이니까.'라고 썼는데 그렇다면 나는 머리가 나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타인의 감정에 너무나도 둔감한 나 자신을 이따금 스스로 자각하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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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과 생각
정용준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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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팬이 되겠다는 건 아니지만 책을 읽다 보면 이따금 한 작가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싶을 때가 더러 있다. 책날개에 있는 작가의 짧은 프로필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어설픈 정보를 떠나 작가의 유년기는 어땠는지, 청소년기에는 주로 어떤 생각을 하며 보냈는지, 성인이 된 지금은 어떤 가치관으로 살고 있는지 등 작가 스스로 밝히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밀한 이야기를 속속들이 알고 싶은 것이다. (흠, 이렇게 쓰고 나니 어쩐지 내가 사생팬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위험한 인물로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튼) 그러나 연예인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에 관심이 그닥 많지 않은 까닭에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작가의 인생사를 굳이 알고 싶어 하는 경우는 극히 적다고 하겠다. (사실 나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유명하다는 연예인의 이름도 허다하게 모른다. 부전자전인지 나의 아들도 그렇다.) 어떤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는 원인은 일차적으로 그가 쓴 책에서 비롯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이치일지 모른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자신의 책이나 언론 인터뷰를 통해 언급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정용준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던 건 그의 에세이 <밑줄과 생각>을 읽은 직후였다. 전에도 작가의 이름은 몇 번 들어 본 듯한데 그의 작품은 생각나는 게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그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었다. 불행하게도 말이다. 누군가 넌지시 읽어보라고 귀띔이라도 해줬더라면 그의 작품 중 한두 권쯤은 진즉에 읽지 않았을까 싶긴 한데 아무도 내게 권하는 이가 없었던 걸 보면 그는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얻은 작가는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암튼 그렇다.


"밑줄 긋는 것이 좋습니다. 그 문장이 몸과 마음에 천천히 스며드는 시간도 좋습니다. 그 언어와 내 언어가 섞이고 남의 언어를 닮은 새로운 나의 언어가 생기는 것이 좋습니다. 밑줄이 그어지면 책은 책 이상이 됩니다. 단어와 문장에 그어진 한 줄의 흔적은 마음에도 그어져 있습니다. 문신처럼 흉터처럼 남아 내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저자와 악수하고 인물과 포옹하고 이야기와 연결되는 느낌. 이보다 좋은 것을 아직 경험해본 적 없습니다."  (p.6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책의 서두에 적힌 이 몇 개의 문장에 '계몽되'고 말았다. 하마터면 나는 어느 날 헌법재판소의 재판정에 나왔던 어느 변호사의 말을 그대로 읊을 뻔했다. '나는 계몽되었습니다!'라고. 책의 내용 역시 '작가의 말'에 버금갈 정도로 좋았던 게 사실이다. 책을 출간하고자 하는 어떤 작가도 자신의 책을 준비함에 있어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테지만, 소설가로 알려진 작가가 <밑줄과 생각>이라는 제목의 산문집을 준비함에 있어 그는 아마도 남다른 각오와 결심이 서지 않았을까 싶다. 한 글자 한 글자, 한 문장 한 문장에 정성을 다한 느낌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좋아하는 작가가 여름에 발표한 소설을 읽었다. 좋았다. 문장을 읽다 말고 잠깐 눈을 감고 멍하게 있었다. 분주한 마음이 가라앉고 다시 읽었다. 눈으로 쭉 읽어나가다가 연필을 들어 밑줄을 그었다. 어떤 단어는 손끝에 만져졌다. 어떤 문장은 온도가 느껴졌다. 어떤 장면에선 마음이 아팠고 어떤 대화에선 마음이 환해졌다. 소설은 작가의 일기가 아닌데 나는 그 작가의 소설이 일기였으면 한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를 사적으로 많이 알게 되고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그런 착각이라도, 그런 허상이라도, 좋다."  (p.176)


'한 줄의 문장', '한 줄의 밑줄', '한 줄의 생각'이라는 소제목으로 구성된 이 책은 자신이 읽었던 인상 깊었던 소설과 글을 소개하면서 작가의 깨달음과 통찰을 더한다. 소설을 쓰는 소설가가 다른 소설가의 작품을 읽고 공감하며 깨닫고 자신의 소설 작법에 있어 잘못된 점을 개선하는 것이야 당연한 이치이겠으나, 소설가가 보편적 일상을 살아가는 무명의 독자로서 여러 작가의 작품을 읽고 자신이 깨달은 바를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러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다. 그런 까닭에 소설가는 자신의 독서 체험을, 음악이나 영화 감상의 체험을 일반 대중과 나누기 위해 책이라는 지면을 통해 소통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일상처럼 가볍고 진부해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전업으로 글을 쓰는 작가라면 자신의 생각이 일회성의 어떤 것으로 그쳐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떠오르는 생각에 밑줄을 긋고, 그 생각에 새로운 생각을 첨삭하는 일을 끝없이 반복하여 그 열정이 독자의 가슴에 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용준 작가의 <밑줄과 생각>은 비로소 대중의 주파수와 일치하여 그들과 교신하게 되었다.


"나는 작가를 감히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가 보고 그가 증언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나도 아주 조금은 알고 있다고 믿고 싶다. 작가에게 신은 인간을 포기하는 관념이 아니다. 도리어 인간의 손목을 움켜쥐고 끝까지 떠오르게 하는 안간힘에 가깝다. 작가는 안다. 때로는 변호하는 것이, 우기고 또 우기는 것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아이처럼 떼쓰는 것이, 태양을 멈추고, 운명을 바꾸고, 신의 마음을 돌이키기도 한다는 것을."  (p.331)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하늘은 맑고 공기는 청명하다. 봄바람 속에 은은한 벚꽃 향기가 실려 오는 듯도 하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거닐며 꽃구경에 여념이 없다. 한 사람의 웃음이 곁에 있는 다른 사람의 웃음을 유발하고 급기야 꽃망울이 터지듯 주변의 모든 사람들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우리는 그 웃음에 밑줄을 긋고 삶의 의미를 가벼이 음미한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읊었던 천상병 시인의 시구처럼 오늘 그들 얼굴에 번졌던 미소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아름다운 삶으로 귀결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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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시간의 기억은 때론 혼재되거나 소멸하고, 왜곡되거나 재탄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란 물리적인 시간의 경과에 의해 차례차례 기억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모두 진실임을 입증할 방법도 전혀 없다. 따라서 어떤 기억은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고, 또 어떤 기억은 최근의 일이지만 까마득한 옛일처럼 희미하거나 아득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미 지나쳐온 시간은 물리적인 순서를 따지는 게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가 사건을 기록하고 관리하는 사학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2024년 12월 3일, 난데없는 계엄령 발표와 그로 인한 국민들의 혼란과 공포. 돌이켜보면 그로부터 4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다. 아무런 이유도 명분도 없는 계엄령 발표에 사람들은 다들 "지금 시점에 왜? 뭐 때문에?" 하면서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누구의 머리에서 비롯된 발상인지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2024년 12월 14일 윤석열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후, 헌법재판소의 파면 선고를 기다리는 지난한 시간 동안 단 하루도 마음 편하게 보내지 못했다. 환율은 치솟고, 소비심리는 급격히 위축되고, 기울어져가는 난파선 대한민국호의 이용객들은 다들 '이대로 가다가는 망하겠는걸.' 하는 우려는 꾸준히 높아져만 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해가 바뀐 2025년의 청명일이자 암브로시오(윤석열의 세례명) 성인의 사망일이었던 4월 4일, 그토록 애를 태우던 헌법재판소가 윤석열에 대한 재판관 8명 전원 일치의 파면을 선고하였다는 사실이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사람들이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문형배 헌재 소장 권한대행의 주문이 낭독되는 순간 서로가 서로를 다독이면서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고 벅차오르는 감격을 나누었다. 이로써 대한민국호는 항로를 잃고 좌초 위기에 빠졌던 상황에서 벗어나 조금씩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이다. 


주말을 맞는 식당의 점심시간. 모처럼의 활기에 주문을 받는 사장님도, 음식을 기다리는 손님들도 모두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지나온 시간의 기억은 때론 혼재되거나 소멸하고, 왜곡되거나 재탄생하기도 하지만, 4월 4일 오늘의 기억은 온전한 모습으로 영원히 기억되기를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의 웃음을 향해 기도했다.


'청명에는 부지깽이만 꽂아도 싹이 난다'고 하던데 오늘은 청명을 하루 넘긴 한식. 하늘은 희끄무레 어둡고 이따금 비가 내린다. 저 비와 함께 대한민국에도 새 생명이 움트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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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어른
이옥선 지음 / 이야기장수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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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으로 순서를 밟아 등단한 작가와 그렇지 않은 작가의 글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잘 쓰고 못 쓰고의 차이가 아니다. 재기 발랄함이랄까 아니면 자유분방함이랄까. 아무튼 신춘문예와 같은 정식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어쩌다 누군가의 눈에 띄어 등 떠밀려 책을 내게 된 사람의 글에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거칢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은 웃음 코드가 존재한다. 물론 적절한 유머와 타고난 글솜씨를 발휘하여 독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는 작가들이 왜 없을까마는 정식으로 등단한 작가의 유머에는 왠지 모르게 정형화되고 순서에 얽매인 듯한 느낌이 들뿐만 아니라 어디선가 읽었음 직한 기시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어쩌면 그들 나름의 정제되고 틀에 잡힌 일정한 웃음 코드가 따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식 절차를 밟지 않은 작가의 글에는 독자가 미리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내용의 웃음 코드가 반드시(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존재한다. 방심하며 읽다가 허를 찔렸다고 할까, 암튼 어느 정도의 의외성은 아마추어 작가의 글을 읽는 또 다른 재미가 아닐 수 없다.


"마침 언제 읽었는지 생각도 안 나지만 내가 이런 메모를 해둔 걸 발견했다. (나는 평소에 책을 읽을 때 메모도 잘 안 하고 그 시간에 또다른 책을 읽는 스따일이다. 그만큼 이 문제에 골몰했다는 뜻 되시겠다, 흠.) 독일 작가 홀거 라이너스 (『남자 나이 50』의 저자)는 "대단한 재능이 곧 성공적인 삶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뛰어난 재능을 갖게 됨으로써 편협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하기 쉽다. 이런 현상은 거의 모든 직업에서 나타난다. 예술가든 사업가든 운동선수든 상관없이 말이다"라는 말을 남겨서 아니 고뢔! 싶은 마음이 들게 했으며, ..."  (p.47~p.48)


평소에 내가 많은 책을 읽는 건 아니지만 이옥선 작가와 같은 '어작'(내가 재미 삼아 붙인 호칭. '어쩌다 작가'라는 뜻)의 작품이 우연히 얻어걸릴 때면 괜스레 웃음이 나곤 한다. 예컨대 김미옥 작가가 쓴 <미오기傳>이라든가 전시륜 작가의 유고집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등은 이따금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배시시 웃음 짓게 된다. 잡식성의 독서를 하는 나와 같은 이들이 누릴 수 있는 또다른 즐거움이라고 하겠다. 특별한 계획도 없고, 이렇다 할 목적도 없는 이의 손에 우연히 들어온 한 권의 책, 선물과도 같은 그 시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옥선의 산문집 <즐거운 어른>도 그런 책이었다.


"나는 이제 어느 정도 자유롭다. 관습과 도덕으로부터, 또 종교와 신념으로부터, 이런저런 인간관계로부터 거의 자유롭다. 다만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는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으며 지금까지 먼 길을 온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한다."  (p.214)


1부 '인생살이, 어디 그럴 리가?', 2부 '나에게 관심 가지는 사람은 나밖에 없음에 안도하며'의 단출한 구성의 이 책에서 작가는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마음껏 펼쳐 보인다. 성형수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공공장소에서 보게 되는 낯 뜨거운 애정행각에 대한 견해 등은 1948년 그것도 경상도 태생인 작가에게는 눈꼴 시려서 그냥 넘길 수 없는 사회 풍조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꼰대스러움(?)을 맘껏 풍기는 한 단면이었지만 그런 사소한 것들을 제외한다면 70대 중반의 할머니가 쓴 글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유려한 산문집이었다. 건강을 위해 틈틈이 요가를 하고, 동네 목욕탕에 출근 도장을 찍는 등 그 나이대의 사람들이 누리는 일상을 유쾌하게 풀어내는가 하면 어려서부터 즐겨 들었던 음악과 오랫동안 친목을 다져왔던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도 눈길을 끈다.


"달목욕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제 가사에서 좀 놓여나서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긴 50, 60대가 많다. 40대는 얼마 안 되고 70대도 많지는 않다. 매일 대략 비슷한 시간대에 다니기 때문에 학교 다니는 것 같고, 새벽반(일찍 깨는 노인이나 자영업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전반 오후반(오전에 운동 프로그램이 있어 나는 주로 오후반에 나간다) 저녁반(작장인들이 퇴근 후 많이 온다)끼리는 같은 반 친구처럼 얼굴도 다 안다. "어제는 왜 안 왔느냐" "이 동네는 어째 사생활 보장이 안 된다니까" "오늘은 좀 늦었네" 등등의 말을 나누고, 몇 년을 그렇게 다니다보니 서로의 사정을 알게 되고 친밀하게 지낸다."  (p.140)


아이들을 키울 때 쓴 육아일기 <빅토리 노트>를 출간한 후 새 글을 다시 쓸 일은 없다고 생각했던 작가가 '글을 쓰다보니 내 안에 이렇게 할말이 많았나 싶게' 빠른 속도로 진도가 나갔다는 이 산문집은 그래서 더 공감하며 읽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작가라는 타이틀을 떼고,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는 일반인으로서, 어깨에 힘을 빼고 가볍게 써내려간 글이기에 책을 읽는 나도 작가와 조금 더 거리를 좁힐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여유가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이 동해야 겨우 책을 읽는 게으른 독서가로서 이옥선 작가와 같은 '어작'(어쩌다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되는 건 그야말로 귀한 선물이라고 하겠다. 나는 여전히 감나무 아래 입 벌리고 누워,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심정으로 다음에 만날 '어작'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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