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의 루시 - 루시 바턴 시리즈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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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시간의 경과에 관계없이 백만 년 전의 그것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런 기억들 중에는 아주 최근의 것들도 있고, 희미하게 닳고 닳은 아주 오래된 기억도 물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통과했던 기억도 내게는 아주 먼 과거의 그것인 양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 중 하나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이었을 그 이상한 경험이 왜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치료제도 백신도 없이, 단지 개인의 위생과 격리를 무기로 감염의 공포와 싸워야 했던 그 길었던 시간이 왜 그토록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마치 나의 인생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시간을 내 인생의 빈 시간에 억지로 욱여넣은 것처럼.


"그리고 나는 또한 깨달았다.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라고. 맙소사,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다."  (p.66)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바닷가의 루시> 역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나는 사실 연작 소설처럼 이어지는 스트라우트 식 소설 작법을 좋아한다. 주인공도, 시공간적 배경도 이전 작품과는 전혀 다른 단행본을 선호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은 축에 속한다는 얘기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읽고 있는 시간만큼은 나의 인생도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불멸의 삶을 부여받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죽음이나 끝에 대한 두려움 없이 오롯이 소설 속에 머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안온한 느낌 때문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계속해서 읽게 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여기저기 돌아다녔다는 것, 그게 내가 말하려는 것이다. 날씨는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물질적인 세상이 우리에게 손을 펴 보이는 듯한 느낌이 존재했고, 그것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도움이 되었다."  (p.170)


<오, 윌리엄!>의 후속작이자 '루시 바턴' 시리즈의 최신작인 <바닷가의 루시>는 주인공인 루시와 그녀의 첫 남편인 윌리엄이 당시 만연했던 뉴욕의 바이러스를 피해 한적한 바닷가의 집으로 가게 되면서 일어난 일을 그리고 있다. 말하자면 바이러스의 위험을 감지한 윌리엄이 아무것도 모른 채 위험천만한 생활을 하고 있던 루시를 돌보기 위해 메인 주에 있는 밥 버지스 소유의 바닷가 주택을 임대하여 루시와 함께 자가 격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미국 북동부 국경지대의 해안가에 위치한 메인 주는 동부 도시 주민들의 여름 휴양지이지만, 대개의 휴양지가 그렇듯 휴가철을 제외하면 인적이 끊기고 항구도시 특유의 회색빛 거친 바람이 부는 을씨년스러운 곳이다. 소설 속 주인공 루시도 이곳에서 심한 고립감을 느낀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하루하루가 내가 걸어가야 하는 넓은 빙판길 같았다. 그리고 그 빙판에는 붙박인 작은 나무들과 잔가지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내가 그 풍경을 묘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세상이 다른 풍경이 되어버린 것 같았고, 나는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알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큰 불안감을 느꼈다."  (p.83)


한없이 서먹한 관계일 수 있는 두 사람(루시와 윌리엄)은 고립된 생활 속에서 지난날을 떠올리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들에 대해 끝없이 걱정한다. 고립된 삶이 두 사람에게 꼭 나쁘게만 작용한 것은 아니어서, 유년시절 가난과 폭력 속에서 성장했던 루시는 그녀처럼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집주인 밥 버지스를 통하여 사별한 남편 데이비드에 대한 상실감을 위로받기도 한다.


"그러자 밥이 말했다. "당신은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는 바보 같지 않잖아요., 루시. 그리고 나는 당신이 세상일에 바보 같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그가 말을 중단했다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요. 나도 좀 그런 경향이 있거든요.""  (p.117)


루시의 말처럼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지만 우리는 슬픔 속에서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나와 비슷한 종류의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흔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불안과 공포를 겪어내는 동안 우리들 각자의 나약함을 확인했고, 서로의 등에 닿는 누군가의 체온이 언제나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공포에 저항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현실에서 깨닫게 해 준 하나의 기회이자 창구였다.


"이 나라에 깊고 깊은 불안이 존재하고, 시민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소곤거림이 내가 뚜렷이 느낄 수는 없어도 감지할 수 있는 미풍처럼 내 주변을 휘도는 것 같은 환시.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받아 그곳을 떠났고, 내가 윌리엄에게 무엇을 느꼈는지 말하자 그가 "나도 알아" 하고 말했다. 그것이 내게 머물렀다. 그날 저녁에 내가 받았던 그 느낌이."  (p.218)


혹자는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기록하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이 지겹지도 않으냐고 묻는다. 다른 누군가는 특별한 사건도 없이 잔잔한 일상을 기록한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느낌이 들어서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나의 생각은 다르다. 작가가 구축한 소설 속의 견고한 질서와 배경, 그 속에서 펼쳐지는 반복적인 일상은 늘 크고 작은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안심과 위로를 선사하는 까닭이라고. 적어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읽는 동안은 불안하지 않다고. 소설을 읽고 있는 그 시간에는 우리에게 예정된 죽음도 아주 멀게만 느껴진다고. 작가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를 위로하며 다독이고 있다. 나는 어쩌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에게 중독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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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지만 안녕
황경신 지음, 김원 사진 / 지식의숲(넥서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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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력이 심한 편은 아니지만 어떤 작가에 대한 호불호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껏 내가 읽었던 책의 권수도 그리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작가의 수도 제한되는 까닭에 굳이 호불호를 나눌 필요도, 그럴 만한 이유도 찾지 못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기본 자료의 부족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현상일 뿐 나의 취향이나 선호가 전무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 그렇지만 형편없는 나의 독서 이력과 미미한 자료에 근거해서, 말하자면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에 의거해서 글을 잘 쓴다고 인정되는 작가가 몇몇 존재하기는 한다. 멀게는 박경리 작가나 박완서 작가에서부터 조금 가깝게는 김소연 작가나 황경신 작가를 들 수 있겠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김훈 작가를 거의 일 순위로 꼽았지만, <허송세월>을 읽고 크게 실망했던 바, 더이상 김훈 작가를 거론하지는 않기로 했다. 물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내가 감히 언급할 수조차 없는, 나의 평가 수준을 벗어난, 저세상 클래스의 작가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들이 황경신 작가와의 인연은 그녀의 에세이 <생각이 나서>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생각이 나서>를 읽어본 독자라면 누구나 그녀는 '타고난 글쟁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생각이 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 자신만의 문체로 완성한, 황경신 체의 에세이인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탁월하고 독특한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놓는 일이 자주 있을 수는 없는 법, 작가에게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한다. 천명관 체로 완성한 <고래>가 그렇고, 오쿠다 히데오 체로 완성한 <공중그네>가 그렇고, 김훈 체로 완성한 <자전거 여행>이 그랬다. 과거에 자신이 쓴 작품 수준을 능가하는 새로운 작품을 세상에 다시 내놓을 수 없는 작가의 심정은 오죽 답답할까마는 이를 대하는 독자의 태도 또한 혹한기의 그것처럼 냉담하구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누군가의 영혼을 영원히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유한의 존재인 나는, 무한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수용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영원이란, 우리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언젠가의 시간 속에서만 영원히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것, 그것만이 영원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p.123 '슬프지만 안녕' 중에서)


<슬프지만 안녕>은 17편의 짧은 소설을 모아서 엮은 소설집이다. 표제작인 '슬프지만 안녕'을 비롯하여 '녹턴', '꽃 피우는 아이', '한밤의 티파티', '기쁜 우리 젊은 날' 등 1990년대 풍의 고전적인 사랑과 이별 이야기가 책을 메우고 있다. 작가의 실제 체험과 허구가 교묘하게 섞여 있다고는 하지만, 체험담이냐 아니냐의 문제보다 더 독자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작가의 글재주가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황경신 작가를 아끼는 열혈 독자인 나의 입장에서 판단해보자면 소설은 왠지 어색하기만 한 게 사실이다. 작가에게는 여전히 에세이스트로서의 자유분방함이나 사색의 순수함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작가에게는 여전히 유교적 토양에서 자란, 관습화한 고정 관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아니 에르노와 같은 사실적 묘사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는 듯하다.


"남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희미한 얼룩 같은 눈들이 공원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 혹은 어딘가 먼 곳을 향해 가듯, 남자는 여기저기 발자국을 남기며 나무 사이를 걷고 있다. 물이 오르지 않은 나무들, 아직 겨울 속에 있는 듯한 나무들이다. 그러나 나무 속에는, 땅속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바쁜 마음으로 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p.255 어느 새의 초상화를 그리려면' 중에서)


작가에게는 특화된 한 분야의 재주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하나의 재주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그 시대를 사는 동시대인의 마음을 관통하는 시대정신과 일치해야 한다. 말하자면 작가의 재주를 인정하고 높이 살 만한 동시대의 독자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나이에 상관없이 그가 쓰는 글은 언제나 탄력이 있고 힘이 넘쳐야 한다. 나는 이제 나이가 들었네, 하고 고백하는 순간 작가로서의 수명은 이미 끝난 것이다. 내가 김훈 작가의 글을 더이상 읽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의연함과 초연함이 글을 쓰는 작가에게도 있어야 한다. 글에서 풍기는 원숙함이나 노련함은 작가의 나이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작가가 기울인 노력의 산물일 뿐이다. 우리는 종종 작가의 노쇠함을 원숙함으로 포장하곤 한다. <슬프지만 안녕>은 황경신 작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통속적이고 구태의연한 느낌이 드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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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살이
애니 딜러드 지음, 이미선 옮김 / 공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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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유명 작가를 제외하면 '작가'라는 직업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사실이 그렇다기보다 나의 인식이 그렇다는 얘기다. 그와 같은 인식의 출발점이 어디일까?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지금은 그런 말이 사라졌을까 몰라도 내가 어렸을 적에는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작가는 밥 빌어먹기도 힘들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었었다. 그런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반복적으로 듣고 자랐던 나는 '작가'라는 직업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알레르기 반응, 공포에 가까운 거부반응을 갖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말이다. 게다가 집안 형편마저 팍팍했던 나로서는 직업 선택 목록에도 오르지 않은 '작가'를 평생 직업으로 갖게 된다는 건 애시당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누군가의 명함에 '작가'라는 두 글자가 이름 앞에 놓일라치면 '이 사람은 과연 제 때에 밥은 밥은 먹고 다니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곤 한다.


선진국을 자처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설마 굶어 죽는 사람이 있을까? 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있었다. 2011년 30대 초반의 시나리오 작가였던 최 모 씨는 자신이 살았던 월세방 현관문에 '그동안 너무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라는 글귀가 적힌 쪽지를 남긴 채 사망했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지병이 있었고, 직접적인 사망 원인도 지병에 의한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그와 같은 글귀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비정함은 충분히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렇듯 작가는 되기도 어렵지만 평생 직업으로 선택하기에도 꽤나 어려운 직업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이라는 영토 내에서는 말이다.


"글쓰기는 한 줄의 단어를 펼쳐놓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줄은 광부의 곡괭이이고 목각사의 끌이며 의사의 탐침이다. 글 쓰는 이가 휘두르는 대로 그 줄은 그에게 길을 파서 내준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땅에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그것이 막다를 골목일까, 아니면 진짜 주제를 찾아낸 것일까? 그 답은 내일 나타날 수도 있고 내년 이맘때쯤 나타날 수도 있다."  (p.11)


미국 작가 애니 딜러드가 쓴 <작가살이(The writing life)>의 첫 대목은 그렇게 시작된다. 1장 '글은 어떻게 쓰여지는가?', 2장 '나는 어디에서 글을 쓰는가?', 3장 '누가 내게 글 쓰는 법을 가르쳐주는가?', 4장 '글 쓰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5장 '어떻게 나만의 글을 써낼 수 있을까?', 6장 '나의 글쓰기는 어떻게 흘러가는가?', 7장 '글의 영감은 어디서 오는가?'의 총 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장의 소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용 자체는 무척이나 평이하고 쉽게 쓰인 듯 여겨지지만 실제로 책을 읽는 독자는 여러 생각할 거리가 넘치는 까닭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소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책에 머무는 그 시간만큼은 꽤나 즐거울 거라는 사실이다.


"작가는 세상이 아니라 문학을 공부한다.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그는 세상을 놓칠 수가 없다. 햄버거를 사거나 비행기를 타면 그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보고한다. 그는 자신이 읽을 책을 주의해서 선택한다. 결국은 그것이 그가 쓸 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배울 것을 조심해서 선택한다. 결국은 그것이 자신이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p.112)


직업으로서의 작가가 되는 길이 예전보다 넓어진 게 사실이다. 일인 출판이 늘고,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책으로 내놓고 있다. 말하자면 유입되는 작가의 수가 전에 비해 획기적으로 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책에 대한 수요는 나날이 감소한다. 전에도 그랬지만 출판계는 그야말로 지독한 레드오션으로 변해가는 셈이다. 이런 마당에 작가를 꿈꾼다는 건 자살 행위와 진배없다. 물려받을 유산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모를까. 그럼에도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 더러 있다. 우리는 그들의 용기 덕분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문화강국의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누릴 수 있고, 작금의 혼란을 잊을 수 있을 만큼의 재미있고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을 수도 있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결코 가능하지 않은 현실일 터,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글 쓰는 것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매번 즉시 그것을 모두 써 버리고, 뿜어내고, 이용하고, 없애 버리라. 책의 나중 부분이나 다른 책을 위해 좋아 보이는 것을 남겨두지 말라. 나중에 더 좋은 곳을 위해 뭔가를 남겨두려는 충동은 그것을 지금 다 써먹으라는 신호이다. 나중에는 더 많은 것이, 더 좋은 것이 나타날 것이다. 이것들은 샘물처럼 뒤에서부터, 아래로부터 가득 차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알게 된 것을 혼자만 간직하려는 충동은 수치스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파괴적인 일이기도 하다 아낌없이 공짜로 푹푹 나눠주지 않으면 결국 본인에게도 손해이다."  (p.129)


'작가'가 되겠노라 호언장담하는 이를 나는 존경한다. 그들의 용기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일개 무명의 독자로서 고통 속에서 대작이 나온다는 것을 역사적 기록으로부터 배워왔기 때문이다.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고통의 경험을 독자들에게 가감 없이 생생하게 전달하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작가'를 꿈꾸는 당신이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구비한 셈이다. 나는 기꺼이 당신의 독자가 될 것임을 약속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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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무가 있는 국경
김인자 지음 / 푸른영토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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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세이를 읽는 게 여행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행에 대한 욕구나 갈망을 한 바구니 키울 뿐이다. 그렇다고 여행 에세이가 여행을 부추기는 광고 서적은 아니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따금 여행 에세이를 읽고, 풍선처럼 부푼 여행 욕구를 안은 채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리고 여행지로부터 지금 막 돌아왔을 때의 노곤한 피로와 예상을 뛰어넘은 여행 경비에 골머리를 앓곤 한다. 어느 여성 잡지의 연말 부록처럼 '이제 내가 여행을 또 떠나면 성을 갈겠다'는 여행 결별 선언이 짐을 정리하는 내내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긴장감을 날려버리기엔 파파야나 망고향기가 있는 국경도 멋지지 않을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 나는 그런 국경을 본 적이 없다. 하여 마음 속 국경에 사과나무를 심기로 했으니 훗날 나무가 자라 붉은 사과가 주렁주렁 열리면 누구든 와서 따 드시라. 그리고 전해주시라. 지상 어딘가 사과나무가 있는 매우 멋진 국경이 있노라고. 그곳에 가면 당신은 그리운 이에게 사과나무가 있어 등지고 싶은 세상을 다시 사랑하게 되었노라는 편지를 쓰게 될 거라고."  (p.141)


김인자 시인의 여행 에세이 <사과나무가 있는 국경>은 어쩌면 작가의 여행 결산서와도 같은 책이다. 작가가 여행했던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그곳에서의 특별한 에피소드를 주제로 쓴 것도 아닌, 여행자로 살았던 20년의 여행기록을 묶은 책이기 때문이다. 풍경보다 만났던 사람들의 인물사진을 우선순위에 두고 순수한 인간애를 책에 담으려 했다는 작가의 서문은 꽤나 인상적이어서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과정을 여행하는 초보 여행자일 뿐이라는 생각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나와 직업군이 다른 어느 개인이 아닌, 삶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만난 '여행 메이트'쯤으로 여겨질지도...


"죽음과 슬픔으로 가득한 도시를 떠나 당도한 서쪽 바다, 밀항을 꿈꾼 건 아니었다 네비게이션을 무시한 채 달렸고 걸었다. 딴엔 죽음이 나를 앞지르거나 따라오지 못하도록 없는 지도를 만들고 숨은 길을 찾느라 몇 번인가 바퀴가 빠질 뻔했다. 죽음이 멀미처럼 아련해질 무렵 바람이 일러준 대로 작은 포구에 도착했고 울기 좋은 방 하나를 얻어 짐을 풀었다."  (p.330)


1부 '사하라 사막에서 히말라야까지', 2부 '트럭여행과 크루즈와 캠퍼밴', 3부 '삶과 죽음, 나로부터의 결별', 4부 '섬, 천년의 기다림'으로 구성된 이 책은 차라리 한 줄 아름다운 '구도(求道)의 서(書)'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작가의 유려한 문체와 웅숭깊은 사색의 결과물이 결합되어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독서의 재미를 만끽하게 한다. 나는 한 권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내처 읽다가 마지막 장을 덮음으로써 독서를 갈무리하는 일반적인 독서가 아니라 마음에 드는 어떤 문장 앞에서 그 뜻과 의미를 오래 음미하다가 다시 책을 읽는 식으로 독서, 음미, 쉼, 독서, 음미 등 불규칙적인 독서를 이어갔다.


"욕망을 긍정한다고 타락이나 방종을 허락하는 건 아니지만 살면서 행복대신 일등이나 부자가 되려는 욕심에 눈이 멀어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여행은 그런 나를 반성하게 했다. 고통과 시련은 집 밖을 그리워 한 죄의 대가로 달게 받겠다. 그리고 깊고 따스하고 흔들림 없는 영혼을 만날 때마다 심장이 터질 듯 좋았다는 것에 감사하며 '아니오'라고 말해준 모든 이들에게도 같은 인사를 대신하고 싶다."  (p.364)


어제오늘 날씨가 초가을처럼 따사로웠다.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날씨처럼 밝았다. 그러나 우리가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지금 이 시각에도 지구 곳곳에서는 모르는 이의 불행이 우후죽순처럼 발발할 터, 우리가 그들의 눈물마저 닦아줄 수는 없겠지만 너무 티 나게 웃고 있지는 말자. 다만 언제, 어느 곳에서도 행복과 불행은 늘 함께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 나의 행복보다 너의 불행을 우선순위로 생각한다는 원칙을 지켜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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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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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 일간지의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기사의 제목부터 혐오와 차별, 증오와 냉대의 마음이 가득했다. ''성오염 물결' 맞서 광화문·국회에 '거룩한 방파제' 세운 한국 교회'였다. 사실 이 기사를 미국에서 썼다면 당장 소송에 걸리는 것은 물론 거액의 배상금으로 인해 신문사가 파산할 수도 있는 기사였다. 그리고 이 기사를 4명의 기자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조악한 기사였다. 논리도 없고, 설득력도 없는 , 한마디로 읽을 만한 가치도 없는 쓰레기 기사였다. 그럼에도 어떻게 한국 개신교의 주창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어리석은 신도들은 이들의 말에 열광하고 지지하는 것일까.


한국 교회의 성장 배경에는 독재 권력과 족벌 자본이 있다. 한국 교회가 이들 세력을 비호함으로써 그들로부터 권력과 부를 누리게 된 것은 당연했다. 목사들은 소득은 있지만 일반인들처럼 투명하게 세금을 납부하지도 않는, 치외법권적 권리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 까닭에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지 않는 정부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앞장서서 반대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포괄적 차별금지법 도입을 반대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외국인과 성 소수자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반대하는 것이다. 성 소수자를 성오염으로 표현하는 것은 지극히 편파적인 주장일 뿐이다. 오염이라는 것은 '공기나 물, 환경 따위가 더러워지거나 해로운 물질에 물듦'을 뜻한다. 그렇다면 성 소수자들도 자신의 몸에 붙은 어떤 더러운 물질을 툭툭 털어내기만 하면 다수인 이성애자로 바뀔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성 소수자는 후천적인 학습이나 타인의 권유에 의해서 형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독히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천적으로 획득되어 잘 변하지 않는 것은 또 있다. 정치적인 성향이다. 만약 작금의 상황에서 같은 논리로 소수자를 비하하고 차별하는 기사를 쓴다면 '정치오염 물결' 맞서 광화문·국회에 '거룩한 방파제' 세운 더불어민주당'이라고 써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국민의힘 지지자들은 절대적 소수이기 때문에 '정치오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렇게 표현하고 차별한다는 것은 잘못된 처사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서론이 무척이나 길었다. 대만 작가 천쓰홍의 소설 <67번째 천산갑>을 읽는 독자 중 작가와 성 정체성이 맞지 않는 사람이거나 이들을 혐오하는 독자라면 다소 언짢고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곱 명의 누나가 있는 대가족의 막내아들이자 성소수자인 작가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쓴 이 소설은 어떤 장면에서는 성 소수자의 삶을 이해하는 독자라 할지라도 때론 낯설고 이상한 기분이 들 것이다. 이성애자인 일반인이 읽기에는 말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엉덩이 냄새가 고약하다고 말하는 걸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엉덩이를 두려워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엉덩이에는 치욕감이 뒤따랐다. 어떻게 공개적으로 엉덩이를 얘기할 수 있겠는가. 변태들이나 그럴 수 있었다. 어떻게 엉덩이를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쳐 죽일 변태 놈들만 가능했다. 어떻게 엉덩이를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냄새가 고약하지 않은가? 인체의 숨결에는 수백 가지의 모습이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건 그렇게 끔찍한 일이 아니었다. 고약한 냄새는 수치스러운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심지어 사랑한다면, 고약한 냄새는 향기로 변했다. 아주 좋은 냄새가 된다."  (p.389)


<67번째 천산갑>은 제목만큼이나 특이한 소설이다. 우선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그와 그녀로 존재할 뿐 특정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동성애자인 그와 이성애자인 그녀는 어린 시절 동반 출연한 영화가 4K로 복원돼 낭트 영화제에 초대되면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설정이 이채롭다. 파리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는 동성 연인 J를 잃고 공허한 상태에 빠져 있었고, 대만에 사는 그녀는 유명 정치인의 아내로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트로피 와이프'로서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을 중심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 소설은 이름도 없는 두 주인공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흔한 모습, 이를테면 원 오브 뎀으로 끝나는 듯하지만 결국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름이 밝혀지게 된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희귀 동물인 천산갑을 키워 그 비늘을 약재로 팔겠다는 생각으로 수십 마리의 천산갑을 산 위의 집에 들여놓았는데 이상하게도 천산갑들은 어린 '그'에게만 친밀감을 보였고, 이를 우연히 목격한 매트리스 광고 감독의 눈에 띄어 '그'는 '그녀'와 함께 천산갑이 등장하는 영화에 동반 출연하게 된다. 낭트 영화제 초청작으로 선정되어 '그'와 '그녀'도 낭트에 갈 예정이었지만 '그'의 엄마와 동물을 잡으러 갔다가 그만 시간을 놓치고 만다. 수십 년 동안 헤어져서 지내던 두 사람. 동성 연인 J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영화제를 핑계로 '그녀'가 찾아온 것이다.


"그의 눈에서 물이 나왔다. 그녀는 자기 말 때문인지 아니면 꿈속에서 누군가를 보았기 때문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상관없었다. 그녀는 말을 뱉었다. 아주 오래전 그녀는 그의 몸을 가까이하면서 신호를 보냈었다. 그가 자신을 짜릿하게 해 주기를 바랐다. 그 시절 그녀는 정말 멍청이였다. 아무것도 몰랐다. 지금도 그때보다 많은 걸 알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게이미가 틀림없이 자기 아들을 짜릿하게 해 주었으리라는 걸. 게이미에게 감사해야지."  (p.470)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받는 아시아계 여성과 자신의 성 정체성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성 소수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같은 처지에 놓인 두 남녀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꽤나 신선하지만 나를 비롯하여 다수의 이성애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다. 더구나 권력과 자본에 결탁한 한국 개신교가 동성애자에 대한 지속적인 차별과 혐오를 부추김으로써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무척이나 집요하기에 한국 사회는 여전히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옆 나라 일본만 하더라도 동성결혼 접수 거부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고 있는 마당에 우리나라만 세계 질서에 맞서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소설에서 두 사람이 낭트로 향하는 여정은 그나마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려는 듯 밝은 모습이다.


"두 사람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창밖에는 큰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들의 인생은 정말 한 편의 곰팡이 핀 옛날 영화다. 필름에 스크래치가 너무 많아서 화면 전체에 비가 내린다. 내리려면 내리라지. 상관없었다. 그 어떤 기술도 없지만, 두 사람의 이 낡은 영화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p.474)


혐오는 혐오로만 남을 뿐 결코 사랑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그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거두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지금은 큰소리를 칠지언정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떵떵거리던 보수 세력이 지역 정당으로 전락한 것처럼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임을 그들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예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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