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현실에서 누리고 체감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는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생각하게 했던 하루였다. 오후에 약속이 있었던 나는 차를 운전하여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는데, 아랫배가 살살 아프고 뭔가 신호가 오는 느낌이 들어 가까운 관공서(그게 하필 도서관이었다)로 방향을 틀었다. 어렵지 않게 화장실을 찾아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뿔싸! 이게 웬일? 한 칸짜리 화장실 앞엔 이미 줄을 서서 대기하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닌가.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이었기에 나는 서둘러 다른 층으로 가 보았지만 모든 게 허사였다. 다른 층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괜히 계단만 오르락내리락하는 바람에 대기 순번만 밀렸고 나의 인내력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바닥에 신문지를 펴고서라도 볼 일을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화장실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이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자신의 배타적 권리라는 걸 기다리는 사람에게 공표라도 하려는 듯 몇 차례 노크를 해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인내력의 한계를 느낀 나는 결국 비어 있는 장애인 화장실로 뛰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밝아진 표정으로 도서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배타적 권리는 과거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 공중전화 부스에서도 심심치 않게 목격되곤 했었다. 뒤에서 애타게 자기 순번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공중전화박스를 선점한 사람이 한 손에는 동전을 잔뜩 거머쥔 채 느긋하게 통화를 할라치면 저것이 바로 배타적 권리구나,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모습을 보고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어서, "아, 통화 좀 짧게 합시다." 하면서 전화를 빨리 끊을 것을 종용하거나 험악한 분위기를 풍겨 빨리 나오라고 은근히 협박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었지만 말이다.


이런 것과는 다르게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의 화장실이나 베란다에서 공공연히 담배를 피우는 것이 마치 자신의 배타적 권리인 양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밖에 나가려면 외투를 걸쳐야 하는 겨울철이나 너무 더워서 잠시도 밖에 나가 있을 수 없는 여름철에 그런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담배를 끊은 지 만 11년이 되는 나로서도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담배연기는 참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나도 몇 번이나 관리사무실에 민원을 넣었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배타적 권리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예의나 배려의 문제이다.


자유나 평등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권리가 아닌 현실에서 체감하고 누릴 수 있는 배타적 권리는 사실 많지 않다. 그것마저도 완전한 배타적 권리가 아닌 타인에 대한 배려가 동반되어야 하는 소극적 권리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반드시 지켜야 할 법적 테두리를 벗어나 '국민 저항권'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들고 나와 제 멋대로 행동하고 난동을 피우는 사람이 늘어나는 바람에 '자유'라는 말의 가치는 이제 그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게 되었다. 난동이나 부리고 깽판을 치는 이들이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단어가 결코 아닌데 말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제 할 일은 뒷전이고 밤낮 술이나 처먹는 이가 시도 때도 없이 '자유'를 외치는 바람에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자유'의 가치는 멧돼지의 똥보다 못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비극의 시작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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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아침을 먹고 느지막이 산에 올랐다. 휴일마다 이렇게 한껏 게으름을 피우는 데는 이유가 있다. 휴일에나 있을 수 있는 여유로움을 한껏 누리고 싶은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따로 있다. 내가 평일에 아침 산행에 나서는 시각은 오전 5시 30분, 해가 길어졌다고는 해도 그 시각에는 여전히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산을 오를 때마다 등산로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고는 있지만 어둠 속에서 쓰레기를 줍는 데는 한계가 있다. 작은 비닐이나 등산로 주변의 풀숲에 버려진 쓰레기는 발견하기 어렵다. 하여 가능하다면 휴일에는 느긋하게 산을 오른다. 더구나 겨울은 쓰레기를 줍는 데 최적의 계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산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도 일말의 양심이 있는 까닭에 자신이 버린 쓰레기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나무둥치 뒤편이나 움푹 파인 곳에 버리기 일쑤여서 나뭇잎이 무성한 여름에는 이를 찾아내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반면 나뭇잎이 없는 겨울에는 여름에 비해 등산객도 줄고, 상대적으로 버려지는 쓰레기의 양도 줄어들지만 지난여름에 버려진 쓰레기를 쉽게 찾아내는 까닭에 여름이나 겨울이나 쓰레기를 줍는 양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간밤에 내린 눈이 희끗희끗 잔설이 되어 낙엽을 덮고, 등산로에는 눈석임물이 고여 군데군데 작은 물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회색 패딩을 입고 몇 발자국 앞서서 걷던 어느 할머니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선 어느 목사의 탄핵 반대 연설이 꾸준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잔뜩 흐려 갤 기미가 보이지 않고, 봄을 시샘하는 쌀쌀한 바람이 등산객의 어깨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등산로 중간쯤에 놓인 어느 벤치엔 부부인 듯 보이는 젊은 연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동공에 초점을 풀고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물멍, 불멍도 아닌 낙엽몽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어쩌면 다른 등산객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바람 소리나 새소리를 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상에 올라 잠시 쉬고 있는데 60대 후반이나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내 앞을 스쳐갔다. 퉁퉁한 체형의(그렇다. '뚱뚱한'은 아니고 '퉁퉁한') 부인이 엉덩이를 과도하게 씰룩거리면서 앞서 걷고, 바로 뒤에서 남편이 뒤따르고 있었다. 검은색 누비 외투와 바지를 입고 암적색 비니를 쓴 부인은 이따금 남편을 뒤돌아보며 꽤나 즐거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여전히 어둠을 뚫고 산을 올랐다. 사락사락 싸락눈이 내렸고, 우둠지를 흔드는 바람이 무척이나 스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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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등산로에도 오가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시나브로 계절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제법 부드러워진 새벽 공기와 짙어지는 솔내음 그리고 먹이를 찾느라 더욱 분주해진 청설모.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달라진 분위기에 한껏 상기되어 반가운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요즘에는 보이지 않는 어느 노인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삶은 그렇게 한 굽이를 돌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엊그제 읽었던 신문에서 지난해 자살로 숨진 사람이 13년 만에 가장 많은, 1만 4439명으로 2011년 이명박 집권 시기에 1만 5906명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다가 2023년 1만 3978명으로 증가하였고, 2024년에는 이보다 461명 증가한 1만 4439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닥 놀랄 만한 기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느 나라나 보수정권이 집권한 시기에는 자살로 숨지는 사람이 늘게 마련이고, 그와 같은 추세가 반영되는 건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유독 MB 집권기와 윤석열 집권기에 자살로 인한 사망자가 급증했는가 하는 문제는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정치는 실종되고, 우리 편이 아니면 적으로 간주되는 현실에서 경제인들 좋아질 리는 만무할 터, 더 이상 기댈 데가 없었던 이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화여대에서 있었던 난동을 탄핵 반대 시위로 포장하는 언론 기사에 나는 또 한 번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날건달 같은 사내들이 여학생의 멱살을 잡기도 하고 밀치며 위협하는 등 과격한 행동이 계속되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정상적인 시위로 본다는 말인가. 그것은 폭력이자 우리 사회가 용인할 수 없는 범법행위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폭도이자 현행범인 셈이다. 그런데 그들을 탄핵 반대 시위자로 포장하다니...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그렇게 인자하고 포용적인 관계로 나아갔단 말인가. 이렇게 말하면 나를 일러 '꼰대'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과거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일반인이 이화여대를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었다. 금남의 구역임은 물론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화여대 재학생을 여자친구로 둔 남학생은 교문 근처의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시정잡배와 같은 날건달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어디서든 이유도 없이 마구 자유를 부르짖는 이들이 우리 사회를 암흑의 세계로 몰아가고 있지 않나 싶다.


여당 국회의원의 아들이 강남 주택가에서 마약을 구매하다 붙잡히기도 하고, 내란 수괴 윤석열을 비호하는 세력들이 온갖 폭력적인 언사와 행동으로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요즘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까웠던 시절로 차츰 회귀하는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봄은 멀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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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꼴통 보수 전성 시대


몇 안 되는 소수일 때는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전면에 나서지 못하지만 누군가 멍석을 깔아주면 활개를 치며 거리를 활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음침한 골목 안쪽으로 숨어들던 친일 제국주의자들이 그렇고 박정희와 이승만 독재를 찬양하는 전체주의자들이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 시대의 고민거리인 은둔형 외톨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멍석을 깔아주고 우쭈쭈 기를 북돋워주기만 하면 세상 무서운 게 없는 듯 행동하게 마련입니다. 절대 들어가면 안 되는, 일반인 출입불가의 성역처럼 여겨지던 법원 건물을 향해 소화기를 던지고, 내부 집기를 부수고, 불까지 지르려고 했던 일들도 그들이 술에 취해서 혹은 마약이나 펜타닐을 먹은 후 취했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그들에게 멍석을 깔아주었기 때문에 미친 짓인 줄 알면서도 거침이 없었던 것입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나는 지난 며칠 동안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몇몇 일들만 겨우 처리했을 뿐 책을 읽지도, 글을 쓰지도 못한 채 기신기신 숨만 쉬며 보냈습니다. 한 젊은(혹은 어리다고도 할 수 있는) 여배우의 극단적 선택에 따른 충격 때문이었습니다. 소식을 접한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한 충격을 받았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나는 그 배우와 일면식도 없고 그녀를 좋아하는 팬 중 한 사람도 아니지만 앞길이 구만리 같은, 재능 있고 예쁜 어린 배우가 그와 같은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충격을 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여파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가 자신의 삶을 내려놓는다는 것, 그 마지막 선택을 결행하는 이면에는 타인이 알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갈등과 번민과 고통이 존재하겠지만 나는 그와 같은 젊음을 지나온 한 사람의 기성세대로서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워야 할 청춘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무한한 책임과 죄스러움을 함께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해외 언론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조회수 장사에 열을 올리는 우리나라 주류 언론과 그 언론에 실린 쓰레기와도 같은 기사에 자신의 더러운 감정을 배설하듯 댓글을 다는 악플러들에 대한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명예와 부를 위해 달려가는 일부 개신교 목사와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영혼 없는 청춘들의 막장 드라마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도 가물가물한 영화 한 편이 떠오릅니다. 순박한 남자 창수와 시골에서 상경하여 온갖 몹쓸 짓을 다 겪고 마침내 자신의 처지에 맞는 행복을 찾게 되는 영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입니다. 나는 비록 친구가 만화방에서 빌려 온 비디오테이프를 통하여 본 영화이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잘 반영한 영화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론과 작금의 권력이 판을 깔아 준 멍석 위에서 꼴통 보수들이 칼춤을 추는 '꼴통 보수 전성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실. 윤석열과 김건희가 각본을 쓰고 감독도 겸한 <꼴통 보수 전성시대>도 이제 그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 오를 여러 인물들을 선별해야 하는 막중한 책무를 떠안고 있습니다. 지금은 <꼴통 보수 전성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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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많이 풀렸다. 봄이 멀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한 계절과 결별하는 건 어지간히 슬픈 일이라는 걸 한 살 한 살 나이를 더하면서 깨닫게 되는 사실이다. 한 계절을 보내는 숙취의 뒤끝은 언제나 쓸쓸함이었다. 지난 계절의 잔재처럼 마음에 남았던 쓸쓸함은 새로운 계절의 정점에 이르기도 전에 말끔히 사라지곤 하지만, 새로운 계절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와 같은, 당연히 있어야 할 긍정적인 기분을 반나마 상쇄하곤 했다. 정월 대보름의 찬란했던 달빛이 짙은 어둠을 다 몰아내지 못했던 것처럼.


외국인 친구가 있는 사람이라면 실감하겠지만 그들과의 전화 통화에서의 주제는 언제나 대한민국의 대통령 윤석열에게로 좁혀진다. BTS를 배출한 국가에서, 블랙핑크를 배출한 국가에서, 기생충을 제작한 봉준호 감독을 배출한 국가에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을 배출한 국가에서 어떻게 윤석열과 같은 미친 작자를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었느냐는 게 그들의 공통된 질문이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말이 질문과 함께 따라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낯이 화끈거려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계엄 성공의 축배를 그들 손에 들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안위를 생각지 않고 국회를 향해 달려갔던 그 위대한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그들 덕분에 우리가 지켜왔던 일상을 휘청거리며 제자리로 되돌릴 수 있었고, 그들 덕분에 다 쓰러져가던 경제를 가까스로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스웨덴 작가 리사 리드센의 소설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불안한 생각을 떨쳐보려 애썼다. 이전에는 사서 걱정하는 일이 좀체로 없었다. 하지만 내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씩 무너져 내려가는 최근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문득 거울 속의 남자에게 애틋한 연민을 느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p.372~p.373)


작가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썼다.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위대한 동시에 생각으로 인해 고통을 짊어지는 동물이기도 하다. 날씨가 풀리고 겨울의 잔주름이 펴지는 시기. 나는 그 쓸쓸함의 숙취를 풀기 위해 산책을 하고 뻐근해진 다리를 욕조 속에 담근다. 그럴 때 나는 봄이 멀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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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2-15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굥은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 겁니다. 인간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기에...

꼼쥐 2025-02-16 14:26   좋아요 0 | URL
헌재 재판관들 앞에서도 꾸벅꾸벅 조는 걸 보면 그런 듯합니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