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함보다 단순함을 추구한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화려함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조금 더 발품을 팔아야 하고, 조금 더 욕심을 부려야 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만족을 더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기운이 넘치지 않고서는 화려함을 추구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겠지요. 박경리 작가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를 이따금 들춰보곤 합니다. 당신의 삶이 평탄했더라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던 작가는 삶이 문학보다 먼저라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단순함을 찾는다는 건 나이가 들었다는 뜻입니다. 화려하고 오밀조밀 귀여운 것만 탐하기에는 정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러나 녹음이 무성한 한여름에는 숲의 본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화려한 것만 눈에 띄던 젊은 시절에는 삶의 참뜻을 알기 어려운 법이지요. 기운이 없어서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가재도구와 옷가지를 겨우 갖추고 살 나이가 되면 그제야 겨우 삶의 본모습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흐리고 약하게 바람이 불던 오늘의 아침 날씨는 금세 변하여 무덥고 습한 날씨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나는 환기를 하기 위해 베란다 창문을 열면서 가볍게 부는 바람이 반가워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문득 떠올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독일 작가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소설이지요.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의 이메일로 꾸려지는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었습니다. 나는 이 소설을 생각할 때마다 삶의 쓸쓸함과 함께 서늘한 한기를 느끼곤 합니다. 그리고 소설의 형식 때문인지 헬렌 한프의 소설 <체링크로스 84번지>도 함께 떠올리는 건 나만의 습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이따금 존 버거의 소설 <A가 X에게>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나도 이제 화려함보다는 단순함을 선호하는 쪽으로 취향이 변하고 있습니다. 화려하거나 복잡한 것을 감당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어느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나이가 들면서 귀가 어두워지고 눈이 나빠지는 건 어쩌면 타인의 단점을 젊은 시절처럼 세세히 보거나 듣지 말라는 신의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온이 빠르게 오르고 있습니다. 오늘도 무더운 하루가 되겠지요. 나는 어쩌면 이 더위를 잊기 위해 다니엘 글란타우어의 소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찾아 읽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의 쓸쓸함과 서늘한 한기가 어깨 위로 가득 내려앉는 걸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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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25-07-06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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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라는데 비는 오지 않고 날씨는 그저 무덥기만 하다. 밤에도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바람도 없고 습도가 높은 탓인지 창문을 열어젖히고 선풍기를 틀어도 땀만 줄줄 흐를 뿐 조금이라도 시원해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최근에는 더위를 일컫는 말이 '불볕더위', '가마솥더위', '찜통더위' 등 많이도 생겼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그만큼 지구 기온이 급변했다는 뜻이리라.


더위로 인해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지다 보니 아침 운동을 나가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게다가 산에는 피에 굶주린 모기떼가 어찌나 극성인지 아무리 더워도 반팔 운동복을 입을 수가 없다. 그러자니 땀은 비 오듯 흘리게 되고 땀 냄새를 맡은 모기는 '옳다구나' 하면서 더욱 달려들어, 모기를 쫓으랴 더위를 식히랴 이중으로 고생을 하는 처지에 놓이곤 한다. 이런 처지이다 보니 '오늘은 운동을 나가지 말까?' 하는 유혹에 시달리는 건 당연지사, 두 눈을 질끈 감지 않으면 나는 너무도 쉽게 그 유혹에 넘어갈 것 같은 위험을 감지하곤 한다. 더위가 마냥 나쁜 것은 아니어서 한밤중에 잠에서 깨면 딱히 할 일이 없는 나는 책을 읽곤 한다. 말하자면 책 읽는 시간이 전에 비해 조금 늘었다는 점은 더위가 내게 주는 혜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백온유의 소설 <경우 없는 세계>를 읽고 있다. 가출 청소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자칫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이지만 백온유 작가 특유의 섬세한 필체로 인해 독자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돌아가는 일은 좀체 발생하지 않는다. 장면 하나하나가 다 수긍이 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는 가출 경험이라는 게 책이나 언론을 통한 간접경험일 테지만 말이다.


"어머니 지갑에 있던 현금이 떨어져갈수록 마음은 초조해졌고 남은 돈으로는 하루나 이틀 정도 버틸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슬그머니 휴대폰을 켰다. 걱정이 가득한 연락이 얼마나 와 있을지, 이쯤하고 못 이기는 척 집으로 돌아가는 게 유일한 선택지가 아닐지 생각했다. 기대와는 다르게 어머니에게서는 내가 도망친 당일에만 몇차례 전화가 왔었고 다음 날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더이상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었고 그게 아버지의 뜻이라는 걸 나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p.37)


오늘도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다. 오늘 밤에도 나는 몇 번을 깼다 다시 잠들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장마가 끝나고 시작되는 본격적인 무더위는 아직 맛도 보지 않았는데 2025년의 더위도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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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시간에 침대에서 현관문까지의 거리는 마치 천리 길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아침 운동을 아무리 오래 한 사람도 그 거리는 잘 좁혀지지 않는다. 불규칙적인 빗소리에 이따금 잠에서 깼다 다시 잠들곤 했던 나는 알람 소리를 듣고도 한참이나 갈등했다. 저 현관문을 열고 나가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맡으며 몸에 붙은 잠기운을 툭툭 털어낼 거냐 아니면 아침 운동을 거른 채 밀린 잠을 내처 잘 거냐?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것이다. 유혹은 아주 깊고 달콤했지만 나는 결국 굳게 닫힌 현관문을 열고 새벽 산행에 나섰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여전히 어두웠다. 간밤에 내린 비로 숲에선 여전히 비가 내리는 듯 나뭇잎에서 나뭇잎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천연덕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까치의 울음소리가 악다구니처럼 들렸다. 잠에 취해 좀처럼 힘이 붙지 않던 다리도 등산로 초입의 계단을 다 오를 즈음부터 생기가 돌았다. 가파른 경사로에서 쓸려 내려온 낙엽 더미가 평지의 끝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퇴비처럼 쌓여 있었다. 인근의 아파트 공사 현장에선 벌써부터 중장비 소리가 요란했다.


능선에 위치한 '산스장'에서 몸을 풀고 있는데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작년까지만 해도 하루에 한 번은 늘 만나던 사이인데 올해부터는 어쩌다 한 번 얼굴을 마주칠 뿐 좀체 만날 수가 없었던 분이었다. 성함도 알지 못하는 그분을 나는 언제나 '멋쟁이 할아버지'로 기억하곤 했다. 머리는 완전한 백발이지만 연세에 비해 풍채가 좋은 그분은 내가 산행에 나서는 그 시각에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마주치곤 했었다. 손안에 호두알을 움켜쥔 채 열심히 굴리기도 하고, 정상에 올라 손바닥을 세게 마주쳐 크게 박수를 치기도 했었는데... 그럼에도 걸음은 언제나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산스장'에서 나와 함께 몸을 풀면서 조금 힘겨워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곤 했다.


전에는 거의 매일 만나던 분의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욕쟁이 할머니'로 기억하던 분이었다. 60줄에 들어선 따님을 앞세우고 열심히 산에 오르던 분이었다. 그러나 80대 후반의 연세가 된 그분 역시 이제는 더이상 산에 오를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쇠하셨다고 했다. 따님과 함께 아파트 인근의 공원을 몇 바퀴 도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한다는 것이었다. '멋쟁이 할아버지' 역시 이제는 매일 산에 오르는 게 힘에 겨워 일주일에 한두 번 오르는 게 전부라고 했다. 매일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줘서 고마웠다며 멋쩍은 고백을 하는 '멋쟁이 할아버지'. 그분도 이제 80대 후반의 연세가 되셨다고 했다. 나는 그분께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살 날이 많이 남은 사람은 특정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이 크고,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은 미안함보다는 고마움이나 감사함이 더 큰 법이다. 내가 '멋쟁이 할아버지'에게 나도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멋쟁이 할아버지'가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내게 고마움을 고백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리라. 나도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어느 순간 미안함보다 고마움이 앞서는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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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의 생각을 스냅사진처럼 써보려 했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 순간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바로 '뇌'라는 걸 각인시키려는 듯 한 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아무런 편견 없이 그냥 그대로 옮겨보자 생각했던 나의 의도를 무시한 채 바로 그 순간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린 듯 멍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침입자에 대비한 소개명령이라도 떨어진 듯 여느 때는 잘도 떠오르던 시시껄렁한 생각들조차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럴 수도 있구나! 어느 심령술사가 내 앞에서 "레드 썬!"하고 주문을 건 것도 아닌데.


요란하던 장맛비가 그쳤다.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씻어낸 듯 대기는 더없이 깨끗했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햇살은 무채색의 보도블록에 부딪혀도 빛의 손실이 전혀 없이 그대로 반사되는 듯했다. 나는 이와 같은 극과 극의 비현실적인 변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불고 하루 종일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던 게 바로 하루 전인데, 금세 이렇게 전형적인 여름 한낮의 풍경을 연출할 수 있다고?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는 날씨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이러다가 언제 어느 순간 또 비가 쏟아질지 알 수 없는 상황.


6월도 이제 하순을 향해 치닫고 있다. 엊그제 시작한 듯한 2025년도 이미 반환점을 돈 상황. 지난 시간에는 언제나 미련과 후회가 뒤섞인다. 장례식장에선 언제나 망자에게 못해준 일만 기억되는 것처럼. 이렇게 햇볕이 투명하게 맑고 쨍한 더위가 내리쬐는데 인근 중학교의 농구장에선 어린 학생들이 더위도 잊은 채 농구를 하고 있다. 나도 저런 청소년기를 건너왔을 텐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머릿속 멍한 상태가 좀체 나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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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코앞이라는데 하늘은 여전히 맑고 화창합니다. 찌는 듯한 더위에 몇 걸음만 걸어도 땀이 쏟아지는 오후,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없었더라면 숨이 턱턱 막히지 않을까 싶은 날씨입니다. 벚나무의 우듬지에도 올봄 새로 돋은 잎들이 시들시들 말라갑니다. 쏟아지는 햇살의 열기를 이기지 못한 탓일 테지요.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름을 대비합니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 들러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퇴근 후 어스름이 지는 저녁나절, 뜻이 맞는 사람들 몇몇이 모여 달리기를 하며 무더위에 맞서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사람들을 아우르며 여름은 한껏 부풀어 갑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신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에도 장애가 존재합니다. 정신의 장애는 현대인에게 있어 아주 깊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까닭에 우리 대부분은 아마도 정신적 장애인에 속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개인별로 장애의 경중은 차이가 나겠지만 말입니다. 신체의 장애는 전적으로 한 개인에 속하는 문제이므로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미미한 편입니다. 그러나 정신적 장애는 타인과의 관계, 이를테면 사회적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까닭에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있어 정신적 장애는 신체적 장애보다 더 큰 문제로 작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스갯소리이지만 나는 지인이나 회사 동료들에게 요즘 유행하는 MBTI 검사를 일러 '정신장애 판정표'라고 부르곤 합니다. 말하자면 MBTI 검사는 정신적 장애를 판정하는 요소를 유형별로 모아 어떤 부분에 장애가 있는지를 알려주는 기준표인 셈이지요. 그것이 아주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사회가 개인 단위로 쪼개지면 쪼개질수록 장애의 정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부락 단위로 공동체를 꾸려 평생을 그들과 함께 살아가던 시절에는 개개인이 경험하는 정신적 장애 수준은 매우 낮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주 어린 시기부터 독립(고립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지만)을 경험하는 현대인들에게 정신적 장애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질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듯합니다.


주변에서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당연한 결과이겠지요. 사회적 관계에 있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고 그들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는 건 힘든 일일 테니까 말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정신적 장애의 등급에 상관없이 인간을 무작정 따르는 애완동물에게 애정을 보이는 것은 인지상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상하게도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대개 일반인보다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타인을 자신의 뜻대로 부리고자 하는 성격의 유형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만 그런가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좋게 말하면 리더십이 강한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공동체 생활에서 자신의 위치가 그에 미치지 못할 경우에는 정신적으로 늘 피폐하거나 분노와 스트레스가 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긴장과 스트레스는 애완동물과의 관계에서는 있을 수 없겠지요. 그렇다고 우리가 겪는 정신적 장애가 고쳐지는 것은 아닐 듯합니다. 사회가 고도로 발달할수록 결혼을 선택하는 사람이 적어지는 까닭도 같은 이유일 듯합니다. 정신적 장애를 겪는 사람이 같은 사람과 몇십 년 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정신적 장애가 비록 계절적 질병은 아니지만 무더운 여름철에는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인내심이 조금쯤 감소하여 나의 장애 정도가 더욱 도드라지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정신과 의사로부터 장애 판정을 받은 바 없지만 나 역시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 중 한 사람으로서 정신적 장애인임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타인에게 짜증을 내기 쉬운 여름철, 나의 장애 등급을 낮추기 위해(겉보기에 낮아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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