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렇겠습니다만 자신의 노력에 비해 과도한 칭찬을 받을 때가 더러 있습니다. 오늘 새벽 산행길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날씨가 풀리면서 산을 찾는 등산객이 늘어난 탓에 등산로에 버려지는 쓰레기의 양이 겨울에 비해 배는 증가한 듯합니다. 어차피 빈 손으로 내려올 바에는 쓰레기라도 주워서 내려오는 게 환경에도 좋고, 기분도 좋고 여러 모로 나쁠 게 없으니 나는 꽤나 오래전부터 등산로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자고 생각했었고, 아침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올 때면 양손 가득 쓰레기를 들려 있는 게 습관처럼 굳어졌습니다.


오늘도 여느 날처럼 작은 골판지 박스며, 페트병이며, 사탕 껍질이며, 사용한 화장지 등을 두 손에 나눠 들고 내려오는데 오늘 처음 본 아저씨 한 분이 나를 향해 과도한 칭찬을 쏟아내는 것이었습니다. 훌륭하시다는 둥 너무나 좋은 일을 하신다는 둥 온갖 칭찬을 늘어놓는 바람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민망하여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줍는 사람 따로 있고, 버리는 사람 따로 있느냐며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에 대한 성토를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스로 그분을 진정시키고 산을 내려오는데 절로 웃음이 났습니다. 그러나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습니다. 온종일 즐거운 마음으로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요?


"우리는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아름다움을 통해서만 삶에서 벗어난다. 그때 우리는 시간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어떤 지속을 느끼지만, 곧바로 한층 더 불투명해진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그토록 아름다운 자연조차 실은 무심하다. 들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시골길 한가운데에서도 인간은 살해될 수 있다. 그러니 피난처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두려운 일은 아니다. 진정 두려운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그 안에서 모두가 어느 정도 길을 잃고 있는 이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세상의 빛> 중에서)


크리스티앙 보뱅의 지적처럼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에서 어느 정도 길을 잃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엊그제 시작한 듯한 2026년도 벌써 두 달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다가오는 3월을 어떻게 보낼지 막막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시시각각 길을 잃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이가 들면서 나는 새롭게 맞는 날들이 특별한 감정의 소모가 없는 무던한 하루하루가 되기를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기쁘거나 너무 슬픈 또는 지나치게 화가 나는, 예컨대 평소에 비해 과도한 감정적 소모조차 견디기 힘든 나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수록 점점 쇠약해지는 기력 탓에 극심한 감정의 소모에 필요한 에너지를 미처 충당하지 못하는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정을 소모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인지 과학적으로 검증한 바는 없지만 말입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나타납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넘어가는, 이를테면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내세우지 않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사람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나는 남들에게 까칠하게 대하지 않는 수더분한 성격의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 역시 내게 일어난 큰 변화 중 하나라면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지금 창밖에는 한겨울에도 자주 보지 못하던 눈이 하얗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살았던 세세한 흔적들도 저 눈처럼 누군가의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그 기억들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욕심조차 한낱 부질없는 꿈임을 최근에야 깨달았습니다. 내가 살았던 흔적 역시 초봄에 내리는 저 눈처럼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쉽게 녹아 사라질 수만 있다면 저승으로 향하는 발길이 조금 가볍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국 작가 데니스 존슨의 소설 <기차의 꿈>을 읽고 있습니다. 100여 쪽 남짓의 얇은 소설이지만 오늘처럼 눈이 내리는 날 읽기에는 더없이 좋은 책인 듯합니다. 이 책에 대한 '추천의 글'을 쓴 정여울 작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소설에는 삶이라는 거대한 파노라마가, 인간의 부조리와 상실과 치유와 극복의 모든 서사가 담겨 있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누군가 내 귓가에 집요하게 무언가 간절한 사연을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모든 것이 다 끝난 줄로만 알았던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위대한 사랑과 희망의 목소리를.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상실의 순간에도 변함없이 시작되고, 지속되고, 항상 우리 마음속에서 끝내 살아남을, 위대한 희망과 사랑의 이야기를."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차량들이 줄을 지어 달려갑니다. 이렇게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날 우리는 잊고 있었던 어느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끝없이 불러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기쁘거나 슬프거나 행복했던 감정들을 야금야금 소모합니다. 격한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기진한 듯 나른한 피곤이 몰려옵니다. 여전히 눈은 그치지 않고 눈꺼풀의 무게만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firefox 2026-02-25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눈오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눈꽃들을 보면서 즐거웠는데, 그 여운을 꼼쥐님 글에서 다시 느껴봅니다.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꼼쥐 2026-02-25 16:59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하루 사이에 날씨가 급변해서 웬만한 눈은 다 녹아버린 듯합니다. 날씨가 어찌나 좋던지요.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설 명절 연휴가 끝난 엊그제 오후의 께느른한 시간에는 국민 전체의 눈과 귀가 지귀연 재판부로 쏠렸었습니다. 명절이나 여행은 기다리는 시간이 설레고 두근거릴 뿐 막상 닥치면 피곤함과 이런저런 스트레스로 인해 어서 빨리 끝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명절 후에 맞는 출근 첫날은 저마다의 사정을 터놓고 말하지 않아도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피곤의 그늘과 느린 발걸음만으로도 힘듦의 강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습니다. 가뜩이나 힘든 하루를 꾸역꾸역 버티고 있던 사람들에게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석열 피고인에 대한 1심 선고 생중계는 더없이 좋은 핑곗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재판정은 낯선 공간일 뿐만 아니라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가보고 싶지 않은 기피의 공간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느닷없는 비상계엄 선포와 끊이지 않는 선전 선동으로 다수의 국민을 공포에 떨게 했던 윤석열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을 지켜보는 것은 일반 형사재판을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지귀연 재판부가 내린 형량에 비해 그가 읊었던 판결문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판결문 곳곳이 논리에 맞지 않았던 것은 물론 그가 썼던 비유나 역사적 사실의 언급에 있어서도 상황에 맞지 않거나 일반인도 그 오류를 쉽게 지적할 수 있는 문장들이 여럿 등장했습니다. 국민적 관심사가 집중된 재판의 재판장으로서 그처럼 형편없는 판결문을 낭독한다는 건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워 낯을 들 수 없게 만든 장면이었습니다. 재판을 지휘하고 판결문을 쓰는 일을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닐 텐데 어쩌면 그렇게 부실한 판결문을 대중 앞에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는 어쩌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이거나 사법적 정의는 지나가는 개에게나 줘버린 못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나 아렌트의 인터뷰집 <한나 아렌트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집필한 의도 중 하나는 악惡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악마 같은 세력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깨뜨리고, 사람들이 리처드 3세 같은 엄청난 악인들에게 품고 있는 존경심을 걷어내는 것이었어요."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대체로 '악마 같은 세력이 위대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윤석열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여전히 '윤어게인'을 외치며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걸 보면 한나 아렌트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비상계엄이 성공하고 그들의 계획이 순서대로 착착 진행되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내란의 우두머리인 윤석열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고는 하지만 '악惡이 위대하다는 통설'은 여전히 유효한 듯 보입니다. 어쩌면 우리 사법부의 일부 재판관들도 '악마 같은 세력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믿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명절 연휴 뒤에 맞는 첫 번째 주말, 계절은 이제 겨울을 벗어나 봄으로 향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악惡이 위대하다'고 믿는 내란의 잔존 세력에 의해 정치적 겨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비상계엄을 저지했던 대한민국 국민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다면 '윤어게인을' 외치던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선善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믿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정치적 겨울의 한파가 그때 이후에는 조금 풀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추위가 풀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말입니다. 최근 감기 몸살을 심하게 앓았던 탓인지 대기질이 조금만 나빠져도 금세 반응이 나옵니다. 전에는 하지 않던 기침과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 등이 그런 것입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한겨울 추위가 다시 찾아오는 게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언제부터 우리는 미세먼지의 공습에 이렇듯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었는지... 풀리지 않는 과제를 강제로 떠안은 듯 한숨이 절로 터져 나옵니다. 명절 연휴 이틀째인 오늘, 하늘은 여전히 뿌옇고 흐릿합니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에세이 <세상의 빛>을 읽고 있습니다. 사실 내가 크리스티앙 보뱅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해야겠지요. 작가의 명성이나 지적 깊이보다 작가의 문장력에 쉽게 빠져드는 나로서는 크리스티앙 보뱅이라는 작가의 매력에 단박에 빠져들지 않을 재간이 없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작가의 글을 그동안 어떻게 외면하고 지낼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사회학자인 다비드 르 브르통의 글은 문학적 글쓰기를 주업으로 하는 웬만한 시인이나 소설가의 문장력 이상이었습니다. 나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는 이런 작가들은 도대체 어떤 경로로 나와 연결되는 것일까요.

"글쓰기는 보편적으로 자폐적인 성향을 지닌다. 시인은 말을 하는 자폐인이다. 텅 빈 방 안의 헐벗은 인간. 그는 자신의 빛을 붙잡고 있기에 무엇도 밝히지 못한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자신의 피부를 뒤집어 놓는데, 피부의 안쪽은 눈부신 색채들로 수 놓여 있다. 자폐는 빛줄기들이 안쪽을 향해 있는, 뒤집힌 태양이다. 겉은 매끄럽고 아무런 감각도 매력도 없지만, 그 안에는 전례 없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한 사람이 자기 안에 갇혀 있는 한, 아무것도 - 혹은 거의 아무것도 - 밖으로 발산되지 않는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을 표현하게 되면, 그 내면에서 쏟아져 나오는 광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눈부시다. 침묵하는 자폐인처럼, 시인은 글을 쓰며 자신을 묻는다. 그는 자기 안의 영광 속에서 살며, 세상으로부터는 죽은 존재다."  (p.18~p.19)

얼마나 아름답고 탁월한 시선인지요. '시인은 말을 하는 자폐인'이라는 표현도, '시인은 글을 쓰며 자신을 묻는다'는 문장도, '그는 자기 안의 영광 속에서 살며, 세상으로부터는 죽은 존재다'라는 결론도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듯한 지식이지만, 이렇게 단정적으로 또는 적확한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우리는 내심 수긍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이미 많은 작가들이 있고, 여전히 더 많은 작가들이 새롭게 유입되고 있지만 독자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작가는 한정적입니다. 그런 작가들의 면면 속에는 어쩌면 깊은 사유와 끊이지 않는 발견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설 연휴 이틀째인 하루가 조용히 흐르고 있습니다. 나는 딱히 한 일도 없이 미세먼지를 핑계로 제 몸의 살집만 불리고 있습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firefox 2026-02-17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도 행복한 한해 되세요~

꼼쥐 2026-02-17 20:2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firefox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힐 2026-02-17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늘 편안하고 무탈한 한 해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

꼼쥐 2026-02-21 15:45   좋아요 0 | URL
늦었지만 마힐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행복하고 건강한 하루하루가 이어지기를~~
 

봄이 오는 길목에서 덜컥 몸살이 걸렸다. 요 며칠 들쑥날쑥하던 기온도 문제였겠지만 새벽에 산에서 하는 운동에 더하여 저녁에 계단 오르기를 추가한 게 원인이 아닐까 싶다. 몸을 돌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갑자기 이렇게 운동량을 늘리다 보니 몸인들 과부하를 견딜 수 있었을까.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절로 생각나는 하루였다. 지나친 운동으로 면역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에서 어제는 지독한 미세먼지까지 퍼부었으니 몸살이 날 만도 했다. 점심을 거른 채 약국에 들러 몸살약을 구입했다. 저녁에는 지인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가야 하는데 걱정이다. 이렇게 한 번씩 앓고 나면 '나'에 대하여 곰곰 되짚어보게 된다. 성동혁 시인의 산문집 <뉘앙스>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사람이 지나가면 많은 종류의 감정이 남는다. 머문 시간에 비해 많은 슬픔을 남기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기억이 안 날 만큼 휘발된 얼굴 또한 많다. 무엇이 나의 삶에 더 많은 부분이었는지 간단히 설명할 순 없다. 그저 어떤 시간과 풍경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나의 기록 방식은 양과 비례하지 않는다. 한 문장이 된 시간이 있기도 하고, 한 권의 책이 된 시간도 있다. 감정만 남긴 시간은 더더욱 많다."  (p.223)


몸은 여전히 으슬으슬 춥고 어깨와 무릎에는 욱신욱신 약간의 근육통이 있다. 약을 사기 위해 약국을 향해 걷고 있는데 인도 가장자리에 텐트처럼 비닐을 치고 농산물을 팔고 있는 할머니들이 보였다. 의자에 앉아 무릎에는 담요를 덮고 있었지만 밀려오는 추위를 다 막을 수는 없었던지 무릎의 담요를 몸 위쪽으로 계속해서 잡아당기고 있었다. 행인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데 저분들은 도대체 얼마나 팔겠다고 이 추위에 거리로 나온 걸까.


그들 각자의 이름도 모르고, 거래조차 한 적 없으니 그들의 얼굴은 내 기억 속에서 며칠이 지나기 전에 휘발되고 말겠지만, 나는 그 잠깐의 스침만으로도 한아름의 슬픔을 안게 되었다. 사는 게 별것 아니라는 말은 살 만한 사람이 내뱉을 수 있는 구차한 낭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추위 속에서 들고 나온 농산물을 팔아야 하는 저 할머니들에게 그런 말은 어쩌면 배 부른 소리쯤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명절이 코밑인데 변덕스러운 날씨가 힘겹게 겨울을 나는 사람들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있는 건 아닐까? 욱신욱신 어깨가 쑤셔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26-02-06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조리 잘하세요.

꼼쥐 2026-02-12 18:44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덕분에 나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