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비가 내린 다음날의 산행은 꽤나 즐거운 경험입니다. 빗물에 토사가 쓸려 내려가 여기저기 패인 등산로며 약해진 지반으로 인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나무들, 잎이 무성한 참나무나 밤나무에서 떨어진 잔가지와 알이 여물지 않은 채 떨어진 밤송이들, 출처도 알 수 없는 고목의 삭정이들과 어디선가 밀려온 낙엽 및 여러 부산물들이 쌓여 마치 인적이 끊긴 정글 속을 걷고 있는 듯한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에 씻긴 공기는 맑고 산새들의 울음소리는 더욱 또렷합니다. 등산로를 따라 채 스미지 않은 빗물이 작은 내를 이루어 흐르기도 합니다. 나는 등산로에 떨어진 참나무 잔가지를 주워 내 몸에 달려드는 모기를 쫓는 데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면 나 역시 자연의 일부임을 자연스레 깨닫게 됩니다. 오늘 아침 산행에 나섰을 때도 그와 같았습니다. 비는 내리지 않았고, 산행을 마치고 내려올 즈음에는 반짝 해가 비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다시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지난 2~3일 사이에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한동안 비는 내리지 않고 뜨겁기만 했던 날씨가 지속된 것에 대한 한풀이라도 하려는 듯 말입니다. 최근에 읽기 시작한 슈테판 셰퍼의 소설 <내게 남은 스물다섯 번의 계절>은 가볍게 산책을 하며 읽기에는 더없이 좋은 책입니다. 책의 두께도 산책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얇고, 목가적인 분위기의 문체 역시 그러합니다. 적당히 걷고 오래된 벤치라도 보이면 잠깐 앉아 땀을 식히면서 몇 쪽을 읽고, 지루하면 다시 일어나 조금 더 걷고, 작은 나무 등걸이나 벤치가 보이면 다시 또 앉아 책을 읽고...
"내가 인생을 다시 한번 살 수 있다면, 다음 생에서는 실수를 더 많이 하고 싶다. 더는 완벽해지려 하지 않고, 더 느긋하게 지낼 것이다. 지금까지보다 조금 더 정신 나간 상태로, 많은 일을 심각하지 않게 여길 것이다. 그다지 건강하게만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더 많은 모험을 하고, 더 많은 여행을 하고, 더 많은 해넘이를 바라보고, 산에 더 많이 오르고, 강을 더 자주 헤엄칠 것이다. 나는 매 순간을 낭비 없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똑똑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물론 즐거운 순간도 있었지만,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순간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누리고 싶다. 삶이 오로지 이런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신이 아직 모른다면 지금 이 말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다시 한번 살 수 있다면 나는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맨발로 다닐 것이다. 생이 아직 남아 있다면 아이들과 더 많이 놀 것이다. 하지만 보라...... 나는 이제 85세고, 곧 죽으리라는 걸 알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죽기 얼마 전에 쓴 이 글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중요 생각이자 중심 문장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는 역시 소설의 앞부분에 이 문장을 인용 배치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한 주의 끝을 알리는 금요일이고, 여전히 하늘은 어둡고, 비가 오락가락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