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심란하거나 울적할 때면 찾게 되는 사람이 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말이다. 물론 책을 읽어도 좋겠지만 어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더러 있어서 그런 순간에는 책이란 한낱 장식품에 불과할 뿐, 마음의 양식으로서의 역할은 기대하기 힘들어진다. 심리적으로 지치거나 바닥으로 가라앉아 수면 위로 떠오르기에는 어떤 자구책도 그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어진 상태, 자력으로 물을 박차고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것이 불가능한 어떤 순간에는 사람의 힘을 빌리는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는 것이다. 부모님을 모두 여읜 나로서는 누군가에게 터놓고 하소연할 처지도 아니지만, 살아 계셨을 때도 살갑게 굴던 자식은 아니었으니 나는 어쩌면 가족보다는 오히려 피가 섞이지 않은 외부의 누군가로부터 더 큰 위로를 받으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울적하여 기신기신 영 기운을 차리지 못할 때면 나는 언제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성직자분들을 찾곤 한다. 성당 신부님이나 교회 목사님, 또는 사찰의 스님이 그런 분들이다. 그분들을 어떤 종교적 목적으로 찾았던 적은 없는 듯하다. 물론 천주교 신자를 자처하는 나로서는 어쩌다 신부님을 대할라치면 으레 몸이 굳고 예를 갖춰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모든 행동거지를 불안정하게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도 없는 산꼭대기 암자에서 도무지 내려올 생각을 않는 스님에게 어리광을 부리듯 전화를 걸 때가 많다. 스님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이다.


어젯밤에도 스님과 통화를 했었다. 말이 좋아 안부전화지, 내가 필요로 하지 않을 때는 스님께 전화를 걸었던 게 1년을 다 합쳐야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은 게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스님도 내 전화라면 귀찮은 내색을 하지 않으신다. 밤이 깊도록 스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내 귀에 얹혀 오늘까지 나를 괴롭혔던(?) 말이 있다.


"소멸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연민을 느껴야 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이 우주에 소멸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심지어 아주 강한 듯 보이는 바위 덩어리도 약하디 약한 물과 바람과 햇빛에 의해 소멸하잖아. 이 광대한 우주에서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다만 소멸하고 다시 만들어지는 데는 다 의미가 있는 거야. 그걸 잊지 말았으면 해."


시인 한정원의 에세이집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가까이에서 더러 보아왔다. 기억을 잃어가는 것. 내 조부가 그랬고, 내가 돌보던 시설의 여성들이 그랬고, 내가 존경하는 수도승이 그랬고, 이제 내 나이든 고양이가 그렇다. 순간순간 그들의 눈 속에서 빛이 꺼지고 눈동자가 멈추는 것을 목도했다. 그럴 때 그들은 아주 먼 데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시선을 나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기억을 잃으면, 사랑했다는 기억을 잃으면, 끝내 사랑을 잃는 것이라는 사실을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작금의 이 무도한 정권을 보다 못한 각 대학 교수님들의 시국선언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올여름이 그랬던 것처럼, 어젯밤 스님의 말씀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 역시 소멸할지니, 소멸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연민을 느껴야 한다는 스님 말씀을 가슴에 새기려 애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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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11-22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님의 글 속에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뜻이 담겨 있네요. 게다가 그러한 것들에 연민을 느껴야 한다는 스님의 귀한 말씀, 저도 함께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 합니다.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호명을 하면 구름 속에 숨었던 누군가가 "네!" 하고 금세 대답을 할 것만 같은, 어두운 구름이 깔린 스산한 날씨였다. 옷깃을 파고드는 소소리바람. 어제와 오늘을 분명하게 구획하려는 듯 급변한 날씨. 늦여름에서 겨울로, 또는 초가을에서 겨울로 넘어온 듯한 날씨 탓에 사람들은 꽤나 당혹스러운 듯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 햇빛 한 점 없이 어두운 하늘을 보며 나는 올 한 해도 다 갔구나, 하는 푸념을 긴 한숨과 함께 뱉었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학가의 시국 선언이 줄을 잇고 있다. 국민들의 인내심이 점점 임계치에 이르고 있다는 신호가 아닌가. 모 대학의 시국 선언문 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 중에는 나의 오랜 친구도 끼어 있지만 사실 대학 교수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가 보수적인 성향이 일반적이고, 일부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직위를 걸 정도의 위험한 도박은 결코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전면에 나섰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의 권력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올여름의 더위가 하루아침에 급변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징후를 감지하고 앞에 나설 수 있는 지식인이 존재한다는 건 한없이 가라앉던 우리나라에게도 약간의 희망이 존재한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미약하지만 다시 되살릴 수 있는 희망의 불씨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그동안 붙잡아왔던 절망과 자조의 끈을 과감히 놓아야 한다.


어제는 비가 내렸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었다. 그들의 목소리도 시국 선언을 하는 대학 교수들의 뜻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국가 경제는 나날이 기울고, 한반도의 전쟁 위험은 나날이 증가하고, 공정과 상식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저소득층과 서민을 위한 대책과 복지는 나날이 감소하고, 오직 내 편 나를 위해 충성하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이 정권의 비열함에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러 나라가 기대고 있고 또 열심히 전파하는 창건 신화에 익숙해요. 점령한 권력에 대항한, 귀족과 교회의 압제에 대항한 영웅적 투쟁의 신화, 피를 흘려 자유라는 약한 식물을 기른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투쟁의 신화. 그러나 르낭은 그런 투쟁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르낭은 나라로 존재하려면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우리나라가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기 위해 항상, 매일, 작은 행동과 생각, 또 큰 행동과 생각에서 우리 자신을 속여야 해요. 위안을 주는 잠자리 동화를 늘 반복하듯이." (줄리언 반스의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의 대통령이 취임한 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나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국민 대다수가 '항상, 매일, 작은 행동과 생각, 큰 행동과 생각에서 자신을 속여'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대통령이 공정과 상식을 실천할 거라고.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거짓을 진실인 양 끝없이 속여 온 덕분에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고 건재한 것인지도 모른다. 위태위태하지만 쓰러지지는 않은 채.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호명을 하면 구름 속에 숨었던 누군가가 "네!" 하고 금세 대답을 할 것만 같은 날씨가 종일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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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4-11-17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경희대 교수님들의 시국선언문을 읽고 먼가 울컥했었습니다! 빗속에서도 촛불을든 시민들을 보면서 미안하고,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이제는 절망과 자조의 끈을 놓고 새로운 희망을 실현해야 할 시간인것 같습니다! 좋은글 보고 힘내서 저도 열심히 새 희망을 외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ㅎ

꼼쥐 2024-11-19 15:18   좋아요 1 | URL
경희대 교수님들의 시국선언문은 조금 특별했죠. 저도 읽어보았습니다. 감동적이기도 했고 말이죠. 어쩌면 이게 시작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지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우려했던 일이 막상 현실로 나타났을 때, 생각보다 약한 결과에 저으기 안심할 때가 더러 있다. 그것은 마치 약하게 고소공포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번지 점프대에 올라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느꼈던 극한의 공포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뛰어내리고 나면 '에이, 별것도 아니네'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과 흡사하다. 우리는 이렇듯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과도한 걱정과 근심을 안은 채 전전긍긍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이와 같은 경험을 얼마나 많이 겪게 되는 것일까. 우리 앞에 어차피 닥칠 불행이라면 그 결과를 미리 걱정하고 고민할 게 아니라 지금의 현실을 충실하게 즐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손에 떠밀려 번지 점프를 하게 될 테고 공중에 매달린 채 별것 아니라며 안심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수능을 치른 학생들의 홀가분한 표정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물론 자신의 마음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조정하거나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결과로 인해 밤잠을 설칠 정도로 걱정과 근심에 싸여 있다면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한 치 앞의 일도 미리 알 수 없는 청맹과니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2년 전 우리가 이렇게 무식하고, 무례하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으리라고 누가 예측이나 했을까. 그러나 결과는 그렇게 되고 말았고, 그를 찍었던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자괴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게 되지 않았던가. 그러려니 하면서 말이다.


하물며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라는 미국은 어떠한가. 절제가 불가능한 망나니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다시 뽑지 않았던가. 이렇듯 세상에는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거나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 일은 다시 또 반복적으로 일어나고야 말 테니까 말이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명 박사나 천공의 예지력 덕분이려니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게 오히려 속 편할지도 모른다. 장은진의 장편소설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가 문득 떠오르는 금요일 오후. 다음주부터 기온이 떨어진다는데 걱정...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주말은 주말처럼 즐겨야 하지 않을까.


"거리를 걷다 문득, 나는 이게 우리의 마지막 축제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광란의 축제도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 있다. 시끌벅적한 축제 뒤에 남는 건 쓸쓸함과 허전함이다. 축제가 끝나면 마술처럼 풀렸던 금기는 마술처럼 다시 시작될 것이다. 어쩌면 축제의 뒤끝을 감당하지 못한 광기 들린 자에 의해 금기의 벌이 내려질지도 모른다. 광란의 밤이 어떤 자를 광란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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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11-15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이 참 요지경입니다.

꼼쥐 2024-11-16 14:57   좋아요 0 | URL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는 요지경이지요. 점점 그 임계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일주일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전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던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제47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지지율 20%를 밑도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와 기자회견도 있었다. 겨울 모드로 변한 날씨의 변화도 우리에게는 중요한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굵직굵직한 뉴스 때문인지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으로 들떴던 문학계의 열기는 다소 누그러진 분위기였다. 이런 어수선함 속에서 2024년 한 해도 저물고 있다.


군에 입대한 아들이 휴가를 나왔었고, 남자들에게 첫 휴가가 늘 그렇듯 집에서 잔 날보다 친구 혹은 선배의 자취방에서 자고 들어오겠다는 연락을 몇 번인가 받았고, 취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서둘러 제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곤 했다. 명태에 붙은 균의 소식이 서결이와 거니의 소식보다 더 빠르게 텔레비전 뉴스 화면을 장식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다들 말을 잊은 채 혀만 끌끌 찼고, 한 나라가 이렇게도 망할 수 있구나, 하는 탄식이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왔다. 나라의 꼴이 말이 아니라는 건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알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바닷가의 루시>를 읽고 있다. 나는 이미 작가의 소설 몇 권을 읽어보았는데, 그녀의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다른 세상에 떨어진 느낌이 들곤 했다. 내가 속한 현실과 유리되어 작가가 꾸며 놓은 조용한 세상에 뚝 떨어진 듯한 느낌은 책의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들었던 것이다. 7살 소녀 앨리스가 토끼굴을 타고 떨어져 이상한 나라에 도착하는 것처럼. 독자들이 스트라우트 소설에 매료되는 까닭은 바로 그 지점이 아닐까 싶다. 자신이 속한 시끄러운 세상으로부터 한 발 물러설 수 있다는 점.


"좋은 날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훌륭한 생활은 하기 힘들다. 감각으로만 경험한 좋은 날들로 이루어진 삶은 충분하지 않다. 감각의 삶은 탐욕의 삶이다. 감각의 삶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반면에 영혼의 삶은 더 적은 것을 요구한다. 시간은 풍요롭고 그 흐름은 달콤하다. 책을 읽으면서 보내는 하루를 좋은 날이라고 부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보내는 삶은 훌륭한 삶이다. 십 년, 이십 년 동안 과거의 다른 날과 거의 똑같은 날은 결코 좋은 날이 아니다."  (애니 딜러드의 '작가살이' 중에서)


주중에 잠시 쌀쌀했던 날이 있었지만 아름다운 가을 풍경이 동화처럼 이어지고 있다. 다음 주에는 수능일이 있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잔잔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선택할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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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좋았던 하루였다. 금방이라도 단풍이 들 것만 같은 투명한 바람이 햇살과 어울려 어울렁더울렁 춤을 추는, 혹은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햇살이 시간 가득 풀린... 지칠 줄 모르는 아이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 미끄러질 듯 맑은 하늘에 이따금 구름이 떠가고 어디선가 들리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구름을 쫓아 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휴일을 반납한 채 대통령 탄핵 집회에 나갔던 하루이기도 했다. 화려한 가을볕이 이울고 마침내 저녁 어스름이 안개처럼 깔리는 시간. 사람들이 세상을 뜨는 까닭은 남겨진 사람들의 가슴에 침묵을 남겨주기 위해서임을 나는 최근에 말 대신 차라리 한줄기 눈물을 택한 10.29 참사 유족들을 통해서 배웠다. 가까웠던 사람들은 그렇게 쉼 없이 내 곁을 떠나가는데 가슴 한켠 침묵의 공간은 왜 이다지도 넓어지지 않고 속절없이 지워지는가. 침묵은 인간 슬픔의 정점. 언어를 잃고, 울음을 잃은 사람들이 마침내 다다르는 슬픔의 설원. 그리하여 침묵은 어떤 울음보다 더 힘이 세다.


어둠을 향해 건네는 침묵의 시선은 무심하다. 무심하다 못해 때론 허허롭다. 현명함이란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의 길지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 삶의 영역에서 한 계단 더 내디뎠을 때나 발견할 수 있는, 찰나의 기쁨이 아닌가. 사이토 다카시의 저서 <내가 공부하는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현대인은 유난히 고독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휴대 전화나 인터넷을 통해 다른 사람과 쉴 새 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고독을 느끼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반면 공부는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혼자서 몰입하는 고독한 작업이다. 사람 때문에 느끼는 것이 아닌, '충실한 고독'이라고 할까. 함께 공부를 할 동료를 만날 수도 있지만 결국은 혼자의 힘으로 가는 것이 공부다. 공부에 몰입하는 동안은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배움이 주는 즐거움에 빠지게 된다. 공부하는 삶을 살게 되면 나만의 공부에 빠져들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이 반갑게 느껴진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대통령을 불신임하고 있다.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만 모르고 있는 듯하다. 이 가을, 하야하기에 얼마나 좋은 시기인가. 본인을 위해서, 그리고 국민 모두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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