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통찰, 철학자들의 명언 500 - 마키아벨리에서 조조까지, 이천년의 지혜 한 줄의 통찰
김태현 지음 / 리텍콘텐츠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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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심란하고 복잡할 때는 뭔가 집중하여 생각을 깊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주제 혹은 하나의 문장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생각할 거리가 필요한 셈이다. 용맹정진을 하는 스님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삼매에 빠져들지 않더라도 말이다. 생각을 단순화하고 잡생각에 빠지지 않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하나의 주제나 문장에 몰두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달아나려는 생각을 붙잡기 위해 스님에게는 화두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그럴 때 우리는 평소 맘에 담았던 어느 철학자의 경구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철학자의 저서 한 권을 통째로 이해한다는 건 나와 같은 지능으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니 기회가 될 때마다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 겨우겨우 이해하는 게 그나마 앞으로의 삶에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053 당신이 무엇을 가졌는지, 어떤 사람인지,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당신의 행복과는 상관이 없다. 행복과 상관 있는 것은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It isn't what you have, or who you are, or where you are, or what you are doing that makes you happy or unhappy. It is what you think about."  (p.35)


인문학자이자 지식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김태현 작가의 저서 <세상의 통찰, 철학자들의 명언 500>은 이따금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때 유용한 책이다. 자신의 삶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강물에 떠밀려 흘러가듯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작정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 또는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의문이 들 때 책의 어딘가에서 자신에게 맞는 문장을 골라 사색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책은 저자가 선별한 각각의 주제에 어울리는 철학자 몇몇을 각각의 장에 배치하여 우리의 삶 전반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와 고민거리를 그때그때마다 적기에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제1장 '삶과 처세에 대한 통찰', 제2장 '사유하는 인간에 대하여', 제3장 '대문호들이 던지는 철학적 교훈', 제4장 '생각의 폭발을 이끈 동양의 철학자들'로 구성된 이 책은 세네카와 같은 고대 로마의 철학자에서부터 프로이트와 같은 비교적 우리 세대와 가까운 철학자들을 아우르고 있으며, 괴테나 칼릴지브란과 같은 대문호와 루쉰이나 법정스님과 같은 동양의 현자들의 생각도 담고 있다. 이처럼 시대를 아우르고 동서양을 섞음으로써 우리의 생각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하고 있다.


"379 젊은 영혼들이 내 눈앞에 우뚝 서 있다. 그들은 벌써 거칠어져 있거나, 거칠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들, 피 흘리면서 아픔을 견뎌내는 영혼을 사랑한다. 내가 인간 세상에 있음을, 인간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年輕的靈魂在我面前延立着. 他們已經從粗糙尖銳起來. 可是我, 他們洗血, 痛苦的靈魂. 我在人間, 人間, 住在感覺."  (p.182)


요즘 산에는 아카시아 꽃이 피고 있다. 아카시아 꽃의 달콤한 향기를 맡으며 책에서 발견한 한 문장을 화두 삼아 깊은 사색에 빠져들다 보면 멀게만 느껴지던 정상까지의 거리도 힘든 줄 모르고 다녀올 수 있지 않을까. 규칙적으로 들리는 멧비둘기의 울음에 박자를 맞춰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산의 정상, 발아래 펼쳐지는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한 줄기 바람에 땀을 식히노라면 사는 게 별것 아니라는 생각도 절로 들 것이다.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 낸 결과입니다. 비슷한 파장의 사람들이 잘 모이듯, 깊은 통찰력을 지닌 사람과 가까워지려면 본인부터 먼저 삶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어려울 것 없습니다. 결국은 우리 모두가 철학자입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p.231 '마치며' 중에서)


오늘은 어버이날. 두 분 부모님 모두 세상을 떠난 까닭에 본의 아니게 고아 아닌 고아가 된 나로서는 생각이 많아지는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다. 일을 하다가도 툭툭 생각이 끊기고, 그리움인지, 죄스러움인지 제대로 알 수 없는 감정에 때론 목이 메고, 하염없는 생각에 넋을 놓는 일도 다반사. 그렇게 긴 하루를 보내고 나면 피곤에 지쳐 잠이 들 것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새벽 산길을 걷고 있을 테다. 삶은, 생명을 유지하는 자의 일상은 그렇게 또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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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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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 분야, 그것도 정치 분야의 도서에 대한 리뷰는 언제나 그 시작이 어렵다. 그렇다고 다른 분야의 도서에 대한 리뷰는 늘 쉬운가 하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어렵기는 매일반이지만 상대적인 어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후속작인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기고자 했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사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읽었을 때는 결국 리뷰를 남기지 않았다. 어쩌면 쓰지 못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인지도 모른다.


저자들은 2021년 1월, 선거에 패배한 트럼프 지지자들의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을 시작으로 촉발된 선거 결과에 대한 불복과 이로 인한 미국 민주주의 급격한 후퇴를 바라보면서 공고하게만 보였던 민주주의 체제의 약점과 허약성을 발견하는 과정을 다른 여러 나라의 사례를 들어 제시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결론으로 마무리한다. 그와 같은 의견 제시에 대한 논거로 미국의 헌법과 선거 제도를 살피고 프랑스, 헝가리, 태국 등 민주주의를 추종하는 국가에서 극단적 소수를 가진 소수가 어떻게 상식적인 다수를 지배하게 되었는지를 심층적으로 파헤친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세력의 배후로 민주주의 원리주의자들, 즉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과 낡은 민주주의 체제를 들고 있다.


책에서 저자들은 민주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선거 결과에 승복하고 권력 쟁취를 위해 폭력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평화로운 권력 이양과 정당한 경쟁을 유도하고, 같은 진영이라고 하더라도 민주주의 기본 원칙을 파괴하는 극단주의 세력과의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민주주의 기본 원칙을 준수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 책이 과연 미국 정치인이나 국민들을 위해 쓰인 것인지 아니면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쓰인 책인지 헷갈릴지도 모르겠다.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질서 정연한 소수의 지배를 꿈꾸는 대한민국의 보수 정치인들의 양태를 너무나 잘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는 때로 정치 싸움에서 다수를 좌절하게 만들거나 일시적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이러한 일은 민주주의 정치에서 일반적인 협상을 통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소수가 '계속해서' 거대 다수를 이기거나 정책을 강요하는 것, 나아가 그 시스템을 이용해서 자신의 우위를 굳건하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그곳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소수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p.247)


그러나 책의 원제인 [소수에 의한 폭정(Tyranny of the Minority)]은 장구한 역사에 있어 일시적인 현상일 뿐 항구적이거나 영원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물체의 열적 상태 또는 무질서도를 나타내는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는 쪽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즉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는 시스템의 무질서도가 크고, 에너지가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며,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는 시스템이 더 질서 정연하고, 에너지가 특정한 형태로 집중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민주주의 발전에 등치 시키면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제도의 무질서도가 크고, 권력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반면 민주주의 발전 단계가 낮으면 제도가 더 질서 정연하고, 권력이 특정한 형태로 집중되어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자연계에서 엔트로피는 결코 감소하지 않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민주주의 제도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책에서 저자들은 정치적 소수를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도입되는 반다수결주의적 제도들에 숨겨진 소수의 독재에 대한 위험성을 끝없이 제기한다. "민주주의는 몇몇 반다수결주의 제도 없이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나 반다수결주의 제도가 지나치게 만연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대목처럼 극단적 소수에 의한 지배를 꿈꾸는 사람들은 획일적이고 단조로운, 극단적으로는 하나의 의견밖에 없는 전체주의적 사고를 지향한다. 그러자면 언론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윤석열 정권이 끝없이 언론 통제에 공을 들였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러나 자연계의 일반 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역사는 진행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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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 나는 외출을 반납한 대신 고요함을 선물로 받는다. 가물었던 대지에 비가 내렸고, 하늘은 종일 어두웠다. 아파트 화단의 마가목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어른 키보다 조금 더 자란 마가목은 우듬지에 흰 꽃을 소복소복 매달고, 무늬가 특별한 잎을 과하지 않게 피웠다. 식물의 성장은 이따금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잎보다 먼저 붉은색 꽃을 화려하게 피웠던 박태기나무도 시나브로 꽃은 사라지고 잎만 무성해졌다. 화단은 이제 화려한 철쭉이 그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 한동안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아마도 철쭉과 영산홍이 되지 않을까 싶다. 화단의 여러 식물들이 하염없이 젖어드는 모습을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베란다창에 흘러내리는 빗줄기도 어른어른 굵어졌다 가늘어지기를 반복하고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었다.


하릴없이 시간만 축내는 걸 알았는지 몇 권의 책이 선물처럼 날아들었다.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얼마 전에 쓴 리뷰에 대한 보상으로 표지가 아름다운 양장본 도서를 보내주었다.




그렇다. 폴 오스터의 소설 <바움가트너>이다. 뒤적뒤적 몇몇 페이지를 다시 읽어보아도 폴 오스터는 정말 글을 잘 쓰는 작가다. 그 사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위대한 개츠비> 출간 100주년에 맞춰 나온 책이다. 유혜경 역자의 번역으로 소담출판사에서 출간한 이 책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위대한 개츠비'를 처음 읽었던 게 언제였는지...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고 리뷰를 썼던 게 언제였는지... 그 모든 게 아득하기만 하다.










윤두열 작가의 신작 <우리는 모두 아름답게 사라지는 거야>를 읽고 리뷰를 올린 게 엊그제인데 작가님이 나의 리뷰를 읽고 댓글과 함께 선물로 책 한 권을 보내셨다. "우연은 인연으로. 마음을 담아."라는 문구와 함께 친필 사인이 책의 앞장에 담겼다.








나는 갑자기 날아든 책 선물로 책 부자가 된 느낌이 들었다. 비는 그쳤지만 저녁 어스름과 함께 고요가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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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아름답게 사라지는 거야
윤두열 지음 / 우연은인연으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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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시시하다'는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시시하다. 시시하다. 시시하다.' 이렇게 몇 번을 되뇌다 보면 멋진 시구가 술술 풀려나올 것만 같고, 세상 심각하게만 여겨지던 일도 '그까짓 거' 하면서 툭툭 털고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이보다 더 좋은 만트라도 없을 성싶지만 어떤 종교도 '시시하다'는 말을 경전에 넣을 리는 만무할 터, 나는 이 말을 바지 뒷주머니에 허술하게 찔러 넣었다가 언제든 필요할 때면 용돈처럼 꺼내 쓰곤 한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어느 명사의 연설을 들을 때도 나는 '시시하다'는 말을 입속에서 굴리며 엄숙한 시간을 이겨내곤 한다. '시시하다'는 말을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몇 번을 굴리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눈 쌓인 경사면을 내려오는 어느 개구쟁이의 눈썰매처럼 빠르게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바라보고 마주치는 모든 순간들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사소한 사건도 중요해질 것이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될 거예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지 마세요. 방법을 알려드렸으니, 그냥 하시면 됩니다. 그럼 정말 그렇게 될 거예요."  ('마지막 순간' 중에서)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과거 어느 시기에 나는 포토 에세이에 한동안 빠져 지냈다. 변종모나 이병률 등 이 분야의 대표적인 작가뿐만 아니라 사진이 반 이상을 차지하는 여행 에세이도 무작정 사서 읽었다.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멋진 풍광의 사진과 그 한 켠을 차지하는 달큰한 글귀가 메말라가는 감성을 자극하곤 했다. 팍팍하고 메마른 현실을 살아가는 나에게 작은 도피처를 제공하고 때로는 깊은 위로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삶의 한 시기가 훌쩍 지나고 나는 한동안 포토 에세이와 담을 쌓은 채 살았다. 일부러 피했던 건 아니다. 책에도 유행이 있는지 이상하게도 그 많던 포토 에세이가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다. 윤두열의 포토 에세이 <우리는 모두 아름답게 사라지는 거야>가 반가웠던 건 과거의 기억이 아련하게 되살아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강으로 향하는 길에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면서, 오늘 노을은 좀 아쉽다고 말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이토록 멋지고 완벽한 곡선을 만났으니까. 우리의 삶과 인생은 때때로 이런 선물을 받는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줄기에 옷과 양말이 젖어도 기쁘게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연을 여러 번 겹치고 포개어 인연으로 만드는 일을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사랑스러운 사람들' 중에서)


사진이 주는 감성은 여러 갈래로 뻗어간다. 힘들고 외로웠던 기억으로 이끌기도 하고, 세상 모든 것을 손에 쥔 듯한 벅차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이끌기도 한다. 한 페이지를 넘겼을 때 십수 년 전으로 회귀하게도 하고, 오지 않은 먼 미래를 꿈꾸게도 한다. 말하자면 포토 에세이는 독자의 나이와 감정을 제멋대로 휘저어놓는다. 윤두열의 에세이 <우리는 모두 아름답게 사라지는 거야>를 읽는 동안 나는 사진에는 없는 쨍한 추위와 휘몰아치는 바람과 꿈꾸는 듯한 햇살과 침잠하는 어둠을 읽었다. 나의 시선은 한 장 한 장의 사진에 오래 머물고, 끝없이 서성였다.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성공을 꿈꾸고, 부족함을 채우려는 부지런한 사람들 사이에 자꾸 나를 데려다 놓는다. 바쁘고 싶지 않은데, 바빠야 잘 산다는 착각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지내고는 있지만 충전이 없으면 방전은 당연하다는 것을 깨닫는 밤. 비록 성과는 없을지라도 성취는 있길 바라면서."  ('성취' 중에서)


발 디딜 틈 없는 만원 지하철에서 내린 젊은이의 축 처진 어깨를 볼 때마다 나는 '시시하다'라는 말을 달빛 뒷면에 큼지막하게 써서 용돈 대신 그의 뒷주머니에 찔러 주고 싶은 심정이다. 자신의 반지하 자취방 좁은 창문으로 스며드는 여린 달빛에 기대어 '시시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사는 게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을까. 낡은 출근 가방에 챙겨 넣을 서류 뭉치와 함께 달빛에 딸려 온 작은 용기도 그곳에 잘 갈무리하면 내일 아침 출근길 발걸음은 조금 더 가벼워지지 않을까. '시시하다. 시시하다.' 주문처럼 몇 번 되뇌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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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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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아름다움에는 3할의 기쁨과 6할의 슬픔, 그리고 잡다한 불순물이 1할쯤 섞여 있다는 것을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순도 100%의 기쁨이나 100% 슬픔을 지닌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비로소 알았다. 뿐만 아니라 각자가 속한 연령대에 따라 아름다움이 발산하는 구성 성분을 각각 다르게 인식한다는 것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창작자 역시 그가 발견한 아름다움의 질료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우리가 아름다운 풍경이나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누군가는 웃고, 또 다른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문학작품은 현실 세계의 이면을 드러내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 피상적 관찰에 불과한 현실에서의 삶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는 일, 어쩌면 그것이 문학이 추구하는 시대적 소명일지도 모른다. 최근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정대건의 소설 <급류> 역시 사랑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려 애쓰지만, 우리가 현실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사랑의 소용돌이와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채로운 인간의 감정을 심도 있게 추적하기도 한다. 사랑이 아름답다는 건 상상에서나 존재하는 피상적인 개념일 뿐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사랑은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선에 따라 충만한 기쁨일 수도 있고, 지저분한 슬픔의 잔해일 수도 있음을 작가 정대건은 자신의 소설을 통해 증명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p.100)


소설은 계곡과 저수지로 유명한 '진평'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열일곱 살의 도담은 도시에서 전학을 온 해솔에게 한없이 끌린다. 게다가 물에 빠진 해솔을 구하기 위해 겁 없이 뛰어들었던 도담은 결국 베테랑 소방대원인 도담의 아버지 창석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살아나게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도담과 해솔은 급격히 가까워진다. 창석으로부터 수영을 배우게 된 해솔과 그 모습이 그저 반가웠던 해솔의 엄마 미영. 남편을 잃고 아들과 함께 외지로 이사를 온 미영 역시 창석의 다정한 모습에 반해 부쩍 가까워진다. 창석의 아내 정미는 잦은 병치레로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도담과 해솔은 풋사랑의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도담의 친구 희진으로부터 창석과 미영에 대한 소문을 듣고 아빠 창석에 대한 의심과 미움이 쌓여가던 도담은 어느 날 밤 창석과 미영이 폭포 호수에서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도담과 해솔은 랜턴을 들고 폭포로 향했고 그곳에서 두 사람을 발견하자 랜턴을 켜게 된다. 그리고 물로 뛰어든 미영을 구하기 위해 창석마저 급류에 휩쓸리고 두 사람은 결국 사망한 채 발견된다. 엄마를 잃고 진평을 떠난 해솔은 할머니와 함께 자란다. 아빠를 잃은 도담은 진평을 떠나지 않은 채 건강을 되찾은 정미와 함께 지낸다. 해솔의 소식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도담과 도담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해솔. 그렇게 끝날 것 같은 인연은 두 사람이 대학을 간 후 극적으로 재회한다. 약학과에 진학하여 약사가 되고자 하는 해솔과 물리치료사를 꿈꾸는 도담. 그들은 그동안의 결별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상대방에 대해 집착하고 탐닉한다. 그렇게 두 사람의 불안한 사랑이 이어지는데...


"해솔과 얽힌 사연 때문에 연상되는 슬픔. 같은 상처를 가진 동질감. 연민이다. 우리가 보통 지독한 인연은 아니지. 해솔과의 재회에 운명 같은 단어가 연상되는 건 우연에도 인과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의 습성 때문이다. 추억 때문이다. 좋았던 날들에 대한 반가움과 지나가 버린 한때에 대한 슬픔일 수도. 이성에 대한 열정? 호르몬 작용은 진작 끝났다. 소식이 궁금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그런 때도 분명히 있었다. 마음의 불씨는 전부 사그라져 버렸다. 완전한 전소. 남은 거라고는 그을린 자국과 탄내 가득한 폐허."  (p.226)


해솔과 도담의 불안한 사랑은 결국 도담의 엄마인 정미의 개입으로 인해 끝이 나고, 서로에 대한 소식도 모른 채 한동안 세월만 흐른다. 소방서에서 의무 소방대원으로 군생활을 한 해솔은 한강에 투신한 학생을 구조하는 등 자신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고 위험을 향해 뛰어든다. 그리고 해솔은 결국 약사가 아닌 소방서의 구조대원이 된다. 물리치료사가 된 도담 역시 틀에 박힌 일상에서 떠돈다. 그들이 서른 살이 된 2018년의 어느 날 불길을 뚫고 빌라 안으로 들어갔던 해솔이 자신의 동료가 보이지 않자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도담은 여유롭게 헤엄치며 웃었다. 자유롭다. 내가 얼마나 수영을 잘했던가.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있을지 모를 미래에도 목매지도 않으면서 진정으로 살고 싶어졌다.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거센 물살을 헤엄치듯이."  (p.295)


정대건의 소설 <급류>가 갖는 유일한 단점은 책을 읽는 독자들의 감정 소모가 극심하다는 것일 테다. 물론 소설의 흡입력이 워낙 커서 자신도 모르게 소설 속으로 빨려들게 되고, 그렇게 공감하며 읽다 보면 나른한 피로가 몰려오는 것이니 그것을 꼭 단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것은 왜 이 소설의 결말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느냐 하는 점이다. 나만 이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쩌면 나는 비극에 너무 익숙해져 있고, 이와 같은 부류의 소설 결말은 당연히 비극으로 끝나야 한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나 통속적인 독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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