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내믹 코리아
정주식 외 지음 / 사계절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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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도 이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아는 뉴스 맞춤형 시대가 되고 말았다. 플랫폼이 알아서 영상을 추천해 주는 유튜브 알고리즘 덕분(?)이다. 자신의 성향이나 정치이념에 맞지 않는 뉴스나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 불리한 뉴스는 애시당초 뉴스 취급도 받지 못한다. 정치 양극화 현상이 심화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그와 같은 추세를 반영하듯 평소 정치 뉴스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던 많은 국민들에게도 강제적으로 어느 한 편을 선택하도록 종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온라인에서 그치지 않고 실생활에서도 극단적인 편 가르기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과는 업무 외에는 사적인 말조차 건네지 않으려는 모습을 볼 때마다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갈수록 개별화되는 플랫폼 알고리즘 속에서 하나의 사안을 두고 같이 고민하고 토론하는 콘텐츠는 사라져간다는 것, 도파민 ROI 시대에 뉴스의 가치는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다는 것, 이 같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정확히 민주주의의 지향과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 토론자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인정투쟁은 명예와 명성을 추구하는 데 반해 주목경쟁은 사람들의 관심 그 자체를 좇는다는 박권일의 지적과 정치인들이 숙성시킬 시간이 없이 콘텐츠의 전반적인 질을 떨어뜨린다는 정주식의 지적 역시 이 가설을 지지한다."  (P.43)


'통치자나 정치가가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고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시티는 일'을 일컬어 우리는 '정치'라고 한다. 그러나 현 정부와 집권 여당은 사회 구성원의 의견을 조율하고 통합하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더욱 갈등을 부추기고 반목과 대립을 조장하는 데 힘을 쏟았다. 야당과 시민단체를 향해 반국가 세력이라고 몰아붙이는가 하면 자신들을 향한 극렬 지지자들에게는 권력으로 비호할 수 있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얻은 효과는 분명했다. 국민들을 이념적 내전 상태로 치닫게 함으로써 피아의 구별을 용이하게 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현 정부와 집권 여당의 목표였는지도 모른다.


"12월 3일 그날 밤의 사건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누군가는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환호했고 누군가는 민주주의의 허약함에 좌절했다. 희망과 좌절을 냉정하게 파악할 때 허약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그만큼 소중히 키워가야 할 우리 민주주의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다. 이 토론에 없는 것은 근거 없는 낙관과 희망 없는 비관이다."  (P.397)


2022년 봄 '토론의 즐거움'이라는 이름의 모임으로 치유 모임처럼 만나 2025년 1월까지 140여 회의 토론을 이어가고 있다는 그들. 정주식 칼럼니스트를 비롯하여 <지금은 없는 시민>의 저자 강남규, <소수의견>을 썼던 박권일, CBS 뉴미디어 <씨리얼>의 신혜림 PD, <글쓰기의 최전선>을 쓴 은유 작가, <한겨레21>의 이재훈 편집장, 장혜영 전 국회의원이 그들이다. 책에 실린 13개의 테마, -'도둑맞은 집중력'과 뉴스의 위기, '죽은 개가 돌아왔어요' 복제견 찬반논란, 양당제를 돕는 중도정치의 역설, 정치인 향한 테러가 끊이지 않는 이유, 인구 문제를 과장함으로써 은폐되는 것들, 카리나는 몇 살부터 연애하면 됩니까?, 진보정치는 왜 망했을까?, 영피프티는 언제까지 젊을까?, 거부권 중독 윤석열 대통령의 심리 상태, 대한민국이 양궁협회처럼 운영된다면..., 사람들이 <흑백요리사>에 열광한 이유,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계엄국과 응원봉,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는 어쩌면 윤석열 정부의 집권 전반에 대한 커다란 이슈들일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독자로서 아쉬웠던 점은 참가한 토론자들의 이념 성향이나 지향점이 매우 유사했다는 것이다.


"이 혼란의 끝에는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잇을까. 우리가 겨울에 본 것은 국가적 아노미 상태에서도 질서를 만들어내는 시민들의 힘이다. 분명한 것은 당연한 미래는 없으며 어떤 세계와 결별할지 어떤 세계와 마주할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일곱 논자가 만들고 싶은 미래의 청사진이 담겨 있다. 우리의 여정이 더 나은 공동체를 열어가는 데 작은 실마리를 전할 수 있길 희망한다."  (p.9 '여는 글' 중에서)


토론 문화가 사라진 자리에 폭력과 증오가 싹트고 있다. 대결과 반목이 일상처럼 꿈틀대는 이 시기에 우리가 평화와 공존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는 구심점은 과연 무엇일까? 폭력과 증오의 정치가 우리 사회를 번영의 세계로 이끌어 줄 리는 없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당장 먹기에는 곶감이 달다'는 속담처럼 눈앞의 이익에 눈이 먼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세를 불리는 데만 급급하고 있다. 그들에게 국가의 발전은 안중에도 없다. 언제쯤이면 우리나라에도 토론 문화가 되살아나서 좌와 우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 방안을 찾는 데 골몰하는 날이 올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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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30만부 기념 거울 에디션)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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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 없다며 강하게 손사래를 치지 않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열의 아홉은 그럴 것 같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에게 부여된 특권, 비록 물질적인 풍요를 받고 태어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를테면 비장애인이라는 특권, 이성애자라는 특권, 남성으로 태어났다는 특권, 다문화 가정이 아닌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특권 등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여러 특권을 갖고 태어납니다.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평생 이른바 '천부특권'을 누리고 살게 되는 셈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은 '천부인권론'을 옹호하는 국가가 아닌 '천부특권론'을 강하게 신뢰하는 국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특권을 알아차리는 확실한 계기는 그 특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할 때이다. 더이상 주류가 아닌 상황이 될 때, 그래서 전과 달리 불편해질 때, 지금까지 누린 특권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주류로 생활하다가 외국에서 이방인으로서 불안하고 두렵고 화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성별처럼 다른 위치에서 경험해보기 어려운 조건이라면 평생 그 특권을 모를 수도 있다."  (p.32)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특권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특권을 누리는 어느 누구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죄야?"라거나 "내가 이성애자로 태어났다고 남들이 나에게 보태준 거 있어?"라는 식으로 항변한다면 뭐라 대꾸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선택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의도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부여한 천부인권적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소수의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까요? 날벼락처럼 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어난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권리를 관철할 수도 없는 소수자로 태어났다면 말입니다. 다수결의 원칙을 주장하는 민주주의 제도는 그들에게 영원히 벗을 수 없는 족쇄를 덧씌우는 역할을 할 테지요. 그들이 평생 차별과 소외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일까요?


"다수자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사실상 침묵을 강요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의는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누가 혹은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은 아직 충분히 정의롭지 않고, 부정의를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p.171)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김지혜가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자신이 누려온 특권에 대해 한번쯤 되돌아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진 특권을 혹여라도 소수자에게 조금이라도 빼앗기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되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이제껏 자신의 특권에 대해 전혀 의식도 하지 못한 채 살아왔는데 이런 책들이 여러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건 꽤나 위협적인 일일 테니까 말입니다. "아흔아홉 섬 가진 사람이 한 섬 가진 사람 걸 뺏는다"라는 우리네 속담처럼 자신이 누리던 특권을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양보한다는 건 아흔아홉 섬 가진 그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대가도 없이 한 섬을 내어주는 꼴이라고 생각할 게 분명할 듯합니다.


"소수자의 이익은 다수자의 피해라는 끝도 없는 논쟁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평등을 지연시키는 논리로 여기저기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런 구도에서 나에게 유리한 차별은 괜찮고 나에게 불리한 차별은 안 된다는 이해관계만 남는다. 콩 한쪽도 나눠먹어야 한다던 풍습이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야기하는 종교적 교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늘날의 '미풍양속'은 낯선 모습의 누군가를 배척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p.204)


혐오와 차별의 언어가 난무하는 요즘입니다. 게다가 시류에 편승하는 일부 정치인들에 의해 내 편, 네 편을 구분하는 '편 가르기' 현상은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소수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는 건 요원한 일인 듯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희미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정의의 실체를 믿고 이를 탐구하고 실천하려는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도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런 사람들 덕분에 느리지만 세상은 조금씩 발전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지혜 교수가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정의를 믿고 실천하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몇 안 되는 누군가에 대한 헌사의 글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천부특권'의 혜택을 받고 자란 내가 새삼 미안해지는 까닭은 누군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침묵'이라는 회색적 언어를 통해 나 역시 다수의 편에 선 채 소수자를 외면해 왔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정의의 언어는 다시 쓰여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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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다카시의 훔치는 글쓰기
사이토 다카시 지음, 장현주 옮김 / 더모던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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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없이 무작정 하다 보면 뭔가 이루어질 때가 있다. 그러한 성취에 대해 혹자는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꼴'이라고 한껏 깎아내려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단순히 운만 작동한다고 될 일은 아니라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 않을까 싶다. 운이라는 것도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부류의 일들은 대개 '조금씩이라도 꾸준히'라는 기치 아래 반복적인 훈련을 필요로 한다.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이 그렇고 아이들의 독해력이 그렇다. 짬이 날 때마다 무작정 운동을 하고 책을 읽다 보면 살도 빠지고 시나브로 독해력도 부쩍 향상되는 것이다.


자기계발서를 즐겨 읽는 독자라면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이름의 작가 '사이토 다카시'가 쓴 <훔치는 글쓰기>는 책의 첫머리에서 예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독해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고 현대인이 과거에 비해 문자에 노출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고 볼 수도 없는데 정작 독해력과 글쓰기 능력은 높아지지 않는 것일까? 작가의 평가는 냉정하다. 이와 같은 추세는 비단 일본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역시 문해력 저하로 인한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한 업체에서 행사와 관련한 게시글에 마음 깊은 사과의 의미를 담아 '심심(甚深)한 사과'란 표현을 썼는데, '심심한'이라는 뜻을 '지루하고 재미없는'으로 오해한 다수의 사람들이 발끈하여 항의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국민의 전반적인 문해력 저하 논란이 불거지게 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내가 말하는 '읽었다'의 기준은 '내용을 정확히 이해했느냐'는 것이다. 단순히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봤다는 말이 아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눈동자만 움직여 글자를 '본 것'을 '읽었다'고 할 수는 없다."  (p.32)


이와 같은 논란의 저변에는 언제나 독서의 부족이 문제점으로 떠오르곤 한다. 사실 독서가 습관화되지 않은 사람에게 억지로 독서를 권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효과가 있을 리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사이토 다카시 역시 평소에 관심이 있는 잡지에서부터 독서를 시작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렇게 재미를 붙이면 단행본이나 문고본 등 책의 세계로 옮겨가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재미있어 보이는 것'을 위주로 읽되 자신의 관심사를 서서히 넓혀가라는 게 작가가 권하는 독서 팁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글쓰기의 단계로 넘어간다. <원고지 10장을 쓰는 힘>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던 작가는 이 책에서도 글쓰기 관련 노하우에 대해 간략하고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는 주어와 술어를 대응시키는 '대응 의식'을 완전히 습관화할 필요가 있다. 이 훈련을 많이 한 사람은 말할 때에도 문장의 꼬임이 적어지게 된다. 거꾸로 문장에 꼬임이 많고 횡설수설하는 사람은 쓰기 훈련을 많이 하지 않은 사람이다."  (p.85)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좋은 글쓰기의 기본은 다독이 아닐 수 없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많은 생각과 깊이 있는 사유(多商量)를 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그들이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많은 글쓰기(多作)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는 더러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상식적인 원리를 꾸준히 실천하고 이어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책 <훔치는 글쓰기>의 저자인 사이토 다카시 역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글쓰기 상식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평소 독서와 글쓰기로 단련된 사람은 어휘가 풍부한 덕분에 대화에서도 의미의 함유율이 높은 대화가 가능하다. 의미의 함유율을 높이는 것이 이번 책의 숨겨진 테마이다. 말하기의 잔기술은 말 그대로 잔기술일 뿐, 독서와 글쓰기 기반이 없다면 지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설득력 있는 문장을 구사할 수 없다."  (p.177 'EPILOGUE' 중에서)


연일 입춘 한파가 매섭게 이어지고 있다. 최근 2030대를 중심으로 독서와 필사를 즐기는 '텍스트힙(Text Hip)' 트렌드가 확산하고 있다고 한다. 독서를 즐기는 한 사람으로서 일견 반갑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시적인 유행으로 그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처럼 살을 에는 추위가 계속되는 시기에는 퇴근 후의 음주 약속을 잡기보다 일찍일찍 귀가하여 따뜻한 방 안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깊은 사색에 잠기는 것이 자신의 건강에도 좋고 경제적으로도 훨씬 큰 이득이 아닐까 싶기는 한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내 눈에는 그 모습이 훨씬 더 힙(Hip)해 보이는데 그것 역시 취향의 차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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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인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말하는나무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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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도 연령 제한이 있을까? J.M. 쿳시의 소설 <폴란드인>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하게 될 질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사랑에도 연령 제한이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과연 몇 살부터 몇 살까지를 적정 연령대로 인정해야 할까. 물론 개인별, 혹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문화나 관습에 따라 어느 정도의 편차는 존재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면서 판단하거나 수용하는 사람의 견해차 역시 무시할 수 없겠지만. 소설을 '사유의 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쿳시는 자신이 쓴 소설에 지나치리만치 깊은 사유와 깨달음을 담는다. 그것은 쿳시 소설의 매력인 동시에 소설 감상에 주어지는 큰 선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들이 만난 날 저녁, 택시에서 그의 손이 닿던 감촉을 생각해본다. 그녀는 그가 헤로나에서 그녀를 반겼을 때 그녀의 볼에 닿던 입술의 감촉을 생각해본다. 마른 뼈가 닿는 것 같은 느낌. 살아 있는 해골이랄까. 오싹하다. 그녀에게도 해골이 있다. 그러나 그의 것과 다르게, 그녀의 것은 흐릿하고 만져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너무 메마르고 열정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 그에 대한 그녀의 최종적인 평가일까? 그녀가 남자에게서 원하는 것은 열정일까? 열정이 내일이라도 불현듯 나타나 격렬한 진짜 열정임을 드러낸다면, 그녀의 삶에는 그것을 위한 자리가 있을까? 그럴 것 같지 않다."  (p.67)


40대의 스페인 여성 베아트리스를 사랑하는 70대 폴란드인 피아니스트 비톨트.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음악 서클 임원이었던 베아트리스는 초청 연주자인 비톨트를 환대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음악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40대의 은행가 남편을 둔 베아트리스와 쇼팽을 새롭게 해석하고 연주하는 독신의 피아니스트 비톨트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음악회가 끝난 뒤 의례적인 저녁 식사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는데, 이후 비톨트는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적극적으로 구애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배우자와 자녀가 있는 베아트리스는 비톨트에 대해 별다른 호감을 느끼지 못한다. 한편 비톨트는 서툰 영어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마저도 한계에 이르자 자신이 직접 연주한 쇼팽의 b단조 소나타 오디오 파일을 보내기도 하고, 자신과 함께 브라질로 떠나자고 하는 등 이메일을 통해 지속적인 구애의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베아트리스는 마요르카에서 연주회가 있었던 비톨트를 가족의 별장으로 초대하여 일주일을 같이 보낸다. 별장이 위치한 소예르는 마요르카에서 가까운 휴양섬이었다. 그후 베아트리스는 그와 냉정하게 결별한다.


"만약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를 향한 감정, 이 의심스러운 길로 접어들게 만든 감정은 무엇일까? 굳이 말해야 한다면, 그녀는 그것을 연민이라 하겠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는 그를 가엾게 여겨 연민의 감정에서 그의 욕망을 채워주었다. 그랬던 거다. 그것은 그녀의 실수였다."  (p.130~p.131)


'나는 당신의 이름을 입술에 머금고 죽을 거요.'라고 말하는 나이 든 남자의 순수한 고백은 아무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쿳시의 소설이 늘 그렇듯 사랑의 결말은 언제나 쓸쓸하고 건조하다. 중년의 베아트리스가 비톨트에게서 느꼈던 메마르고 건조한 느낌. 그것은 어쩌면 열정이 사라진 형식적이고 의도된 사랑, 서로가 서로에게 결핍된 무언가를 충족시켜 줌으로써 각자가 지금까지 느꼈던 헛헛한 감정을 해소시켜 주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기계적인 행위에 명명된 과분한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나이 든 사람의 사랑이란 각자의 감정을 모태로 탄생한 하나의 요식행위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심각할 게 없다. 사랑은 우리가 바라볼 때조차 과거 속으로, 역사의 깊은 안쪽으로 물러나는 마음의 상태, 존재의 상태, 현상, 경향일까? 폴란드인은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심각하게 사랑에 빠졌다. 어쩌면 지금도 그러한지 모른다. 그러나 폴란드인 자신도 역사의 잔재, 욕망이 진정한 것으로 평가받으려면 손에 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암시가 있어야 했던 시대의 잔재다. 그녀, 즉 베아트리스 즉 그의 애인은 어떠한가? 그녀는 확실히 손에 닿을 수 없는 존재는 아니었다."  (p.139)


길었던 설 연휴 이후 너무도 쉽게 맞이한 주말의 오후. 나는 겨울 나목의 메마른 가지 위에 존 쿳시가 명명한 허울뿐인 사랑을 걸어 두고 나른한 시선으로 한참 동안 응시했다. 탄탄했던 육체의 수분이 빠져 쭈글쭈글 주름이 지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시나브로 열정을 잃고 차츰 형식만 존재하는 빈 껍데기로 변해가는 것은 아닐까? 싱거운 하늘엔 낮달처럼 긴 침묵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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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인생공부 - 보고 듣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
김태현 지음, 니콜로 마키아벨리 원작 / PASCAL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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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깨달음은 대개 개개인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어느 정도 연륜이 쌓여야만 체득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독서나 타인의 경험을 경청하는 것과 같은 간접 경험에서 비롯된 깨달음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을 과연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때가 더러 있다. 개인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각성과 독서를 통한 인지는 그 의미나 깨달음의 깊이 면에서 확연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각성은 개인의 삶을 뿌리째 흔드는 까닭에 이전과 이후의 삶의 방향과 태도가 확연히 달라지는 반면 인지는 다만 삶에 대한 개인의 시선을 다르게 할 뿐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계발 서적을 열심히 읽는 사람도 책을 쓴 저자의 성공에 결코 이르지 못하는 까닭도 그런 차이가 아닐까 싶다. 물론 독서가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자신의 다양하고 직접적인 체험에 치열한 독서가 더해진다면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어떤 세계관이 생성될까? 사실 전 인류를 통하여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은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겠지만, 자신의 깨달음을 책으로 남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그런 책은 대개 고전의 반열에 올라 세월이 흐른 뒤에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널리 읽히게 된다. 그와 같은 책 중 하나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아닐까 싶다. 토스카나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7세 때부터 라틴어를 배워 고전을 탐독했던 그가 피렌체 공화정의 외교를 담당하는 공직자로 근무하는가 하면 스페인의 침공으로 인한 몰락을 경험하기도 했던 그였기에 인간 개개인의 심리와 습성, 대중의 태도와 경향 등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테다. 그렇다면 개인의 생존과 안녕을 담보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공동체 생활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어떤 본성을 지녔으며 이를 통제하는 권력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책이 <군주론>이다.


저자인 마키아벨리는 물론 인간 본성을 다룸에 있어 인간의 보편적인 품성을 다룰 뿐 대한민국의 20대 대통령처럼 지극히 악독한 인간이나 테레사 수녀님처럼 지극히 선한 인간을 그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따금 자신의 내면은 생각지도 않은 채 인간의 악한 품성을 다룬 책에 대해 비현실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인간은 극단적으로 악하지도 않고, 극단적인 선량함을 보유하고 있지도 않다. 때로는 적당히 선하기도 하고, 때로는 적당히 비겁하거나 악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적당히 참아내기도 하는 게 보통의 인간임을 마키아벨리 역시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경험이 쌓일수록 더 깊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철학적 사유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는 개인의 인생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축적되는 경험이 세상과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상황과 인간의 행동을 냉철하게 분석하며, 자신의 경험을 통해 군주가 어떻게 행동해야 권력을 유지하고 위험을 피할 수 있는지를 탐구했습니다."  (P.46)


인문학자 김태현이 쓴 <군주론 인생 공부>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를 없애고 그의 사상이나 철학을 좀 더 깊이 연구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 안내서'와 같은 책이다. 물론 <군주론>의 문구 일부를 발췌하고 해석함으로써 <군주론> 전체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군주론>의 핵심 문장과 그 글에 숨은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마키아벨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진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마키아벨리의 지혜를 현대적인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실질적인 통찰과 영감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이 책을 통해 <군주론>의 명제들이 단순한 역사적 기록들이 아니라, 오늘날의 복잡한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지침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P.9 '이 책의 구성' 중에서)


총 4개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PART 1 '수단과 목적을 구분하지 말아라', PART 2 '복수는 상대가 두려워할 정도로 심하게 해야 한다', PART 3 '적은 항상 내부에 있으니 측근을 경계하라', PART 4 '때로는 도덕적 기준을 무시하고 행동하라'의 소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현명한 군주가 갖추어야 할(또는 준비해야 할) 올바른 대처법과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때도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여전히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운명이 우리의 절반을 지배할지라도, 나머지 절반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형성하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균형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성공적이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열쇠입니다."  (P.205)


명절이면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이고, 뜻하지 않은 오해로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만남 자체를 기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연휴마다 공항을 가득 메운 인파를 보고 있노라면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물론 만나서 지지고 볶고 싸우느니 차라리 안 만나고 안 싸우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항변할 이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결국 그들과는 영영 멀어질 수밖에 없음을 각오해야 한다. 어떤 이는 가족 모임에서 피해야 할 주제로 '정치, 종교, 스포츠'를 들던데 그런 논쟁적인 주제를 피하는 것은 물론 타인과 비교하는 언사도 절대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가족에 대한 작은 배려이자 에티켓임은 물론 개인의 품성을 가늠하는 시험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시간에 차라리 인문학자 김태현의 <군주론 인생 공부>를 일독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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