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인간심리 속 문장의 기억 Shakespeare, Memory of Sentences (양장) - 한 권으로 보는 셰익스피어 심리학 Memory of Sentences Series 3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작, 박예진 편역 / 센텐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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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울수록 몸속 세포 하나하나의 감각이 되살아난다. 말하자면 추위는 세포 감각을 일깨우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글의 느낌을 되살리는 건 무엇일까?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그것은 바로 슬픔이다. 슬픔은, 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문장 하나하나의, 낱글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생생하게 되살린다. 그럴 때의 슬픔은 비가 내려서 혹은 낙엽이 져서 일시적으로 느끼는 낭만적인 슬픔이 아니라 깊은 고통 속에서 맛보는 처연한 슬픔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에서 깊은 슬픔을 체험한 작가의 글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넓은 공감력을 갖게 된다.


고전문학 번역가이자 작가이며 북 큐레이터로도 활동하고 있는 박예진 작가의 신작 <셰익스피어, 인간심리 속 문장의 기억>을 읽는 내내 나는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에 대해 생각했다.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를 살았던 그에 대해 기록으로 남겨진 단편적인 사실 외에 작가의 삶에 대한 전모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의 글 속에는 언제나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슬픔으로부터 건져 올린 보편적 깨달음의 경구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다만 슬픔이 슬픔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깨달음을 통한 작은 기쁨으로 재탄생하는 감정의 탈피를 경험하도록 한다.


"sentence 114

I have done penance for contemning Love, whose high imperious thoughts punish'd me with bitter fasts, with penitential groans, with nightly tears, and daily heart-sore sighs; for in revenge of my contempt for love, love hath chased sleep from my enthralled eyes and made them watchers of my own heart's sorrow.

나는 사랑을 경시한 것을 속죄하네. 사랑의 높은 오만한 생각들이 나를 비통한 금식, 참회하는 신음, 밤마다 흐르는 눈물, 매일의 마음 아픈 한숨으로 벌하였네. 사랑은 내 흘린 눈에서 혼돈의 잠을 빼앗아가고, 내 마음의 슬픔을 지켜보게 만들었네."  (p.92~p.93)


우리는 간혹 위대한 고전문학의 힘을 간과하거나 그 필요성을 잊곤 한다. 그러나 깊은 슬픔에서 비롯된 글과 문학은 시대를 불문하고 살아남게 마련이다. 인간의 보편적인 감성은 시대에 상관없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 나라 영국에서 수백 년 전에 쓰인 셰익스피어의 문장이 시대와 장소를 건너뛰어 21세기 대한민국의 독자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엮은 박예진 작가는 오늘날까지도 사랑받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엄선하여 간략한 스토리와 함께 작품 속 명문장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sentence 218

I am very proud, revengeful, ambitious, with more offences at my beck than I have thoughts to put the in, imagination to give them shape, or time to act them in. What should such fellows as I do crawling between earth and heaven? We are arrant knaves, all. Believe none of us.

나는 매우 교만하고, 복수심에 차 있고, 야망이 가득하며,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죄를 마음에 품고 있소. 그 죄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상상력도, 그것을 실행할 시간도 없소. 나 같은 자들이 땅과 하늘 사이에서 기어다니며 무엇을 해야겠소? 우리는 모두 철저한 악당이오. 누구도 믿지 마시오."  (p.10~p.161)


오전에 인근 공원을 가볍게 산책했다. 아침 특유의 날카롭고 쨍한 냉기가 온몸의 세포를 살아나게 하는 듯했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나온 사람들, 여러 운동 기구에 매달려 가볍게 몸을 푸는 사람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빠르게 걷는 사람 등 제각각 목적하는 바와 행동은 달랐지만 이 추운 겨울 아침에 공원에 나와 온몸의 세포 감각을 일깨웠던 기억은 오래도록 비슷한 장면으로 남지 않을까. 그리고 박예진 작가의 책 <셰익스피어, 인간심리 속 문장의 기억>을 읽는 독자들 역시 그 추구하는 바도 다르고 읽는 장소도 다를 테지만 셰익스피어가 느꼈던 인간 존재의 슬픔과 삶의 여정에서 겪는 온갖 감정에 대한 물음표를 각자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간직하지 않을까. 2024년의 마지막 주말 아침, 그 냉랭한 한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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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진은영 지음 / 마음산책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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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끝이 찡한 추위가 가슴속까지 얼얼하게 하는 아침. 거실 문을 열자 베란다 창문을 통해 쏟아지던 겨울 햇살이 냉랭한 한기와 함께 부엌 입구까지 짓쳐들었다. 온전한 느낌이란 언제나 한 발 늦게 도착하는 법, 나는 잠옷 위에 패딩 조끼를 껴입고 베란다로 나섰다. 아파트의 동과 동 사이 주차장에는 녹지 않은 눈이 여전히 주차된 차량 위에 소복이 쌓여 있고, 이른 외출이 불만인 어린아이의 뻗대는 소리가 휴일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잠자리가 편하지 않았는지 뒷목이 뻐근했다. 나는 속절없이 푸른 하늘을 향해 긴 숨을 토해냈다. 하얀 입김이 방충망 틈새를 빠져나가는 동안 문득 들었던 생각, '아, 책을 읽어야지.' 하는 강박이 편집증 환자처럼 나의 뇌를 흔들었다.


"내가 다 기억할 수 없는, 죽고만 싶었던 숱한 순간에 나를 살린 누군가의 문장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통의 순간도 회복의 과정도 전부 잊었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 나는 위대한 책들을 읽고서 혁명을 일으키지도 못했고 인류를 구원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나처럼 평범한 대부분의 독자에게 독서란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p.8 '책머리에' 중에서)


진은영 시인의 산문집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은 그렇게 자기 고백적인 시인의 넋두리로 시작된다. 많은 책을 읽었고, 지금도 늘 무언가를 읽고 있지만 삶이 바뀌기는커녕 읽었던 책의 제목마저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다고 하소연하는 시인. 책에 대해서만 논하자면 나의 삶도 시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언가 열심히 읽고 기록하지만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고, 하루의 지난 삶에 또 하루를 더하는 기계적인 일상이 지겹도록 이어져 왔다. 그리고 죽고만 싶었던 어떤 순간을 견디게 했던 것이 있다면 끝없이 읽고 쓰는 무용한 행동 덕분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을 꿈꾸며 싸우든 그 꿈을 이루는 일은 어렵다. 조금 전진한 기분이었는데 도로 제자리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인간은 실패하려고 태어난 '훼손된 피조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뮈 덕분에, 우리는 어려운 싸움을 계속 이어가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대신 위대한 용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승리하는 이들이 아니라 진실과 인간적 품위를 지키기 위해 어쩌면 패배할지도 모를 싸움을 시작하는 이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p.143)


시인의 독서일기와도 같은 이 책에서 시인이 열거하는 작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카프카, 버지니아 울프, 한나 아렌트, 모르스 블랑쇼, 바흐만, 실비아 플라스, 카뮈, 시몬 베유, 바슐라르, 존 버거, 앤 카슨, 릴케... 한동안 책에 빠져 살다 보면 내가 책이나 작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지목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독자의 취향이나 성향이 어떤 작가에 의해 지배되고, 그것이 결국 생각지도 않았던 책을 선택하도록 이끌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시인 역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독서에 대한 취향이나 성향이 자신이 좋아하는 한 작가에 의해 시나브로 굳어지게 되는 체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터, 따지고 보면 지금의 시인을 만든 것도 결국 시인이 읽었던 책이 아닐까 싶다.


"2022년 우리가 거리에서 많은 젊은이를 잃고서 치러야 했던 사회적 제의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핵심이 전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패도 사진도 없는 분향소에서 고인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한 채 누군지도 모르는 고인을 애도하고 추모했다. 세상을 떠난 당신이 누구였는지 알고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바로 그 제의에서 말이다."  (p.188~p.189)


이 책에서 시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작가들의 책을 통하여 그 속에 깃든 삶의 의미를 살피고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문학의 힘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삶에서 겪는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자신과 같은 상황에 놓였던 문학 작품 속 어느 주인공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만 있다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이른바 문학의 유용성이랄까 독서의 힘이랄까 하는 문제를 반복하여 되새긴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정작 삶에서 꼭 필요하다고 느껴지지도 않는, 팔 할의 딴짓으로 구성되는지도 모른다.


한낮이 되어서도 기온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시인의 산문집 한 권을 반나절 만에 뚝딱 읽어치운 나는 며칠 지나지 않아 책의 제목마저 아득해질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나의 독서는 이렇게 무심하다. 그럼에도 나는 짬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이나 내용을 곱씹고 음미할 만한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서둘러 잊곤 한다. 나의 기억 어딘가에 두어 줄의 문장쯤 남아 있겠지, 하는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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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슴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24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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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시간의 퍼즐이 완성되기까지 우리는 아무도 그 결과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이의 운명을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단순한 논리 구조로 쉽게 예측할 수 있을 만큼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인간의 직선적인 사고방식으로 점칠 수 있을 만큼 분명한 방향성을 갖는 것도 아닌 까닭에 우리 삶의 결과는 때로 기적처럼 부풀려지기도 하고 농담이나 조롱처럼 무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로서 개개인의 삶이 비록 하찮고 무의미할지라도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그 과정은 오직 한 개인에게 귀속된 유일한 것이기에 우리는 이따금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누군가의 삶을 전해듣기도 하고, 한 권의 책 속에서 어떤 이의 삶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의 삶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남기를 바라며 사는 동안 다른 누군가의 삶을 끝없이 궁금해하는지도 모른다.


한강의 첫 장편소설인 <검은 사슴>은 등장하는 인물이 그리 많지 않은 반면 분량은 꽤나 길고 두꺼운 까닭에 인물 상호 간의 관계와 그에 따른 인물 개개인의 심리를 비교적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소설이다. 물론 사람의 심리라는 게 형식화된 틀 안에서 정형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설정한 인물 개개인의 성격이나 지나온 삶의 이력을 대입하면 소설 속 인물 개개인의 행동이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겠다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 대한 일반 독자의 리뷰에서 종종 왜?라는 의문부호를 목도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탄광 지대라는 낯선 환경이 독자들로 하여금 생경한 느낌을 불러일으킨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소설 속 중심인물인 의선의 성장 배경이 그곳이었다는 것도 독자들의 호기심을 부추겼을 테다.


"의선의 생감새는 평범했다. 조그맣고 마른 얼굴에 코와 광대뼈는 평면적이었다. 긴 외까풀 눈이 유달리 맑기는 했다. 인중이 약간 짧아 웃을 때면 입술이 유아적인 동그란 모양으로 벌어졌고, 그 안으로 오종종한 옥니가 보였다. 애써서 찾아보려 해도 남다르게 예쁜 구석이라고는 없는, 누군가 후천적인 매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식의 질문을 던진다면 그때서야 어렴풋하게 떠오를 법한 얼굴이었다. 그러니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도 아닌 내가 이따금씩 그녀를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은 의아스러운 일이다."  (p.81)


각 인물의 복잡한 심리에 비해 소설의 얼개는 비교적 단순하다. 작은 제약회사에서 근무하던 의선이 알몸으로 거리를 내달리는 황당한 사건으로 인해 실종되자 인영과 명윤이 의선을 찾아 그녀의 고향인 황곡으로 향한다. 같은 건물에 위치한 잡지사에서 근무하는 인영은 의선이 살던 반지하방의 침수로 오갈 데 없어진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이끌었고 진심을 다해 의선을 돌봐준 인물이다. 인영의 후배이기도 한 명윤은 의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한편 의선의 고향인 황곡에서 만난 장종욱은 탄광 사진작가로서 의선과 관련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고통 속에서 성장했던, 혹은 고통과 함께 현실을 살고 있는, 그럼에도 어둠을 박차고 밝은 햇빛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 상상 속의 동물 '검은 사슴'과 닮아 있다는 점이었다.


"한 사람의 정신이 폭발했을 때 그 사건은 얼마만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일까. 더이상 의선은 병원에서 진정제를 맞을 필요가 없었다. 내장에 든 것을 모두 토한 뒤의 마르고 쓸쓸한 얼굴로 웃지도 않았다. 극도로 말을 아끼다가도 매우 이따금, 마치 오랫동안 글로 써서 다듬은 문장 같은 말들을 천천히 독백하던, 나이에 비하여 성숙해 보였던 스물다섯 살의 여자애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p.201)


한때는 번성했지만 이제는 사라져가는 탄광촌 황곡에서 의선을 찾아 헤매는 인영과 명윤의 과거가 허물을 벗듯 하나씩 드러난다. 어쩌면 의선은 인영과 명윤이 겪고 있는 어둠의 트라우마를 벗겨줄 작은 희망, 밝은 침묵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을 벗어나고자 발버둥쳤던 의선이 제풀에 지쳐 쓰러져 다시 어둠 속으로 도피하는 것을 방관한다면 잠시나마 의선과 연이 닿았던 인영과 명윤 역시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되돌리려던 그들의 발길을 끝내 황곡에 묶어두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흑백사진에 친밀감을 갖는 것은 밤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또한 누구나 태중의 어둠 속에서 태어났으므로, 그 열 달 동안의 어둠에 대한 기억을 몸 어딘가에 저장해두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서 몸부림치며 빛 속으로 뛰쳐나오려 했던 마지막 순간의 기억 역시 그 안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p.320)


잔뜩 흐렸던 하늘에는 조금씩 빛이 되살아나고 있다. 다행이었다. 인간의 연약함과 깊은 어둠을 탐색하는 이와 같은 소설을 읽은 날에는 빛이 들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느낌이 들곤 한다. 벗겨진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햇살이 비친다.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좌절과 고통 속에서도 아주 이따금 희망의 웃음을 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에 익숙한 사람들의 강인한 연대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 내가 쓰러지면 다른 누군가가 즉시 나를 일으켜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살게 하는지도 모른다. 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저 햇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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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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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열차의 유리창에 호호 입김을 불어가며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있을까요. 어둠이 내려앉은 차창 밖의 먼 풍경으로부터 나의 시선을 그렇게나마 가까이 두고자 했던 어설픈 행위. 뽀얗게 변한 유리창에 엉성하게 그려진 어떤 형체는 차라리 이별의 무게 혹은 그리움의 한계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선이 멀어질수록 가슴속 빈자리도 커져가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휑하게 뚫린 가슴을 차곡차곡 채워갈 것임을 그 시절에도 나는 잘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멀어지려는 나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붙잡기 위해 성에가 낀 유리창에 형체도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거나, 문득 떠오르는 어떤 이름 석 자를 써보거나, 흩어지는 성에를 붙잡기 위해 반복하여 입김을 불어넣기도 했던 것입니다. 삶이 지루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행복한 삶을 자신만 모르는 채 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시절에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이십 년 만에 다시 온 침묵은 예전처럼 따스하지도, 농밀하지도, 밝지도 않다. 처음의 침묵이 출생 이전의 그것에 가까웠다면, 이번의 침묵은 마치 죽은 뒤의 것 같다. 예전에는 물속에서 어른어른한 물 밖의 세계를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딱딱한 벽과 땅을 타고 다니는 그림자가 되어 거대한 수조에 담긴 삶을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것 같다. 모든 언어가 낱낱이 들리고 읽히는데, 입술을 열어 소리를 낼 수 없다. 육체를 잃은 그림자처럼, 죽은 나무의 텅 빈 속처럼, 운석과 운석 사이의 어두운 공간처럼 차고 희박한 침묵이다."  (p.19)


한강의 소설 <희랍어 시간>을 다시 읽는 동안 나는 야간열차에서의 어두운 기억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마치 전시 포로병의 소지품을 면밀히 검색하는 군 수사관의 시선으로 보고 또 보았던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 속에 내가 미처 몰랐던 어떤 큰 비밀이라도 숨겨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 역시 소멸해가는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보다 유난히 소리에 민감했던 여자는 열일곱 살 겨울 무렵 갑작스레 말을 잃고 맙니다. 그렇게 말을 잃고 살아가던 여자의 말문을 다시 틔워 준 것은 낯선 외국어였던 한 개의 불어 단어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혼을 한 여자는 아홉 살 난 아이의 양육권마저 빼앗긴 채 다시 말을 잃고 무기력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말을 다시 찾았던 과거의 기억에 기대어 그녀가 선택한 마지막 희망이 희랍어였습니다.


"이따금 그녀는 자신이 사람이기보다 어떤 물질이라고, 움직이는 고체이거나 액체라고 느낀다. 따뜻한 밥을 먹을 때 그녀는 자신이 밥이라고 느낀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할 때 그녀는 자신이 물이라고 느낀다. 동시에 자신이 결코 밥도 물도 아니라고, 그 어떤 존재와도 끝끝내 섞이지 않는 가혹하고 단단한 물질이라고 느낀다. 침묵의 얼음 속에서 그녀가 온 힘을 다해 건져내 들여다보는 것은 이주에 하룻밤 함께 지내는 것이 허락된 아이의 얼굴과, 연필을 쥐고 꾹꾹 눌러쓰는 죽은 희랍 단어들뿐이다."  (p.59)


여자가 듣는 희랍어 강의의 강사 역시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입니다. 가족들을 모두 독일에 두고 십수 년 만에 혼자 한국에 입국하여 희랍어를 가르치고 있는 남자는 앞을 볼 수 없다는 마흔을 일이 년 앞두고 있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수강생 중 말을 하지도, 웃지도 않는 여자를 지켜보면서 여자의 침묵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소설은 그렇게 목소리를 잃은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과거가 교차하면서 두 사람의 삶을 응시합니다.


"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모른다. 오래전 아이였을 때,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해도 되는지 알 수 없어 어스름이 내리는 마당을 내다보았던 것을 모른다. 바늘처럼 맨몸을 찌르던 말言들의 갑옷을 모른다. 그녀의 눈에 그의 눈이 비쳐 있고, 그 비친 눈에 그녀의 눈이, 그 눈에 다시 그의 눈이...... 그렇게 끝없이 비치고 있는 것을 모른다. 그것이 두려워, 이미 핏발이 맺힌 그녀의 입술이 굳게 악물려 있는 것을 모른다."  (p.183)


우리가 잃어가는 게 비단 말語과 시력뿐이겠습니까. 다소의 시차는 존재하겠지만 언젠가 소멸하게 될 한시적인 현상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영원히 존재하는 궁극적인 그 무엇에 새길, 혹은 영원에 약조하고픈 하나의 징표로 남길 만한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해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모두 소진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사랑이 됐든 연민이 됐든 말입니다. 작가는 우리 모두가 한시적인 현상계에 사는 여리디여린 존재임을 소설을 통해 일깨우고 있습니다. 야간열차의 유리창에 아주 잠깐 남아 있었던 나의 입김처럼 우리 모두는 기억하기도 어려운 찰나의 순간을 살다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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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산문집
김소연 지음 / 마음의숲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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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이야기를 좋아할까? 하는 문제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한 편의 논문을 쓸 정도로 관련 자료를 훑어보고 나름의 결론을 도출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문득 이것이 궁금했을 뿐이다. 어느 시인에 따르면 '우리는 이야기를 매개로 지각을 펼치고 세상을 탐지한다. 이야기는 인간 사회를 결속시키며, 생물학적 생존 이익에 기여한다. 이야기는 인간을 인간으로 빚는 강력한 요소다. 그것이 우리가 이야기를 지어내고 퍼뜨리는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즉 이야기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유다.'라고 설명한다. 또 어떤 이는 '인간이 영웅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그것이 우리 삶의 인식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김영하 작가 역시 그의 소설 <작별 인사>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서사를 끊임없이 생각한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인간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근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인간의 본능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본능이 인간 삶의 유한성과 결합하여 그 궁금증을 증폭시켰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유한한 삶에서는 결코 체험하지 못할 수없이 많은 다른 인생과 그 결과에 대한 궁금증은 다른 어떤 대상보다 더 강한 유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나에게 죽음이라는 장애물이 없었더라면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다른 인생이 내가 살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이번 생에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호기심은 두 배 세 배 증폭되는 것이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니까.


"독자는 소설을 읽는다는 자의식을 놓고, 그냥 그 세계에 들어가 잠시 동안 무언가가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인물이 된다. 잠에서 깨어난 듯 책을 덮고 났을 때에 나를 둘러싼 방 한 칸이 낯설어질 만큼 그 세계에서 살다 나온다. 이런 종류의 낯섦을 처음 경험했던 어린 시절의 그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p.176)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 <나를 뺀 세상의 전부>는 비교적 편안하게 읽히는 책이다. 현학적이거나 작가 개인만 알 듯한 특이한 체험을 기록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직장 동료나 학교 선후배를 통해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이야기 혹은 나의 삶에서도 있었던 유사한 경험을 통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산문집 전반에 흩어져 있다. 시인은 으레 사물이나 사람을 대함에 있어 극도로 예민하고 까탈스럽다는 편견은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쉽게 깨트릴 수 있다. 애초부터 그런 편견은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누군가의 주장을 듣고 있을 때보다 누군가의 하루를 지켜보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에 더 크게 설득되고 더 큰 경이감이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나도, 되도록 생각한 바와 주장하는 바를 글로 쓰지 않고, 다만 내가 직접 만났거나 직접 겪었던 일들만을 글로 써보고 싶어졌다. 나를 뺀 세상의 전부, 내가 만난 모든 접촉면이 내가 받은 영향이며, 나의 입장이자 나의 사유라는 걸 믿어보기로 했다."  (p.10 '책머리에' 중에서)


'겨울 이야기, 봄 이야기, 여름 이야기, 가을 이야기, 다시 겨울 이야기'로 구성된 이 책은 시인의 일상 역시 독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 책을 쓴 시인 역시 자신의 삶이 자신을 제외한 다른 누군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시인의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책으로 읽는 까닭은 그 속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고자 함도 아니요, 무료한 일상을 독서로 때우고자 함도 아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와 서사를 창조하는, 이야기 창조자로서의 동지 의식 혹은 같은 처지의 인간으로서 느끼는 동질감을 체감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책을 읽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12월이 다가온다. 다가온다고 적으니 벌써부터 긴장이 감돈다. 물론 가장 아무것도 아닌 12월이 될 것이다. 가장 아무것도 아닌 선물을 또 누군가에게 줄 것이고 받을 것이다. 가장 시시한 일을 하며 가장 시시하게 지낼 것을 알면서도 해마다 12월은 무작정 설렌다. 왜 그런가를 따져보고 싶지는 않다. 다만, 가장 시시함에도 가장 설렐 수 있다는 것은 무조건 축복이고 무조건 내게는 기적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p.250)


우리는 비단 우러러보거나 존경할 만한 사람의 특별한 일상만 궁금해하거나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이의 일상도 궁금하여 때로는 호기심이 동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별것 아닌 각자의 일상도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다른 누군가가 궁금해하는 소중한 서사이기 때문이다. 결코 허투루 다룰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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