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타의 산책
안리타 지음 / 홀로씨의테이블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왕의 의자'라고 부르는 작은 바위가 있다. 내가 매일 아침 산책을 마치고 내려오는 산의 능선을 따라 낮게 솟은 작은 봉우리에 있는 바위의 이름이다. 물론 그 이름은 내가 명명하여 나만 그렇게 부르는 까닭에 다른 이들은 어찌 부르는지 알지 못한다. 옛날 초등학교 교실의 나무의자를 닮은 그 바위는 한 사람이 겨우 앉을 정도로 그닥 넓은 편은 아닌데, 그곳에 앉으면 앞이 탁 트여서 내가 사는 도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바람길도 훤히 트여 운동 후 땀을 식히는 데는 그만이다. 나는 아침 출근 시간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그곳에 잠깐 앉아 땀을 식히거나 도시 전경을 감상하곤 한다.


오늘도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듯 '왕의 의자'에 앉았는데 근처 참나리 군락에서 꽃이 피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저게 언제 꽃이 필까? 늘 궁금했는데 드디어 꽃이 만개한 것이다. 날씨가 더운 탓인지 산을 오르는 이는 많지 않았고 활짝 핀 참나리 꽃이 오가는 이를 반기는 듯했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2025년 7월의 마지막 한 주도 나는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을 듯했다.


"너무도 신비롭고 벅찬 감각에 순간, '이건 운명이야' 하는 확신이 나를 휘감았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다음 날, 그다음 날에도 나는 찬찬히 자연을 거닐며 같은 감각을 반복했다. 그리고 이 비밀스럽고도 강렬한 인상은 나를 이전의 삶에서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아, 그날 이후, 나는 산책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p.41)


이번에 새로 발견한 작가 안리타의 산문집 <리타의 산책>은 200쪽 남짓의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읽는 데 꽤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곁가지로 따라오는 생각의 알갱이들이 포도송이처럼 부풀었기 때문이다. 좋은 책이란 이렇듯 작가가 쓴 짧은 문장으로부터 독자의 깊고 넓은 사유를 이끌어내는 책을 일컫는 것이리라. 일차적으로는 작가가 쓴 문장의 기본 의미를 파악하는 게 먼저이겠지만, 작가가 그 문장을 쓰기 위해 서성거렸을 어느 거리, 어느 시간대의 빛나던 햇살과 그늘이 되어주던 숲, 그리고 작가를 환영하고 응원하던 들꽃들...


"그때부터였을까. 이렇듯 내가 늘 숨으로서 매달려 있는 생에 관심이 커진 계기가. 삶에 이토록 깊이 연결된 호흡이라니, 폐부 깊이에 닿는 뜨거운 느낌이 삶이라니, 한 사람을 살리고 한 사람을 죽이는 모든 힘이 거기에 있다니, 존재가 어디에도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이 아찔해서 나는 노을빛까지도 사무치게 들이쉰다."  (p.113)


한때 살아가면서 필요할 때면 언제든 무한대로 지원되던 이웃의 위로는 언제부턴가 '옛다, 위로' 하는 식의 천편일률적이면서도 진심이 담기지 않은, 그럼에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일정액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그마저도 제공되지 않는 값싼 문장이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삶의 진정제가 되었다. 삶이 힘들수록 우리는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싸구려 위로의 글에도 쉽게 감동하고, 이웃으로부터 소외되면 소외될수록 그 경박한 위로의 글조차 더욱 목말라했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일회용 밴드에 익숙해진 탓일까 아프니까 청춘이었던 우리는 중년이 되어서도 늘 아프고, 언젠가 읽었던 싸구려 위로의 글에 찔끔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말이나 글에서 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나를 사랑하고 위로하는 나만의 목소리를.


"나는 내가 발견한 이 알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 삶은 때로 낯설고, 이해할 수 없이 복잡하지만, 그 속에서 문득 마주하는 순간들은 눈부시도록 찬란하다. 이따금 죽고 싶은 만큼 살고 싶은, 그 고통의 순간에도, 생은 놀랄 만큼 신비하다. 계절처럼 마음은 변덕스럽고 때로 나약하지만, 우리는 그 순환 속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해진다. 이 양가감정 속에서 문득 마주하는 순간들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이상할 만큼 감동적이기도 하다."  (p.193)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멈춰 있는 물레방아를 돌리듯 순환의 처음은 언제나 힘겹고 무겁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모든 처음을 기꺼이 감당하는 이유는 내게 남은 처음이 시나브로 줄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 허락된 봄이, 내게 허락된 한 달의 첫날이, 내게 허락된 한 주의 첫날이... 그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정체되거나 늘지 않는다는 건 명확한 사실. 나는 그렇게 7월 마지막 주의 첫날을 지우고 있다. 습관처럼 또 그렇게. 안리타의 에세이 <리타의 산책>을 마저 읽으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의 첫 문장 - 다시 사는 삶을 위하여 문장 시리즈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루라는 시간이 누군가 물을 엎지르듯 의미도 없이 한꺼번에 소진되는 듯한 요즘, 새벽에 산행을 하고, 씻고, 아침을 먹고, 출근을 하여 얼쩡거리다 보면 뭘 했는지 기억에도 없는데, 이미 엎질러진 하루는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40도에 육박하는 불볕더위가 우리의 기억력에도 점화하여 최근에 생성된 기억 파일만 까맣게 태워버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루를 보내는 건 무척이나 긴 느낌인데 일주일, 열흘, 한 달 등 뭉텅이로 잘려나가는 시간들은 어찌나 빠르게 소진되는지... 그렇게 보면 한 사람의 생애는 얼마나 짧게 마감하는가.


교정의 달인으로 인정받는 김정선이 교정교열자가 아닌 작가로서 펴낸 에세이 <소설의 첫 문장: 다시 사는 삶을 위하여>는 요즘처럼 멍하고 정신없을 때 읽기 좋은 책이다. '이십 대 후반부터 오십 대의 문턱을 넘어선 지금까지 줄곧 남의 글을 손보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는 작가는 '소설의 첫 문장을 통해 내 글쓰기의 첫 문장으로, 내 삶의 첫 문장까지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는 듯했다. 그러나 바쁜 현대인들의 독서라는 게 일천하기 짝이 없어서 첫 문장을 거론할 만한 소설의 권수도 몇 권 되지 않을뿐더러 자신이 읽은 소설의 첫 문장을 기억한다는 것도 믿기 힘든 사실, 작가가 되살린 여러 소설의 첫 문장을 통하여 내가 읽었던 몇몇 소설을 겨우 확인할 뿐이다.


"다른 사람의 삶에 공감하려면 '내 삶'이라는 기반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글을 제대로 읽어 내려면 '내 문장'이라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 문장'은 바로 '내 삶'을 표현한 것이어야 하고, 이게 바로 글쓰기와 글 읽기의 시작점 아니겠는가. 규칙과 기술을 익히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문장을 읽거나 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이런저런 기법을 익힌다고 해서 내 손끝에서 나만의 문장이 저절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글이 첫눈에 말끔하게 해독되는 것도 아니듯이."  (p.10 '머리말' 중에서)


책은 1장 '다시 보는 첫 문장', 2장 '다시 쓰는 첫 문장', 3장 '다시 사는 첫 문장', 4장 '다시 읽는 첫 문장'의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을 읽는 독자는 굳이 순서에 따라 읽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작가는 어차피 자신이 뽑은 소설의 첫 문장을 내세워 소설에 대한 느낌이나 자신의 경험을 그 문장과 함께 잘 버무리고 뒤섞어 감칠맛 도는 책으로 엮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떤 장을 펼치더라도 내용과 형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물론 각각의 장에 따라 선정한 책은 나름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지만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로 시작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와 '나는 곧 죽을 것이다.'로 시작하는 요 네스뵈의 소설에 대해 작가는 인간 개개인의 특별함이 죽음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생각을 옮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는 특별한 삶 때문이라기보다 특별한 죽음 때문인 듯하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죽음이 점점 가까워지는 걸 인식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내 특별함이 언제든,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끝장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살아가는 존재. 진정한 특별함은 바로 그런 것임을 깨닫는 존재. 그러니 당신과 내가 특별한 존재인 이유는 이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p.147)


어떤 독자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소설의 첫 문장은 특별하다.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주요 관심이 첫 문장에 집약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설가 역시 첫 문장에 대한 고심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별 관심을 받지 못했던 첫 문장이 소설의 재미와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다시 첫 문장으로 관심이 쏠리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유명세를 타게 된 첫 문장의 경위야 어찌 되었든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의 첫 문장을 어떤 특별한 것으로 기억하게 마련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로 시작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을 기억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특별함으로 인해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는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작은 무법자
크리스 휘타커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의 의식이 상식과 비상식의 넓은 영역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정상과 비정상의 드넓은 영역 그 어디쯤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의 영역을 지나치게 고집하다 보면 나를 제외한 그 어떤 사람도 상식적이거나 정상적인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다. 마치 우리가 자신의 자아가 성숙하기도 전에 새가 뜬 눈으로 보았던 세상과 세상 사람들의 삶이 모두 비정상적인 것처럼 느껴졌던 한때의 기억을 누구나 갖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삶의 기준이 구름과 먹구름 사이의 경계만큼이나 모호하다는 걸 이해할 나이가 되면 완벽한 듯 보였던 나의 삶도 실수투성이의 순간순간들로 이루어졌을 뿐 삶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음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 역시 남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됨으로써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애처로워하는 것만큼 나를 제외한 타인에 대한 연민의 감정도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영국 작가 크리스 휘타커가 쓴 <나의 작은 무법자>를 읽는 동안 나는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사이의 갈등을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와 같은 혼란은 책을 다 읽고 며칠이 지난 시점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책의 원제는 <We begin at the end>인데 역자는 왜 <나의 작은 무법자>를 책의 제목으로 삼았을까? 하는 의문으로부터 작가는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이 책을 집필했을까? 하는 질문에 이르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으로 인해 나는 정작 책을 읽는 데 투자한 시간보다 책을 이해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야 말았다. 500쪽이 훌쩍 넘는 비교적 두꺼운 책이지만 작가는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 너무 서둘러 끝을 맺으려 했던 게 아닌가? 하는 나름의 주관적인 판단도 여러 질문들과 함께 뒤섞였다. 그리고 읽게 된 작가의 결문. '나오며 - 한국독자들에게'로 시작하는 네 쪽의 글 속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었다.


"이 글은 지극히 광범위한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극도로 사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복수와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들여다보는 범죄소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죠. 그것은 첫사랑, 자기희생, 선악의 개념과 그 중간의 회색지대에 관한 책입니다. 하루하루 분투하며 살아가는 여자아이와 과거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경찰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실수에 관한 이야기, 다시 일어나서 한 걸음씩 발을 내딛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p.571)


그러나 이 기나긴 이야기에 대한 작가의 짧은 설명만으로는 이 소설에 대한 의미 부여를 명쾌하게 내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이 서두의 첫 문단에 기록한 내용이다. 특별할 것도 없지만 소설의 두 축인 40대의 워크 서장과 열세 살 소녀 더치스 중 어느 쪽의 시각에서 바라보냐에 따라 이 소설은 지극히 복잡할 수도, 지극히 단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소설의 역자인 김해온 작가는 결국 더치스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이해하겠다는 선언으로서 <나의 작은 무법자>를 책의 제목으로 정한 것으로 보였다. 아직 자아가 완성되지 않은 더치스의 입장에서 세상은 온통 비상식과 비정상의 틀로 짜인 듯 보였을 테고 구성원의 절반을 차지하는 어른들은 하나같이 더치스의 기준에서 벗어난 비정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 위험한 세상에서 더치스 자신과 자신보다 훨씬 어리고 연약한 남동생 로빈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짜 놓은 기준과 틀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그야말로 '무법자'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가 뒤로 돌자 더치스가 작은 몸으로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서 있었다. 더치스는 파편의 삐죽삐죽한 쪽을 높이 들어 그의 목을 조준했다. "난 무법자 더치스 데이 래들리다. 네놈은 바에 들락거리는 겁쟁이 놈팡이고. 내가 네놈 목을 깔끔하게 날려주마." 더치스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동생의 외침을 들었다. 스타는 딸의 손목을 잡고 딸이 유리 조각을 떨어뜨릴 때까지 흔들었다. 다른 남자들이 와서 그들 사이에 끼어 소동을 가라앉혔다. 공짜술이 한 바퀴 돌았다."  (p.70)


술과 약에 취한 채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고 팁을 받아 생계를 이어가는 더치스의 엄마 스타 래들리는 얼굴이 예쁘장한 싱글맘이라는 이유로 주변 남자들의 유혹의 대상이 된다. 한적한 시골 마을인 케이프 헤이븐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서장 워크는 스타의 오랜 친구이다. 동갑내기인 그들은 십대 시절 스타와 빈센트 킹, 워크와 마사가 짝을 지어 어울렸었고, 빈센트 킹이 스타의 동생인 시시 래들리를 차로 치어 죽게 함으로써 그들은 각자의 길로 뿔뿔이 흩어졌었다. 그러던 어느 날 30년의 형기를 마친 빈센트가 고향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타가 자신의 집에서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되는데... 사건 현장에 있었던 빈센트는 현행범으로 체포되고, 그의 결백을 확신하는 워크 서장은 변호사를 선임할 것을 주장하지만, 빈센트는 십대 시절 워크의 연인이었던 마사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변호사로 지명하지 않겠다고 버틴다. 결국 워크는 마사를 찾아가게 되고, 졸지에 엄마를 잃은 더치스와 로빈은 몬태나에서 농장을 하는 할아버지 핼에게 보내진다. 그러나 디키 다크의 소유였던 케이프 헤이븐의 술집에 불을 질렀던 더치스로부터 화재 영상을 받아 보험료를 청구하려던 다크는 더치스를 쫓게 되고, 자신들을 돌보지 않았던 할아버지에 대한 나쁜 감정이 있었던 더치스는 언제나 핼과 대치하지만 결국 핼의 진심을 알게 된 그로부터 총 쏘는 법과 말 타는 법을 배우게 된다. 평온한 날이 이어질 것 같던 몬태나의 삶에 균열을 깬 것은 다크의 등장과 핼의 사망이었다. 더치스와 로빈은 위탁 가정을 찾게 되지만 복수를 결심한 더치스는 케이프 헤이븐으로 향하는데...


"어쩌면 빈센트는 교도소 생활에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그냥 자신이 너무 미워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기보다는 사형당하는 쪽이 낫다고 여기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의문이 너무 많았다. 그는 자신이 진실과는 다른 색을 칠했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뼛속 깊이 느꼈다. 빈센트 킹은 죄가 없었다. 그리고 워크는 그걸 우연에 맡기지 않을 작정이었다. 더는 아니었다. 그는 이미 멀리까지 왔고, 자기 영혼을 대가로 지불해야 한대도 끝까지 갈 작정이었다."  (p.466~p.467)


소설은 개연성을 확보한 채 물 흐르듯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어른의 시각에서 바라본 나만의 판단일지도 모른다. 더치스도, 로빈도 그들만의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때까지 어느 정도 어른들의 도움과 보호가 필요할 테지만 세월이 흘러 그들 역시 한 사람의 인격과 자아를 갖춘 성인이 되었을 때 어린 시절 그들과 연관되었던 여러 사람들에 대한 판단과 이해는 세상의 보편적인 기준을 향해 수렴할지 아니면 그 반대 방향으로 흐를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작은 무법자들이 세상의 악과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그것이 곧 그들의 판단 기준이 되지 않도록 보살피고 도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할 뿐이다. 그것이 곧 소설을 읽는 근본 이유로 이어질 수 있기를 <나의 작은 무법자>를 읽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바라 마지않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핼이나 워크처럼 혹은 돌리처럼, 이름은 서로 달라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우 없는 세계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용기와 결단이 없다면 삶은 바뀌지 않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되짚어볼 때, 나의 용기 없음에 나는 이따금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남들처럼 작은 용기라도 있었더라면 내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상상에 하염없이 빠져들기도 한다. 그랬다. 나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주어진 환경과 조건을 무작정 견디고 버티는 데에는 미련하리만큼 특화된 인간이었다. 반면에 나는 익숙했던 환경에서 벗어나는 일에는 지독히도 겁이 많았다. 그런 까닭에 나는 사흘이 멀다 하고 벌어지는 아버지의 폭력을 묵묵히 견뎠을 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가난과 악조건 속에서도 이른바 '모범생'이라는 칭호를 결코 잃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용기 없음'으로 인해 나는 그 어려웠던 시절에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다. 성인이 된 후에 나는 속내를 모르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내가 이룬 성취에 대한 아낌없는 칭찬의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내가 이룬 성취가 '대단하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어가는 그들의 칭찬을 들을 때마다 나는 과거 나의 '용기 없음'이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마 그들에게 말은 못 하였지만.


"어머니의 재촉에 나는 119에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목을 고정당한 채로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아버지에게 폭행당하는 어머니를 구한 순간. 미세한 각도로 꾸준히 틀어지고 있던 내 삶에 가속도가 붙은 시점이 바로 그때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p.55)


백온유의 소설 <경우 없는 세계>를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건 소설의 주인공인 장인수가 나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수의 아버지가 자수성가한 기업가이며 남부럽지 않은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것도,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어머니가 취업전선에 나설 필요가 없었던 것도 나와는 크게 다른 환경이었다. 하나 같은 것이 있다면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와 드잡이질을 해 아버지의 코뼈를 부러뜨렸던 인수와는 달리 나는 맥없이 지켜보거나 뜯어말리는 게 전부였다. 더구나 불편한 관계가 내내 이어지자 이를 참지 못하고 가출을 감행했던 인수와는 다르게 나는 이웃의 친구네 집을 방문하거나 아버지를 피해 겉돌 뿐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가출을 경험했던 인수는 이제 성인이 되어 노숙 생활을 정리하고 옥탑방에서 홀로 자취를 하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자동차 사고를 가장해 돈을 뜯어내는 소년 이호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가 떠오른 인수는 자신의 집으로 이호를 데려온다. 그리고 이호를 보면서 그날의 기억을 되살린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나와 경우, 성연 우리 셋 중 가정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아이는 다름 아닌 성연이고, 그때가 되면 성연은 번뜩 정신을 차리고 이 생활을 깔끔하게 청산할 것이라는 확신에 혼자 괴로워했다. 집으로 돌아간 그애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환대를 받을 것이고 지금의 모습은 떠오르지도 않을 만큼 번듯해질 거라는 생각으로 숨이 막혔다."  (p.139)


거리를 떠돌던 인수가 제일 처음 만난 친구는 '성연'이었고, 이어서 보육원에서 도망쳐 나온 '경우'도 만나게 된다. 노숙 생활을 전전하던 그들은 가출 청소년들이 드나드는 반지하방 '우리집'에 정착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름도 모르는 A가 자다가 갑자기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고, 경찰 조사를 두려워한 아이들은 A의 시체를 유기하기에 이른다. A는 보험 사기를 통해 필요한 돈을 조달하던 아이였고, 죽기 전날 그는 실제 사고를 당하고도 돈 한 푼 받지 못한 채 '우리집'으로 복귀한 상황이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인수는 아이들이 A의 사체를 캐리어에 담아 야산에 묻은 것에 대해 심한 자책을 하게 되고, 사체 유기에 동참했던 경우는 결국 경찰에 자수하고 만다. 이 사건으로 '우리집'에 모이던 아이들은 법적 처벌을 받게 되고, 인수는 변호사를 선임해 준 아버지의 도움으로 무죄 처분을 받는다. 그러나 다시 집을 나온 인수는 자신이 머물던 고시원으로 찾아온 경우를 애써 피하게 되고...


"경우가 고시원을 찾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애가 죽었다는 사실을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되었다. 경우의 죽음을 알린 건 경우를 처음 만났을 때 경우와 함께 다니던 중학생 아이들 중 하나였다. 경우는 소년원을 나온 뒤 그 아이와 함께 지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열다섯 살이었던 아이는 열여덟 살이 되어 있었다."  (p.252)


12년 전에 있었던 혹독한 가출 경험으로부터 인수는 오늘도 환각과 환촉에 시달린다. 한여름에도 살갗을 에는 듯한 추위를 느끼고, 그림자처럼 떠도는 귀신의 무리를 본다. 작가는 인수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가출 청소년의 실상을 낱낱이 알리고,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조망한다. 그리고 지금은 없는 경우를 소환하여 그가 꿈꾸었던 세상을 회상한다.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언젠가 자신을 보육원에 두고 간 어머니와 함께 살고자 했던 경우가 꿈꾸던 세계. 그 세계는 너무도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경우가 없는 세계에서 새로운 꿈을 꾸며 살아가야 한다. 


백온유 작가에 의해 펼쳐지는 이 소설은 현실과 소설 사이의 작은 빈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가출 청소년의 삶을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소설을 읽는 나의 심정은 내내 불편했다. 어쩔 수 없는 환경도 아닌데 가출을 감행한 인수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도 어려웠음은 물론 가출 청소년들이 모여 불편하고 답답한 생활을 이어가는 것도 언짢았다. 나는 이제 그 또래의 아이들로부터 아주 멀리 지나쳐 온 부모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오늘처럼 장맛비가 하염없이 쏟아지는 날이면 혹시 누군가 비를 맞으며 거리를 헤매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 - 낯선 경험으로 힘차게 향하는 지금 이 순간
조승리 지음 / 세미콜론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맑은 하늘과 이글거리는 태양이 두렵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나 이따금 생각해 본다. 싫었던 적은 자주 있었어도 두려웠던 적은 글쎄... 딱히 떠오르는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작열하는 여름 날씨가 두려웠던 적은 많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요즘 날씨는 정말 두렵다. 열대야로 인해 잠을 설치는 것도 문제이지만 한낮의 살인적인 더위는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무지막지한 자연의 힘이 인간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음을 현실에서 체감하기 때문이다.


조승리의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를 읽고 남은 인상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작가의 두 번째 에세이 <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을 서둘러 읽게 되었다. 때론 읽었던 책의 강렬한 인상으로 인해 어떤 특별한 목적도 없이 같은 작가의 책을 연거푸 읽을 때가 있다. 조류의 새끼들이 알에서 부화한 뒤 처음 본 대상을 자신의 어미로 인식하는 것처럼 작가의 이름만 보여도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동 반사적인 이러한 반응은 정해진 기간이 없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작가가 쓴 한 작품에 크게 실망하거나 최근에 읽은 다른 어떤 작가의 작품이 내게 큰 인상을 남김으로써 나의 시선이 다른 작가에게 향하면서 끝이 나게 마련이다.


"나는 타고난 운명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해진 운명대로 살지만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명리학을 공부하며 내가 얻은 것은 운명에 결코 순응하지 말고 맞서라는 가르침이었다. 나는 과거의 기록을 통해 피해야 할 때와 나아가야 할 때를 조언받는다. 그것이 진정한 명리학이라 생각한다."  (p.248)


조승리 작가의 두 번째 산문집인 이 책은 전작의 다소 심각한 분위기에 비해 글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밝아진 느낌이었다. 첫 작품 치고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 덕분일지도 모른다. 처음 출간한 한 권의 책으로 자신의 이름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킨다는 건 웬만한 필력으로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물론 시각 장애인이라는 작가의 남다른 이력이, 그리고 시각 장애인이 할 수 있는 많지 않은 직업 중에서 고객과의 신체 접촉이 잦은 마사지사를 직업으로 삼아 그 길을 꿋꿋이 걷고 있는 점도 독자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독자들이 조승리 작가를 선택하는 데는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인생관에 있지 않을까 싶다. 자신에게 지워진 운명의 굴레나 삶의 역경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어깨 위에 쌓인 가벼운 먼지쯤으로 여겨 몇 번의 손길로도 쉽게 떨쳐낼 수 있다고 믿는 자세는 장애가 없는 일반인들에게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난관에 처한 인간에게 절망이나 좌절은 가깝고 용기나 희망은 아주 먼 곳에 위치하는 법이니까.


"저녁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자 새로 입학한 내가 궁금했는지 아이들이 내 방으로 몰려왔다. 그 애들은 별스럽지 않게 자신이 실명된 이유를 말했고, 우스갯소리를 하듯 장애인 학교에 입학한 과정을 떠들어댔다. 애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기구했다. 부모가 모두 장애인인 아이도 있었고, 갓난아이 때 쓰레기통에 버려져 구조된 고아도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낯선 공간에 누워 생각했다. '나도 저 애들처럼 불행이 익숙해지면 무뎌진 불행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겠지.' 엄마가 비상금으로 놓고 간 십만 원은 새로 사귄 친구들과 유흥비로 탕진했다. 그리고 나는 눈먼 일상에 적응했다."  (p.162)


명한 햇살 사이로 가볍고 건조한 바람이 불고 있다. 여름철에 흔하디 흔한 소나기도 요즘엔 찾아보기 힘들다. 아스팔트 도로는 강렬한 햇빛에 달구어져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거리에는 휴일 오후를 닮은 느긋한 차량들이 몇 대 오갈 뿐 인도를 걷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나처럼 소심한 사람들은 한껏 기세가 오른 여름 햇빛으로부터 달아나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잔다. 일주일에 삼일 마사지사로 일하고, 평일 오전에는 3~4시간씩 집필을 하고, 건강을 위해 PT도 받고 있다는 조승리 작가. 작가처럼 부지런히 책을 읽었다면 서너 시간이면 충분했을 텐데 나는 이 한 권의 책을 읽는 데 꼬박 일주일을 소모했다.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노력하지 않는다. 무더위를 핑계로 내가 그랬던 것처럼.


"기체는 한 시간가량 수난을 당하다가 거짓말처럼 안정되었다. 난기류 구간이 끝난 것이다. 기장의 무사 귀환 방송에 승객들이 환호하며 알라를 불러댔다. 나는 절망스러웠지만 안도했다. 종잡을 수 없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공포로 잠식되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살고 싶었다. 나는 건방지고 오만했다. 비겁하게 불행을 피하려고만 했다. 못난 마음을 자책했다. 멀뚱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데 승무원이 내게 다가와 손에 샌드위치를 쥐어주었다."  (p.112)


누군가 내게 숙제를 내준 건 아니지만 집에는 여전히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딴에는 읽겠다고 산 책이지만 나는 띠지도 풀지 않은 채 배달된 채 그대로의 상태로 고스란히 모셔만 두고 있다. 오늘도 나는 날씨를 핑계로 뒹굴뒹굴 시간만 흘려보냈다. 휴일 하루가 그렇게 저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