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나에게 책이라...  나는 정말 모르겠다.  책이 나에게 어떤 의미냐고 묻는다면 나로서는 정말 할 말이 없다.  이건 정말 멍청한 질문이다.  혹시 이런 질문은 어떨까?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나도 안다.  궤변도 그런 궤변이 없다는 사실을.  그러나 나에게는 그 질문이 그 질문일 뿐이다.  왜냐하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말하자면 기억할 수 있는 연령의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책과 떨어져 지냈던 적이 결단코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설명하거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대상과 나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에 곧바로 대답할 수 없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나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스운 대답일지 모르지만 내게 책이란 동일시되는 나 자신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책과 가까워진 계기는 부끄러운 애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폭력 때문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드셨던 아버지를 피해 나는 친구네 집을 전전했고, 그럴 때마다 책에 빠져 들었다.  한국전래동화나 세계문학전집, 셜록 홈즈나 괴도 뤼팽, 심지어 무협소설에 이르기까지 나는 밤이 늦도록 친구의 눈치를 보며 책을 읽었고, 아버지가 잠드셨을 늦은 시각에야 집으로 향하곤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도시로 전학을 나와 형과 함께 자취를 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니, 놓을 수가 없었다.  내가 새로 사귄 도시의 친구들 앞에서 조금이나마 어깨를 펼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은 책밖에 없었으므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해서도 다르지 않았다.  등록금의 부담에서 자유로웠던 나는 아르바이트에서 번 돈으로 마음껏 책을 살 수 있었다.  그만한 호사가 없다고 늘 생각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한 후에도 가방에는 언제나 책이 한두 권쯤 들어 있었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두면서 시작했던 첫 사업에서 큰 실패를 경험했을 때, 그 암울했던 긴 터널을 빠져나오게 한 것도 역시 책이었다.

 

아내뿐만 아니라 나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간혹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게 말할 때가 있다.  책 좀 그만 읽으라고.  그러나 멈추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외로움을 달래주던 어릴 적 기억 때문인지, 친구네 집에서 읽던 책에서 나던 퀴퀴한 곰팡내의 평온한 느낌 때문인지, 아니면 시간의 흐름을 잊기 위함인지...

 

어쩌면 나는 번지점프대 위에 오르는 순간에도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있어야만 안심이 되는 그런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책은 나 자신과 구분되지 않는 그 무엇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이없는 일은 아들놈도 나처럼 책을 즐긴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대책이 없다.  나도 남들처럼 이 질문에 우아하고 멋진 말들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그런 글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형편없는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2014-04-19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길동무로 책을 곁에 두면서
삶을 사랑하시기를 빌어요

꼼쥐 2014-04-24 11:4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아마 제 삶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아침 기온이 하루가 다르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낮아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9월에 출간된 에세이에는 제목만 읽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그런 책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따뜻한 느낌에는 사랑, 가족, 어머니 등등이 있지만 '슬픔'은 따뜻한가 하고 한참 고민한다.  '아무려면 어때.' 나는 너무도 쉽게 고민 같지 않은 고민을 놓아버린다.  가을 하늘이 너무 슬퍼서.  조락의 계절 가을이 가면 곧 겨울이 다가올테지.

 

<허삼관 매혈기>,<인생>, <형제> 등으로 유명한 작가 위화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지 싶다.  위화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들었던 생각은 그의 글이 참 담백하다는 것과 슬픔을 저 깊은 심연으로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으로서 갖는 보편적인 감정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것은 작가가 나와 같은 범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위화의 새책이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에세이를 읽는 재미는 작가에 따라 크게 변한다.  이런 까닭에 인기 소설가의 산문집을 읽고 크게 실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시인이 쓴 에세이에 실망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시인의 산문집에는 낱글자들이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통일성이 떨어지고, 때로는 균형을 잃고 위태위태 쓰러지지만 살아서 통통 튀는 낱글자의 몸짓에 그깟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시인의 산문집은 너무도 쉽게 읽힌다.  아쉬울 정도로.

 

 

 

 

 

 

 

판화가 이철수의 글을 읽노라면 그가 판화가인지, 작가인지, 아니면 구도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일 수도 있겠지만 판화에 새겨 넣은 짧은 글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깊이을 더하여 그 끝에 닿을 수 없는 아득함이 느껴지곤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박완서 작가의 책은 모두 읽었다.  내 독서 취향에 맞았기 때문이겠으나 슬픔의 밑바닥까지 가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그후의 담담함', 나는 작가의 글에서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오르가즘과 같았다.  기쁨의 극한을 성적 오르가즘에서 찾는다면 슬픔의 극한은 뭐라 말해야 할까?  방향은 서로 달라도 그 끝은 서로 통하는 것이겠지.  세상의 모든 끝에는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 낮에 대학 시절의 낡은 노트를 뒤적이다 딴에는 소설이라고 끄적거렸던 제법 긴 글을 보게 되었다.  분명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소설의 소재로 삼았을 텐데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의 얼굴은 통 떠오르지 않는다.  누구였을까?

 

==========================================================================================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말라 있었다.

내용에 비해 턱없이 가벼운 논리.  일상에서 벗어난 말은 언제나 뽀얀 흙먼지처럼 날린다.

진주는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논리가 부딪힐 때마다 매번 가슴이 답답하고, 불같은 성질의 그도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급기야 몰상식한 싸움도 마다하지 않던, 좋지 않은 기억들이 그녀를 현실에서 한발짝 떨어진 침묵의 공간으로 기어들게 만들었다. 몇 번의 체험만으로도 인간은 쉽게 굴복하고 길들여진다.  그에 비하면 일상의 가벼움은 얼마나 자유롭고 따스한가!

지친 일상만을 분주히 떠들어 대는, 청중도 없는 허공을 향해 그렇게 해야만 하는 사람처럼 되는 대로 말을 토하는, 조금은 천박해 보일 정도의, 그저 흔하게 보이는 아줌마라고, 진주 자신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와의 대화에서는 언제나 맨밥을 먹는 사람이 쉬어빠진 김치라도 원하듯이 간절한 그 무엇을 갈망하게 했다.  중심에서 벗어난 그녀의 상념은 거실의 벽을 훑고, 부엌에 흩어진 설거지 꺼리를 더듬어 그녀의 구멍 난 양말에 와서야 끝났다.

“지금 듣고 있어?”

그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진주는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응, 듣고 있어.”

“그런데 왜 대답이 없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대답 좀 해라. 아무 대꾸도 없으면 얼마나 기분 나쁜지 알아?”

그는 분명 수화기 건너편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을 터였다.


  진주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7년 전 어느 무더운 여름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는 더위 속에서 친구의 집을 찾던 그녀는 잠시 땀을 식히려 편의점에 들렀다.  서늘한 냉기에 등줄기의 땀이 잦아들 즈음 진주는 비로소 주변을 

 

==================================================================================

글의 서두만 옮겼다.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되고, 제목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라는 경제학 공부는 멀리하고 나는 참 쓸 데 없는 일에만 시간을 허비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며칠 전 대학 시절 나와 친하게 지내던 선배 한 분이 전화를 했다.
무심한 성격인 나는 알고 지내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언제나 마음 뿐이지 금세 잊어버리곤 한다.  그러다 보면 가까운 사람들과도 한달에 한번 이상 통화하기가 어렵다.  그래서일까 나이나 성별을 무시하고 내 전화를 기다리기 보다는 상대방이 먼저 전화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잘못된 습관인 줄 뻔히 알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선배는 참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당시 여의도의 작은 사무실에서 무역업을 하던 선배는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자신의 취미 생활에 열심이었다.  그런 날이면 언제나 내게 전화를 했다.  시골에서 문화생활이라곤 누려 본 적이 없는 나를 가엾게 여긴 탓인지, 아니면 연애에는 통 관심이 없었던 사람인지라 마땅히 같이 갈 사람을 찾기 어려웠던 까닭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공짜 티켓을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반 강제적으로 나를 공연장으로 끌고 다녔다.

언젠가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아시안 유스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이 있었다.
그날도 선배는 내게 전화를 걸어 강의 이후 시간을 비워두라는 명령(?)을 하고는 다짜고짜 내가 다니는 대학으로 데리러 오겠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작은 일에도 잘 삐치는 성격의 선배인지라 나는 감히 선배의 청을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선배의 사무실에서 우리 학교까지는 자가용으로도 족히 한 시간 이상이 걸리는 먼 거리였고, 학교에서 예술의 전당까지는 더 멀었다.  정체가 심한 퇴근 시간에 그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데리러 오겠다는 선배의 성의(?)가 가상하기도 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공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당시 클래식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격식을 갖춘 그런 자리가 영 마뜩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갖춰 입을 옷도 없었고, 길고 지루한 공연 시간 내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걱정이었으니 결코 편안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배는 마냥 들뜬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구스타프 말러의 열렬한 팬이었던 선배는 말러의 곡이 연주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찾아가곤 했었다.

그날의 공연은 미국의 유명한 작곡가겸 지휘자인 루카스 포스가 지휘봉을 잡고 소프라노 엘리 아멜링이 협연했으며 연주 프로그램은 다케미스의 `오각정원으로 흘러내리는 한줌의 선율', 말러의 `교향곡 제 4번'이었다.  선배는 잔잔한 클래식 선율에 한껏 도취되어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여름 밤의 낭만에 흠뻑 취한 선배와는 달리 나는 공연이 빨리 끝나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선배는 악기를 잘 다루지는 못했지만 음악 공연을 갈 때는 그날 연주될 곡목의 악보를 구해 거의 외다시피 한 후에 공연장을 찾는 사람이었다.  청중의 입장에서 선배는 애호가의 수준을 넘어 준 프로급의 음악인이었다.  그러니 그 당시 선배의 눈에 나는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는가.  예술의 전당 건너편의 감자탕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도 선배의 공연 이야기는 그치지 않았다.  학창시절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는 선배의 고백이 믿기 어려웠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는 열정을 잃지 않았던 선배를 통하여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요즘도 가끔 시집(詩集)을 펼칠 때면 선배 생각을 하며 마음에 드는 시 몇 편쯤은 외우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가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이 대중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 예술가의 노력에 대한 작은 보답이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그들의 노력을 너무 쉽게 잊고, 너무 쉽게 흘려버리며 사는지도 모른다.

열정적인 음악 애호가로, 사업가로, 아마추어 골퍼로 살면서도 여전히 연애에는 무관심한 선배는 이 여름의 더위에도 시원한 미소를 짓게 하는 사람이다.
"형, 그거 아시우?  올해 형 나이가 도대체 몇이우?  제발 장가 좀 드시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동안 꽃샘추위가 맹위를 떨치더니 언제 그랬냐는듯 포근하다.
블로그에서도 뜸하던 사람들이 한 분 두 분 다시 돌아오고, 보지 못했던 이름들도 속속 올라오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봄은 꿈을 꾸는 계절이요, 알 수 없는 희망에 들뜨게 하는 계절인가 보다.  창밖으로는 노란 개나리를 닮은 유치원생들이 줄을 지어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얼마전 한 블로거님의 글을 읽으며 문득 옛추억이 떠올랐었다.
모르긴 몰라도 소설가를 꿈꾸는 분일텐데 자신이 쓴 소설을 블로그에 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저 독자의 입장에서 읽었던 탓에 뭐라 평을 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분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 긴 글을 쓰는 동안에는 진정 행복할 것이라 믿는다.
 
아마 내가 대입 수능을 마친 고등학교 졸업 무렵이었을 것이다.
부모님과 떨어져 형들과 자취를 하고 있던 나는 기차 여행이 잦은 편이었다.
왜 그런 결심이 섰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어느날 문득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낯 모르는 사람들과 서먹한 얼굴로 서너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보낸다는 것도 지루하고, 멍하니 창밖의 풍경에만 시선을 두는 것도 참으로 따분한 일이었나 보다.  무엇보다 입시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느낌이 나를 무언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 수집’은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나는 기차를 타기 전에 항상 작은 메모 수첩과 연필을 챙겼고, ’오늘은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하는 기대감으로 설레었다.
기차에 오르면 옆좌석에 앉은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선 사람의 인사에 한동안 의아해 하다가 궁금해서 묻곤 했었다.
"저를 아세요?" 하고.
그때마다 나는 동행하게 되어 반갑다며 나의 신분을 밝히고는 가슴 주머니에 고이 지참했던 수첩과 연필을 꺼내 들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옆좌석에 우연히 앉게된 동행인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사람들이 다들 순진했던지, 아니면 내 얼굴이 선량해 보였던 탓인지 싫다 않고 이야기 보따리를 선선히 풀어나갔다.
그 중 사오십대의 중년층은 내게 빼놓을 수 없는 고객(?)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하곤 했다.  
"내 얘기를 소설로 엮으면 모르긴 몰라도 한 트럭으로도 부족할거야."

나는 그들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깨알같이 수첩에 옮겨 적었다.
간혹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목적지를 지나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얼마나 미안하고 죄송했는지...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단편소설로 옮겨 우편으로 보내주겠노라고 하면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주소를 손수 적어주며 꼭 부쳐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때로는 전화번호를 일러주며 자신의 집에 놀러오라는 분들도 더러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수첩에 적힌 이야기를 토대로 어떻게 글을 꾸밀까 하는 생각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이왕이면 그들의 이야기를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내 자신의 역량으로 최대한 빛나게 해주고 싶었다.  나 스스로도 그분들의 삶을 같이 사는 느낌이었다.
한 작품이 완성되면 낡은 수동 타자기에 하얀 종이를 끼우고 혹시 오타라도 나지 않을까 조심조심 타이핑을 쳤다.  그렇게 정성을 들인 원고를 곱게 접어 편지봉투에 넣는 날 나는 무척이나 행복했었다.

여행 횟수에 비례하여 내가 모은 이야기와 주소도 하나 둘 늘어만 갔다. 
나의 ’이야기 수집’은 내가 군에 입대하면서 끝이 났다.
이제는 연락도 끊겨 영영 뵐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지만, 가끔씩 그들이 그리워지면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그때 들었던 이야기 한토막을 들려주곤 한다.
나도 이제 ’이야기 수집가’가 아닌 ’이야기 전달자’로 누군가에게 ’그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남보다 튀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1등만 기억하는 치열한 경쟁사회.
내가 들었던 이야기들은 봄날에 피어나는 이름 모를 야생화처럼 튀지도, 별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내 편지를 받았던 사람들은 왜 그렇게 기뻐했을까?
특별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던 것일까?  
밋밋하고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이야기가 하얀 종이 위에 활자로 살아난 모습을 보면 누군들 감동하지 않으랴.
튀지 않고, 기괴하지도 않은 그들의 잔잔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몇번의 이사로 그 이야기들은 대부분 기록에서 사라졌지만 내 가슴에는 여전히 진한 감동으로 남아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