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번잡한 일상을 쉼 없이 살다 보면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나 향수처럼 자연을 닮은 맑고 투명한 글이 가득한 책 한 권쯤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우리의 육체가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순수함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에 대한 향수도 깊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한 편의 시가 그리워지기도 하고, 가슴 절절한 한 편의 소설이 생각나기도 하고, 자연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한 편의 에세이가 떠오르기도 한다. 책 없이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이들에게 내린 천형(天刑)! 순수함으로부터의 도피를 도통 용납하지 않는 시대 부적응자로서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이러한 운명을 나는 독서 애호가 중 한 명으로서 기꺼이 순응하며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을 하듯 책을 읽는다. 사랑에 빠지듯 책 속으로 들어간다. 희망을 품고, 조바심을 낸다. 단 하나의 몸 안에서 수면을 찾고, 단 하나의 문장 속에서 침묵에 가닿겠다는, 그런 욕구의 부추김을 받으며, 그런 욕구의 물리칠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다. 조바심을 내며, 희망을 품는다. 그러다 때로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이 목소리처럼, 일체의 조바심을 몰아내고 일체의 희망에 딴죽을 거는 무언가다. 그것은 위로하려 하지 않고 마음을 진정시키며, 유혹하지 않고 황홀감을 준다. 자체 안에서 자신의 종말과 죽음의 슬픔, 어둠을 품고 있는 무언가다. 스스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그것에 귀 기울이는 자는 이제 자신이 피신할 데도, 의지할 데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는 자신에게서 해방되어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p.108~P.109)


프랑스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인 크리스티앙 보뱅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겠지만, 우리가 어린 시절의 순수함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어느 날 아침 문득 들었다면 그의 글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와 같은 생각의 저변에는 보뱅의 글에서 느낄 수 있는 깊은 사유와 자연을 닮은 서정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것은 상업적 작품에만 몰두하는 어느 베스트셀러 작가의 얕은 지식과 일회성의 사유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비교불가의 위로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울림이다.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전해지는 저릿저릿한 느낌과 원시에 가까운 순수로의 무모한 회귀. 고해성사를 하듯 나는 보뱅의 글을 읽는다.


"위대한 책은 그 책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시작된다. 어떤 책이 위대하다는 건, 그 책에서 점차 드러나 보이는 절망의 위대함을 의미한다. 책 위에 무겁게 드리워져 책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한참을 가로막는 그 모든 어둠을 의미한다. 책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 책이 있기 전, 글이 써지기도 전에 모든 것이 시작된다."  (p.47)


짧은 서문과 아홉 편의 텍스트를 모아 엮은 보뱅의 산문집 <작은 파티 드레스>는 제목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에세이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난해함이나 기이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문장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일상의 황폐함에서 오는 순수함으로부터의 거리일 수도 있다. 일상의 피로에 찌들 대로 찌든 우리네 삶이 방향을 잃은 채 표류하는 동안 우리의 영혼 역시 자연의 순수함으로부터 아주 멀리 떠나오고야 말았던 게 아닐까.


"객관적인 눈으로 차분히 행하는 독서가 완벽한 독서는 아니다. 그런 독서가 핵심에 이르는 독서는 아니다. 그런 독서는 책의 검은 광맥을 건드리지 못한다. 책에 담겨 있고 당신의 눈과 삶의 저변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반짝이는 진실의 핵을 건드리지 못한다. 당신의 눈 속, 삶의 저변. 즉 근원에 가 닿는 또 다른 독서만이 당신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당신 안에 자리한 책의 뿌리로 직접 가 닿는 독서, 하나의 문장이 살 속 깊은 곳을 공략하는 독서."  (p.48)


힘들고 팍팍한 현실 탓인지 내 영혼에서도 서걱거리는 모래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게다가 이 시대를 책임져야 할 젊은이들 역시 각종 자격증 취득을 위한 수험서나 자기 계발서 등 실용서 위주의 독서만 할 뿐 문학서적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 장마가 코앞인데 현실에서 체감하는 온도는 영하의 찬바람이 부는 듯한 것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책을 읽는 건, '고통이 제자리를 찾게 하려는 거'라고 썼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가난한 삶과 그로부터 오는 고통을 통하여 글도 쓸 수 있고, 자신의 고통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마치 꿈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해 들어 첫 폭염주의보가 발효된 탓인지 거리에는 사람들 발길이 뚝 끊겼다. 이따금 강한 햇살과 타는 듯한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이 제 갈길을 가겠다는 몇몇 학생들의 젊은 혈기와 만용이 쏟아지는 햇살에 저항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베리아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는 등 이상 고온 현상이 지구 곳곳에서 관측되는 요즘, 올여름을 어찌 나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여름이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골목골목 가득했다. 말하자면 여름은 아이들의 계절이었다.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더위에 지쳐 강물에 멱을 감기도 하고, 어스름한 달밤이면 참외며 수박 등 군것질 거리를 찾아 서리를 모의하기도 했다. 어느 조직이나 그렇지만 그곳에서도 항상 나이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곤 했다. 그러나 정해진 서열에 고분고분 따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어서 코흘리개 꼬마가 제 덩치의 두 배쯤 되는 동네 형에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드는 경우가 더러 있게 마련이었다. 말하자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철없는 어린아이라고 해도 제 살길을 생각하지 않고 무데뽀로 덤비는 경우는 드물었고 자신의 형 혹은 삼촌을 뒷배로 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싸움 실력으로 치자면 한 주먹 거리도 되지 않을 테지만 형이나 삼촌을 믿고 저보다 한참이나 위인 형이나 누나에게 대드는 모습은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광경이었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를 볼 때마다 나는 그 시절의 코흘리개 꼬마를 떠올리곤 한다. 일본과 미국을 뒷배로 삼아 천지분간도 없이 나대는 모습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기껏해야 북한과 중국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밖에 다른 어떤 장점도 없는데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미국의 과도한 경제적 압박이나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 아무런 항의나 거부 의사를 내비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형이나 삼촌의 지시를 받은 코흘리개가 앞뒤 분간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의 말을 그대로 읊어댐으로써 동네 형들에게 따돌림을 받거나 무시를 당하는 형국이랄까. 철부지 어린애라면 제 이속을 차릴 줄 모르니 그와 같은 짓도 거침이 없겠지만 다 큰 어른들이 도대체 뭔 짓거리인지...


올해 들어 처음 있었던 폭염주의보는 저녁이 다 된 지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직장 동료들은 요즘 일본이 방사능 오염수를 방류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해산물을 먹어두자며 점심 식사는 언제나 해산물을 1순위로 하고 있다. 해산물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것도 길어야 한두 달이겠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현실이라는 중력에 갇혀 평생을 살게 된다. 그러나 현실을 바라보는 마음의 태도나 색깔에 따라 체감하는 중력의 크기는 제각각 다르다. 심지어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도 각자가 느끼는 마음의 중력은 서로 다르고, 다를 수밖에 없다. 성장 배경을 비롯한 마음을 둘러싼 외부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운동에는 언제나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현실을 향해 이끌리는 구심력과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꿈과 낭만 혹은 무관심 등과 같은 원심력이 늘 존재하게 마련이다. 양귀자의 소설 <모순>은 우리가 마음속의 구심력과 원심력 중 어느 한편으로 극단적으로 기울었을 때, 그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는 문제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세상의 숨겨진 진실들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것은 마치 평생 똑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식이요법 환자의 불행과 같은 것일 수 있었다. "  (p.227~p.228)


소설은 주인공인 안진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딱히 불행할 것도 없지만 별 볼일 없는 25살의 어른이 된 안진진. 그녀의 가족 구성원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출과 귀가를 반복하며 가산을 탕진하더니 이제는 장기 가출로 생사마저 불분명한 아버지, 제대 후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건달질을 일삼으며 조폭 두목을 꿈꾸고 있는 동생 진모, 어쩔 수 없이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전사가 된 엄마. 자신의 인생에 양감이 없음에 늘 우울해하던 주인공은 어느 날 아침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며 자신의 인생에 온 생애를 다 걸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시작된 다짐의 첫 번째 과제가 바로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두 남자 중 한 명을 결혼 상대자로 선택하는 것이었다.


"나영규와 만나면 현실이 있고, 김장우와 같이 있으면 몽상이 있다.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끝까지 달려가고 싶은 무엇, 부딪쳐 깨지더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 그렇게 죽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강렬한 무엇, 그 무엇으로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힘이 사랑이라면,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의 손을 잡았다."  (p.195)


주인공이 그렇게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아마도 9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함께 결혼과 동시에 달라진 엄마와 이모의 극단적인 삶이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만우절인 4월 1일 한날한시에 태어난 엄마와 이모는 거짓말처럼 4월 1일 만우절에 합동결혼식을 치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운명은 그때부터 정 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량처럼 술과 낭만을 찾아 밖으로만 맴돌고 술에 취해 폭력을 행사하던 안진진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이모부는 세상의 중심이 오직 자신의 가족인 성실한 가장이었다. 게다가 성장 과정에서 작고 큰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진진과 동생 진모에 비해 사촌인 주리와 주혁은 말썽 한 번 없이 반듯하게 성장하여 미국 유학길에 올라 있다. 그럼에도 이모는 가슴에 늘 채울 수 없는 휑한 빈자리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주인공인 안진진을 찾았다.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p.173)


안진진이 예비 결혼 상대자로 생각하며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두 남자도 성격과 외모 등 모든 면에서 판이하게 다르다. 즉흥적이고 감성적인 김장우에 비해 모든 걸 계획하고 준비하는 나영규. 자신의 아버지를 닮아 낭만적인 기질이 강했던 안진진은 나영규보다 김장우에게 마음이 끌린다. 그러던 와중에 동생인 진모가 구속된다. 죄목은 살인미수. 그가 사귀던 여자친구의 남자친구를 진모가 자신의 조직원과 함께 살해하려 했다는 혐의였다. 한동안 평안한 날들을 보내던 엄마는 진모의 구명운동에 전력을 다한다. 김장우에게 마음이 기울었던 주인공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나영규와 만나기로 약속하고 이별을 결심했지만 치매와 중풍으로 반송장이 된 채 집에 돌아온 아버지로 인해 이별 통보는 무기한 연기되고 만다.


"행방불명으로 먼 세상을 떠돌던 한 인간이 속세로 귀향하기에 이만한 날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런 말을 알고 있다. 인생은 짧다고,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고. 아버지는 참으로 긴긴 인생을 살았다. 그것이 진정 아버지가 원했던 삶이었을까."  (p.268)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은 소설의 결론 부분에 이르러 일어난다. 마냥 행복한 듯 보였던 이모. 이모는 주인공에게 보낸 편지에 '모든 불행을 떠안은 것 같아 늘 불안해 보이던 엄마의 삶이 부러웠다’고 썼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불행을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동동거리며 종종걸음을 쳐야만 했던 엄마. 크게 걱정할 것이 없어 큰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늘 우아하고 멋진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는 듯 보였던 이모. 그러나 삶의 이면에는 타인이 알 수 없는 마음의 중력이 작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이 저켠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가슴만 아픈 게 아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 안진진, 환한 낮이 가고 어둔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맡아본 적 있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나는 끝내 지고 마는 거야......"  (p94~p.95)


삶의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현실의 구심력이 우리의 팔목을 비틀 때마다 꿈과 이상을 좇아 저 멀리 달아나고도 싶고, 세상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현실을 향해 빠르게 젖어들기도 한다. 우리는 이처럼 현실이라는 마음속의 중력을 가볍게 벗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현실이 주는 익숙함과 안온함에 나른한 향수를 느끼기도 한다. 그 중간에는 언제나 자신의 선택이 존재할 뿐이다. 뭔가 궁리를 하고 자신의 삶을 더 나은 쪽으로 이끌려는 노력이 없다면 삶이란 다만 관에 누운 채 무덤에 묻히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생각이 없는 조용한 삶을 간절히 원하는 건 과연 어떤 연유인지...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p.127)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라는 주인공의 말이 귓가에 쟁쟁한 오후. 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저절로 손그늘을 만들게 되는 초여름의 휴일 오후를 나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벗어날 것인가 아니면 강하게 빨려 들어갈 것인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주인공의 각성은 께느른하게 번지는 오수(午睡)의 유혹에 삼켜진 지 오래.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꺼풀이 감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6. 유유상종에 대하여


거듭 말하지만 시간은 결코 우리 편이 아닙니다. 굳이 어려운 열역학 제2법칙을 꺼내들 것도 없이 시간은 우리들로부터 많은 것을 앗아갑니다. 나는 누구이며, 너는 누구인가?라는 개인의 자의식이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나는 내 경험과 기억의 총체(總體)"라고 말했다면 시간에 대한 대가로 자신을 정립하는 중이라고 퉁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지난 과거에 대해 조금의 후회도 갖지 않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기 어려운 것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시간을 허비한 것에 비해 스스로가 얻은 대가는 아주 미약하거나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대다수인 듯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시간은 결코 우호적이거나 친밀한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우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위에 언급한 내용은 내가 존경하는 어느 인간의 철학을 내 일기에 간추려 옮긴 것입니다. 나의 스승인 천공(千空) 멧돼지의 철학이라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밝히는 바이지만 우리 멧돼지는 근본적으로 철학과 같은 이성적인 추론은 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기시감 멧돼지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라든가, 날리면 멧돼지의 말이라면 무조건 알아서 기라는 둥 현실적인 조언만 할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20년 남짓의 짧은 멧돼지 생애에서 천 개의 구멍(空)을 파는 걸 목표로 열정을 쏟아붓는 스승의 모습에 반하여 다른 멧돼지들이 천공 스승이라 부르며 우러러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언제였던가 천공 스승이 나와 '동운' 멧돼지를 불러 놓고 한마디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천공 스승 왈, "인간의 언어 중에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단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귄다는 뜻이라더구나. 너와 동운 멧돼지는 어쩌면 그리 똑같은지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너희 둘이 떠올랐단다. 다른 멧돼지들에게 조금의 양보나 배려도 용납하지 않는 점도 그렇고, 다른 멧돼지들로부터 요만큼의 해라도 입을라치면 이만큼의 크기로 되갚아주는 점도 판박이처럼 닮았지. 게다가 다른 멧돼지의 뒤통수를 치는 것도, 갚아야 할 복수는 마음속에 반드시 기억하는 것도 서로 흡사하지 않니?"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역시 스승은 스승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내가 리더 멧돼지가 된 지도 벌써 1년이 훌쩍 지났습니다만 나에 대한 지지율은 좀체 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하여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하는 '똥광' 멧돼지를 중용하기로 했습니다. 기시감 멧돼지의 핵 오염수 방류 및 국내 경제의 부진 및 막대한 세수 결손 등 앞으로 나에 대한 지지율을 약화시킬 악재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와 나의 측근들을 비난하는 멧돼지들은 모두 잡아들여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리는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화로울 것입니다. 오늘은 6월 10일, 6.10 민주항쟁 기념일이라는데 이것을 기념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나 또한 그 시절의 리더 멧돼지처럼 거리에 나오는 멧돼지들을 잡아 죽일 생각이니까 말입니다. 내가 비상 도시락으로 키우는 강아지들을 대동하고 '동물 광장'에 나갔다고 전 난리를 치는 멧돼지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욕을 먹을 일인지 지금 생각해도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런 멧돼지들은 모두 잡아 바다에 처넣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늘은 비가 온다는데 가까운 멧돼지들과 술이라도 한 잔 해야겠습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생에 감사해
김혜자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편견이나 경험 탓이겠지만 연예인의 저작을 잘 읽지 않는다. 잘 읽지 않는다기보다 거의 읽지 않는 편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인기를 등에 업은 연예인이 자신의 과거를 왜곡, 윤색하여 홍보용이나 돈벌이용으로 책을 출간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책에 대한 지나친 경외심을 지닌 까닭에 책을 깔보는 듯한 그와 같은 행위가 마음에서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었는지도 모른다.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나는 그동안 일부를 전부인 양 오해하는 일반화의 오류 속에서 나 스스로를 묶어두었음을 깨닫는다. 김혜자의 에세이 <생에 감사해>를 읽어가면서 나는 많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고, 고집스레 지켜왔던 나의 편견과 잘못된 행동에 대해 반성했다.


"어떤 한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뒤에서 희생한 다른 이들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반드시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산도 좋고 물도 좋고 정자까지 좋은 곳은 없습니다. 내가 남편에게도 잘했고, 아이들에게도 너무나 좋은 엄마였고, 그리고 연기도 빼어나게 잘했다? 그런 건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배우로서 살아온 것 말고는 모든 부분에서 부족한 여자였습니다."  (p.221)


평생 동안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매진했던 사람들은 삶에 대한 저마다의 확신과 철학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비단 연예계라고 해서 다를 리 없다. 나는 그것을 간과했었고, 그들의 화려한 삶 뒤에 숨겨진 갖은 구설과 도덕적 결함과 텅 빈 허무를 지레 짐작했었다. 말하자면 나는 모든 연예인의 삶이 껍데기뿐인 공허한 것이라고 내 멋대로 재단했던 것이다.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이처럼 연예인을 뭉뚱그려서 경시하는 데는 전통적인 유교 제도에서 기인한 바가 크겠지만 반상의 계급구조가 사라진 현대에 있어서 그보다는 연예인에 대한 질투와 시기의 감정이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삶은 그냥 살아가는 것밖에 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픈 오스카만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게 아닙니다. 몸이 성한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처음 보는 것처럼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낭비할 때가 많습니다. 며칠을 살더라도 얼마만큼 가득 차게 사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삶은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p.240)


사실 나는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를 그닥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렇다고 예능이나 스포츠에 열광하지도 않는다.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드라마에 정신을 놓고 빠져들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텔레비전과는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는 내가 '김.혜.자'라는 이름 석 자를 똑똑히 기억하는 까닭은 지난 60년간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연기가 단연 돋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배역을 맡으면 '그 사람'이 되어야만 했고, 그렇게 되기 위해 수십, 수백 번 몸부림치며 연기했다는 그녀의 고백처럼 어떤 배역이든 혼신의 힘을 다했던 그녀의 연기에 매료되지 않을 이가 과연 누구이겠는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 까닭 없이 우울하고 절망하는 것은 나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알았습니다. 책을 통해서도 나 같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조금씩은 부조리 연극의 배우들입니다. 단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절망감과 우울증 속에서도 스스로 힘을 내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이고 그것이 인간입니다."  (p.56)


자살을 꿈꾸며 수면제를 사 모으던 한 소녀가 대한민국 국민 전체를 웃고 울리는 국민 배우가 되고 인기 스타의 자리를 유지한 채 수십 년을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은 누구나 매 순간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만의 기적을 창출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그러나 정작 기적을 만드는 본인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을 일구는 일련의 과정임을 깨닫는다면 현실의 생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배우 김혜자는 여러 가상의 삶을 현실로 살아보면서 그 모든 게 기적임을 본인 스스로의 삶 속에서도 깨닫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끝나는 날까지 단정하게 살리라' 책상 위에 있는 달력에 써놓고 생활한다는 그녀는 우리의 이미지 속에서는 언제나 훌륭한 배우이자 연기자로만 각인되어 있지만, 사실은 한 가정의 주부이자 생활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읽지 않았으면 미처 알지 못했을 내밀한 이야기부터 배우로 살아오면서 그녀가 맡았던 여러 배역과 감독들 그리고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 등 배우 김혜자의 삶 전반에 대해 들려주는 이 책은 내가 생각하던 어느 연예인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배우라는 직업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었던 장인(匠人) 김혜자의 삶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뿐이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갖게 해준 그 사람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김혜자의 고백이 가슴 뭉클하게 느껴지는 이 책은 삶에 지치고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작은 희망으로 읽힐지도 모른다. 인생의 황혼녘에 선 대배우 김혜자의 삶이 편안하고 길게 이어질 수 있기를 한 사람의 팬으로서 간절히 기도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