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적으로 아침 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이따금 자신의 부지런함을 마치 전쟁터의 무용담처럼 떠벌리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말입니다. 어제 아침의 일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각에 자주 마주치는 할머니 한 분과 처음 보는 아주머니 한 분의 대화를 옮겨 보면 이러했습니다. "형님, 일찍 나오셨네요. 언제 올라오셨어요?" 하면서 아주머니가 반갑게 묻자 "나? 나는 벌써 산에 올라갔다 내려와서 필라테스도 20분 하고 이제 막 내려가려는 중이야." 하면서 자신의 부지런함을 한껏 뽐내는 듯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 부지런도 하셔라. 몇 시에 나오셨는데요?" 하면서 치켜세우자 "5시가 채 되기 전에 집에서 나왔을 거야." 하면서 별것 아니라는 듯 낮은 목소리로 답을 하고는 잘 다녀오라는 인사와 함께 산을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의 평소 모습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언제나 상냥하고 새초롬한 태도로 일관했던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두 사람의 대화 장면이 꽤나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등산로에서 자주 마주치는 욕쟁이 할머니 역시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듯하여 안타깝기만 합니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지팡이 없이 씩씩하게 걷곤 하셨는데 이제는 지팡이에 의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작은 언덕길에서도 가쁜 숨을 몰아쉬곤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도 양념처럼 가볍게 섞던 욕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어제는 내게, "여자가 이쪽으로 오면 저쪽으로 도망가고, 저쪽으로 오면 이쪽으로 도망가. 여기에 이상한 여자가 하나 있어." 하면서 말듯 모를 듯한 당부를 하셨습니다. 나는, "네, 알겠습니다. 조심히 내려가세요." 하면서 가볍게 헤어졌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집회 대응 방식을 보면서 내가 등산로에서 만났던 이런저런 사람들을 떠올렸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날이 그날 같은, 그닥 달라질 것도 없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은 이따금 미친(?) 짓거리를 하게 마련입니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던 평범해 보이는 여성 정유정이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아다니던 80년대의 집회 현장처럼 매일매일이 스펙터클한 일상이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해야만 했던 경찰 공무원이라면 평화적인 시위가 무척이나 간절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폭력이 사라진 평화적인 시위가 오랜 시간 이어지다 보니 고위급 경찰 공무원들의 일상 또한 그날이 그날인 듯 지겹기만 했겠지요. 하여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망루에 있던 노조원을 향해 진압봉을 휘둘러 진압하게 했고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조금 더 강한 자극이 필요했을 테고, 이것 또한 자신의 진급 기회를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믿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무방비 상태의 집회 참가자들에게 캡사이신을 마구잡이로 뿌려 고통을 당하게 하는 모습도 앞으로는 자주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행태가 이어지면 집회 참가자들 역시 자구책으로 다른 방법을 강구할 테고 우리는 오래전에 잊었던 80년대의 풍경을 일상처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골에 홀로 사시는 어르신들을 만나본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이 십분 이해가 될 듯합니다. 대화 상대가 없어 말할 기회가 없었던 그들은 어쩌다 만난 사람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던지 종일이라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것처럼 말을 쏟아냅니다. 듣는 사람이 말을 끊고 돌아서는 게 미안할 정도로 말입니다. 현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은 그날이 그날 같은 평화로운 일상이 무척이나 지겨웠는지도 모릅니다. 피를 흘리고 고통을 받는 모습이 그 시절의 낭만처럼 그리웠을 테지요.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때로는 혀를 자극하는 양념처럼 일상을 자극하는 강한 충동이 즉각적인 행동으로 옮겨지는 사람도 더러 있는 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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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지른 모유
시쿠 부아르키 지음, 남진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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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의무가 지배하는 일상의 촘촘한 시간 너머로 휴식처럼 드문드문 비가 내렸다. 뭘 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나 목표도 없이 빗줄기는 그저 흘러내리다 기척도 없이 멈춰 서곤 했다. 결코 작위적이거나 어색하지 않은 부작위의 현장. 우리의 삶도 이처럼 자연스러울 수 잇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흘러갈 수만 있다면 우리 곁에서 불행한 사람이 더는 눈에 띄지 않을 텐데... 우선 나부터 시간을 감싸는 저 빗줄기로부터 작은 위안을 얻고 진심으로 감사하며 누군가에게 기쁨의 인사를 나누었을 텐데...


시쿠 부아르키의 소설 <엎지른 모유>를 읽는 동안 오가는 삶의 풍경들을 생각했다. 병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100세 노인 에우라리우의 독백으로 꾸려진 이 소설은 독자들의 시선을 생의 마지막 순간으로 이끌어 간다. 물론 소설에서 주인공은 몸은 물론 그의 기억마저 온전하지 못해 횡설수설하거나 때로는 자신의 진술을 번복하거나 부정하기도 하지만, 소멸되어 가는 개인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결코 스러지지 않는 것은 가슴에 아로새겨진 숭고한 사랑임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내가 얼마나 네가 오는 것을 좋아하는지 안다면, 너는 매일같이 달려올 것이다. 너는 아직까지 나를 인정해 주는 유일한 여자이다. 네가 없다면, 나는 굶어 죽을 것이다. 네가 없다면, 나는 마치 부랑자처럼 매장당할 것이다. 나의 과거도 꺼져갈 것이다. 아무도 나라는 존재의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p.125)


빗소리가 굵어졌다 가늘어지는 반복을 거듭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기도 하고, 잠에서 깬 나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아파트 정원수의 묵묵함을 넋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중심 서사는 첫사랑이었던 아내 마틸지의 실종이다. 에우라리우의 생애는 마틸지와 함께 했던 삶과 마틸지가 없는 이후의 삶으로 나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오랜 그리움과 기다림 속에는 상대방에 대한 질투와 불신, 분노와 절망, 의심과 회의 등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하나 둘 들러붙는다.


"만일 이 근처에 신부님이 있으면 고해성사를 할 수 있도록 나에게 좀 안내해 줘라. 나는 아내를 알게 된 날부터 평생을 죄악 속에서 살았으니까. 미사에 다니던 그 시절, 어떻게 성당에서까지 생각으로 죄를 지었는지 너에게 언제 이야기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세례를 받았으니까, 병자 성사를 받을 권리도 있다. 비록 교리 문답서에서는 육신의 부활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지만 나는 영원한 삶을 믿고 싶다. 마틸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아직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꽤나 말쑥했던 청년이, 십대의 마틸지에 비해 이렇게나 노쇠한 상태로 영원으로 나아가는 것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p.178~p.179)


에우라리우의 길고도 지독한 사랑 이야기는 브라질의 어두웠던 식민지 역사를 동반한다. 유력 정치인 가문의 아들이었던 에우라리우에 비해 백인 농장주와 그의 성적 노리개였던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났던 마틸지, 그녀는 이른바 뮬라토였다. 브라질의 근대사에서 뮬라토들이 대를 거듭해 빈민으로 전락하는 과정과 이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투쟁사, 독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 등이 에우라리우 개인의 지독한 사랑담과 더불어 장대하게 펼쳐지는 이 소설은 지구 반대편의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우리 곁에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인 듯 친근하게 읽힌다.


"시내에 마틸지에 대한 새로운 소문이 떠도는 게 확실했다. 나를 버리고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식료품 가게와 카페 그리고 이발소에서 사람들이 등 뒤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그들이 아내의 혹시 모를 숨겨진 애인들을 추측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나타나면, 마치 속고 산 남편에 대한 배려의 차원이라는 듯이 깊은 침묵이 맴돌았다."  (p.207)


딸과 남편만 남겨두고 사라진 아내 마틸지와 떠날 수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마틸지의 숨겨진 비밀. 그렇게 시작된 죽음의 비밀을 마침내 알고 가슴을 치게 되는 한 남자의 아련한 사랑과 회한이 먹먹하게 전해 온다. 의무가 지배하는 일상의 촘촘한 시간 너머로 휴식처럼 드문드문 비가 내리고 나는 이따금 고양이처럼 까무룩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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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 보면 흐드러지게 핀 넝쿨장미의 붉은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바야흐로 5월. 며칠 전부터 시작된 초여름의 이른 더위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성하(盛夏)의 불구덩이를 더욱 두렵게 하고, 우리 역사에 기록된 5월의 아픈 기억들은 장미꽃보다 붉다. 1980년 5월 광주를 떠올리는 5.18 민주화 운동,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4주기를 맞는 5월 23일. 그러나 5.18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많고, 그들을 대표하는 정당의 대통령은 5.18 희생자를 애도하고 유가족을 위로해야 할 자리에서 "저는 광주와 호남의 혁신 정신이 인공지능(AI)과 첨단 과학 기술의 고도화를 이뤄내고, 이러한 성취를 미래세대에 계승시킬 수 있도록 대통령으로서 제대로 뒷받침하겠습니다."라든가 "우리는 모두 오월의 정신으로 위협과 도전에 직면한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실천하며 창의와 혁신의 정신으로 산업의 고도화와 경제의 번영을 이뤄내야 합니다."와 같은 별 시답잖은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이게 과연 5월 영령들 앞에서 할 소리인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후쿠시마 오염수 시찰단이 오늘 출국했다. 오염수의 안전성을 검증하기보다는 일본의 설명을 듣고 견학을 하는 차원의 방문이기 때문에 일본 측 주장을 이웃 당사국의 입장에서 정당화하는 역할이 주가 되는 모양새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이를 적극 부인하고 있다. 물론 대통령이 결정한 일을 아랫사람들이 반대할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결국 일본이 정한 일정에 따라 후쿠시마 오염수는 아무런 제재도 없이 바다에 방류될 테고 가장 근접한 이웃국가인 우리나라가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임은 너무도 자명해 보인다. 어제 지인들과 가까운 근교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바람도 적당히 불어 그늘에 있으면 잠이 솔솔 쏟아지는 날씨였다. 고기도 넉넉히 굽고 준비해 온 과일도 넘쳐나서 종래에는 다 먹지도 못하고 남겨야 했지만 모처럼 자연 속에서 보내는 시간은 마냥 좋았다. 그 자리에서도 대화의 주제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였다. 사람들은 다들 방류가 시작되는 순간 해산물 섭취는 끝이라며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나이가 들 만큼 든 사람들, 이를테면 대통령의 주요 지지층은 세상을 살 만큼 살았고, 자식을 낳아야 하는 부담도 없으니 방사능에 오염된 해산물을 먹는다고 해도 크게 해가 될 것도 없지만, 앞길이 구만리인 젊고 어린 사람들은 도대체 어찌 살아야 할지... 모였던 사람들은 저마다 자식 걱정, 손주 걱정에 숙연한 마음이었다.


정부의 세수 결손이 심각한 수준이다. 1분기 국세 수입은 87조 1000억 원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24조 원이나 줄었다. 그럼에도 추경에는 선을 긋고 있는 정부의 기조로 볼 때 올해의 경제 성장 전망치를 달성하는 것 역시 힘에 겨운 게 아닌가 싶다. 다른 나라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줄줄이 높여 잡고 있지만 국내외의 연구 기관 모두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률 전망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낮춰 잡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마이너스 성장도 어렵지 않을 기세다. 하루가 다르게 물가는 오르고,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가 무역적자액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세수 결손을 바라보는 정부는 망연자실 손을 놓고 있고... 도대체 국민들은 누굴 믿고 살아야 하나.


과거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5월도 그 끝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직면하지 않은 경제 위기가 먹구름처럼 다가오고 있다. 아픈 기억의 5월보다 더 심하게 아플지도 모르는 암울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전에 좋아하는 해산물이나 맘껏 먹어야겠다. 일말의 후회도 남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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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하는가 - 지금 당신이 가장 뜨겁게 물어야 할 첫 번째 질문
이나모리 가즈오 지음, 김윤경 옮김 / 다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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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원 태풍이 불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기업의 걱정과 불안이 밑바탕에 깔린 결과이지만 갈수록 기업의 이익이 줄어드는 현실을 그저 두고 볼 수만은 없는 현실적 판단이 초래한 자구책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어려움을 비교적 잘 헤쳐 나왔던 대한민국의 경제에 검은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청년 취업률이 급격히 감소하는 현실. 그렇다고 노인 인구의 경제적 자립도가 높아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달리 뾰족한 대안도 없으면서 탈 중국을 외쳤던 어느 망상가의 취중 실언이 대한민국 전체를 위기에 빠트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세계 10위를 넘나드는 대한민국의 경제 규모로 볼 때 어느 한 사람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건 너무나 창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한민국 경제를 움직이는 조직 전체의 수준이 이전 정부에 비해 턱없이 낮아졌으면 몰라도...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젊은 직원들 역시 자신의 자리가 언제 사라질지 몰라 불안에 떨거나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일하는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곰곰 생각하곤 한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해 보이지만 좀 더 거창한 다른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것 역시 가식적으로 느껴진다. 우장춘 박사의 사위이면서 교세라의 창업자이기도 한 이나모리 가즈오의 저서 <왜 일하는가>를 꺼내 읽은 것도 그런 정황과 맞닿아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는 건, 어쩌면 손에 잡히지 않는 파랑새를 쫓아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환상을 좇기보다는 눈앞에 놓인 일부터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훨씬 중요하다. 일을 좋아하고 사랑하면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게 되고, 노력을 노력이라 여기지 않으며,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일에 완전히 몰입하면 저절로 추진력도 붙는다. 추진력이 붙으면 성과도 좋게 나타나고, 덩달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도 받게 된다. 주위에서 칭찬해 주면 내가 하는 일이 더 좋아지고 그 일에 더 집중하게 되는 선순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바로 이렇게 우리 인생에 선순환이 시작된다."  (p.90)


'일하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과 경험을 통해 일이 우리 인생에 가능성을 이야기하고자' 했다는 이 책은 사실 이전에 두어 번 읽었던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힘들고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때면 하시라도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지방대 출신의 가난한 청년이 일을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해 가는 경험이 책을 읽는 독자 누구에게나 깊은 울림으로 전해지는 이 책은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현대인의 일상에 한 줄기 의욕을 불끈 심어준다. 게다가 자신의 일에 진저리를 치던 마음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반발과 원망하는 마음만 키워갈 것인지, 아니면 어려운 요구라도 자신을 성장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일지는 오직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도착점도 크게 달라진다. 일도 그렇지만, 인생도 마찬가지다."  (p.190)


65세의 나이에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던 저자는 하토야마 총리의 부탁으로 77세의 나이에 파산 직전에 있던 일본항공의 회장에 취임하여 8개월 만에 흑자로 전환시켰던 전력이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일에 대한 열정이 자신을 성공적인 삶으로 이끌어주었다고 회상한다. 우리나라 말에 '울력'이라는 단어가 있다. 출가수행자들이 절 살림에 보탬이 되고 몸을 쓰면서 망상이나 잡념을 떨쳐버리기 위한 수행의 한 방편으로 쓰였던 집단 노동을 일컫는 말이었다. '여러 사람이 힘을 구름처럼 모은다'는 뜻에서 운력(雲力)이라고도 하는데 세속에서는 주로 몸으로 하는 일이나 노동을 뜻하지만 불가에서는 중요한 수행의 일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일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확고한 듯 보인다. 일이란 단순히 생계수단을 넘어 개인의 인격을, 나아가서는 삶 전체를 완성하는 수단이자 방편인 셈이다.


"90년에 걸친 내 삶을 돌이켜볼 때, 앞선 인생 방정식은 삶을 사는 가장 간단하고도 정확한 진리이자, 더 좋은 인생길을 걷기 위해 항상 생각해야 하는 좌우명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소개하고 강조하고 싶다. 올바른 사고방식과 강한 열의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노력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 살려서 세상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바란다. 그런 자세로 일하면 당신의 인생에는 풍요로운 열매가 열리고, 곧 놀라운 세상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p.266)


맑았던 하늘에 조금씩 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구름 사이로 길게 뻗어 나온 가난한 햇살이 공원의 녹음 위를 훑고 지나간다. 우리의 삶도 이렇듯 맑게 빛나던 인생이 한순간에 어두워질 수 있고,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뻗은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각자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왜 일하는가?' 하고 물었을 때, 당신이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이 당신의 인생 전체를 결정할지도 모른다. 하늘을 보면 오늘의 날씨를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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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꽃길만 걷게 해줄게.


이맘때의 등산로는 하얀 꽃길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짙은 향기를 내뿜으며 오가는 등산객들의 마음을 한껏 들뜨게 했던 아카시아꽃의 흰 꽃잎들도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분분히 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봄의 등산로는 딱 두 번 꽃길이 된다. 봄의 상징처럼 화려하게 피었던 벚꽃이 단 한 번의 봄비에 처연히 지고 마는 4월의 어느 시기와 요즘과 같이 아카시아꽃이 지는 시기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흰 카펫처럼 점점이 흩뿌려진 꽃길을 어슬렁거리며 걸을 때마다 괜스레 미안해지곤 한다. 리더 멧돼지로 취임한 지 만 1년이 지났건만 이렇다 할 성과는커녕 다수의 서민 멧돼지들로부터 욕만 무수히 듣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를 열렬히 지지하는 늙다리 멧돼지들로부터 "속이 다 후련하다."는 격려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라고 하겠다. 죄인과 다름없는 내가 이런 꽃길을 걸을 자격이나 있을까마는 언젠가 감옥에 갈 미래라면 지금의 호사를 맘껏 누리는 것도 삶을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게 지금의 생각이다. 뉘라서 이런 호사를 구분 없이 베풀어준다는 말인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는 결혼 전 아내 멧돼지에게 꽃길만 걷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돈과 권력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아내 멧돼지의 욕심과 강한 집착이 매력적으로 보였던 까닭에 나는 이런저런 수컷 멧돼지와 사귀었던 아내 멧돼지의 허물을 못 본 척 덮어둘 수 있었다. 물론 뒷골목 시절 나의 행실도 건전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다. 술에 취한 채 시중을 들던 여러 암컷 멧돼지들을 맘껏 유린하곤 했으니 아내 멧돼지나 나나 도긴개긴, 그 밥에 그 나물이긴 하다. 아무튼 아내 멧돼지에게 눈이 멀었던 나는 어떤 순간에도 제발 나를 버리지 마라 달라며 매달렸었다. 나를 버리지 않는 대신 나는 아내 멧돼지로 하여금 꽃길만 걷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결혼 후 아내 멧돼지는 나의 권력을 이용하여 이런저런 이권에 개입했고, 나는 그때마다 나의 뒷골목 똘마니들을 압박해 수사를 막아주곤 하였다. 그럼에도 리더 멧돼지로 취임한 지금도 아내 멧돼지의 범죄 사실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얼마 전 날리면 멧돼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아내 멧돼지에게 다짐하였다. 내가 있는 한 무슨 일이 있어도 감옥에 가는 일은 없을 거라며 앞으로도 영원히 꽃길만 걷게 해 주겠노라고.


며칠 전 기시감 멧돼지의 방문이 있었다.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고 싶어 하는 일본의 속셈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리더 멧돼지로서 나의 무능력과 아내 멧돼지의 범죄 전력 등을 무마할 수 없는 나로서는 기시감 멧돼지의 요청을 들어주는 대신 나보다 힘이 센 날리면, 기시감 멧돼지를 확실하게 나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물론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뿌리는 순간 수산업에 종사하는 우리나라의 많은 멧돼지들이 모두 직업을 잃게 되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삼중수소에 오염된 여러 수산물을 먹은 수많은 멧돼지들이 대를 이어 그 피해를 감당하게 될 테고... 그러나 나의 신념은 여전히 확고하다. 나라가 망하고 이 땅에 사는 많은 멧돼지들이 죽거나 병이 들어 고통을 받는다 해도 아내 멧돼지의 앞길이 꽃길이라면 그 무엇을 두려워하랴.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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