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카프카 -상 (양장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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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는 안개가 짙었다.

이렇게 농무(霧)가 낀 날의 대기는 달착지근했던 지난 밤의 꿈을 생각나게 한다.  의식이 살짝 걷힌 듯한 틈새로 이치에 닿지 않는 무의식의 장난들이 활개를 치던...  어깨에 매달린 꿈의 무게는 아침운동을 나서는 내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더이상 확산되지 못한 채 안개 속에서 자맥질을 하는 역한 냄새들.  고무 타는 냄새와 화석연료가 불완전 연소를 할 때 내뿜던 역한 냄새가 비위를 거스르며 내 발길을 붙잡는다.  약간의 편두통이 있었고, 메슥메슥한 고약한 느낌이 있었다.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올 때에도 어둠은 채 걷히지 않았고, 그 희미한 어둠 속에서 농무는 더욱 짙어진 듯했다.  어느 만화영화의 배경처럼 안개가 낀 숲은 괴괴한 느낌마저 감돌았다.  나는 그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생각했다.  내 의식의 투명한 유리잔에 지문처럼 묻어나는 무의식의 저편.  뜬금없다.  인적이 끊긴 조용한 숲에서 나는 그렇게 <해변의 카프카>를 떠올렸고, 분주히 나무를 타는 청설모 한 쌍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해변의 카프카>를 처음 읽었던 것은 내가 처음부터 무모하게 시작했던 사업을 정리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그때 나는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막연히 소일하고 있었고, 다가올 미래는 마치 오늘의 안개처럼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불안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책을 읽고 있던 내가 남들 눈에는 태평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당시의 내 불안의 정도는 다른 어떤 것에도 의식을 집중할 수 없을 만큼 심한 것이었다.  나는 내 의식을 옥죄어 오는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순간순간의 기억마저 의도적으로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여러 가지 소중한 것을 계속 잃고 있어."  전화벨이 그친 다음에 그는 말한다.  "소중한 기회와 가능성, 돌이킬 수 없는 감정, 그것이 살아가는 하나의 의미지.  하지만 우리 머릿속에는, 아마 머릿속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을 기억으로 남겨두기 위한 작은 방이 있어.  아마 이 도서관의 서가 같은 방일 거야.  그리고 우리는 자기 마음의 정확한 현주소를 알기 위해, 그 방을 위한 검색 카드를 계속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지.  청소를 하거나 공기를 바꿔 넣거나, 꽃의 물을 바꿔주거나 하는 일도 해야 하고.  바꿔 말하면, 넌 영원히 너 자신의 도서관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거야."    (하권 p.449)

 

<해변의 카프카>는 서로 관련도 없어 보이는 사건과 인물들이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오늘 아침 집 근처의 도서관에서 빌린 <해변의 카프카>를 만10년 만에 다시 읽는다.  그때의 불안했던 내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쨌든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고, 그간의 추억들이 비 오는 날 솔잎에 맺힌 작은 물방울처럼 조롱조롱하다.  내가 불러낸 기억들과 얼굴을 맞대고 함께 읽었다.  나는 그때 '왜 작가는 하필이면 오이디푸스 신화를 책으로 엮을 생각을 했을까?' 하고 궁금해 했으며, 시간의 비가역성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시공간을 넘나드는 소설의 전개 방식에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었다.

 

"다무라 군, 우리 인생에는 되돌아갈 수 없는 한계점이 있어.  그리고 훨씬 적기는 하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점도 있지.  그런 한계점에 이르면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들은 그저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거야."    (상권 p.315)

 

한참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 나는 한 편의 소설을 매개로 그때의 나를 되돌아 본다.  나는 그때 상상력이 결여된 공허한 인간이었고, 오직 그 불안했던 현실의 한 순간이 훌쩍 다른 시간대로 옮겨지기를 간절히 원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는 그 고통의 순간순간을 한발짝도 뛰어넘지 못하고 주어진 시간들을 꼭꼭 눌러 밟으며 천천히, 아주 느리게 지나쳐 왔다. 

 

"차별당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인지, 그것은 차별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아픔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그 뒤에는 개별적인 상처 자국이 남아.  그렇기 때문에 공평함이나 공정함을 추구하는 데에는 나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다만 내가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이지.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즉 쉽게 말하자면, 조금 전 도서관의 실태를 조사하러 온 두 여성 같은 인간들이라구."    (상권p.351)

 

15세의 소년 다무라 카프카를 통하여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10년 전의 나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입구의 돌'처럼 일본에는 혹시 시간여행을 가능케 하는 웜홀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또 다른 시간대로 훌쩍 떠나고도 싶었었다.  그러나 소설 속의 다무라 카프카가 판타지와 같은 환상의 세계를 경험한 후 현실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처럼 삶의 기억들은 아름다운 무늬로 누군가의 가슴 속에 새겨질 수 있음을 나는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결국 소중한 것은 내게 주어진 시간과 그 시간을 밟고 지나가는 나의 기억들임을 다시 읽은 한 편의 소설을 통하여 나는 되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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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여린 마음을 위로하려는 듯 부드럽기 그지없는 비다.  나는 잠깐 산책을 했고, 속삭이는 빗소리를 들었고, 이따금씩 우산을 옆으로 젖힌 채 한두 방울의 비를 맞곤 했다.  겨울을 준비하는 모든 생명체의 바쁜 일상은 잿빛 어둠에 묻혀 가뭇하다.

10월에 출간된 에세이를 둘러본다.  반가운 이름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윤기, 이외수, 잭 캔필드, 안셀름 그륀 신부님...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다.

 

 

'책'이라는 단어가 있는 책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아주 오래된 습관처럼 나도 모르게 스르르 끌리는 것이다.  저자의 이름에 '잭 캔필드'가 보인다.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이다.  물론 다른 많은 작가들이 등장하지만, 나는 오직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의 저자인 잭 캔필드만 보고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볼 수 있는 권리'가 내게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딱히 종교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나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안셀름 그륀 신부님을 사랑한다.  그의 따뜻함이 좋고, 밝고 투명한 그의 영혼이 좋다.  게다가 나는 한 때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던 그 순간에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책을 통하여 위로를 받았다.  <자기 자신 잘 대하기>를 비롯하여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머물지 말고 흘러라>, <삶을 배우는 작은 학교>, <노년의 기술> 등 신부님이 쓴 주옥같은 책들을 지금도 가끔 들춰보곤 한다.  나는 그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져 오는 것을 느낀다.

 

 

 

 

내가 이윤기 작가를 다시 평가할 수 있었던 계기는 그의 산문집 <무지개와 프리즘>을 읽은 직후였다.  나는 이제껏 무릇 작가라고 통칭되는 사람들에게 가장 결여된 것은 '일관성'이라고 여겨왔었고, 내가 읽었던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것을 확인하곤 했었다.  작가에게 있어 '변신'이란 '문학적 재능', 또는 '창의성'으로 과대포장 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수시로 얼굴을 바꾸는 작가들의 행태에 나는 얼마 간의 역겨움을 느끼곤 했었다.  그러나 이윤기 작가의 일관성과 뚜렷한 주관, 그리고 두 말 할 필요도 없는 빼어난 글솜씨는 금세 나를 사로잡았다. 

 

 

 

 

 

 

작품 속에서 작가의 진면목을 파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특히나 노련한 작가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세간에 떠도는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작가를 평가한다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다.  대담집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런 데 있다.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던(때로는 드러내는 것을 꺼렸던) 자신의 생각들을 과감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이외수의 생각을 소설가 하창수와의 대담에서 얼마나 보여줄지 자못 궁금하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물의 가족>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의외성'이었다.  그것은 '독창성'과는 구별되는, 당돌함이나 특이함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책을 읽지 못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만 잊고 있었을 뿐이다.  에세이의 제목 또한 도발적이다.  삭발을 한 그의 얼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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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철학자 - School Library 04
알퐁스 도데 지음, 강승민 옮김 / 종이나라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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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하루 종일 목 안이 칼칼했었다.  중국발 스모그가 몰려 온 탓이리라.  그렇다고 중국에 항의도 할 수 없는 처지이고 보면 그야말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수산물은 입에도 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독가스나 다름이 없는 스모그가 몰려 와도 어떤 대책도 없이 손을 놓고 있어야 하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닌가.  이런 오염이 비단 자연환경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터, 우리가 먹는 음식도 예외는 아닐 듯싶다.  오염된 환경에서 자란 식재료에 각종 향신료와 첨가물이 뒤범벅 되어 이제는 옛맛과의 비교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요즘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고 있는데, 한 권 한 권 읽어나갈수록 작금의 오염된 환경에서 생겨난 최근의 책들이 그 오염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하고 지저분해졌는지 새삼 깨닫곤 한다.  화려한 비유나 미사여구,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성적인 묘사 등으로 인하여 책을 읽는 독자는 텍스트를 관통하는 주제에 집중하기보다는 오히려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것에 눈길이 쏠리게 된다.  책을 쓰는 작가들도 이러한 현상을 익히 인지하고 있을 터,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타락하고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반성하기보다는 오히려 독자의 얕은 지식이나 유행을 탓함으로써 자신들의 허물을 합리화시키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삶의 외부에 존재하는 물질의 세계, 이를테면 자연환경이나 문명의 이기, 또는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 등의 심각한 오염은 눈으로 쉽게 확인될 수 있지만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 고전을 읽지 않는다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글의 오염도를 쉽게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요즘 아이들이 사오십 년 전의 된장국 맛과 지금의 된장국 맛을 비교할 수 없는 이치와 비슷하다.  어떤 기준점이 사라졌다고나 할까?  내가 어린 시절에 즐겨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고 있는 요즘, 나는 현대 작가들의 글이 너무도 타락했음을, 그리고 그로 인하여 그 글을 즐겨 읽는 독자들의 영혼도 얼마나 심하게 오염되고 있는지 조금쯤 알 것만 같다.

 

최근에 나는 알퐁스 도데의 소설 <꼬마 철학자>를 다시 읽었다.  내가 알퐁스 도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별>이라는 작품을 읽은 후였다.  그때는 마치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었을 때의 느낌과 흡사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련함과 애틋함이 가슴속에서 한동안 떠나지 않았었다.  조금의 시차는 있었겠지만 <별>을 읽은 여운이 채 사라지기 전에 나는 <꼬마 철학자>를 읽었었다.  작가의 어린 시절을 담은 <꼬마 철학자>를 읽었을 때의 느낌이 어떠했는지는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부피가 두툼한 이 책을 매일매일 아주 조금씩 아껴가며 읽었던 것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고, 이 책의 주인공인 다니엘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것처럼 나도 이제는 그리움이 많아지는 나이가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새로 출간되는 많은 책을 읽었었고, 물과 공기처럼 담백한 글들은 내 관심에서 차츰 멀어졌었다.  '퓨전'이라는 명목으로 본래의 맛을 잃어버린 요즘의 음식에 내 입맛이 길들여지는 것처럼 말이다.  합성 조미료와 향신료를 제거한 음식을 다시 먹어본다면 그 밋밋함에 질색을 하며 물러나지 않을까?        

 

"생제르맹 데 프레 광장의 성당 오른쪽 모퉁이에 있는 6층 건물의 지붕 밑에는 내 가슴을 저리게 하는 창이 하나 나 있다.  바로 형과 내가 살던 방의 창이다.  그곳을 지나칠 때면 지난날 창가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거리를 내려다 보면서 먼 훗날 등 굽은 할아버지가 되어 처량하게 거리를 지나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미소를 띄우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 같은 자크 형과 그 높은 곳에서 살 때 생제르맹 종탑의 낡은 시계는 어김없이 매 시간마다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려주었다.  젊음과 패기로 넘쳐 났었던 그 시절로 단 몇 시간 만이라도 돌아갈 수 있도록 종을 울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었다.  온 정열을 다해 시를 썼던 시절이었다."    (p.262)

 

이 책의 어디에서도 화려한 비유나 단번에 마음과 눈을 사로잡을 만한 현란한 문장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극적인 반전도 없다.  그저 담담히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마치 나른하고 지루한 오후의 시간들이 천천히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화려하지도, 모험과 스릴이 넘치는 것도 아님을 작가는 조용히 말하고 있는 듯하다.

 

"아주 강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상한 꿈을 꾸어도 그저 웃어넘기고 마는 사람이라면, 뭔가 미래의 일을 예감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불안에 시달려본 적이 결코 없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철통 같은 두뇌로 오직 현실만 인정하고 미신 따위는 떠올리지 않는 냉철한 실증주의자라면, 그래서 그 어떤 경우에도 초자연적인 것은 믿지 않고, 논리로 설명해낼 수 없는 것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제부터 펼쳐질 남은 이야기들은 영원한 진실만큼이나 사실이다.  여러분은 믿지 않겠지만......"    (p.460) 

 

진리와 도덕에 대한, 삶의 진면목과 사랑의 가치에 대한 기준점마저 사라진 시대에 진실을 말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체념하기에는 아까운 너무도 소중한 것들이 우리 곁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도 오염되고 훼손된다는 사실이 그저 섬뜩할 뿐이다.  '아, 글도 오염되는구나!'하고 느꼈던 나의 생각이 허망한 것일지도 모른다.  원인도 모른 채, 거부하지 않고, 좋든 싫든 시대의 변화를 다들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다들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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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노래
김중혁 지음 / 마음산책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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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만 있다면 꽁꽁 숨겨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아껴가며 누리고 싶은 계절이요 시간들이다.  청명한 하늘과 막 단풍이 드는 나뭇잎들과 더없이 적당한 기온과 따사로운 햇볕...  그야말로 분에 넘치는 과분한 사치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나는 이 아름다운 계절의 한허리를 베어내어 다락방 한 귀퉁이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동짓달 어느 추운 날에 구비구비 펴고 싶은 심정이다.  황진이의 싯구처럼 말이다.

 

소설가 김중혁의 산문집 <모든 게 노래>를 읽었다.  이 책에 대해 약간의 사전지식이 있는 분이라면 내가 왜 처음부터 구구절절이 계절 얘기를 했는지, 그 계절이 어쨌다는 건지 조금은 알(것이라고 믿지만)지 않을까?  감잡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음악을 (심하게)좋아하는 작가가 계절을 나누어 봄에서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의 노래에 얽힌 추억과 감상을 기록한 책이다.  책에서는 다양한 뮤지션이 소개되고 있고 다양한 장르의 노래가 등장하지만 나는 그 중에 절반도 알지 못했다.  그런 탓에 책을 읽은 시간보다는 책에 소개된 노래를 찾아 듣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것도 일이라고 나중에는 지쳐 쓰러질 정도로 피곤했다.

 

"가을이 되면 실용음악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음악은 귓속으로 들어와 가을의 모든 빛을 풍요롭게 만든다.  음악을 들으며 풍경을 바라보면 빨래 세제 광고처럼 '흰색은 더욱 희게, 색깔은 선명하게' 보인다.  보내도 가지 않던 여름이 가고, 보내고 싶지 않은 가을이 왔다.  바람이 완전, 음악이다."    (p.185~p.186)

 

누구에게나 어느 시절, 어떤 계기로 인해 물리도록 듣던 노래가 있을 것이다.  그런 노래일수록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아니, 쉽게 잊으려 해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어느 날 거리에서 우연히 듣게 된 그 노래에 기억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퇴행을 한다.  마치 정지했던 화면이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마자 재생되는 것처럼 노래를 듣던 그 순간이 노랫말과 함께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피아노 선율에 맞춰 공원 길을 달렸다.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 램프가 어두운 길을 비추고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말없이 걷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와 윤상의 목소리만 들렸다.  가끔 내 숨소리도 들렸다.  머리 위로 키 큰 나무들이 휙휙 지나갔고, 저녁 공기가 모두 코끝으로 밀려들었다.  이런 순간들, 짧은 순간들, 바람 같은 순간들.  음악을 듣고 있으면 순간과 현재를 느끼게 된다.  좋은 음악은 시간을 붙든다.  현재를 정지시키고 순간을 몸에다 각인한다."    (p.28~p.29)

 

언젠가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이 음악을 듣고 있기에 어떤 노래를 듣고 있느냐고 물었었다.  그룹 아바(ABBA)의 맘마미아를 듣고 있었다는 아들의 대답에 순간 움찔했다.  아, 아바라니!  내가 어렸을 때 즐겨 듣던 아바의 노래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 투명한 목소리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비틀스와 카펜터스의 노래를 즐겨 듣던 아들은 이제 아바의 노래를 듣는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아들과 나는 그때의 순간을 추억처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릿해온다.

 

"공부하듯 음악을 듣는 바람에 얻게 된 게 또 하나 있다.  나는 기타를 산 덕분에 음악을 열심히 들었고, 음악을 열심히 들었던 덕분에 소설가가 되었다.  기타를 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사랑하게 됐고, 내게 음악적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됐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음악적 재능을 흠모하게 됐고, 그러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사랑하게 됐고, 음악을 들으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좋아한다는 걸 깨닫게 됐고, 그렇게 소설을 쓰게 됐다."    (p.69)  

 

내 손에 들어온 책들은 대개 쉽게 읽히는 책이 있는가 하면 며칠 동안 끙끙대며 읽어도 무슨 얘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책으로 나뉘게 마련이다.  이 책은 전자에 속하는 책이다.  책에 대한 이런 분류는 단지 책의 쉽고 어려움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다만 책이 독자의 경험과 정서에 얼마나 가까우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김중혁 작가처럼 학창시절을 노래만 들으며 날라리(?)로 보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나는 그야말로 모범생 중에 상 모범생으로 살았다.(쓰고 나니 내 자랑 같다. 자랑 맞다.)

 

"세월을 보내고 나이를 먹으면 우리가 쌓아가는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몇 시간의 기억이다.  밤을 꼴딱 새우며 책을 읽었던 시간들, 처음으로 가본 콘서트장에서 10분처럼 지나가버린 두 시간, 혼자 산책하던 새벽의 한 시간, 그 시간들.  그리고 책 속, 공연장, 산책처럼 현실에 있지만 현실에서 살짝 어긋나 있는 공간에서 우리는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p.229)

 

내가 견딘 시간을 고스란히 추억으로 보상받을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나이가 들며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치열했던 시간보다 뭔가 빈 듯한, 빡빡하지 않고 느슨했던, 다소 성긴 듯하면서도 헐거웠던 그 시간들이 내 지난 삶에서 많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사치스러운 계절에 맘에 드는 노래 한 곳을 반복해서 들으며 하루하루의 숨가뿐 일정표를 잊고 싶다.  어쩌면 우리가 추억이라는 부르는 것들이 반쯤은 뇌에, 그리고 또 반쯤은 음악으로 세포 속에 녹아드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내 몸 어느 구석에 숨죽이고 있던 음악의 기포가 '펑'하고 터지는 순간 나는 반사신경보다 빠르게 그 시절을 떠올릴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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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월드시리즈 1차전이 있었던 날입니다.  관심이 있는 분은 익히 아시겠지만 보스턴 레드삭스가 세인트 루이스를 상대로 8대 1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제목에는 프리메라리가 소속의 유명 축구팀 써놓고 웬 야구 얘기냐구요?  아, 그렇군요. 제가 혹시 낚시글을 쓰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이 드신다면 읽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제가 여기에 쓰려는 얘기는 축구나 야구 얘기는 아니니까 말이죠.  다만 요즘의 제 관심사가 야구나 축구 등 스포츠에 쏠려 있는 관계로 제목을 그렇게 정했을 뿐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나요?  뉴스는 보면 볼수록 짜증만 나는지라 뉴스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지낸 지가 반 년 이상은 되었고, 맘에 드는 드라마도 없고, 그렇다고 특별히 보고 싶은 다큐멘터리도 없으니 관심은 주로 스프츠로 향하게 되더군요.  아무튼 따분한 시간이 지겹도록 오래 지속되는 듯하여 오늘은 낙서 삼아 소설 좀 써보려고 합니다.

 

#소설 1

 

프리메라리가 소속의 두 팀인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가 결승에서 맞붙었습니다.  리오넬 메시를 필두로 네이마르, 이니에스타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한 바르셀로나는 위협적인 호날두와 카시야스, 사비, 벤제마 등이 포진된 레알 마드리드와 붙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하여, 바르셀로나의 감독은 불안한 마음에 심판을 매수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매수된 심판은 경기를 바르셀로나에게 유리하도록 이끌었고, 결국 바르셀로나는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소설 2

이번에는 바르셀로나의 감독이 불법적으로 심판을 매수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심판으로 내정된 사람들이 모두 바르셀로나 감독과 친분이 있거나 우호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심은 숫제 바로셀로나 팀과 한편이 되어 같이 뛰기까지 했습니다.  패스도 하고 태클도 하면서 말이죠.  바르셀로나 팀은 결국 열한 명이 아닌 열두 명이 뛴 셈이죠.  팽팽하게 진행되던 경기는 결국 바르셀로나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경기를 지켜보았던 관중들은 당시에 뭔가 찜찜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결과가 달라질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약간의 의심도 희미해지는 듯하던 어느 날 바르셀로나 감독의 심판 매수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팀의 열성 팬들은 "심판을 매수하기는 했지만 우리는 실력으로 이겼다."고 항변하는 감독을 적극 옹호했습니다.

 

소설 2에 대하여 바르셀로나의 감독은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죄의식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심판이 도와주지 않았어도 실력으로 이길 수 있었던 경기였다고만 주장하였죠.  그러므로 심판도 죄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황당한 상황에서 그들의 주장이 맞다고 박수를 칠 수 있겠습니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민주주의는 스포츠와 같이 룰이 깨지면 모든 것이 깨지는 불안한 시스템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정의로운 법과 제도의 구축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죠.  그러나 완벽히 정의로운 제도는 아닐지라도 그동안 우리가 만들어 놓았던 룰이 지난 대선에서 깨졌다는 것을 스포츠 경기의 관중만도 못한 우리 국민들이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경기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법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실력으로 이겼다는 말만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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