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리크스 - 권력에 속지 않을 권리
마르셀 로젠바흐 & 홀거 슈타르크 지음, 박규호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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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리크스는 정보의 주인과 정보공개에 대한 의사결정, 정보공개에 따른 책임, 정보 민주주의에 대한 인류의 위대한 도전이다.
 
지난 3월 31일 [평화나눔아카데미]의 두 번째 강연 주제였던  '정보화 시대의 새로운 혁명, 위키리크스'를 수강하기 위해 읽은 다니엘 돔 샤이트-베르크의 <위키리크스와>와 책의 이름만 같은 책이다. 저자는 독일의 대표적 주간지 [슈피겔]의 두 기자이며, 다니엘은 위키리크스의 내부자로서 위키리크스의 취지와 목적, 내부 구조와 시스템, 소통방식과 의사결정 구조 등을 이야기한 것이라면, 이 책은 부제 [위키리크스: 권력에 속지 않을 권리]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위키리크스라는 폭로 사이트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와 위키리크스를 탄생시킨 줄리안 어산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아프간, 이라크 전쟁 관련 기밀문서와 이집트 반정부 시위를 유발한 비리 공개까지, 2010년을 거쳐 2011년까지 그 여파가 몰아치고 있는 위키리크스에 대한 지지자와 비판자 양쪽의 인터뷰를 모두 담아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보에 대한 국가의 일방적인 통제를 인정할 수 있는가? 그나마 국가의 3권분립이 이루어진 서구를 놓고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만이 정보의 공개여부를 결정해도 되는가? 3부의 권력 엘리트들은 과연 어떤 정보가 국가의 비밀이 되는지, 언제 어떻게 공개할 지를 결정할 정당한 권한이 있는가? 정보 공개와 관련하여 어디까지가 민주주의라 할 수 있을까?
위키리크스는 위 질문들에 대해 'NO'라고 대답하면서 아무것도 계속 비밀에 부쳐질 수 없으며 모든 것이 대중에게 공개될 때만이 민주주의가 더 성숙되고 그것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이를 실천했다. 그렇다면 먼저 국가가 공개하지 않아야 하는 정보가 있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 정보가 인류와 개인들의 재산과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핵무기나 화학무기 개발 기술은 인류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고 자동차 엔진기술은 특정 회사나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다. 특정한 정보의 경우 테러리스트가 입수하게 되면 심각한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2007년부터 위키리크스가 폭로하여 세계적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킨 대표적인 사례들(율리우스 베어은행, 사이언톨로지, 카우프싱 은행, 미군의 이라크 민간인 학살, 아프카니스탄 전쟁 기록,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 등)을 살펴보면 '인류의 재산과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 유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미국과 여러 국가의 정부가 위키리크스와 어산지를 반역자,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면서 체포하려고 하는 이유는 더욱 '인류의 재산과 생명의 보호'와는 거리가 멀다.
 
위키리크스는 모든 것이 다 정당하고 적합한가?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위키리크스의 문제의식과 취지, 주요한 폭로 내용과 방식, 취재원의 보호, 금전처리 원칙 등에 대해서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전폭적으로 지지,지원할 수 있다. 하지만, 위키리크스의 내부자였던 다니엘의 주장이나 위키리크스 비판자들의 애기 중 몇 가지는 위키리크스와 어산지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가장 중요한 고려 대상은 어떤 정보를 공개해야 하는지 누가 결정할 것이냐에 대한 것이다. 위키리크스의 경우 어산지 개인이 모든 의사결정을 담당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정보독점'인 것이고 결국엔 '권력독점'이 될 것이다.
두 번째는 취재원 보호다. 아직까지 위키리크스의 취재원이 위해를 당한 사례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정보독점을 지켜내고 어산지와 취재원을 추적하는 극우파와 정보기관들의 폭력적인 행태가 확산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어느 언론에서 표현한 것처럼 위키리크스는 민주주의의 축복이 될 것인가, 아니면 저주가 될 것인가? 전 세계 부패 정치인들과 강대국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이 웹사이트의 정체와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위키리크스의 등장은 권력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새로운 정치주체의 출현을 의미한다. 위키리크스는 정보 권력 즉, 정보의 독점적 소유를 문제 삼고 있다. 권력에 의해 진실이 은폐되고 나아가 거짓을 진실처럼 포장하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권력투쟁인 셈이다. 위키리크스는 각국 정부들로부터 정치적 통제권을 빼앗으려는 의도는 없지만, 정보에 대한 국가의 일방적 통제에는 단호히 반대한다. 무엇이 비밀에 부쳐져야 하는가를 ‘함께’ 결정하겠다는 새로운 정치주체가 갑자기 출현하면서 이제 우리는 판단과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게 된 셈이다.
 
저자가 보기에 위키리크스가 분명히 비상하고 특출한 아이디어이지만 또한 디지털 혁명의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다. 비밀 폭로 플랫폼의 컨셉은 새로운 게 아니며 다양한 형태의 선구자들이 있다. 그러나 민주적 공공성과 최선의 제보자 보호를 위한 인터넷의 가능성을 어산지와 그의 협력자들만큼 실행에 옮기며 단기간에 국제적 명성을 쌓은 사람들은 일찍이 없었다. 저자는 위키리크스가 저널리즘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하겠지만 그것을 변화시킬 수는 있다고 판단한다. 위키리크스를 바라보는 언론의 태도와 입장은 예상되는 바이기도 했고 많이 실망한 측면도 있다. 위키리크스가 태동한 여러가지 이유 중 하나가 기존 언론의 역할이 수요자와 시민들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임에도 기존 언론들은 스스로 변하기 보다 위키리크스를 활용하여 자신들의 기사 확보와 돈벌이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존 언론들이 기성 권력과 너무 접근하여 또 다른 권력의 범위안에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한국과 같은 민주주의가 부족한 나라의 경우에는 '권력의 범위'가 아니라 '권력'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에 이미 언론의 기능과 역할을 기대할 수도 없지만...
 
그리고 이 문제적 웹사이트를 만든 사람은 대체 어떤 인물인가?
그 어떤 저널리즘에서도 시도한 바 없고.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이 폭로 사이트 또는 매체를 탄생시킨 사람은 바로 호주 출신의 기이한 해커, 줄리언 어산지라는 남자였다. 저자가 어산지를 처음 만났을 때, 어산지는 배낭과 여행가방 하나만 들고 있었으며 이것이 끊임없이 이동하면 살아가기 위해서 그에게필요한 전부였다. 그런 어산지의 모습과 방식은 68혁명 세대 출신의 어머니와 함께 살아오면서 그가 체득한 그 만의 방식이었다. 어산지는 컴퓨터의 귀재다. 뿐 만 아니라 그는 몇 시간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자신의 300달러짜리 노트북의 키보드를 두드리며 또 하나의 세계 속으로 빠져든다. 
 
어산지는 급진적인 인물이다. 그는 정치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보통의 상식과 기준을 다르게 정의한다. 그의 생각과 행동은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극단으로 치닫는다. 어산지에게는 비전과 카리스마가 있다. 어산지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불러 일으키고 그들을 열광시키고 추종자로 만드는 재능이 있다. 저자는 그의 비상한 카리스마가 분열과 대립을 불러일으키는 가운데서도 대중을 사로잡는 매력을 발산하는 정치가들을 연상시킨다. 

저자의 어산지에 대한 평가는 너무 한 쪽에 치우쳐 있다. 슈피겔이 위키리크스와 밀월관계이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저자들은 기자로서의 중립성을 상실한 측면이 있다. 나는, 정보독점과 권력분산이라는 어산지의 이념과 취지는 충분히 인정하고 동의할 수 있지만 어산지가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 결정하는 방식,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는 방식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어산지가 동일한 방식을 계속 고집할 경우, 위키리크스가 네티즌과 취재원 또는 내부 협력자들에게 외면당하거나 위키리크스와 어산지가 또 다른 '독재권력'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나는 이 조직의 심장이고 영혼이며, 창립자이고 대변인이고 최초의 프로그래머이고 기획자이고 자금조달자이고, 그로 나머지 전부다. 이게 싫으면 네가 떠나라" (줄리언 어산지가 자신을 비판한 아이슬란드의 위키리크스 자원봉사자에게 채팅에서 던진 말) (p.225) 
 
* 책 속의 문장
- 위키리크스 조직의 역사를 우리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추적해왔다. 처음에는 경쟁상대로서 관찰을 시작했다. 탐사보도 저널리즘(investigative journalism)의 핵심 분야에 새 경쟁자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위키리크스 사이트와 그 운영자들에게 좀 더 진지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스위스 은행그룹 율리우스 베어(Julius Baer)의 원본자료들을 위키리크스가 인터넷에 올리고 은행 측이 이를 불법으로 고발한 2008년에 들어서 분명해졌다. 2009년에 우리는 위키리크스가 독일연방정보국 에른스트 우를라우(Ernst Uhrlau) 국장과 교환한 편지들을 읽어보았다. 그것은 위키리크스보다 연방정보국에 훨씬 더 당혹스러운 내용이었다. 우리는 그때 처음으로 위키리크스의 독일 대변인 다니엘 돔샤이트-베르크(Daniel Domscheit-Berg: 2010년 늦가을에 사퇴)와 접촉하였으며, 그 이후 줄곧 만남을 유지하고 있다. (p. 7)
 
* 책 속의 책 : 쉴렛 트레이퍼스 <언더그라운드>, 스티븐 레비 <해커, 그 광기와 비밀의 기록>

[ 2011년 4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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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리크스 - 마침내 드러나는 위험한 진실
다니엘 돔샤이트-베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지식갤러리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2007년부터 위키리스크는 전세계의 ’위험한 진실’을 폭로하기 시작했고 2010년에는 대형 폭로들을 잇달아 터트리면서 세계를 뒤흔들었다. 위키리크스의 등장으로 전세계적으로 언론의 자유 및 알권리와 국가기밀의 보장이라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미국을 필두로 하여 여러 국가의 정부는 위키리크스와 줄리언 어산지(위키리크스 창립자이자 대표격)를 ’디지털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공격하고 있다. 위키리크스 자체가 또 하나의 권력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의견도 상당하다.
 
저자는 2007년에 위키리크스에 합류한 이후 몇 년간 공개적인 대변으로 활동하면서 ’2인자’로 불리기도 했으며 어산지와 가깝게 지냈으나 권력 남용을 폭로하고 정보 공개를 추진하는 위키리스크의 내부 문제를 제기한 후, 어산지와 논쟁을 벌이다가 위키리크스를 떠났다. 이 책은 한 때 세계적인 ’권력’의 비밀을 폭로한 위키리크스에서 주요 활동을 전개한 저자가 위키리크스의 내부를 폭로하고자 써낸 것이다.
 
이 책은 [평화나눔아카데미] 3월 31일 강연(강사 안병진 경의사이버대학 미국학과 교수)의 주제인 ’정보화 시대의 새로운 혁명, 위키리크스’를 듣기 위해 급하게 구하여 읽은 2권 중 첫번 째 책이다. 작년에 위키리크스가 미국 국무부의 대규모 비밀 외교문서를 폭로하여 전세계적으로 파란을 일으켰고 그 폭로가 부분적인 이유가 되어 중동에 ’재스민 혁명’이 발발하였다는 소식에 위키리크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의 주요 내용은 미국 최대의 시스템컨설팅회사에서 네트워크 보안 전문가로 근무하던 저자가 우연히 호기심으로 위키리크스에 발을 들이는 1장 [만남]으로 시작한다. 저자는 위키리크스에 발을 들인 후 얼마되지 않아 위키리크스에서 2인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2007년 말 유럽에서 가장 큰 해커 그룹인 카오스컴퓨터그룹(CCC)이 개최하는 카오스커뮤니케이션콩그레스에서 처음 어산지를 만났다.
 
2장 [율리우스 베어은행]은 위키리크스가 처음으로 세계에 이름을 알린 폭로였다. 위키리크스는 스위스 법정에 기소를 당하지만 여론의 힘으로 무죄판결을 받는다. 3장 [사이언톨로지]는 두 번째로 이름을 알린 폭로였다. 위키리크스는 그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사이비종교(라고 여러사람들이 규정하는...)’ 사이언톨로지의 비밀성경과 관련 기업, 단체를 고발한다.
 
3장 [언론의 생리를 터득하다]는 언론파트너의 필요성을 느끼고 처음으로 언론과 협력하는 과정과 폭로자료의 저작권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5장 [줄리언과의 동거]에서는 2009년 두 달간 줄리언 어산지가 저자의 집에서 머문 동안에 함께한 모습과 어산지의 독특한(괴상한?) 성격과 행동방식을 알게 된다. 6장에서는 위키리크스의 재정문제를, 7장에서는 인터넷 검열에 대한 전세계적인 전쟁을, 8장에서는 아이슬란드 최대 은행인 카우프싱 은행의 내부 자료 폭로와 아이슬란드를 ’언론자유 무역항’으로 만들고자 했던 노력을 이야기한다.
 
9장부터 14장까지는 오프라인 모금활동, 아이슬란드 언론보호 관련 법 추진과정을, 이라크에서 미군 아파치 헬기를 민간인을 저격 살인한 ’부수적인 살인’ 비디오의 폭로, ’부수적인 살인’ 비디오를 내부자료로 올린 브래들리 매닝의 체포, 아프카니스탄 전쟁기록과 ’최후의 심판’ 파일의 공개, 어산지의 스웨덴 여성 성폭행 혐의에 대한 고소와 수배 과정을 이야기한다.
 
저자의 이야기는 자신과 줄리언 어산지가 최초로 외부적인 갈등모습을 보인 것은 아이슬란드에 4주간 머무는 기간동안이었다. 그 사건 이후 어산지와 저자는 화해하지 못했고(저자는 어산지가 화해를 거부했다고 말한다.) 둘 사이의 골을 점점 깊어간다. 줄리언 어산지는 위키리크스 설립자 타이틀에 대한 소문으로 저자를 못미더워하고 미행 강박증도 심해진다.
 
위키리크스의 핵심 멤버들 사이에 본격적인 갈들이 발생한 것은 ’성폭행 혐의건’이었다. 저자와 몇몇은 어산지가 당분간 은신한 것을 제안하지만, 어산지는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제안을 주도한 저자를 정직처분시킨다. 위키리크스 핵심 멤버 여러명이 위키리크스를 떠난 것은 결국 저자의 정직 처분에 대한 내부 논란이 주요 원인이 되었다. 위키리크스에 가장 큰 시련이 닥친 것은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였다.
 
위키리크스가 폭로자를 보호하거나 폭로기술이 아닌 위키리크스의 활동과 정책, 자금과 의사결정 등에 대해서 백악관이나 펜타콘처럼 베일에 쌓여있게 되면 위키리크스도 또 하나의 ’빅 브라더(Big Brother)’(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거대 권력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 책의 내용에 대한 진실 여부, 저자가 위키리크스를 탈퇴한 동기나 향후 거취에 상관 없이 위키리크스 내부를, 내부의 논쟁과정을, 위키리크스와 어산지에 대한 비판을 세상에 공개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역은 없어야 한다.
 
책 속에서 이야기하는 저자의 주장이 모두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키리크스는 ’위키리크스’라는 조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밀과 정보의 투명한 공개’라는 상징과 아젠다로써 의미가 있는 것이고 따라서 제2, 제3의 위키리크스는 당연히 등장해야 하며 웹2.0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계속 나타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는 위키리크스를 함께 탈퇴한 동료들과 ’오픈리크스’를 준비 중이다.
 
한국정부와 권력층은 미국의 좋은 측면보다 나쁜 측면을 더 배워왔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당연하게 국민에게 알려할 권리마저 정부와 권력층이 통제하는 부분이 훨씬 많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도 경향리크스와 같은 노력이, 또 다른 IT 전문가들의 노력이 계속 등장하기를 원한다.
 
[ 2011년 4월 6일 ] 
 
* 책 속의 문장 
- 혹시 위키리크스도 몇 달 사이에 종교적 숭배처럼 변하지 않았는지 반성해 보았다. 솔직히 내부비파닛스템에 있어서는 거의 종교적 숭배 수준이다. 뭔가 잘못 되면 그것은 외부 원인 때문이다. 지도자에게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 외부의 위험이 항상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에 우리는 내적으로 더욱 강하게 응집하여야 한다. 너무 비판적인 사람은 벌로 채팅에서 퇴장당하거나 문책을 받게 된다.(p.66)
 
- 나중에야 비로소 줄리언이 나의 친절을 복종으로 이해했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저 배려 차원에서 그렇게 했을 뿐인데, 줄리언은 나를 자기보다 한참 낮은 사람으로 여긴 듯 싶다.(p.95)
 
- 그(줄리언)가 위키리크스의 설립자이고 위키리크스에 대한 권리가 그에게 있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에게도 그것은 명확했다. 하지만 나 또한 성공에 대한 내 몫을 갖고 싶었다. 나는 열심히 일했다. 내 몫을 요구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p.151)
 
- 받은 자료를 즉시 공개하는 것 그리고 독립적 결정이라는 우리의 고유한 원칙은 한낱 우수갯소리로 전락했다. 언론은 원했던 대로 우리를 자기들 발밑에 두었다. 우리의 손이 묶여 있는 동안 이들은 독점기사를 판매했다. (p.227)
 
- 위키리크스와 달리 오픈리크스는 더 이상 문서를 발행하는 사이트가 아니며, 대신 전체 폭로 과정에서 처음 절반에만 집중한다. 제보자는 익명으로 자료를 제출하고 당연히 안전을 보장받으며 협력파트너는 받은 자료를 분석하여 발행할 수 있다. (p.319)
 
* 책 속의 책 : 피에르 조제프 푸르동 <재산이란 무엇인가>, 제레미 스캐할 <블랙 워터>, P. W. 싱어 <전쟁대행주식회사>, 구스타프 란디우어 <혁명>, 닐 스티븐슨 <크립토노미콘>, 솔제니친 <제1원 First Cir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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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31일 안병진 교수 강의 요지 ]
http://www.nanum.com/site/153905  

 위키리크스의 폭로 : 모든 권력은 비리와 음모로 유지된다
글쓴이 | 안병진 조회수 231 2011.04.04 02:33 http://www.nanum.com/site/153905


“세계는 지금 ‘제1차 세계 정보전쟁’에 돌입했다” - 영국 일간지 <가디언>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은 위키리크스와 줄리안 어산지

2010년 4월.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동영상 한 편이 인터넷에 공개되었습니다.

17분 남짓의 영상에는 마치 전자게임을 즐기듯 이라크 민간인을 사살하는 미군의 모습이 담겨있었는데요.
전쟁의 추악한 실상과 진실을 드러낸 이는 다름아닌 ‘위키리크스’, 그 설립자인 줄리안 어산지였습니다. 

“전쟁을 전자게임 즐기듯 하는 이라크 민간인 살상의 모습은 가장 충격적인 영상이었습니다.

평범한 미군 병사들이 그저 낄낄 웃으면서 민간인을 살육하던 모습이 생생하게 전달되면서 전쟁이 만들어 내는 추악한 실체와 전쟁을 수행하는 자들의 ‘사이코패스’같은 면모가 드러났던 겁니다.
이 영상은 죽고 죽이는 전쟁에서는 상대를 자신과 같은 삶의 의미를 지니는 인격체가 아니라,
전자오락기에 있어서 그냥 제거해야 될 대상으로 여기게 만든다는 사실을 전해줬습니다.”

이 밖에도 위키리크스는 두터운 장막에 가려왔던 수많은 진실들을 차례로 폭로해왔습니다.

2007년 케냐 대선 당시 독재정부와 야권주자가 야합한 내용의 비리문건을 공개해 대선의 결과를 뒤집었고, 2010년엔 미군의 민간인 학살 등이 담긴 아프간 전쟁 관련 기밀문서 9만 2000여건도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UN 사무총장의 생체정보를 파악하라는 지시내용과 세계 각국 정상들에 대한 원색적인 평가를 담은 미국 국무부의 외교전문까지, 모두 위키리크스를 통해 처음 세상의 빛을 보게 되며 묻혀있던 진실이 하나둘씩 밝혀졌는데요.
위키리크스의 활약으로 이제 우리는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결정권자들의 무능, 부패, 무모함을
보다 실제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구’는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무기’가 된다 

위키리크스의 이런 폭로와 활약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마트폰’, ‘스마트TV’에 ‘스마트 슈즈’, ‘스마트 워터’까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요즘 ‘스마트’라는 표현이 넘쳐나고 있는데요,
하지만 이 많은 최첨단 기술이 과연 ‘스마트한 개인’을 만드는가에는 회의적인 시선이 더 많습니다.

안병진 교수는 위키리크스의 활동이 인류가 이뤄놓은 기술 진보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지만
같은 도구를 가지고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합니다.

“위키리크스의 운동은 어떻게 보면 단순합니다.

낡은 서버와 300불짜리 PC, 그리고 단 두 명의 멤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이 전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은 것입니다.
여기 나무젓가락이 있다면, 그것을 제가 들고 있으면 그냥 식사할 때의 나무젓가락이겠지만 이소룡이 들고 있으면 살인무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21세기는 테크놀로지를 누가 어떻게 드느냐에 따라 그것은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고,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순수한 열망이 세상을 바꾸다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세상의 중요한 정보들을 어째서

소수의 위정자와 분야 전문가들만 쥐고 있는가’에 의문을 던진 줄리안 어산지.
안병진 교수는 평범한 도구가 진실의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위키리크스는 시대의 흐름 속에 이해해야 한다며
위키리크스 이전에 순수한 열망으로 세상을 바꿔낸 사례들을 소개했는데요. 

 “세계적인 음원공유 사이트 ’냅스터’를 만든 숀 패닝입니다. 그는

‘친구들과 어떻게 하면 서로가 가진 음악을 공유하고 나누면서 살 수 있을까?’
그래서 밤을 새워 만들어 본 것이 음원 공유 사이트 ‘냅스터’죠.
돈을 주고 사서 들어야 했던 음악을 공짜로 주고 받을 수 있게 하자
’워너뮤직 그룹스’와 같은 다국적 음반회사는 어마어마한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세상에! 여드름투성이의 이 청년이 전세계적인 규모의 다국적 회사를 충격에 몰아넣은 겁니다.”

“이 친구는 수익성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냥 친구들과 우정의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단순하고 소박한 꿈이었던 거예요.(웃음)
그것이 이러한 어마어마한 의미를 가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거죠.
그러나 그때부터 ‘제국의 역습’이 시작됩니다.
이 어린 청년의 행동을 해적질이라 규정하고, 여러 공격을 가했고 그 전쟁은 현재도 진행 중에 있지요.
물론 이 주제와 관련해 여러 논쟁의 여지는 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 일상의 많은 부분들이 다국적 기업이나 권력에 장악되어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죠.
이런 사람들의 문제제기와 변화의 노력이 있었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유사한 이슈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권력은 비밀과 음모로 유지된다 

그렇다면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진실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안병진 교수는 실상 모든 권위있는 정부와 권력이 비밀과 음모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일깨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왜 끊임없이 기밀을 만들어내고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일까요?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임을 자랑하는 CIA에 관한 흥미로운 사례 하나를 소개합니다.

“CIA가 기밀을 유지하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찰머스 존슨이라는 세계적 석학이 CIA에서 자문으로 일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하나가 거의 탐정소설 같은 CIA의 기밀 자료들을 보는 일이 너무 흥미로웠다고 합니다.
늦은 밤까지 서재에서 자료를 뒤져본 이 분의 결론은 ‘CIA 의 분석자료 대부분은 그렇게 탁월한 내용이 아니다’라는 점이었습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채널들을 통해 모은 정보들일 텐데도 말이죠”

“가령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당시
CIA는 ‘소련이 서둘러 진주해야 한다’는 식의 황당한 정책제안을 한다든가, 사실 우리 같은 일반인들도 알아챌 수 있는, 별로 기밀로 여길 가치가 없는 것들도 모두 기밀로 엮여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분이 한 말은 이렇습니다.
‘CIA가 기밀을 유지하는 진정한 이유는 정보의 분석과 보고서 자체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활동을 자신들의 경쟁 조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국익이나 안보라는 명분에서 기밀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조직의 기밀을 유지하는 것 그 자체로부터 조직 보호를 꾀한다는 것인데,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소통’이 아니라 ’저항’

“우리가 어산지의 운동을 주목하고,
앞으로 세계는 위키리크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할 만큼 의미있게 여기는 것은 미 제국의 실체를 폭로하고 끊임없이 확장하려고 하는 미국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는 데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저항을 굉장히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만들어냈다는 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세계의 꿈틀거리고 저항하는 뜨거운 영혼들을 위해

안병진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소통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우리는 소통을 너무 많이 한다.

우리가 부족한 것은 창조이다. 
우리는 현재에 대한 저항이 부족하다” - 들뢰즈 & 가타리

바야흐로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위키리크스가 이룩한 혁명을 통해
강력한 무기 하나를 쥐게 된 셈입니다.
하지만 무기는 그 자체로 빛을 발하지 않습니다.
어둠을 향해 진실의 탄환을 쏠 때에만 비로소 무기는 빛날 수 있다는 교훈과
그 용기를 가슴에 담아봅니다. 

정리 | 이유만 (대학생나눔문화)

2010년 타임지 온라인 독자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은 ’위키리크스’와 ’줄리안 어산지’였습니다.
이들의 활약으로 지금까지 비밀로 유지되던 수많은 진실들이 폭로되었고, 세계는 위키리크스에 열광하거나 이들로 인해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이후 세계의 수많은 전문가들은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진실의 내용을 분석하고 위키리크스가 불러일으킨 새로운 운동에 주목해 왔는데요. 
 

평화나눔 아카데미 두 번째 강사로 모신 안병진 교수는 ’위키리크스로 새로운 정치운동의 지평이 열렸다’고 합니다.  


특히 위키리크스는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미 제국을 향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창조적 저항’이었다고 하는데요. 

지금부터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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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도주의는 전쟁으로 치닫는가? - 그들이 세계를 돕는 이유
카너 폴리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인도적 개입>과 더불어 오늘 공부모임 교재 2권 중 다른 하나다. 저자는 실제 현장에서 일하는 인도주의 활동가로서, 국제앰네스티와 유엔난민기구(UNHCR) 등 각종 인권단체와 인도주의 기구에서 근무하면서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콜롬비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우간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지에서 활동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199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분쟁지역에 대한 인도주의적 무력 개입과 정치적 목적을 둘러싼 논란의 배경, 그리고 구호 활동가들이 겪는 아이러니한 현실과 그 이면에 존재하는 문제의 핵심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1948년 유엔이 설립된 이후, 1970년대부터 조심스럽게 이루어지던 인도주의 활동이 정치적 의도와 '천부적 인권'을 이유로 하여 '정치적 인도주의'로 확대되고 있으며, 결국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애초의 선한 취지는 사라지고 인도주의 자체가 사방에서 비난받는 상황에 대해 공론화시키기 위해 이 책을 발간한 것이다. 즉, "국제관계에 있어서 인도주의의 영향력은 분명히 증가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학문적인 검증은 거의 뒤따르지 않으며, 여전히 근거 없는 통념과 오해가 난무한다."(p.35)하는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한국 역시 '정치적 인도주의'와 무관할 수 없다. 1999년 3월 ‘국군부대의 동티모르 다국적군 파병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해, 그 해 10월부터 4년간 한국의 상록수부대는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의 평화 유지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한국도 국제사회의 한 일원으로 인도주의적 개입에 동참해오고 있다(2007년에는 레바논 Blue Line에 대한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고, 2010년 2월에는 아프가니스탄의 2차 파병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강대국의 인도주의 활동은, 우리나라에서 국군을 파견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이미 구호품 전달과 집짓기, 농사짓기의 차원을 넘어섰다. 갓 태어난 아기를 위해 털모자를 짜거나 식빵 모양의 저금통에 동전을 채워 보내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굶어죽는 아이’에 관한 문제와 ‘총칼을 든 반란군’에 관한 문제가 서로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지만, 사실 이 두 이미지는 같은 장소, 같은 상황에서 벌어지는 똑같은 문제이다.
 
자연재해나 내전, 전쟁이나 학살 등의 이유로 위험에 처한 제3세계 나라를 위해 국제적십자사, 국경없는의사회, 국제엠네스티, 유엔난민기구, 기아추방행동, 옥스팜 등의 인도주의 NGO는 일찍부터 유엔이나, 나토, 이유, 또는 서구 강대국보다 한 발 앞서 인도주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1990년 들어 일부 인권단체들이 인도주의 활동에 뛰어들었고 기존의 인도주의 단체와 더불어 서구 강대국과 유엔(UN), 나토(NATO), 이유(EU) 내에서 홍보활동을 강화하고 정치적 압력을 강화하여 보다 ‘직접적이고 명쾌한 해답’을 주고 싶어 했고, 그리하여 일찌감치 구호품보다는 ‘군대’를 파견하는 일에 관심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정치에 중립적이었던 인도주의가 정치적 색깔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인간이 향유해야 한다고 믿는 인권과 내정간섭의 소지가 있는 국제사회의 개입이 교묘히 결합한 것이다.
 
인권단체는 "보편적인 인권 존중의 원리를 강조하는 한편 인권을 개개인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로 정의한다. 인권운동가들은 인권 증진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특정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는 개입론자라 할 수 있다." 인도주의 NGO 또한 "보편적인 기준에 따라 행동하되 '전쟁의 규칙'이라고도 일컫는 제네바협약에 우선적으로 그 근거를 둔다. 이들 역시 전쟁이나 자연재해 상황에 직접 개입해 구호활동을 벌인다는 점에서 개입주의자라 할 수 있으니 원활한 현장접근을 위해 전통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이들은 사회가 어떻게 통치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거시적 비전을 지니지 않으며, 특정 범주의 사람들을 한시적으로 돕는 일에 스스로를 한정시킨다." (p.16) 그런데 이 두가지 유형의 운동이 그동안 서로 가까워지면서 어느 순간부터 '정치적 인도주의'라 일컫는 관념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1960년대 말 비아프라 분쟁에서 그 조짐이 보인 인도주의의 정치화는 1990년대 보스니아 전쟁과 르완다 집단학살 사건을 거치며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이어, 코소보 전쟁을 전환점으로 거치며 911 테러 후 미국과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점령으로 절정을 맞기에 이른다. 그렇지만 코소보 사태에서는 개입 시기도 놓치고 부적절하게 개입하면서 인종청소를 막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난민을 증가시키고 민간시설만 폭격하였고 르완다 집단학살사건에서는 소극적으로 개입하는 바람에 내전이 장기화되고 민간인의 피해만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에서는 '인도주의를 빌미로 한 군사적 침공'이 발생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더욱 나쁜 상황은 '정치적 인도주의'로 전개됨에 따라 NGO 조직이 유엔이나 나토의 군대이 협력하는 상황이 늘어나는데 그것은 신변을 안전하게 하는 긍정적인 결과 뿐 아니라 NGO 활동의 순수성이 현지 주민들에게 의심받게 된다.
 
실제 현장에 가장 접근해 있었던 저자가 보기에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인도주의를 빙자하여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정치적 인도주의 단체'들과 서국 정치가들이 거짓 정보와 과대 여론조작을 통하여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무력 개입을 진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NGO 활동가로서 저자는 인도주의 단체의 한계와 현실적인 조건도 인정한다. 보통의 인도주의 단체는 후원자들의 후원금으로만 운영되기 때문에 비인도적 사태가 발생할 경우 후원금을 받아내기 위해 어느 정도 위기를 과장하고 사태를 크게 홍보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소말리아, 코소보,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아프카니스탄 등의 인도적 활동 사례를 면밀하게 검토, 분석한 후 자신을 비롯하여 분쟁지역에서 활동하는 인도주의 활동가들에게 딜레마를 안겨주는 세 가지 이슈를 다룬다. 그것은 구제와 보호의 문제, 정의와 평화의 문제, 그리고 인도주의 기구의 책임성 문제다.
 
저자는 결론으로, "인도주의 기구들이 전반적으로 정치적 행동에서 생기는 문제점들을 해소할 일관된 방안을 아직 마련하지 못한 상태"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앞으로 "개입이라는 이슈에 대하여 훨씬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접근방법을 고안하는 일이 인도주의가 풀어내야 할 난제"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도적 개입이 "그 대상이 되는 사회에 일정한 해악을 끼치게 마련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군사적 개입은 더 심한 불안정성을 초래하고 점령자와 피점령자에게 큰 비용을 치르게 하기 때문에 최대한 자제해야 함"을 역설한다.
 
더욱이 세계는 "서구 자유주의가 수출용으로 포장한 '인권' 개념만이 유일한 인권 개념은 아니라는 점부터 인정하고 이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오늘날 "부와 권력의 불균형으로 세상에 발생하는 불의를 성토하는 논의의 내부에 인간의 존엄성, 개인의 자유, 자결권 존중 등의 개념을 어떤 식으로 자리매김할 지에 관해서도 폭넓은 대화가 필요하다."며, "극심한 빈곤을 퇴치하려면 경제성장도 필요하지만 빈곤과 불평등이 분쟁과 인도적 위기를 일으키는 최대의 원인이라는 점에서 인권단체와 인도주의 기구는 경제정의를 주장해야 할 중대한 임무를 갖는다"는 의미심장한 결론도 내리고 있다.
 
전세계의 인도주의 활동가들은 '인도주의'가 해답만이 아니라 '문제의 일부'라는 점을 알고 있다. 
 
<인도적 개입>과 더불어 이 책을 읽으면서 인도주의 단체와 유엔의 개입이 정치경제군사적인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언제나 미국 극우보수파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입김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라크 침공이나 아프카니스탄 침공, 그리고 리비아 무력개입은 당연히 후자의 목적으로 일으킨 전쟁이고 향후 무력 개입의 당사자와 개입을 받은 국가의 국민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조금 아쉬운 것은 저자가 책의 제목 <왜 인도주의는 전쟁으로 치닫는가?>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한 것 같다. 책 속의 마지막 장의 제목도 <수출용 인권은 어떻게 전쟁으로 치닫는가]인데 이 또한 저자의 결론을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찾지 못하는 것인지, 저자의 문제의식일 뿐인지, 내가 독서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인지 헷갈린다...ㅋ
 
나도 앞으로 좀 더 국제적인 인도주의 활동과 단체에 대해 알아야 할 것 같다. 
가능하면 어느 정도 시간을 할애하여  활동도 하고...^^ 
  
* 책 속의 문장
- 인도주의는 이제 수십억 달러 규모의 산업으로 성장했다. 유엔과 엔지오는 이른바 ‘복합적 위기상황’이 발생하면 특정 로고가 박힌 티셔츠를 입고 같은 로고가 그려진 자동차를 타고 현장에 제일 먼저 달려가 지원사업을 펼친다. … 오늘날 대다수의 영·미 구호기구는 자신들의 운영프로그램에 지원된 기금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상당 규모의 미디어 담당부서를 갖추고 있다. 구호기구에 고용된 언론 담당관과 로비스트들은 특정 위기를 강조해 세인의 관심과 양심을 자극하고 “돕기 위해 뭔가 행동하도록” 유도한다. ‘정치적 인도주의’는 대다수 구호기구의 운영체계 내에 이렇게 제도화되어 갔다.(p. 29)

- 인도주의 활동가들은 구호 제공에 관하여 ‘갖다 주기만 하면 끝’이라는 식의 태도를 늘 경계하면서도 종합적인 평가와 프로그램들의 광범위한 영향에 관한 평가의 중요성을 현명하게 지적했다. 존 포세트 같은 인물은 바로 이런 측면이야말로 “서비스 제공은 효율적이어도 인권문제는 어떻게 다뤄야 좋을지 모르는” 사기업체에 비해 인도주의 비정부기구가 경쟁력을 갖는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원조는 단순히 부족함을 충족하는 행위가 아닌 수혜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과정의 일부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많은 인도주의 활동가들이 수용했다.(p. 55)

- '인도적 개입’이라는 용어는-구호활동에서부터 군사력 사용에 이르기까지-다양한 행위를 포함한다. 한 국가, 여러 국가, 혹은 기타 단체가 긴박한 위험에 처하거나 극심한 고통을 겪는 이들을 구호하려는 목적으로 ‘인도적 개입’을 통해 타국의 내정에 간섭한다. 인도적 개입이라는 용어 사용을 타국의 영토 및 주권을 침범하는 정치적·군사적 활동에 한정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인도주의 활동가들은 이 용어를 중립적인 구호활동 말고는 다른 일에 사용하기를 꺼린다. 그 두 가지가 분명히 구분되는 것 같아도 현장 활동을 하다보면 차이점이 흐려지곤 한다.(p. 67)

- 국제사회는 코소보 문제를 인권문제라 믿고 있었지만 이는 사실 주권과 영토에 관한 분쟁이었다. 나토의 개입은 전쟁범죄와 인종청소를 방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극적으로 증가시켰다. 유엔은 인권과 법치를 보장하는 다민족사회의 건설을 위해 효과적인 임시행정기구를 설치하겠노라고 약속했지만 오늘날 코소보는 부정부패가 창궐하고 국제원조에만 의지하는 단일민족사회가 되고 말았다.(p. 119)

- 2008년 3월 인도주의 기구들이 공동 발표한 보고서는 아프가니스탄에 약속된 원조금 200억 달러 가운데 100억 달러가 미지급되었고 도착한 금액 가운데 40퍼센트는 컨설팅 비용으로 소비되거나 영리기업의 호주머니로 돌아갔다고 밝혔다. 그보다 몇 개월 전에는 옥스팜 보고서가 지방재건팀 구호활동의 비효율성과 낭비를 지적했다. 원조국들은 필요나 효과를 예상해 원조금을 배분하기보다는 서구 병사들이 살해되지 않도록 지역 주민의 협조를 매수할 수 있는 곳에 원조금을 퍼주었다. 반군진압 전략과 인도주의 활동을 너무 긴밀히 연결시킴으로써 초래된 부작용이었다.(p. 151)

- 나토의 코소보 개입이 인도주의적이라는 설명은 민간인의 고통을 멈추는 것이 개입의 기본 목적이었다는 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공습으로는 민간인을 직접 보호하는 일이 불가능하며 오직 지상군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실제로 인권감시인이 철수하자마자 민간인의 안전이 취약해졌고 이로 인해 집단살해가 급속하게 늘어났다. 나토 전략가들은 사태가 그렇게 발전할 가능성을 미리부터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작전에 관한 주요 결정은 인도주의가 아니라 정치적 고려를 기반으로 내려졌다.(p. 192)
 
[ 2011년 4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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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적 개입 - 정의로운 무력행사는 가능한가
모가미 도시키 지음, 조진구 옮김 / 소화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내일 공부모임 교재 중 하나다. 지난 번 공부모임에서 참석자들이 최근 리비아 민주혁명 과정에서 서구 국가들이 유엔의 결의 없이 임의로 리비아 내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현상에 대해 우려하면서 서구 국가들이 명분으로 내세우는 '인도주의'에 대해 공부하기로 한 것이다.
 
국제법의 권위자인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냉전 후 무고한 시민들이 대량으로 죽어 가는 내전이나 민족분쟁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제기했다고 지적하며, 어떤 한 국가에서 죄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비인도적 상황이나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했을 때, 무력행사 이외에 다른 수단이 없을 경우 국제 사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문제 삼아 여러 사례와 함께 전반적인 내용을 다룬다.  저자는 1999년 NATO군에 의한 유고 폭격 이후 각광을 받게 된 '인도적 개입'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국제법의 시점에서 다각도로 분석하였다.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폭격 자체는 인도적 개입의 모델 케이스로 간주하기 어렵다. 코소보 자치주에서 반인도적 행위가 벌어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취한 수단(폭격), 절차(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무시), 얻은 결과(박해의 순환) 등 어느 것을 보아도 의문이 남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러 증언과 자료를 통해 폭격 전후에  코소보에서 세르비아 군대 및 민병대에 의한 알바니아계 민간인 학살, 학대 뿐 아니라 코소보 민병대에 의한 세르비아계 민간인 학살, 학대로 동시에 존재했다는 것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인도적 개입'의 공통적인 정의는,
첫째. 극도의 인권침해 또는 인도에 대한 죄라고 부를 수 있는 심각한 박해가 있을 것.
둘째. 해당국 정부가 그러한 박해를 자행하고 있거나 주민간의 박해를 멈추게 할 의사와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을 것.
셋째. 개입하는 것은 통상 다른 국가 또는 복수의 국가일 것. 복수의 국가에는 나토와 같은 군사동맹도 포함 된다'
넷째. ‘개입’은 통상 군사력을 사용한 ‘무력개입’일 것(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나 무력을 사용할 경우가 첨예한 문제가 된다)  (p.22) 
'인도적 개입'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합법적이라고 해도 어떠한 종류나 형태의 인도적 개입이 합법적인가"와 "합법적일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인도적 개입'이 유엔 차원에서 타당성을 결여하는 것은 주로 법적인 이유에서다. 즉 '인도적 개입'이라고 하면 무력행사를 수반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유엔헌장 상 무력행사를 수반하는 유엔활동은 ‘강제행동’(유엔헌장 제7장 특히 제39조와 제42조)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것은 ‘개입’과는 다른 합법성이 분명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엔의 경우, 유엔군은 존재하지 않지만 평화유지활동을 위한 '평화유지군'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설치되었다. 평화유지활동의 경우 병력의 전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국가의 동의에 입각하고 있어 상대의 의사에 반할 경우에도 행해지는 강제행동이나 개입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또한 무력행사에도 많은 제약이 있으며 대상국에 명령할 권한도 없다. 평화유지군이 아닌 군사활동은 원칙적, 대체적으로 유엔의 동의를 받기 어렵고 국제법에 저촉되기 마련이다.
 
유엔 헌장 제2조4항에는 국제 관계에서 무력행사 또는 무력에 의한 위협의 금지 & 다른 나라의 '영토보전 또는 정치적 독립'을 존중해야 함을 명시적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파괴력 자체가 세계에 교훈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인도적 개입'과 관련해서는 2차 세계대전 직전에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면서 내세운 명분이 '인도적 개입'이었고 그 외에도 다수의 국가간 침공행위가 '인도적 개입'이라는 이유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인도적 개입'을 명분으로 한 또 다른 침탈행위로 1983년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을 예로 들고 있다.
 
'인도적 개입'의 정당성을 따지기 어려운 여러가지 사례로는 1971년 동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에 대한 인도의 무력개입, 1978년 캄보디아에 대한 베트남의 개입, 1979년 우간다에 대한 탄자니아의 개입 등을 들 수 있다.
 
그동안 유엔은 소말리아, 르완다, 그리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기아와 살육이 발생하였을 때 대응을 요청받고 평화유지활동을 했다. 하지만 미묘한 형태로 행해진 활동이기 때문에 제약도 많았다. 세 경우 모두 문제점을 남긴 사례이기는 하지만 조금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유엔에 의한 ‘구호 활동의 과잉과 과소’라고 요약할 수 있다. 
저자는 소말리아의 경우, 유엔이 과잉개입하여 내전을 확대한 후 마무리하지 못하고 평화유지군이 철수할 수 밖에 없었고 르완다의 경우, 유엔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내전 및 민병대에 의한 학살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유엔은 유고연방의 인종청소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고 스레브레니차에서는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음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인종청소의 학살을 막아내지 못했다.
 
서구 국가들이 자주 내세우는 개념 중에 '정전(正戰)'이 있다. '정전'이란 말 그대로 정당한 전쟁이며 적극적으로 싸워야 할 전쟁이다. 무력을 기본으로 하여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싸워야 할 정당한 전쟁을 설정하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엄격한 조건을 붙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특정 국가의 판단에 의해 행해져서는 안 되며 국제사회, 즉 유엔의 총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공격하는 상대방이 아무리 ‘악’해도 통상의 전쟁과는 달리 상대방을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공격하는 대상이나 수단은 매우 제한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권을 침해당하고 구호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자신이 그러한 방법으로 구호를 받고 싶어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나 아프카니스탄 침공, 그리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리비아 개입은 모두 불법적이고 부당한 것이다. 이미 유엔과 학자들은 이라크나 아프카니스탄 침공은 인도적 목적이 아니라 특정한 국가들의 정치경제군사적 목적이 중요했음을 인정한다.

만약 비인도적 상황에서 ‘주권보다 인권’을 주장할 경우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 인권(생명에 대한 권리·평화에 대한 권리·식량에 대한 권리·가족생활의 권리 등)을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해당국의 주권을 일축하며 죄 없는 시민들을 말려들게 할 가능성을 내재하면서 징벌적인 무력 공격을 하는 것 자체는 아닌 것이다. 저자는 극도의 비인도적 상황에서 주권은 제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해당 국가가 보호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타국 또는 국제기구 혹은 다양한 인간집단이 보호하고 구호하려고 할 때 그것을 방해할 권리를 해당 국가는 갖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인도주의 단체가 임의로 피해 민간인을 구제,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예외로 인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특정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적지않은 인도주의 단체의 '인도적 개입' 역시 많은 학자나 전문가들에게 그 동기에 있어 의혹을 받고 있다.)
 
저자의 결론은 국제사회가 '인도적 개입'을 이유로 하여 타국에 무력으로 개입하는 것에 대해 필요성, 수단, 절차, 결과를 모두 감안하여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력에 의한 개입 이전에 유엔과 국제사회는 실제 비인도적 상황에 처한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NGO 등 민간단체의 역할을 적극 장려, 활용해야 하고 유엔은 평화유지군 등 인도적 활동을 지원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저자는 궁극적으로는 '예방적 개입'을 주장한다. 이는 "해당국의 인권침를 비난하고 인권조약의 비준과 실행을 촉구하며 인권을 침해하는 책임자를 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을 말한다. 사후적으로는 무력개입보다 평화유지군 파견을 통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 책을 읽고나니 미국이나 일본, 한국 주류언론의 시각이 아닌 유엔과 국제법 전문가의 시각에서 '인도적 개입'에 대한 관점과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의 시각을 벗어났다고 해야 할까...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번 리비아 내전에 서구 국가들이 무력으로 개입하는 행위를 자신있게 반대할 수 있다는 것.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무력으로 개입하는 것은 인도적인 정당성도 없고 국제법적인 절차와 명분도 없을 뿐이다. 십중팔구 리비아 내의 종족 간 내전을 확대시킬 것이고 그 과정에서 수 많은 죄없는 민간인들의 피해만 엄청나게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라크, 아프카니스탄에 이어 리비아에 대한 무력개입은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에 우호적이지 않은 국가, 또는 상황이 오면 또 다시 그들은 타국에 무력으로 개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 2011년 4월 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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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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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일반 가정에서 ’쇠고기’라 함은 매우 특별한 식품일 것이다. 지난 40년 넘게 내가 자라온 환경에서 쇠고기는 ’명절 음식’이었다. 우리집에서는 설과 추석 때가 되어야 가끔 쇠고기를, 그것도 갈비찜으로 먹는 연례 행사였다. 그것은 우리 집과 친척들에게도 공통적인 음식문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참고로, 우리 집과 친척은 현재 자기 집 한 채 정도 있고 부모들은 모두 일선에서 은퇴하고 자식들의 용돈으로 생활하는 정도이다. 지난 40년 동안 대부분의 친척들은 빠르면 1980년대에 늦으면 1990년대에 자기 집을 마련한 세대였다.(그렇다고 돼지고기와 닭고기를 늘 풍성하게 먹은 것도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나이가 들어서도 쇠고기는 지금도 그다지 ’좋다’던가, ’맛있다’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쇠고기(등심, 갈비, 육회 등)는 특별한 행사나 접대, 중요한 모임에서 서로 대접하는 경우에 식당에서 올라오는 음식이다. 내 기억에 회사의 법인카드로 결제하거나, 업무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개인적인 필요나 기호로 인해 쇠고기를 먹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실제 먹어본 적도 거의 없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일반 중산층이나 서민들은 나와 비슷한 처지이고 생각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가정하고 산다.
 
그래서 2008년 PD수첩에서 광우병을 중요하게 다루고 언론에서 광우병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때도 쇠고기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 역시 수 차례 서울 도심에서 벌어지는 촛불시위에 참석하였지만, 그것은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대한 분노보다 국민적,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문제에 대한 이명박 정권의 태도와 대응이 컸다.(물론, 이명박 정부와 그 똘만이들의 작태는 3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지만...)
 
이 책 <육식의 종말>이 처음 내 머리 속에 들어온 것은 광우병 사태가 벌어진 2008년이었다. 당시 광우병과 소고기에 대해 인터넷을 뒤지다가 저자의 책을 처음 알게 되었지만 구하거나 읽지는 않았다. 그 뒤로 시간이 흐른 뒤, 2009년 노무현 전대통령이 돌아가실 즈음 그 분이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유러피안 드림>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육식의 종말>과 같은 저자라는 책 소개를 보면서 두 번째로 각인된 것이다. 저자의 책을 여러 권 준비했다가 벼르고 별러 작년(2010년) 초부터 <노동의 종말>과 <소유의 종말>, <유러피안 드림>과 <엔트로피>, 그리고 공부모임 교재로 <공감의 시대>를 읽었다. 책 내용 마다 이 책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간략하게 필요한 내용이 들어있어서 읽지 않고 넘어가도 되지 않겠냐라고 생각했다.(이 책의 최초 발간년도는 1992년이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이야기는 저자의 저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육식의 종말>은 법정스님의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에서도 다루어졌고 남미에 대한 이야기에도, 아프리카와 아시아 빈국의 식량난과 관련한 책과 글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저자의 책 속에서 자주 거론되는 사례를 보면서 결국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은 육식을 중심으로 한 현대인의 식생활에 비판을 가한다. 급속도로 증가하는 육식 문화, 특히 쇠고기에 집중되는 음식 문화와 이로 인해 파괴되는 환경과 생태계의 위기에 대해 논한다. 저자는 생태계를 보호하고 생존권을 위한 식량의 공급, 지구를 공유하는 다른 생명체들의 안녕을 위해서 현대사회가 육식 문화를 넘어야만 지구의 미래에 희망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책은 서양 문명과 소에 대한 관계를 다루면서 시작한다. 내가 보기에도 육식이 흔치 않았던 동양과 달리 서양(특히 유럽과 미국)에서는 기원 전부터 신화와 벽화에서 소가 등장하는 문화였다. 대지가 척박했던 것도 영향을 미친 듯 하다. 책은 이어서 소와 소고기 산업으로 유럽과 미국의 경제가 변화하는 모습, 목축산업을 위해 미국 내 버팔로를 몰살시키고 인디언을 학살하는 과정, 쇠고기의 본격적인 산업화를 이야기한다.(여기까지가 1~3부) 4부에서는 유럽, 미국 뿐 아니라 제3세계와 빈국에서 대규모 경작지가 쇠고기를 위한 곡물재배지로 탈바꿈하면서 ’배부른 소 떼와 굶주린 사람들’로 양분된 세계의 모습을, 5부에서는 지구의 환경을 위협하는 쇠고기 산업, 6부에서는 ’차가운 악(cold evil)’이 되어버린 쇠고기 문화를 다룬다. 물론, 책 속에는 육류를 많이 섭취하는 서양과 그들을 모방한 몇몇 나라의 식생활과 건강이 심각하게 취약해진 상황도 묘사한다.
 
<소유의 종말>과 <노동의 종말>에서도 느꼈지만, 저자는 매우 독창적인 사유체계를 지닌 사람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보여지는 ’소유’나 ’노동에서, 그리고 이번에는 ’육식’에서 저자는 그 단어들이 함축하는 정의와 개념을 끌어내고 그것을 사회적, 역사적, 경제적인 관점에서 풀어내는 재능이 탁월하다. 또한 그 과정에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폭 넓은 연구와 학식, 그리고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들어 있다.
 
한국 사회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저자의 저작들은 상당히 앞선 연구들이다. 서구사회나 동양의 경우 일본 정도에서 저자의 연구 주제가 일반화되는 과정이 진행 중일 뿐이고 한국의 경우에는 <소유의 종말>과 <노동의 종말>, 그리고 이 책 <육식의 종말>의 경우에도 거리감을 느낀다. 그리고 한국 뿐 아니라 동양사회의 경우 일찍부터 농경사회가 자리잡았고 신화나 음식문화에서도 육식보다 채식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육식의 종말>을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이유는 2008년 촛불시위 당시의 상황에서도 깨달았듯이 서구, 특히 미국의 쇠고기 산업이 예속적인 친미정권을 등에 엎고 무차별적이고 강제적으로 이 땅을 침범하기 때문이다. 우선, 최근 구제역 파동에서도 보여지듯이 한국의 낙농산업이 취약하기 때문이고 먹거리는 산업과 무역으로만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책 속에서 드러나듯이 미국의 쇠고기 산업의 정육체계가 부실할 뿐더러 산업으로서의 육우는 정상적인 동물의 생육과 성장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소의 체중을 늘리기 위해 자행되는 부당하고도 비도덕적인 업체들의 행위는 우리가 미국산 소고기를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셋째, 쇠고기 산업은 단지 낙농 산업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옥수수와 콩 등 세계적인 곡물과 사료의 수급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식량과 곡물 등의 상당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가정경제에까지 좌지우지될 수 있다. 넷째, 저자의 표현대로 현재의 세계 식량위기는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소위 ’선진국’이 과도하게 식량을 섭취하고 낭비하기 때문이고 더 중요하게는 사람이 먹을 식량을 소와 돼지 등 산업용 동물들이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책을 통해 ’채식 위주’의 음식문화에 대한 계기가 마련될 지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는데 막상 다 읽고나니 내 기대와는 조금 다르게 전개된 느낌이다. 그렇더라도 [육식의 종말]에 이바지해야 하겠다는 의지가 생겨날 정도는 된다.
 
* 책 속의 문장
- 지방많은 소고기를 원하는 영국인들, 평원의 황소를 구입할 돈줄이 필요한 서부목축업자들, 잉여 옥수수를 먹어치울 비육우를 원하는 중서부 옥수수 재배 농부들, 새로운 식민지 투기적 시장을 이용하려는 영국 재정가들의 관심사가 한 덩어리가 되어 미국의 ’축산단지’가 창출되었다.(p.118)
 
- 오늘날 소와 다른 가축들은 일반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멀찍이 떨어져 있다. 사람들은 지역 슈퍼마켓에서 미리 포장된 형태의 쇠고기 부위를 구입한다. 목축업자들은 전국의 고기 생산용 소들을 많은 공업단지들처럼 사람들의 시야에서 차단된 고립된 장소에 격리시켰다. 현재 비육장은 고도로 자동화되어 있기 때문에 ’관리인’과 짐승들 간에 직접적인 접촉은 아주 뜸한 편이다. 심지어 일상적인 사료 공급도 컴퓨터로 관리되곤 한다. 제임스 서펠은 이 정도의 거리감에서 동물들은 단순히 더 많은 생산량을 위해 추상화된 존재인 생산의 숫자나 단위가 될 뿐이다라고 말한다.(p.336) 
 
[ 2011년 2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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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3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