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수사학
제이슨 델 간디오 지음, 김상우 옮김 / 동녘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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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26 서울시장 선거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끔 하였다. 나 역시 야권단일후보 경선 때 민주당 박영선 후보와 무소속 박원순 후보간의 TV토론, 본선 때 한나라당 후보 나경원과 야권단일후보 박원순의 TV토론을 지켜보면서 '말'과 '수사'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여기서 '수사'는 단순히 '말'이나 '대화', '연설' 뿐 만이 아니라 자신의 정책이나 의견을 표현하는 각종 방식과 매개를 뜻하는 개념이다. 공부모임 참가자들이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지난 10월 31일 이 책을 가지고 토론한 바 있다.

보통의 경우에는,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려 할 때에는 곧잘 막히는 경우가 많다. 서로가 사용하는 단어가 문구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같은 말이나 문구인데도 각자가 사용하는 쓰임새나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어울리고 대화하는 집단이나 계층이 달라지면서 자기들끼리만의 의사소통 방법이 생겨나기도 한다. 노동자나 농민들이 사용하는 단어, 직장인들이 사용하는 단어, 법률가나 의사들이 사용하는 단어, 정치가나 관료가 사용하는 단어도 다르고 직업에 따라 사용하는 단어가 다르기도 하다. 학자들과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단어도 물론 다르다. 그리고 TV나 라디오 등 미디어를 자주 접하는 사람들은 그 미디어에 따라 한동안 '유행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특정한 상황이나 개념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다르거나 알아듣지 못할 경우 서로의 의사표시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오랜 시간 서로 이야기를 하면 결국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하거나 설명하는 시간이 짧게되면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일상생활에서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자리, 관계에서는 의사소통이 불명확하더라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의사소통이나 어떤 내용을 꼭 설명해야 하는 입장이 되면 문제가 달라질 것이다. 상대방에 따라, 상황에 따라, 내용에 따라, 주어진 시간에 따라 몇 명, 몇 백명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려면, 내용을 소통하고 공감하려면 표현하는 측이 좀 더 세심하게 준비해야 할 것이다.

2010년 튀니지에서부터 시작되어 올해 리비아까지 이어졌고 지금도 뉴욕에서 진행 중인 '재스민 혁명'.. 튀지니와 이집트 혁명의 승리에는 소셜 미디어의 힘이 결정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튀니지의 전태일로 불린우는 부아지지의 분신을 전 세계에 알리며 운동의 불길을 당겼고, 인터넷이 막힌 상태에서도 시민단체들은 아날로그 방식을 이용해 연대를 이뤘다. 이번 혁명은 소셜 네크워크를 활용한 새로운 방식의 문화혁명인 것이다.

이제 대항 담론과 거친 연설만으로 혁명이 가능하던 시대는 지나간 것이 분명하다. 포스팅 하나, 트윗 한 줄로 논쟁이 시작되고, 아이폰, 안내방송, 광고판 등의 메시지가 사람들을 거리에 나서게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은 모이고 흩어지며 혁명을 창조해낸다. 이데올로기, 경험, 문화, 연령 등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없는 중심 없는 무리가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는 다중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4대강, 복지삭감, 전세난, 물가불안정, 한미FTA, 부정선거 등의 사회적인 문제가 폭발되는 상황에서 활동가들의 창조성이 끊임없이 필요한 이 시대... 세상을 바꾸려는 활동가들은 어떤 방법으로 준비하고 대응할 것인가? 어떻게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행동하게 할 것인가?

이 책의 저자 간디오는 21세기 급진주의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전달하는 ‘방식’ 즉, ‘수사’를 꼽는다. 세상이 바뀌려면 무엇보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야 하며,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활동가와 조직가의 수사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활동가들에게 필요한 언어적, 비언어적 전략들을 제공하기 위해 쓰여졌다. 수사의 필요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연설하고 논증하고 설득하고 글을 쓸 때 바로 적용 가능한 기본적인 수사 전략을 제시하는 것이다. 전달하려는 ‘내용’에 몰두하느라 전달 ‘방법’에 소홀했던 이들, 더 나은 소통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저자의 주장과 근거, 이론적인 배경과 실무적인 아이디어와 전술들은 어느 정도 수긍도 가고 활동가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한국의 활동가들이 번쩍이는 혜안을 얻거나 기발한 아이디어나 '수사학' 이론, 전술을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활동과 문화가 한국의 그것과는 다를 뿐 아니라 저자는 책 속에 구체적이고 다양한 사례보다 이론에 가까운 설명과 주장을 더 많이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저자의 글을 통해 두 가지 중요한 것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중'과 '중심 없는 운동'이다. '다중'과 '중심없는 운동'이라는 개념은 2011년 한국사회의 모습을 상당부분 설명하고 있다. 

첫번째는 민중, 대중, 노동계급, 다중이라는 개념의 재정립. 저자는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를 인용하면서 21세기에 맞는 집단들의 개념으로 '다중 multitude'를 제시한다. 그들은 "21세기 현재의 급진적 시대가 '공통'을 통해 서로 접속되어 중심 없이 자율로 행동하는 집단, 민중, 연합에 의존하는 동시에 그것들을 진작한다"고 말한다. '다중'은 '민중', '대중', '노동계급'과 같은 이전의 전통적 개념을 새롭게 개념화한다. '민중'은 사람들을 정체성이 하나 밖에 없는 단일체로 총체화하고 '대중'은 사람들을 차이가 배제된 획일체로 환원하며, '노동계급'은 노동과 관련된 정체성만 있는 특정한 유형을 지칭할 뿐이다. 이러한 기존 개념은 결국 권력관계와 사회현실을 창조하는 다수의 활동을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중'이 인정하는 것은 다수의 차이이며, 민주적 삶의 형식과 다양한 사회적 행위자를 위한 공통의 투쟁이며, 소통에 의해 창조된 세계를 창조하는 활동이다."는 것...

두번 째는 '중심 없는 운동'이다. 이는 단 하나의 운동이 있는게 아니라 상호 접속된 다수의 운동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과거와 달리 전체의 운동의 상징하고 조직하는 단 한 명의 상징적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급진주의 소통의 생명력은 다중의 모세혈관 곳곳에 네트워크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단 한 명, 단 한 집단(예를 들어 전위당)이 행동과 사회 전체 사이를 매개하는 책임을 지지 못한다. 이제는 다수의 사람, 생각, 운동이 함께 진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인류사회 전체에서 발견되는 '반권위주의', '탈권위주의'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중심 없는 운동', 그리고 반권위주의의 성공은 개인의 책임감에 따라 좌우된다. 즉 활동가 저마다 책임지고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 


최근 통합진보당의 공동대변인으로 선임된 진보신당 전 노회찬 대표. 그는 정치판을 뒤엎는 촌철살인의 어록을 갖고 있는 몇 안되는 정치인이다. 2004년 대선에서는 “불판을 갈아야 한다”와 같은 신선하고 날카로운 비유를 던져 그를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감동시켰고, ‘웃음화법, 애드리브, 비유의 달인’ 등의 수식을 얻으며 예상보다 많은 표를 획득했다. 이후에도 그는 첼로연주, 점심 번개, 친절한 트위터 활동 등으로 ‘노동운동은 거칠다’라는 편견을 깨고 부드러운 진보의 재탄생을 알리고 있다. 그가 말하고, 행하고, 느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은 바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수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과 효과를 기억하는 활동가들은 많지 않다. 수사는 억지로 꾸미는 것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보다는 행동이다”, “메시지를 다듬는 것은 기만이다”, “고함과 함성은 급진적 변화의 진실한 표현이다”와 같은 편견이 자리 잡고 있어 소통의 ‘방식’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미약하다. 

이 책은 이러한 ‘신화’를 깨는 것에서 시작한다. 
1장. [수사는 행동이다]에서는 우선 수사학의 기원인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 수사가 소통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서술한다. 원래 수사학은 “설득하고, 추론하고, 분석하고, 나아가 현실을 창조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려는 활동가들의 목적과 충분히 연결된다. 
실제로 저자는 2000년 4월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항의운동 장면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엿 본 후에 본격적으로 활동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현장에서 활동가와 조직가들을 만나며 ‘수사학’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68혁명 이후 등장한, 소통과 수사를 이용해 세상을 바꾸는 ‘신급진주의’이론을 확장, 실천해왔고, 집회나 모임에서의 연설, 토론, 논증을 분석해왔다. 그러면서 활동가가 어떻게 자신의 소통 능력을 개선해 냈는지 관찰하며 이 책까지 집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현실을 비판하고 지금과 다른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하는 책은 많다. 그러나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해 어떤 방식으로 함께 가야 하는지 일러주는 책은 흔치 않다. 이 책은 이런 고민을 하던 활동가들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출간한 것이다. 활동가들이 택한 운동방식에 따라 활용할 수 있는 수사학 실용서임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문장과 더불어 사파티스타, 애비 호프만, 네그리, 들뢰즈, 1999 WTO, FTA 반대 운동 등 인물과 사건의 풍부한 사례를 들며 이해를 돕는다.

저자의 '수사'에 깔린 논리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수사를 바꾸면 소통이 바뀐다. 소통을 바꾸면 경험이 바뀐다. 경험을 바꾸면 사람들의 성향이 바뀐다. 성향을 바꾸면 사회에 대한 심대한 변화의 조건이 생긴다."

2장. [급진주의자들이 갖춰야 할 수사의 기본 원리]에서는 대중연설, 글쓰기, 설득, 논쟁, 권유 등 다양한 수사 전략을 분류하여 각 상황에 필요한 지침을 제시하며 그 효과까지 예상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아무리 다양한 방식의 운동이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메시지 전달방식은 글쓰기와 말하기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확실한가? 목표는 무엇인가? 청중은 어떤 사람인가? 연설장의 상황은 어떤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주도면밀한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가령, 신문, 전자우편, 문자, 웹 등에 발표하는 ‘글쓰기’와 대중 앞에서 하는 ‘연설’은 분명히 다르게 준비해야 한다. 눈으로 읽는 글에서는 무엇보다 ‘첫 문장’에 신경을 써야 하는 반면, 귀로 듣는 연설의 연설문에는 숫자나 어려운 용어를 넣지 않는 게 좋고 몸을 활용하면 효과가 높기 때문이다.

'민중생존권 쟁취하자' '군사독재 타도하자' '신자유주의 철폐하자' 등의 구호는 자신들만 이해하고 대중들이 낯설어하게 된다. 
계급모순, 노동의가치, 자유주의자, 부르주아정권, 반자본주의.... 등도 마찬가지... 

3장. [언어로 세상 바꾸기]는 언어가 곧 생각을 바꾼다는 논리에서 시작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곧 언어로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를 바꾸면 생각도 바뀔 수 있다. 먼저 저자는 활동가들은 언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것이 자신이 목표한 운동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주로 어떤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설득력 있는 연설을 하는 활동가들은 어떤 단어들을 택하는지 관찰할 필요가 있다. 언어의 선택은 곧 가치와 이미지를 만들고 그것에 따라 정치적 선택, 감정의 반응, 사회적 행위가 생기기 때문이다. 경찰을 ‘짭새’라는 하는 것은 경찰의 권력에 대항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의 언어를 바꿔라, 그러면 사람들의 생각하는 방식이 바뀐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라, 그러면 사람들이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 바뀐다. 사람들의 방식을 바꿔라, 그러면 사람들의 믿음, 가치, 태도, 행동이 바뀐다. 이 모든 것을 바꿔라, 그러면 사회의 방향이 바뀐다.” 

또한 저자는 권력을 위해서 사람들의 이해를 곡해하거나 혼동시키는 언어를 분석해, 본래의 의미를 알리는 것 역시 활동가의 몫이라고 주장한다. 가령 미국 전쟁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부수적 민간피해’, ‘정밀무기’, ‘민주주의 확산’ 등과 같은 단어에는 미국의 전쟁은 인간적이며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합리화가 담겨있다. 뿐만 아니라 ‘아나키즘’, ‘공산주의’와 같이 부정적인 의미가 고정화되어 있을 경우에는 이 틀을 깨기 위한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시효성을 잃은 단어 대신 ‘수평주의’, ‘탈중심화’, ‘비물질적 노동’, ‘프리거니즘’, ‘해킹행동주의’ 등과 같이 다중의 시대에 걸맞는 단어를 창조하고 사용하는 것 역시 활동가의 역할이다. “언어를 탐구하여 더욱 확신에 차고, 더욱 독립적이며, 더욱 자기를 긍정하는 정체성을 만들어야 한다.”

‘수사’와 마찬가지로 몸의 모습인 ‘매무새’ 역시 활동가들에게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다. 외모를 가꾸고, 몸을 단장하는 것은 흔히 진보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능한 소통자는 연설장이나 모임의 분위기와 자신의 외적 효과를 맞출 줄 안다. 사람들과 소통하기 유리한 매무새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장. [몸으로 하는 혁명]의 많은 부분은 자신의 몸이 혁명의 도구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활용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몸은 늘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곳이기에 수사적 효과가 아주 크다. 예를 들어 완전한 채식주의자의 마른 몸은 지속가능한 생태, 자연 존중, 윤리적 소비 등을 연상하게 한다. 의도하지 않더라도 활동가가 앉고, 서고, 행하는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이 수사인 것이다. 또한 저자는 몸이 글이나 말보다 활용도가 높기 때문에 글이나 말주변에 자신이 없는 활동가들이라면 몸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좋다고 제안한다. 메시지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기, 노동자들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을 하기, 거리극이나 플래쉬몹 연출하기 등도 효과를 볼 수 있는 수사 전략이다.

5장. [21세기 신급진주의 수사]의 특징에 대해 언급한다. 급진주의 역시 ‘다양성 인정, 복수의 역사 끌어안기, 복합적인 질문 선호, 대결적인 미래 그리기’ 등을 내걸며 중심없는 공동체, 맥락을 횡단하는 소통, 새로운 형태의 지도력으로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네크워크를 활용한 수사 전략은 신급진주의에 유용하다. 
독립매체 만들기, 1인 미디어,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하기 등은 신급진주의의 특징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좋은 예다. 우리는 이미 촛불을 통해 이 효과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소통과 현실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수사학을 활용할 것. 
저자의 이 주장을 새기고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욕망하며,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상상하고, 창조할 때 사람들이 꿈꾸는 다른 세상은 가능할 수 있다.

[ 2011년 12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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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있는 사회 - 동녘신서 101
아비샤이 마갈릿 지음, 신성림 옮김 / 동녘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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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지난 10월 공부모임에서 선정되어 세미나를 진행했던 것이다.
 당시 이 책을 선정한 이유는, 참석자들이 '모욕이 일상화 되어버린 사회'에 대한 우려를 공감했기 때문이다. 공동체 내의 신뢰가 붕괴되면서 나타나는 자살과 왕따, 집단괴롭힘과 소수자에 대한 박해 등에 대한 이야기 중에 '품위'와 그 반대인 '모욕'에 대한 의견이 있었다. 개인에 대한 모욕, 집단에 대한 모욕, 소수자에 대한 모욕, 직위와 권위에 의한 모욕, 권력에 의한 모욕, 정치적인 이유에 의한 모욕, 제도에 대한 모욕 등...

 금년(2011) 초 카이스트 대학생들의 연쇄자살(4명) 상황을 지켜보면서 엄기호씨는 4월 15일자 프레시안에 "카이스트의 유령들... 그들을 못 보는 당신도 괴물이다"라는 기고를 실었다.
 자살사태의 직접적인 배경은 MB의 교육관료가 카이스트 총장으로 임명한 서남표가 경쟁력을 향상시킨다는 이유로 2008년 도입한 '징벌적 장학금 제도'였다. 상대평가 기준 평균 학점 3.0 이하부터 장학금을 뱉어내야 하는데 2.0이 되면 그 금액이 무려 600만원이 된다. 과학기술입국을 취지로 설립한 국립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 서로를 짓밟고 넘어야하는 정글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평균 아래로 내려가는 학생들을 패자로 규정하고 징벌에 처하는 이런 제도에 말로 학생들에게모욕, 치욕감을 주는 것이 아닐까?

 2009년 10월 조국 교수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 자 있다. "구성원들이 자기가 모욕당했다고 간주할 만한 근거가 있는 조건에 맞서 싸우는 사회가 바로 '품위있는 사회'이다. 생존권을 외면하는 재개발을 추진하고 이에 반대하는 철거민들을 '도시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강경진압하는 현 정부의 행태를 정당한 법치라고 할 수 있을까? '공무집행'의 외관을 띤 정부의 행위야말로 '제도적 모욕'의 예이다. 그리고 장례도 미루고 7개월 이상 이러한 모욕에 맞서 싸 우는 사람들이야말로 '품위있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생소한 개념과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엄기호씨와 조국 교수의 관점을 고려하면서 이 책을 읽으면 좀 더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저자는 '문명화된 사회'와 '품위있는 사회'를 구분하는데, 구성원들이 서로 모욕하고 않는 사회는 '문명화된 사회(개인만의 괸계와 관련된 미시윤리적 개념)'라고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고 않는 사회는 '품위있는 사회(전체 사회구조와 관련된 거시윤리적 개념)'라고 구분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책은 1부. 모욕의 개념, 2부. 존중의 근거, 3부. 사회적 개념으로서의 품위, 4부. 사회제도의 검증, 맺음말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사람이 모욕감을 느끼는 이유를 다룬다. 여기서 저자는 두 가자 주장을 주장을 비교하는데, 하나는 통치제도의 존재자체가 모욕감을 느낄 이유라도 말하는 무정부주의자의 주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어떤 통치제도도 모욕감을 느낄 이유를 제공할 수 없다는 스토아학파의 주장이다. 두 가지 주장에 대해 저자는 통치제도가 반드시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제외한다.
 그는 품위있는 사회의 이념이 반드시 권리의 개념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권리 개념이 없는 사회라 하더라도 품위있는 사회에 적합한 명예와 모욕을 개념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 명예의 개념으로 적합한 것은 자기존중의 개념으로, 자부심이나 사회적 명예와 대립한다고 주장한다.

 2부에서는 인간을 존중해야 할 정당한 근거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다루고 세 가지 유형의 정당화를 제시한다. 첫째는 적극적인 정당화로, 사람들이 존중받는 자격을 갖게 하는 인간의 공통된 특성에 의존한다, 둘째는 그런 특성이 존재할 가능성에 의문을 던지면서, 인간을 존중하는 일반적인 태도가 존중의 원천이라고 제안하는 회의적 정당화다. 마지막 소극적인 정당화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적극적이었다 회의적이다 근거는 없지만 그들을 모욕하는 일을 피해야 할 정당성은 있다고 주장한다.

 3부에서는 어떤 사람을 인간 공동체에서 거부하는 일이자 기본적인 통제력을 상실을 의미하는 모욕 개념을 다룬다. 저자는 모욕의 이런 두 측면이 사회구조 안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자신의 인간성을 표현하는 특정 생활양식에 대한 거부로 나타나는지 구체적으로 애기한다.

 4부에서는 복지제도가 처벌제도 등 주요 사회제도가 품위 있는 사회에서 작용했다 할 방식을 다룬다.

 맺음말에서 저자는 '품위있는 사회'와 존 롤스의 '정의로운 사회'를 비교,검토한다. 즉 ‘정의로운 사회’와 ‘품위 있는 사회’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정의로운 사회가 각자가 기여한 바에 따라 사회적 명예의 분배가 차등적으로 분배되는 사회라면, 품위 있는 사회는 더 나아가 그런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즉, 명예가 훼손되지 않는 사회라는 것이다.
 그는 정의로운 사회는 반드시 품위 있는 사회여야만 한다고 본다. 하지만 어떤 사회는 그 성원들에 대해 정의로울 수 있지만, 그 사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방인)에 대해서는 모욕을 행사하는 사회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지, 아니 더 나아가 그런 종교집단들이 그 구성원을 어떻게 대하는지, 여성들은 그 안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규범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정의로운 사회가 반드시 품위있는 사회는 아닐 가능성이 있으며 서로 다른 이론이나 개념을 포괄하는 관계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만, 그는 정의로운 사회보다 품위있는 사회를 확립할 가능성을 낙관한다.

 저자의 결론은 '인간의 존엄성에 가치를 두지 않는 사회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는 평등주의적 사회정의 이념과 관련된 여러 문제 상황을 나름의 방식으로 수용하면서도 인간의 존엄성에 초점을 두고 한층 더 나아간 ‘품위 있는 사회’라는 인간다운 사회에 관한 또 다른 규범적 이념을 제시한다.
 저자가 제시한 ‘품위 있는 사회’는 결국 하나의 사회에 있는 ‘제도들’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를 말한다. 품위 있는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보다 더 급하게 실현해야 하는 사회이며, 현실적으로 정의롭지 않더라도 이 사회는 반드시 품위가 있어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품위 있는 사회’는 사회가 제도를 통해 구성원들을 존중하는 사회이고, 더 나아가 사회 구성원들이 정당한 이유로 모욕감을 느낄 그런 조건들과 싸우는 사회다.
 그는 이런 사회가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로 인간의 존엄성을 들었다. “사람들이 무엇을 모욕하고, 또 어떤 것을 존중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사람들이 모욕감을 느끼는 이유로 사람으로서의 자기-존중(자존심)을 부정하고 사람을 사람 아닌 존재로 다루는 현실에 대해 “사람을 어떤 ‘물건’이나 ‘기계’로 또는 ‘동물’이나 ‘인간 이하’로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에 대한 무시는 사람을 그 표현과 감정과 기분의 변화 등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민감하게 보지 않는 방식으로, 충분히 또는 세심하게 보지 않거나 마치 사물이나 동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열등한 인간으로 보는 것-낙인찍기)은 인간의 공동체로부터 배제시키거나 거부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품위 있는 사회'에 한국 현실을 비춰보면 어떨까.
 쉽게 떠오르는 것은 소수자에 대한 모욕과 국가권력 및 제도에 의한 모욕이 '일상다반사'라는 것이다. 조금 사정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장애인에 대한 모욕은 폭력의 수준으로까지 여전히 나타나고 있고 성소수자에 대한 제도적 모욕은 전혀 개선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다. 여성에 대한 무의식적 모욕과 폭력행태는 집권당의 대표에서 '강추행'이라는 별명을 얻는 국회의원, 대학교 내에서의 집단 성폭행, 술자리에서의 성추행, 일상적인 성희롱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군인과 학생에 대해 폭력과 모욕을 제도적으로 근절하고자 하는 노력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저자는 품위 있는 사회는 인간을 존중하고 모든 인간에 대한 모욕은 잘못임으로 그 사회는 자신의 품위 문제를 단순히 어떤 국적이나, 시민권이 있는 사회 구성원에게만 한정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예컨대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거주는 하지만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도 존중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때리지 마세요, 저도 사람입니다”라는 한국어부터 배우는 우리 현실에 비춰보면, 우리는 그들을 공동체의 완전한 일원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품위 없는 사회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등시민”으로 자기-존중(자존심)에 손상을 입게 되는 시민이다.

 저자는 또한 품위 문제를 문화적인 부분으로 연결시켜 설명한다. 포르노그래피가 사적이 아닌 공적의 목적으로 사용되거나, 동성애자들처럼 사회적 소수자의 생활양식을 문화가 외면할 때, 사회가 충분히 여력이 있지만,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을 구축하는데 노력하지 않는 것도 상당히 모욕적인 상황이라고 말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연고주의나 학벌주의도 특정 집단의 배제의 원리가 작동하므로 사회의 품위를 훼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사회에 보이지 않게 제도화 되어 있는 속물근성, 사생활, 관료제, 실업사태 등까지도 그 본성은 상당히 모욕적인 속성이 있다. 특히 복지제도는 겉으로는 한 사회의 품위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대상자들을 동정이나 자비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부끄럽고 열등한 존재로 격하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면 결과적으로 모욕적이 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한동안 논란이 되었던 '차등급식'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 누구도 모욕되지 않고, 어느 누구도 기회에서 배제되지 않으며 참여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자기존중이 보장되고 ‘사회제도들’에게 모욕받지 않는 사회, 무턱대고 모든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똑같이 어떤 것을 나누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간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존중을 누리면서 사는 사회...
 저자가 제사하고 있는, 현대사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다. 그래서 그는 일반적인 평등주의적 사회정의의 이상은 정말 중요하고 본래적으로 가치 있는 인간 존엄성의 보장이라는 가치 지향을 중심으로 재정립되거나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성장과 경쟁을 만능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저물어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념이라는 잣대만으로 사회를 구분하고 규정하는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이제야 그것을 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다양한 가치와 다양한 이해관계가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거대한 물결처럼 어떤 방향으로 함께 흘러가는 느낌이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가 없는 대신 꾸준하게 추구해야 할 인간에 대한 존엄성은 더욱 절실하다. <품위있는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아는 누구를 모욕하지 않았는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익숙한 제도와 문화로 인하여 누군가를, 어떤 집단이나 계층을 무의식적으로 모욕하고 있지는 않은가...


 참고로  '품위'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으로 정의한다. 책의 제목 <품위있는 사회>의 원제목인 'decent'의 사전적인 의미는 '점잖은,친절한,예절바른'이다. 따라서 역자는 책의 내용과 저자의 취지에 맞게 책의 제목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과연 이 책의 한국어 제목을 왜 '품위있는 사회'로 정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요약하면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이반 일리히의 저서 의 한글번역본의 제목을 <학교없는 사회>로 정하여 독자들에게 저자가 학교를 없애자고 주장한 것처럼 편견을 심어버린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국어 사전이 유명무실화되기 시작했다. 2천여 시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이 온갖 불법과 불의를 저지르면서도 '정의사회 구현'을 외치면서 "정의"가, 전두환의 파트너 노태우가 수천억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떠들면서 "보통사람"이, 국가를 수익모델이 삼은 가카가 생태계를 파괴하고 토건국가를 만들고 썩은 냄새가 진동하면서도 '4대강살리기' '녹색성장' '공정사회'를 외치면서 "살리기"와 "녹색"과 "공정"이라는 단어가...ㅠ

[ 2011년 12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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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란 이름의 편견 - 인간의 외모를 바라보는 방식을 리디자인하다
데버러 L. 로드 지음, 권기대 옮김 / 베가북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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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 사이 뱃살이 더 나왔네?"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핑계지. 다만 게으를 뿐.. 시간은 주어디든지 아니라 만드는거야" "더 예뻐졌네!"
가족이나 친한 지인들에게 아무런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꺼내는 이야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나니 후 나는 아무런 느낌도 없다.
반대로 내가 자주 듣는 이야기는 "머리 좀 이쁘게 다듬지?" "옷을 왜 이렇게 촌스럽게 입어?" "그래가지고 어디 사업(영업)하겠어?" 등이다.

시내 카페에 책을 읽고 앉아가 잠시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주변 자리에 앉은 여학생, 아줌마, 여성들의 이야기가 들리기도 한다. 드라마 이야기, 연예프로 이야기와 더불어 반드시 대화 소재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외모, 패션, 연예인, 성형수술, 다이어트, 화장류의 이야기다.

언젠가 우리 주변에서도 크고 작은 성형수술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10대 청소년들은 연예인 누가 성형을 했는지 훤히 알고 있다. 우리나라 케이블 TV 프로그램에서도 참가자들에게 성형을 해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기사도 읽은 기억이 난다. 이휘재가 진행자로 나오는 프로그램에서 여자 연예인들은 성형수술을 했던 사실을 전혀 꺼리지 않고 자랑하고 다른 연예인은 부러워하기도 한다.
현재 TV, 인터넷, 모바일, 지하철, 옥외광고판 어디서도 성형과 화장, 패션 등에 대한 광고와 기사가 넘쳐난다.

얼핏 생각해보면 이러한 모습과 생각들이 아주 당연한 듯 한 상황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사회적 편견'이자 '외모지상주의'라고 비판한다.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사회적 '병리'현상이고 또 다른 사회구조적 차별이며 부도덕한 자본의 착취이자 결과라고 주장한다.

예일대학교를 Summa Cum Laude로 졸업한 데버러 로우드는 미국에서 법 윤리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지도자이며, 남녀문제, 법률 및 공공정책 분야에서 가장 주도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탁월한 학자인 동시에 미국 최고의 지성인이다. 미국변호사협회 여성분과위원회 회장 및 미국로스쿨협회 회장을 역임한 로우드는 현재 스탠퍼드 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녀는 스탠퍼드 윤리센터를 설립했을 뿐 아니라 남녀 성차 연구를 위한 미셸 클레이먼 인스티튜트를 이끈 적도 있으며, 클린턴 행정부에서는 하원 법사위원회 소수민족 선임자문관으로 봉직했다. 법 윤리 분야의 탁월한 업적 등을 인정받아 변호사협회가 수여하는 Michael Franck상, Pro Bono Publico상, W. M. Keck Foundation상 등, 수많은 상을 타기도 했다. 로우드는 분주한 가운데 시간을 쪼개 전국법학저널에 칼럼을 기고하는가 하면, [아름다움이란 이름의 편견] 외에도 [Managing Pro Bono], [Women and Leadership], [In Pursuit of Knowledge], [Moral Leadership], [Gender and Law], [Access to Justice], [In the Interests of Justice], [Ethics in Practice], [Speaking of Sex] 등 20여 권의 저서를 발표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선호하는) 것은 단지 인간의 본능일까? 따라서 그것은 비난하거나 개탄할 수 없는 일일까? 하지만 미모라는 개념이 허망하고 부당하게 정의되었다면, 그리고 그 왜곡된 이미지가 위험하게도 인간의 판단과 행동을 좌우한다면, 그냥 방치해도 좋을까? 근거 없는 아름다움의 이상 때문에 상상을 불허하는 경제적자원이 낭비되고, 사기성 광고가 판을 치고 건강을 위협하며, 외모로 인해 혹독한 차별이 자행되고, 수많은 삶이 피폐해지고 있는데도 (특히 어린이들부터 그런 편견에 물들고 시달리고 있는데도) 국가와 사회는 이를 수수방관해도 좋은 걸까?

이 책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저자는 아름다움이란 이름의 편견이 인간의 영혼을 지배해온 내력을 꼼꼼히 살펴보고, 소위 ‘루키즘’으로 불리는 외모지상주의의 엄청난 폐단을 세심하게 따져본 다음, 법률적, 정책적, 사회적 조치를 통해 이를 최소화하고 개선하기 위한 전략을 제안한다.
저자의 아이디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외모를 단순히 심미적 이슈로만 볼 것이 아니라 법적,정치적 이슈로 취급할 때 비로소 외모로 인한 편견과 차별을 없애고 진정한 사회적 정의와 평등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외모로 인한 차별이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편견은 아니다. 하지만 그 피해와 영향은 너무나도 심각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되기만 한다. 즐거움의 원천이요, 당당한 정체성의 표현 방식이어야 할 외모가 수치심의 원천, 피눈물 나는 투쟁의 목표로 삼았다.
이 책에서 그 해결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외모는 단순히 얼굴의 미모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몇 십년은 확장된 세계화에 따라 지금은 전세계 그 어디에서나, TV 시청이 가능한 곳에서는 여자애들이 패션모델과 연예인의 몸매와 외모에 자신을 맞추어야 밥을 굶고 살을 빼려고 애쓰고 있다. 세계화의 부정적인 모습은 각 지역의 고유 농산물과 문화, 언어를 멸종시키는데 이어 '미'의 기준, '인생'의 기분부터가 획일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외모의 중요성은 생각보다 크다. 그리고 외모지상주의에 따라가기 위한, 순응하기 위한 대가는 너무 크다. 대인관계애 있어, 경제적 기회에 있어, 자존감과 낙인찍기, 그리고 삶의 질에 있어서 외모중심의 문화는 사람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특히 청소년들에게 커다란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누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문화를 조성했을까? 저자는 이 문제를 사회생물학적 기반, 문화적 가치, 아이덴티티, 시장 요인, 테크놀로지와 미디어, 광고에서 찾아본다,

인간이 머리를 가꾸는 데 쓰는 돈만 매년 총 45조 2,200억 원, 효과조차 의심스러운 화장품에 허비되는 돈은 21조 4,200억 원, 오프라 윈프리조차 살빼기 스트레스로 넘어진다, 모든 의학 분야 중에서 발군의 속도로 성장하는 것은 성형외과, 발이 뭉그러지는 한이 있어도 ‘킬 힐’은 신어야 한다, 5세~10세 소녀들을 위한 미인대회만도 3천 개...
자, 이러고도 이 세상이 과연 제정신인가?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끔씩은 개탄해 마지않으면서도, 다음 순간 한숨과 함께 잊어버리기 십상인 외모지상주의 혹은 ‘루키즘’의 모든 것을 파헤치고, 나아가 그 개선과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탁월한 인문서다. 외모라는 편견의 오랜 역사, 그 가공할 폐단과 피해, 우리의 일상에 나타나는 그 편견의 모습들, 이로 인한 차별과 눈물겨운 투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가 하면, 법조계와 학계에서 쌓아올린 치열한 연구와 경험을 토대로 이 괴물과도 같은 외모의 편견을 타파할 현실적인 전략을 제안한다. 특히 아름다움이란 이름의 편견을 바라보는 페미니즘의 고민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져 있기도 하다.
아름다움의 허상에 온통 넋이 빠져버린 우리의 문화 ! 청소년들까지 미모의 노예로 전락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 우리의 문화 ! 이 책으로 그 탈출구를 찾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미모에 집착하는 편견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사회 정의와 도덕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란 이름의 편견]은 우리 모두의 책꽂이에 반드시 꼽혀 있어야 할, 허영과 편견에 관한 최고의 인문서이다.

다이어트와 성형수술을 생각하는 지인들에게 먼저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 책 속의 문장 :
- 우리 여성들은, 스스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끔 그들을 세뇌하고 있는 얼토당토않은 미의 기준에 얽매인 채, 남자들의 인정을 받을 것을 매일같이 강요당하고 있다.

- 외모에 관한 선입견 때문에 우리가 치르는 대가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금액으로 따져볼까. 전 세계적으로 외모 가꾸기에 투자되는 돈은 적어도 136조 8,500억 원이다. 머리 가꾸는 데 대충 45조 2,200억 원, 스킨케어로 28조 5,600억 원, 성형수술 비용으로 23조 8,000억 원이 들어가고, 화장품 및 향수에 소비되는 돈이 각각 21조 4,200억 원과 17조 8,500억 원이다. 그뿐이랴, 미국인들은 다이어트로 47조 6,000억 원을 쏟아 붓고 있으며, 살빼기를 위한 피트니스에다 그보다 더 많은 금액을 소비한다. 그러면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 한다. 다이어트를 했던 사람들 중 95퍼센트는 1~5년 사이에 다시 몸무게가 늘어나며, 화장품 중에서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혜택이 전혀 없는 것도 너무나 많다.

- 외모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외모의 개선에 신경을 쓰는 것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라고 한다. 이건 참으로 역설적이 아닌가! 외모에 대한 투자는 다른 형태의 소비처럼 지속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단 그 새로움이나 참신함이 없어지면, 혹은 하나의 ‘문제’가 해결됐다 싶으면, 새로운 형태의 자기표현이나 개선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니까. 이러한 패턴을 사회학자들은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고 부른다.

- 월터 크롱카이트나 톰 브로코 같은 앵커들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남자 배우들은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연애영화의 주연을 꿰찬다. 숀 코너리는 60대에 피플지가 선정하는 “가장 섹시한 남자”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여자는 어떤가? 젊었을 땐 자기 나이의 두 배인 남자들을 상대로 연기하다가, 노화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우아하게 퇴장하거나 온몸에 “손을 봐야” 한다. 어떻게든 열심히 노력해봤자, 어느 칼럼니스트가 짙은 화장을 하고 나온 여성 정치인을 두고 했던 핀잔이나 듣기 일쑤다: “엔간한 나이가 되었는데도 아등바등 붙어 있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 그녀에게는 어딘지 굴욕적이고, 슬프고, 필사적이며, 보기에 민망한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 그가 말했던 그 “엔간한 나이”는 기껏 43세였다!

- 스튜어트 이원의 유명한 표현처럼, 광고주들은 단순히 상업의 캡틴이 아니라 “의식의 캡틴”이다. 사회적인 의미를 창조하고 개인의 욕망과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 젊음을 격려해주는 건 좋지만, 젊겠다고 아등바등해서는 안 된다. “나라는 존재는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지,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에 달린 게 아님”을 이해할 때에만 비로소 중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 여자들이 외모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만 없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할 것이라는 생각은 한 마디로 논센스다. 여자들이 더 많은 것을 성취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포기할 때가 아니라, 법적이고 사회적인 권리와 특전을 얻게 될 때다...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한다면 이 세상은 한층 더 생기를 잃을 뿐이다. 물론 우리가 아름다움에 얽매어 있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여자들에게 힘을 주는 원천의 하나를 깎아 내리는 데 급급하지 말고, 페미니스트들이 여자들의 힘의 모든 원천을 고양시키는 노력을 한다면 좀 더 유용할 것이다.

- 외모는 즐거움의 원천이 되어야지, 수치심의 원천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외모에 대한 우리의 이상은 인종, 연령, 몸의 크기에 따른 다양성을 반영해야 한다. 이렇게만 된다면, 외모의 중요성이 과도하게 평가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취업과 교육이란 장으로 외모의 중요성이 넘쳐흐르는 일도 없을 것이다. 또 성에 따라 차별화된 그루밍을 강요당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여성의 자존감은 외모가 아니라 성과에 직결될 것이다.

- 외모로 인한 차별을 보여주는 하나하나의 예는 사소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이 축적될 때의 충격은 어마어마하다. 그러한 편견은 능력의 원칙에 위배되며, 기회 균등을 잠식할 뿐 아니라, 오명을 악화시키고, 자존감을 갉아먹는데다,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고, 계급, 인종, 민족, 성, 성적 취향에 근거를 둔 불이익을 한층 더 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외모를 위한 제품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소비자들을 보호해주는 것은 상식뿐이다. 사람들은 광고에서 주장하듯이 주름살이 그냥 사라지는 법은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 것도 받아들이는 인간의 수용력 또한 과소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 ‘코즈메수티컬’ 스킨 케어 제품의 시장이 연 640억 달러에 달한다는 사실은, 소비자가 ‘알아야 할’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 사이의 엄청난 간격을 말해준다.

- 진보는 개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 초점을 단순히 그들의 선택에 맞추어선 안 된다. 진보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향한 너그러움과, 사회적 태도 변화나 외모에 관한 정책의 변화를 위한 지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2011년 9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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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 스웨덴 - 국민의 집으로 가는길
신필균 지음 / 후마니타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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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2010년은 한국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한 해였다. 1987년 이후 한국의 선거는 정치적인 이슈와 경제적인 이슈가 쟁점이었다. 한국의 정치구조는 수구기득권 세력을 대변하는 정당(현재의 한나라당)과 그들을 반대하는, 보수야당으로 불리우는 정당(현재의 민주당)으로 크게 대별되어 대통령 선거나 지자체 선거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수준 낮은 정치적인 이슈와 '근거없는 경제성장'을 정책으로 내걸고 진행되었다.
하지만, 2010년 지자체 선거는 식상한 이슈를 벗어난 새로운 정책의제가 중요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무상급식'이었다. 물론, 그 전 선거에서도 소수 야당이자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국민참여당은 꾸준하게 무상급식을 포함한 사회복지를 전면에 내세운 바 있다. 다만 거대 여당과 야당에 가려, 그들만을 링 위에 올려놓는 기득권 언론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2010년 선거에서 사회복지가 주요 이슈로 떠올랐을까? 그것은 첫째, 유권자들이 더 이상 기존 정치권과 관료, 기득권 언론의 '여론 유도'에서 벗어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는 1997년 IMF 이후 10년 동안 제대로 된 개혁을 이루어내지 못했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유권자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고실업, 고물가, 비정규직, 자산감소, 소득감소, 부동산 거품, 빈부격차, 양극화...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유권자들은 더 이상 기존 방식으로는 자신들의 삶이 나아지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인간적인 삶을 누릴 권리와 행복할 권리, 그리고 그것을 보장해야 하는 국가의 의무를 문제삼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복지가 주요 이슈로 떠오른 두 번째 이유는 작지만 오랫동안 꾸준하게 유권자들을 설득한 진보정당과 시민단체의 노력일 것이다. 그들은 꾸준히 유권자들에게 사회복지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설득하고 한국이 '복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을 제시했다.
 
2010년을 그렇게 겪으면서 지났지만, 해가 바뀌어도 복지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높다. 정당이나 연구 집단의 복지 관련 비전 발표 및 논쟁도 이어지고 있다. 복지 예산 증가율(2010년 8.9%, 2011년 6.2%)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은, 사람들의 빈곤한 현실과 대비되면서 더욱 쟁점화되었다. 8.24 주민투표에서 다시금 유권자들의 의지가 확인되었음에도 “복지 포퓰리즘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라는 대통령의 발언, “망국적 무상 쓰나미” 및 ‘복지 포퓰리즘’이 공산주의보다 위험하다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김문수 현 경기도지사,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의 발언, 그리고 조중동 등 기득권 언론의 공세가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한국 현실과 거리가 먼 ‘복지병’을 끌어와, 복지를 삶의 개선을 도모하는 실질적 정책 및 전망이 아닌 이데올로기로 치부한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복지’는 정치사회적으로 최우선 의제가 되었고 앞으로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만 남았다.
2010년부터 삶의 질이 하향 평준화되면서 한국의 유권자들은 국가에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이에 특정 계층에게 선택적(시혜적) 복지를 제공하자는 주장과, 모두가 복지 수혜자가 되는 ‘보편적 복지’를 본격적으로 도입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논쟁에서는 정책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고 한번 결정된 정책이 정권 교체와는 독립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지에 대한 탐색과, 한국 사회의 정치문화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찾기 어렵다.  
 
보통 복지 정책을 이야기할 때 스웨덴 사례가 빠지지 않는데, 한국의 스웨덴 사회복지 관련 연구는 조세정책이나 연금 및 보험제도, 노동시장 정책과 다양한 복지 서비스 등 정책과 제도에 주목하는 경향이 많다. 이 책은 복지 정책이 도입되고 확대된 과정과 그 맥락을 개괄하면서, 정책에 담긴 가치와 비전, 이를 구현한 정당 지도자의 리더십과 사회단체의 역할, 정책을 안정적으로 시행하게끔 뒷받침하는 스웨덴의 합의 문화 등을 살핀다. 이는 정책의 실효성과 관련해 ‘선별적 복지 대 보편적 복지’의 구도를 넘어 기본적으로 논의되어야만 할 지점이기도 하다.

전세계에 '사회복지'라는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원조' 국가이자 21세기 현재도 가장 강력한 '복지국가'임을 인정받는 스웨덴...
2010년 말 The Economist는 2011년 스웨덴의 예상 GDP를 4,490억달러, 경제성장율을 2.2%, 1인당 GDP를 47,300달러로 예상했다. 1인당 FDP로는 세계 5위 수준이다. 스웨덴을 포함한 세계 정상급 국가들의 또 다른 특징은 국가 내 빈부격차가 작다는 것이다. 심지어 '복지병'을 앓고 있다고 비판받았고 상당히 복지를 축소했다던 영국, 프랑스는 그럼에도 한국보다 1인당 GDP가 훨씬 높고 빈부격차도 크게 적으며 여전히 복지수준이 정상급이다.
한국 내에서 '복지병'이니 '복지 포퓰리즘'이니 하고 떠드는 사람들은 유럽의 복지국가 역사와 유럽의 사회복지가 국민경제에 미치는 상당한 효과, 공동체의 정체성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알면서도 그렇게 떠드는 것은 국민이 '무지'하다고 생각하여 속이고 선동하는 파렴치한 행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처음부터 '복지국가'였을까? 스웨덴 국민들은 어떤 과정을 겪으면서 세계 최강의 '사회복지'를 만들어 냈을까? 스웨덴의 역사는 한국과 어떻게 다를까? 스웨덴 복지국가의 비결은 무엇일까? 한국 사람들이 스웨덴의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지난 공부모임에서 신필균씨의 [복지국가 스웨덴]을 읽고 세미나를 진행했다.
 
저자 신필균은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를 졸업했고 스웨덴 정부 장학생으로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를 마쳤다. 스웨덴 사회보험청 책임연구원, 스톡홀름 광역시 정보 센터 컨설턴트, 스톡홀름 광역시의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한국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원장, 지구를 위한 세계운동(GAP) 한국본부장,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실 비서관, 정책기획수석실 비서관, (노동부)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이사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총장을 지냈다. 현재는 여성 정치포럼 운영위원,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시민정치 포럼 공동대표, 녹색교통운동 이사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스웨덴 사회복지의 유형과 발전상'(공저, 1999), '에코가족'(공저, 1997), 역서로 '뺀드비치 할머니와 슈퍼 뽀뽀'(2009) 등이 있다. 
그녀는 오랫동안 스웨덴의 대학과 관공서에 근무하면서 스웨덴의 복지 역사와 개념, 구조, 정책,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복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구현되는지 목격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독자들에게 더 생생한 현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목소리를 들려준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스웨덴의 역사와 정치 및 복지국가의 근간을 확립한 스웨덴 사민당의 리더십과 노동조합운동의 역할(제1부)과, 정권이 바뀌더라도 복지 정책의 근본이념을 유지하는 바탕인 스웨덴의 합의 문화(제3부)를 확인해 두면, 정책의 구체적 모습이 서술된 제2부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스웨덴 복지 정책의 핵심 정신이라고 할 만한 ‘국민의 집’ 이념은 브란팅과 한손, 에르란데르, 팔메로 이어지는 60년 남짓 동안 스웨덴 사민당 지도부가 한결같이 공유하고 실천했던 정치철학이다. 1976년 선거를 기화로 사민당의 장기 집권 시대가 끝났고, 사민당과 보수정당이 교차 집권하는 추세는 2010년 총선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스웨덴 복지국가는 보수정당의 집권 시기에도 외형적으로는 시장 원리의 도입, 민영화 등의 변화를 거쳤을지언정 보편주의적 원리만큼은 훼손하지 않았다. 스웨덴 복지국가는 이미 스웨덴 국가와 사회의 기본 작동 원리로 정착했으며 스웨덴 사민당의 성쇠와 무관한 사안이 되었던 것이다. 스웨덴에서 복지국가가 성립된 이후에 보수정당이 집권할 수 있었던 것조차 이들이 집권 이후에도 스웨덴 모델을 유지/발전시키겠다는 공약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의 합의에 도달한 데는, 소외되는 집단이나 계층 없이 모두가 각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이 크게 기여했다. 특히 ‘노동 있는 민주주의’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스웨덴 민주주의의 정신은 공동체 내에서의 참여, 존중, 합의에 있다. 한손 총리는 스웨덴 사회에서 헌법에 의해 모든 사람의 기본권과 참정권은 마련되어 있으나 민주주의가 발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계급사회에서 사회 구성원 간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방치하면 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바탕에 있었던 것이다.

보편주의를 기반으로 한 스웨덴의 양성 평등 정책은 물론, 장애를 입은 자의 일상적 생활을 가능하게 하자는 정상화 원칙 역시 시혜적 복지 서비스가 아닌 스웨덴이 지닌 민주주의적 복지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본인의 경제적 여건과 상관없이 올바른 지혜와 판단력을 구사할 수 있고 독립적으로 자기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교육 정책, 건강상 문제가 또 다른 불이익을 낳지 않게 하는 보건 의료 정책, 사회적 주택 정책과 직업교육에 중점을 둔 노동시장 정책 및 지속 가능한 생태 환경과 자원 유지를 위한 환경 정책까지도 계층 간, 세대 간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자는 민주주의 정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스웨덴식 보편적 복지 정책은 개개인에 대한 존중과 함께 민주주의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철학이며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이 책의 부제인 ‘국민의 집’ 이념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무엇보다 분배의 형평성이 실현되는 경제정책과 노동시장 정책, 평등과 연대 및 사회 통합에 기초한 사회복지 정책,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의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이다. 계급투쟁이나 사유재산 폐지가 아니라 인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민의 집’을 함께 건설하자는 연대성 강조는 비사회주의정당이나 농민, 중산계층들과의 정치적 대화와 협조를 가능하게 했다. ‘국민의 집’은 빈곤층과 노동계급만을 위한 복지 정책이 아니라 전 국민을 아우르는 포괄적이며 보편주의적인 복지 제도를 마련해 스웨덴 특유의 복지국가 모델을 이루었다.
이 부분은 한국의 진보정당과 좌파정당이 눈 여겨 보아야할 대목이다. 얼마전 한국의 어느 진보 정치인이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이념은 해석이고 오직 푸른 것은 민중의 삶이다"라고...
 
 
스웨덴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한국과 다른 국가였다. 그들은 종족간 내란도 없었고 나라가 분단된 경험도 없었다. 그리고 극단적인 이념적 갈등을 겪지도 않았다.
하지만, 스웨덴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어찌 보면 더 힘들고 어려운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전쟁 후 폐허와 쓰레기장처럼 방치된 서울에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이 방랑하는 빈민들의 모습은 18세기 스웨덴 도심지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그리고 수 백년에 걸친 봉건 왕조의 학정과 착취, 급작스러운 산업화와 근대화로 인한 민중들의 비참한 삶,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 집회와 시위와 파업과 충돌의 역사는 스웨덴인들의 유전자 속에 각인되어 있다.
 
[복지국가 스웨덴]은 '복지국가'를 향한 대장정에 막 나서기 시작한 한국인들에게 많은 교훈과 시사점을 준다. 어떤 이들은 이 책을 읽고 그냥 '북유럽 부유한 남의 나라 일'이라도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자살률부터 극심한 빈부격차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에 내재한 수 많은 '문제'를 생각하고 우리의 미래, 우리 아이들과 후손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책 속에서 이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많다.
 
스웨덴의 역사, 구조, 사회복지를 일구는 과정,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세부 복지정책, 정치인과 학자들, 정당과 단체들에 대한 것은 이 책을 읽은 누구라도 쉽게 이해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스웨덴 노동자의 조직율(2010년 현재 전체 노동자의 85%)과 다당제를 가능케 하는 제도를 부러워하면서 그것이 '복지국가 스웨덴'이 가능한 핵심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스웨덴의 노동자 조직율이나 다당제가 19세기 초부터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스웨덴 역시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봉건 왕조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 책 속에서 배워야하는 스웨덴의 근원적인 장점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한국사회의 현실에 비추어 찾아낸 몇 가지 교훈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 15세에서 65세까지 스웨덴 국민들 중에서 1주일에 책 한 권 이상 읽는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여성이 무려 50%에 달하고 남성도 조금 낮기는 하지만 30%에 달한다. 2009년 한국 성인들의 독서율 평균은 1년에 11권으로 한 달에 한 권이 채 되지 않는다. 성인들 중 약 30%는 1년에 한 권도 책을 읽지 않는다.(2010. 01. 문화체육관광부 '국민독서실태조사')
독서는 일종의 문화다. 책을 읽게 되면 스스로 생각하고 남의 생각이나 삶, 다른 의견을 듣는 것이다. 자신이 살면서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데 따른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간접적인 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문학과 과학, 이론과 사실 등에 대해 지식을 넓혀가면서 상상력도 풍부해지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것들이 작게는 가정에서, 크게는 사회 전체적으로 이성적인 대화를 가능케하고 합리적인 사고와 대화와 협상과 합의를 가능하게 해주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스웨덴인들이 처음부터 책을 그렇게 많이 읽게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웨덴이 지금과 같은 복지수준과 문화수준을 이룩하는 과정에는 책을 읽는 사람의 수와 문화가 확대되는 과정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는 우리 아이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성인들이 갑자기 책을 많이 읽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아이들은 지금부터라도 책을 읽고 책을 통해 얻고 생활과 실천을 통해 책을 검증하고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고 자신의 주관과 근거를 마련하고 책 내용에 대해 생각하고 토론하고 대화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익히도록 하는 것이 10년, 50년 후의 한국의 밝은 미래에 희망을 줄 것이다.
 
두 번째는 스웨덴인들의 조직화 수준과 공동체주의 문화다. 우리가 서구인들이라고 생각할 때 늘 선입견에 빠지는 것들 중 하나가 '서구인들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다른 유럽국가들도 다소 수준의 차이가 있지만, 스웨덴의 경우 개인들이 적어도 1개 이상의 정당이나 정치조직, 노조, 시민단체, 종교단체, 이익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다. 그 뿐 만 아니라 동네모임, 지역모임, 학부모모임, 독서모임, 봉사단체, 합창단 등 문화단체 등에 상당한 비율이 가입되어 있다. 단적인 사례로, 1,0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스웨덴의 전국합창단협회 소속 합창단의 500여 개나 된다. 교회합창단은 6천 개가 넘는다고 한다.
서구인들의 개인주의는 '공동체'를 전제로 하는 긍정적인 개인주의인 것이다. 이러한 조직과 단체, 문화는 당연하게도 '공동체주의'를 불러올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대화와 협의, 토론과 합의,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인권의 향상이 사회적인 가치로 자리잡을 수 밖에 없다. 한국은 비교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다. 스웨덴인 대부분이 매일 조직이나 모임에 참여하여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문화생활을 즐기는 시간에 한국 남성들은 야근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있고 여성들은 함께 야근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가족을 챙기고 있는게 아닐지...
 

셋째는 당 지도부의 청빈한 삶으로 대별되는 '사회적 모범'이다. 책의 서문에 거론된 '야스플링 장관'은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의 당 서기 14년, 장관직 14년, 평생동안 국회의원을 거쳐 73세에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저자가 1980년대 후반 그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는 '초라한 임대아파트'에서 부인과 살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당 서기와 장관, 국회의원, 국회상임위 위원장 활동을 하면서도 한 번도 자신이나 가족, 친지, 지인들을 위해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기는 커녕) 자신의 지위나 권력을 사용하지도 축재하지도 않았고 오직 스웨덴 국민들을 위해 헌신했던 것이다.
이 또한 한국의 정치인들이 느끼고 배워야 할 '모범적인 공직생활'이다. 이런 훌륭한 사람이 정치인, 지도자로 수 십년간 일했으니 어찌 청소년, 청년, 성인들이 배우고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사회복지 정책과 제도 하나 하나를 이루기 위해 100년 이상 끊임없이 싸워온 스웨덴인들의 노력이다. 스웨덴의 사회민주당은 1889년, 노동조합평의회는 1898년에 설립되었다. 사민당이 하원 의원을 처음 배출한 것은 7년 만인 1896년이었고 자유당과 연립정권을 형성하고 입각한 것은 28년 만인 1917년이었다. 노조가 처음 총파업을 단행한 것은 1909년이었으며 4개월만에 참패하여 대량해고와 노조원 감소(50%가 줄어 8만명)를 겪었다. 1931년에는 공장폐업에 항의하는 노동자에게 군대가 발포하여 5명이 죽기도 했다. 중앙정부가 유치원 운영에 보조금을 지급하기 시작한 것은 1912년. 스웨덴인들이 싸움을 거쳐 완전한 보평,평등 선거권을 획득한 것은 1918년. 사회보험에 적용되는 여성들이 출산휴가와 휴가비를 받기 시작한 것은 1937년이고 보험과 상관없이 모든 여성에게 출산휴가비가 지급된 것은 1940년. 이 때 아동연금도 지급되기 시작했다. 노령연금제도는 1913년 처음 도입되었고 1935년 지급액과 대상이 확대되면서 기초연금법으로 변경되었다. 1944년부터 유치원에 대한 정부보조금 지급, 1950년부터 9년제로 확대된 의무교육이 시작되었고 1976년부터 6세 아동에 대한 취학전 교육이 실시되었다. 대학 등록금은 전액 무료이고 학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학업보조금을 지원하고 대출해주기도 한다. 전국민 의료보험은 상병수당과 함께 1955년 본격 시작된다. 1935년부터 자발적 실업보험에 국가보조금이 투입되기 시작되었고 실업급여는 소득의 80%, 최장 14개월(18세 미만의 자녀가 있으면 5개월 추가), 상병급여도 있다. 임대주택은 전체의 55%, 그중 공공임대가 22%, 조합 임대가 15%이다. 모든 사회복지의 방향은 '보편주의'다.
스웨덴 국민들이 싸움을 통해 평등 선거권부터 공동임대주택까지 하나씩 마련하는데 소요된 기간은 짧게는 30년부터 길게는 100년이 걸렸다. 한국의 경우 '사회복지'를 명확하게 요구로 내걸고 국민들이 싸운 것은 이제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비록 현실에는 수 많은 빈곤과 절망이 존재하지만 '복지국가'를 한꺼번에 서둘러 끌어올릴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보편주의'라는 방향성이다.
 
 
* 책 속의 문장 : 이 책은 소개할 좋은 내용이 생각보다 많다. 이 서평을 다 읽느니 차라리 책 한 권을 구해서 스스로 읽기를 권하고 싶다.
- 스웨덴 국가와 사회는 어느 세력이나 개인이 절대 권력을 차지하지 못하는 제도적 장치와 사회적 관습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극소수 부유층에 실질적으로 정치사회적 권력이 집중되는 데 반해, 스웨덴은 이를 법률이 아니라 사회적 균형에 의해 해결하고 있다. 스웨덴에서는 어느 정당도 다른 정당의 협조 없이 정책을 관철,지속할 수 없다. 이것은 바로 스웨덴의 선거제도가 어느 한 정당에 의한 다수 지배를 어렵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p.72~73)

- 1960년 '아동돌봄법'이 제정되면서 이미 발생된 문제를 해결하고 복지 수요만을 충족하는 데 급급했던 ‘처방적 복지’ 대신, ‘예방적 복지’라는 새로운 개념이 도입되었다. 여기에는 자녀 부양 가족을 안정시키기 위한 예방적 처방의 서비스를 확대하는 내용과 청소년들이 즐길 수 있는 놀이, 연극, 스포츠 등 방과 후나 휴일을 이용한 프로그램이 포함되어 있다. 이 법이 전국적으로 실효성을 거두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으나, 1960년대 말 모든 코뮨이 이를 시행하여 보편적 아동 정책을 완성했다.(p.92)

- 가족 정책에 대한 관심은 1920년대의 빈곤 가족에 대한 사회적 책임 문제와 1930년대의 출산율 저하에 따른 인구 감소 문제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 스웨덴 가족 정책에서는, 문제에 접근하는 관점이나 해결 방식이 포괄적이고 통합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출산을 모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 모두의 사회생활과 가정생활 사이의 조화와 역할 분담 문제로 본다.(p.103~104)

-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스웨덴 노인 정책이 월등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노인 문제를 접근하는 방법이 독특했기 때문이다. 우선 노인에 관한 문제를, 사회복지 정책이 논의되던 19세기 말부터 가족 내의 문제에서 사회적 문제로 전환했다. 그리고 개인의 ‘생애 주기’적 관점에 그치지 않고, ‘가족’의 관점과 사회적 관점에서 좀 더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노인 문제 해결책을 시도했다. 스웨덴의 노인 정책은 한편으로 노인의 경제 문제, 서비스 문제, 거주 문제와 같은 실생활 문제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으며, 다른 한편 광역 정부와 기초 정부의 상호 보완적 행정 체계를 통해 포괄적인 효과성을 도모해 왔다.(p.116)

- 스웨덴빈곤가족돌봄협회는 노동문제를 제외하고는 사회적 약자들의 모든 생활 문제를 다루었다. 당시 이들은 ‘빈곤’의 개념을 ‘사회적 질병’으로 정의하고 결코 개인 문제가 아니라고 역설했다. “이 병은 심지어 사회적 강자에게까지 전염될 수 있고, 이미 빈곤 상태로 전락한 시민들은 또 다른 시민에게 이를 전염시킬 수 있어서 결국 전 사회를 위협할 수 있다”라며 사회적 책임론을 강하게 피력했다.(p.120)

- 스웨덴의 연금 개혁 이후 스웨덴이 지금까지 지녀 온 주요 복지국가 원칙들, 즉 소득 보장 원칙과 보편주의적 분배 정의 원칙에 대한 중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기초 연금이 폐지되어 보편주의가 약화된 점과, 프리미엄 연금제도가 도입되어 연금제도 성격이 사회보장의 의미에서 개인 보험으로 바뀐 점 등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개혁 제도는 구제도가 안고 있었던 남녀 차이 및 생산직 노동자와 사무직?전문직 노동자 사이에서 빚어졌던 불공정성을 해소해 재분배 원칙을 강화했다. 그 결과 30년 이상 저임금을 받아 왔던 노동자와 시간제 노동을 하는 여성 노동자는 새 제도 덕분에 연금 급여가 상승했다. 그리고 각종 사회보장 급여가 소득으로 간주되어 기여금이 적립되는 점은, 특히 출산휴가와 관련해 남녀의 기회 평등을 장려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p.155)

- 스웨덴에서 공교육 개념은 국가가 재정을 부담하는 것을 기본으로 고등학교 과정까지의 교육 자료와 급식 및 그 밖의 모든 부수적인 비용에 대해서 학부모가 일체의 부담을 지지 않음을 뜻한다.(p.210)

- 스웨덴 대학의 특징은 전국적으로 골고루 분포되어 있고, 대학 수준의 편차가 없으며, 학비가 없다는 점이다. 대학생이 되면 부모로부터 자립해 생활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독립적으로 조달하는 문화가 있다. 정부는 학생보조중앙위원회를 두고 소득이 없는 학생들이 원활히 학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일정액의 학비 지원금을 대출해 준다. 고등학교 졸업 후 3년 이내에 대학 진학의 길을 선택하는 수는 전체 졸업생의 3분의 1이 조금 넘는 43퍼센트에 불과하다.(p.226~227)

- 유념할 만한 가장 중요한 점은 건강보험제도의 개혁을 추진했다고 해서 환자의 부담이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과, 보편적 의료보장 시스템이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합하면 스웨덴 의료 개혁은 공급의 효율성 측면에 중점을 두고, 1차 의료 기관의 역할과 기능을 강화하면서, 종합병원의 비용 절감을 유도했다. 동시에 추가 비용의 투입 없이도 의료 체계의 질적 향상, 관료가 아닌 환자 중심의 행정, 병원 경영의 합리화가 이루어졌다.(p.244)

- 스웨덴 주택 유형의 특성 가운데 필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일찍이 주거권 운동을 배경으로 한 소비자 조합이 주택 건설 회사를 운영해 주택에 관한 조사 연구와 주택 공급을 통해 소비자가 정책과 시장에 직접 참여하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지방정부가 시민의 주거 문제를 시장 논리에 맡기지 않고 삶의 터전 마련을 도와주는 주거 복지 차원에서 주택 건설을 책임지는 방식이다. 주택 정책의 이름을 “모두에게 주택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p.264)

- 코뮨이 공급하는 주택의 종류에는 일반 임대 아파트 외에 수요자의 특성에 따라 원룸 학생 아파트, 학생 가족 아파트, 노인들을 위한 특수 아파트 등 다양한 형태의 주택을 공급한다. 그리고 특별한 상황에서 임시로 주거지를 찾는 청소년과 여성 등을 위해 가구가 갖추어진 호텔형 아파트도 운영한다. 그 외 장애인이나 노인들을 위한 맞춤형 주거 시설의 개보수 공사를 맡아 한다.
임대 아파트는 신청 순번대로 분양되는데, 도심지에 가까울수록 기다리는 기간(1~15년)이 길다. 행정 당국은 자녀가 있는 경우나 의학적 사유에 의한 상황을 참작하여 사회적 약자에게 우선권을 준다. 정부는 부족한 임대 아파트의 입주 대기 기간을 줄이기 위하여 민간 건축 회사가 제공하는 새 건축 임대 아파트의 3분의 1을 코뮨 임대주택 중개소 목록에 의무적으로 등록하게 하여 민간 임대주택을 선택할 기회를 제공한다.(p.268)

- 공공 주택이나 민간 회사의 임대료 책정은 기본적으로 제도적 장치에 의해 집 주인(건물 소유자)과 세입자 조합 간에 지역 단위의 단체 협상으로 결정된다. 지역 단위에서 협상이 결렬될 경우에는 중앙 차원에서 재협상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협상 주체로 참여하는 기관은 세입자전국연합과 SABO이다. 민간 임대주택일 때는 건물소유자연합이 참여한다. 임대료를 책정하는 기준은 당연히 주택의 질적 수준(가치)이며, 일반적으로 ‘동급의 아파트에 동일한 집세’라는 법 원칙을 준수한다. 이런 사회적 원칙은 세입자 주거권 보호로 이어지며 공공 주택의 임대료 수준은 민간 임대주택의 임대료 결정에도 영향을 미친다.(p.269)

- 한국 삼성연구소는 2010년 5월 선진화 지표를 중심으로 OECD 30개국을 조사한 결과 스웨덴을 가장 선진화가 잘 이뤄진 국가라고 발표했다. 한국은 23위였다. 조사 기준은 역동성을 중심으로 자부심,자율성,창의성,호혜성,다양성,행복감 등 7대 지표를 사용했다. 그리고 2006년 유엔개발지수조사는 스웨덴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발표했고, 2004년에도 '뉴스위크'가 조사한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나라’로 꼽혔다. '뉴스위크'는 그 이유로 보건 의료 제도의 발달과 혁신, 연구가 뛰어나다는 것을 들고 있다. 조사와 평가 자료에는 유엔 개발 지수, 국제경쟁력 지수, 세계 경제 안전 지수, 교육 및 문맹 지수, 청렴성 지수 등이 사용되었다.(p.330)

- 한 국가의 운영 체계와 국민의 실생활이 천국과 지옥을 그리 쉽게 넘나들지 않는다는 것은 웬만한 지각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스웨덴은 천국도 아니지만, 복지 제도가 실패한 나라도 아니다. 1936년에 한 미국 저널리스트는 “주식회사 스웨덴의 성공은 기꺼이 적응하고 타협하려는 스웨덴 사람의 성향에 있으며 스웨덴 사람들은 사회질서의 성공적 작동 가능성에만 관심을 가지는 궁극적 실용주의자”라고 평가한 바 있다.(p.331)

- 산업화 초기부터 스웨덴은 보편적 기초 연금에 관한 합의(1935년), 살트셰바덴 합의(1932~38년), 소득 연금 개혁(1957년), 원자력발전소 증축 문제(1980년), 유럽연합 가입(1994년) 등에서 보듯이 중대하고 복잡한 정책에 관한 합의를 이끌어 낸 전통이 있다. 많은 국가들은 이와 비슷한 문제나 사안에 관한 정책 결정을 두고 오랜 진통을 겪고도 해결하지 못하거나 결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사후에 설득하는 방식을 취하곤 한다.(p.332)

- 스웨덴에서의 커피 타임은 직장 문화의 하나다. 일과에서 오전과 오후 두 번은 개인별이 아니라 집단별로 함께 휴식을 취한다. 이 시간에 주고받는 이야기는 잡담이라 하더라도 대부분 사무적인 일과 관련이 있다. 스웨덴 국민은 신문이나 정보지를 많이 보는 편이다. 물론 독서율도 세계적으로 앞서 있다. 일반 상식이 풍부하고 소신이 강해 커피 타임에 나누는 대화는 정보를 얻는 동시에 자신의 의견을 검증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공중파 방송을 통해 토론되는 국가적 사안도 직장에서의 커피 타임 주제가 된다.(p.334~335)

- 합의를 이루는 과정이나 합의 자체의 단점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합의’는 다양성에 대한 자극과 도전을 약화하거나 창의성을 방해할 수도 있다고 지적된다. 합의되었기 때문에 그저 따르면 된다는 태도가 지닌 수동성 때문이다. 그러나 긴 시간을 소모하면서 이루어진 합의는 실행 시간을 단축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런 ‘합의’의 절대적 장점은 결정 단계?과정에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결정된 사항은 오랫동안 지속된다. 또한 구성원의 헌신과 자발성을 불러일으키면서도, 갈등 탓에 발생하는 지체와 불안정을 사전에 예방해 장기적으로 더욱 큰 이익을 가져온다.(p.335)

- 스웨덴은 결코 지상에 실현된 낙원도 아니며 행복한 전체주의 국가도 아니다. 그렇다고 전통 복지국가를 하나하나 허물며 세계화 물결 속에 동참하는 국가는 더욱 아니다. 스웨덴은 자유/연대/복지/환경과 같은 근대적 이상을 향해 현실이라는 거친 여로에서 오늘도 좌우를 더듬으며 느리지만 쉬지 않는 달팽이의 행로를 계속하고 있다. 어찌 보면 순하고 부지런한 이 달팽이의 행로에서 21세기 인류는 자신의 미래에 관한 큰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p.357)  

 
[ 2011년 9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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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몰락 - 미국의 패권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가브리엘 콜코 지음, 지소철 옮김 / 비아북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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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 [제국의 몰락]처럼 미국이 언젠가 몰락한다는데에 나도 이견이 없다. 옛말에 '달이 차면 기우는 법'이라고 했거늘, 미국이라는 제국 역시 몰락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고대 로마도, 비잔틴제국도, 대영제국도, 징기스칸제국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몰락했으니까... 
하지만, 저자는 "미국이 지배했던 세기는 막을 내리고 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그 쇠락의 과정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 책은 저자 '가브리엘 콜코'를 한국에 소개하는 첫 책이자 저자의 최신작이다. 특히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 이후 전 세계인들의 관심사인 미국의 패권이 어떻게 약화되고 쇠락의 길을 가는지를 저자의 관점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제국의 필수요소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중심으로 미국이 더 이상 초월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패권국이 아님라고 말한다. 즉, 핵확산의 세계화와 값싼 미사일의 대량 보급, 중앙은행이 통제 불가능한 국제 금융시스템, 미국 엘리트 그룹의 부조리와 하드파워의 비극적인 종말 등 저자는 정치학과 경제학, 역사학과 철학을 넘나들면서 군사력 만능시대의 종언을 고하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이란 등 중동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며 행동하는 지식인의 양심과 인류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  
 
'공산주의가 사라지자, 미국은 급격히 쇠퇴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저자 뿐 아니라 몇몇 학자들은 구소련이 멸망한 후에 미국의 패권이 급격히 막을 내리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왜일까?
콜코는 주적(主敵)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1991년 구소련이 사라지고 사회주의 이념이 무너진 후, 미국은 더 이상 평화 유지라는 명분으로 국제 사회를 통제하고 무기를 수출할 수 없게 되었다. 주적이 사라지자 헤게모니에 굶주린 미국은 적들을 마음대로 선택했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남아메리카의 군사독재정권들, 국경선을 따라 활동하고 국적이 모호한 소규모의 비밀조직들 .... 그러나 미국이 온갖 명분을 만들어 임의의 적들을 상정하고 그들의 무력을 뿜어대는 동안 세계의 군사기술은 빠른 속도로 저렴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핵무기의 확산과 값싼 미사일의 대량 보급, 미사일 방어 시스템의 한계 등... 최첨단 군사 기술은 중동 국가들을 넘어 동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의 국가뿐 아니라 게릴라 조직에게로 확산되었다. 결국 세계는 더욱 불안정해졌으며, 군사력만으로 패권을 휘두르는 시대는 지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 엘리트 그룹은 무기 판매상들과 결탁하여 여전히 전쟁을 부추기고 권력과 야망을 위해 국제 사회를 무시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전쟁은 미국 내부에서도 '실패'임을 인정하고 있고 실질적으로 미국사회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지만, 정치엘리트와 무기판매상들은 이에 아랑곳없이 이란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고 이스라엘에게 시리아 침공을 부추기고 있다.

정치 엘리트와 무기 판매상의 결탁이 세계 군사체제의 변화를 가져왔다면, 미국의 금융 투기꾼들은 '탐욕'에 물들어 세계 금융 시스템의 불안정을 초래했다. 고위험 고수익에 투자하는 이들은 전통적인 경제 메커니즘과는 무관하게 거액의 돈을 벌고 잃으면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국제 금융을 창조낸 것이다. 지난 20년간 이들은 막대한 이윤을 챙겼으며, 1998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10억 달러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부자들의 수는 다섯 배나 증가했다. 그러나 수익성이 큰 만큼 위험성 역시 훨씬 커졌다. 특히 전문가들은 대출채권이나 채무담보의 위험성으로 인해 안정성이 흔들리고 상당한 규모의 은행 유동성이 고갈될 것이라 진단했는데,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새롭게 재편된 국제 금융 시스템이 붕괴하고 있고, 각국의 중앙은행은 이러한 붕괴를 대처할 힘과 지식이 없다는 점이다. 자본주의가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저자인 가브리엘 콜코는 1932년 미국 뉴저지 주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62년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졸업 후 펜실베이니아대학교와 뉴욕주립대에서 강의했다. 이후 캐나다로 이주해 1970년 요크대학교에서 역사학과 교수로 활동했으며 현재 동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임 중이다. 윌리엄 애플먼 윌리엄스, 하워드 진 등과 더불어 초기 신좌파New Left를 주도한 역사학자로 인정받았으며, 특히 자본주의 국가의 정부와 기업의 관계를 연구해 '정치자본주의(Political Capitalism)'의 실체를 밝힘으로써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그는 행동하는 학자이기도 했다. 베트남전쟁 중에 그는 프랑스와 남베트남, 북베트남을 수차례 방문해 직접 공산주의자들과 만나 대화했으며, 구호물자를 모아 베트남에 보내기도 했다.
냉전의 기원, 20세기 미국의 대외 정책, 베트남전쟁, 중동 문제 등을 연구해 14권의 책을 발표했는데, 그의 역사 관점과 주장은 토머스 매코믹, 로이드 가드너, 브루스 커밍스 등 진보적 역사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세계적 석학인 노암 촘스키는 미국의 제국주의와 대외 정책을 비판하는 많은 저서에서 가브리엘 콜코의 주장과 논거를 인용하면서 그의 연구 업적과 논점에 대해 경의를 표해왔다.
[미국의 부와 힘:사회 계급과 소득 분배 분석], [보수주의의 승리], [전쟁의 정치학:세계와 미국의 대외정책, 1943-1945], [힘의 한계:세계와 미국의 대외 정책 1945-1954], [전쟁의 세기:1914년 이후의 정치, 분쟁, 사회], [전쟁의 시대:세계와 맞선 미국] 등의 주요 저서에는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 철학을 아우르는 그의 넓고 깊은 학문,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양심, 인류에 대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덫에 걸린 자본 - 미국의 금융 위기>, 2부 <소멸하는 패권 - 불안한 미국의 대내외 정책>, 3부 <준비된 재앙 - 중동 정책의 한계>, 4부 <정보와 기술, 그리고 미래의 전쟁 - 향후 국제 관계의 미래>
 
1부에서는 금융 투기꾼들의 등장과 그 결과를 이야기한다. 고위험 고수익에 투자하는 이들은 미국의 금리가 아주 낮을 때 은행에서 돈을 빌렸으며, 전통적인 금융 엘리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들에게 자금을 제공했다. 결국 금융 투기꾼들은 전통적인 경제 메커니즘과는 무관하게 거액의 돈을 벌고 잃으면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국제 금융을 창조해냈다. 지난 20년간 이들은 막대한 이윤을 챙겼으며, 1998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10억 달러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부자들의 수는 다섯 배나 증가했다. 그러나 수익성이 큰 만큼 위험성 역시 훨씬 커졌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불안정해졌다. 전문가들은 투명성의 결여, 복잡성, 리스크의 불명료성, 보편적인 불확실성, 특히 대출채권이나 채무담보의 위험성으로 인해 안정성이 흔들리고 상당한 규모의 은행 유동성이 고갈될 것이라 진단했는데 일련의 사건들로 그 진단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새롭게 재편된 국제 금융 시스템이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를 시작으로 붕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중앙은행들이 지금과 같은 현실에 대처할 수 있게 설계되지 않았으며, 현실을 통제할 법적인 힘과 지식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세계적인 금융 불안과 함께 미국의 패권은 더욱 약해지고 있다. "미국 자본주의는 자살의 길로 향하고 있고 그 길에 다른 나라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2부에서는 불안한 미국의 대내외 정책을 거론한다. 미국의 패권은 베트남전쟁을 계기로 급격히 쇠락해졌다. 그들의 값비싼 최첨단 무기들은 베트남전쟁에서 효력이 없었고, 이러한 문제를 전쟁 후에 해결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기술적 기반을 강화하면서 최대 55만 명이 파견되었던 베트남전쟁보다 약 14만 명의 병력이 파견된 이라크전쟁에 5배나 많은 전쟁 비용이 소요되었다. 이라크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비용이 많이 든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게다가 이라크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군은 또 한번 무너지고 있다. 왜 그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무기업자들과 정치인들 사이의 뿌리 깊은 이해관계를 들 수 있다. 무기업자들은 대부분의 주(州)에서 주요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고, 군비는 경제를 유지하는 버팀목이다. 무기업자들은 국방부가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돈을 번다. 그리고 돈을 버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목적이다. 또한 권력과 야망에 불타는 정치인들과 병적으로 전쟁을 선호하는 국방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경험 많은 CIA의 국제정보를 무시하면서까지 더 많은 무기를 사들이고 전쟁이 벌이고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종종 여론을 부적절하게 만들면서 결과적으로는 미국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있다. 군수산업이 중심인 미국 자본주의의 자기파멸적인 구조, 그 구조에서 나오는 당연한 귀결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부에서는 중동 정책의 한계를 지적한다. 미국은 1954년 이후 수차례 이란의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고 이 지역에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중동 지역 국가들의 저항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석유 생산국인 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국력을 보강했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반감이 증대되면서 연대가 강력해졌다. 단적으로 미국의 첨단 기술력을 이어받은 이스라엘군이 2006년 7월 레바논을 공격했을 때, 당시 헤즈볼라의 로켓은 이스라엘의 최신 전차 20대를 파손했고, 결국 이스라엘군은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 후퇴했다. 또한 2008년 3월 라이스 국무장관이 걸프 지역을 방문했을 때 우호적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이집트는 더 이상 이란에 대한 미국의 모험을 지원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스라엘의 학력이 높은 유대인들은 전쟁의 혐오를 느끼며 이민 가는 비율이 급격히 증가했고, 이제 이스라엘은 이슬람의 위협뿐 아니라 줄어드는 인구 문제로 인해 국가 위기를 대비해야 한다. 이것이 그동안 미국이 중동에서 행한 대외정책의 열악한 현실이다. 그들의 수많은 개입은 그 지역에 평화가 아닌 반목과 혼란만을 낳았다. 미국의 중동 정책 실패만큼 미국의 힘이 소멸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이 저지른 이라크 전쟁, 아프카니스탄 전쟁은 중동지역 전체에 상존하던 혼란과 무질서의 '판도라 상자'를 다시 열었다는 점이다.

4부에서는 향후 국제 관계의 미래를 진단한다. 1991년 소련이 사라진 후 미국에는 유난히 값비싼 무기, 핵폭탄, 지나치게 파괴적인 무기들로 무장한, 비용이 많이 드는 공군이 남았다. 실질적인 적들의 부재는 재앙이었다. 목적을 상실한 미국은 이제 적들을 마음대로 선택하게 되었다. 가난한 아프가니스탄의 부족민들, 이라크인들, 어쩌면 중국, 볼셰비키가 사라진 러시아, 남아메리카의 군사독재정권들, 국경선을 따라 활동하고 국적이 모호한 소규모의 비밀조직들 .... 그러나 미국이 온갖 명분을 만들어 임의의 적들을 상정하고 그들의 무력을 뿜어대는 동안 세계의 군사기술은 빠른 속도로 저렴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핵무기의 확산과 값싼 미사일의 대량 보급, 휴대성과 정밀성이 향상된 대인·대차량 폭탄들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모든 미사일 방어 시스템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점 등.... 이제 최첨단 무기와 군사기술은 중동의 몇몇 국가들을 넘어 동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북한, 이란, 타이완, 베네수엘라 등에서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또한 국가 간의 관계를 넘어 소규모의 비밀 조직부터 대규모의 게릴라 조직에 이르기까지 국가 내에 존재하는 집단들도 영향을 받고 있다.
첨단 군사기술의 보급으로 이제 세계 어느 곳에도 안전한 곳은 없다. 이는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와 군사 등 모든 영역에서 미국의 힘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지배하던 세기는 이제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세계 금융위기까지, 저자는 패권국인 미국의 국제관계와 경제를 살피면서 정치 엘리트의 오만과 편견, 그리고 금융 투기꾼의 위험한 투기가 미국사회를 얼마나 악화시켰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충격과 공포'로 대변되는 그들의 하드파워 전략이 낳은 국제사회의 외면과 냉대, EU와 이슬람 그리고 중국 등 새로운 세력의 출현을 이야기하면서 미국의 패권이 현재 사라지거나 이미 사라졌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담고 있다.  
 
이 책을 일다보면 올해 5월에 읽은 찰머스 존슨의 [블로우 백 (2003. 삼인)]과 지난 해 11월에 읽은 자크 사피르의 [제국은 무너졌다 (2009. 책보세)]와 가 생각난다. 찰머스 존슨(미국)은 2002년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계기로 그동안 미국에 대해 서서히 쌓여오던 '역풍'이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미국에게 불어오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제국의 몰락'을 예견한 바 있다. 자크 사피르(프랑스) 역시 가브리엘 콜코(미국)와 비슷한 이유를 들어 미국이라는 제국이 무너졌음을 선언한 바 있다. 서구 학계 중 적지 않은 학자들이 미국의 일방주의와 패권주의, 신자유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미국의 정책방향을 수정하지 않을 경우 '몰락'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흐름이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유럽과 미국 내부의 상당수 학자들이 '미국'의 위험한 질주와 '몰락'을 지적함에도 우리나라 내부의 수구기득권 세력과 보수층들, 그리고 현 정부가 맹목적으로 미국을 따라하고 미국의 우산 속으로 기어들어 가려고만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답답하다. 미국은 더 이상 지구상의 '모범'도 아닌데다가 전세계의 '적'으로 규정되고 있는데...
미국을 따라가다가 자신들만이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절대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5천만 국민들이 볼모로 잡혀서 미국의 '몰락'에 희생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 2011년 9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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