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논어 - 홍사중의 고전 다시 읽기
홍사중 지음 / 이다미디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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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며칠 전 약속이 있어 광화문 부근에 갔다가 잠시 짬을 내어 교보문고에 들러 오랜만에 실컷 책구경을 했다. 그때 눈에 뜨인 책 중의 하나가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이었다. "꼭 마흔이 되어야 <논어>를 읽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백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이땅에서는 수 만명의 청소년과 성인들이 <논어>와 사서삼경을 읽었을텐데' 하면서...ㅋ
나 역시 한 권 한 권 책을 읽으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동양 고전도 읽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지난 주에 우연하게도 공부모임 세미나 교재로 '논어'가 결정되어 읽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느끼는 것이지만 먹거리에서도 '편식'이 몸에 해로운 것처럼 '읽을거리'도 '편식'하게 되면 '마음'에, 또는 '정신'에 해로운 것 같다. 조선시대에 사대부들을 비롯한 지배계층들이 500백년 넘게 독차지했던 자신들의 권력과 이권을 일본에게 빼앗겼을 뿐 아니라 아무런 잘못도 죄도 없던 '백성'들까지 도탄에 빠트린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눈을 감고 귀도 막은 채 '편협된 주자학' 등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구사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성경'을 무슨 절대진리인 것처럼 받들면서 중세 암흑기에 수 많은 무고한 인명을 살상시켰고 그 이분법과 유아독존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와 이란에서 엄청난 살상행위를 거듭하고 있다. '과학만능주의'와 '성장만능주의'는 서구사회 뿐 아니라 전세계에 뿌리를 깊게 내리면서 국가간 양극화와 국가내 빈부격차를 확대시키고 생태를 파괴하고 있다. 제국주의가 광품처럼 전세계를 몰아칠 때 한반도에 들어온 기독교 역시 21세기 현재에도 상당수 사람들에게 도그마로 남아 우리사회에 큰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가원전 중국 땅에서 태동하여 2000년 넘게 동양사회의 사상과 문화에 자리잡았던 '공맹사상' 등 동양사상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서구의 강력한 힘에 떠밀려 지금은 흔적을 찾기도 어렵다. 물론 동양사상 뿐 아니라 전세계 구석구석에서 수 천년, 수 만년 동안 이어져오던 여러 민족과 국가의 전통사상과 문화가 서구 제국주의의 무자비한 탄압과 말살정책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형편이다. 서구에서 태동하여 전세계에 퍼졌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가치의 핵심이 '다원성'과 '만민평등'임에도 당시에는 서구인들의 '그들만의 리그'였기 때문일 것이다.
서구사회에서는 20세기 후반부터 서구의 지배사상과 문화가 더 이상 전세계적인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다는 반성과 문제제기가 이어지고 동양사상을 비롯한 지구상의 다양한 사상과 문화가 존중되고 그 의미와 내용이 재평가되기 시작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정작 동양사회, 특히 중국과 한국에서는 오히려 서구사상과 문화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느껴진다. 답답한 상황이다.

나 역시 사회적,정치적 격변기를 겪을 수 밖에 없는 세대라 <논어>를 읽으면 언론에 거론되는 여러 정치인, 지도자급 인물들을 생각하게 된다. 특히 박정희나 전두환, 김영삼처럼 상식적,정상적인 과정 속에서 대통령에 취임한 정치인은 평가할 가치조차 없었고 현재 대통령인 이명박은 <논어>의 관점에서는 군자 비슷하기는 커녕 최악의 지도자이자 "강물이 뒤엎을 배"에 해당하기에 제외한다. 그나마 김대중, 노무현 전직 대통령과 올해 우리나라에서 총선, 대선이 실시되는 가운데 거론되는 여러 야권 지도자(안철수,문재인,유시민,손학규,이정희등)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평가하게 된다. 공자의 많은 이야기와 생각 중에서 사람과 사물과 사건과 상황과 갈등과 태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어 딱딱할 것이라는 당초 생각보다 재미있게 읽었다.

동양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 한국, 일본, 동남아 각국은 서양사회와 전혀 다른 가치관과 문화로 수 천년 넘게 이어져왔다. 그런 과정에서 동양사람들의 몸과 문화 속에 유전되어온 것은 여전히 서양의 그것과 무척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고전 뿐 아니라 동양고전 역시 꾸준히 탐구해보고 그 사상과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실제 언젠가부터 동양 내부에서보다 서구사회에서 동양철학과 사상을 연구하고 재해석하는 학자들이 늘어난다고 한다.
혹자는 '약 2,500년 전의 공자와 논어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라고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수 천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공자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다면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인간의 본성을 무어라 설파할 것이며, 어떤 삶이 올바른 삶이라고 가르칠 것인가? 이런 문제의식은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봐야할 것이다.
과연 공자는 21세기에 제대로 재평가, 재해석되어 새롭게 부활할 수 있을까?

이 책은 단순히 논어의 텍스트를 알기 쉽게 해석한 책은 아니다. 논어의 텍스트를 재해석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공자를 탐구한 책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다. 저자는 인간 공자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탐구하고, 그래서 삶의 지혜를 깨닫고 올바른 교훈을 터득하고자 한다.
그래서 저자는 책의 제목을 <나의 논어>로 붙였다고 말한다. 저자는 우선 공자를 둘러싸고 있는 신화의 껍질을 과감히 벗겨냈다. 그리고 오늘을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오버랩시켜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성인 공자에서 인간 공자로의 귀환이다.

저자가 동서양의 문헌을 두루 섭렵하면서 만난 공자는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출세를 위해 기술을 배우고 학문을 익힌 사람이었다. 그리고 도저히 실현될 가망이 없는 꿈에 매달린 채 좌절과 체념 속에서 일생을 마친 비운의 인간이었다. 슬픔을 참지 못해 목놓아 울기도 했고, 거침없이 노여움을 나타내기도 했고, 제자들에게 핀잔을 잘 주고 농담도 하고 좌절감에 사로잡혀 신세한탄을 늘어놓기도 했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 만큼 격동과 혼돈에 시달리던 시절이었다. 그것은 온갖 악덕과 비정에 물들고 소인들과 권모술수가 판치는 세상이었다. 어제의 정의가 오늘의 죄악이 되고, 오늘의 권력자가 언제 역적몰이를 당할지도 모르고, 권력이 법과 정의의 저울대를 멋대로 바꾸고, 나아가 도덕의 눈금마저 숨져지는 시대였다. 저자는 이런 난세의 한가운데서 도덕 정치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의 권력자에게 인정받으려는 인간 공자의 몸부림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저자가 1장 '공자를 말한다'에서 시도하는 것은 신화 벗기기이다. 공자를 둘러싼 신화의 껍질을 벗겨내고 인간 드라마를 보여준다. 출생의 비밀에서부터 가족을 둘러싼 의혹 등 신화 찌꺼기들을 걷어내고 인간 공자의 참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비천한 신분을 벗어나 말단 관직의 진출과 이후 14년에 걸친 떠돌이 현실 정치가의 고단한 모습, 공자를 미워하는 사람들, 고향으로의 귀향과 죽음을 다루고 있다. 1장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연령별 특성인 '이립(而立)'-'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이순(耳順)'-'종심(從心)'과 공자의 말년에 피력한 소회 '여일이관지(予一以貫之 나는 그저 외길 하나를 일관해서 걸어왔을 뿐이다)'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제2장 '지식을 말한다'에서는 지(知)의 본질과 목적 그리고 학문하는 자세를 일깨워준다. 당시의 시대 상황에 비추어 예(禮)로서의 지를 말하며 이것은 단순히 앎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지식을 의미한다. 2장에는 '학이시습지 불역역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好)'와 '육언육폐(六言六蔽)', '온고지신(溫故知新)', '완불상지(玩物喪志)', 그리고 '현현역색(賢賢易色)'에 대해 그 유래와 뜻을 설명한다.

제3장 '군자와 소인을 말한다'에서는 인간의 본질과 인간의 도리, 그리고 삶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다.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仁)에 대해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인은 사랑하는 것이며, 지는 이해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공자 사상의 핵심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장에서는 '화이부동(和而不同)',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교언영색(巧言令色)' 대한 유래와 뜻을 설명한다.

제4장 '처세술을 말한다'에서는 말 그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처세훈을 들려준다. 공자가 살았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비추어도 조금도 낯설지 않다. 공자가 가르치는 난세의 처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살아있는 경구임에 틀림없다. 4장에서는 '인자불우 지자불혹 용자불구(人者不憂 知者不惑 勇者不懼)', '익자삼우 손지삼우(益者三友 損者三友)', '방유도 빈자천언지야 방무도 부차귀언지야(邦有道 危言危行 邦無道 危行言孫)', '군자유삼계(君子有三戒)', '불환무위 환소이립(不患無位 患所以立)', '군자 욕눌어언 이민어행(君子 欲訥於言 而敏於行)' 등에 대한 유래와 뜻을 설명하고 있다.

제5장 '리더십을 말한다'에서는 한 나라나 한 무리의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도리와 자세를 얘기한다. 공자가 말하는 군주론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정쟁을 일삼는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이 금과옥조로 삼을 만하다. 5장에는 '관즉득중 신즉민이언 민즉유공 공즉열(寬則得衆 信則民任焉 敏則有功 公則說)'과 '민면이무치 도지이덕 제지이례 유치차격(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등에 대한 유래와 뜻을 셜명되어 있다.

제6장 '천명과 부귀를 말한다'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경계하고 천명에 순응할 것을 요구한다. 현실에서 재물과 명성을 탐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지만 도가 지나침을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정당한 수단으로 재물과 명성을 얻으면 하등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6장에는 '군자유삼외(君子有三畏)' 등에 대해 들어있다.

제7장 '공자 학원과 제자들'에서는 공자의 교육 이념과 교육 방법을 얘기한다. 당시 공자 학원에는 출세를 위해 제자들이 많이 모여들었지만 공자는 신분이나 우열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 논어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자로와 안연, 자공을 다루고 '사과십철(四科十哲 : 공자의 문하생 중 뛰어난 제자 10명. 덕행에는 안연(顔淵)·민자건(閔子騫)·염백우·중궁(仲弓), 언어에는 재아(宰我)·자공(子貢), 정사(政事)에는 염유·계로(季路), 문학에는 자유(子遊)·자하(子夏))'과 '칠십자(七十子 : 공자의 제자 가운데 후세에 이름이 알려진 뛰어난 70인)'를 설명한다.


과거 중국이나 한반도의 고전도 그렀지만, <논어>의 원문 한자를 읽어보면 <논어>는 '해석해야'하는 텍스트로 보인다. 따라서 혹자는 <논어>에 대한 주석서가 3천권이 넘는다고 말했다. 즉 내가 이 책 <나의 논어>를 한 번 읽고 어디가서 '내가 <논어>를 읽어 보았다.'라고 쉽사리 떠들 수 없다는 말일 것이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앞으로 다른 관점이나 해석을 하는 종류도 읽고 이 책도 몇 번을 더 읽어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으리니...ㅎ

현실의 권력 투쟁, 명분과 현실 사이의 갈등, 생을 이어가야 하는 세상살이의 고단함, 인간의 욕망이 빚어내는 시시콜콜한 일상사, 이런 것들이 저자가 만난 인간 공자의 모습이다. 저자는 그런 것들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될 때, 비로소 공자는 오늘 우리와 함께 살아 숨쉬고, 또 논어는 죽은 경구가 아니라 생명의 언어로 살아 꿈틀거린다.
저자는 공자가 숭배의 대상이건, 비판의 대상이건 상관하지 말고 한 인간으로 보자고 말하고 있다. 논어를 한 인간의 언행의 기록으로 보아야 공자의 참모습과 논어의 참언어를 제대로 맛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과연 그렇게 느꼈나? 이 책에서는 <사기>나 '성경' 또는 '불경'과 같은 신화같은 내용을 담겨있디 않았다. 저자의 원래 의도대로 공자의 인간 본성이 숨기없이 나타나 있다.

이번에 읽은 <논어>에서는 '온고지신'처럼 과거에 중고등학교에서 배우가나 알고 있던 고사성어에 대해 원래 유래와 뜻을 다시 새길 수 있었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어느 제자와 대화 속에서, 어떤 취지로 고사성어가 사용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육언육폐' 등 새로운 고사성어도 많이 배운 것 같다.

공자의 사상과 철학을 기본으로 받아들였으면서도 청나라와 조선이 '군자의 나라'가 되지 못했던 것은 아무래도 도그마와 해석의 문제가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은 명확하게는 모르겠지만)명나라 때 왕양명에 공자의 '유학'이 '주자학'으로 재해석되고 조선에 도입되면서 또 재해석되는 가운데 명나라(이후 청나라)와 조선이 공자사상의 '본질'이 아닌 '자구'에 매달린 것들이 그러한 사례일 것이다. 이덕일의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는 그러한 과정을 잘 보여주었다.

재미있는 것은 사마천과 공자의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공자의 삶의 역정과 공자가 역사에 남긴 유산이 비교할 수 없게 다르지만, 그럼에도 사마천의 <사기 본기>를 읽으면서 사마천과 공자의 닮은 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마천이 <사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 자신의 인생 후반기에 한나라 무제에게 궁형을 당한 이후였다. 공교롭게도 공자 역시 춘추전국시대 제후국으로부터도 중용되지 못하여 14년 동안 방랑한 후인 인생 후반기에 본격적으로 <논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인생역정이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사에는 '만약'이 무의미하기는 하지만, 공자가 제나라나 노나라의 왕들에게 '중용'되었다면 <논어>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공자의 사상이 공자 사후 2천년 넘게 동양에그렇게 강하게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자문해본다.
 
[ 2012년 3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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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라곤의 기적 - 행복한 고용을 위한 성장 몬드라곤 시리즈 2
김성오 지음 / 역사비평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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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라곤에서 배우자>과 이 책에서 읽은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의 발전 역사는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은 기업의 지배구조와 탐욕을 극복할 수 있는 생산 및 기업운용 방식이다. '몬드라곤'은 자본가 또는 기업가 개인의 성품이나 양심이 아닌 자본의 구성, 기업의 지배구조, 회사의 목표와 운영구조의 여부에 따라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자본주의 기업의 전개과정과 전혀 다른 기업의 발전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문제의식이다.
 
물론, 한국을 비롯한 동양의 문화와 역사는 바스크 지역이 특별한 지역이라고 해도 스페인을 비롯한 서구 유럽의 문화나 역사와 큰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몬드라곤에서 배우자>에 나타난 것처럼 스페인 바스크 지역은 이미 18세기부터 협동조합과 유사한 협력적인 조직이나 기업이 태동한 바 있다. 그리고 스페인 내 바스크 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정서가 '몬드라곤'의 태동과 성장의 밑받침이 된 것도 어느정도 사실이고 돈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라는 뛰어난 사상가이자 지도자가 있었기에 '몬드라곤' 복합체의 태동과 성장이 가능한 것도 분명하다. 또한 '몬드라곤' 복합체의 시초인 '울고'가 처음 태동한 1950년대의 세계경제와 지역 내 경제사정은 21세기인 지금과 크게 다르기 때문에 '몬드라곤'의 경험을 현재의 한국에 무차별적으로 도입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하지만, 한국이나 동양 역시 전통적으로 '계'나 '두레'처럼 마을 단위, 지역 단위로 협력하고 협동하는 여러가지 자치조직과 경제조직이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19세말 이후 서구문물의 무차별적인 침탈로 대부분 사라졌지만.. 뛰어난 조직가 같은 사람의 문제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몬드라곤' 복합체의 운영구조와 역사에서 21세기의 우리가 어떤 아이디어와 가능성을 발견할 것이 있느냐일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기업의 목적과 지배구조에 따라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않던 전혀 다른 기업 모델이 가능할 수 있지 않냐는 것이다. 기업가와 노동자의 분리와 대립, 기업의 소유자와 생산자의 분리와 대립, '성장만능'의 기업이 아닌 '양질의 고용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의 성장 가능성 등이 여기에서 핵심적인 구성요소다.
 
비록 '몬드라곤' 복합체 하나의 사례를 그대로 한국에 기계적으로 도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전세계적인 협동조합의 현황과 역사도 전혀 모르고 우리나라의 현실과 사례도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몬드라곤' 복합체의 사례는 내가 협동조합에 대해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당장 하루아침에 무언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는 없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더 연구하고 세미나를 하고 실험하고 실패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윌리엄 화이트의 <몬드라곤에서 배우자 Making Mondragon>가 1940년대의 준비과정과 1956년 '울고' 생산협동조합의 설립부터 1990년 협동조합 복합체의 설립까지의 바스크 지역의 협동조합의 성장과정을 다루었다면, 이번 책은 1990년 이후부터 최근까지의 몬드라곤 협동조합의 모습을 말해준다. 몬드라곤을 중심으로한 거대한 협동조합 복합체는 2006년 '몬드라곤'이라는 단일한 이름과 브랜드로 통일되었다.
저자는 몬드라곤 협동조합이 1980년대 스페인의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였듯이 1990년대 말 동아시아발 경재불황을 극복했고 2008년 미국발 전세계 금융위기, 경제위기도 극복해나가는 중이라고 설명한다.

몬드라곤은 실제 외형적인 수치상으로도 1990년 보다 훨씬 성장한 것으로 나타난다. 2010년 현재 260개 개별 회사(협동조합)가 금융, 제조업, 유통, 지식 등 4개 부문을 포괄하는 하나의 기업집단으로 조직되어 있다. 기업의 전체 자산은 우리나라 돈으로 약 53조원, 제조업과 유통업의 연 매출액은 약 22조원 규모다. 약 8만 4천명의 노동자들이 고용되어 있는데, 그 중 3만 5천명이 출자금을 낸 조합원이고 나머지는 조합원으로 전환 중이라고 한다. 해외에 80여개의 생산공장을 갖추고 있고 제조업 매출의 약 60%가 수출을 통해 올린다.
몬드라곤 내 유통부문의 핵심기업인 '애로스키'는 소비자협동조합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 약 2,100개 매장을 갖고 있고, 금융 부문의 핵심기업인 '노동인민금고'는 스페인에서 5위 안에 드는 대형은행으로 전국에 420개 지점을 갖고 있다. 몬드라곤 대학교는 공학부, 경영학부, 인문학부를 포괄하면서 바스크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기술연구소들이 소속되어 있다.
 
저자는 몬드라곤을 좀 더 현실감 있게 설명하고자 책 속에 자산 규모가 비슷하고 노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된 우리나라의 현대자동차와 비교했다.(물론 몬드라곤은 금융, 제조업, 유통, 교육·연구 부문을 포함한 기업 집단이고, 현대자동차는 단일 기업이므로 단순 비교는 무리일 수 있다.)
몬드라곤과 현대자동차는 자산 규모(몬드라곤 자산 53조 원, 현대자동차 41조 원)와 매출 규모(몬드라곤 매출 22조 원, 현대자동차 36조 원)가 비슷하고 2000년대 들어 더욱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글로벌화 전략(몬드라곤 수출 비중 60%, 현대자동차 수출 비중 62%)을 펼치는 양태도 비슷하다.
그러나 몬드라곤과 현대자동차를 회사 소유구조와 급여, 그리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문제로 바라보면 많이 다르다. 가장 크게 다른 것은 소유구조이다. 몬드라곤의 회사 자본금은 노동자 조합원들이 소유하고 있지만, 현대자동차는 정몽구 회장을 비롯한 대주주들이 주식 지분의 큰 비율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회사 경영을 좌지우지한다. 또한 급여 측면에서 볼 때 몬드라곤은 조합원 노동자와 비조합원 노동자 간에 급여 차이가 없는 반면, 현대자동차의 경우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급여 차이가 상당하다. 다시 말해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은 몬드라곤에서만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더 중요한 차이는 회사의 성장과 고용의 양적, 질적 성장이 정비례하는지 그렇지 않은가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현대자동차는 최근 지난 달 대법원 판결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고용의 양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질적 측면에서도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수 많은 비정규직과 사내하청, 외주화는 현대자동차의 매출과 이익 증대에 관계없이 고용의 양과 질을 현격하게 떨어트리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사회 내에서 왜 기업이 존재하고 성장해야 하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현실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성장이 이루어지면 고용이 확대될 것이다”라는 목표 아래 끊임없이 성장 위주의 정책이 펼쳐졌다. 이러한 '성장만능주의' 이데올로기와 신화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비롯하여 역대 정부의 책임자와 관료, 언론, 학자들의 지속적인 주장이었다. 하지만 최근 20년의 경제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러한 논리는 허구임이 드러나고 있다.
저자는 고용 없는 성장은 죄악에 가깝다며 이를 비판한다. 그리하여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고용 확대를 위해서는 성장이 필요하다. 허접한 일자리가 아니라 질 좋은 일자리로! 한마디로 질 좋은 고용을 위한 성장!”이다. 저자는 몬드라곤의 기업 목표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고용 창출’이었음을 강조한다. 즉 몬드라곤에서는 고용 창출과 기존 조합원의 이익이 부딪칠 때면 언제나 노동자 조합원들이 자신의 이익을 양보하고 고용 창출에 방점을 찍어왔다는 것이다.
저자는 역으로 우리 정부와 기업이 성장의 목표를 ‘질 좋은 고용’에 둔다면 고용과 성장의 선순환 고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제6부에서 1990년대 이후 한국의 협동조합 경험과 현황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생산공동체운동과 자활공동체운동, 저자의 경험에 근거하여 정리한 대안기업운동, 원주 지역에서 일어나는 ‘이종 협동조합 간 연대에 의한 지역공동체 운동’도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 2012년 3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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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라곤에서 배우자 - 해고없는 기업이 만든 세상 몬드라곤 시리즈 1
윌리엄 F. 화이트 & 캐서린 K. 화이트 지음, 김성오 옮김 / 역사비평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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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이윤을 향한 무한경쟁'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 자체도 문제지만, 더욱 큰 문제는 '자본'이라는 속성이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진화하면서 불려나가는 특징을 보인다. 더군다나 1990년대 초부터 가속화된 '시장경제의 세계화'는 개인이나 소집단, 개별 국가를 염두에 두지 않고 무한한 경쟁을 가져옴으로써 인간존엄성과 민주주의, 노동이나 공동체 보다 이윤과 생산,유통체계를 자본의 논리에 맞도록 강제하는 특징을 보인다.
 
예전에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읽었다. 그 책에서 장하준 교수는 전세계적인 국가간 불평등, 자본에 의한 민주주의의 약화, 자유시장 경제에 대한 헛된 이미지, 국가내 불평등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현재 세계 무역과 금융을 쥐고 있는 독점자본이 개인과 집단, 인류 고유의 가치와 문화, 공동체와 국가, 민주주의와 평등에 전혀 관심이 없음을 고발한 것이다.
우리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기본적인 경제체제를 인정하고 그 개별 요소로서 기업과 시장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아무런 책임과 의무가 없는 '무한 자유'와 '무한 권리'를 보유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전세계적으로 시장경제가 '초세계화'되는 상황에서 인류 고유의 삶과 가치가 위협받고 있다. 최근에 읽은 <자본주의 새판 짜기>에서 저자 대니 로드릭이 주장한 것처럼 현대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특성으로 하는) 시장경제는 민주주의와 국가주권, 그리고 세계화(HyperGlobalization) 상호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고 "민주주의와 민족자결권이 하이퍼글로벌라이제이션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진실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와 국가제도만으로 개인과 집단의 삶이 개선될 것인가? 나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가 엄청나게 큰 규모와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만큼 민주주의와 국가주권이 개선된다 한들 '최소한의 규제'에 그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현대민주주의의 주류인 '대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제도'의 한계와 문제점을 숱하게 제기해 왔다. 대의민주주의는 개인들의 자발성과 직접적인 이해를 시스템 속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기존의 시장경제 체제 역시 개인의 삶과 협동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그렇다면 개인과 집단의 삶이 개선될 수 있는 방향은 무엇인가? 당장 어떤 체제나 시스템이라고 뚜렷하게 드러난 것은 없지만, 아마도 '성장'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 인간 중심의 시장경제, 공유와 협력의 시대정신 등이 고려된 방향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반 일리히가 <성장을 멈춰라>를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문제제기한 대로 '자율적 공생사회'가 근본적인 대안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현재 수준에서 갑자기 도약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가능성을 보이는 것 중 하나가 협동조합일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보통 생산자나 유통업자의 횡포로 인해 태동한 소비자협동조합을 생각한다. 소비자협동조합은 소비자를 속이고 대상화시키는 생산자와 유통업자에 대항하여 소비자들이 뭉쳐서 저렴한 가격, 스스로의 선택, 유통 비용 축소, 환경친화적 제품 등을 목적으로 발전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 식으로 한국에서도 생활협동조합이 상당 부분 발전해 왔고 최근에는 생활협동조합 뿐 아니라 의료생협, 주택생협 등 다양한 산업분야로 협동조합이 발전하고 있다. 소비자협동조합은 대기업의 횡포와 유통업자의 횡포를 막고 생산자와 중소기업을 보호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기존의 소비자협동조합에서 아쉬운 것은 소비자 중심의 협동조합이라는 한계로 인해 '일자리'와 '노동'에 대한 가치창출이 부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 및 성격과 더불어 협동조합의 역사가 짧은 이유 등으로 대부분 조합원의 참여가 제한적인 것이 문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 특히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생산협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비자가 중심인 생활협동조합과 달리 노동자가 중심인 협동조합은 근본적인 성격과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소비자협동조합이 담아낼 수 없는 노동 중심의 생산시스템과 직접 참여에 의한 민주주의가 적용, 발달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몬드라곤(Mondragon)은 스페인 북동쪽 바스크 지역에 위치한 도시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1940년대부터 주임신부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의 주도로 시작된 협동조합운동과 제조업·금융·유통·연구·교육을 포괄한 협동조합 그 자체를 일컫기도 한다. 노동자들이 회사를 소유하고 경영자를 선임하며 경영 전체를 관리·감독하는 체제인 몬드라곤은 1956년 노동자생산협동조합으로 시작했지만, 오늘날 해외에까지 생산공장(2010년 현재 77개의 해외 생산공장)을 갖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책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는 한국에서 1992년 초판을 발행해 협동조합에 관심을 둔 사람들과 새로운 사회운동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안타깝게도 여러 사정으로 인해 절판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몬드라곤을 배우고 그곳에서 인류 미래를 위한 희망의 불씨를 보려는 사람들의 열망은 여전했기 때문에 역자가 최근 새로 발간한 것이다.
이 책은 1941년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한 작은 시골 마을에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가 부임하여 1956년 첫 협동조합 ‘울고’의 탄생을 도운 뒤 1980년대 말까지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가 어떻게 설립되고 발전해갔는지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제도의 대안으로 제기된 모든 생산자 연합체는 실패하거나 생산자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전통적 통설을 극복했으며, 심지어 1980년대의 극심한 경제불황을 이겨내고 1980년대 말 100여 개의 협동조합과 19,500여 명의 노동자로 이루어진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책의 저자 윌리엄 화이트 교수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밝히기 위해 몬드라곤의 경영체계, 경기침체기의 대응, 고통스럽게 단행한 조직 재편 등을 체계적이고 분석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책은 몬드라곤 협동조합에 관한 일종의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생산협동조합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협동조합 매뉴얼이자, 교과서가 될 수 있을 만큼 몬드라곤의 경영구조, 체계, 개편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우리에게 더욱 큰 감명을 주는 것은 한 가톨릭 신부와 그와 함께 몬드라곤을 만들어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몬드라곤의 기적을 일궈낸 씨앗은 돈 호세 마리아 신부의 헌신적 지도력과 그의 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을 설득하여 학교를 세우고 이곳 졸업생들과 함께 최초의 협동조합 ‘울고’를 세운 일, 주변 사람들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노동자생산협동조합이 성공할 수 있도록 협동조합 은행(노동인민금고)을 설립한 일, 사람들과 토론하고 공부하며 협동조합을 이끈 일 등 몬드라곤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면서도 한 번도 공식적인 직책을 맡지 않은 돈 호세 마리아 신부의 헌신과 열정은 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1980년대 온 유럽이 경제침체를 겪는 와중에도 노동자들이 협동조합을 지켜내기 위해 혁신과 개편을 해나가는 과정 또한 눈물겹게 그려진다. 1974년 처음 파업을 겪으면서 내부 갈등을 겪고 이로 인해 해고의 아픔까지 감당했지만 끝내 그들을 복직시키고 협동조합의 원칙을 새로 깨닫는 과정, 파산한 기업을 구제하기 위해 쏟아붓는 노력 등도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몬드라곤으로부터의 교훈은 스스로 공부하고 연구하여 대안을 고민하였고 일자리를 창출하여 나누고 이를 위해 기업을 경영하였던 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몬드라곤의 선구적인 노동자이자 경영자인 5인은 생산협동조합의 방식으로 기업을 설립,운영하고 조합원들과 민주적 경영과 창조적 노력을 거듭하여 바스크 지역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을 만들어냈다. 또한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 신부의 조언을 받아들여 생산과 마케팅을 제고시키기 위한 연구와 금융까지 스스로 창출해낸 것이다. 협동조합의 성장은 1980년대 스페인의 경제위기 속에서도 양질의 일자리로 이어졌다.
또 하나의 교훈은 아리스멘디 신부에게서 얻었다. 아리스멘디 신부는 프랑코 군사독재 치하의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조직인 카톨릭의 성직자였지만 스페인 내전 이후 노동자,서민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여러 실질적인 대안과 방법을 노동자들과 함께 연구한 끝에 생산협동조합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그 과정에서 아리스멘디 신부는 홀로 수 백개의 개별적, 소규모, 중규모 토론모임을 조직했다고 한다. 그리고 생산협동조합, 노동인민금고, 연구소, 대학 등 어느 조직과 기업에서도 공식적인 직책과 직함을 가지지 않고 끝까지 직접 나서서 일하지 않았으며 도움과 제안만 거듭하였다. 그는 언제나 먼저 공부하고 연구하고 대안을 수립한 후 구체적으로 일을 추진하면서 설득하여 자연스럽게 협동조합의 주인공들이 새로운 조직과 일에 참여하여 익히고 발전시켜 나가도록 지도,지원했다.
 
 
몬드라곤의 창립자이자 정신적 스승인 돈 호세 마리아 신부의 주옥같은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일부 사람이 자신의 배타적인 이익을 위해 타인의 노동을 이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사회제도는 일종의 사회적 괴물이다. 협동조합주의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자본주의자와 구분된다. 즉 후자가 자신에 봉사하는 사람을 키워내기 위해 자본을 이용하는 반면, 전자는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자본을 이용한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서로는 서로를 보충해줌으로써 완전해질 수 있다. 혼자 설 수 있는 사람은 신이거나 짐승이라고 한다. 이 말은 사회 계급들이 서로를 필요로 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민중과 당국이 서로 떨어져 생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이 말은 공동의 선이나 모든 사람의 이익 등을 진실로 추구할 때 사회제도는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선한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노동자들이 그 일에 참여해서 그들 사이에 진정한 화합을 이루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느껴지고 실천되는 민주주의는 그 범위를 선거제도상의 정책이나 절차에 국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제도적 과정을 민주화함으로써 경제와 재무 분야뿐만 아니라 교육과 사회 분야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반영되어야 한다.”


[ 2012년 3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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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와 저항 - 한국 자유주의의 두 얼굴 우리시대 학술연구
문지영 지음 / 후마니타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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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부터 자유주의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우연하게도 공부모임에서 세미나 교재로 최근 한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 자유주의에 대한 책 두 권을 선택했다. 이 책과 더불어 최장집 교수 등이 집필진으로 참여하고 최태욱씨가 엮은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나 역시도 한국 근현대 정치사에서 '자유주의'라는담론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한국사에서 자유주의 담론의 형성과정을 다룬다는 저자의 서문을 읽었을 때 호기심이 컸다.

사실 오래 전부터 자유주의에 대한 진보진영의 일부 인사들의 폄하가 미덥지 않았다. 저자가 서문에서 지적하듯이 자유주의를 "재산을지닌 부르주아적 개인들, 즉 근대적 의미의 유산자들의 정치 이념"이자 "이러한 '소유적 개인들' 모두의 자유 공화국을 옹호하는 정치 이념"으로 이해하는 입장은 역사적으로 서양 자유주의에 대해 마르크스가 제기해 온 전형적인 비판임은 맞는 말이다. 
부르주아 혁명에 성공한 서양사회에서 자유주의는 공식적인 지배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지만, 애초에 저항이념으로서 그것이 지니고 있던 진보성과 기독교 신앙에 기반을 둔 도덕성을 거의 상실한 채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이 시작된 19세기 이래로는 저쩜 계급적,제국주의적 이익을 옹호하는 논리로 변질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기본적으로 그가 경험했던 19세기 현실의 자유주의에서 출발했다. 
요컨대 자유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역사적'인 것으로서, 그 문제의식이나 분석대상, 모색된 대안의 적실성과 설득력은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는 곧 마르크스주의적 자유주의 비판이 역사적 맥락을 초월해 어떤 경우에나 무조건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함축한다.
1980년대 한국사회 변혁론의 자유민주주의 비판은 바로 이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저자는 현실적 맥락을 고려할 때, "한국의 자유주의는 계급 중심적 관점에서는 제대로 설명될 수 없는 면이 있으며, 한국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부재'를 곧장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부재 내지 빈곤으로 연결지어야 할 근거는 더욱이 없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자유주의는 아주 불편한 단어이자 이념이었다. 그래서 사실 무수한 궁금증을 일으킬 수 밖에 없어 보인다. 그 질문이라 함은, 한국에 자유주의가 도입된 것은 미국의 반공 기지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얻어진 우연한 결과인가?, 정부 수립 후 자유주의는 오직 독재 정권의 정치적 수사로만 존재했을 뿐인가?, 공식적 지배 이념으로 표방된 자유주의와 민주화 운동의 이념적 기반으로 발전한 자유주의 간에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가?, 반공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공산주의로부터의 자유’와 ‘억압적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라는 한국 자유주의의 익숙한 딜레마는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가?, 서양 자유주의 일반의 특성을 공유하지 못하는 한국 자유주의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결국 자유주의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건져 낼 수 있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가?...와 같이 끝이 없다.

저자는 위와 같은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책에 담았다. 그 과정은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를 둘러싼 통념과 또 자유주의에 대한 서구 중심적 혹은 일면적 평가를 극복하려는 시도도 포함한다. 요컨대 이 책의 목적은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도입, 전개 과정을 추적하고 그 가운데서 드러나는 자유주의의 이념적 특성과 전망들을 재구성함으로써 한국 자유주의의 역사적 성격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작업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를 좀 더 민주적으로 견인할 수 있는 자유주의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흔히 ‘한국의 자유주의’는 회의적 냉소적 반응의 대상이 되곤 한다. 저자는 그 배경을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분석한다. 
먼저, 반공 분단국가에다 오랜 독재 정권기를 거친 한국 사회는 자유주의와 무관하다는 입장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는 자유주의가 부재했다거나 또는 비정상적이고 미약하게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에서 ‘한국의 자유주의’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가 한국 사회의 바람직한 대안으로 여겨지거나 심지어 한국 사회와 연관되는 것조차 거부하는 입장과 관련이 있다. 전자가 이념과 사상으로서 자유주의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그것이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에 비판적이라면, 후자의 입장은 대개 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자유주의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이처럼 그 주제가 직면해 왔으며 또 직면할 수 있는 직접적, 잠재적 비판에 대응해,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내용을 핵심적으로 다룬다. 
먼저 이 책은 서양으로부터 도입된 자유주의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곧 ‘한국의 자유주의화’와 한국의 역동적인 역사적 맥락이 자유주의의 전개 양상 및 성격에 제공한 새로운 면모, 곧 ‘자유주의의 한국화’를 동시에 천착함으로써 한국의 자유주의 사상을 총체적으로 조명, 평가한다. 
다음으로 이 책은 한국 자유주의의 ‘양면성’, 즉 ‘지배’ 이념으로 표방된 동시에 그에 맞서는 ‘저항’ 이념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던 한국 자유주의 특유의 전개 양상에 주목하며, 이 점을 드러내고 해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한국 자유주의의 역사적 성격은 이처럼 ‘한국의 자유주의화’와 ‘자유주의의 한국화’ 그리고 한국 자유주의의 양면성이 씨줄과 날줄로 서로 얽히면서 만들어 내는 특정한 맥락 속에서 형성되어 갔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공과나 가능성에 대한 평가는 이러한 맥락에 대한 고려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각 장의 중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1부 -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과 계보는 개화기 이래 자유민주주의적 근대국가 수립을 목표로 투쟁했던 주체적인 노력들을 중심으로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및 계승사를 추적한다.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기원은 단순한 일회적 사건이었다기보다 갈등과 혼란을 동반한 복잡하고 장기적이며 무엇보다 주체적인 일련의 과정이었다는 점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제1부 전체 논의의 목적이다.

1장 - 개화와 자유주의는 ‘서구 근대의 충격’과 그에 대한 ‘조선 지식인의 대응’을 주제어로 자유주의 수용의 배경을 간략히 소개하고 박영효, 김옥균, 유길준 등 일단의 개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개항 이래 자유주의의 수용을 위한 노력이 어떤 특성을 보이며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살펴본다.
2장 - 식민지 시기 자유주의의 굴절과 전화는 일단의 개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졌던 자유주의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어떤 식으로 살아남게 되는지를 고찰한다. 식민 통치하에서 자유주의는 정반대의 두 길로 나아가게 되는데, 제국주의와 타협하면서 종국적으로 친일,부일의 논리를 정당화하게 되는 것이 그 하나라면, 전투적 민족주의의 경향을 띠게 된 것이 다른 한 길이다. 이 장에서는 윤치호, 이광수의 사상을 중심으로 전자의 길을, 양기탁과 안창호, 신채호와 박은식 등을 중심으로 한 신민회와 우파 민족주의 세력의 독립운동 이념을 중심으로 후자의 길을 각각 살펴본다.
3장 - 근대국가 형성과 자유주의는 개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졌던 자유주의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의 근대국가 수립 과정에 어떻게 개입하고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를 보여 준다. 미군정의 영향력 아래 놓인 해방 공간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수립’과 ‘민족 통일’이 동시에 실현되기 어려운 별개의 과제로 분리되어 인식됨에 따라 자유주의 세력이 우파 민족주의 진영(김구,김규식등)으로부터 분화되어 나와 이승만 등 친일적인 극우 단정 세력과 손을 잡게 되는 맥락을 들여다보고, 특히 조소앙과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국에서 근대국가 건설 이념으로 작동한 자유주의의 특성을 살펴본다. 또한 제헌헌법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초기 제도화의 특성과 한계를 검토한다.

제2부 -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이념과 현실은 헌법과 독재 정권의 민주주의 담론, 국가보안법 분석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체제’ 대한민국의 이념과 현실, 실상과 허상을 드러낸다. 공식적 지배 이념으로서 자유주의의 외양과 실천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존재하는데, 제2부에서는 이 괴리를 구체적으로 부각시켜 그 계기와 진행 과정, 결과를 고찰하는 데 집중한다.

4장 - 자유민주주의 헌법 이념: 제1차 개정 헌법에서 제5공화국 헌법까지는 각 개정의 맥락과 쟁점들을 분석하면서 헌법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가 어떻게 굴절, 변조되는지 살펴본다. 거듭된 개정은 결국 독재와 공존 가능한 혹은 독재를 뒷받침하는 명목상의 자유주의만 헌법에 남겨놓았다는 점에서, 또한 입헌주의의 정착을 요원한 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공식적 지배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가 정상적으로 발전하는 데 치명적이었음을 지적한다.
5장 - 독재 정권의 민주주의 담론과 자유주의는 독재 정권이 구사하는 민주주의 담론이 공식적 지배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를 어떻게 왜곡하고 위축시키는지를 분석한다. 이승만의 ‘일민주의’,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 전두환의 ‘정의로운 민주복지국가’ 담론으로 대변되는 독재 정권의 민주주의 담론들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 다양성에 대한 요구를 방종이나 분열로 매도하고, ‘일민’이나 ‘국민 총화’ 같은 전체주의적 가치를 강요하며, 무엇보다 ‘국가 안보’를 ‘자유’에 앞세우는 방식으로 대한민국이 표방하는 자유민주주의를 반공주의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변질시켰음을 보여 준다.
6장 - 반공주의의 신성화와 자유주의의 위축은 한국 사회에서 반공주의가 자유주의의 발전에 한계로 작용하게 되는 맥락과 메커니즘, 그리고 그 실상을 드러낸다. 여기서 국가보안법은 반공주의를 안정적으로 확대재생산하는 제도적 기반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이 장의 논의는 국가보안법이 안보와 자유를 양자택일적인 가치로 만들고 ‘공산주의로부터의 자유’를 ‘억압적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보다 우선적인 것으로 강제함으로써 반공주의에 의존한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한편,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해 왔다고 지적한다. 국가보안법은 그것이 내세우는 국가 안보라는 가치,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안전을 지킨다는 목적 자체가 자유주의에 반하는 것이라기보다 구성원 개인을 배제한 채 국가권력을 정치의 주체화하고 그럼으로써 획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지배 질서를 존속시킨다는 점에서 반자유주의적이라는 것이 잠정적인 결론이다.

제3부 - 민주화 담론과 자유주의는 정부 수립과 함께 공식적 지배 이념으로 채택된 자유주의가 ‘지배’의 장을 떠나 ‘저항’의 영역을 추동하고 확장하는 기능에 복무하게 되는 역사적 맥락을 추적한다. 독재 정권 아래에서 국가보안법의 구속을 받는 자유민주주의는 오로지 ‘공산주의로부터의 자유’라는 가치에 기대어 명맥을 유지했을 뿐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의 이름에 걸맞은 이념과 실천은 ‘민주화’의 이름으로, 민주화 운동을 통해 발전하게 되는데, 반독재 민주화 담론과 비판적 지식인 담론의 분석을 통해 자유주의가 저항 이념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형성하게 되는 특성을 살펴본다. 또한 1980년대의 상황을 자유주의적 민주화 담론이 어떻게 대응,대처하는지도 살펴본다.

7장 - 반독재 민주화 담론의 형성과 전개: 1950~70년대는 이승만 정권 이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제기된 학생 운동권 및 재야사회 단체의 시국 선언문, 성명서, 결의문 등과 <사상계>를 통해 저항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가 드러내는 특성을 분석한다.
8장 - 비판적 지식인 담론의 자유주의는 정계, 언론계, 학계, 종교계 등 자신의 분야에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운동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운동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는 담론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장준하(사상계)와 함석헌(씨알의소리), 리영희(전환시대의논리, 우상과이성), 한완상(민중과지식인)의 사상적 기반을 분석함으로써 민주화 운동 이념으로 발전한 자유주의의 구체적인 내용과 성격을 살펴본다.
9장 - 자유주의적 민주화 담론의 굴절과 균열 그리고 새로운 전망: 1980년대는 ‘독재 대 민주’의 대치선을 따라 단일한 하나의 진영을 구성한 채 통합적 전망을 제시해 오던 저항적 자유주의 담론이 이른바 ‘1980년대적 상황’에 직면해 내적 균열과 분화를 겪고, 상대적으로 보수화되는 배경과 맥락을 보여준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저항적 자유주의는 특정한 계급적 이해를 공유하는 세력이 아니라 특정한 신념과 가치를 공유하는 세력에 의해 지지되었고, 이 점에서 계급적 기반과는 무관하게 민중적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진보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모순 구조가 좀 더 복잡하게 전개되는 1980년대 들어 비계급적 혹은 탈계급적 연대는 일정한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년 민주화’에 이르는 과정에서 저항적 자유주의가 어떻게 영향력을 잃지 않고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되는지 살펴본다.
 
 
저자도 그렇지만, 나 역시도 "한국에서 자유주의가 옳고 다른 이념은 그르다"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가 만민평등과 자유, 민주주의, 법치주의라는 원론으로만 보면 인간 사회에 보편적으로, 그리고 한국에서도 기본적인 담론의 토대로서 작용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동서양에 존재하는 많은 미래의 담론이나 이념 중 한국에 적합한 것이 마땅히 없고 서구에서 한 때 진보적인 역할을 했던 자유주의가 한국에서 다시 그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필요한, 21세기의 담론으로 기능할 새로운 사상과 이념을 만들어 나가는데 있어 자유주의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 2012년 2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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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새판짜기 - 세계화 역설과 민주적 대안
대니 로드릭 지음, 고빛샘.구세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미국이라면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하는' 한국의 관료들과 정치인들, 언론인, 종교인들, 학자들, 그리고 깨어나지 못한 백성들... 
여기 이들에게 세계화에 대해 소개할 책이 한 권 있다. 이 책의 저자 대니 로드릭은 '마국 광신도'들이 꿈에서라도 자식들을 보내고 싶은 하버드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했고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의 국제정치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만하면 '뼛 속부터 친미'인 가카와 우익 정치인, 관료, 언론인, 학자, 종교인들이 귀를 쫑긋 세울 만 한가?

하지만 저자 로드릭은 그들의 선입견이나 바램과는 달리 '세계화 주창자'가 아니라 '비세계화' 경제학자다. 그는 열렬한 자본주의 추종자이자 충실한 민주주의 신봉자다. 동시에 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시장의 실패'와 '시장의 무능'에 대해 정확하게 꿰뚫고 있고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기 위해 국가와 제도, 그리고 민주주의가 반드시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다. "한마디로 시장에는 '스스로 만들고, 규율을 세우고, 안정되게 하고, 적법화하는 능력'이 없다."

이 책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지금 한국의 주류 정치인, 학자, 언론인, 기업인들이 한국이라는 국가와 한국경제에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요즘 정치권과 언론에 한미FTA에 대한 폐기 논의가 다시 불붙었다. 야당과 상당수 사람들은 한미FTA 협정이 불공정하고 편파적이고 한국의 사법제도와 공공성을 제한할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고 재협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세계화'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저자는 '세계화' 자체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뿐더러 금융 세계화의 경우 현재의 국제 금융체제로서는 명백하게 부적절함을 지적한다. 특히 자국 내의 경제구조와 제도,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경우 세계화 자채가 해당 국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만들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이런 관점에서 평가해 보면, 한국의 경우 FTA(자유무역협정)는 고사하고 세계화 자체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재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 내부의 경재구조와 제도, 민주화 정도를 고려하면 WTO 체제도 전체 한국경제에 도움아 되지 않을 수 있다, 차라리 기본적인 국제무역체제는 GATT(브레턴우즈) 체제가 한국에 유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1997년 초 <세계화는 너무 진행되었는가? Has Globalization Gone Too Far?>라는 책을 냈고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우리나를 비롯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경제위기가 닥쳤다. 아시아 경제의 위기를 예견했다는 자부심도 있었지만, 저자는 자신의 당시 예견이 국제 상품경제에만 국한되어 금융시장의 위기를 진단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내가 보기에는 겸손한 말이지만...)
아시아 경제위기 후 저자는 몇 년간 금융 새계화 문제에 집중하여 연구했다. 2007년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논문을 요청하자 그는 <금융 세계화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라는 논문을 작성했다. 
"금융 세계화는 몇 가지 약속을 했다. 기엄가들이 자금을 모으는 데 도움을 주고, 위기를 더 잘 버텨낼 수 있는 경험 많은 투자자들이 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현금이 부족하고 여러 쇼크에 노출될 위험성이 높으며 다각화 능력이 부족한 개발도상국들이 가장 큰 혜택을 입을 것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처럼 정작 잘 나가는 국가는 자본을 받아들인 나라들이아니라 잘사는 나라에 자본을 빌려준 나라들이었다. 국제 금융에 의존한 국가들의 실적은 형편 없었다." 저자는 왜 국제 재정지원이 개발도상국들이게 이익을 가져다 주지 못했는지 조명하려 했다.
그 논문을 출판사에 보내자마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미국을 집어 삼켰다. 처음에는 미국에서, 그 다음에는 다른 선진국들애서, 엄청난 금액의 구제금융을 실시하고 금융회사를 매입했다. 금융세계화가 바로 이 위기의 중심에 있었다. 아시아와 산유국들의 지나친 절약은 주택 경기 거품과 그로써 탄생한 파생상품이라는 거대하고도 위태로운 구조물을 한층 부풀렸다. 

그 위기가 월스트리트에서 세계 금융 중심 도시들로 그토록 쉽게 퍼져나간 이유는 금융 세계화로 모든 대차대조표가 한데 뒤섞였기 때문으로 드러났다. 저자는 자신이 또 다시 수면 바로 아래 있던 더 큰 사건을 놓치고 말았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물론, 2007~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예측하지 못한 것은 저자 뿐 아니라 거의 대다수의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던 것은 대다수의 전문가들이 세계롸, 특히 금융 새계화가 전 세계에 부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예측했고 저자를 비롯한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정치가와 금융가, 학자들은 그런 위기가 발생하는 원인이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는 예측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예측을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럴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경제학자들과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 당시 유행하는 담론을 지나치게 믿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담론이란 시장이효율적이라는 등, 금융 혁신으로 리스크가 그것을 잘 견뎌낼 수 있다는 등, 자가 규제가 최고라는 등, 정부의 개입은 비효과적이고 해롭다는 등 하는 것들이다. "오만은 사람의 눈을 가리는 법이다."
저자는 새계 무역체제가 금융체제와 다른 이유로, 무역 관계가 무너진다고 해서 금융처럼 연쇄 파산이 발생하진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법규가 지나치게 구속적이고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국가는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 그 효과는 포착하기 어려우며 다자간 상호 자유무역 원칙과 비차별 원칙에 따라 점진적으로 조정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007~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경험한 이후 몇 년 사이에 현재의 국제 무역체제가 부유한 국가들에게 반드시 유리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 안에서 경제 세계화를 지지하는 세력이 급격히 약해졌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금융위기 전까지 줄기차게 세계화를 주장했던 대표적인 전문가들 또한 그러하다. 기존에 세계화를 반대했던 조지프 스티글리츠 뿐 아니라  세계적 경제학자 폴 새무앨슨, 2008년 노벨 경제학 수상자 폴 크루그먼, 연방준비제도이사회 부의장 출신의 앨런 블라인더, 칼러니스트이자 세계화 옹호론자 마틴 울프, 클린턴 행정부의 세계화 추진자 래리 서머스도 회의론자로 돌아섰다.
물론 경제학자들 대다수는 어느 누구도 세계화에 반대하지 않는다.하지만 세계화를 더욱 효과적이고 공정하며 지속가능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국가 내, 국가 간 기관을 설립하고 보완 메커니즘을 만들 수 있다.

저자는 1970년대 이후 무차별적인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세계경제가 '세 가지 정치적 딜레마(trilemmma)'에 빠져 있음을 밝혀낸다. 그것은 민주주의,국민국가, 세계화라는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기가 불가능하다는 개념이다. 세계화를 추진하려면 국민국가나 민주주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국민국가와 세계화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국가와 민족자결권을 지키려면 깊은 민주주의와 깊은 세계화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불가피하게 아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가 직면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저자의 생각은 명쾌하다. "민주주의와 민족자결권이 하이퍼글로벌라이제이션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신의 사회적 합의를 보호할 권리가 있고 이러한 권리가 글로벌 경제의 요구와 충돌할 때 물러서야 할 것은 후자다."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한국은 민주주의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고 국민국가로서의 지위도 불안정하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화를 무차별로  강행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와 국민국가로서의 자결권도 침해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정녕 한국 내 기득권들자와 지배계층은 한국을 1980년대의 중남미나 아프리카 후진국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 정말 현재의 한국 상황에서 세계화를 강행했을 때 자신들의 안위와 자배력이 유지 또는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저자는 17~18세기 자본주의의 태동 이래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던 시스템과 세계화가 진행되었던 시대의 특징과 흐름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두 가지 시각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화 담론을 제시한다. 첫째는 각국 정부와 사장아 대체제가 아닌 보완재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 넓고 바람직한 시장을 원한다면 정부의 개입과 관리가 필요하다. 가장 효율적인 시장은 약한 정부가 아니라 강한 저우가 만든다는 것이다. 둘째는 자본주의 모델은 단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시장, 금융체제, 기업지배구조, 사회복지 같은 제도적 장치를 다양하게 조합함으로써 경제번영과 안정을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국가든 자국의 필요와 가치에 따라 이러한 제도적 장치들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으며, 이는 한 국가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이기도 하다.
저자가 20세기에 자국의 경제발전과 국제무역체제 속애서 모범적이라고 평가한 국가 중 하나가 바로 한국이다. 한국의 위정자들은 전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체제와 방식을 내던져 버리고 한국경제와 국민들을 '세계화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있는 셈이다. 참고로 21세기에 적절하다고 지목되는 국가는 중국과 인도다.

그렇다면 저자가 제시하는 세계화의 새로운 담론은 무엇일까? 그것은 '건전한 세계화'를 위해 4가지 방향을 제시한다. 그것은 국제 무역 제도 개혁, 국제 금융 규제, 국제 노동이동 완화, 중국과의 원만한 관계구축이다. 
 
 
- 인상 깊은 문단 :
 
"자본주의는 인간 사회의 경제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점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번영을 누리는 모든 국가가 자본주의를 채택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사유재산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자원을 분배하고 경제적 보상의 정도를 결정하는 역할을 시장의 손에 맡긴다. 세계화는 자본주의를 범세계적으로 확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세계화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세계화의 미래를 논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미래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다." 

"시장은 까다로운 전제조건을 요구한다. 세계시장은 더더욱 그러하다.
식량이나 다른 일용품 시장은 사람들이 서로 잘 알고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도 비교적 잘 돌아갈 수 있다. 작은 무리의 사업가와 금융인들도 공통의 신념체계만 가지고 있다면 무역과 교역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보다 조금이라도 크고 범위가 넓은 시장이 오래 지속되려면 이를 뒷받침할 제도가 필요하다.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한 재산권 규범, 계약을 강제 이행하도록 해주는 법정, 구매자와 판매자를 보호해주는 무역 규칙, 사기꾼을 처벌하는 경찰력, 사업주기를 관리하고 부드럽게 이어나가도록 도와줄 거시정책 틀, 금융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기준과 감독, 금융위기 예방에 기여하는 최종 책임기관, 공공규범에 규합하는 보건 안전 노동 환경 기준, 약자를 위로하기 위한 보상 체제, 시장 리스크에 대비한 사회보험, 그리고 이 모든 제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지금을 조달할 세금까지 그 규모는 어미어마하다.
한마디로 시장에는 '스스로 만들고, 규율을 세우고, 안정되게 하고, 적법화하는 능력'이 없다."

"세계화를 떠받치는 기둥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세계 시장은 매우 취약하다. 국가 차원에서 규제와 법령으로 지배하고 지원하는 국내 시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세계 시장에는 독점 규제 기관도, 조정 기관도, 안전망도, 최종 책임자도, 무엇보다 전 지구적 민주주의도 없다. 바꾸어 말해, 세계 시장의 지배구조는 매우 취약하다. 따라서 불안정하고, 비효율적이며, 대중의 인정을 받기도 힘들다. 이러한 세계 시장의 특성은 각 국가의 시각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세계화에는 불안정 요소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세밀한 조정을 통해 균형점을 찾을 때에만 세계 경제 체제를 건전하게 유지할 수 있다. 각국 정부에게 지나친 권력을 주었다가는 보호무역주의와 자립 정책을 초래할지 모른다. 반대로 시장에 자유를 지나치게 부여했다가는 세계 경제 불안을 초래해 필요한 사회적 정치적 지원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 2012년 2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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