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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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피로사회>와 함께 세미나 교재였던 책. 책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세미나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가 고도화되면서 20세기 후반부터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누구나 성공하고 성과를 만들어야 하는 성과사회, 스스로를 착취하는 피로사회"로 변화되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멜빌 역시 이 책 <필경사 바틀비>에서 성과사회 혹은 피로사회의 초창기 모습을 전달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한병철은 “너는 할 수 있다”라는 말이 지배하는 성과주의는 스스로를 착취하는 ‘피로사회’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여기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 혹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답변으로 고용주인 변호사를 당혹케 하는 필경사 ‘바틀비’라는 사람이 있다.

이 작품은 1856년 처음 단행본으로 발간됐다. 작품은 당시 미국 금융경제의 중심이던 월 스트리트를 배경으로 '상식적'이고 자부심이 강하며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인 변호사와 전혀 '상식적'이지 않고 타협도 하지 않는 주인공 바틀비를 대비시킨다. 변호사는 기존의 필경사들이 까탈스러워 새로운 필경사를 찾는다. 말이 없고 묵묵히 일만 하는 바틀비는 쉽게 고용된다. 하지만 바틀비는 일한 지 사흘 째부터 자신이 하는 일('필경' : 재판기록이나 변호문서에 대한 내용을 글로 옮기는 일) 이외의 다른 업무나 일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특이한 말로 거부한다. 변호사는 처음에는 아주 당황해하다가 자신의 부드럽고 온화한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참는다.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러 바틀비는 당초 자신이 하기로 했던 업무까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면서 거부하기에 이른다. 변호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해하고 결국 바틀비에게 해고를 통지하지만 이마저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면서 자신의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변호사도 독자도 그가 왜 그러는지는 끝내 알 수가 없다. 변호사는 바틀비를 이해하려고도 하고 동정도 해보지만 결국 그가 무서워 도망치듯이 사무실을 옮겨버린다. 새로 입주한 세입자 역시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는 바틀비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마침내 건물주에 의해 바틀비는 구치소에 갇힌다. 마침내 사회로부터 격리된 바틀비는 음식을 거부하다가 숨진다. 

정상적이지도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주인공 바틀비의 말과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자신의 존재 방식에 의문을 갖게 될 수도 있다. 변호사 역시 의문과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친 것이다. 바틀비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한 대상은 당시 시대상황에서 상식과 합리성과 제도와 계약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근대적 합리성,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과 노동, 작가의 창조적 자유와 권리 등으로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19세기 이후 우리에게 내면화된 근현대사회의 운영원리를 내면화한 우리의 존재가 과연 스스로에게 바람직하고 유익하고 행복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바틀비의 생각과 삶은 나에게도 '상식'과 '합리'에 대해 백지상태에서 생각해 볼 것을 말하는 것 같다.

[ 2012년 6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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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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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가 세미나 교재로 채택되어 읽게되었다. 저자는 21세기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최첨단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적 현상과 본질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저자가 독일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기에 독일 및 서구사회를 주요 분석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사회에도 적용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 한병철은 현재의 사회를 '성과사회', 그리고 이 사회 속에 사 인간은 '성과주체'라고 명명한다. 과거의 사회가 금지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현대의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사회인 것이다. 이 책에서 성과사회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화가 낳은 결과로 해석하는데, 개인의 성과에 대한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자본주의는 전체적인 생산성을 극대화해간다는 것이다.(당신들도 나처럼 이 문장에서 박정희와 정주영, 그리고 이명박이라는 이름이 떠오르는가?)

 

저자는 이 책에서 현대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적대성 내지 부정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냉전, 면역학, 규율사회)에서 그러한 부정성이 제거된 사회,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의 변화가 20세기 후반 이후 일어났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회가 금지(“해서는 안 된다”)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긍정의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성공하라는 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규율이며, 성공을 위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이다(“Yes, we can!”). 그러나 부정성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긍정성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귀결되며 타자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른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자아는 피로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은 우울증을 낳는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과거의 착취가 타자에 의한 착취였다면 자본주의의 착취는 '자발적인 착취'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착취'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모든 권위를 타파하고 가장 완전한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고 실현한 서구 사회, 부정성이 거의 완전히 제거된 듯한 긍정성의 사회에서도 “왜 우리는 여전히 진정 자유롭지 못한가?”와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가?”라는 의문에 대한 공감되는 답을 제시한다. 또한, '피로'를 할 수 있는 능력의 감소,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닌 과잉활동의 욕망을 억제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의미로 해석한다.

 

이 책에서 '성과사회'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화가 낳은 결과로 해석된다. 더 큰 성과를 올려서 더 큰 성공을 거두고자 하는 개개인의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자본주의는 전체적인 생산성을 극대화해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착취는 이렇게 해서 자발적인 착취의 양상을 띤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노동수용소를 짊어지고 있다. 범람하는 성공학 도서들이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경영자입니다”라고 말할 때, 한병철은 그것을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착취자입니다”라고 읽는다.
(자본주의 초기, 중기 단계에서 창업자들과 자본가들, 기업가들만이 프론티어리즘과 같은 '할 수 있다'를 '성과주체'로서 규정된다면, 20세기 이후 자본주의의 지배계급과 문화지배층들은 그 범위를 중산층과 노동자, 서민 등 하층 계급에게도 그러한 이데올로기와 문화를 전파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성과주체는 스스로를 착취하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서, 자기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완전히 망가질 때(소진될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피로사회라는 것이다.
저자는 성과사회의 과잉활동, 과잉자극에 맞서 사색적 삶, 영감을 주는 무위와 심심함, 휴식의 가치를 역설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피로’의 개념도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성과사회에서 ‘피로’란 할 수 있는 능력의 감소이고, 그저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무위의 가치에서 출발하는 한병철은 피로가 가진 또 다른 측면을 본다. 피로는 과잉활동의 욕망을 억제하며, 긍정적 정신으로 충만한 자아의 성과주의적 집착을 완화한다. 피로한 자아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유아론적 세계에서 벗어나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그는 모든 권위를 타파하고 가장 완전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한 서구 사회, 부정성이 거의 완전히 제거된 듯한 긍정성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의문, 다시 말해 “왜 우리는 여전히 진정 자유롭지 못한가?”와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가?”라는 의문에 대해 적절한 답을 제시해준다.(그것이 바로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독일에서 이 책이 그토록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이유일 것이다.)

 

우리사회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 책에 묘사하고 있는 성과사회의 모습과 상당 부분 닮아있다. 이 점은 긍정의 힘을 통한 성공을 설교하는 처세술 책들이 서점에서 얼마나 많이 팔리고 있는지를 보더라도 확인된다. 한국인이 바라는 이상적 사회의 모습은 아마도 능력(업적)과 성공의 일치일 것이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노래 실력 하나만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의 우승자가 된 '수퍼스타 K2'의 허각에게서 사람들이 본 것도 그러한 이상일 것이다.(그 자체로 나름 장점이 있는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능력(업적)=성공'이라는 이상은 능력(업적)을 최상의 가치로 만드는 성과사회의 패러다임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이상적인 사회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존재하려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가 모든 개개인의 마음속에 내면화된 지상 과제가 될 때 사회는 저자의 말대로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양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자살율이 OECD 국가에서 상위에 차지하는 현실과 학생들을 자살로 내모는 무한입시경쟁 역시 같은 맥락인 것이다.

 

이 책은 독일에서 출간 즉시 철학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거의 모든 독일의 주요 신문과 방송 매체들이 이 책을 비중 있게 다루었고, 시대의 핵심적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친 책으로서 격찬하였다고...

 

[ 2012년 6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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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그 이후 - 승자독식 논리에서 상생의 인본주의로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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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추천은 커녕 중고책으로도 팔지 않고 벽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싶은 책이다. 그만큼 별 볼일 없을 뿐더러 거의 500쪽에 달하는 책을 읽는 시간도 아까운 책이다.
저자를 개인적으로 아는 바 없지만 책 속애서 느껴지는 저자의 인식은 '멘탈 붕괴'거나 굳이 좋게 표현하더라도 뉴라이트에 버금가는 '신주사파'라고 명명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00주의'나 '00파'라는 낙인찍기를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싶지는 않은 표현이지만...ㅠ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다. 한 시대가 격변하고 있다는 점,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 좌우대립의 이분법만으로는 21세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 지식과 창조성이 중요하다는 점, 기업에게도 나름 장점이 있다는 점, 대결이 아니라 상생이 필요하다는 점, 인본주의가 요구된다는 점 등이다. 하지만 저자의 주요 개념이나 논리 전개, 방향에 대해서는 수긍하기는 커녕 공감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엄청 '헤매고' 있는 것 같다.

 

내 생각에 저자가 헤매는 이유는 먼저 저자가 적용하는 개념이나 단어가 좌충우돌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저자는 지식이나 창조력을 생산요소로서의 자본, 노동과 동일한 기준이나 반열에서 비교, 적용하고 있다. 산업사회 내에도 지식이 당연히 포함되지만 저자는 산업사회와 지식사회를 별개로 다룬다. 탈산업사회와 탈자본주의를 구분하지 못한다. 좌와 우, 자본과 노동, 국가와 시장 등의 대립개념의 이분법적이고 대결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 두 가지가 동전의 양면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지식과 창조력이 자본과 노동, 국가와 시장의 내부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중요성이 늘어나는 것을 마치 대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오해한다.
마르크스나 레닌이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후 형태라고 생각했지만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이후에도 여러가지 형태로 살아남았듯이 신자유주의가 약화되거나 사라진다는 것과 자본주의가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다를 수 있음을 생각하지 못한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동물인 사람에게서 지식이나 상상력, 감성, 그리고 창조성을 따로 떼어낼 수 있다고 자신한다. 창조력마저 돈으로 지배하는 자본의 위력을 무시하고 이윤을 최고의 생명으로 삼는 기업의 속성을 간과하고 있다.
'사람이 모든 것의 근본'이고 '사상과 문화, 기술을 체화한 새로운 인간형'이라는 표현 속에서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이라는 근대적 인간형이 재등장하는 모습과 변질된 주체사상의 변종을 발견할 수 있다. 2008년 한국에 별종 뉴라이트가 탄생한 후 신종 주사파가 등장하게 되는건지 우려된다. 저자는 색안경을 쓰면서 인간과 자연과 우주가 한 몸이고 다른 양태임을 꿰뚫어 보는 눈을 잃은 것 같다.

 

공부모임 참석자들 역시 겉으로는 나처럼 심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내심에는 나보다 더 큰 실망감이나 상처를 입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한 참석자는 "박세길이 피터 드러커에게 말렸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왜 파터 드러커 이상의 애기를 하지 못하는가?"라고 반문했고 다른 참석자는 "창조력 역시 일반인들 중 극히 일부분에게서 강하게 드러나는 요소이기에 승자독식 구조에서는 마찬가지다."라고 비판했다. "기업이 이윤을 지상과제로 삼는 한 어떤 표현을 하더라도 노동자는 이윤을 위한 수단일 뿐이고 그것이 한국에서 노사갈등의 핵심이지 않은가?"라는 반문도 있었고 "지식기반사회가 되어도 농업과 제조 등 산업사회는 오랜동안 계속될 것이다."라는 반론도 있었다.

'박세길'이라는 이름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라는 책을 통해 알고 있었다. 대학시절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은 이후 다른 여러 책들 속에서 한국현대사에 대해 읽었기 때문에 여러 지안들에게 '잘썼다'고 추천받았음애도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를 읽지는 못했다. 그래서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딸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니 늦기 전에 읽고 아이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중 하나다.

공부모임에서 박세길씨의 최신작인 이 책을 세미나 교재로 삼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주저없이 동의하였다. 최근들어 자본주의가 세계경제와 각국 경제에, 전세계인들의 삶애 온갖 몹쓸 나쁜 결과를 가져오고 있고 많은 학자들이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경제체제에 대한 담론들을 제기하고 있다. 국내 학자, 그것도 역사를 전공하는 학자가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예상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처음 책을 접한 후, 제목 아래에 달린 부제가 '승자독식 논리에서 상생의 인본주의'라고 달려 있어 나에게 흥미도 유발시키기도 했다.

책의 서문을 읽어보나 저자가 현실 자본주의로 인한 많은 이들의 고통에 가슴아파하고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세상'에 대해 오랫동안 많은 열망과 연구를 거듭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저자는 1990년대 10년 동안 새로운 사회를 탐색하면서 원고지 1만 매를 넘는 글을 썼다. 2000년대 초반에는 직접 다양한 실천적 접근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단초를 찾으려고 연구단체를 설립하였고 사회단체 상근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이론적 기반이 취약함을 느끼면서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하고 '성찰과 탐구'를 위해 2007년 가을 홀로 치악산 기슭으로 들어갔다.

저자는 치악산에 들어가면서 두 가지 결심을 했고 모두 이루어냈다고 한다. 하나는 '10만 쪽'의 책을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 가지 종류의 역사책을 쓴 것이다. 10만 쪽이면 300쪽의 책 300권을 읽은 셈이다. 그는 2008년 6월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을, 2010년 4월 <미래를 여는 한국인사(상,하)>를 출간했다. 그리고 그 이후 저자는 어느날 문득 좌우 구도의 낡은 안경이 자신의 사고를 규정했다는 것을 깨닫고 좌우 구도의 낡은 안경을 벗어 내려놓은 후 '편견 없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실마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다가 드디어 영감이 샘솟기 시작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계속하여 서문에서 두 권의 신간을 집필하면서 얻은 결론을 소개했다. 10개나 되지만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두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전지구적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를 찾을 수 없다. 둘째, 자유와 평등은 분리되는 순간 둘 모두 불구화된다. 둘은 조화롭게 통일되어야 한다. 셋째, 사회주의를 지배했던 국가만능주의와 자본주의를 지배했던 시장만능주의 둘 모두 답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국가와 시장의 위상과 상호관계에 대해 근본적인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넷째,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정점이며 필연적으로 몰락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의 몰락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기 시작할 것이다. 다섯째, 생산 활동을 주도하는 요소가 자본에서 지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로 이동하고 있다. 이는 지배권력의 원천이 자본에서 창조적 능력을 지난 사람에게로 이동할 수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다. 여섯째, 대중이 주역으로 떠오름에 따라 수직적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수평적 소통과 협력이 모든 영역을 지배할 것이다. 일곱째, 한반도 분단의 역사는 진보와 보수가 '공존'을 바탕으로 경쟁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여덟째,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신세대는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풍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아홉째, 국가의 절대우위가 사라진 조건에서 국가권력 장악을 바탕으로 한 위로부터의 변화에 의존해서는 세상을 제대로 바꿀 수 없다. 말하자면 아래로부터의 변화가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열째, 기업 경영은 매우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영역으로서 그로부터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고리가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한 '새로운 결론'에 기초하여 저자는 책의 본문에서 21세기 세계는 "산업사회에서 지식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고 "따라서 산업사회를 지탱하던 자본과 노동은 더 이상 주도적 생산요소가 될 수 없게" 되었고 "권력의 원천이 자본에서 지식으로 이동"하면서 지구촌이 "탈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게 지금 세계적인 경제위기는 '역사의 변곡점'인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세계의 패러다임은 대전환 중이다. 그것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서의 패러다임의 변화(놀라운 가술적 진보를 바탕으로 사람이 주도적 위치를 되찾고 개인의 삶이 복원되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신세대의 등장, 근대 경제학의 해체에 따른 새로운 패러다임의 설정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3부 인본주의 사회로의 진화'에서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해명하는 데서 핵심 개념이 주도적 생산요소'이며 역사적으로 토지, 자본과 노동이 최근까지의 주도적 생산요소로 작용했다면 앞으로는 '창조력(지식 + 감성 + 상상력)'이 주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창조력은 생산요소이면서 동시에 생산수단'이고 따라서 '창조력은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독자적으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제 지식으로 무장하고 감성을 구현하면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경제활동의 중심에 서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상 최초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생산수단인 창조력이 주도적 생산요소로 떠오르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창조력은 오직 사람 속에만 존재하며 다른 작업수단에 의해 대체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사람을 모든 것의 근본으로 삼는 새로운 사회가 열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암시한다."(p.214) 저자의 관점에서는 새로운 계급인 '창조자 계급'이 출현하고 기업권력도 구성원 모두가 권력의 중심에 서는 수평적 조직문화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는 사람을 모든 것의 근본으로 삼는 인본주의 사회이며, 인본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중심 고리는 기업에서의 '수평적 조직문화의 정착'임이 밝혀진다"(p.253)

 

그는 '4부 상생의 생태계'에서 세계가 산업시대의 일반적 모습이었던 돈과 기계의 예속으로부터 인간의 본성을 되찾고 이를 중심으로 경제를 운영하고자 노력이 강화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승자독식을 지양하고 동반자 관계의 연쇄사슬인 '상생의 생태계'를 구축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5부 새로운 사회의 한복판으로'에서 저자는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은 필연적 가능성"이지만 그이행의 경로와 속도를 규정하는 요소는 사상문화적 동향, 정치사회적 환경, 기술적 조건, 경제적 변화 등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상문화적 동향임을 주장한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사상과 문화, 기술을 체화한 새로운 인간형이 등장하면서부터 열리기 시작한다. 거꾸로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하기도 한다"(p.445)

 

책 전체에서 저자는 피터 드러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고 실제 기업과 경영의 가치와 긍정성, 지식과 창조력에 대한 그의 과도한 강조하면서 드러커의 글을 자주 인용한다.

 

[ 2012년 6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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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궁리 공동선 총서 1
인디고 연구소 기획 / 궁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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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슬로베니아 철학자의 이름은 친구에게서 몇 번 들은 적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관심은 없었다. 언젠가 친구가 페이스북에 올린 지젝의 글을 읽으면서 든 느낌은 '무지 어렵고 현학적이네..'였다. 그랬던 지젝이 나와 어떤 인연인지 세미나 교재로 다시 등장했다. 다행하게도(!) 지젝의 저서를 번역한 책이 아니라 국내 '인디고 연구소'측이 지젝과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여 발간한 책이다.


지젝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이다. 그가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라 부르는 이 장벽은 전근대적인 차별정책에 비해 보다 치밀하고 노회한 성질을 띠고 있다. 예컨대, 자본가의 착취 방식이 공정 영역을 사유화함으로써 그 지대를 물리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 자본가들의 이윤을 남기는 방식이 지적 재산권을 경유함으로써 보다 세련되고 뻔뻔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 라는 개념은 현대사회에 적용하기 어려운 마르크스 정치학의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이라는 개념을 현실의 조건에 맞도록 확대, 발전시킨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공정 영역의 사유화' 역시 현대 들어와서 자본가들이 이윤을 취하는 교묘한 방식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IMF 체제 이후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외 자본에게 사회간접시설의 개발권을 제공하면서 시작되었기에 실감할 수 있다. 현대통령인 이명박이 서울시장 때부터 지금까지 국가시설 전반을 통채로 넘겨주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하여 지젝은 오늘날 자본가들의 지배 체제야말로 민주주의를 거스르고 있으며 오히려 여론 독점과 이윤 독식이라는 경제적 독재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특히 프롤레타리아의 자본주의적 삶을 북한 인민의 삶에서 가져오는 정치철학절 재치는 한반도에서 같은 민족과 문화라는 공통성을 지닌 우리들에게 씁슬한 유머로 다가온다.

오늘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일을 하는 계층이 아니라 실업자나 빈곤층 등 배제된 자다. 그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하는 배제된 자들까지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으로 포괄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개념을 재정의한다.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은 분노 자본이 자유롭게 운집하고 폭발하는 저항의 거점이 됨으로써 혁명의 새로운 주체들이 탄생하는 열린공간아 된다는 것이다. 안정된 고용을 누리는 노동자 계급이 이익집단화되고 정치경제적 이익을 공유하는 메카니즘에 속해버린 현대 자본주의 구조에서 지젝의 이런 지적은 크게 공감이 된다. 지난 2010년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오큐파이 투쟁, 99% 투쟁이나 튀니지, 이집트 혁명도 그런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폭력이 대판 지젝의 통찰력도 우리에게 필요해 보인다. 우리가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폭력은 늘 여기에 있다"는 사실 자체라는 것이다. 진보적 좌파의 폭력에 대해서만 여론의 초점이 맞추어지로 있지만, 좌파의 방어적 폭력을 초래하는 진짜 폭력이 노회한 방식으로 이 세계에 늘 상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상존하는 폭력에 노출된 대상은 배제된 자들이다. 그는 '이론과 철학의 부재'가 포함된 자는 물론이고 배제된 자들조차 이 세계에 상존하는 폭력의 현실에 대해 인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한다고 주장한다. 직접적 폭력이 아닌 자본과 공권력에 의한 경제적, 제도적, 문화적 폭력이 현실 구조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이론과 철학으로 규정해야 인지할 수 있다는 말이 좀 거창하기는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상적으로 경찰과 검찰의 폭력이 난무하고 있지 않은가?

인디고 연구소는 폭력이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를 가르는 장벽의 원인이자 결과라면, 그것이 필연적으로 '공동선'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으로 유도한다. 지젝은 공동선을 '공동'과 '선'으로 분리해서 접근한다. '공동'은 보편성의 문제를 함축하는데, 보편성이야말로 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를 가르는 장벽을 허물 수 있는 진정한 해방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선과 악을 초월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보편성의 세계가 아니라, '선'의 규준을 투쟁으로써 쟁취하는 '구체적 보편성'의 세계야말로 좌파에게 주어진 또 다른 실천적 과제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인간윤리의 범주가 될 '선'이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선'은 점유, 혹은 투쟁과 쟁취의 대상이다. "공동선은 단순히 전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성질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젝에게 오늘날의 궁극적 '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배제된 자들의 정치사회적 침입과 복원이다.

전셰계적인 정치경제 그리고 철학적 분위기는 어떠한 형태로든 자본주의가 영속한다고 생각하거나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정치철학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독점된 여론이나 지식계층에서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가 '불가능'하다고 선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지젝은 자본주의 이후의 공동의 세계를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상징계적 억압의 사실을 끊기 위해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로 재사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경계 흐리기는 '가능한 것'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이를 위해 지젝은 보다 복잡한 오늘날의 세계적 자본주의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예각적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이론의 정치화()가 시급하다고 진단한다. 이는 곧 정치적 주체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르크스와 레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노동자계급과 프롤레타리아라는 테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지젝의 발상과 사유를 한 번쯤 접하기를 권하고 싶다.

연구소의 소개에 따르면 지젝은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한 독보적인 철학으로 '동유럽의 기적'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석학이라 한다. 독특한 영화해석과 문화비평을 내놓는 철학자로 유명하며 미학, 정치이론 등 다양한 지식을 철학에 자유자재로 접목하는 독특한 사유를 통해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MTV 철학자'라 불리기도 한다. 남동유럽의 소국 슬로베니아 출신으로 파리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체주의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현실정치에도 적극 가담하기도 했다.

[ 2012년 6월 0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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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셰익스피어를 입다 셰익스피어 에세이 3부작
안경환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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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문학. 나에게는 둘 다 어려운 대상이다. 물론 보통사람들에게 가장 거리가 먼 대상이기도 하고 반대로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 있기도 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보통사람들에게 법'은 아무래도 어렵고 권위주의와 권력의 냄새를 본능적으로 느낄 것이고 소설을 제외한 시, 연극 등 대부분 문학 역시 일반인들에게는 멀 것이다.(그 거리는 비교할 수 없이 크지만...) 하지만 우리가 세금을 내고 운전면허를 따고 병역의무를 지고 다른 사람과 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법률행위를 하는 것이고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은 문학을 가까이 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법과 문학 모두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다. 50년 전에는 여성과 장애인을 차별하거나 경찰이 길가는 젊은이를 붙잡아 두들겨 패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사람들은 법에 의해 처벌받는다. 문학 역시 시대적 상황에 맞는 구성과 주제와 표현방식을 달리한다. 법은 인간의 정의를 주레로 하여 현실적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고 문학은 인생을 주제로 하여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학에 비해 법은 딱딱하고 비인간적인 냄새가 난다. 법과 문학 모두 단어와 문장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지만 그 단어와 문장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정반대다. 법과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수단이지만 대체로 법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고 문학은 공감을 얻는다. 특히 한국에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법과 법률가들(변호사, 판사, 검사)은 대중들에게 가장 큰 불신과 비난을 받는 직종에 속한다. 왜 대중들에게 공감과 지지를 얻지 못하는지는 자신들 스스로가 더 잘 알 것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법률가들 스스로가 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법의 적용과 판단이 대상자의 지위고하에 따라, 빈부에 따라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법률가들이 불신과 부정의 대상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여러가지 역사적, 태생적인 이유도 있고 제도적, 구조적, 정치적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일부 법률가들은 법의 본래 취지에 맞는 활동과 역할을 펼치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대중들에게 공감을 얻고 정의와 평등을 위해, 헌법의 정신에 따라 올바른 법률적 행위와 판단을 위해 노력하는 '진정한 법조인'인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소속 상당수 변호사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어떻게 민변의 적지 않은 변호사들은 일반적인 법률가, 변호사들과 다른 자세와 태도를 보일까? 아미 작고하신 조영래 변호사나 지금 서울시장인 박원순 변호사를 통해 왜 그런지를 알 수 있는 방법도 있지만 다른 방법도 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노력'하는 법률가들이다. 그들이 노력하는 내용은 스스로 공평무사한 자세와 태도를 갖추기 위래 애쓰고 법에 대해 더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도 있도 대중들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고 공감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노력을 하는 민변 변호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법과 문학의 간극을 줄이고자 시도한다.  그는 서구사회에서 법이 대중화된 이유 중 하나를 셰익스피어를 통해 찾는다. 그는 "법과 문학의 본질과 효용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작품의 총체적 이해와 사회의 통합적 지성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아니 본인 스스로가 자신의 전공인 법학 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 전반에 걸쳐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많은 것을 얻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지난 수 십 년, 셰익스피어는 나의 친절한 스승이자 친구였고, 작품의 수많은 인물은 내 꿈을 휘젖는 연인이었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영국의 대문호'로만 알고 있던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의 다른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셰액스피어는 '소송만능주의자' 수준으로 일생동안 숱한 송사에 휘말려 살았다고 한다. 저자는 많은 자료조사를 통해 셰익스피어가 실존 당시의 보통 사람보다 자신의 재산적 이해관계에 민감했으며 재산을 얻고 지키려고 기꺼이 법절차에 의존했다고 말한다. 정확하지 못한 기억으로 증언을 한 적도 있고, 담합성이 강한 소송에 동참하기도 했다.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다른 소송이 있었을 가능서도 높다고...^^ 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셰익스피어의 대다수 작품 속에는 소송이나 재판와 관련된 내용이 상당히 많다고. 그것은 그가 활동하던 엘리자베스 시대는 소송 폭주 시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한 해 평균 1백만 건 이상이였다고...ㅋ)
물론 소송과 관련한 사건들이 셰익스피어의 작품 소재나 줄거리에 반영되기는 했지만 그의 작품은 인간의 보편적인 삶과 생애, 갈등과 반목, 애정과 애증 등 인류의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초임 판사의 생애 첫 재판이다. 배당된 사건은 원로 판사에게도 어려운 사건이다. 그런데도 신출내기 판사는 만인을 경탄시킨 명판결을 내린다. 원고는 절대로 잘 수 없는 사건이라고 확신했다. 부자 상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차용증서를 받았다. 빌려준 돈을 제날짜에 못 받았다. 그래서 증거를 들고 법원에 갔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두 사람이 합의하여 서명한 계약서의 내용이 약간 특이하다. 만약 채무자가 빌린 돈을 갚기로 한 날짜에 갚지 못하면 자신의 심장 가까이 살 일 파운드를 채권자에게 준다는 내용이다. 법대로 따르겠다는 약속을 이미 했다. 거짓말도, 유혹도, 사기도 없었다. 그야말로 완전한 자유의사로, 내용을 너무나 잘 알고 맺은 계약이다.
피고도 각오하고 있었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사건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바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빚쟁이의 자비, 법원의 관용 뿐이다. 엎드려 비노니 그저 목숨이라도 부지하게 해달라는 애원 뿐이다. 젊은 판사의 입에 한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다.
그러나 경천동지의 일이 벌어졌다. 재판을 시작할 때만 해도 판사는 모든 사람의 예상대로 원고의 법적 주장에 동조하면서 피고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권고했을 뿐이었다. 판사로서의 자신의 권한은 그뿐이라는 것을 암시하면서. 그러나 완강한 채권자는 요지부동이다. 심지어 채무자가 원금의 3배에 해당하는 대금을 위약금으로 변상하겠다는 청약마저 일축하고 오로지 계약서에 적힌 대로 '살'로 '특정이행'할 것을 요구한다. 이때 판사의 태도가 돌변한다. 느닷없이 계약서에 적힌 내용의 기슬적인 흠을 문제람아 피고의 책임을 면제해준다. 계약서에 적힌 내용은 불법이고 따라서 무효하는 것이다. 납득할 수 있는 판결이다. 그러나 판결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태도를 표변한 판사는 이제 폭군으로 변한다. 돈을 빌려준 채권자를 살인미스로 몰아 그의 전 재산을 내놓으라고 명령한다.
'법아 그러나 어쩔 수 없다'며 소극적으로 채권자의 자비를 호소하던 판사는 일순간 고도의 사법적극주의자가 되어 경각에 몰린 생명을 구하고, 마침내 위태롭던 정의를 세운다. 신참판사의 명판결(?)은 신화가 되어 대에 길이길이 전승된다.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창작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위광을 업고 지구를 정복한다. 셰익스피어가 내놓은 문제의 판결은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최고 명판결로 후세인의 칭송을 받는다."

위 안용문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의 주요 내용이다. <베니스의 상인>은 복수극이라고 한다. 고리대금엄자인 원고는 자신을 공공연하게 고리대금업자로 비하하고 심지어 '목을 따 죽일 개'라고 부르며 수염에 침을 뱉는 등 오랜 세월에 걸쳐 모욕을 준 피고를 법을 통해 복수하려는 것이었다. 원고는 사적 복수를 공적 복수로, 물리적인 직접 복수에서 제도를 통한 복수로 형식과 절차를 변한 근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반대편인 피고의 복수 역시 잔인하다. 위기에서 벗어나 처지라 바뀐 피고는 원고를 파멸시키기로 작심한다. 판사의 판결에 따라 자신의 몫이 된 원고의 재산의 절반을 자신을 수탁자로 하는 신탁을 창설한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향후 원고가 취득할 모든 재산을 신탁재산에 납입할 것을 약속하라고 강요한다. 그뿐 아니라 유대교안 원고를 기독교로 개종하라고 정신적인 자산마저 빼앗는다. 그로써 원고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는 것이다. 이로써 '명판결'이라는 법적인 정의와 별도로 법과 정의가 무엇인지, 복수가 무엇인지, 둘 중 누가 궁극적인 가해자고 피해자인지 독자들과 관객들에게 생각토록 한다.

이 이외에도 저자는 책 속애서 <헨리 6세>를 비롯하여 우리도 들은 기억이 있는 <햄릿>, <오셀로>, <맥베스>, <리어왕>, <로미오와 줄리엣> 등 12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그 작품들 속에는 법률가에 대한 증오, 법에 대한 부정, 정치적 갈등, 세대간 갈등, 오명, 명예, 공평 등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법은 시대의 거울"이기에 모든 문학 작품 속에 법이 투영되기 마련이라고 주장한다. "법을 빼고 읽어도 문락이 되지만, 법과 함께 읽으면 더욱 큰 문학과 세상이 보인다"고.. 그는 시인을 높게 평가한다. "시인은 위대하다. 시는 어떤 예술 장르보다 정교하고 차원 높은 언어의 마석이다. 시는 역사보다 더욱 진실하고 철학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절이 있다. 역사는 특정 시기에 치중하지만 시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취지다. 문학이야말로 인간 삶의 주제를 더욱 깇이, 선명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창의적인 작가라 내면의 진힐에 더욱 용이하게 접근하도록 인도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시인도 시대의 입법가이자 판관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법락자이면서도 법률전문가들의 독점물로 전락한 법을 문학의 아래에 위치히키는 저자의 입장과 법철학이 의외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공감하게 된다. 법 역사 사회적인 합의로 규정되는 '인간의 창작물'에 불과한 것이고 역사적일 수 밖에 없다는 데 동의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든, 인간이 만든 법이든 모두 불안전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끝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갈등하는 것이 본질일 수 밖에 없다. 법규의 문장에 구속되는 법률전문가들은 자격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들, 로스쿨 학생들, 전현직 법률가(판사, 검사, 변호사, 교수 등) 모두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또한 삶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구하는 뭇 학생들과 법에 대해, 셰익스피어에 대해 궁금해하는 지인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 2012년 5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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