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역사 2 - 주체사상과 유일체제 1960~1994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6
이종석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 역사비평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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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근현대사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무척이나 왜곡되어 왔다. 물론, 자력이 부족하니 타력에 의해 좌지우지된 측면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조선 왕조 500년은 체제의 구성원이 모두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자멸하였다.
왕권은 정조 임금 이후로 외척에 의해 농간을 당했고 체제의 지배세력인 사대부와 관료들은 체제 내부의 역량을 키울 생각은 없이 '상호 괴멸적인 당파투쟁'에 몰입하여 외세의 침입을 자초하였고 중산층과 민중들 역시 무력하기만 하였다.
결국 조선을 둘러싼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이 격화되어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침략하게 되었고 일본은 철저하게 조선을 약탈하고 체제 자체를 폭력으로 붕괴시켰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 역시 자력이 아닌 외세에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에 조선은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한반도가 동서 냉전의 최전선이 되어버림에 따라 이념의 양극단이 남북에 고착화되었다.

반도 남단 한국의 현대사는 나름대로 대다수에게 알려져 있고 연구결과도 많지만, 정보가 차단되어 있는 북한에 대해 일반인들은 '베일에 싸인 장막'처럼 잘 알 수가 없었다. 동서 냉전이 무너지고 냉전 이념이 부분적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에 이제 한국 내 학자들도 북한을 연구하여 결과물을 일반들에게 선보이기 시작한지 한 참 되었다. 
이제는 남북통일이 '민족적 소원'인지마저 희미해지고 있지만, 한국 내에 냉전수구세력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분야에서 위력을 떨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을 모르면 앞날을 예측할 수도, 대비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연평도 포격 사건이나 천안함 침몰 사건 등이 일어날 때마다 한국사회와 99%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통일이니 연방이니를 떠나 남북 화해와 교류, 남북 협력과 평화체제가 더 시급하고 절실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 책은 공부모임의 새해 첫 교재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연말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후 북한이 김정은으로 후계체제를 구성하는 계기가 있었기에 선택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약속이 겹쳐서 새해 첫 번째 공부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ㅠ (그래도 책은 꼭 구해서 읽지만...ㅋㅋ) 이 책과 더불어 정창현씨의 <인물로 본 북한현대사>(2011)도 같은 날 교재였다.
 
<북한의 역사>는 2권짜리 시리즈다. 해방부터 1950년대까지의 초기 북한사를 다룬 1권과 사회주의 건설이 본격화되는 1960년대부터 김일성 사망 시기까지를 다룬 2권으로 나뉘어 출간되었다. 
1권은 계간 [역사비평]의 전 편집주간이자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으로서 진보사학계의 한 축을 든든하게 지탱해왔던 김성보 교수(연세대학교)가 집필을 맡았고, 60년대 이후 현대 북한사의 서술은 참여정부 시절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과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며 학술과 정책 양면에서 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북한 전문가로 이름을 높인 세종연구소 이종석 수석연구위원이 맡았다. 이념과 정치의 잣대에 흔들리지 않고 북한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살펴보면서 그 안에서 통일과 상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진지하고 내실 있는 접근이 기대된다.

김성보, 이종석 두 필자는 공히 ‘자료의 부족’을 일찌감치 고백하며 ‘북한사 바로알기’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자의적인 판단으로 섣불리 단정 짓는 것이야말로 지금까지 남북관계를 꼬이게 만들었던 우리 내면의 함정이었다. 오늘날의 북한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은 바로 오늘날의 북한을 있게 한 과거의 역사를 편견 없이 실증적으로 되돌아보는 데 있다. 북한이 걸어온 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현재의 북한을 이해할 수 있고, 역사에 기반한 깊은 이해야말로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갈 전망을 밝히는 초석이 될 것이다.

시리즈 두 번째인 이 책에서는 대체로 10년 주기로 열린 조선노동당 4, 5, 6차 대회를 기준으로 주체사상이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어떻게 지배했고, 강력한 대중동원력을 바탕으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유일체제가 어떻게 체제위기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는지 객관적이고 균형 있는 시각으로 밝히고 있다.
시기구분에 입각한 체계적인 교과서 구성으로 북한의 역사 구비 구비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한편, 장마다 별도로 다뤄야 할 중요한 테마나 역사의 굵직한 흐름에서 간과하기 쉬운 사람 사는 모습의 면면을 ‘스페셜 테마’로 배치해 입체적인 이해를 도왔다. 정치?경제적인 ‘결정적 장면’들 외에 북한 사람들의 생생한 일상 스케치까지 다양하게 배치된 화보 역시 <북한의 역사 2>를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저자는 한때 북한 역사 전개의 기둥이자 근본가치였고 그들의 자랑이었던 주체사상과 유일체제가 어느 시점부터 체제위기를 심화시킨 근본원인이 되었다는 역사적 역설을 차분하게 파헤친다. 주체사상은 맨처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보완하는 특수한 실천전략으로 제기되었다. 
이 사상이 독재자 개인에 의해 전유되어 ‘김일성주의’라 불리고 개인숭배 시스템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자, 북한사회는 일체의 물적, 외적 조건을 주관주의적으로 무시하고 오로지 대중의 ‘혁명적 의지’와 수령에 대한 충성심에 기대어 속도전을 펼치는 방식으로만 사회 발전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정한 단계에 오른 사회가 그 이상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성 있는 개인들의 창의력에 기반한 혁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북한사회가 당도한 위기는 일시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중국이 선택한 실용주의 노선처럼 자기 사회의 발전단계를 객관적으로 직시하면서 사회구성원의 창의력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개혁개방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북한의 공식 입장도 그렇고 한국사회 내부에서도 어떤 이들은 북한의 고립과 경제파탄이 북한 내부의 사정보다 미국 등 서구열강과 남한의 적대행위가 더 크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과 남한의 적대행위와 압박이 북한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북한에게 우호적인 중국이 오랫동안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는  현실은 북한이 미국에게 핑계를 댈 수 만은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수 많은 인민들이 굶주리고 죽어가는 국가 현실을 고려할 때, 주체사상이나 김일성주의, 수령론이나 후계자론, 속도전이나 3대혁명기수론 등 북한이 내부체제에 동원하고 있는 사상, 정책은 내 이성과 판단으로는 수긍하기 어렵다. 아프리카나 이라크, 아프카니스탄 등과 같이 당장 북한 영토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 2012년 1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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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히의 유언
데이비드 케일리.이반 일리히 지음, 이한.서범석 옮김, 박홍규 감수 / 이파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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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국내에 소개된 이반 일리히의 저작 중 내가 읽은 마지막 책이고 작년 10월 중순 공부모임에서 세미나를 진행한 것이다. 당시 서울시장 선거가 한창이었고 나는 책은 읽었지만 박원순 후보의 선거캠프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던 때라 세미나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이반 일리히의 저작 중에서 <학교 없는 사회>와 <성장을 멈춰라> 2권을 읽은 상태였다. 따라서 책을 읽는 중에 이반 알리히와 대아비드 테일리가 거론하는 다른 책, 즉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 그리고 <그림자 노동> 등에 대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서평을 쓰는 것을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읽어보지 않았기에 당연한 것이지만...

이 책을 읽고나서 급하게 이반 일리히의 다른 저작 중에서 앞에서 얘기한 3권을 서점에 주문하여 연말까지 읽었고 순차적으로 각 책에 대한 서평을 썼다. 그나마 3권을 읽으면서 이반 일리히의 철학과 문제의식을 이해하고 나니 이 책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고 책에 대한 서평 쓰기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다른 저작인 <자각의 축제>, <불능의 전문가 Disabling Professions>, <유용한 비고용의 권리와 그 전문적 적 The Right to Useful Unemployment and it's Professional Enemies>, <젠더 Gender>, , ,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In the Vineyard of the Text>, <과거의 거울 속에서 In the Mirror of the Past>은 국내에 번역,출간된 책이 없어 구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아쉬움이 크다. 앞으로 추가로 국내에 출간되기를 바란다.

1970년대의 다수 저작에서 일리히는 근대 산업생산사회가 사회 전분야를 장악함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관계 없이 제도화, 권력화, 전문화를 가져왔고 결국 인간의 자립적, 자존적인 삶을 파괴시키고 있다고 문제제기했다. 학교교육이라는 제도는 학습과 배움을 제도화,상품화하여 인간이 스스로 배우고 학습하는 능력을 훼손하고 있고 수송과 교통은 인간의 이동을 제도화하여 인간의 이동능력을 제한하고 에너지의 노예로 만들었으며, 병원과 의료시스템은 건강을 제도화하여 결국 인간이 스스로,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건강을 유지관리할 능력을 빼앗고 고통, 질병, 죽음에 대한 인간의 자율행위를 불능으로 만드는 것에 더하여 병원이 병을 만듬으로서 '의료의 복수'를 가져왔다. 경제발전과 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사회체제의 이념에 관계 없이 대량 생산체제를 가져오게 하여 인간 공동체와 환경을 파괴하고 제도화와 권력화를 가속화시키면서 전문가와 기술전문관료에 대한 인간의 의존을 심화시키게 되었다. 이는 인간에게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상품화, 서비스화하면서 발생하는 상황인 것이다.

일리히는 제도화, 권력화, 전문가화를 극복하는 방법은 '성장'을 멈추고 인간들 스스로 제도화, 전문가화에 한계를 설정해야 하며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공생의 사회로 나가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일리히는 1980년대 들어 자신이 1970년대 내내 고민하고 문제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했던 제도화, 권력화, 서비스화라는 '근대성'의 출발점에 대해 연구를 거듭하여 '근대성'이 결국 서구사회의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서양의 근현대란 "기독교의 타락한 돌연변이, 즉 교회가 권력을 잡고 제도를 만들어 그것에 인간을 철저히 적용시켜 제도를 숭배하게 만든 탓"으로 생겼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초기 기독교가 갖고 있던 '벗에 대한 환대와 희망'이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공인받은 뒤 변질, 타락하기 시작해 이웃을 맞아들이는 환대와 관용이 사라지고, 법과 기술, 제도와 물질의 물신화로 나아갔다고 본다. 기독교 신앙은 본래 최선이었으나 권력화 과정이 계속되면서 타락과 최악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는 근대 이후 사회를 기독교의 타락으로 보는 주장으로 나아갔다.
 
일리히는 이 문제를 기독교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와 사마리아인'에 대한 분석으로 지적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5~37)라는 질문에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에리코로 가던, 강도에게 습격당해 옷도 빼앗기고 반죽음이 된 채 길가에 버려진 유대인 남자 이야기를 꺼냈다. 그 유대인 남자를 보살핀 사람은 성직자도 레위인도 아닌 사마리아인이었다. 그는 쓰러져 있는 유대인 남자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운 후 상처를 치료하고 그를 가까운 여관에 데려가 완쾌할 때까지의 숙박비도 지불했다. 오늘날 상황으로 보면, 팔레스타인인이 유대인을 도운 것이다. 그는 자신의 민족을 보살피려는 민족적 선호로부터 자유로웠고 그래서 자신의 적을 돕는 반역행위를 저질렀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선택의 자유를 행사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서구인들은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내 이웃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의 질문으로 바꾸어 버렸다.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적이나 마찬가지인 유대인을 도와주었으며, 이는 ‘내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관한 모범이 되는 행위이다.

 

일리히는 예수가 말한 이웃 관계는 기대하거나, 요청되거나 의무 지워지는 것이 아니며,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방인을 따뜻하게 대할 의무를 인지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서로간에 자유로이 창조되는 것으로서의 이웃 관계란, 타인과 타인의 육체를 통해 맺어지고, 우리가 결정함으로써 생겨나며, 예수는 이를 이웃으로 행동하는 것이라 일컬었다.

오늘날 빈부 격차가 심화되는 사회의 합리적인 통치 수단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이용하는 일이 흔하다. 하지만 일리히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으로, 스스로 선택한 가난과 무력함과 비폭력을 꼽는다. 이는 타락한 자나 조롱 또는 무시받는 자들도 갖고 있는 것들이다. 이에 반해 현실의 기독교 교회는 생산 및 소비 지향의 유혹에 넘어갔고, 대형화와 관료화, 신도 회원제를 통한 확장을 추구하는 데 여념이 없다. 복음은 제도화되었고, 사랑은 서비스에 대한 요구로 바뀐 것이다.

그는 기독교의 사례를 "최선이 타락하면 최악이 된다."라고 표현한다. 

 
일리히는 우주 만물과 모든 생각 속에 신이 존재한다고 보는 세계관이 훼손된 것과 때를 같이해 근대가 시작되었음에 동의한다. 신과의 관계 속에 사물을 이해해야만 자연은 그 생명을 되찾을 수 있다. 인간은 오랜 옛날 추위로부터 살아남고, 거친 세상을 걸어가기 위해 도구를 이용했다. 신이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흉내내서 인간도 그들의 조건에 맞춰서 사물을 만들게 된 것이다. 도구의 근대적 개념이 세계를 우연성의 정신으로 보는 데서 기원하는 것으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도구의 시대는 시스템의 시대로 넘어갔다.
 
 
이 책은 사제직을 떠났지만 평생 기독교 본래의 모습을 염원한 신앙인으로서의 이반 일리히가 서구 근대 세계의 단초를 제공하고 주도해온 기독교에 대한 절절한 바람과 다양한 견해들을 보여준다.(그는 사회적 공공성의 믿음에서 삶과 죽음을 초월한 참된 신앙인이었고 저 흔해빠진 제도 교회인이 아니라 독실한 자유신앙인이었다.) 또한 이전의 책들에서 제시한 학교와 병원 의료, 교통 체계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입장을 새롭게 정리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열정과 희망을 종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한 열정과 희망은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한, 일리히가 좋아했던 파울 첼란의 시 구절‘미래의 북녘 강에서’의 내용에도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그가 2002년 점점 커져가는 왼쪽 뺨의 종양으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라디오 진행자와 진행한 대담을 엮은, 그의 마지막 육성을 담은 책이다. 데이비드 케일리는 1990년대 초에 한 차례 대담집으로 엮었던 프로그램을 1997년 이후 다시 진행하면서 대담을 바탕으로 원고를 만들고 인터뷰를 추가하여 이 책을 엮었다. 이 책에는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오늘날 지구공동체가 형성되는 데 커다란 토대를 제공했던 서구 근대 세계와 기독교를 바라보는 이반 일리히의 입장과 견해가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일리히가 평생에 걸쳐 산업문명을 비판해온 자신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가 이전까지 썼던 여러 책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회와 자연의 ‘근본’은 무엇이고,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지를 평생 고뇌하고 연구해온 한 독립적이고 예리한 지성인의 면모가 녹아 있다.


역자는 새삼 이반 일리히의 삶과 사상을 돌아보는 것은 "그가 서구 세계가 주도해온 산업화와 개발 이데올로기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에 힘을 쏟았다는 점에서 오늘날 경쟁과 개발이라는 괴물성에 신음하는 한국사회에 갖는 의미가 실로 적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한가운데에는 기독교 신앙의 변질과 타락이 있으며, 제도화를 비판하고 절제할 것을 주장한, 자연과 생명의 회복이라는 그의 간절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

핸드폰과 정보기술, 그리고 온갖 서비스와 신자유주의 정책이 지배하다시피 하는 사회에 이반 일리히의 삶이나 그 주장은 고리타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속도와 편리성이 주는 비인간화를 경고한 일리히의 외침은 헤아릴 수 없는 의미가 있다. 어떤 기성의 학문적, 사상적 틀도 단호히 거부하고 독창적인 통찰력으로 산업사회의 모순구조를 파헤쳐온, 부드럽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 일리히는 전 세계가 공생공락의 사회를 이룩하기 전까지 많은 이들에게 끊임없이 중요한 영감을 불어넣어줄 것이며, 언제까지나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면모와 향기를 품고 있다. 
 
일리히는 나에게 더 이상 경제성장, 기술의 진보, 제도화와 전문화, 대량생산, 가치의 서비스화라는 이데올리기에 얽매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인간에게 있어 희망은 자율적, 자립적이고 공생하는 삶이라는 생각이 간절하다. 2002년 고인이 된 이반 일리히씨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 2012년 1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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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 석필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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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당파 싸움 때문에 망했다." 일제시대 이후 한국인들의 머리 속에 무의식처럼 뿌리 깊게 남아있는 생각이다. 나 역시 초중고를 다니면서 그렇게 교육 받았고 언론과 책, 드라마, 각종 자료를 통해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처음 의문을 가지게 한 것은 대학 초년 시절에 읽은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에 당파 싸움이 없었을까? 그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기 시작한 이후 이해관계나 생각의 차이로 인하여 별개의 집단을 구성하여 서로 간에 이견이 생기거나 다툼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당파 싸움'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당파 싸움'은 어떻게 진행되었고 조선에서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당쟁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 역사를 분석한 것이다.

저자의 조선당쟁사를 읽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 현대정치사가 오버랩되었다. 그만큼 인간의 속성, 정치나 정당의 성격과 구조, 구조적인 모습, 한반도라는 동질성, 문제의 뿌리가 비슷하다는 것을 느낀다.

저자는 조선에서 달파란 말이 사용되기 전에 스스로 이를 일컫는 말이 '붕당'이었다고 설명한다. 1392년 조선 건국 이전 고려 말기에 한반도에서는 신흥사대부가 고려의 변화를 꿈꾸었다. 신흥사대부 중 역성혁명을 꿈꾸는 이들이 정도전, 조준 등이었고 온건개혁세력은 정몽주, 길재, 이색 등이었다. 역성혁명 이후 건국공신 중심의 훈구파가 집권과 동시에 개혁세력을 숙청하였고 조선 건국을 반대한 온건개혁파의 나머지 세력은 중소지주라는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향촌 사회를 장악하기 위해 힘썼다. (8.15 해방 후 상황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키워진 두 개의 정당, 즉 이승만의 독립촉성회와 한국민주당의 뿌리가 모두 자주계급이란 점에서 조선의 훈구파-사림파 구도 또는 조선 말기의 노론파-소론파와 연계성이 짙다.)

조선 건국 후 약 80~90년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공신 집단은 훈구파는 부패하기 시작했고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 때부터 온건개혁파는 훈구파는 전횡과 부패에 환멸을 느끼는 임금과 백성들의 지지를 업고 하나의세력을 형성하여 '사림파'로 등장했다. 훈구파는 당연히 사림파의 등장을 반기지 않았고 신진세력을 공격하였다. 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 10년의 갑자사화, 중종 14년의 기묘사화, 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는 모두 사림파에 대한 훈구파의 공격안 것이다. 사림파는 한 번 사화를 당할 때마다 수 십명씩 처형당하는 등 극심한 타격을 입었으나 조금 시간이 흐르면 다시 재기에 성공하여 제14대 임금 선조 때에 이르면 드디어 훈구파는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기 된다. (이 부분도 1987년 6월 항쟁 이후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이 생각나게 한다. 조금 다른 점은 김영삼의 경우 줄곧 야당이었다가 여당과 손을 잡고 정권을 획득했다는 것...)

사림파는 훈구파의 탄압에 맞서 싸울 때는 하나의 정치세력이자 동지였지만 훈구파를 물리치고 집권당이 되자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색당쟁'이라고 부르는 조선의 정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집권이 분열로 이어지는 것은 정치사에서 흔하다. 살림하고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집권 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동인과 서인은 이념과 정책이 서로 달랐다. 이념이나 정책으로 볼 때, 동인의 뿌리는 퇴계 이황으로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시작되었고 서인의 뿌리는 율곡 이이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으로 시작되었다. 동인과 서인의 정책의 차이는 토지를 둘러싼 싸움이 컸다. (야당이 분열하는 부분은 한국현대사와 다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이 분열하면서 군사독재 정권이 연속집권하도록 만들었다. 이 점에서 한국현대사의 야당은 조선시대 사림파 만도 못했다.)


사림파의 집권 이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지고 동인과 서인이 각각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자세한 상황은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사림파가 집권 이후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계기가 정5품의 '이조정랑'이라는 벼슬자리 때문이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조선시대의 인사권은 삼정승이 아닌 이조에 있었는데 이조판서의 전횡을 방지하기 위해 관료들에 대한 감찰과 탄핵권한이 있는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리 추천권은 이조의 낭관(?官), 즉 '이조정랑'에게 전권이 있었던 것이다. 이조전랑의 후임자는 전임자에 의해 추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조전랑은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대부분 판서와 재상까지 승진할 수 있는, 출세가 보장된 자리였다. (이런 면에서는 조선시대의 인사정책이 현대의 국가체계보다 합리적으로 보인다. 역사학자들은 조선의 정치구조가 합의체적인 운영을 추구했다고 말한다. * 아래 그림 : 시기별 정당 분포도)

 

저자는 조선 중기까지의 붕당 정치는 조선의 체제에 긍정적인 기능을 한 것으로 평가한다. 각 붕당은 상대 붕당과 상호 공존의 틀 안에서 이념과 정책을 둘러싸고 경쟁을 하였으며 양반들의 계급적 이익에 기초해 있다는 근본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국가체제와 백성들의 삶에 나름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건국 이후 300여년이 지난 제18대 임금 현종 재위 중인 17세기 후반에 '예송 논쟁'으로 발생하기 시작한 당쟁은 그러한 붕당 간의 공존의 틀을 깨트렸다. 당시 여당이었던 남인은 야당이었던 서인을 인정하지 않았고 서인 또한 남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붕당의 이유가 공허하기도 했을 뿐더러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삼았고 공멸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현대 한국 정치집단에서는 이러한 경우가 발생하지 않고 있다. 여러가지 다른 시대적인 변화도 있겠지만, 해방 이후 지금까지 상대 정치집단을 적으로 삼고 죽이려고 하는 것은 일방, 특히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여당세력일 뿐이다. 현대 정치라고 불리우던 기간이 60년 정도로 짧기도 하지만....)

현종 이후 제21대 임금 영종 즉위까지 공멸의 당쟁은 이어졌다. 영조와 다음 임금인 정조 재위기간 까지는 공멸의 당쟁을 공존의 당쟁으로 변화시키려는 '탕평'의 시대였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이유는 격화되는 당쟁의 뿌리인 붕당의 재생산에 대처하여 국가 차원에서 고급인력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정조의 재위기간을 짧았고 급작스러운 정조의 죽음은 조선을 최악으로 이끈 세도정치라는 극단적 반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정조를 상대적으로 선호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정조의 개혁은 역사적으로 볼 때 구조적인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저자는 조선 후기 정조의 정치적 과제는 국왕이 남인들과 손을 잡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 들어 새롭게 등장한 신흥세력과 손잡고 양반 독점의 정치 구조를 허물어야 했던 것이다. 정조는 서얼들을 규장각에 등용하는 등 개혁적이기는 했지만 정조 자신이 사대부 중심의 정치 구조 자체를 타파하려는 생각은 부족했다. 


저자는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토리당과 프로테스탄트 중심의 휘그당이 나타난 17세기 후반을 정당의 기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서양인의 시각에서 '웃기는 이야기'로 평가한다. 그는 이미 그 600년 전에 중국에서는 이미 가진 귀족 관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구법당과 못 사진 농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신법당이 분립되었음을 지적한다.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했던 15~16세기부터 정당의 맹아는 시작되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당초 이 책의 발간에서 저자의 문제의식이었던 조선은 당쟁 때문에 망했을까? 저자는 이런 주장을 단호하게 배격한다. 조선은 중국의 청나라와 일본의 무사정권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자졌듯이 조선 역시 봉건시대에서 근대시대로 넘어가는 사회적 변화를 정치가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무너진 것이다. 공멸 수준의 당쟁과 세도정치는 그렇게 무너져가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특성의 한국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반대로 조선의 당쟁을 옹호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조선에서 정당이 일본보다 일찍 발생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당의 존재가 사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당쟁이 발생한 초기에 동인들과 서인들이 서로의 부패를 감시하는 기능을 했던 것등 여러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즉, 저자는 조선의 당쟁을 한마디로 "긍정적이다" 또는 "부정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고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긍정성과 부정성이 시기 구분에 따라 달라지는데 특히 당파끼리 공존을 추구할 때 긍정적이고 독존을 추구할 때 부정적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당파 싸우 망국론'을 주도적으로 생산하고 확산시킨 세력이 일본이었음을 지적한다. "조선 정치사를 압축하는 한 개념으로 '당쟁'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학자는 일본인 시데하라 히로시였다. 그는 1900년 학정참여관으로 조선에 와서 이른바 조선의 교육개혁을 단행한다면 명목으로 교육분야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었다. 그가 1907년에 펴낸 <조선정쟁지>에서 당쟁을 조선 정치의 특징이라고 규정했다. 히로시는 조선시대의 정당들을 ,주의를 가지고 서로 존재하는 공당이 아니라 이해관계에서 서로를 배제하는 사당'이라고 규정했다. 한국인의 특성임을 규정짓는 '당파성론'은 일본인의 이런 정치적 목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p.455) 일본은 조선이 당쟁 때문에 망했다는 생각을 한국인에게 주입시켜 망국의 책임을 침략자들이 일본이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에게 돌리게 하려는 통치 정책은 하나로 조선사를 이용한 것이다. 이처럼 조직적이고 한국사 지하자원을 고안한 것은 물론 조선총독부였고 이를 이론화한 인물들은 총독부 산하 소속의 학자들이었다. 1924년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이 문을 연 다음에는 경성제대 소속의 교수들이 이를 체계화했다.


저자는 조선의 당쟁사를 통해 현대의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을 "공존의 정치"라고 말한다. 특히 현대 한국정치사가 뿌리깊게 각인시켜 놓은 지역차별과 사상통제를 통한 '독존'의 위험을 지적한다. 조선 붕당정치의 교훈은 독존을 추구하는 정치 체제가 파멸시키는 것은 상대 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독존 정치 체제는 특정 정당, 정치세력이나 특정 지역을 넘어 조직 자체, 즉 나라와 민족과 국민 전체를 파멸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지역갈등과 사상통제, 그리고 '독존'을 추구하고 있는 한나라당과 수구우익 언론, 재벌 등 기득권층이 새겨야할 것이다.

창피한 사실이지만 나는 그동안 한국사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책은 그런 나에게 한국사, 특히 조선사와 인물들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서구역사와 서구 학자, 그리고 서구의 이론에서 크게 배우는 것이 있는 만큼, 같은 뿌리일 수 밖에 없는 조선의 역사와 인물, 사건과 정책에서는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 나이에 바보같긴 하지만...ㅋㅋㅋ

[ 2012년 1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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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리라이팅 클래식 15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고전평론가'라는 직업을 개척한 인문학자 고미숙씨의 최근 신간으로 고미숙씨를 초빙하여 공부모임에서 세미나를 진행했다(하지만 나는 개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해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ㅠ)
 
저자는 자신의 몸이 크게 아프개 되면서 자신의 관심을 병과 몸으로 돌렸다고 한다. 그녀가 40대 초반이던 어느 날 그녀의 몸 속에는 생활하기 불편할 정도로 종양이 자라났다. 국내 최고의 종합병원에 같더니 온갖 검사를 마친 후에 의사가 하는 말이 "수술해야 잘라내새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수술도 하기 싫었고  수술 후에 입원실에 오랫동안 누워있어야 한다는게 싫어 수술을 포기했다. 그후 그녀는 등산을 하고 요가를 하고 자전거를 타면서 병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한다. "그동안 그만큼 나는 무지했고 또 게을렀다. 그러고도 살 수 있었던 것은 대충 살 만했기 때문이다. 계급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웬만큼 살 만한하면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얼마나 게으른가를 정직하고 볼 기회를 놓인다. 그래서 아파야 한다. 아파야 비로소 '보게'된다."

개인적으로 잘 아는 선배가 한 명 있다. 그분은 천성이 척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2000년대 초부터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잘 풀리지가 않았다. 사업을 하면서도 지식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열망으로 꾸준하고 책을 읽고 클래식을 감상하기도 한다. 그리고 애주가였다. 사업 때문이기도 했지만 거의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술자리가 있었고 나중에는 술을 마시지 않고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당연히 간에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었고 의사로부터 여러번 경고도 받았다. 하지만 술을 매개로 한 생활, 업무 스트레스는 줄어들지 않았고 급기야 간에 작은 종양이 나타났고 한 차례 수술했다. 수술 후에 술의 양을 줄이기는 했지만 횟수는 줄지않았고 급기야 조금 시간이 지나자 횟수마저 과거로 돌아갔다. 또 다시 병원을 찾은 선배는 종양이 재발했고 조금 더 심각해진다 것을 알았다. 의사와 주변의 권유에 따라 간의 대부분을 잘라내고 다른 이의 간을 이식하는 대수술을 감행했다. 대수술 후 아직까지 큰 후유증은 없었으나 선배의 생활을 철저하게 '환자'로 관리된다. 매일 먹는 약과 면역억제제에서부터 먹거리, 행동반경에 이르기까지... 면역억제제는 평생 먹어야 한다.
 
고미숙씨와 나의 선배...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갑작스러운 종양의 발견으로 인생의 기로에 섰으나 전혀 다른 방향을 선택하였고 지금은 전혀 다르게 살고 있다. 한 사람은 '앎의 주체'에서 '자기 삶의 치유자'로, 다른 한 사람은 남은 인생을 '환자'의 삶으로...
물론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반드시 몸이 아프냐, 그렇지 아니냐를 기준으로 하여 극단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건강 말고도 직업, 비전, 가치, 그리고 가족, 사람관계 등 삶의 질을 가르는 많은 영역도 있고 누구나 상대방보다 더 나은 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과 병, 생활습관, 특정한 계기에 대한 태도와 선택, 앎과 인식체계 등에 있어서 사람이 어떤 태도를 취하고 노력하는가에 따라 적어도 건강과 치유에 대한 전체적인 방향이 크게 달라질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이 책은 자신의 병을 통해 병에 대한 앎의 주체로 나선지 10년쯤 지난 시점에 저자가 동의보감을 공부하면서 느끼고 깨달은 바를 펴낸 것이다.

한국사회는 지난 근현대 100년을 거쳐 수 천년 동안 이어져왔던 동양적 인식체계와 문화를 대부분 버리고(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서구의 것에 익숙해져 왔다. 우리 역시 서구인들처럼 정상과 비정상, 선과 악, 삶과 죽음, 부자와 빈자, 항복과 불행, 건강과 병, 발전과 후퇴 등 이분법적인 사고구조에 익숙해져 있고 분석과 해체, 나누기와 가르기, 전체보다는 부분에 강한 문화가 자리잡았고 모든 문화적인 요소에 자본과 비즈니스가 결합되어 있다.
건강이나 차유(의학)도 마찬가지인데, 서양의학은 인체를 하나의 유기체이자 자연과 소통하는 주체로 인색하지 못하고 개별 장기, 조직, 세포로 나누어져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근본적인 한계로 작용한다.

저자 고미숙씨의 이 책에서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담론의 차이에 주목하며, 이 차이에 의해 한쪽은 몸과 인생, 그리고 우주로 연결되는 가르침을 터득할 수 있으며, 다른 한쪽은 삶에 필수적인 질병과 죽음을 “없어져야 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성찰과 연구의 기회를 박탈하고 만다고 말한다. 선조가 허준에게 <동의보감> 편찬을 명할 때 내린 당부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듯이(“수양이 최선이고 약물은 그 다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을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 p.39) <동의보감>은 단순한 의학서가 아니다. <동의보감>의 탄생 자체가 삶의 방식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었고, 모두가 그 지식을 누리게 하자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런 <동의보감>의 취지를 더 밀고 나가 이렇게 주장한다. “내 안의 치유본능을 깨워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자!”

저자는 이러한 관점에 의거하여 <동의보감>을 8개 장으로 나누어 독특하게 설명한다.
1장 허준, 거인의 무당을 탄 자연철학자. 임진왜란으로 유배지까지 허준이 <동의보감>을 펴낸 과정을 담았고 책 속의 키워드가 분류, 양생, 용법이란 점, 그리고 <황제내경>에서 <금원사대기>까지 동양의학의 '거인'들을 어떻게 책 곳에 흡수해 냈는지 설명한다.
2장 의학, 글쓰기를 만나다 : 이야기와 리듬. <동의보감> 속에 담긴 의학적 내용과 민담을 소개하면서 의사는 연출가에게 임상실험 리얼타임 예능이을 주장한다.
3장 정(精), 기(氣),신(神)  : 내 안의 자연 혹은 아바타. 몸과 우주가 화려한 대칭의 향연임을 주장하면서 정(精), 기(氣),신(神)이 어떻게 동양의학에 반영되어 있는지, 인체와 존재와 우주를 어떻게 다루는지 설명한다. 아파야 산다.
4장 '통하였느냐' : 양생술과 쾌락의 활용. 양생의 척도는 태과와 불급 넘어야하며, 정을 보호하고 기(氣)를 보호하며 신을 보호하여 한다는 허준의 명제를 설명한다. 여기서 저자는 정(精)은 애로스와 도, 기(氣)는 자금력과 소통의 윤리, 신(神)은 존재의 절대적 탈영토화로 해석한다.
5장 몸, 타자들의 공동체 : 꿈에서 똥까지.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꿈은 사라져라 하며 몸 속의 벌레와 똥오줌은 안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6장 오장육부, 그 마법의 사중주. 오장육부는 사람 몸 속의 '사계()'이다. 상생과 상극, 수승화강과 음허화동, 일정의 파노라마, 음향과 기억, 얼굴의 일곱개 창을 통해 동양의학의 구성채계를 설명한다.
7장 병과 약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병이라고 무엇이고 욕이란 무엇인지,  아프다는 갓과 처방의 의미를 설명한다.
8장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임신과 탄생은 병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며 자궁, 폐경, 양생 등 여성들의 몸에 대한 귀중함을 말한다.


“하늘에 해와 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다”는 표현은, 동양의학의 사유체계가 어떤 땅에 발 딛고 있는지를 명징하게 보여 준다.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닌 것이다. 실제로 우주(자연)와 인간의 신체는 연결되어 있다. 산업화된 근대 이후의 사고방식에서는 마치 사회의 전 과정이 분업화되어 있듯, 자연과 신체도 분리된 ‘개체’로 여긴다. 그렇기에 우리 신체의 각 부분도 기능별로 분화하고, 또 의학의 체계도 그렇게 짜여 있다(소화기, 순환기, 내분비, 비뇨기 등).
서양 근대철학의 시작이 ‘의심할 수 없는 나’인 것과 지금의 서양의학 담론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개체에 대한 탐구, 그것은 서양 근대에 제반 분야에서 모두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서양에서는 해부학이 발전했던 것이다.
드라마 ?허준?(원작 소설 <동의보감>)에서 가장 문제가 된 장면은 바로 허준이 스승의 시신을 해부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듯한 클라이맥스 부분이다. 지금까지 많은 동양의학 전문가들이 이야기한 바 있듯이, 이것은 서양의학적 지식에 기반한 상상이다.
동양의학에서의 몸은 가르고 절개해서 보이는 해부학적 신체가 아니라 정(精), 기(氣), 신(神)이 접속하고 변이하는, 자연의 하나이다. 그렇기에 고대 중국과 한국에서는 의도적으로 해부를 무시했던 것이다.

또한 서양의학에서는 감정을 뇌와 연결시켜 말하지만, <동의보감>을 비롯한 동양의학에서는 놀랍게도 오장육부와 감정이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예컨대 기쁨을 주관하는 것은 심장이고, 슬픔을 주관하는 것은 폐이며, 화(분노)를 주관하는 것은 간이다. 실제 <동의보감>에는 상사병으로 밥도 먹지 못하고 누워만 있는 여인에게 화를 내게 해서 뭉친 기를 풀어 주는 치법(治法) 사례부터 이와 유사한 예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저자는 이처럼 몸과 우주에 대한 시선에서부터 감정을 바라보는 관점까지, 이 책에서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신체에 대한 서양의 담론을 짚어 가며, 동양의학 담론의 특이성을 선명히 부각시킨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동양의학의 우수함이 아니다. 서양담론의 배치가 전문가들에게 의학의 영역을 넘겨주어 자기 몸과 감정을 들여다볼 계기 자체를 차단한다면, 동양의 담론에서 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몸과 감정을 컨트롤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바로 이 점이 지금 누구보다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지혜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서로 다른 별개의 문제 또는 서로 절대적인 문제일까? 저자는 질병과 죽음을 빼고 나면 삶이 너무 왜소해진다고, 아니, 그걸 빼고는 삶이라고 할 게 없다고 말한다. “태어난 이상 누구든 아프다. 아프니까 태어난다.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곧 아픔이다. 또 살아가면서 온갖 병을 앓는다. 산다는 것 자체가 아픔의 마디를 넘어가는 과정이다.”(p.429) 삶의 풍요로움은, 이 병과 죽음을 어떻게 끌어안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기 시작한다는 법정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어느 과(내과, 외과, 피부과, 이비인후과 등등)에 갈 것인지만 잠시 생각한 후 이후의 과정은 전문가에게 맡겨 버린다. 그리고 처방을 받으면 고쳐지겠거니 생각한다. 이 병이 왜 생긴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도 자신의 경험을 들어 말한다. 자기 몸에, 자기 병에 너무나 무지하고 게을렀다고, 말이다. 왜 우리는 우리 몸인데도, 우리 몸을 고치는 건 오로지 전문가들의 몫이라고만 생각하게 되었을까? 게다가 그 병은 우리 삶 자체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치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삶의 정말 중요한 부분, 내가 변할 수 있는 마디를 남의 손에 넘기는 것과 같다. 마치 수능 전문가들에게 내가 원서를 넣은 학교와 전공의 선택까지 다 맡겨 버리고, 좋은 결과만을 바라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학교에서 그 전공으로 사는 것은 ‘나’인데도 말이다. 
저자의 이 고민은 이반 일리히의 문제의식과 동일해 보인다. 일리히의 그의 저작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 현대 의학과 병원신세를 문제를  "전문가에게 맡기는" 정도의 수동적인 문제가 아니라 "서양의학과 병원의 건강과 치유에 대한 제도적 독점"으로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은 일리히의 논점을 다르지만 몸과 건강, 병에 대한 궁극적인 접근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사회정의와 복지국가의 차원에서 의료의 독점을 막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는 의료의 수요자인 개개인들이 건강의 주체로, 자기 몸의 주인으로 나서는 것만이 궁극적으로 방향이라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말이 우리 모두가 의학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뜻도, 병원을 이용하지 말자는 뜻인 것도 당연히 아니다. 병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서, 최소한 병을 만난(이 병을 불러온) 내 삶에 대해 생각하며, 병원을 다니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병을 재빨리 치워버려야 할 어떤 것으로만 보는 데서 벗어나, 왜 이런 병이 오는지, 이것으로 내 감정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예뻐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하기 위해서” 내가 꾸려야 할 일상은 어떤 것인지, 보고, 느끼고, 공부하자는 것이다. 환절기마다 재채기와 콧물에 시달리면서도 자기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무지의 늪’에서 벗어나 ‘앎에 대한 열정’으로 나아가 보자는 것이다.

태어남과 동시에 질병과 함께하고 되고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이 시작된다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면 질병도 죽음도 내 삶 속에서 함께할 수 있을 것 같다. 아프다는 것은 내 몸 속의 조화가 깨어졌거나 내 몸에 연관된 외부세계와의 조화가 깨어진 것이라는 인식은 내 몸안의 여러 존재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지나고 외부의 세계, 즉 물과 공기와 흙과 불, 그리고 사람과 동식물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관계하도록 마음먹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살면서 질병과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살면서 사람들과의 아픔과 번뇌와 갈등, 해어짐 역시 피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내가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변해야 하는건 무엇일까?
 
* 책 속의 문장
- 언급한대로 허준의 독창성은 분류학에 있다, 특히 가장 두드러진 건 '5편 106문 목차'다. "내경편,외형편,잡병편,탕액편,침구편 등 다섯 가지 큰 묶음은 우리에게는 별로 낯설지 않은 구성이 아니다, 조선에서는 <동의보감>이 나온 이후 그렇게 의학을 보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때문이다. 너무나 익숙하다고 보니 우리는 그것이 동아시아의 흐름에서 얼마나 이색적인 것인지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이렇게 다섯 편으로 나누어 살피던 예는 이전에 결코 없었다," (p,57)

- 끝으로 <동의보감>에서 사계절에 맞추어 사는, 평생의 양생법으로 권하는 생활수칙을 소개한다. “하루의 금기는 저녁에 포식하지 않는 것이고, 한 달의 금기는 그믐에 만취하지 않는 것이고, 일 년의 금기는 겨울에 멀리 여행하지 않는 것이고, 평생의 금기는 밤에 불을 켜고 성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다.”(p.163 / <동의보감> ?내경편?에서)

- 오늘날 안채의 가능은 수백만 년 동안 감염인자와 주고받은 상호작용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감각에서 외모, 혈액 화학작용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것은 질병에 대한 진화 반응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심지어 성적 매력까지 질병에 대한 진화 반응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성적 매력을 느끼는 사람의 향기는 왜 그렇게 매혹적일까? 그것은 그 사람과 나의 면역 시스템이 다르다는 표시이다. 면역 시스템이 서로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들은 부모에 비해 더 광범위한 면역력을 갖춘다, (p.186 샤론 모알렘 <아파야 산다>)

-  "음양의 이치상, 기쁨은 발산하는 양기다. 슬픔은 침잠하는 음기이고. 그래서 전자는 쉽게 잊혀지고 슬픔은 오래 간다. 복은 내탓이고 화는 남의 탓이 되는 것도 이런 원리다. 사랑의 기쁨은 산산이 흩어지지만, 사랑의 아픔은 천년이 지나도록 절대 잊혀지지 않아야 하는 것도 이런 법칙의 산물이다. …… 특히 현대인들은 그 임계점을 넘어 버렸다. 쇼와 이벤트에 길들여지다 보면 기쁨은 더 이상 쾌락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 결과 사람들의 성향은 업!되지 않으면 다운된다. …… 갑자기 분노가 폭발하거나 아니면 아무런 이유 없이 불안에 시달린다. 이런 구조가 심화되면 어떤 일을 겪어도 상처가 되어 버린다.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을 해석하는 감정의 회로가 기억이라고 했다. 자의식이라는 구조와 오장육부의 기운적 배치, 이런 조건이라면 어떤 사람도 콤플렉스 덩어리가 되기 마련이다. 암과 우울증, 그리고 자의식. 이것이 현대인들의 삶을 지배하는 삼종세트다. 이런 몸으론 외부와 부딪힐 때마다 상처투성이가 된다." (p.265)
 
[ 2012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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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 푸른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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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어준, 지승호의 < 닥치고 정치 >를 읽고 / 2011. 10., 336쪽, 푸른숲

 

안철수/박원순 현상, 김진숙과 희망버스, 무상급식 등과 더불어 2011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키워드 중 하나가 '나꼼수'이고 나꼼수의 기획자가 바로 김어준이다. 나꼼수는 "이명박 대통령 헌정방송"을 내세우며 팟캐스트를 시작했고 지난 8월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곽노현 교육감 구속, 서울시장 보궐선거 등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 '팟 캐스트 세계 1위를 기록한, 최대 회당 600만명이 다운로드 받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MB 정권과 집권당이 방송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장악하고 조중동 등 주류언론이 정권과 야합하면서 '알권리'와 '말할 권리'를 빼앗긴 대중들은 나꼼수의 등장에 환호하였고 첨단 미디어의 발전은 SNS와 스마트폰을 보급을 가져와 소비자들이 손쉽게 나꼼수에 접하고 주변에 전파하면서 자기 의견을 추가하기도 했다. 바야흐로 '1인 미디어'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김어준은 대중의 목마름과 기술발달에 자신의 콘텐츠를 담아냄으로써 시대의 아이콘으로 등장한 셈이다.


지금까지 기존 정치권은 물론이고 진보적인 정치권과 시민사회운동 세력도 대중들의 몸과 마음에 다가가지 못해왔다. 자신들만의 언어와 자신들만의 조직으로 대중과 소통이 단절된 채 기득권 언론과 비주류 언론에 의지해 온 것이다. 정치권이든, 노동운동이든, 시민운동이든, 진짜 일단 대중들과 머리가 아닌 몸으로 만나는데 처음 성공한 집단이 바로 ‘나꼼수'라 할 수 있다.


최근 경향신문에 실은 우석훈씨의 말대로 "나꼼수가 없었다면, 어눌하면서도 TV 토론에서 ‘따박따박’ 나경원을 ‘발라주지’ 못하는 별로 매력적이지 못한 중년의 남성이 시장이 될 수 없었을 건 분명"하다. 명실상부, 현재 "공중파와 언론을 통틀어서 지금 김어준은 최고의 기획자"이다. 그는 "지금 한국에 김어준의 감각을 따라갈 사람은 없고, 그만큼 종합적이며 기민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한편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세상은 ‘시민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김어준의 시대’이기도 하다."고 단언한다.

 

김어준. 그는 어떤 사람인가? 그의 철학과 정치관은 무엇일까? 

이 책은 김어준이라는 기획자에 대해, 그의 세계관과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번 책 [닥치고 정치]에서 무학(無學)의 통찰을 약속하는 김어준은 폼 잡는 이론이나 용어, 모두 버리고 일상의 언어로 정치를 이야기한다.(그의 말투는 기성 언론인, 학자, 정치인 뿐 아니라 점잔을 빼는 '어른'들도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땅에 점장을 빼는 지식인이 너무 많고 그런 사람  '일색'이디기 때문에 김어준처럼 내뱉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사방이 꽉 막힌 세상에서는...)

그는 이 책이 "'평소 정치에 관심 없는 게 쿨한 건 줄 아는 사람들에게, 이번 대선이 아주 막막한 사람들에게, 그래서 정치를 멀리하는 모두에게' 외치는 정치 교본"이라고 큰 소리친다. '이명박의 여집합', '신정아와 문재인', '비자금, 도둑질', '박근혜, 과거다', '유시민과 국민참여당' 등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쏟아내고 있다.


김어준 수다의 시작과 끝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왜 정치에 관심을 둬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다. 그는 정치와 우리 개개인의 일상이 따로 가고 있지 않음을 환기시키며,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원하는 바를 위해 스스로 행동하길 바란다. 높은 물가와 등록금, 과도한 경쟁 체제 등 일상 속 스트레스의 근원을 해결할 수 있는 시대, 우리 모두 정치의 '주체'임을 인식하고, 닥치고 정치한다면 그의 말대로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독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 깨닫기, 이명박 정권과 삼성을 통해 보는 우리나라 보수 권력과 그들이 만든 시스템의 실체, 유명 정치인들의 적나라한 정체, 이들을 견제해야 할 민주당과 진보정당이 대중들에게 외면당하는 이유, 무엇보다도 선거가 당신의 인생에 끼치는 영향을 무학(無學)의 통찰로 시원하게 깨우쳐준다.


안철수도, 박원순도, 곽노현도, 오세훈도 뉴스에서 볼 수 없었고, '나꼼수'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전인 바로 그때, 이 인터뷰는 진행되었다. 당시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현 정권은 여전히 민심과 거리가 멀었고, 주류 언론이 선택한 뉴스는 빠진 것이 많았다. 작년 6·2 지방선거와 분당 보궐선거 결과의 의미는 자명했지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처럼 정치 이슈가 생활화되고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정국이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분명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뭔가 불편하고 찝찝한, 그리고 보이지 않는 분노가 쌓여가고 있었다.


이에 내년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그는 분연히 일어나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한 <진보집권플랜>처럼 옳은 소리로, 점잖게 소명의식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왜 선거에 참여해야 하며 그것도 '알고' 찍어야 하는지, 왜 사람들이 머리 아픈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같이 잘살기 위한 길은 무엇인지, 일상 언어로 풀어헤쳐 보고자 했다. 이 엄중한 시국에 벌어진 우연을 가장한 필연. 정치 지형에 대한, 공학적 접근이 아니라 실제로 각 개인의 입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꼼꼼하고 구체적인 정치 해설 가이드북 <닥치고 정치>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 책의 모토는 '알고 찍자'다. 내년 대선과 총선에 앞서 어떤 정당과 정치인이 우리의 욕망과 희망에 부합하는지 김어준은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박근혜를 비롯해 이렇게 많은 현직 정치인들을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신랄하게 평가한 책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김어준은 정치가 인격화된 우리의 현실에 맞추어 날카로우면서도 실감나는 일상의 언어를 구사한다. 그 익살스런 입담으로 쏟아내는 적나라한 인물평 속에는 우리가 그 정치인들을 보면서 어렴풋이 느꼈던 감정을 집어내는 통찰이 있다. 단 몇 마디로 그 정치인이 어떤 사람인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판가름해준다.

(김어준은 다음 대통령 후보감으로 문재인씨를 꼽았다. 그가 문재인씨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MB 정권의 탄생이 민주정부 10년의 반동이고 자신이 공과를 분명히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과 문재인씨가 이 시대의 패러다임인 '공감, 소통, 참여'를 상징할 수 없기 때문에 선뜻 18대 대통령으로 동의하기가 어렵다. 물론 아직 1년간의 시간이 남았다. 문재인씨 역시 현재 유력한 후보이고 적극적인 유권자의 참여를 통해 그가 선택되고 스스로 시대의 패러다임을 익히고 더불어 안철수씨와 공감한다면 다음 대통령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그동안 기득권을 누려온 보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그 반대편에 있으면서도 대다수 국민들을 대변하지 못한 진보 정당의 한계 또한 여과 없이 보여주는 식이다. 비꼬고 낄낄거리기보다 사뭇 진지한 태도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진보집권을 위한 김어준의 로드맵을 제시한다. 책 속에 현직 정치인들을 그렇게 많이 등장시키고 날카롭게 파헤치는 이유가 로드맵을 가능토록 하는 엔진이 바로 사람,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좋은 컨텐츠와 정책을 갖고도 엘리트 의식이 빚어낸 대중 언어의 부재로 대중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진보 정당의 폐부를 후벼 파고, 스스로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임을 자처하면서 국민참여당에게 괴물의 탄생이라 칭하는 것은, 결국 문재인, 심상정, 이정희, 노회찬, 유시민 등과 같은 인물들이 다 함께 나서서 대중적 지지를 끌어냈으면 하는 바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꼼수' 현상과 김어준 시대의 효과는 대선까지라 할 수 있다. MB로 상징되는 막가파 기득권은 현재의 '선수'들이 합심하여 다음 대선에서 교체할 수 있지만, '엘리트에 의한 정치&경제 독점'과 대의정치의 한계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정치,경제,사회,문화,언론,노동,NGO까지 포진해있는 인물들의 면면은 대부분 엘리트이고 우리나라의 교육시스템과 문화는 이를 확대,심화시키면서 재생산하고 있다.)


그래서 어쩔 것이냐? 이 책은 '할 수 있다!'라는 구호에서 멈추거나, 맥 빠지는 선동으로 끝나지 않는다. 김어준은 기존 정치권에서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정치'가 나타나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의 근거를 제시한다. 그 사례가 바로 현재 진행 중인 '나꼼수' 광풍이다. 이 책의 인터뷰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나꼼수'의 인기몰이는 김어준이 말하고 있는 변화 가능성이 현실화된 사례다. 시대정신과 기술의 진보가 마련한 플랫폼이 합쳐지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구태의연한 정치 공학이나 보수 언론의 프레임을 가뿐히 뛰어넘어 새롭게 판을 짜는 혁명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 책에서 제시된 주장이 '나꼼수'의 열광적인 반응으로 증명되고 있다. 즉, 새로운 유통 플랫폼이 등장한 이 시대에는, 철저한 자발성, 대중을 지향하는 언어, 쫄지 않는 자세만 있다면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해온 프레임 밖으로 나가서 생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꾸 기득권의 프레임 밖으로 나가 세상을 보려는 노력이 바로 혁명의 시작이고, 그가 말하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자 진보집권플랜이다.



김어준의 생각과 주장에도 부족한 부분이 있고 나와 다른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가 책에서 말하는 요지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동안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한국사회가 존재하는 것이고 앞으로 참여하는 만큼 한국사회가 바뀌리라는 것을...

모두가 닥치고 정치에 관심을 둔다면 그것이 김어준의 희망이고 우리 모두의 희망이 될 것이리니 관심이 참여로, 참여가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해본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김어준은 김어준의 길을 갈 것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역할, 자신이 잘 하는 분야에 최선을 다하리라 믿는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신이 할 수 있는 분야에 최선을 다하고 목표와 목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함께 하고 놀고 웃고 즐기면서 조금씩 더 나은 사회와 인간관계를 만들어내는 사회를 보고 싶다.

 

* 인상 깊은 문단


- 노무현의 애티튜드가 빛을 발하는 순간은 상황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을 때...(p.17)


- 자유주의자들의 낭만을 비판하는 21세기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휴머니스트였던 마르크스의 낭만을 생각해봤을까 몰라.(p.46)


- 어?e든 당시(마르크스 시대)의 주석은 지나치게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한 한계가 있다고 봐. 경제적 계급은 공포가 만든 결과일 뿐이거든. 원인이 아니라. 그 공포를 통제하지 않고서는 계급 문제를 풀 수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공포는 본능의 영역이라고. 이걸 과학이나 신념으로 해결할 순 없다고. 다만 관리할 수 있을 뿐이지. 그래서 계급의 문제를 풀려면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공포를 줄이고 관리할 수 있는 정서적 안전정치가 사회적으로 더 절실하다고 봐. 그게 사회구조적 장치여야 하는 건 맞지만, 혁명으로도 공포 자체를 삭제할 순 없다는 거지.(p.46)


- 사람들이 대통령을 선택할 때 논리를 동원하는 건, 그 사람에게 꽂힌 마음을 정당화할 도구로 쓰는 거지, 논리의 귀결로 누군가를 선택하는게 아니라고. 그런데 진보 진영에선 언제나 논리르 먼저 내세우지. 뇌 구조가 그럴 수 밖에 없긴 한데, 지금 사람들이 찾고 있는 건 그게 아니야. 자기 마음을 줄 사람. 그리고 그 마음이 배신당하지 않을 사람을 찾는 거지.(p.73)


- 2007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저조한 득표는 종북주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투표하게 된 시대성, 노무현 정부로 인한 피로감, 민주당의 탁월한 등신 인증에 따른 콜래트럴 데미지였다고. 진보정당은 선거에서 그렇게 민주당의 종속변수라고. 탄핵 정국처럼, 한나라당이 완전히 지그려져서, 진보를 폭 넓게 받아들일 여력이 생기고 그래서 두 번째 선택까지 고려할 수 있는 특수한 상황에서야 별도로, 추가 배려를 받는...(p.185)


- 그런데 진보정당의 방식은 이런 식이야. 처음 만난 상대 앞에 재무계획서와 신혼방 설계도를 딱 꺼내놔. 그리고 입주할 주택의 입지 조건과 구입할 차량의 대출조건 및 주변 교육환경의 우수성에 대해 부동산과 금융, 교육 전문용어를 섞어 진지하게 프리젠테이션하지. 그런 다음 건조한 표정으로 바로 결혼하재. 만약 나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속물이라 더 큰 집과 더 큰 자동차에 넘어간 방증이라며. 그걸 당한 상대는, 당신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당신 패션부터 좀 후줄근한 것이 촌스러운 데다, 자료는 열심히 준비는 한 것 같지만 뭔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겠고, 결정적으로 내가 당신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게 왜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일이냐며 일어나 떠나버려. 남겨진 진보군은 자기 프로포즈가 실패한 요인을 열심히 분석하다가 입지 조건과 대출조건의 우수성을 다른 결쟁자들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혼자 결론 내리지. 그렇게 연애 한 번 못해봤으면서 꼭 결혼할 거라고 혼자 다짐을 하지. 

욕심 많고 잇속 빠른 보수군이 옆에서 지켜보다가 진보군이 책상 위에 남기고 간 계획서와 설계도를 집어와서는 표지만 엄청 화려하게 바꾸고 총천연색 칼라로 인쇄해서 자리를 박차고 떠난 국민양을 찾아가 계획서를 다시 내놓는다는 거지. 하지만, 그 내용은 읽어주지 않아. 휘리릭 페이지만 넘기면서 대신 장미 한 송이 안겨주고 레스토랑에 데려가서 엄청 맛있어 보이는 스테이크를 시키지. 그들은 그렇게 연애를 시작해버리네.(p.223)


- 하지만 대중정당이 왜 자꾸 학술원처럼 구냐고. 진보진영이 대중의 모호한 인식체계를 계몽해서 어떻게든 민주당을 포함한 보수와 자기들을 분리해내겠다는 나홀로 전략, 바로 거기서부터가 거대한 실패의 시작이라는 걸 알아야 해. 내가 한 번 이야기했잖아. 마음은 한정된 자산이라 비슷한 곳에 여러 번 나눠줄 만큼의 여력이 없다고. 게다가 우리 마음을 그렇게 나눠 쓸 만큼 한가로운 정치 지형 속에 있지 않아. 

아주 쉬운 예로, 어떤 분야든 업계 1,2위 정도가 머리에 입력되고 나면 3위부턴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해서 나머지 모두 군수 업체로 처리된다고. 기억이 잘 안나. 정치는 훨씬 더 그렇다고. 내 일상에 매일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내가 매일 쓰고 있는 상품도 아니기 때문에 큰 덩어리의 이미지로 1차 분리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마음을 쓰는 일 자체가 대단한 정신노동이야. 그래서 진보진영이 자신들을 구분시키려는 노력은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보편적 방식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라고. 자기들이 뭔데 그게 가능해. 

그게 쉽게 되는 소수의 진보정당 열성 지지자들은 그런게 대단한 정신노동이라는 것부터 이해하지 못하지. 그리고 억울해하지. 우리 가치를 모른다고. 바로 거기서부터 본격적으로 굴러먹기 시작한다.(p.299)

 

[ 2012년 1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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