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잡는 자가 대권을 잡는다 - 대한민국의 학교를 단번에 바꿀 교육 정책 제안
이기정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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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고에 다니는 아이들을 둔 학부모나 그렇지 않은 시민들을 포함하여 우리나라 교육이 크게 문제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갓 같다.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스스로의 경험에 의한 것이든, 언론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것이든 관계없이 교육문제는 빈부격차와 양질의 일자리 문제와 더불어 현재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일 것이다.
내 입장에서도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인 딸아이가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달려있고 주변 친척, 지인들 대부분이 초, 중, 고교에 다니는 자녀를 두고 있기 때문에 대화나 관심사에서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현존하는 '교육이 문제'라는 생각에 대한 어려운 점은 학부모 대다수가 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생각하면서 대처하고 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이런 대처방식은 교육문제만은 아니다. 일자리 문제, 소득의 문제, 주거의 문제, 사회복지의 문제 등 대부분의 사회적, 국가적인 문제를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물론 이러한 개인적 대처방식은 본능적인 차원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매일매일 겪는 문제이고 자신에게 목숨과도 같은 피붙이 아이들의 문제인데다가 하루아침에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집단적으로 대처하거나 사회정치적으로 해결하는데 개개인들이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사람들이 아이들의 교육문제를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분명할 뿐더러 그에 따른 비용과 노력이 과도하게 투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과 이들이 정치권과 정부, 사회지도층 인사들에 대한 기대를 많이 포기한 듯 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특히 상당수 사람들이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16~17대 국회에게 기대를 걸면서 민주정부의 개혁적인 교육정책을 기다렸다가 크게 실망하면서 개별적인 대응이 확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럼에도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16,17대 국회에서 핵심적으로 활동했던 정치권, 관료출신들이 자신들이 교욱정책을 잘못 폈다는 것, 그 부분에 대해 학부모들과 유권자들이 실망하고 절망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상당수의 시민단체들과 진보언론들, 전교조 등 사회단체들 역시 정치권 만큼의 실수와 부족함을 계속 반복해왔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래도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처한 현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은 반드시 개혁되어야 하고 개별적인 노력과 접근으로는 충분할 수 없고 구조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교육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 입장에서는 이제야 교육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알아보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먼저 교육문제를 개혁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고 나 역시 여기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나의 노력은 <핀란드 교육혁명>과 <핀란드 부모혁명>, <대한민국은 사교육에 속고 있다 >와 <학교개조론 >, 파울로 프레이리와 체 게바라, 노엄 촘스키의 교육관련 책을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이었고 앞으로는 내가 알게 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외부적인 노력을 시작하는 것...

 

이 책은 원래 내가 교육문제에 구체적으로 관심을 가진 계기가 되었던 세미나 교재였다. 저자의 생각은 지난 주 <학교개조론>(2007, 미래인)을 통해 처음 접했다. 저자는 <학교개조론> 발간 후 4년간의 상황변화와 연구의 진척 등을 반영하여 2012년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두고 이 책을 발간했다.
저자는 2012년 대통령 선거가 "학교개혁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학교개혁이 한두 개 정책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정부 내 교육부서 하나가 변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개혁 방안 여러 개를 한꺼번에 제시하여 대통령 선거의 주요 쟁점을 교육으로 만든다면 교육에 희망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이런 저자의 책 발간 취지와 비교하면 책의 제목이 저자의 의도라기보다 독자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출판사의 기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ㅋ)

 

저자는 이 책에서 <학교개조론>에서 제시한 개혁정책과 조금 다른 여섯 가지 정책을 'BIG 6'라는 이름으로 제시한다. <학교개조론>의 핵심 개혁정책 세 가지 중 '교육과 사무행정의 분리'와 '교장선출제'는 유지, 보강하고 '교원평가제'는 제외시켰으며 새로이 '중고등학교의 무학년 학점제'와 '학급당 학생 수 20명으로 감축' 그리고 '특목고, 자사고 폐지와 고교평준화 확대'와 '교과서 자유발행제도 및 자유선택제도'를 추가하였다.('교원평가제'의 경우 저자가 보기에 이미 알맹이가 빠진 채 형식적으로 도입되어 학교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BIG 6'에서 제외시킨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교육개혁 정책 'BIG 6'을 자세하게 설명함과 동시에 나름대로 6가지 정책의 상호 연관성과 파급효과 순위도 정하고 각각의 정책에 필요한 예산도 산정하여 제시한다. 또한 각 정책에 대한 기득권의 저항 순위도 매기고 기존 제도와의 충돌 가능성, 좌우파가 갖는 거부감, 타협과 양보 전략도 제시한다. 저자로서는 단순히 자신이 제시한 정책의 옳고 그름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의 구체성과 정치권과 기득권 집단의 상대적인 반응 등을 제시함으로써 개혁정책의 현실가능성을 높이고자 연구한 흔적이 엿보인다. 저자가 서문에 밝혔던 "교육정책을 실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과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는 '울분'을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대한민국 교육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경쟁 위주의 입시 체제가 아닌 '학교의 무능'이라 지적하면서 "입시가 사라져도 지금의 학교는 질 좋은 교육을 절대로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학교의 무능을 개선하고 어떠한 교육 형태에도 능숙하게 대응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고안한 것이 바로 '교육 정책 BIG 6'다. 무엇보다 우열반 수업이 아닌 수준별 맞춤형 수업의 실시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학급당 학생 수 감축 방안으로 소개한 교실 수 확대 요령과 교사의 사무행정업무로부터의 해방을 통한 10만 교원 충원 방안, 교원성과급을 이용한 사무행정업무전담직원의 채용은 서로 단단히 엮여 있어 정책상의 빈틈이 없다.
학생들의 능률적인 학습을 위해 무학년학점제로 실시되는 수준별 맞춤형 수업은 각 학생의 수준에 맞게 필요하고 가능한 만큼의 학업을 이수하도록 유도하여 학생들이 천편일률적인 수업에서 받는 고통을 최소화해 학습 의욕을 극대화하는, 학교교육의 기본 가운데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 정책 'BIG 6'은 이처럼 기본에 충실한 교육의 큰 틀 하나를 제대로 만드는 것만으로도 교원들의 교육 활동 집중도를 높이고 1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일석이조 이상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교육개혁 정책 'BIG 6' 이외에도 저자가 추가한 교육개혁 과제인 학교 도서관의 활성화, 수능시험의 단순화, 청소직원 도입, 교육전문 대학과 학교현장의 연계, 교장의 수업참여도 충분히 필요하고 가능한 정책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2부에서 고찰하는 '교원평가제'와 '전교조에 대한 검토', '무상급식 논쟁'과 '평준화 폐해에 대한 시각', '교욱에서의 포퓰리즘'과 '수렁에 빠지지 마라'는 소위 좌, 우파로 나뉘어 진영논쟁과 같이 비생산적으로 논의되는 부분들에 대해 이념적인 시각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과 교육 당사자와 수혜자 입장에서 각 사안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에 대부분 동의함에도 두 가지는 지적하고 넘어가야겠다. '학교무능론'과 개혁정책 실현전략이다.
첫 번째 '학교무능론'의 경우 현재 우리나라 교육현실의 문제를 '학교의 무능'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고 왜곡의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저자가 스스로 분석하고 평가한 한국 교육현실, 교육현장의 문제는 '학교의 무능'이 아니라 '학교제도(시스템)의 문제'가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현재 학교 내 교육의 중요한 문제는 대부분 교육자치가 허울만 있을 뿐 실제 존재하지 않고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제도와 시스템으로 학교교육을 망가뜨리고 있음이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저자도 인정하듯이 교사와 학부모, 아이들이 책임질 문제도 아니거니와 그들이 노력한다고 해서 해결될 성질이 아닌 것이다.(영향을 일부 미칠 수는 있지만...) 물론 그렇다고 하여 내가 교사들과 학부모들에게 전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바꿔야 할 대상이 제도와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저자의 교육개혁 정책의 실현 가능성과 전략에 대한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자의 정책에 대한 깊은 고민의 흔적은 느껴지지만 반대로 실현가능한 전략은 보이지 않는다. 저자의 바람대로 올해 대통령 선거에서 교육개혁 정책이 중요한 공약 중 하나가 되고 선거 쟁점에서 논의되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새로 당선된 대통령 당선자의 정책의제에 반영되어 내년부터 한 가지씩 실현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바람'과 '가능성'이나 '전략'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본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교육문제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절실한 문제고 국가적 차원에서도 미룰 수 없는 과제이기도 하다. 2010년 지자체 동시선거에서 무상급식이 주요 선거쟁점으로 떠오를 수 있도록 교육개혁을 원하는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혁정책을 여론화시킬 것인지, 누가 중심이 되어 논의를 확산시킬 것인지, 각 정당에는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등이 제시되어야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육개혁 정책의 입법자를 국회에서 선출하는 지난 4월 총선에서는 교육과 관련한 정책이 전혀 공론화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교육 관련 책을 한 권씩 읽을 때마다 답답함도 많이 느껴지고 전교조에 대한 실망과 아쉬움이 커진다. 나도 그만큼 기대가 컸고 앞으로 기대도 크다. 그동안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던 나 자신도 실망스럽고...ㅠ

 

[ 2012년 4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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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 - 제주 강정마을을 지키는 평화유배자들
이주빈 글, 노순택 사진 / 오마이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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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금) 한국경찰의 대표적인 문제점이 노출된 상반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제주 강정마을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신부님 한 분이 추락사고를 당한 것이고 또 하나는 수원에서 경기도 경찰청이 112 신고가 접수되어 6분 넘게 강간,살인 피해자가 살려달라고 했는데도 늑장 대응하여 결국 살해된 사건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역은 파출소에서 얼마 되지 않은 거리였고 심지어 경찰은 자신들의 태만과 실수를 고의로 감추려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강정마을에서의 경찰 과잉진압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경찰이 본연의 업무인 치안과 민생 보호에는 뒷전이고 정권과 재벌들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인 것이다.

 

 

 

 
강정마을 사건의 경우, 6일 오후 문정현 신부가 강정마을 방파제에서 성 수난 주간을 맞아 천주교의 '십자가의 길' 예식을 펼치며 이동하는 중 경찰에 떠밀려 7m 아래로 떨어져 심한 부상을 당했다.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국민에게 사업의 취지와 정보를 공개하고 국민과 대화하면서 협조를 구하려 하지 않고 국민의 의사와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힘으로 정책을 밀어붙이는 몹쓸 태도와 무식한 방식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현 이명박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끝까지 용산참사와 매년 예산안 날치기, 4대강 죽이기, 한미FTA 날치기, 외환은행 불법 매각, 언론사 장악, 국민들의 알권리 침해 등 여론을 무시한 수 많은 '강행'으로 점철되었다.
강정마을의 경우, 헌법을 수호하고 국민주권을 지켜야 할 정부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스스로 망가뜨리고 제주도 서귀포 지역에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면서 1948년 4월 이후 64년 만에 또 다시 제주도민들에게 악몽을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제주 강정마을이 해군기지로 결정,강행되는 과정에서 정부가 얼마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어겼고 거짓말을 일삼았는지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강정마을 주민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삶과 구럼비바위 등 아름다운 자연을 지키고자 애쓰는지에 대한 것이다.(이 책은 지난 주 공부모임 교재였다.)
 

 

 

 

 
구럼비는 제주 강정마을 해안가에 넓게 펼쳐진, 길이가 1.2킬로미터나 되는 너럭바위의 이름이다. 연산호 군락과 붉은발말똥게를 포함해 여러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종이 서식하며, 제주 올레 7코스에 속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사람들은 이 너른 바위에 기대어 책을 읽거나 바다를 감상하고 피곤할 땐 누워 잠을 잤다. 아름다운 강정바다의 물결처럼 잔잔하고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그러나 2011년 9월, 해군과 공사 시행업체(삼성과 대림)는 구럼비바위로 가는 길목에 높이 3미터짜리 철제 펜스를 치고, 다음날부터 굴착기로 구럼비바위를 부수기 시작했다. 강정마을 주민들과 평화운동가들이 4년 넘게 반대하고 있는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끝내 강압적인 방법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평화롭던 제주 강정마을이 격랑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은 2007년 4월, 당시 마을회장이 불과 주민 87명의 동의를 얻어 해군기지 유치를 결의하면서부터다. 분노한 주민들은 2007년 8월 해군기지 유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했고, 전체 주민 1.970명 중 725명이 참여해 94%가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강정마을은 애당초 해군기지 후보에조차 없던 마을이었다. 해군은 2002년 해군기지의 최적지로 '화순항'을 선정했다. 그런데 워낙 주민들이 강하게 반대하니까 슬그머니 후보지를 바꾸어 2005년 9월 느닷없이 남원읍 위미리를 사업 대상지역으로 정했다. 물론 또다시 위미리 주민들의 강한 반대로 난항을 겪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해군기지 선정을 위한 여론조사를 불과 사흘 앞두고 강정마을이 후보지로 선정된 것이다. 계속 주민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해군과 정부는 기지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후보지 지역주민과 참을성 있게 협의하는 방식이 아니라 음모가들처럼 몰래 마을회장을 구워 삶고 일부 주민들을 회유하여 부당하고 부적절한 날치기 주민투표를 졸속처리한 것이다.
그리고나서 절대보전지역 지정이 해제된 때가 2009년 9월이었으니 만 2년 동안 해군은 불법 공사를 진행했다. 이런 야만스러운 정부가 어떻게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인지...ㅠ
강정마을 주민들과 민주당·민주노동당 등 정치권에서는 세계자연유산 3관왕(세계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 생물권보존지역) 지역인 강정마을 일대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반면 한국 정부는 남방해상무역 보호 등의 이유로 해군기지 건설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군사전문가들은 제주해군기지가 중국을 압박하는 미군의 기항지로 활용되면서 ‘관광의 섬 제주’가 ‘동북아의 화약고’로 바뀔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미군은 한·미안보동맹과 한·미행정협정 등에 근거해 언제든지 한국의 기지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강정마을은 매향리와 대추리에 이어 반전과 평화의 상징이 되고 있다.

 

 

 

 
매향리, 대추리, 용산에서 주민들과 함께 싸웠던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신부는 2011년 7월부터 강정마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강정 바다의 아름다움에 반한 김민수 씨는 아예 ‘강정 김씨’로 본을 바꾸고, 3년째 해군기지 반대 싸움을 벌이고 있다. 프랑스에서 온 ‘마음치료사’ 뱅자맹 모네는 평화를 위해 작은 힘을 보태는 강정의 생활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느끼고 있다. 대만에서 온 평화운동가 왕에밀리는 강정마을에서 ‘양심의 소리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발 들어달라고 호소한다. 즉 이 책은 제주 강정마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유배’를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반대투쟁을 지속적으로 취재해온 <오마이뉴스> 이주빈 기자는 강정마을 ‘평화유배자들’을 인터뷰해 그들이 생각하는 평화와 자유가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한국전쟁’과 ‘분단권력’을 주요한 테마로 삼아 사진 작업을 해온 노순택 작가는 강정 사람, 강정 바다, 구럼비바위의 소박하지만 강인한 모습을 포착해냈다

 

 

 

 
"사람들은 너른 내 몸에 기대 책을 읽거나 피곤할 땐 누워 잠을 잤죠. 그 흔한 일상의 풍경이었던 모습들이 이젠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고 있군요. 내게로 오는 길을 다 막아버렸기 때문이에요. 해군과 시공업자들은 육지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내게로 올 수 있는 모든 길목에 높이 3미터짜리 철제 펜스를 쳤어요. 그리고 다음날부터 굴착기에 정을 꽂아 내 몸을 부수기 시작했어요. 하얀 살이 터져 포말처럼 강정바다에 흩뿌려졌어요. 너무 아팠지만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어요. 너무 슬펐지만 울 수가 없었어요.  그리웠기 때문이에요. 내 등을 주방 삼아 요리하던 종환 삼촌, 감옥에 갇혀 있는 문주란 꽃처럼 순한 사람 동원 씨, 그리고 우리들의 공주님이었던 일곱 살 태나……. 그리움이 깊으면 다시 만날 것이란 믿음에 그들에게 고통을 핑계로 구걸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 온몸이 바스러지는 한이 있어도 그들에겐 신음소리 한 점 내주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끝내 저 3미터 펜스를 넘어 다시 만날 테니까요.
아이들 웃는 소리가 들려요. 다시 아이들을 안고 싶어요. 내 너른 등에 무등을 태우고, 강정바다 수평선 너머를 함께 꿈꾸고 싶어요. 나를 가두고, 나를 죽이는 건 참을 수 있어요. 그러나 섬마을 아이들의 꿈을 죽이는 건 참을 수 없어요. 섬마을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지우는 건 참을 수 없어요."(p.238)
 
 
헌법 제1조는 학생들 시험문제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주권'은 민주국가의 가장 중요한 원리임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향후 인류에게는 인간들의 자유의사 보다 수 백만, 수 억년 동안 먼저 지구상에 존재해온 자연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국민의 자유의사 보다 '국가'를 빙자한 정권의 의사는 2순위일 수 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정부와 해군은 기지공사를 중단하고 원점에서부터 새로 출발해야 한다. 정부가 솔직하게 국민들에게 정보를 공개하고 설명하고 다수의 후보예정지를 대상으로 공정하게 협의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 당시 방사성물질폐기처리장 유치 과정이 절반 정도의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지역주민들의 삶의 터전에 관계된 국가정책에 대한 기본적인 처리 방식은 방폐장건을 토대로 수정하여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리 훌륭하고 필요한 국가정책이라도 국회와 국민들을 무시하고 힘으로 밀어붙여서 진행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만 못할 뿐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정책이라고? 그렇다면 우리사회 내부에서부터 평화적인 방식으로, 부드러운 대화와 협의를 통해 진행해야 한다.
 
며칠 남지 않은 4월 11일 총선에서 야권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것만이 해군기지 건설공사 강행을 막는 방법인 것 같다.
 
[ 2012년 4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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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GPE 총서 2
장석준 지음 / 책세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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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공부모임 교재였는데 이제야 읽었다. 책을 읽고보니 저자가 소위 진보 진영에서 드물게 알려진 이론가이자 사회학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외국 사회학,경제학자의 책이나 익히 알려진 장하준,최장집 교수의 저작을 읽을 때보다 더 관심을 기울여 읽었다.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비판과 실망이 커지고 있고 서구국가에서도 신자유주의를 공격하는 흐름이 많아졌음에도 저자는 왜 책의 제목을 '신자유주의의 탄생'이라 정했을까라는 궁금증도 들었고 국내 진보진영 사회학자는 신자유주의 탄생과 극복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최근 캐나다에서 대학생들이 등록금 문제와 대학의 신자유주화에 대한 반발로 수 십만명이 시위를 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작년 여름,가을 세계 금융의 심장인 미국 뉴욕의 월가에서도 “Occupy : 1%의 탐욕, 99%가 막자”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당시 탐욕스러운 금용 자본에 대한 항의로 촉발된 월가의 시위는 한 달 넘게 계속되면서 전 세계 여러 도시로 확산되었다. 2008년의 금융 위기와 더불어 월가 점령 시위는 지난 30여 년 동안 군림해온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의 몰락을 상징하는 징후로 보인다. 막강했던 시장 근본주의 교리는 치명적 금이 갔고 자본주의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의 요구가 제기되고 있다. 한 시대가 저무는 지금, 흔들리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극복할 새로운 질서는 어떻게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

저자의 결론을 먼저 들어보면, 그는 현재 지구 전체에 '구조개혁 좌파'라는 흐름과 세력이 존재하고 있으나 이들이 전략적인 실패로 신자유주의의 탄생을 막아내지 못했으며, 향후 생활경제 정치를 강화하고 '생산수단의 소유와 경영'이라는 구조개혁의 방향을 고수하면서 대중운동과 지구정치적 질서를 만들어내면 신자유주의도 막아내고 자본주의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경제가 돌아가는 현실이 세계적으로 적용되고 있으므로 한 나라의 구조개혁이나 경제개혁도 자국 내에서만 해결하기가 이미 어려워진 것이 사실인만큼 정치에 대한 저자의 지구적 관점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현재 수준을 생각하면 정당, 정치세력은 물론이고 노동조합이나 농민, 서민들의 지구적 네트워크가 구성되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릴(차이와 이해관계를 극복한다는 전제로도)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저자의 분석과 해법은 지난 번에 읽은 대니 로드릭의 <자본주의 새판짜기>(2011, 21세기북스)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대니 로드릭은 좌파가 아닌 자본주의 주도세력의 하나라는 입장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원칙과 기준을 바르게 우지하지 않고 국민국가의 고유성과 필요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금융중심의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빈부격차와 양극화, 자본주의의 약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국민국가와 민주주의, 세계화가 충돌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고려할 때 세계화보다 국민국가와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세계적인 발전과 평등에 기여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대니 로드릭은 전지구적 정치체제의 성립 가능성을 부정하는 편이고 장석준은 필요하고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것도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좌파정치의 블럭화와 시스템에 방점이 찍혀있기는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1970~1980년대 그때, 자본 주도의 지구화 세력이 일방적으로 압승을 거둔 것이 아니라 그에 맞선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음을 밝히고, 그럼에도 왜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추출함으로써 오늘에 필요한 해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에 걸쳐 신자유주의가 처음 등장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과정을 ‘지구정치경제’적 시각에서 탐색한 이 책은 당시 지구 곳곳에서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초기 흐름에 맞서 투쟁했던 흐름을 분석해 '구조개혁 좌파'라는 세력을 규정하고 이들 ‘구조개혁 좌파’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즉 1970년대 칠레,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웨덴 등에서 대의민주주의 형식을 존중하며 자본주의 극복을 고민했던 ‘탈자본주의 구조 개혁 노선’의 ‘성공과 패배’의 기록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새롭게 분석한다. 신자유주의와 그 지구화 과정이 단순히 경제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생활 세계 - 국민 국가 - 지구 질서’라는 정치의 세 층위를 가로지르며 전개된 거대한 정치 변동이었음을 밝히려는 것이기도 하다. 1970년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전환 과정을 개별 국가가 아닌 지구 질서의 변동이라는 맥락에서 다루고 있는 이 책에 따르면, 결국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피할 수 없었던 필연적 현상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에 따라 충분히 ‘저지’할 수 있었던 사건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의 핵심 구조인 생산 수단의 소유, 경영 문제에 도전하고 대중 운동을 발전시켜 계급 세력 관계 자체를 바꾸”고자 했던 구조 개혁 좌파의 과제를 계승하되, 국민 국가의 정치에 갇혀 생활 세계의 권력 관계를 제대로 바꾸지 못했던 한계를 뛰어넘어 ‘생활 세계-국민 국가 -지구 질서’를 결합하는 새로운 정치 형태를 만들어낼 것을 제안한다.
신자유주의가 역사적 전환기에 선 지금, 이 책은 우리 시대의 문제를 분석 전망하는 데 필요한 지구정치경제적 시각과 함께 위기의 시대를 돌파할 새로운 ‘정치’에 대한 전망을 여는 데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지구 곳곳에서는 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흐름과 이를 저지하려는 세력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이 과정은 전후 질서 붕괴 이후의 새로운 질서 수립을 놓고 구조 개혁 좌파와 신자유주의 우파가 벌인 대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1970∼1973년의 칠레 인민연합 정부의 분투, 1970년대 영국 노동당의 모색과 논쟁, 1981∼1983년의 프랑스 좌파연합정부의 시도와 스웨덴 등지의 흐름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이러한 역사의 다른 가능성들을 제압하고 세력을 확장해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신자유주의 태동기의 윤곽을 제시한다.

2008년의 금융 위기는, 신자유주의 지구 질서가 완전히 붕괴한 것은 아니지만 그 전성기가 이미 끝났음을 공표했다.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세계사의 또 다른 전환기를 마주한 지금, 우리 시대의 정치 운동은 어떤 전망을 마련해야 할까? 이 책은 전후 사회민주주의의 복원 대신 탈자본주의 구조 개혁의 비전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새로운 지구 질서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복지 국가를 복원·확대하거나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신자유주의 지구 질서를 철저히 해체해야만 새로운 질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해체 작업은 기존 자본주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구조 개혁이다.
구조 개혁 좌파는 신자유주의의 전 지구적 시장 위계 체계에 가장 능동적으로 맞서 현상 유지가 아니라 현상 타파를 주창함으로써 좌파 정치의 구조적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이들은 국민 국가의 정치에 권력 거점들을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경제 정책 수단들을 창출하려 했다. 공공 부문을 확대하고 경제 계획을 발전시키려 했으며,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노동조합 운동의 역량을 성장시키려 했다. 이렇게 스스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 했으며, 새로운 질서의 출발점은 곧 계급 세력 관계의 역전이었다.
물론 앞에서 보았듯이, 1970~1980년대에 구조 개혁 좌파는 자신들이 만든 기회를 성공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길을 내주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과거의 오류를 직시하고 당시에 보여주었던 가능성을 제대로 실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 좌파 정치의 역사가 놓쳤던 정치의 또 다른 층위들을 환기해야 하는데, 저자에 따르면 이는 곧 “국민 국가의 정치를 생활 세계의 정치 및 지구 질서의 정치와 (재)접속하는” 것이다.

좌파 정치 운동은 생활 세계의 정치에서 출발하지만, 국민 국가의 정치에 본격 참여하면 생활 세계의 실천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만다. 2차 세계대전 후의 국민-대중 경제에서 거대 노동조합들이 등장해 제도화된 단체 교섭에 참여한 후 노동자들의 관심이 임금 교섭에 집중되면서, 과거의 노동 계급 공동체들은 사라지고 ‘미국식’ 대중 사회가 들어섰다. 영국 노동조합 운동이 AES 좌파와 연대해 산업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데 게을렀던 것도, 국유화 이후 칠레의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인민연합 정부와 대립한 것도 생활 세계 속의 권력 관계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던 구조 개혁 좌파의 한계를 보여준다. 대중 운동을 개혁하고 활성화하는 일부터 했어야 했다는 당시의 한계는 곧 오늘의 과제이다. 지금 노동 대중의 생활 세계는 더 파편화되고 대중 운동은 침체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급진적 구조개혁론자들이 이야기하듯, 탈자본주의 구조 개혁의 궁극 목표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민중 ‘자치’를 실현하는 데 있으며, 생활 세계 수준에서 이러한 능력들이 성숙해야만 국민 국가 수준에서 더 확대된 민중 자치를 실현할 수 있다. 저자는 대중 운동의 재구성이 필요하며, 그 방향은 노동조합, 협동조합, 문화 서클 등이 서로 결합된 노동 계급 공동체들의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시장’과 ‘국가’보다 우위에 서는 ‘사회’를 새로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 ‘사회’는 자본-임노동 관계나 국가 관료 기구의 거대 체계로부터 자율성부터 되찾아야 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자체를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저자는 구조 개혁 좌파가 일국 차원을 넘어서는 지구 질서 차원의 정치를 실현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가 혼돈의 출발점이며 초국적 자본과 대결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국민 국가 내부의 변혁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구 질서의 변화를 주창할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진보적 사회 변화를 추진하는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자본 진영의 전 지구적 정치만이 작동했다. 유럽 좌파 정부들은 신자유주의 지구 질서에 누가 더 잘 적응하는지 경쟁할 뿐이었다.
저자는 국민 국가의 틀을 넘어선 좌파 정치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 것은 라틴 아메리카의 좌파 정치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와 브라질 노동자당의 룰라 정부는 200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좌파 붐’, 즉 우루과이·볼리비아·에콰도르·파라과이·엘살바도르 등에서 좌파 정권이 등장하는 유례없는 상황을 맞아 공동 이니셔티브로 지역(대륙) 차원의 좌파 정치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고, 라틴 아메리카 각국의 경제 사회 통합에 박차를 가해 2008년 남아메리카 국가연합(UNASUR)을 창설했다. 라틴 아메리카 좌파 정부들은 현실 정치로 구현된 국제 연대를 갖추었으며, 이러한 좌파 주도의 지역 연합은 지구 질서 수준에서 북반구-남반구의 세력 관계를 바꿀 진지 역할을 할 것이다. 물론 라틴 아메리카 좌파 정부들의 노력은 아직 현재 진행형의 실험 단계일 뿐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국민 국가의 정치를 폐기하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국민 국가의 정치와 지구 질서의 정치는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 지구 질서 수준의 새로운 정치 무대를 구축하는 것은 오직 국민 국가들의 공동 이니셔티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역으로 좌파들이 이 새로운 초국적 무대에 진지들을 구축하게 되면 이것은 국민 국가 내의 세력 관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즉, 전 지구적인 구조 개혁이 시작되었는지 여부가 국민 국가 내에서의 구조 개혁의 승리를 상당 부분 결정할 것이다. 국민 국가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도 다시 한번 ‘지구 질서의 정치’가 실체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과 기득권 세력이 세계적인 정치체제와 경제운용 체제를 장악하여 자신들의 이윤창출에 이용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 대항세력이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네트워크와 정치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여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가 무엇이냐의 관점에 따라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가 사회구조 내에서 파생하는 이익집단간의 갈등을 수렴하여 조정하고 해결하는 구조라면 세계정치체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자본가들과 기득권 세력들은 이미 전세계적인 네트워크와 새스템을 구축한 만큼 이와 갈등관계를 일으킬 수 밖에 없는 노동자, 농민, 시민사회단체, 빈민과 서민, 각종 이해집단들 역시 세계적인 네트워크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며, 이를 위한 일국 내지 세계적인 차원의 정치적인 노력과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현재 수준으로 보면 이 과정이 오랜 노력과 시간이 투여될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내가 보기에 저자의 분석과 대안에 대해서 비판적인 부분은 두 세가지다. 하나는 저자가 자본주의 구조개혁의 전략으로 제시하는 '생산수단의 소유와 경영'의 개혁이 의미하는 바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지난 1970~80년대 유럽을 돌아보면 영국은 그렇다 하더라도 프랑스와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어느정도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성 문제나 정부부채, 실업과 양극화 문제가 다시 불거졌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들이 국유화나 사회화를 늘린다고 해결될 수 있을까? 두번째는 생활경제 정치를 통한 대중운동 활성화에 대한 저자의 관점에 대한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다분히 대중운동이나 민중자치를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경제규모의 규모나 사회의 복잡성, 대량생산과 무역체제, 다양한 이익간의 갈등을 고려하면 오히려 민중자치의 객관적인 조건은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문제도 있다. 민중자치만을 생각하면 구모를 줄이고 정치경제을 분산시키는 것이 최적의 방법이 아닐까? 마지막은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국민국가 내의 갈등을 너무 '진영 논리'로 쉽게 가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신자유주의는 정치의 박해(?)를 받아 사라질 수도 있고 박해를 극복하고 다른 방식으로 부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의 특성상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적절한 대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다른 가면을 쓰고 반드시 부활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는 일국 내에서든 지구적 차원이든 투기자본에 대한 규제에서부터 화폐경제나 통화체제, 공정거래와 무역체제, 제3세계의 양극화 문제, 기술관료의 문제, 일국 내 민주주의의 문제 등이 함께 검토되고 대안이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 2012년 3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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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시베리아 억류자, 일제와 분단과 냉전에 짓밟힌 사람들
김효순 지음 / 서해문집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일제의 식민지 침략과 약탈, 그 과정에서 자행된 강제노동, 징용, 학살 등을 다룬 <역사가에게 묻다>의 저자인 김효순씨의 또 다른 기록작품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와 세계 어디에서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현대사의 비극이 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1940년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일제 징병으로 만주로 끌려갔던 이들이 해방 뒤에는 소련군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수년 간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고국에 돌아와 38선을 넘을 때는 총알 세례를 받고 엄격한 심문을 받은 사람들. 식민 지배와 조국 분단,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가혹한 역사의 짐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던 사람,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바로 시베리아 억류자들이고 이 책은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최초의 공개기록이다.

<역사가에게 묻다>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이 책을 읽게 되면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 행정부, 국회가 얼마나 자국의 동포들과 시민들에게 무정하고 무책임한지 분노가 치밀게 된다. 뿐 만 아니라 언론사들과 학자들, 대학과 연구소, 지식인들의 미천한 역사의식과 이중성이 역겨워진다. 국가의 존재 이유, 민족을 떠드는 그들의 허울, 민중을 위한다는 사탕발림에 진절머리가 난다.
개인적으로 미국이 모든 외교정책을 자국과 자본가들 위주로 운영하면서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를 침략하고 착취함을 비난하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적어도 미국 정치인들과 행정부의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자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쏟는 정성과 노력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시간이 얼마나 많이 지났는지, 얼마나 정부관료의 입장이 어려운지, 돈이 많이 드는지 상관하지 않고 자국민 한 사람을 위험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죽은 시체를 자국의 땅으로 데려가 묻어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기 때문이다.
도대체 한국의 정치인들과 정부관료, 언론들은 무엇을 위해, 왜 존재하는 것일까? 그러고도 한국사회의 공동체가 계속 온존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1945년. 일제 말기 만주(현재의 동북 3성), 쿠릴 열도, 사할린의 일본군 부대에서 복무하던 조선인들이 있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제의 징병 정책으로 인해 끌려간 이들이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은 한때 승승장구하던 관동군을 궤멸시키고 만주 등지에서 일본군 60여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스탈린은 8월 하순, 포로들을 시베리아 각지로 이송하라는 극비 지령을 내렸다. 이른바 ‘시베리아 억류’로 알려진 사건이다.
문제는 일본군에 끼여 있는 조선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일본 군인으로 간주돼 혹한의 시베리아 등지에서 중노동을 하고 3, 4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1948년 12월 말 약 2,200명이 소련 화물선을 타고 흥남항으로 귀환했다. 만주나 북한이 연고지인 사람들은 가족을 찾아 떠났지만, 남한이 고향인 사람 500여 명은 이승만 정부에게 골칫거리로 남았다. 이미 남북에 별도 정부가 수립돼 38선을 경계로 팽팽하게 대치하던 때였다.

북한 당국은 남쪽과 이들의 송환을 공식적으로 협의하지 않고 1949년 1, 2월께 한밤중에 38선을 넘도록 했다. 지긋지긋한 일본 군대와 소련 포로 생활을 이겨내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들을 맞이한 것은 38선 경비 부대의 발포와 대공 수사기관의 엄격한 신문이었다. 더구나 조사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서도 오랜 기간 요시찰로 묶여 감시 받았다. 이어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목숨을 부지한 억류 귀환자들은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이 엄연히 계속되는 상황에서 소련 체험은 천형 같은 낙인이었다. 1990년 6월 한국과 소련이 수교를 맺기 전까지 이들은 자신들의 기막힌 처지를 내놓고 호소하지도 못했다.

억눌렸던 이들이 시베리아에서 당한 고초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시베리아 삭풍회]라는 모임을 결성한 것은 한국이 소련과 수교한 이후인 1991년이었다. 초창기에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노동증명서를 발급받는 일에 주력하면서 정부에 시베리아 억류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문제 해결을 요청했다. 그러나 되돌아 온 것은 성의 없는 회신뿐이었고, 그것은 정권이 바뀌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정부가 해준 것이 하나도 없다”며 분통을 터트리는 이들은 일본 총리에게도 피해 보상을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의 태도 역시 변함없었다. 일본 정부는 박정희가 1965년 졸속으로 체결해준 한일회담으로 모든 식민지배상이끝났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일본에서는 박정희가 저지른 지금은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자이면서 시베리아 포로 생활을 같이 했던 일본 억류자 단체와 교류하면서 서울, 모스크바, 도쿄를 오가면서 보상 촉구 운동을 함께 하고 있다.
이들의 삶은 한국 현대사에서 최대 피해자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당한 서러움과 고난에 비하면 이들의 삶은 의외라고 할 정도로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의 인생에 정부와 권력기관의 위로와 보살핌은 없었다. 전쟁의 사지로 끌고 간 일본이나 시베리아에서 노예 노동을 시킨 러시아는 이제까지 사죄와 보상 요구를 외면했다. 우리 정부도 이들의 하소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 적이 없다.”

국내에 시베리아 억류를 경험한 남쪽 피해자는 이제 30여 명 정도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저자는 그동안 억류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유족, 관련 단체 관계자, 학자, 국가기록원, 경찰국 등 정부기관의 관료, 정치인 등 한국과 일본 인사 수십 명을 만나 취재했다. 이들의 증언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우리 현대사에서 큰 공백으로 남아 있는 시베리아 억류 문제를 하나하나씩 풀어헤쳤다. 이병주, 이규철, 동안 등 생존자들의 육성과 치밀한 자료 분석으로 되살아난 역사의 현장은 참으로 생생하다..
저자가 개록해 놓은 기록이 보여주는 시베리아 억류자들의 고난어린 역정 속에는 해방 전후에 복잡했던 남북한-소련-일본 관계가 농축되어 있다. "1949년 초 갑자기 38선을 넘어 내려와 소련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일제가 패망한 후 소련으로 끌려가 노예 노동을 했을까? 일제의 식민 통치 피해자인 조선 청년이 왜 종전이 됐는데도 오히려 가해자 취급을 받아야만 했을까? 냉전이 격화되면서 침략 전쟁의 소모품으로 동원된 이들은 어떻게 버려졌을까? 이들의 억울한 사연이 이제껏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고 개인의 피해 사례만 나열하면, 야만의 시대에 짓밟힌 수많은 사람들이 털어놓는 또 하나의 넋두리 정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저자는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이들의 기구한 삶이 전개됐는지에 주목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러시아·중국·만주·미국을 포함한 이 지역의 20세기 현대사를 폭넓게 이해하는 게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현대사,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무관심 속에 묻혀있던 근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아마추어 학자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베리아 억류는 한 개인이 조사·연구해서 전모를 밝히기에는 너무 과제가 방대하다. 그러나 한참 늦었지만 이제라도 하지 않으면 이들의 역사는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힐 것이다. 정부, 정치권, 언론, 학계가 모르는 사실을 저자가 공개했으니 이제 그들이 저자의 기록을 토대로 나머지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시베리아 억류'가 벌어진지 70여년이 지났다, 시간이 오래된 것을 관련 사실을 조사하고 연구하기 어렵다는 단점도 있지만, 당시의 책임을 추궁당할까 두려워하는 이들이 현실에 없기에 시작하기에 좋은 여건이라는 장점도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의지와 노력 뿐이라고 생각한다. 국립대학이나 연구소라도 나서서, 개인적인 학자, 교수라도 나서서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라도 그 사실을 알게된 이들은 각자 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공부모임에서 <역사가에게 묻다>와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를 교재로 선택한 이유가 김효순씨의 활동을 알고자 함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인세를 보태어 그분의 활동에 도움이 되고자하는 마음도 있었다.
 
[ 2012년 3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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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에게 묻다 - 굴절된 한일 현대사의 뿌리 찾기
김효순 지음 / 서해문집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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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세기 말부터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시아 전역의 국가와 민중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끼친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지금까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반성과 사과, 그리고 후속조치가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반성, 사과는 커녕 상당수 학자와 정치인들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거나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고 일부 우익 인사들은 자국의 헌법을 바꾸어 '정식 군대'를 창설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한마디로 '불량(비양심적)국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왜 그럴까?
이러한 일본의 태도는 같은 전범국이었던 독일과 비교해보면 180도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셈이다. 독일은 냉전으로 인해 동,서독으로 갈라지는 굴욕을 당했으면서도 2차대전 패전 후 국내외 군사재판을 통해 상당수 전쟁범죄자들을 처벌하였고 진심을 담아 피해국가와 민중들에게 사과했으며 상당액의 배상금을 지불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2차대전에서 패배했음에도 동서냉전의 최전선, 소련과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막아내기위한 미국의 전초기지를 받아들이면서 피해국들보다 오히려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정치경제적 혜택을 받았다. 미국은 사회주의 이념의 태평양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한국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좌파진영의 정치사회 세력을 극심하게 탄압하였고 전쟁범죄자들을 대부분 석방하고 천황제를 제외한 기존의 인물들과 정부체제를 존속시켰다. 그리고 일본에 엄청난 원조를 제공하고 경제적 기회를 부여하였다. 일본은 1950년 한국전쟁과 60년대 베트남 전쟁 등을 통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천황제 군사국가 시대의 인물과 체제를 기초로하여 전후에도 보수우익 세력이 경제권력과 손잡고 수 십년 동안 국가권력을 배타적으로 지배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동서냉전의 최전선이라는 외적 조건으로만 보면 독일과 일본이 큰 차이가 없음에도 왜 전후 처리는 정반대일까? 나에게 있어 이 의문은 일본 근현대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풀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리고 한국 내에서 일본에 대한 감정과 경멸은 또 다른 어려움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사립대학에 대부분 존재하는 일본어학과가 서울대학교에 없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우리나라의 정치계, 학계 등 권력층의 일본에 대한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승만처럼 극렬하게 일본을 배타시하는 정치인이 있는가 하면, 박정희처럼 일본을 고향처럼 생각하는 정치인도 있다. 일제 식민지의 후퇴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 내에 식민지 하수인들과 친일파들이 득세하여 국가권력을 좌우했음에도 자신들의 아킬레스건 때문인지 오히려 일본에 대한 학구적 연구를 배제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책은 일본 내에서 전쟁범죄에 대한 전후처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 중에서 한일관계라는 맥락에서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 침탈에 대한 태도와 차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와 더불어 한국정부와 정치권이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 왔는지 알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준다.
 
저자 김효순은 "‘한일 신시대의 도래’라는 그럴 듯한 선언을 수없이 들어도 망언은 왜 계속되는 걸까? 일본 전역에 방치돼 있는 강제연행 희생자들의 유골은 고향 땅에 돌아올 기약이라도 있는 건가? 교과서 기술 등을 둘러싼 역사적 갈등을 극복 해소하는 방안은 없는가? 일본과 한국의 시민 사회는 어떤 노력을 해왔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와 같은 질문들에 답을 찾고자 굴절된 한일현대사, 뒤틀린 한일관계의 뿌리에 들어 가보고자 한다.

이 책에 나오는 일본 내 역사가나 활동가들은 평생 난마처럼 꼬인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사를 연구하거나 전후보상이나 재일동포 문제 해결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노력해온 사람들이다. 냉전과 분단상황에 휘둘리면서도 균형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던 이들의 오랜 경험과 시행착오와 식견이 역사를 보는 독자들의 안목을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야마다 쇼지] “일본인은 스스로 죄를 고백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야마다 쇼지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분석하는 문제의식은 과거의 어느 특정 시기에 한정돼 있지 않다. 그는 당시의 실상을 파헤치는 것 못지않게 ‘전후 책임’, ‘사후 책임’을 집요하게 추궁해왔다. 그의 문제 제기는 일본 정부의 책임 회피와 방관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국가 범죄’에 가담하고 묵인해온 일본 민중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는 '민중책임론'을 주저 없이 말한다. 그만큼 일본과 한국의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야마다 교수의 자세는 결기에 차 있다. 그는 잘못된 과거를 따지는 지식인의 자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말하지 않고 생각만 한다면 도피하는 것이다.”

[강덕상] “재일조선인의 역사 연구는 뿌리 찾기다”
재일동포 사학자 강덕상은 1923년 간토 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배후에 일본 정부의 조직적 관여가 있었음을 밝혀냈다. 1960년대 초반 도쿄의 국회도서관에서 우연히 미국이 보낸 ‘반환 자료’(미군이 점령 초기에 압수한 일본 육군과 해군의 문서)를 볼 수 있었고, 이를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성장한 그는 여느 조선 아이들처럼 자기부정과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다. 청소년기의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이겨내고 뿌리를 찾기 위한 역사 연구에 들어갔다. 그가 오랜 강사 생활을 거쳐 대학 교수로 취직한 것은 예순을 몇 해 앞둔 때였다. 재일동포로서는 그가 처음이다. 은퇴를 생각할 늘그막에 교수가 된 그의 역정은 식민지 출신이 옛 종주국에 남아서 겪었던 고단한 삶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야타 세쓰코] “시대가 연구자보다는 활동가를 원했다”
미야타 세쓰코는 전후 일본에서 한국, 조선에 대한 연구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진행돼왔는지를 말해줄 수 있는 중요한 증인이다. 조선에 대한 주류 학계의 관심이 아주 낮았던 1954년 와세다 대학에 들어간 그는 몇 가지 일이 겹치면서 조선사 연구의 분수령이 될 수 있는 여러 모임의 결성이나 사건에 참여했다. 그에게는 어느 대학 교수라는 직함이 없다. 수십 년 동안 일본의 수많은 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했다. 대학에 정착할 자리를 잡지 않은 것은 순수한 연구자보다는 활동가로서의 역할을 시대가 요구했기 때문이다.

[조동걸] “대학에서 근현대사 강의가 없었던 것 자체가 비극이다”
조동걸은 평생 독립운동사를 연구해온 국사학계의 원로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 후 일본에서 온 청구권 자금의 일부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꾸려졌을 때 초기부터 관여했다. 당시 주요한 구실을 했던 인사들이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때의 우여곡절을 얘기해줄 수 있는 소중한 증인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1949년 6월이 통탄스럽다. 반민특위가 와해됐고 ‘남로당 프락치 사건’으로 제헌의회에서 진보적 성향의 의원들이 쫓겨났다. 게다가 백범 김구까지 암살됐다. 이 때문에 일제 식민지 청산이나 독립운동사 정리 작업이 모두 중단됐다. 그 결과 대학에서 근현대사 강의가 오랜 기간 아예 없었고, 그 자체가 비극이라고 말한다.

[하야시 에이다이] “강제동원 희생자 위해 필사적으로 역사기록 남긴다”
하야시 에이다이는 다큐멘터리 르포를 쓰는 작가다. 징용으로 탄광에 끌려간 조선인, 자살특공대(가미카제), 일본군위안부, 이중 징용, 시베리아 억류자, 사할린에서의 조선인 학살 등 주제도 아주 다양하다. 그의 무기는 무엇보다도 끈질김이다. 피해자는 말할 것도 없고 가해자 편에 섰던 사람, 뭔가 감추려는 사람들을 찾아가 말을 건넨다. 답변을 회피하면 수십 번이라도 집요하게 찾아간다.
일본 국내뿐 아니라 러시아, 중국, 한국, 인도네시아, 뉴기니 등 광활한 지역을 찾아다니며 증언을 모은 그는 누구보다도 강제연행의 실상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강제연행은 없었다’거나 ‘당시 조선인은 법적으로 일제의 신민이었기 때문에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한 것뿐’이라는 우익의 주장을 들으면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김광열] “평생 찾아다닌 강제연행 기록, 이제 누가 하나?”
재일동포 김광열은 일제강점기에 지쿠호 탄전 지대에 끌려와 갖은 고초를 겪었던 동포들의 흔적이 사라져가는 것을 볼 수 없어 1969년 탄광 도시였던 다가와로 아예 이사를 했다. 발로 뛰어다니며 이름을 확인한 조선인 희생자는 약 2000명, 찾아낸 유골도 약 500위에 이른다. 그가 모아놓은 자료들은 이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가 구식 녹음기를 들고 다니며 증언을 수록했던 사람들은 다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77세에 [발로 본 지쿠호, 조선인 탄광노동의 기록]를 출간했다. 30년을 넘긴 집념의 결실이었다.

[우쓰미 아이코] “도쿄 군사재판에서 식민지 문제는 완전히 빠졌으니……”
우쓰미 아이코는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인 B·C급 전범 문제의 전문가다. 1970년대 20대 후반 인도네시아에 갔다가, 현지의 포로감시원이던 한 조선 청년의 기막힌 삶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전기가 됐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는 아직 이 분야의 전문가가 없다. 현실적으로 연구에 30여 년의 격차가 있는 셈이다. 더욱 난감한 것은 그 격차가 좁혀질 전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평생의 과제인 B?C급 전범 문제 해결을 위해 해외 취재를 하고 지원 활동을 벌인다.

[히다 유이치] “한일 시민단체, 과거사 문제 공유해야”
히다 유이치는 전후 보상 운동에 관여해온 일본의 활동가, 연구자, 단체들이 호응해서 만든 조직인 강제동원진상규명 네트워크의 공동 대표다. 재일동포 차별 등 인권 문제, 전후 보상이나 강제연행 희생자 조사 등을 다루는 시민운동에서 이 단체의 이름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각 지역의 전문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자료 입수, 피해 사례 조사, 유골 소재 확인 등에 주요한 구실을 했다. 식민지 피해 조사에서 한국의 정부 기관과 일본 시민단체 사이의 연계 활동이 처음으로 실현된 셈이다.

결국 이 책은 한일 양국의 여느 역사서에서도 찾을 수 없는 유일무이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부모임의 한 참가자가 제안하여 세미나 교재로 선택된 이 책과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은 현대사의 비극,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최초의 책 <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의 저자는 동일인이다. 저자는 일본 내 한일관계 역사가들의 연구 동기와 활동에 얽힌 중요한 뒷이야기를 일일이 증언으로 끌어내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이들과의 대화에서는 흥미로운 일화들이 잇따라 튀어나온다. 단지 재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들이다. 조선사 연구의 기인 야마베 겐타로와 조선인 운동가 김천해의 인연, 북한에서 사라진 재일동포 사학도 김종국, 해방 공간에서 쫓겨 다닌 독립운동가 김선기와 박진목, 포로감시원과 포로가 만나 화해한 이학래와 던롭,박병숙과 바커르 등 근현대사를 가로지르는 그러나 누구도 관심없었던 이들의 흔적도 찾아냈다. 그동안 방치해 온 한국의 근대사 연구에 있어 더 없이 소중한 자료일 것이다.


이 책이 대학이나 연구기관의 전문적 연구 성과물은 아니지만, 책 속의 증언과 사실관계 기록은 저자의 이야기처럼 뒤이어 한일 근대사를 연구할 사람들에게 큰 동기와 사실자료를 제공할 것이라는데 공감한다. 책 속의 역사가들이 정리한 것만 가지고 "왜 일본은 양심적이지 못한가?"라는 의문에 대한 연구결과를 쉽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사항들은 추측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같다.

그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로 2차 대전 후 동서냉전에 따른 패전국에 대한 전후처리에 있어 미국의 유럽국가인 독일과 아시아 국가인 일본에 대한 입장 차이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독일이 유럽사회의 일원으로 미국과 같은 문화권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독일의 자율성을 상당부분 인정했고 일본의 경우는 '미개한 동양권'이라는 전제에서 권위적이고 패권적인 방식식으로 처리한 것이라고 본다.
두 번째로는 독일과 일본의 내부 사정과 수준에 따른 차이.. 다시 말해 독일은 16~17세기 유럽 전역의 르네상스 부흥과 자유주의 사상의 교류, 민주주의 혁명과 파시즘의 태동, 민중들의 조직과 투쟁,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 등의 역사적 과정을 거쳐온 반면 일본은 중세시대의 막부통치에서 19세기 중후반 급속하게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사상의 교류나 민중들의 투쟁 없이 곧바로 천황제와 군국주의로 이행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두 가지 차이가 전후 독일과 일본의 자국내 전후처리와 민주주의의 정착에 그대로 반영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마지막은 문제해결을 위한 피해당사자국, 즉 우리나라의 태도와 노력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1965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전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부당한 한일협정'을 통해 배상과 후속조치를 생략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역대정권, 정치권, 학자, 언론 등은 일본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해방 후 동서냉전을 이유로 민중들의 뜻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군정이 한국의 지배권력에 배치한 친일파가 잔류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실제 상황이 그러함에도 미래에 대한 전망도 결코 밝지 않아 보인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 수구우익 세력들이 날뛰면서 초중고교나 대학에서 근현대사를 과목에서 삭제하려고 시도하는 행위들을 보면 우리나라의 근현대 역사가 뒤틀리고 회귀하고 있다는 절망감과 분노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지금부터라도 그동안 미진했던 근현대사 연구에 매진하고 일제에서 비롯된 만행과 버림받은 동포들에 대한 사실관계 파악에 주력한 후 각각의 사안에 걸맞는 국가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 2012년 3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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