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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미네르바의 올빼미 4
잉에 아이허 숄 지음, 유미영 옮김, 정종훈 그림 / 푸른나무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말하고 쓴 것,

그것은 바로 많은 독일 사람들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에요.

단지 그들은 입 밖에 내서 말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랍니다.”

 

 

  요약 。。。。。。。                                                        

        히틀러 치하의 나찌 독일이라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시민들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 투쟁했던 한 남매의 이야기를 기록한 이야기다. 저자인 잉에 숄은 자신의 두 동생인 한스와 조피의 이야기를 과장되지 않은 문체로 차분히 적어 내려간다.

 

        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독일 국민들은, 무능한 정부에 실망을 하고, 그들이 당하고 있는 경제적, 정신적 어려움을 일거에 해결해 줄 수 있는 강력한 정부를 갈망한다. 그렇게 탄생한 정부가 바로 히틀러 정부다.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 사람들은 히틀러를 보며 그런 기대를 했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시대가 잘못 흘러가는 것을 눈치 챘다. 한스 숄은 그런 인물 중 한명이다. 어렸을 때부터 히틀러의 전체주의가 어떻게 개인의 인격을 말살하고, 획일을 강요하는지,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억압되는지를 체험한 그는 대학생이 된 이제, 당당히 반체제 운동을 벌이는 투사가 된다.

 

        사실 그가 한 일은 무력투쟁이나 테러, 요인암살과 같은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런 분야에 관해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한 의과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리 많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그가 한 것은 체제가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일이었다. 물론 직접 나서서 군중 앞에서 외친 것은 아니었고, 전단지를 만들어 돌리거나, 한 밤중을 틈타 도시의 벽에 크게 ‘자유’를 쓴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불법적인 정부는 단지 ‘진실’만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협을 느끼는 법, 히틀러의 친위대는 한스와 그의 동생과 동료들을 체포했고, 역시나 불법적인 재판을 통해 그들을 살해하고 만다.

 


  감상평 。。。。。。。                                                     

 

        히틀러라는 한 사람의 미치광이로 인해 시작된 전쟁은 수 백 만 명의 사상사와 상상할 수 없는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남겼다. 독일은 전후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만 했고, 오랫동안 전쟁을 일으킨 나라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살아야만 했다. 어쩌면 그것은 오명이 아닐지도 모른다.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 국가가 치러야할 당연한 대가일 수도 있다.

 

        그것은 단지 히틀러라는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그에게 정권을 맡긴 독일국민 전체가 함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독일은 적어도 표면적으로 볼 때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있는 것 같다.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나라, 유대인 대학살을 사죄하기 위한 기념관을 국가에서 운영하는 나라, 나찌의 상징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범죄가 되는 나라, 이런 나라가 독일이다.

 

 

        떳떳하지 못한, 그래서 한 편으로는 숨기거나 왜곡시키고 싶은 유혹도 들 만한 과거지만, 그들은 결코 묻어두지 않는다. 이 책도 그런 일환이다. 다만 이 책에서는 단지 부끄러운 과거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작지만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과거가 있음을 보여준다. ‘백장미단’이라는 이름으로 나찌의 반인륜적이고 불법적인 정권에 대항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내용 말이다.

 

        이런 책을 독일 중 고등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독일이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거나 왜곡하지 않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결코 그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그에 대한 저항이야말로 진정으로 자랑스러운 일임을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우리 옆에 있는 섬나라와는 어쩌면 이렇게 천지차이일까. 식민지배가 조선의 경제를 발전시켰고, 위안부는 없었다고, 매년 패전기념일이 되면 최고 통치권자가 A급 전범들을 참배하러 가는 나라. 이게 일본이라는 비정상적인 나라의 현실이다. 어디 일본뿐이랴. 불법적으로 정권을 탈취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자유를 억누르며 독재정치를 했던 전직 대통령, 쿠데타를 일으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전직 대통령을 찬양하며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우리나라에는 버젓이 살아 있다. 아니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목소리를 높여대지 않는다. 

 

        이야말로 히틀러 정권이 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쓰러진 독일경제를 되살린 현명한 통치자였다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책을 읽고 나면 독일의 철저한 자기반성의 모습과 일본과 한국의 극우파들의 후안무치한 두꺼운 얼굴이 대조되어 씁쓸한 기분마저 든다.

 

 

       우리나라의 중 고등학생들에게도 꼭 읽어주었으면 하는 책. 생각보다 어려운 내용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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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자궁 미궁 이야기
이즈미 마사토 지음, 오근영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미궁에서는 중심에 이르는 의미는 물론이고 중심에 이르는 과정,

다시 말해 사람이 중심으로 향한 길을 나아가는 행위의 의미도 중요하다.

사람은 미궁 안으로 길을 더듬어가면서 그 더듬어간다는 행위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떠안게 되는 것이다.

 

 

  요약 。。。。。。。                                                      

        우리는 흔히 풀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미궁에 빠졌다’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미궁’이 무엇이기에 거기에 빠지면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걸까? 그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미궁’이라는 것이 그리스 신화에 처음 등장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이 책 ‘우주의 자궁, 미궁 이야기’는 바로 그 ‘미궁’을 소재로 쓴 역사책이다. 역사책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치사 중심의 내용 전개가 아니라, 순수하게 ‘미궁’이라는 소재에 국한한 역사를 쓰고 있기 때문에, 역사책 하면 나폴레옹, 알렉산더 이런 영웅 중심의 이야기나, 고구려의 역사 영국의 역사 이렇게 한 나라의 역사 이야기만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약간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목차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저자는 미궁이라는 것이 처음 탄생했던 때부터 현대의 미궁 개념에 이르기까지의 2,000년을 훌쩍 뛰어 넘는 긴 시간을 추적해 나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궁이라는 소재의 본래 의미가 무엇이며, 그 의미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특별한 감정의 이입 없이 차분하게 서술한다.

 

  감상평 。。。。。。。                                                    

        책을 읽으면서 가장 새롭게 다가왔던 부분은 역시 ‘미궁’과 ‘미로’의 구분이다. 그 둘을 별 차이 없이 섞어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저자는 그 둘은 전혀 다른 개념이라고 말한다. 정리하자면 미궁은 처음부터 중심부까지 단 하나의 길로만 되어 있어서 그 길을 따라가면 길을 잃는 따위의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중심부, 혹은 출구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여러 막다른 길들을 만들어 놓은 것은 미궁이 아니라 미로라는 것이다. 혹시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은 손? ㅎㅎ


 

        이 책의 약간은 ‘자극적인(?)’ 제목은 미궁이 우주의 ‘자궁’과 같이 깊은 의미를 가지고 만들어졌다는 저자의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미궁이란 단지 거대한 함정이 아니라 ‘성장’과 ‘통과 의례’와 같은 극기의 과정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하나의 표지라고 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궁은 자궁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이런 설명은 충분한 증거로서 뒷받침되고 있지 않다는 점은 아쉽다. 저자가 책을 쓰면서 참고했던 수많은 미궁도들은 단지 그림일 뿐이지, 설명을 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해석하기 나름이다. 기록이 아닌 유물들만으로는 그 사이의 빈 공간을 메우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물론 저자는 미궁 연구가로서의 추리력과 적절한 상상력으로 그 틈을 메우고자 하지만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그 상상력에는 여전히 ‘고대의 모신(母神) 숭배사상’과 같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내용들이 영향을 주고 있다.


 

        역사책을 읽는다는 건 언제나 그렇듯 흥미로운 작업이다. 적게는 수 십 년, 많게는 수 천 년 동안 일어났던 일들과 그 기간 동안 살았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기회니까. 또, 대개 역사야 말로 사람을 정말로 지혜롭게 만들어주는 법이다.

 

        그리 어렵지 않은 책이라, 시간이 날 때 두고 틈틈이 읽어볼만한 책. 단 컬러 그림이 많아 값이 약간 비싼 것이 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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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대리인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3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2년 6월
평점 :
품절


 

 

 

“민심이라고? 너는 민심을 몰라.

런 고상한 행동만 하면, 로마는 수도원이 돼버려.

사람들은 한때는 감동도 하겠지만 금방 싫증이 나버릴 거야.”

 

 

 

 

[ 요약 ]

 

        르네상스로 알려진 시기의 종반부를 살았던 네 명의 교황에 관한 이야기다. 비오 2세, 알렉산데르 6세, 율리우스 2세, 레오 10세가 그들이다. 네 명의 인물은 언급된 순서로 교황의 자리에 오르는데, 각기 나머지의 교황들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면들을 지니고 있다. 흔히 많은 교황들이 거의 무색무미의 재위 기간들을 보내다가 사라져버린데 반해, 이 네명의 교황들이 연이어 올랐던 이 시기는 좀 이례적이라고 하겠다.

 

         먼저 비오 2세는 노구의 몸을 이끌고 다시 한 번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려 했던 교황이다. 이전에 마지막으로 일어났던 십자군과는 무려 200년이 넘는 시차가 있었다. 시대는 물론 사람들도 변해버린 상태. 이미 민족국가의 개념은 거의 기정사실화가 된 그 시대에 과연 새로운 십자군의 결성은 가능했을까.

         알렉산데르 6세는 사보나롤라라는 이름을 가진 피렌체의 수도사와의 대결로 알려진 인물이다. 또, 체사레 보르자라는 ‘아들’(양자도 아니고 친아들)을 통해 이탈리아의 지배를 꿈꿨던 인물이기도 하다. 나나미 여사는 알렉산데르 6세와 사보나롤라 사이에 오고갔던 서신 등을 근거로, 알렉산데르 6세의 교활함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율리우스 2세는 즉위 초부터 직접 전장터를 돌아다녔던 교황이었다. 물론 그의 개인적인 용명을 떨친 적은 없었지만(그러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다.) 제법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율리우스 2세의 공적은, 이탈리아 반도에 영향력을 끼치려는 강대국들(주로 프랑스나 스페인, 독일 등의)의 ‘독’들을 또 다른 ‘독’과의 연합을 통해 물리쳐 낸 일이다. 그의 재위 기간 내에 적과 파트너들은 계속해서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율리우스 2세의 연극에 배우로서 참여하는 듯 했지만, 결국 그가 죽기 직전 최후로 남겨진 것은 전혀 변하지 않은, 아니 좀 더 악화된 것 같은 이탈리아의 상태였다.

 

        마지막인 레오 10세는 시오노 나나미가 ‘마지막 귀족적인 교황’이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세 사람의 교황의 재산(전임 교황인 율리우스 2세의 저축금, 자신의 재산, 다음 교황이 떠맡은 빚)을 탕진한 인물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통치를 하는 내내 물 쓰듯 돈을 낭비했던 인물이다.

 

 

         이런 인물들이 ‘신의 대리인’의 자리에 올랐던 시기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시오노 나나미는 딱딱한 ‘설명’이 아니라 리드미컬한 ‘이야기’로 이 시기를 잘 포착해내고 있다.

 

[ 감상평 ]

         네 명의 개성 있는 교황들을 통해,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는 당시의 독특한 시대적 분위기를 그려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채 500페이지가 안 되는 분량으로, 그것도 많은 내용을 담기에 ‘효율적’인 ‘설명’이라는 방식이 아니라, 그 반대인 ‘이야기’라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그 당시 상황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저자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중요한 포인트들을 잡아냄으로써, 하나의 이어지는 이야기로 구성해낸다는 쉽지 않은 작업을 훌륭하게 해 내고 있다.

 

        군데군데 시오노 나나미 특유의 강력한 반 종교적 사관이 엿보인다. 예컨대 저자는 글의 시작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독설’을 퍼붓는다.


        ‘지나친 금욕은 흔히 광신의 온상이 된다. 금욕생활로 몸은 수척해지지만, 상상력은 오히려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정의라고 믿고, 자신이 믿는 것은 모두 신의 계시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신의 선택을 받은 자신이 그 계시를 지상에 구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들의 가슴을 활활 타오르게 한다.’


        한 인물의 평생의 작업을, 저자는 배고픔으로 인한 정신착란쯤으로 평가절하 해버린다. 그것도 저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정세판단과 어긋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이쯤 하면 슬슬 시오노 나나미의 강력한 반 종교적 성향에 인상부터 찌푸려진다. 저자가 쓴 20권이 넘는 책들을 직접 읽어 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저자의 종교분야에 관한 독선과 아집은 점점 완고해져만 가는 듯 하다.

 

 

        역시 역사란 단편적으로 알아서는 부족하다. 책을 읽기 전에 서로 다른 세 권의 책을 통해 이 책에 등장하는 교황들 중 세 명에 관해서는 이미 접해 봤었지만, 그들이 이런 식으로 연이어 교황이 되었다는 것과, 그들의 정책 사이에 나타나는 중심추의 독특함, 그리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 등에 관한 지식은 이 책을 통해서 정리하게 되었다. 용케도 흥미로운 시기를 잘 포착해 이야기로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를 싫어하는, 아니 때때로 조롱하고 경멸하는 사람이 쓴 기독교 인물에 관한 이야기.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시종일관 독설과 비난일색인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한 사람(비오 2세)만 빼고는 나머지 교황들이 순수하게 ‘종교적인’ 인물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꼭 교회 역사에 관심이 있지 않더라도, 르네상스 시기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해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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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4 - 그리스도의 승리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4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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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이 어려운 것은,

개혁으로 손해를 보는 기득권층은

개혁하면 손해라는 것을 금방 알기 때문에 격렬히 반대하는 반면,

개혁으로 이익을 볼 터인 비기득권층은

개혁이 뭐가 어떻게 이로운지 몰라서

당분간은 지지하지 않고 상황을 관망하거나 미지근하게 지지하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1. 요약 。。。。。。。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세 아들 -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스 -과 두 명의 조카 -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 -였지만 한 차례의 숙청과 내부 갈등으로 최후의 계승자가 된 것은 둘째인 콘스탄티우스였다. 위기의 제국을 홀로 통치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을 깨달은 그는 처음에는 사촌인 갈루스에게, 그리고 그가 숙청된 후에는 갈루스의 동생인 율리아누스에게 제국 방위의 책임을 나누어 준다.

 

     콘스탄티우스가 죽고 제위를 계승한 것은 율리아누스였다. 이제까지 철학도였던 율리아누스는 생각보다 제국 통치의 과업을 훌륭하게 수행했지만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수행하던 중 죽음을 맞는다. 신하들은 호위대장이었던 요비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고, 7개월 간의 짧은 통치를 하고 급작스런 죽음을 맞은 요비아누스를 대신해 황제가 된 것은 순수하게 계르만족의 혈통이었다는 발렌티니아누스였다.

 

     11년간의 제위 기간을 북방의 이민족들과의 싸움으로 보낸 발렌티니아누스의 뒤를 이어 선제의 아들인 16살의 그라티아누스가 제위에 오른다. 이 시기 훈족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이민족들의 등장으로 마치 도미노처럼 동고트족이 서고트족의 영역으로 밀려들어왔고, 서고트족은 로마쪽으로 밀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제국의 동방을 책임지던 선황의 동생 발렌스가 죽고, 제국 서방을 책임지던 그라티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를 발탁해 그에게 동방을 맡긴다. 이후 그라티아누스가 반란으로 죽임을 당하면서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전체의 황제가 된다.

 

     제국을 위협하는 이민족들의 침입이 점점 더 강력해지는 것과 동시에, 이 시기를 특징짓는 것은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였다. 율리아누스가 로마의 전통 종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애썼던 것은 예외적인 움직임이었다. 388년 테오도시우스는 로마 원로원에서 기존의 로마 종교의 공식적인 폐지를 결정한다.

 

 

2. 감상평 。。。。。。。        

 

     로마 제국은 착착 그 최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역사의 결과를 아는 후세인들이 보는 관점이고,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은 당면한 위기를 하나씩 대처하기 위해 애를 썼다. 출신도 배경도 성장환경도 다 달랐던 당시의 황제들이 동분서주하며 제국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후세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로마 말기의 황제들은 황궁 안에서 먹고 마시며 제국의 안위 따위는 걱정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열네 번째 책의 부제를 ‘그리스도의 승리’라고 붙였다. 물론 그녀의 이전 책들을 읽었다면 이 표현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 자신은 종교문제에 관해 꽤나 중립적인 입장을 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표현에는 묘하게 비꼬는 뉘앙스가 담겨있는 듯하다. 진짜 그리스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따른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꽤나 늘 자기들끼리 싸우면서도 기독교를 제국통합의 기치로 삼고자 했던 황제들 덕분에 결국 황제들까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제국의 종교가 되어버렸다는 식이다.

 

     계속 느끼는 것이지만 유물론자인 저자의 종교적 이해는 대단히 제한적이고, 따라서 이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생각이 더 자주 푸념처럼 등장하고 만다. 결국 대단히 피상적인 관찰과 해석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쯤 해서 저자가 이 시리즈를 내면서 자신을 역사가가 아니라 아마추어 역사학도로 소개하는 목적이 짐작이 간다. 역사가로서 역사책을 저술한다면 그가 결코 절대적으로 객관적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객관적 관점을 띄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마추어 역사학도라면 굳이 그런 가면을 쓸 필요가 없다. 책 자체는 역사가처럼 서술하면서 독자들의 저항감을 낮춰두고는 틈틈이 자신의 생각을 객관적 서술인 것처럼 집어넣는다. 그래도 누군가 이에 반론을 제기한다면 자신은 전문가가 아니라 아마추어일 뿐이라고 한 발을 뺄 수 있다. 대단히 영리한 자리잡기이다. 아무튼 저자는 영적 측면에 대한 이해는 아예 포기하고 있는 듯 한데, 이 점은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한 축을 스스로 내차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시오노 나나미가 책을 재미있게 쓰고 있지 못하다(책 자체가 아니라 책을 쓰는 저자의 심적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애착을 갖고 쓰고 있는 로마가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는 시기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날이 언제인지 아는 사람의 마음과 비슷할까. 고대의 많은 역사가들도 비슷한 마음이 들었는지, (자기가 생각하기에) 책의 대상이 되는 국가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 붓을 꺾어버린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꿋꿋이 이야기를 연결시켜나가고 있는 나나미 여사의 노력에는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 열네 번째 책은 ‘전체’를 설명하기 위한 ‘여러 부분들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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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버러지 2006-07-04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나미의 편향적 역사관점은 독자인 나로서도 이제 슬슬 짜증이 나게 만든다. 그녀는 마치 로마는 원래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로마다와야 하고, 14권의 로마답지 못한 기독교 동화과정은 로마사에서 없었어야 할 내용으로 간주하고 있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어찌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마는 극단으로 흐르는 것은 오히려 공감을 잃게 만드는 약점이 있다

노란가방 2008-10-01 19:05   좋아요 0 | URL
저도 동의합니다.
이전 책들에서 저자 스스로 강조하고 있는 원칙을 깨뜨리고 있죠.
후세의 관점으로 과거를 억지로 재단하려는 태도..
 
암베드카르 평전 - 간디와 맞선 인도 민중의 대부
게일 옴베트 지음, 이상수 옮김 / 필맥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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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양이나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고

먹을 물을 구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 내가 이 땅을 나의 조국이라고 부르고

이 종교를 나의 종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1. 서평

 

        간디와 싸운 혁명가. 책을 읽고 난 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다. 책 제목에 ‘평전’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암베드카르라는, 약간은 생소한 이름을 가진 사람의 일대기이다.

 

         간디가 힌두교라는 큰 정신적 틀 안에서의 인도인들의 독립을 추구했다면,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의 입장에서 인도에 새로운 질서를 추구했다. 불가촉천민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 안에서 가장 낮은 지위를 가지고 있던 이들로, 말 그대로 만지는 것 자체가 불결해지는 사람들이다.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나 성장과정에서 여러 멸시와 고생을 하면서 자신과 같은 불가촉천민들을 해방하고자 평생을 바쳤던 인물이다.

         일견 굉장히 과격한 투쟁을 전개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암베드카르는 적극적인 입법투쟁을 통해, 또 그 자신이 국회의원으로, 정당 활동을 통해 불가촉천민들을 엄격한 신분적 제한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하지만 간디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국민회의 측의 반발, 기득권자들의 적대활동으로 사실상 그의 투쟁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제한적으로 제제의 완화는 있었지만(공동우물의 물을 마실 수 있다던가, 저수지를 이용할 수 있다던가 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나오지 못했다. 여전히 불가촉천민이 만든 학교 급식을 먹지 않겠다고 반발을 하는 인도인 학생들이 있다는 뉴스가 해외토픽에 올라오는 것이 현실이다.

 

         독립 후 인도의 초대 법무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인도 헌법의 기초를 놓기는 했으나, 그 때는 그의 투쟁력이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후였다. 오죽하면 늘 부딪혀왔던 간디의 국민회의 측의 지원으로 국회의원 의석을 차지하고, 법무장관이 되었을까. 정적들은 그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을 때에야 그에게 ‘자리’를 주었다. 개혁의 좌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베드카르는 여전히 마하르들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남아 있다. 열성적인 운동가, 정치가, 행정가, 종교지도자. 불가촉천민이라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유럽 등지에서 몇 개의 학위를 따 냈고, 복잡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학술적인 연구를 통해 논문을 발표했던 학구열에는 감탄을 할 수밖에 없다.

 

        다만 자연과학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나치게 영적인 부분을 가볍게 다루는 그의 태도는 주의해야 할 것이다. 마치 기독교를 합리주의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던 구(舊) 자유주의자들의 시도를 보는 듯 했다. 이런 점이 그의 또 다른 한계가 아니었을까? 암베드카르는 간디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2. 종합평가

 

난이도

★★★☆☆ 3.0

'생소함'은 어렵다;;

흥미도

★★★☆☆ 3.5

읽어나갈 수록 흥미가 생긴다

글솜씨

★★★☆☆ 3.0

차분하게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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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지족 2007-10-02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도 버린 사람들" 등과 같은 불가촉천민에 대한 다른 책을 더 읽어 보시면 관점이 달라지실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여전히 간디는 더없이 훌륭한 분이지만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간디의 한계성이 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암베드카르 박사의 삶을 아는 것이 대한민국에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_^

노란가방 2007-10-02 20:46   좋아요 0 | URL
약자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
온통 자기 욕심에만 밝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국 정치문화에선 참 그리운 모습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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