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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의 신화 - 일본 역사 교과서, 미디어의 정치학
사토 다쿠미 지음, 원용진.오카모토 마사미 옮김 / 궁리 / 2007년 8월
평점 :
미주리호에서의 ‘항복’이 아니라 옥음방송의 ‘종전’을 기억하고 싶었던 일본 국민에게
옥음사진은 존재하지 않으면 창조해야 할 필요가 있는 증거사진이었던 셈이다.
1. 요약 。。。。。。。
일본에게 있어서 8월 15일은 종전일인가 패전일인가. 한 글자 차이지만 그 의미는 크게 다르다. 종전이라는 말은 우열의 판단이 배제된 어휘지만, 패전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전공인 미디어 연구를 통해 1945년 이후 일본의 미디어들이 어떻게 그 날의 기억을 윤색하고 창조해왔는지를 밝혀낸다.
사실상 8월 15일에는 소위 옥음방송(일왕의 종전교서를 라디오를 통해 내 보낸 것)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교서가 실제로 녹음된 것은 8월 14일이었고, 실제적으로 항복문서에 조인을 한 것은 9월 2일이었다.(그래서 미국이나 유럽 쪽 연합군 측에서는 9월 2일을 대일전승기념일로 기념한다) 우익은 우익대로 원자폭탄을 강조하며 스스로를 피해자로 둔갑시켰는가하면(왕의 결단으로 전쟁이 ‘끝났을’ 뿐이라는), 좌익은 좌익대로 당시 왕과 각료들을 파시스트로 몰아붙이며 그들로부터 해방된 날(그러니까 소위 민중들은 파시스트의 압제 아래 있었다는, 어찌 됐건 대중은 죄가 없다는 식)로 8월 15일의 이미지를 ‘창조’해 낸다.
원자폭탄, 야스쿠니 신사 참배, 교과서 등이 복잡하게 얽힌 이 문제를 풀어나가며, 저자는 일본인들이 좀 더 정직하게 그 날을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8월 15일을 일본 고유의 명절인 오봉과 함께 전몰자들을 추도하는 날로 기린다면, 9월 2일은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으로서 그에 대한 반성을 하는 날로 말이다.
2. 감상평 。。。。。。。
우리나라에서는 ‘광복절’이라고 부르는 그 날. 별다른 생각 없이 그 날을 그렇게 생각해 왔었다. 이런 질문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무엇을 기준으로 그 날을 광복절이라고 부르는가?’ 일왕이 라디오로 ‘종전교서’를 발표한 것을 기준으로? 남의 나라를 무단으로 점령해 수십 년 동안 갖은 약탈을 하다가, 이제 간다고 말하면 그냥 그 날을 기뻐하는 건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부분을 일깨워준 책이다.
종전교서를 기준으로 한다면 실제로 그것을 반포한 8월 14일을 기념하는 것이 옳다. 교서에도 날짜는 14일로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로도 일제는 이 땅에서 금방 물러간 것이 아니다. 실제로 중국 등지에서는 여전히 일본군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얼마 전 읽었던 장준하의 ‘돌베개’에도 실려 있듯 일본군은 그날 이후에도 임시정부의 환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은 8월 15일의 신화, 즉 그들의 천왕이 거룩한 결단으로 국민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종전을 선택했다는 환상을 각종 미디어를 통해 주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미국 전함 미주리 호 갑판에서 이루어졌던 항복문서 조인식은 차차 잊혀 갔다. 이제 일본은 8월 15일에는 A급 전범들까지 합사 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각료들과 국회의원들이 참배를 하며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날로 삼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침에 생중계 되는 기념식 말고는 그냥 노는 날일 뿐이다. 답답한 노릇이다.
왜 이런 책이 일본인들에 의해 쓰일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 지 아쉬울 뿐이다. 특히 책의 말미에 일본의 초중고 교과서들을 분석하며 어구 하나, 문장 하나에 담긴 전제들을 상세하게 밝히는 부분은, 독도 문제, 정신대 문제, 새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가 나올 때에만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우리나라의 모습과 너무나 비교가 되어 무안할 정도였다. 이미 일본이 다 연구해 나름대로의 논리를 확고하게 구축 한 뒤 문제를 공론화 시킬 때에야 연구를 시작하는 식으로는 언제까지나 당하기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