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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임레 케르테스 지음, 박종대, 모명숙 옮김 / 다른우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하나의 단계가 끝나고, 그것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 다음 단계가 바로 다가온다.
그런 식으로 해서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그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이해하게 된다.
줄거리 。。。。。。。
독일에 의해 강제 병합된 헝가리에 사는 유대계 소년 죄르지. 악명 높은 반 유대 정책에 의해 주거나 이동의 자유가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 나름대로는 어렵지만 꿋꿋히 살아가고 있는 그 가정에도 마침내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가 강제 노역장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다가온 위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소년 역시도 강제 노역에 동원되기에 이른 것이다. 어느 날 아침의 버스에서 갑자기 강제로 끌려 내려진 소년은,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빠지게 된다.
소년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간다. 고작해야 1, 2초밖에 안 되는 순간 다행히도 가스실이 아닌 노역장으로 배정을 받게 된 소년. 이제부터 힘겨운 수용소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몇 차례의 이동을 통해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소년의 몸에는 상처가 생기고, 정신 세계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채 하루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수용소 생활. 삶과 죽음의 경계선 상에서, 소년은 하루하루를 버텨나간다.
감상평 。。。。。。。
강제 수용소와 가스실이라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지르는 독일의 정신병자 집단들. 그들에 의해 희생을 당한 수 백 만 명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오늘날까지도 인간이 과연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로 남아 있다. 혹독한 수용소 생활에서 살아남은 한 명의 소년은, 이제 자신의 남은 일생을 ‘증인’으로서의 삶을 사는데 바치기로 작정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책이 바로 ‘운명’이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기록된 책이다.
그 끔찍한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결코 흥분하거나 과격해지지 않는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기록된 이 책은, 마치 저자 자신의 일기장을 넘기는 것처럼, 매우 사실적으로 상황을 묘사하면서도, 결코 감정적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나 담담한 설명에 잠시 저자가 경험했다는 그 이야기의 진정성이 의심되기까지 할 정도이다. 무엇이 저자로 하여금 이러한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을까?
저자는 인생을 하나의 ‘단계’에 비유한다. 사람은 각 단계를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단계에서 그 단계의 목표에 도달하게 되면, 또 다른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모든 단계를 한 번에 다 경험하는 일은 없다. 오직 한 번에 하나의 단계를 거칠 뿐이다. 저자는 자신은 매 단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그 단계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고백한다. 이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지옥과 같은 상황이었지만, 저자는 그 안에서 행복(어쩌면 정확히 말하면 ‘성취’)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는 매 순간 자신의 삶의 주인이었고,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수용소 생활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일견 매우 역설적으로 들리는 저자의 이 말은, 극한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면서, 인생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저자는 보통의 사람이 보지 못하는 보다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이 견디기 힘들 것만 같은 어려움을 극복해 낸 저자의 경험은, 오늘날 작은 문제에도 세상이 다 무너지기나 한 것처럼 지나친 감정의 저조기에 빠져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듯싶다. 고압적이거나 설교 투의 문체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자신의 체험을 담담하게 써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저자는 어떤 연설보다도 강하고 진한 메시지를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