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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 하 ㅣ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2
박지원 지음, 길진숙.고미숙.김풍기 옮김 / 그린비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상권이 산해관 까지의 길고긴 여정이라면, 하권은 산해관에서 연경으로 다시 황제가 있는 열하까지의 길을 다녀오는 숨가쁜 여정이다. 상권에 비해서 하권은 여정이 바쁜 날들의 연속이다. 특히 연경에서 황제의 명령으로 열하까지오라는 전갈을 받고 사흘밤낮을 가리지 않고 9개의 강을 건너야하는 숨가쁜 여정은 이 책의 백미였다. 이러한 바쁜 여정속에서도 연암은 중국의 지식인들과 필담으로 날을 지셌다. 그리고 연암과 필담을 나누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연암과 헤어지는 것을 너무도 슬퍼했다. 마치 피를 나눈 친구와 같은 정경을 연출하며 그들은 연암을 떠나보냈다. 중국인과 한국인이라는 국경선이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한문이라는 소통의 도구는 그들과 생각을 나누고 밥을 먹다가 밥알이 튀어나오는 웃음을 던져주기도 했다. 언어라는 소통의 도구가 청나라사람들과 조선사람 연암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이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된 사실은 우리나라의 특산물이 인삼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의 부채와 청심환은 중국인들이 그 토록 원하는 조선의 보물이었다. 그중에서 조선의 청심환 중국인들이 그토록 탐내는 보물이있다. 심지어는 중국의 한 노파가 연암 일행이 참외값도 내지 않고 참외로 값을 달라는 자신을 먹던 참외를 던지는등의 무례를 저질렀다고 하소연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연암에게 청심환을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조선 사신일행에게 청심환을 얻고자하는 잔꾀였을 뿐이다. 그리고 조선의 사신을 만나면 중국인들은 끊임 없이 청심환을 달라고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의문이 생겼다. 중국에도 청심환이 있고 청심환의 원조는 중국이아니던가? 그런데 왜? 조선 사신에게 청심환을 요구했을까?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중국은 지금만 가짜기 많았던 것이 아니었다. 중국 청심환에는 가짜도 많았다. 그러나, 조선의 청심환은 궁제 즉, 나라에서 만들어 동짓날에 왕이 신하들에게 하사해주었다. 국가에서 청심환의 품질을 책임지고 관리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조선의 사신은 100~200개정도의 청심환을 가지고 중국에가서 여비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청심환 한 환에 3돈 은에 거래되었다. 명품은 그져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끊임 없는 품질관리만이 명품을 탄생시키다. 얼마나 그 품질이 좋았으면, 조선의 청심환에는 바다 깊은 곳에 있는 녹지 않는 얼음 즉 고빙(古氷)이 있다는 소문까지 만들어졌을까?
한가지더! 조선의 금이 청나라에서 유명했다고 한다. 연암집에 피서산장에서 청나라 사람이 연암을 보고 금이 있느냐고 묻자, 연암은 조선에는 금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청나라 사람은 열하의 궁전의 금은 조선의 금이라고 되받아친다. 그렇다 조선후기 광산 개발의 붐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금이 열하까지 흘러들어가서 조선사람을 보면 금이 있느냐고 물었던것이다. 열하일기를 살펴보자.
압록강을 건너기 전, 박천 땅에 이르러 길 옆에 말을 세우고 버드나무 밑에서 땀을 훔치고 있을 때였다. 한 떼거리의 사람들이 남부여대를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모두 8~9세 되는 사내와 계집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품이 마치 흉년에 정처 없이 떠들면서 빌어 먹느라 유리걸식을하는 것 같았다. 내 이를 이상히 여겨서 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성천 금광으로 가는 중이라고 한다. 손에 든 기구를 살펴보니 나무 바가지 하나, 포대 하나, 끌 하나분이다. 끌로 흙을 파낸 다음, 포대에 담아서 바가지로 이는 것이다. 온종일 흙 한포대만 파내면 별로 애쓰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단다. 조그만 계집아이들이 흙을 잘 파기도 하려니와, 원체 눈이 밝아서 금을 잘 찾아낸다고 하기에 하루 종일 일을 하면 금을 얼마나 얻느냐고 물었다.
"그건 운에 달렸지요. 하루에 여남은 알을 얻는 때도 있고요. 운이 없으면 서너 알에 그치기도 하죠 뭐. 운수대통하면 단박에 부자가 되기도 하구요."
"그럼, 그 알 모양은 얼마만 한고?"
"거의 낟알만 합지요."
금을 태는 것이 농사짓는 것보다 이익이 낫다한다. 한 사람이 하루에 얻는 금이 적어도 예닐곱 푼쭝은 되기 대문이다. 그걸 돈으로 바꾸면 두세 냥이나 된다. 그러다 보니 농장을 떠나 여기로 모여드는 농사꾼들뿐 아니라, 사방의 건달패와 놈패이들까지 가세하여 절로 부락을 이뤄 무려 십여만 명이 들끓게 되었다. 아울러 쌀이며 술과 밥, 떡과 엿 같은 것을 파는 장사치들이 산골에 그득하다 하는데,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하겠노라. 그 많은 금들이 대체 어디로 가는지, 또 금을 그렇게 많이 캐내는데도 금값이 더욱 오르는 건 어인 연유인지.
그렇다. 열하일기에 나오듯이 조선후기에는 역동적인 조선사회의 변화가 있었다. 그것을 연암은 알았을까?
이밖에도 호질을 비롯하여 허생전등과 같은 낮익은 소설들이 열하일기에 담겨있다. 과연 이 이야기를 연암이 직접 짓고 비판을 피하기 위한 장치로 베낀이야기 들은 이야기로 포장한 것일까? 아니면 진정 베끼고 들은 이야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