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과 의열단 - 김원봉의 항일 투쟁 암살 보고서
박태원 지음 / 깊은샘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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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과같아라! 물과 같아라! 산과 같아라! 별처럼, 물처럼, 산처럼 그들은 이 땅의 독립을 위해서 살았다. 이여성, 김약수, 약산 김원봉!! 이 세사람은 젊은 시절 자신의 젊음을 조국을 위해서 바치기로 약속하고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나는 그들의 삶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제세히 소개해 놓은 책들을 구하기 힘들었다. 그중에서 그래도 약산 김원봉의 삶은 영화와 책으로 소개되어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그를 알 수 있는 책을 찾던 중에 약산 김원봉의 삶과 의열단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는 '약산과 의열단'이라는 책을 펼쳐 들었다.

 

1. 김원봉의 육성을 듣는 듯한 책!

  이 책은 소설가 박태원이 의열단원들의 활약을 소개한 신문기사와 김원봉을 인터뷰한 자료를 근거로 쓴 책이다. 책 곳곳에서 김원봉이 먼저 죽어간 의열단원의 죽음을 기억하며 가슴 아파하는 신음소리가 들린다. 얼마나 많은 동지들을 먼저 보냈는가? 그들을 사지로 떠나보내면서 김원봉 그도 얼마나 슬펐을까? 조국 광복을 위해서 자신의 젊을 바치는 수 많은 별들!! 그 별들의 삶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팔뚝에 힘줄이 불끈 솟았다.

 

2. '밀정'과 '독립운동가' 사이

  영화 '밀정'을 본사람들은 송강호가 연기했던 '황옥'이 과연 독립운동가인지, 일제의 밀정인지 판단이 서지 않을 것이다. '황옥' 경부가 과연 밀정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있다. 재미있는 것인 이책 속의 김원봉은 황옥은 밀정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당시를 살았던 많은 의열단원들도 황옥을 밀정이라 보지 않는다. 그런데, 꾀 많은 역사학자들은 황옥을 밀정으로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황옥이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다.

  반면,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했던 박용만을 이 책에서는 밀정으로 소개하고 있다. 일본군함 출운호를 폭파하려했다가 추방당한 그를 밀정으로 보기에 너무도 무리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역사학자들도 박용만을 밀정으로 보고 있지 않다. 그런데, 박용만이 국내에 귀국해서 조선총독 사이토를 만났다는 사실은 그를 밀정으로 의심하기에 충분한 면도 있다.

  밀정과 의사 사이에는 생각보다 작은 강이 있다. 때로는 밀정이 의사로 추앙받기도하고, 의사가 밀정으로 오인받기도 한다. 황옥과 박용만 이 두 인물은 밀정과 의사 사이에 있는 강이 얼마나 넘기 쉬운 강인지를 알려준다. 과연 그들은 의사일까? 밀정일까?

 

3. 나혜석과 의열단의 만남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로 나혜석을 꼽는 사람들이 있다. 수원에는 나혜석 거리가 있고 많은 연인들이 그 거리를 걷는다. 내가 수원에 살았던 시절, 수원지역의 역사를 탐구하며 수업자료를 모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신여성 나혜석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최린과 바람피며 자유롭게 살아간 여성에게서 무엇을 배우겠냐는 논리였다. 그당시 3.1운동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느냐? 나혜석이 그것 빼고 독립운동을 한적이 있는가? 그 남편이 일본의 대단한 친일파 아니냐?라는 반론에 나는 별반 반론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나혜석과 의열단의 흥미로운 일화가 소개되있다. 의열단원 박기홍이 나혜석에게 총한자루를 맡겼다. 박기홍이 계호기한 일이 사전에 드러나 그는 감옥에 갔다. 출옥후, 우연히 나혜석을 만났는데 그녀가 총을 도로 내주었단다. 단동현 부영사의 아내로서 남편에게 말하지 않고 총을 베갯속에 넣어 이를 배고 잤다고 한다. 그녀의 조국에 대한 사랑은 뜨거웠었다. 그런데, 조국을 배신한 그녀의 남편을 어떻게 이해햐야할까? 조국을 사랑하나, 사랑하는 남편은 조국을 배신했다. 그리고 그녀는 최린과 외도를 한다.

 

  너무도 재미있는 책이다. 이틀만에 책을 다 읽을 정도로 책은 재미있다. 약간은 고어투의 말이 있어 읽기에 불편한 점도 있지만, 약산 김원봉의 뜨거운 조국애를 느끼며, 열정적으로 시대를 살아간 가슴벽찬 의열단원의 삶을 알고자하는 분들은 반드시 일독을 해보길 바란다. 그들의 삶을 기억하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책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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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18-09-18 0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설가 구보씨가 이런 책도 쓰셨군요~~ 저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좋은 책 추천 고맙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 2017 개정신판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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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11월 대전 갤러리아 백화점 앞에 온 가족이 나와 촛불을 들었다. '이게 국가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더 이상 국가가 망가지도록 방조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박근혜 하야'를 외첬다. 과거 역사를 배우고 가르치고 있는 나로서는 적폐세력이 촛불 참여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아내는 용감했다. '당신이 안가면 나혼자라도 나가겠다.'라는 강경한 말을 했다. 계엄을 검토했다는 문건이 발견되고 나서야 나의 우려가 기우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다시 5.18 광주에서 벌어졌던 비극이 연출될 수도 있었다. 엄연히 과거 독재국가의 향수에 빠져 있는 적폐세력이 엄존한 상황에서 우리 시민들을 광장으로 촛불을 들고 나오도록 인도한 힘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토록 광장에서 '적폐 청산', '박근혜 하야', '재벌 개혁'을 외치면서 우리들이 만들고 싶었던 국가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고 싶어서 유시민 작가의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펴들었다.

 

1.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유시민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라는 질문을 풀어가는 것으로 엉클어진 실타래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폭력이 난무하는 자연상태에서 개인들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군주와 사회계약을 맺었다는 홉스의 주장을 첫머리에서 소개하고 있다. 사회계약론 중에서 홉스의 사회계약론과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확실히 다르다. 홉스가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로 보았다면, 루소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상태로 보았다. 자연상태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그들이 만들려고 하는 국가의 형태와 국가를 유지하는 방법은 달라진다. 유시민은 폭력을 독점한 국가라는 점에서 홉스의 주장을 지지한다.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고 국가라는 '리바이던'은 폭력을 합리화하고 합법화한다. 국가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견제의 대상이다. 폭력을 독점한 국가는 언제나 괴물로 변할 수 있다. 과거 이승만 독재정권, 박정희 독재정권, 전두환 폭력정권을 통해서 국가 폭력으로 수 많은 시민들이 생명과 자유를 잃는 처절한 모습을 우리는 보아왔다. 시민의 감시와 견제가 없다면, 국가라는 괴물은 언제나 본래의 폭력적 모습을 다시 드러낼 수 있다.

  그랬다. 나보다 세대가 앞선 분들과 대화를 하면, 그분들의 입에서는 "국가가 하는 건데, 설마 국민에게 나쁜 것을 하겠어?"라고 반문한다. 국가를 견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유시민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들은 '국가주의형 이념보수'이다. 국가를 비판하는 것 자체를 못견뎌하는 '열열한 애국자'이다. 국가는 믿음의 대상이라는 신화는 JTBC의 박근혜-최순실 특종보도를 통해서 산산조각났다.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존재를 대통령감으로 생각하며 투표했던 많은 사람들!! 자식이 없기에 절대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그녀에게 투표했던 많은 사람들이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미르재단, K-스포츠 재단을 만들면서 많은 돈을 끌어 모으려했던 모습들을 보면서 국가라는 '리바이던'은 견재의 대상이며 감시를 해야만 국민이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추운 겨울을 따사로운 촛불로 밝히며 난생 처음으로 대전 탄방동 일대를 행진했다. 같이 나왔던 막내가 걷기 힘들다고 해서 아내가 업고 행진했다. 몸이 약한 아내에게 막내를 넘겨 받아 막내를 업고 외쳤다. "박근혜는 하야하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구호를 외치며 나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국가가 '리바이던'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맴돌았다.

 

2. 국가의 속성!! 애국심의 두얼굴

  "집단에는 양심이 없다."라고 니버가 말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밀그램의 실험에서 알 수 있듯이, '악은 평범'하다. 누구라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부당한 지시에 '아니오'를 하지 않는다면, 악마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국가'라는 이름의 불법적 명령에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4대강 사업, 연예계 블랙리스트를 수행했다. 남일동 빌딩에 전투경찰이 투입될 때도 전투경찰들은 '아니오, 해서는 안됩니다. 시민과 경찰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유시민이 말하듯이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며 폭력을 합리화한다. 그리고 인간은 부당한 지시에 저항하기보다는 순응이라는 편리한 방법을 사용한다.

  과거 정권의 가장 심각한 폐악은 인간을 그자체로 보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는 점이다. 칸트의 두번째 정언명령은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인간을 그 자체의 고귀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수단으로 보는 사고방식은 우리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남일동 빌딩에 올라가 절규하는 시민들을 '도시 게릴라'로 묘사하는 세력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 인간을 수단화하고,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데도 이를 양심에 따라 '아니오'라고 거부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사회에 존재한다. '아니오', '안됩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때, 국가가 저지를 수 있는 '리바이던' 적인 모습들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국가에게 '안된다.'라고 말하려 광장으로 나온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학생부터 나이든 할아버지까지! 촛불을 든 시민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들이 바랬던 국가는 헌법에 나와있는 국민이 주인이된 국가였다. 국민을 수단이 아닌 고귀한 존재로 여기는 그러한 국가였다.

 

3. 국가를 바꾸는 방법은 무엇인가?

  국가를 바꾸는 방법!!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혁명을 떠올릴 것이다. 혁명을 하려면 많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다. 아니면 소로가 말했던 '시민 불복종'이라는 방법이 있다. 이두 방법 중에서 어느 것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까?

  우선 소로의 '시민 불복종'이라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시민 불복종'이라는 방법은 소극적 저항이다. '적극적 저항'에 비해서 소극적 저항은 사회를 바꿀 수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직접적인 혁명을 현실적인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간디, 마틴 루터 킹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이 전개했던 '시민 불복종'운동은 인도를 영국에서 독립하게 만들었으며,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인권을 강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전제가 뒤따른다. 모두가 함께 해야한다!! 사회의 다수를 평화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가장 위력이 약한 방법이라 생각되는 이 방법이 가장 위대한 결과를 가져온다. 200년의 식민지배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인도가 서로 웃으며 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마하트마 간디의 '시민 불복종'운동이라는 평화적 방법덕분이다. 물론, 3.1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평화적 방법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상대가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 존재라는 전재가 없는 상태에서 '천황제'라는 '전체주의'에 물든 일제에게는 조선의 평화적 방법은 쉽게 진압할 수 있는 소요일 뿐이었다.

  포퍼는 '불복종 운동'에서 더 나가서, '점진적 공학'이라는 방법을 제시했다. 어떤 경우에도 최대의 궁극적 선을 추구하고 그 선을 위해 투쟁하기 보다는 최대의 악과 긴급한 악에 대항해서 투쟁한다는 포퍼의 주장은 우리 사회에 적합한 이론일까?  혁명은 모순이 극에 달하고 시민의 각성과 압제자가 썩어 빠진 상태에서 성공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 현실에서는 '비타협적 급진주의'보다는 포퍼가 말한 점진적 공학이 더 유용하다. 민주적 방법으로 합리적인 타협안에 도달할 수 있는 포퍼의 '점진적 공학'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포퍼는 '사회혁명'에 반대했다. 왜일까? 혁명이 폭력을 수반하며 독재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질문을 던진다. 모든 혁명이 '폭력'을 수반하는가? 그렇지 않다. 2006년 11월부터 2017년 초까지 '촛불혁명'을 일으키면서 우리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비폭력을 강요하는 것에 문제있다.'라고 말하는 자도 있으나, 그의 주장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다. 촛불혁명의 현장은 폭력보다는 온정과 따스함이 자리잡았다. 촛불집회에 돈이 필요하다고 하여, 나와 아내는 만원을 모금함에 넣었다. 딸들도 모금함에 돈을 넣겠다고 하여 급히 지갑에서 돈을 떠내어 딸아이 손에 쥐어주었다. 모금함이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다음 줄로 넘어가려하자, 막내는 달려가서 자신이 쥐고 있던 돈을 모금함에 넣었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스스로 대한민국의 주인이며, 대한민국을 위해서 자신도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행복함을 딸아이는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가져온 손난로를 우리 아이에게 쥐어주며 '예쁘다'고 말하는 이웃도 있었다. '촛불은 바람불면 꺼진다.'는 보수 정치인의 말에, '박근혜가 하야하지 않으면 병석에 누워있는 어머니께서 다음주에는 나오신답니다.'라고 자유발언을 하는 시민도 있었다. 먹을 것을 나눠주는 따스한 이웃도 있었다. 촛불혁명의 장소는 포퍼나 하이에크가 우려했던 '폭력'이 난무하는 장소가 아닌, '사랑'과 '나눔'이 있는 민주주의 학습의 장소였다. 촛불집회 이후, 우리 딸아이가 좋아하는 것은 태극기였다.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태극기를 보면서 스스로 대한민국을 바른길로 인도했다는 자부심을 느낀단다. 

  추운 겨울에 따스한 촛불을 밝히며 새해를 맞이했다. 나에게는 또 하나의 의문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만든 가장 완벽한 정치제도인 '민주주의'가 왜? 이리도 취약할까? 두번씩이나 함량 미달의 정치인을 대통령을 뽑았고, 그 정치인을 끌어내리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목청껏 '박근혜는 하야하라.', '재벌 개혁하라.'를 외쳤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왜이리 불완전할까?

 

4. 민주주의는 최악을 막는 제도이다.

  '핼 조선'이라는 단어가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 시기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많은 젊은 이들이 이땅을 떠나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며 이민을 꿈꿨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이민'을 선택하는 방법과 대한민국을 바꾸는 방법이 있다. '두려워서 도망친 곳에 천국이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돈이 아주 많아 투자 이민을 가지 않는 이상, 낯선 외국에서 새로운 삶의 뿌리를 내리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새롭게 선택한 '국가'가 나의 마음에 쏙든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새롭게 선택한 국가가 마음에 안들게 된다면, 그때 나는 또다른 나라를 찾아헤멜 것인가?

  죽어서 천국을 찾기 보다는 살아서 이땅을 천국으로 만들자! 파랑새를 찾아 헤매지 말고 이 땅을, 대한민국을 파랑새가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존재하기 위해서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피와 민주투사들의 희생이 있었다. 거져 주어지는 것은 없다. 민주국가 대한민국에 무임승차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온 것이다.

  민주주의는 너무도 취약했다. 시민들의 선택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두번씩이나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 대통령들은 지금 감옥에 있다. 유시민은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마음대로 악을 저지르지 못하게'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플라톤의 현자가 대통령이 된다할지라도 자신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마음껏하지는 못한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다른 독재국가에 비해서 마음껏 국가를 유린하지 못한 것도, 노무현 정권과 지금의 문재인 정권이 그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길을 마음껏가지 못하고 있는 것도 민주주의의 장점이자 한계이다. 민주주의는 급격한 진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느리지만 꾸준히 진보가 이뤄진다. 느리지만 꾸준한 진보가 있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절실하다. 그것을 우리는 촛불혁명을 통해서 몸으로 깨달았다. 한동안 우리집의 유행가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였다. 집안에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딸들이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학교에서는 레미제라블의 '민중의 노래'를 부르는 학생이 늘어났다. 야간 자율학습에 빠지고, 학원에 갔다가 귀가 길에 촛불집회에 참여한 학생들이 나에게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 학생들이 행진을 하기 전에 반드시 불렀던 레미제라블의 '민중의 노래'를 잊지 않은 것이다. 집에 와서 다시한번 레미제라블의 '민중의 노래'를 들으며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사랑과 관심을 먹고 자란다. 민주주의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지 않는다면, 꽃이 물을 먹지 못해 시들듯이, 민주주의도 죽어버린다.

 

5. 한국의 진보정치는 가능한가?

  촛불집회 현장에서 시민들의 자유발언 중에서 한 여성이, 조국교수의 '법학강의'를 인터넷을 통해 듣고 왔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엉망이 되어버린 대한민국호를 살리기 위해서 '법학강의'를 찾아들을 정도로 절실했다. 이러한 절실함이 결실을 맺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그렇다면 대한민국호는 어떠한 정치인들에게 키를 넘겨야할까? 유시민은 대한민국의 진보정치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진보정치인이 지켜야할 도덕과 진보정치의 방향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베른슈타인은 "노동운동이 필요로하는 사람은 자기 모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란 식물도 감싸안을 수 있을 만큼 생각이 넓어야"한다고 말했다. 생각이 교조적으로 흐를수록 정통성 논쟁! 이념논쟁에 빠진다. 중국 공산당의 정풍운동, 1930년대 만주의 민생단 사건, 일본의 적군파에서 '다른 모판에서 자란 식물을 감싸 안을 수' 없는 자들이 벌이는 비극을 볼 수 있다. 그곳은 죽음의 공간이다. 유시민은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비극을 예로든다.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결국은 현실을 개혁하지 못하고 히틀러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모두 죽어갔다.

  '변질'의 위험을 안고 신념윤리와 책임 윤리사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것, 그것이 정치를 통해서 선을 추구하는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유시민은 절규한다. 정치인은 일반이들과 다른 윤리적 규범이 적용되어야한다. 자신의 신념과 대척점에 있지 않다면 최악이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진보정당들은 연합해야한다. 유시민은 이를 진보정치인들에게 절실히 말하고 있다. 정치는 현실이기 때문에..... 이승만이 권력을 잡고 수 많은 민주투사들이 희생되어야했다. 김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통일국가 수립이라는 대의를 위해서라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남한에서 김구가 권력을 잡았어야했다고 주장한다. 그랬다면, 최소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발전했으며, 어쩌면 더 큰 민족의 비극을 막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신념윤리와 결과에까지 책임을 져야한다는 책임윤리 사이의 딜레마에서 진보정치인들은 현명한 판단을 해야한다. 현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유시민은'진보는 본능을 거슬러 간다.'라고 말한다. '작은 오류만으로도 쉽게 무너진다. 한번 무너지면 복구하기 어렵다. 진보는 바람을 거슬러 나는 새,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기존에 익숙한 생각, 체제를 선호한다. 그러하기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고, 나이들면 보수 정당에 투표하기도 한다. 유시민의 이말 중에서 '한번 무너지면 복구하기 어렵다.'라는 말이 나의 가슴을 파고든다.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살아있을 것 같던, 노회찬이 너무도 쉽게 세상을 등진 사건이 떠올랐다. 대기업 삼성을 노회찬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약간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잘못을 '신념윤리'에 위배된다고 괴로워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민주주의가 관심과 사랑이 없으면 쉽게 취약해지듯, 진보 정치도 현실이라는 벽앞에 너무도 취약했다.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하려하는 공자처럼, 현실이 쉽게 바뀌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진보정치인들은 현실을 바꾸려 오늘도 바람을 거슬러 날아간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진보를 위해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시민의 한사람으로 사랑과 관심을 주자.

 

 

  촛불혁명이 일어나고 이제 2년여가 지나간다. 촛불혁명 이후, 우리 현실도 많이 달라졌다. 보수정권이 들어섰을 때는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관리자들의 행정에 말없이 묵묵히 따르던 사람들이, 이제는 '안된다.'며 당당히 자신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촛불혁명 이후 삶이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주변에서 시작된 촛불혁명의 여파는 사회에까지 이어졌다.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운동'이 한국에서만 조용하다고 의아해하던 시사평론가는, 촛불혁명이후 거세게 일어나는 한국의 '미투운동'에 놀란다. 촛불혁명을 거치면서 자신들의 힘과 능력, 이땅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각성한 시민들이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꼰대들의 부당한 갑질에 대해서도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하는 깨어있는 시민들을 보며, 촛불혁명의 위력을 다시한번 실감한다. '국가란 무엇인가'라고 나에게 묻는다면, '리바이던'이라는 괴물을 깨어있는 시민들이 길들이는 곳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민의 관심과 사랑이 없다면, '리바이던'은 시민을 헤칠지도 모른다. 자! 깨어있자! 부당한 지시에 '아니오'라고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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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의 대화 - 새로 읽는 남북관계사 새로 읽는 관계사 시리즈
김연철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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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의 이명박근혜시기를 지나서 평화의 새벽이 다가왔다. 벅찬 가슴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판문점 산책로 대화를 지켜보고, 불가능할 것 같았던 김정은과 트럼프의 싱가폴 회담을 바라보았다. 과거에서 머나먼 안드로메다의 이야기로만 들렸던 일들이 지난 일년 사이에 숨가쁘게 진행되었다. 이때 지난 7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남북이 대립을 넘어서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걸어왔던 머나먼 여정이 궁금해졌다. 김연철 교수는 남북관계의 실무 경험이 있는 몇 안되는 전문가이다. 그의 눈을 빌려 위대한 평화를 찾아나선 남북한의 머나먼 여정을 살펴보자.

 

1. 무능한 대북관계의 시작 박정희 정권

  김연철은 현대외교에서 대통령의 외교 철학과 정책에 대한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현대 외교는 정상회담을 중심으로 전개되기에 대통령의 신념과 철학이 큰 비중을 차지할 수 밖에 없다. 대학에서 '민중'이 역사의 중심이며, '지배자' 중심의 역사에서 탈피해서 민초의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아야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역사는 '민중'과 '지배자' 일방의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탁월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현명한 민중의 지지가 없다면 탁월한 업적을 만들기 힘들며, 현명한 민중이라 할지라도 민중의 힘을 조직화할 수 있는 리더가 없다면 결실을 맺지 못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남북관계에서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탁월한 리더가 중요하다. 남한을 18년 동안 통치한 박정희는 남북관계를 통일로 이끌 인물이었을까?

  박정희의 그릇은 '민족의 통일을 위한 초석'을 담기에는 너무도 작았다. 1969년 닉슨 독트린 이후 시작된 데탕트를 박정희는 위기로 인식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신발을 신지 않는 모습을 보고, 어느 사업가는 그들에게 신발을 팔 수 있다며 희망을 보았지만, 어느 사업가는 그들은 신발을 신지 않는다며 비관했다. 같은 사실이라하더라도 그사람의 그릇에 따라서 현실을 달리 보인다. 데탕트라는 시대의 조류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기회를 삼기 보다는, 기존의 반공 논리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혈안이 된 박정희 정권은 위기의식을 가졌다. 불행히도 박정희의 이러한 세계관은 그를 추종하는 수구세력에게 그대로 복제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박정희 정권의 탁월한 업적 중에 하나인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에 박정희가 회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1972년 5월 31일 박성철이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하자, 박정희는 이를 거부했다. 북을 믿지 못하는 그는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진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허공에 날려버렸다. 이어서, 남북관계 진전을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했던 이후락을 교체하고 더 이상의 남북관계 진전을 가로막았다. 민족의 통일과 번영보다는 정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박정희의 모습을 보며 그의 지도자로서의 그릇을 가늠할 수 있다. 우리는 박정희 정도의 그릇을 가졌다. 국민이 새로운 지도자로 대통령을 교체하지 않는 이상 남북관계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었다. 슬프지만, 모든 국민은 그 국민의 수준에 맞는 그릇을 갖기 마련이다.

 

2. 역사의 교훈 - 대화를 하지 않으면 남한은 왕따를 당한다!!

  '대북 정책을 둘러싼 한민관계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남북관계가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김연철의 글을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북한과 대화를 하면 남한이 동북아의 외교무대에서 운전석에 앉을 수 있지만, 북과의 대화가 단절되면 '코리아 패싱'이 시작된다. 이러한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다.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일어난 직후, 존슨 미국 대통령의 대응은 참으로 현명했다.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몰라서 허둥대지도 않았으며, 침착하게 국가 안전 보장회의 참여자들에게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자유 토론을 하도록 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했을 때 보았던 케네디의 모습과 흡사하다. 아울러, 우리가 그리워하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과도 유사하다. '한비자'를 보면, 군주는 자신을 비워야하며, 자신의 마음을 신하에게 보여서는 안된다고 한다. 신하들이 마음껏 자신의 의견을 말하도록 하여 그들의 마음을 알아보고 최종결정을 내려야한다. 이것이 신하들의 머리를 빌릴 수 있는 방법이다. 위기 상황일수록 토론과 대화 및 의견 청취의 위력은 극대화된다.

  북한과 미국의 불꽃튀는 외교전과 협상술이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남한은 왕따를 당했다. 푸에블로호 협상 자체를 북한은 선전에 이용했으며, 남측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미국에 제안해서 남한과 미국 관계의 균열을 유도했다.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북한만의 생존술이 발휘되었다. 미국은 돈으로 박정희를 달래며 제발 가만히 있어달라는 제스춰를 보였다. 1.21사태가 일어난 해이며, 북한과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당사국임에도 불구하고 남한은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강경한 보복을 목청껏 말할 수록 한국은 왕따의 수렁속에 빠져들었다.

  우리가 남북관계를 돌파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면 미국도 우리를 존중하고 정보를 공유한다. 김대중정권과 노무현 정권시기에 우리가 약소국으로서 동북아 외교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것도 남북의 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중진국 리더'의 모범을 보였다는 외신의 찬사를 얻기까지 했다. 그러나 우리가 북한과 대립만을 하려한다면 미국은 우리를 외면한다. 이는 박정히 정권 시기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불행히도 박정희의 아바타를 자처하는 정권에서 '코리아 패싱'이라는 용어가 탄생하며 박정희의 선례를 답습한다.

 

3. 남름 능력을 발휘한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

  전두환은 박정희 키즈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남북관계를 살펴보면 박정희보다 진일보안 모습이 보인다. 그는 86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 북한과 대화를 했다. 단초는 1984년 북한의 수해물자 제공 수락에서 부터 시작된다. Give and take! 라는 말이 있다. 북한이 의례적으로 하는 수해물자 제공을 덥석 받은 전두환 정권은 수해구호물자를 가져온 북측 인사들에게 대형가방 1600개에 카세트 라디오, 전자 팔목시계, 양복지, 내의, 양말을 담아 보냈다. 공짜란 없다. 이시기 받기만 했다면 1985년 이산가족 상복의 결실까지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남북한이 '교류와 협력'에 상당한 의견 일치를 보기까지 했다. 남북 철도 연결, 공동어로 구역 설정, 경협위원회 설치 의견 접근 등등.... 반공을 강조하는 보수정권에서 어떻게 이러한 합의가 이뤄질 수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물론, 전두환 정권 시기에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가 노태우 정권의 합의에 밑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가 있다. 어느 식물도 뿌리 없이는 홀로 설 수 없기 때문에.....

  전두환 정권을 이은 노태우 정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물론 과거 나도 노태우 정권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공산권이 무너지는 세계정세를 잘 파악하고 북방외교를 한 것이 노태우 정권이다. 공산권과의 수교가 더 늦어졌다면 엄청난 시장인 중국을 놓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노태우는 외교에서 만큼은 과거 냉전 시기의 논리에 얽매이지 않았다. 북방정책의 최종목표에는 '우리의 생활.문화권을 연변 연해주 등에 까지 확대시켜 나간다.'는 원대한 구상이 있었다. 얼마나 노태우의 장쾌한 구상인가! 냉전의 대결에서 벗어나, 새롭게 열린 중국과 러시아와의 교류와 협력을 넓혀 우리의 경제 및 생활 공간을 넓히겠다는 구상을 타 보수 정권에서는 하지 못했다. 그것을 노태우는 하고 있었다. 그의 원대한 구상은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를 도출해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는 남북의 평화정착을 바라지 않는 세력이 있다. 노태우 정권 시기에 '훈령조작사건'도 그러한 세력에 의해서 저질러졌다.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산가족 상봉을 이루라는 노태우 대통령의 훈령을 누락시켜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민족의 숙원을 좌절시킨 사건을 읽으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대통령의 말도 듣지 않고 민족의 이익을 외면하는 파렴치한 수구세력의 존재를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한다.

 

4. 무능력한 보수정권과 한반도 운명(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정권)

  리더의 철학과 소신이 남북관계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김영삼 정권을 보면 알 수 있다. 여론에 휘둘려 일관성 없는 대북정책을 추진했으며, 남북관계는 더 없이 나빠졌다. 1993년 3월 19일 '서울 불바다론'을 말하는 북한 대표의 영상이 전국을 강타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북한을 비난했다. 그러나 김연철이 이 책에서 남측의 유도된 대결이었음을 밝힌다. 남측(송영대)대표가 "귀측 핵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지 않을 경우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예측할 수 없다."라고 말하자. 북측(박영수)은 "우리는 전쟁을 바라지 않지만 결코 그쪽이 전쟁을 강요하는 데 대해서는 피할 생각이 없다.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만다."라고 맞받아친다. 북한을 몰아 붙이자, 북한이 격렬하게 대응한 이 비밀 대화를 앞뒤를 잘라서 언론에 공개했다. 남북의 대결을 조장하는 한심한 행동을 김영삼 정권은 주저하지 않고 저질렀다. 그리고 1995년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김영삼은 '더 이상 남북 대화는 없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말만은 일관성 있게 지킨다. 외교에서 철학이 없는 리더의 위험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김영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행은 김영삼 정권에서 그치지 않는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특히 노무현 정권 시기 10.4 선언에서는 평화협정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명박근혜 정권은 진보정권의 빛나는 업적을 폄훼하며 이를 무시했다. 2007 남북 정상회담에서 '서히 평화 협력 특별지대 구상, 백령도 인근 해역 해양 생태공원조성, 해주특구 개발'이라는 엄청난 합의를 했다. 대립의 어둠에서 벗어나, 상생과 평화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이 합의를 이명박은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북한 붕괴론의 근거한 이명박의 초강경조치는 5.24조치로 이어진다. 그러나 5.24조치의 피해는 남측이 북측에 비해 더 컸다. 남측이 45억 달러의 피해를 본데 비해서 북측은 8억 달러의 손해를 보았으며, 남한의 빈자리는 중국이 들어와 이익을 가져갔다. 얼마나 멍청한 조치인가? 이러한 멍청한 정책이 이명박정권에서 그쳤다면 우리 민족에게는 행운이었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통일 대박론'을 외치며 이명박 정권의 정책을 계승했다. 박근혜 정권은 '결과로서의 통일'을 외치며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외면했다. 전형적인 북한 붕괴론에 근거한 통일론이다. 2004년 6월 15일을 기해서 남북은 대결을 접고 평화 통일을 기원하며 더 이상의 비난 방송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박근혜정권이 이를 재개했다. 물론 재 설치된 스피커에 방산비리가 저질러져서 북한에 남한의 방송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는 웃지못할 일도 발생했다. 멍청한 박근혜 정권은 남한이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대북방송을 재개하면 북한이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남한이 빠진 경협의 자리는 중국이 치고들어왔다. 민족의 불행만 높이는 멍청한 정책으로 인해서 남한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빠져들었다. 촛불혁명에 의해서 새로운 남북관계가 열릴 수 있는 장이 마련된 지금!! 과거의 시대로 되돌아갈 우려는 없는가? 불행히도 박정희와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를 추종하는 세력이 한국사회에는 존재한다.

 

 레이건 대통령은 "배고픈 아이는 정치를 모른다."라고 말했다. 김연철은 '어떤 문명국가에서도 인도적 지원을 퍼주기라고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인도적 지원마져도 퍼주기라고 말하며 북한과의 교류를 불편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삐딱한 생각을 조장하며 정치적 이익을 누리는 정치인들이 있다. '70년의 대화'라는 책을 통해서 어떠한 철학과 신념을 가진 정권 혹은 리더가 집권하는가에 따라서 남북관계는 요동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꼈다. 남북관계의 평화와 번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시민들이 냉전 수구 논리로 무장한 세력들이 집권하지 못하도록 오늘을 밝혀야한다. 깨어있으라! 깨어있으라! 지난 9년 동안 시민들이 깨어있지 못했기에 남북관계에 불행이 깊어졌다. 다시는 절망의 늪을 헤매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모두 깨어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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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 EBS <인문학 특강> 최진석 교수의 노자 강의
최진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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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의 얼굴을 가진 노자!!'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만큼 <도덕경> 속의 노자의 말은 다양한 각도로 재해석되어 왔다. <도덕경>을 병법서로 보는 관점과 제왕의 통치술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책으로 보는 시점에서 소개된 서적을 보아왔던 나에게 최진석 교수의 관점은 참으로 신선했다. 하나의 관점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 틀에서 벗어난 사실들은 무시해버린다. 왕필본 <도덕경>과 하상 공본<도덕경>을 읽고 있는 나는 두 주석서를 참고하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도덕경> 속의 노자의 말을 이해하려 부단히도 노력했다. 알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없다. 최진석 교수의 책은 내가 <도덕경>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다면 내가 본 새로운 <도덕경>의 세상은 무엇일까?


 

1. 최진석만의 탁월한 해석

 

 논어 자로 편에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할까? 보통은 '군자는 조화를 추구하나 소인과 같아지지는 않고, 소인은 같아지기를 바라지만, 조화를 이루지는 못한다.'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최진석은 해석이 달랐다. 당시의 신분제 사회라는 점에 유념해서, 군자는 지배계급으로서, 군자와 소인 계급이 다르며, 따라서 차이를 인정하고 각각의 사명을 수행하여 전체의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소인은 피지배계급으로서 계급적 구분을 부정하고 군자와 차이 없이 같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라고 말한다. 기존의 현대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보통의 학자들과는 달리 혁명적으로 해석한 최진석의 해석은 나의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패는듯했다. 공자는 기존 질서 유지를 두둔하는 보수적인 학자로 볼 수도 있는 해석이다. 이러한 혁명적인 해석으로 <도덕경>을 <논어>와 대비시키며 최진석은 자신만의 <도덕경> 읽기를 한다.

 무명천지지시(無名天地之始) 유명만물지모(有名萬物之母)를 최진석은 어떻게 해석할까? '이름 없음은 천지의 시작이요, 이름 있음은 만물의 어머니이다.'라는 보통의 해석을 최진석은 자신만의 '무'와 '유'의 개념정의로 혁신적 해석을 해낸다. '무'는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몸 안의 공간처럼 비어있으되 기능하는 영역을 '무'라  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유'라 정의한다. 있음과 없음이라는 극단적인 표현보다는 '비어있음'으로 '무'를 해석하는 것이다. 비어있는 곳이 우리가 기능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다. 도시의 비어있는 공원이 도시의 삭막함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삶의 여유를 주듯이……. '있음'과 '없음'의 극단적인 개념으로 도덕경을 바라보았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던 도덕경이, 최진석의 새로운 관점을 통해서 바라보니, 너무도 쉽게 이해되었다.

 

2. <도덕경>의 핵심 '유무상생'

 <도덕경>의 핵심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을 핵심이라고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최진석은 <도덕경>의 핵심은 대립 면의 공존이라 말한다. 이를 도덕경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 할 수 있다. 유와 무는 서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새끼줄이 서로 꼬여서 하나의 새끼줄이 되듯이, 유는 무와 관계를 맺고 무는 유와 관계를 맺는다. '노자의 철학 체계 안에서 유와 무는 존재적으로 선후나 차등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층 차에서 공존한다.'는 최진석의 해석은 그가 바라보는 <도덕경>의 핵심이다.

 이러한 관계론적 측면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새로운 관점이 눈에 들어온다. '밝을 명(明 )'에 대한 최진석의 해석을 살펴보자. 그는 '해를 해로만 또는 달을 달로만 아는 것은 '지(智 )'이며, '해와 달을 한 세트로 아는 것'은 '명(明)'이라 말한다. 노자 철학을 관계론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최진석의 해석을 확장하면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많은 동양철학의 의문들이 풀린다. '생사일여(生死一如)' 즉,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이 말은 삶과 죽음을 같이 바라보아야, 둘 사이를 관계론적으로 바라보아야 제대로 '삶과 죽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철학적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니 '사랑과 이별'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뿐인가? '사랑과 이별'이 하나라면, '사랑과 미움'도 하나이다. 사랑하기에 미움도 싹튼다. 연애할 때는 그렇게 사랑하는 연인이 결혼해서 싸우는 것도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서로에게 무관 심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수많은 관계의 연속이다.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의 연속에서 벗어나서 때로는 대립하는 세차원의 관계 속에서 인생이 펼쳐지기도 한다.


3.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

 '馳騁?獵令人心發狂(치빙전렵영인심발광)'이라는 말은 '말달리며 사냥하는 사람의 마음을 발광하게 한다.'라고 해석된다. 나는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노자는 사냥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 말했을까? 사냥은 고대의 군사훈련 성격도 갖고 있기에 군주는 사냥을 많이 다녔다. 그런데 왜? 사람을 미치게 할까? 최진석은 '바람직한 것을 모두 똑같이 수행하는 사회보다 바람직한 것을 없애고 각자 바라는 바를 다양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더 강하다.'라고 해석한다. 사냥감을 쫓는 사람들처럼 모두가 같은 목표를 향해서 맹목적으로 달리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미쳐 나갔는가? 충남의 00 고등학교에서 모의고사 1% 안에 드는 학생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사회가 정해놓은 목표가 근접한 학생이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져 고민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모두가 같은 목표, 사회가 정해놓은 목표를 향해 달리면서 많은 학생이 미쳐나가고 있다. 자신이 정한 목표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서 정해놓은 목표의 위험성을 일찍이 노자는 지적하고 있었다. 1등이 아니면 모두가 패배자라고 치부하는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용기 있는 우리 사회를 보면서 노자의 구절을 다시 한번 들여다본다.

 '故貴以身爲天下 若可寄天下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고귀이신위천하 약가기천하 애이신위천하 약가탁천하)'라는 말은 '그래서 자신을 천하만큼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자기를 천하만큼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줄 수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언뜻 생각하면, 이기적인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최진석은 '죽음을 가벼이 여기게 만드는 국가라면 이미 근본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라고 진단한다. '자신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최진석의 주장은 노자가 말하는 건강한 사회를 이해하게 해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극단적인 모습을 '가미카제 특공대'에서 우리는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라는 광풍 속에서 수많은 젊은이를 '일본제국'을 위해서 '천황'을 위해서 바치라고 강요했다. 승산 없는 전쟁에, 가치 없는 전쟁에 수많은 젊은이가 죽었다. 그 죽음의 행렬에 조선의 젊은이들도 있었다.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자가 어찌 남을 사랑할 수 있을까? 개인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국가가 국민을 안전하게 보살필 수 없다. 노자는 이미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과연 우리는 자신의 몸을 천하만큼 사랑하는 자에게 이 나라의 운영을 맡기고 있는가? 저 국회에 있는 국회의원 중에서 과연 얼마만큼이 그러할까?

 

 최진석을 통한 <도덕경> 읽기는 나에게 새로운 관점을 안겨주었다.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를 통해서, 하상공주에 근거한 노자 이해를 주로 해왔다면, 최진석을 통해서 대립 면의 관계성을 강조한 '(有無相生)'이라는 문구를 통한 노자 이해는 <도덕경> 이해를 한 차원 높여주었다. 그리고 '보통명사'로 살기보다는 '고유명사'로 살라는 말을 되뇌며, 학생들에게 남이 정해 놓은 목표를 살기보다는 자신이 정한 자신의 삶을 살도록 안내하는 교육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개별 자의 독립성보다는 관계성에 주목하고, 나의 삶을 살자! 오늘도 나는 <도덕경> 읽기를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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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를 뒤흔든 말, 말, 말
제임스 잉글리스 지음, 강미경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세계적인 명언과 연설들을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다. 인간의 말은 맥락속에서 이해해야한다. 여론을 호도하는 극우 정치인들은 특정인의 주장을 앞뒤 맥락을 잘라버리고 자신이 편리한데로 이해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악날한 수법을 사용한다. 맥락을 떠난 말은 진실을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진실을 알고 싶다면 그 말의 앞뒤 맥락을 살펴보아야한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뒤흔든 말들을 살펴보고 싶었다. 그 말들의 앞뒤 맥락을 살펴보며 그 말들의 위력을 이해해 보고 싶었다.

 

1. 연설문 선정의 빛과 그림자

  이 책의 저자 제임스 잉글리스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저널리스트이다. 서양인이라는 그의 출신은 세계적 명연설을 선정할때도 그 한계가 드러났다. 동양의 명연설문은 간디의 연설문과 전범 히로히토 일왕의 연설이 전부이다. 최소안 동서양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은 없었다. 반면에 호주인인 그는 호주 출신의 명연설문은 꼼꼼히 챙겨 넣었다. 너무도 서양중심의 편향적인 연설문 선정이다. 제갈량의 '출사표'와 단재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을 비롯한 수많은 명문을 넣고 싶은 욕망이 치솟았다.

  이 책이 한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페리클레스의 전사자 추도 연설' 처럼 역사의 격랑속에서 이뤄진 명연설문을 만나볼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성 인권과 참정권에 관한 연설문을 비롯해서, 흑인 인권과 관련된 연설문을 수록했다. 이 책의 원제목이 'Fighting talk'이다. 단지 전쟁에 관한 연설문만을 싣지 않고 흑인 인권과 여성의 권리에 대한 연설을 빼놓치 않은 것이 이책을 더욱 빛나게한다. 물론, 흑백 인종차별 문제가 심각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저널리스트이기에 흑백 인종문제의 중요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2. 나의 가슴을 울린 말들!!

  세계의 명연설문을 묶어 놓은 이 책속에는 나의 가슴을 울린 말들이 많다. 그중에서 일부를 뽑아서 그 감동을 나눠보자.

 

  "악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선에 협조하는 것만큰이나 중요한 의무입니다." - 마하트마 간디-

 

  '간디평전'을 읽었을 때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연설이다. 지난 이명박근혜 정권 시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부역했는가? 4대강 사업에 협조하며, 때로는 침묵으로 그들에게 동조했다. 그들에게 빌붙어서, '폭식투쟁'을 하는 일배충들이 날뛰는 아비지옥이었다. 최소한 그 악의 세력에 동조하지 않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다.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쓴 저자중에는 내가 아는 사람이 2명이나 있다. 한명은 대학교시절 교수라는 작자고, 한명은 대학원에서 만난 사람이다. 최소한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라면, 박근혜정권의 국정교과서 작업이 얼마나 우리 역사교육을 뒷걸음치게하는가를 알고 있을텐데, 그들은 박근혜정권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들은 더이상 '교수님',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암흑의 9년이라는 시간 을 버틴,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당신은 용기있는자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들이 아버지를 묻는 것보다 아버지가 아들을 묻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자는 세상에 둘도 없다." -헤로도투스-

 

  평화시에는 아들이 어버지를 묻지만, 전쟁시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가슴에 먼저 묻는다. 전쟁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행위이다. 그 전쟁을 미화하며 '숭고한 전쟁'이라 말하며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떠미는 전쟁광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헤로도투스는 전쟁의 비극적 속성을 한마디로 잘 말하고 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예술의 반대는 추함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신앙의 반대는 이단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그리고 생명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무관심이다."-엘리 위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작가 엘리 위젤은 절규한다. 인류의 죄악에 무관심할때 그 악은 다시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보게 된다. 시간이 지날 수록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심이 무뎌지는 현실을 보며 엘리 위젤은 악이 다시 고개를 들것이라 몸서리쳤을 것이다. 그이 말대로 관심이 없다면, '사랑, 예술, 신앙, 생명'이 지속될 수 없다. 관심에서 '사랑, 예술, 신앙, 생명'이 지속될 수 있다. 우리 인류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관심에서 시작된다. 요즘 문제가 되는 예멘 난문문제를 비롯해서 팔레스타인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관심'에서 부터 출발한다.

 

"친애하는 세계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줄지 묻지 말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우리가 함께 손잡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물어보십시오."-존F.케네디-

 

  우리주변에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행운을 주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많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결실을 맺으려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부모 혹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행운을 주길 바라는 사람이 많다. 예전에 교장의 갑질을 보면서 어느 선배교사가 "아니, 왜? 전교조는 뭐하는거야!"라는 말을 나에게 했다. 그 선배교사는 전교조가 모든 학교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투였다. 그래서 물었다. "그럼 선생님은 전교조에 왜? 안들어오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교사라는자는 전교조의 문제점을 말하기 시작했다. 용기가 없어 교장의 갑질에 숨죽이는 비겁한자가, 전교조 선생님들에게 앞장서서 갑질에 대항해주길 바라면서, 그들은 절대 전교조와 같이 연대하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교조를 욕하면서 전교조가 일구워 놓은 곡식만을 거둬들이려한다. 그들에게 케네디의 말을 해주고 싶다. 옥토를 물려주지 않은 부모를 원망하기 보다는, 자신이 개척할 황무지를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라! 황무지를 옥토로 일굴 수 있는 부모에게 축복을 주어라! 누군가 자신에게 행운을 주기만을 바라는 거지 근성을 버려라!

 

"우리는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키러 들어가는 것이며, 저 고대의 땅에 깃발이 휘날린다면 그것은 그들의 깃발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 존경심을 보여라."

"제군은 전투에서는 인정사정 두지 않되 승리에서는 관대해야 한다."

"(이라크) 그 나라에 가거든 살살 걸어라. 아무리 사소한 것도 함부로 대해선 안된다. 이라크 국민처럼 고결하고 관대하면서도 올곧은 국민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팀 콜린스 중령-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전, 쿠웨이트 사막의 포트 블레어 메인 기지에서 콜린스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감동적인 연설을 약800명의 미군에게 한다. 이것이 이라크를 침공하는 미군 장교의 연설이라면 당신은 믿겠는가? 미군이 1945년 9월에 인천항을 통해서 한반도에 들어서면서 그들은 '점령군'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2003년 미군은 스스로 '해방군'으로 이라크에 간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미군에 팀 콜린스 중령과 같은 군인들만 있었다면, 이라크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됐을 것이다. 전쟁터로 가는 미군이 자신의 적국 국민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존경심을 보이라는 연설을 한다. 이것이 그대로 실천되었다면, 미국은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미군 최고 책임자, 부시 대통령 밑에 어찌 이리도 참다운 군인이 있을 수있는가?라는 의문이 계속해서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장교가 꿈인 학생들에게 읽히고 싶은 명연설문이다.

 

"아내의 잘못에는 눈을 감고

아내의 미덕에는 후하게 칭찬하라."-윌리엄 피트가 영국 하원 연설에서 프라이어의 시를 인용-

 

무릎을 탁치게하는 명언이다. 두고두고 마음에 새겨야하는 시구절이다. 아내의 잘못에 눈을 감고 아내의 미덕에 후하게 칭찬해야 가정이 화목하고 평온해진다. 그런데 그것이 잘되지 않는다. 특히 아내의 미덕을 후하게 칭찬하지 못하는 나를 자주 발견한다. 무덤덤한 한국남자의 한계를 이제는 극복해야겠다.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3.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못합니다.

  이원복교수의 연수를 듣다가 놀랐던 기억이있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소크라테스가 했으며, 소크라테스는 국가를 가장 중요한게 생각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소크라테스가 했다는 도덕교과서의 서술은 잘못된 것임을 법원에서 판결로 이미 결론지었다. 그런데 이원복교수는 아직도 소크라텟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다 강의하고 있으니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독재정권시절에 만들어진 잘못된 지식이 민주정권이 들어선 지금도 횡횡하는 현실을 보면서 을씨년스러운 느낌이든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왜? 유죄판결을 받고 죽었을까? 그의 마직막 변론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좀 우스운 표현을 사용하자면 등에 처럼 성가신 나란 사람은 실은 신이 이 나라에 보냈습니다. 이 나라는 덩치가 커서 움직임이 굼뜬 준마와 같아서 생기를 불어넣을 자극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이 하루 온종일 어디서나 여러분에게 들러붙어 일깨우고 설득하고 꾸짖으라고 나 같은 등에를 이 나라에 보낸 것입니다. 다시는 나 같은 사람을 찾기 어려울 테니 나를 살려두는 게 좋을 겝니다."

 

  신에 대한 불경죄와 젊은이들을 오염시켰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그가 배심원들에게 할 수있는 말이 아니다. 그의 변론을 읽으면 그가 과연 살고 싶어서 이런말을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든다.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을 내려다보며 꾸짖고 있다. 배심원들은 소크라테스를 제정신이 아닌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아슬아슬하게 유죄판결이 나온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소크라테스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내가 한 마리를 빚졌네. 기억해 두었다가 갚아주게"라고 했다. 의술의 신에게 빚을 졌다는 말을 통해서 그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죽음을 택했고, 그래서 배심원들의 유죄선고를 유도했다는 점에서 그는 탈출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독배를 마셨다.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

  우리가 아는 명연설중에 페리클레스의 전사자 추도 연설을 빼놓을 수 없다. 세계사 시험문제 지문으로도 자주나오는 이 명연설을 직접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도 무척 행운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페리클레스의 명연설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없는 내용이 있다.

 

  "아직도 출산할 수 있는 나이라면 죽은 자식을 대신할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기운을 내십시오. 새로 태어난 자식은 잃어버린 자식을 잊게 해줄 뿐만 아니라 부국강병에도 기여할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에게 할 말인가? 개인을 부국강병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고 있다. 마치 개인은 국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들리는 이 연설을 21세기에 한다면 아마도 수많은 여성들의 미투의 대상이 될 것이다.

  요즘, 미투운동이 거세게 불고 있다. 일찍이 여성운동의 선구자로서 활약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의 연설을 읽으면, 몹시 불편한 느낌이 많이 든다.

 

"남성성은 파괴적이고, 고집스럽고, 이기적이며, 과정이 심하고, 전쟁과 폭력과 정복과 탈취를 사랑하고,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모두에 불화와 무질서와 질빙과 죽음을 야기합니다."

 

  워싱턴에서 여성참정권을 요구하며 이러한 연설을 한 그녀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여성과 남성은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화합의 관계여야한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주어야한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적으로 돌린다면 인류는 생존할 수없다. 나의 주장이 옳다고 타인의 인격을 말살하는 행위는 인류를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여성이 권력을 쥔다고 반드시 여성성을 발휘하여 세상을 평화롭게 만든는 것도 아니다. 박근혜 전대통령을 보면서 과연 여성이 권력을 쥐면 반드시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볼 수있을까? 남성이든 여성이든 권력을 쥐면 누구든지 폭군도 될 수 있고, 현군도 될 수있다.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 각각의 그릇의 차이이다. 권력을 참되게 행사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닌자가 권력을 갖게되면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의 여성운동도 서로를 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화합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루디 줄리아니 유욕 시장의 명연설을 읽으며, 그의 테러없는 세상을 향한 이상에 공감한다. 그러나 테러의 원인을 다각도로 보지 못한점은 매우 아쉽다. 9.11테러의 원인을 미국의 패권주의에서 찾는 의견이 많다. 오사마 빈라덴이 사실은 사우디의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그가 왜? 반미주의자가 되었는지 생각해보아야할 것이다. 지금 서아시아(중동) 문제의 근본적원인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배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순 중에 하나는 강대국들! 정확히 이야기하면 매이져 석유기억들이 너무도 싼값으로 석유를 중동에서 사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의 자원이 강대국들의 매이져 기업들에 의해서 헐값으로 팔려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분노를 쌓았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과 아프카니스탄 전쟁을 거치면서 테러리스트들은 그 분노를 더욱 키웠다. 마침내 'IS'라는 괴물을 탄생시켰다. 테러와의 전쟁이 오히려 테러라는 괴물을 키우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다. 이책에 소개된 많은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는 연설을 쫒은 결과는 너무도 참담하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용서'와 '사랑'일 것이다.

  하임 헤르조그의 '시오니즘은 인종주의'라는 유엔 결의안에 대한 반박 연설을 읽으며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하임 헤르조는 나치에 의해서 벌어진 '크리스탈나흐트(수정의 밤)'사건에서 이야기를 출발한다. 마치 시오니즘을 인종주의로 규정한 사람들이 나치의 동조자인 듯한 인상을 주는 연설을 읽으며, 오늘날의 팔래스타인 문제가 떠올랐다. 어제의 약자인 유대인들이 오늘의 강자가되어, 오늘의 약자인 팔래스타인인들에게 가하는 참상이 떠올랐다. 폭력은 대물림되는 것일까?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다.

 

4. 연민의 글

  강해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때로는 연민의 정이 든다. 강철같은 심장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엘리자베스 1세, 사자의 심장을 가진 맹수로 보이는 나폴레옹! 그들의 글에서 오히려 연민이 느껴진다.

  이 책에 따르면 엘리자베스는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통념을 거부하면서 예사로 침을 뱉고, 욕설을 일삼고, 맥주를 즐겨 마셔 백성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당신은 이 글을 읽으며 어떤 마음을 들었는가? 엘리자베스에게서 정이 떨어졌는가? 나는 오히려 그녀가 애처럽게 보인다. '천일의 앤'이라는 이야기로 유명한 그녀의 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했다. 가장 행복하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여야할 부부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고 죽임을 당하는 관계가 되었을 때, 자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남성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그녀는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곡된 남성상은 그녀를 불행에 빠뜨렸다. 그녀는 '국가와 결혼했다.'라고 말하며 결혼을 거부한 것도 그녀의 불행한 가정사에서 비롯되었다 본다. 남자를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마음은 상처를 받았다. 누구도 그녀의 아픔을 보듬어줄 수없었을 것이다.

 

"프랑스, 군대, 조세핀"-나폴레옹-

 

  나폴레옹이 1821년 죽음에 임박했을 때, 그의 본처 조세핀의 이름을 불렀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녀와 이혼했다. 그리고 아들을 얻었지만, 그는 황위를 잃어버린다. 조세핀과 있을때, 그는 인생의 오르막길에 올랐고, 그녀를 떠나보면서 그의 인생도 내리막길을 걷는다. 죽음의 모래시계가 떠날때를 알릴때, 그는 자신의 인생을 떠올리면서 얼마나 많은 회안을 느꼈을까?

 

"그대의 선조들이 큰 물을 건너 이섬에 상륙하면서 말이오.  (중략) 그러면서 조그만 자리 하나만 달라고 청했소. 우리는 그들을 가엾게 여겨 그 부탁을 들어주었고, 그들은 우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소. 우리는 그들에게 옥수수와 고기를 주었으나, 그들은 그 보답으로 우리에게 독을 주었소."

"형제여, 예전에는 우리의 자리가 넓었고 그대들의 자리는 무척 좁았소. 이제 그대들은 아주 큰 민족이 되었고, 우리에게는 담요를 펼 곳마져 남아 있지 않소. 그대들은 우리나라를 온통 차지해 놓고도 만족할 줄을 모르는 구려. 우리에게 그대들의 종교까지 강요하려 들다니 말이요."-사고예와타 추장-

 

  청교도들을 환대하며 친구로 대해주었지만, 그들은 인디언친구들의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낯선 사람이 오면 환대하라 가르친다. 그러나 진정으로 환대한 것이 오히려 독으로 되돌아 오기도한다. 사고예와타 추장의 말은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한다. 환대만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환대받을 가치가 있는자에게만 환대를 해야한다. 환대할자와 환대하지 말아야할자를 구분하는 능력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 제주도의 예멘 난민들은 환대의 대상인가? 환대하지 말아야할 자인가?

 

"오스트레일리아 노동자들은 영국의 대의가 정당하다고 굳게 확신하기에 그 중추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전력을 다해 기여해왔습니다.(중략) 그들의 조상은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에서, 스코틀랜드에서, 웨일스에서 왔습니다. 그들은 영국 국민을 수세기에 걸쳐 결집시켜온 핏줄과 영광과 말을 물려받았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인종과 언어가 본토와 같은 영국 땅입니다."-존 커틴-

 

영국의 이익이 자신들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생각을 읽으며 착잡한 연민을 느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을 위해서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일본군이 남진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를 위협하자 영국은 과연 오스트레일리아를 위해서 싸웠을까? 처칠은 오스트레일리아와 아시아를 일본에 넘겨주는 한이 있더라도 미국 군대를 영국 방어에 투입한다는 내용의 비밀협정을 루스벨트 대통령과 체결하기도 했다. 스스로를 영국인으로 착각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인의 모습을 보면서 착잡한 연민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이 책에는 우리의 피를 끓게하는 많은 연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연설들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중에서 '징병과 전쟁을 비판한 무정부주의자의 연설'을 한 에머 골드먼이 가장 인상적이다. 그녀는 투옥과 추방을 여러차례 당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녀는 "미국 국민 모두가 들고 일어나 우리는 누가 뭐래도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미국의 남녀 무구에게나 자유와 기회를 의미하는 그런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말할 것'이라고 외친다. 그녀는 온몸으로 주어진 천국은 없음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천국을 원한다면 당신이 사는 이땅을 천국으로 만들라고 우리에게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과거 이명박근혜정권에서 새로운 천국을 맛보기 위해서 이민을 가려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천국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땅을 천국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은 어느곳에서도 천국을 발견할 수 없다. 이땅이 지옥이라면, 우리 다함께 이땅을 천국을 만들기 위해 힘을 모으자! 그것이 이땅을 살아갈 자격이 있는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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