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 - 인도사로 본 한국사회
이광수 지음 / 이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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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에게 일본혼을 심어줘야 하다. 그렇지 않고 조선인의 민족적 반항심이 타오르게 된다면 이는 큰일이므로 영구적이며 근본적인 사업이 필요하다. 이것이 곧 조선인의 심리연구이며 역사연구이다."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말이다. 역사가 핵무기보다 무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라는 이광수의 책은 인도사를 바라보는 통찰력으로 한국사의 아픈 곳을 꿰뚫어 보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가 서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만들어진 인도'라는 사실에 놀라고, 인도의 다르면서도 비슷한 한국의 모습에서 다시한번 놀란다. 책장을 읽으며, 연신 핵폭탄을 맞은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인도에 대해서 한국 사회에 대해서 고민했다. 인도사학자 이광수가 전해준 충격을 함께 나눠보자.

 

1. 만들어지는 역사

 '역사는 과거의 객관적인 사실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한번 지나간 역사는 똑같이 재현될 수 없다. 과거 사실을 카메라로 똑 같이 찍어 놓지 않는 이상 과거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알 수 없다. 설혹 카메라로 과거 사실을 찍는다 하더라도,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이 어떠한 관점에서 사실들을 찍고 편집하는가에 따라서 과거 사실은 새롭게 창조된다. 인도의 역사도 역사의 재창조, 재해석 작업이 끊임 없이 진행되었다. 자신들에 의해서,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서 확대 재생산된 인도사는 인도인의 마음을 올가 메고 있다.

  인도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많은 사람들이 '힌두교'를 떠올릴 것이다. 저자 이광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힌두교를 설명하면서 '피자 효과'를 언급한다. 신혼여행을 로마로 갔을 때 맛보았던 담백한 이탈리아 피자는 다시 미국으로 전해져서 미국식 피자로 다시 태어났다. 이탈리아의 번화한 중심상점에는 미국식 피자가 즐비했다. 반면, 전통 이탈리아 피자를 먹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서민들이 살고 있는 골목을 찾아가야했다. 이탈리아를 점령한 '미국식 피자' 처럼, 인도의 힌두교는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서 한번 굴절되었다. 그리고 초강대국 미국에 의해서 왜곡되었고, 다시 인도가 이를 역수입하면서 '미국식 힌두교'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 힌두교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그 속에는 서로 상반된 주장과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불살생과 소숭배, 정신적 안정의 추구를 핵심으로하는 힌두교만이 서구에 의해서 확대 재생산되었고, 이를 힌두교의 전부라 믿는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인도의 슬픈 현실은 우리에게도 찾아볼 수 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라는 이미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서구인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신경쓰며, 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한국의 이미지를 통해서 한국의 것을 찾는 어리석음을 우리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스스로 근대화를 이루려할 때, 강력한 제국즤의의 군화발에 짓밟혔던 약소국들!! 그들은 스스로의 문화를 고민해볼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많은 고유문화들이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사라졌다. 타국의 시선이 아닌, 우리의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도에 대한 다른 선입견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 '인도는 종교의 나라이다.' 혹은 '인도는 종교 때문에 서로를 죽이기도 한다.'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중세 인도에 침입한 무슬림들이 인도의 사원을 약탈했으며, 이것이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의 시작이라는 생각에 저자 이광수는 정면 반박한다. 소미나타 사원 약탈 사건을 살펴보면, 무슬림의 기록에는 대대적인 약탈 사건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힌두인들의 기록에는 그러한 기록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우상을 파괴했다는 자랑꺼리로 소미나타 사원 약탈을 과장했을 것이라는 것이 최근의 연구성과라 이광수는 주장한다. 그런데,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인도를 식민지배하면서 종교로 분할 통치하려했고, 서구 역사학자들은 충실히 제국주의자의 의도에 복종했다. 이슬람인들만의 기록을 토대로 힌두와 무슬림의 대립은 필연적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역사는 현재 인도를 종교 분쟁의 사회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서 마들어진 역사의 족쇄는 다시 인도인들을 분열과 대립의 사회로 만들어가고 있다.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서울 수 있다. 역사라는 무기를 수구세력이 잘알고 있었다. 뉴라이트세력들은 뉴라이트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만들었으며, 국정 한국사교과서를 만들려했다. 친일파 중심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분열과 대립, 좌절과 노예근성을 심어주려했던 그들의 노력은 다행스럽게도 촛불혁명으로 좌절되었다. 수구세력이 역사라는 무기의 중요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던 시기에, 진보라는 사람들은 역사에 무관심했다. 역사를 수능 선택과목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우리의 역사를 말하는 것을 쇼비니즘적인 생각으로 몰아붙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해야할 때에 역사라는 배타적 민족의식을 기르는 과목에 주목할 필요가 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역사는 평화를 지키는 수호천사가 될 수도 있으나, 세상을 아마게돈으로 몰고갈 수 있는 핵무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할 것이다.

 500년 후,  '전두환은 평화주의자다.'라는 기록을 학생들이 배우게 된다는 상상을 당신은 해보았는가? 저자 이광수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와 비슷한 일이 인도사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쇼카왕은 인도 대륙을 정복하고 전쟁의 비극을 깨닫는다. 그리고 평화주의자가 되었다고 많은 이들이 믿고 배우고 가르치고 있다. 만약 아쇼카가 평화주의자라면 깔링가 정복 후, 15만 명의 포로를 풀어주었어야했다. 그러나 아쇼카는 15만 포로를 풀어주지 않았다. 그가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한 이유는 더 이상 추가적인 대외 팽창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일 뿐이다. 대외팽창보다는 충분히 팽창된 영토를 안정적으로 다스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뿐이다. 제대로된 사료 비판을 하지 않고, 아쇼카가 남긴 글들만 그대로 믿는다면, 전두환이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반포한 글들을 그대로 진실로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이러한 이광수의 지적은 나의 머리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사료비판!! 이는 깨어있는 사람이 되기위한, 깨어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필수 요소였다. 아쇼카가 만들어 놓은 아쇼카식 역사를 바로보지 못한다면, 500년 후, '전두환은 평화주의자다.'라는 왜곡된 역사를 우리 후손들이 배우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

 

2. 인도사를 통해본 한국의 민낯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저자 이광수의 날카로운 인도사에 대한 통찰에 놀라고, 그의 한국사에 대한 송곳 같은 비판에 아파한다. 우리는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으로 인도를 바라보았다. 그러한 잘못은 우리가 우리를 바라볼 때도 반복된다. 진정한 자아를 찾이 못한 인도와 한국의 모습은 너무도 닮아 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인도와 한국의 모습을 살펴보자.

  '네루왕조'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네루를 비롯해서 그의 딸인 인디라 간디, 인디라 간디의 큰아들 라지브 간디로 이어지는 네루 혈통들이 인도의 수상직을 역임했다. 네루의 후광을 등에 업고 검증보다는 혈통을 중요시하는 전근대적인 모습은 한국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버지 박정희가 18년 동안 철권통치를 했다. 그리고 박근혜는 정치를 시작한지 18년만에 18대 대통령이 되었다. 인간은 왜이리도 어리석을까? 한 나라를 이끌 지도자라면, 혈통보다는 능력을 보아야한다는 진리를 그들은 모르는 것일까? 무당에게 연설문을 수정받고, 세월호 7시간 동안 머리 올리기에 정신없었던 지도자를 아직도 추종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박근혜 통치시기, 국민은 좌와 우로 분열되었다. 박근혜는 한국인 모두의 대통령이기 보다는 보수의 대통령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Divide and rule(분할하여 통치하라)"의 통치방식은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배하면서 사용한 방식이다. 힌두와 무슬림을 분리하여 인도인들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막는 방법이다. 물론, 일제가 문화통치시기 친일파를 양성하여 우리민족을 분열시키려했던 것과 같은 방법이다. 사회를 하나로 통합해야하는 것이 지도자의 의무일 터인데, 자신의 권력을 쥐려 국민을 갈라치기하는 비열한 통치는 인도와 한국에서 똑같이 찾아볼 수 있다.

  "나는 학습지를 만들지 않아, 인터넷에 보면, 나보다 더 잘만드는 사람들이 많은데뭐!" "SKY 나온 애들이 나보다 잘하잔아. 그네들을 믿어"라는 말을 젊은 시절에 선배 교사로부터 들었다. SKY 출신이라면 주눅부터 드는 나약한 선배교사! 자신의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선배교사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많이 느꼈다. "SKY는 최고"라는 신화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최고의 실력을 갖추었으며, 나는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패배감을 내재화하고, 한국사회의 주인으로 살기보다는 노예로 살려는 자들이 우리주변에는 너무도 많다. 한편, 한국사회의 "SKY 출신"이라는 신화는 다시 수구 신문에 의해서 합리화되고 있다. 수구신문은 한국사회의 평화와 자주를 싫어한다. 일본자위대의 위협비행을 수구신문은 일본의 편에서 일본의 입장을 대변한다.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제한을 일본의 입장에서 변호한다.

   이러한 모습을 인도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브라만 세력을 약화시키려했던 아쇼카왕의 노력은 그가 죽자 실패로 끝났다. 결국, 브라만과 왕은 타협한다. 브라만은 현실 세계의 왕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 댓가로 브라만은 경제적 풍요를 누린다. 브라만은 자신의 특권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신화'를 만들고, 그 신화에 자신을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왕의 족보에 삽입해준다. 견고한 브라만의 '신화'는 현대 인도사회 속에서도 살아남아 있다. 다른면서도 비슷한 인도와 한국의 모습을 보면서 씁슬함을 감출 수 없다.

  인도농민의 자살 쓰나미가 밀려왔다. 2006년 한해 동안 1만 7060명의 농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국적 농업회사의 횡포속에 나약한 농민들은 죽음의 길을 택했다. 개방화 신자유주의의 높은 파고를 헤쳐나가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농민의 모습은 한국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더이상 농민의 죽음이 신문 지면을 장식하지는 못한다. 개방화 속에 농촌에는 젊은이가 없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사라진지 오래다. 농촌은 공동화되고 있다. 인도보다 더 심각한 농촌문제를 보면서 사라지는 농촌을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괴롭다.

  저자 이광수는 냉철하게 인도역사를 읽어내려간다. 인도 고대사를 전공한 그가 인도의 현대사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를 날카롭게 꿰뚫어보고 있다는 점에서 연신 감탄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묻는다. 우리는 우리를 제대로 보고 있었던 것일까?

 

3. 과연 그럴까?

  날카로운 이광수의 글들을 읽으면서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저자 이광수와 나의 역사관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는데 어찌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없을 수 있었겠는가? 이광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을 살펴보자.

  첫째, 굽타 시대를 '고대 인도의 황금기'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인가? 저자 이광수는 굽타시대 브라만을 5.18 후 전두환을 위해서 기도한 목사들에 비유한다. '마누법전'에 브라만의 특권을 합리화하는 내용이 있다는 내용은 카스트에 저항하는 조짐이 빈발했다는 반증이라 주장한다. 이시기 발달한 언어학과 천문학은 신을 위한 것들이라 주장하며, '고대 인도의 황금기'라고 보기 보다는 '브라만 문화의 황금기'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라 주장한다. 이광수는 브라만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심하다는 생각이든다. 문학, 천문학, 언어학이 신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발전했다면 그것은 인도문화의 한부분이다. 따라서 그 가치를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사실 따지고 보면, 고대의 문화들은 지배층의 문화가 아니었던가? 그리스로마의 문화도 수많은 노예 노동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진배층의 문화였다. 중세의 성당들도 농노들의 경제력을 찾취해서 만들어진 기념물들이었다. 조선 세종시대의 문화도, 조선의 농민들을 수탈해서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들 문화들의 가치를 평가절하하지는 않는다. 그시대 그 사회의 생산력의 한계가 분명히 있었기에 그것 나름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둘째, 민족주의는 반역일까? 저자 이광수는 "민족주의가 강할 수록 다른 의제는 위축된다."라고 주장한다. 민족주의 담론만이 지배될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비타민C를 과다 섭취할 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민족주의의 과다는 분명 심각한 문제를 유발시킨다. 그러나, 인간이 생존하는데 비타민C가 필요하듯이, 인류가 생존하는데 민족주의는 필요하다. 이광수가 지적하듯이 거대한 인도가 작은 나라 영국의 식민지가 된 것은 인도인에게 '민족'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말했듯이, 사피엔스가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을 박멸하고 지구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상상의 공동체를 믿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강력한 '민족'이라는 무기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파괴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을 보호하는 안전망이 될 수도 있다. 서구의 강대국들은 민족주의라는 무기를 선업혁명과 결합시켜 대외 팽창의 에너지로 활용했다. 그들의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은 민족이라는 개념을 수입했다. 저항적 민족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히틀러의 극단적 민족주의를 경험한 서구는 민족주의를 반역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서구의 이론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학자들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한국도 서구와 같이 원초적 민족의식이 없었다고 규정한다. 사실 유럽은 근대에 국민국가가 만들어졌다. 그러니 민족이라는 원초적 개념이 근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고대부터 '삼한일통'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타민족을 지배하면서 팽창해간 역사가 아니기에, 좁은 한반도에서 동류의식을 키워갔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왕을 버리고 일본군에게 세금을 바치면 될텐데도, 조선의 백성들은 왜군에 맞서 싸웠다. 못난 지배층을 버리지 않고 피눈물을 흘리며 이땅을 지켜낸 민초들을 보면서 묻는다. '무엇이 당신들을 싸우게 만들었냐고?' 왜군이 이해못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일본에서는 성의 주인이 바뀐 것은 백성들에게 세금낼 대상이 바뀐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조선의 백성들을 달랐다. 원초적 민족의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땅을 지켜올 수있고, 통일을 이끌수 있는 원동력이 '민족'에 있다. 민족이라는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법으로 사용하고, 민족주의에 가려 의제화되지 못하는 의제를 발굴한다면, 민족주의는 반역이 아닐 수 있지 않을까? 완벽한 이념과 사상은 존재할 수 없기에 '민족'을 수선해서 인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어떨까?

  셋째, 변혁인가! 안정인가! 저자 이광수는 말한다.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사회에서 방치되어 있는 계층이 이렇게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나라는 없다. 총기가 난무하는 5.18때도 전당포 한 곳 털리지 않았고, 전국에서 백만명이 모여 촛불을 밝히면서도 사건 사고 한건 터지지 않았다."라는 글을 읽으면서 생각에 잠긴다. 박노자가 '평화적인 방법만을 고수'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글을 쓴적이 있다. 그들에 눈에는 한국인들이 평화적인 방법만을 고수하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다. 평화적 3.1운동에서 평화적 촛불집회가 이상해보일 수도 있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일제의 식민지배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냉정한 비판도 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무장투쟁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사회적 안정이 사회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알고 있지 않은가? 영국이 대영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명예혁명을 비롯한 정치적 사회적 변혁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반면 프랑스는 혁명과 반혁명을 거치면서 국가의 에너지를 국가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소비했다. 영국과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영국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연기에 있었다. 평화적 방법을 통해서 정권을 교체시킨 우리의 저력은 비판의 대상이기 보다는 타국이 배워야할 교본이 아닐까?

  저자 이광수의 주장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단지 나와 관점이 다를 뿐이다. 그의 탁월한 시선을 따라가며 그의 주장에 반문을 던지는 경험 자체가 나로서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실 이광수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겨울의 세계사 연수에서였다. 인도사의 권위자를 만나 인도사에 대한 편견을 수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책을 읽으며, 인도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우리 사회와 나 자신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가장 흥미로웠던 주제는 '인도는 왜 매국노가 없을까?'라는 주제였다. 세계사 연수에서는 한국에서는 매국노가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인도는 그러하지 않았다고 규정한다. 이 책에서는 여기에 "인도에서는 대영제국의 지배에 찬성하는 이들이 존재의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 만한 식민지배를 했지만, 한국에서는 친일 세력이 존재의 정당성을 가질 수 없는 식민지배를 했다."라고 말한다. 한국사의 맥락에서 인도사를 이해할 때 벌어질 수 있는 오류들! 인도사는 인도사의 맥락에서 이해해야함을 다시한번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인도사와 한국사를 비교함으로서, 그 대비를 통해서 한국사를 분명히 알게되기도 했다. 그래서 일국사를 뛰어넘어 세계사의 시각에서 한국사를 바라보자는 말이 설득력을 얻나보다.

  부처는 자신을 신으로 신봉하라 말하지 않았다. 그져 먼저 깨달은 사람일 뿐이다. 자신을 숭배하는 것을 철저히 부정했고, 한곳에 머무르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불교는 부처의 말을 어기고 불교 교단을 형성했다. 인도에서 불교가 융성할 수록 불교의 퇴보는 시작되었다. 발전이 퇴보로 이어져 인도사회에서 불교가 힌두교에 포섭되었다. 서구의 일직선적, 단선적 발전 사관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인도의 다양한 역사와 문화는 사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화두를 던져준다. 사고의 확장을 바라는 독자, 인도사를 바로보는 것을 뛰어넘어 한국사를 꿰뚫어보고 싶은 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ps.  이책을 사랑하는 관점에서 오류 몇가지를 지적한다. 인도사 전공자이다보니, 한국사에 대한 설명에서 오류가 몇가지 보인다.

144쪽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거란족이 함께 만든 나라"라는 표현은 '거란족'을 '말갈족'으로 수정해야한다. 거란족은 발해를 멸망시킨 족속이다.

157쪽 "5세기경 고구려에서는 차별을 기초로한 율령적 신분제가 나타났다. " 고구려는 4세기 소수림왕때 율령이 반포되었다. 5세기를 4세기로 수정해야한다.

265쪽 "쇄국"이라는 용어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수정해야한다. 한국사 용어가 바뀌었다.

75쪽 "항일 독립군에 가담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왕조의 복원을 주장했다. 그들이 꿈꾼 것은 평등사회건설이 아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라는 서술은 매우 잘못된 표현이다. 물론 왕정복구를 추구한 세력이 있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공화정으로 대세가 바뀌었다. 3.1운동의 결과 민주공화정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부분은 반드시 수정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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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I 행동의 심리학 - 말보다 정직한 7가지 몸의 단서
조 내버로 & 마빈 칼린스 지음, 박정길 옮김 / 리더스북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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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유난히도 눈치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상대방의 얼굴 표정을 읽고, 재빠르게 대처해야하는데 그러질 못한다고 핀잔을 많이 듣는다. 핀잔을 가장 많이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이 있는 나의 아내이다. 포카페이스를 못하며, 돌려서 말을 못한다. 상대방이 돌려서 하는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한다. 상대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는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상대를 진실하게 대해야하는 것은 진실을 말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눈치없는 나의 단점을 보완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행동 심리학 서적을 뒤지다가, 'FBI 행동의 심리학'을 집어들었다. 전직 'FBI' 대적첩보 특별 수사관 조 내버로가 쓴 책이라는 말이 나의 구미를 당겼다.

 

1. 행동의 심리학은 과학적 근거가 있는가?

  전직 FBI 조 내버로의 글은 25년 동안의 경력에 근거하고 있기에 믿음이 갔다. 그러나, 학문적 근거가 있는 말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었다. 조 내버로는 나의 의구심을 미리 예상한 듯하다. 그는 진화 심리학의 관점에서 '인간을 지키는 3단계 생존 매커니즘'을 제시한다. 정지(Freeze), 도망(Flight), 투쟁(Fight)은 인간이 위험에 처했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 발휘했던 행동들이다. 이 생존의 기술들은 오랜 진화의 시간을 거쳐 현생인류에게 내재화되었다. 특히 우리의 변연계는 우리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무의식적으로 우리몸을 움직인다. 말과 표정에서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 지라도, 발과 몸짓은 진실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생존 전략을 우선적으로 써야할까? 조 내버로는 '가급적 투쟁반응을 자제해야한다.'고 조언한다. 그 이유는 '처음부터 공격적인 전략을 쓸 경우 감정이 혼란스러워지면서 위협적인 상황을 냉철하고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라 말한다. 맞는 말이었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학생보다 먼저 흥분하는 경우이다. 그럴경우, 사건은 제대로 수습되지 않는다. 나00 교감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먼저 흥분하거나 화를 내면 지는거야!" 맞는 말이었다. 학생이 어떠한 불손한 말을 할지라도 먼저 화를 내서는 안된다. 항상 침착하고 논리적으로 대응해야한다. 항상 상벌점 규정과 징계규정, 학교 교칙을 머릿속에 넣어두고, 학생 반발시에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대답해야한다. 권위적으로 응박질러서 생활지도가 되는 시기는 먼옛날 옛적일이었다. 흥분한 변연계를 잠재우고, 냉철한 전두엽을 활용해서 냉철하게 일처리를 해야함을 알게된 나에게, 조 내버로의 조언은 행동의 심리학이 상당히 실용적인 책임을 확신케했다.

 

2. 작은 차이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호텔에 묵고 있는 조 내버로에게 호텔 주인이 부탁했다. 자신의 보안대원이 완벽한데 무언가가 빠진것 같으니 이를 해결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조 내버로의 해결책은 '손을 뒤로하고 턱을 올리라'는 것이었다. 너무도 작은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차이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위엄이 부족했던 보안대원들에게 상당한 위엄을 주었으니 말이다.

  그렇다.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온다. 우리 주변에서 권위가 필요한 공간과 친절함이 필요한 공간이 있다. 공간의 변화에 따라서 공간에 알맞은 손동작, 제스춰를 한다면 나는 공간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 교실에서 나의 손동작과 발동작을 어찌해야하는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 힌트를 이 책에서 찾았다. 학부모와 상담할때, 학생과 상담할때, 관리자를 비롯한 동료교사와 대화하면서 그들에게 나는 어떠한 제스춰를 해야할지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에서 어떠한 단서를 찾을 수 있는지 고민했다. 책을 읽으면서, '넛지'가 생각났다. 강압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계입 '넛지'!! 나의 행동 하나 하나는 하나의 '넛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상대방의 의도를 읽고 이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3. 행동의 심리학에 오류는 없는가?

  '등뒤에 팔을 두는 태도는 '왕의 자세'로 불리며,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의미를 전달한다.'라는 설명을 당신은 동의하는가?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 앞으로 구부정한 자세로 걷는 걸음걸이를 교정하기 위해서 '왕의 자세'를 한다. 뒷짐을 지고 걸으면서, 나의 자세를 교정하려 노력한다. 이러한 나의 모습을 보고, '왕의 자세'를 하고 있다며,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뭐라 변명해야할까? 행동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행동읽기들은 절대적이라 말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제한된 정보나 한가지 관찰에 근거해 누군가에게 거짓말 쟁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도록 조심하라"(261쪽)

 

  책을 끝맺으며 조 내버로는 얇팍한 지식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오만을 경계하라 당부한다. 우리말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말이 있다. 비언어적 행동은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대처하기 위한 참고자료일 뿐이다. 절대적 경전이 아니다. '왕의 자세'가 나에게는 자세 교정을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거드름을 나타내는 표시일 수 있다. 행동 심리학을 절대적 좌표로 이해하기 보다는 삶에 지혜를 얻을 수 있는 하나의 부표로 삼아야할 것이다. 진실을 알기 힘들때, 행동 심리학을 떠올리자, 그리고 힌트를 얻자.

 

  '상대가 이러한 행동을 하면, 그는 이러한 심리이다.'라는 법칙화된 절대적 진리를 제시할 것으로 기대하고 읽었던 '행동의 심리학'은 절대적 진리를 찾기 보다는 '대인관계를 풍부하게 해줄 지식을 얻게 되었다.'는 기쁨을 가지고 참고 자료로 활용하라 한다. 그렇다. 비언어적 행동의 노예가 되기 보다는 비언어적 행동의 주인이 되어야한다. 나의 인간관계를 도와주는 참고자료이며, 갈피를 못잡는 나에게 경계선을 알려주는 부표로 '행동 심리학'을 활용해야겠다. 인생이라는 기나긴 항해를 도와주는 별자리 처럼 '행동 심리학'을 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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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풀어낸 고려 왕 34인의 이야기
석산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역사학에도 심리학을 접목시킬 필요가 있다." 고려시대사 강의를 듣던중, 문철영 교수가 던졌던 화두였다. 역사학은 딱딱하고, 대중의 관심을 잃어가고 있다는 고민이 깊어가던 시기였다.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라 생각했던 역사가, 재미없고 딱딱한 학자들만의 이야기 남아 있는 현실은 너무도 안타깝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심리학과 역사학을 접목시킨다면, 역사속 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그들이 그러러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고, 역사학의 재미는 배가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감돌았다. 드디어 심리학의 눈으로 역사적 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본 책을 만났다. '심리학으로 풀어낸 고려왕34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문종을 재발견하다.

  고려시대,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장수왕시기, 백제는 근초고왕시기, 신라는 진흥왕 시기, 발해는 선왕시기, 조선은 세종대왕 혹은 영정조시기를 전성기로 생각한다. 그러나, 고려의 전성기는 언제였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한국사 교과서를 펼쳐보자. 태조왕건이 나라를 세우고 광종과 성종 치세에 국가 기틀을 잡다가, 거란과 여진의 침략을 물리치지만, 몽골의 오랜 침략 속에서 결국 굴복한다. 그 굴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공민왕이 노력했지만, 결국 고려의 혼란은 수습되지 않고 조선왕조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고려는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혼란기에 접어들었다는 인상을 주는 서술이다.

  사실 고려왕조의 전성기는 문종시기였다. 조선 세종이 셋째이듯이, 문종도 셋째로서 왕위를 계승했다. 문종시기 학문은 발전했고, 여진족은 고려에 복속되었다. 고려의 기미주로 편성된 여진족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백성들의 삶도 편안해졌다. 학문이 발전하고, 정치가 밝아졌으며, 국제 정세도 고려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종시기 역사에 대해서 교과서에서는 서술이 안되고 있다. 조선에 비해서 너무도 홀대받는 고려의 모습을 바라보며, 혹시! 식민사학의 그늘이 고려에 드리워졌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유독 고려에 대한 차별 대우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망상일까?

  문종치세를 재발견하고, 교과서 서술의 문제점가지 생각한 것은 이 책에서 문종의 심리를 분석하며 문종치세의 업적을 제시한 부분을 읽으면서부터이다. 다른 고려사 관련 책들에서 발견하지 못한 보석을 '심리학으로 풀어낸 고려왕 34인의 이야기'에서 발견했다.

 

2. 마음속에 어린 아이가 울고 있는 궁예

  드라마 '태조왕건'이 한창 방영되던 시기!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태조 왕건'인지, '궁예'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왕건보다 궁예라는 캐릭터가 주는 강렬함은 많은 시청자들을 텔레비젼앞으로 모이게 했다. 마치, 중국의 초패왕 항우와 한고조 유방의 싸움을 보면서, 승리한 한고조 유방보다, 패배한 초패왕 항우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언더도그 효과(underdog effect)' 즉, 어려운 환경에서 악전 고투를 하거나, 게임에서 지고 있는 자가 승리하기를 바라는 기대심리가 작동했을 것이다. 궁예는 왕족이지만, 아버지에게 버림받았고, 한쪽 눈까지 잃었다. 반면, 왕건은 송악의 호족 출신이다. 아버지에게 살해라는 위기에 빠져 악전고투하는 궁예를 자신에게 투영하며 사회적 밑바닥에 있는 인물이 승리하길 바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건의 승리로 결말이 지어질 것을 알고 있다. 결말을 알면서도 궁예를 마음속에서 버리지 못한 것은 궁예에 대한 미련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궁예가 승리하기를 바랐지만, 궁예는 왕건을 넘어서기에는 너무도 상처를 많이 받았다. 러레노어 테어는 '유아시절의 외상은 잊히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런 경험을 지닌 사람들의 일상은 단조롭고 냉혹한 면이 있으므로 잘 관찰하면 외상의 유무를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어린시절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궁예의 가슴속에서 커다란 상처가 있다. 그 내면에는 '버림받은 아이' 궁예가 울고 있었다. 결국, 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지 못한 궁예는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간다. 관심법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부인과 자식도 죽인다. 

  주디스 루이스 허먼은 "자신에게 일어난 상처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으나, 회복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한쪽 눈을 잃고, 힘든 삶을 살아야했던 것은 궁예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상처받은 자신의 '내면 아이'를 달래고, 스스로를 치유할 의무는 궁예 자신에게 있다.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궁예는 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현대 사회에도 수많은 궁예가 있다. '울고있는 내면아이'를 달래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아이를 달랠 줄도 모른다. 그렇다면, '울고 있는 내면아이'를 달래고 치유하는 의무를 사회가 나눠 수행할 수는 없을까? 생애전환기 검사를 하듯, 정신과 진료를 받고, 내면 아이를 치유하는 시스템을 우리도 갖길 바란다.

 

3. 절대지존! 그러나 나약한 인간! 

  전통시대! 제왕은 절대지존이다. 그 누구도 감히 그를 무시할 수 없다. 한생명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해서일까? 고려의 왕들중에는 자신의 막강한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많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이들 왕의 묘호앞에는 '왕'자가 붙는다. 원나라 황제에게 충성하라는 의미이다. 고려의 왕은  고려에서는 절대지존의 자리에 있지만, 원나라 황제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존재들이다.  자신의 부인 제국대장공주에게 매까지 맞은 나약한 충렬왕! 아버지와 아들이 왕위를 두고 경쟁했던, 충렬왕과 충선왕! 자신의 아들까지 죽이고,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도 조카를 세자로 삼아 아들을 견제했던 충선왕!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는 지체장애자로 모함받은 충숙왕! 부왕의 첩과 외숙모를 겁탈하며 향락에 빠져 살다가 타국에서 죽은 충혜왕! 어린나이에 죽은 충목왕과 충정왕! 이들의 삶은 애잔한 느낌까지 든다. 그들은 몽골과 몽골출신 부인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져야했다. 그리고 고려 백성에게는 한없이 강한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얼마나 한심했으면, 제국대장공주가 사냥을 즐기는 충렬왕에게 사냥을 하지 말고 백성을 돌보라했겠는가?

 

  "자신이 기대는 대상에게 비굴해질수록 자신에게 기대는 사람의 단점을 들춰내고 더 모멸하는 것이다. 이는 의존할수밖에 없는 자신의 객관적이고 명시적인 열등 상태를 극단의 주관적 우월감으로 표출하면서 억압 에너지를 해소하려는 행동이다."(261쪽)

 

  강자에게 비굴한 사람은 자신보다 약한자에게 강해진다. 자신의 삶에 당당한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강한자에게 기대어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는 고려왕들의 모습은 백성들의 고통으로 이어졌다. 백성들이 고통을 받더라도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의지도! 힘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권력을 지키는 것도 버거웠을 테니까...... 타인의 힘에 의지한 정치는 충혜왕의 폐륜적인 모습으로 극에 달한다. 당당한 주인으로 살지 못하면, 그 고통은 대를 이어 유전된다. 내가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 자녀들도 주인으로 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타인에 의존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왕은 비단, 원간섭기에만 있지 않았다. 수동의존형 왕 '인종'도 그러했다. 처음에는 이자겸에 의존해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했고, 이자겸을 제거하고 나서는 묘청에 기대어 정치를 하려했다. 결국에는 김부식을 비롯한 문벌귀족에게 기대어 권력을 유지하게 되었고, 경계선 성격을 지닌 의종 시기에 무신정변이 발발하여 고려왕의 권력은 무너진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정치를 하지 못하는 왕은 그 권력을 쥘 자격이 없다. 절대자를 추종하는 맹목적 신도처럼 그들은 나약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권력은 어린아이에게 칼을 쥐어주는 것과 같은 효과를 만들게 된다. 인종의 나약한 자아는 경계선 성격을 지닌 인종으로 이어졌고, 자신이 관심의 중심이 되기를 바란다. 마치 트럼프처럼! 

  권력을 다룰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이 없는 왕들에게 통치를 받고 있는 백성들의 고통은 어떠했을까? 왕조시대! 제왕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다. 어떠한 제왕을 만났는가에 따라서 백성의 삶이 많이 달라진다. 무당에게 의사결정을 맡기며 푸른집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던 사람을 대통령으로 두었기에 우리가 겪어야했던 고통을 생각한다면, 고려시대 백성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4. 상처받은 자들! 상처를 치유할 방법은 없는가?

  제왕에서 평민까지, 아니 노비까지! 사람은 나약한 존재이다. 사랑을 갈구하며 부모라는 존재의 그늘 속에서 살아야한다. 어른이 되면 부모에게 받은 상처는 다시 자신의 삶을 옥죄게 된다. 하인츠 코헛은 "전능한 줄 알았던 부모가 능력의 한계가 있고 자신의 이상과 기대에도 못미치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고 했다. 그리고 이것을 건강한 자아상과 가치관을 가지게 되는 "최적의 좌절"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제왕의 아들에게는 "최적의 좌절"을 해줄 아버지가 부재한 경우가 많다. 아버지의 한마디에 만백성의 생명이 달렸기에 그들의 도덕성 발달은 좌절될 위험이 상존한다. 대한항공의 "땅콩회항"을 비롯한  대기업 자녀들의 갑질은 "최적의 좌절"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던 제왕들의 자녀와 비슷한 모습일 것이다. 그나마, 제왕의 자녀들은 그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려는 많은 스승과 신하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기업에는 제왕의 자녀를 바른길로 인도하려는 '스승과 신하들'이 있는가?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부모라는 존재에 의해서! 강한 힘을 가진 어른이라는 존재에 의해서! 불의의 사고에 의해서! 힘쎈 친구에 의해서 겪게된 고통을 치유할 방법은 없을까?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치유의 방법을 살펴보자.

 

  "트라우마를 말살하기 보다 그것과 더불어 살며 그 트라우마를 발전과 성숙의 원천으로 사용하는 방법까지 익혔을 때 마침내 내면의 상처가 완치된다."

 

  '상처를 받은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지만, 상처를 치유할 의무는 나에게 있다'는 말처럼, 트라우마를 겪은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지만, 그 트라우마를 치유할 의무는 나에게 있다. 트라우마를 없애려하기 보다는 트라우마와 더불어 살며 그 트라우마를 발전의 발판으로 삼으라! 성숙된 인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나 또한 초등학교 시절 왕따를 당했다. 그리고 그 왕따의 그늘은 나의 삶을 그늘지게했다. 나는 과연 트라우마와 더불어 살며, 그 트라우마를 발전과 성숙의 원천으로 사용했는지 자문해본다. 내가 고등학교 교사로 살고 있는 것도 그 트라우마를 성숙의 원천으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다. 때론 초등학교 시절의 일들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기기도 한다. '미병의 상태'! 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병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우리 조상들은 강조했다. '위생가설'에 따라서 병균을 없애면 인간이 건강해질 것이라고 서양의학자들은 말했다. 그리고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다. 그러나, 엄청난 양의 항생제 남발은 우리에게 유익한 유산균들도 죽였다. 무균실에서 자란 아이는 오히려 면역력이 낮아져 질병에 시달리기 쉬워진다. 병을 없애기 보다는 병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 즉 미병의 지혜를 터득할 시간이 왔다.

   정신분석학자 로버트 존슨은 그림자를 대하는 원칙을 "우선 직면해서 수용하고, 그다음으로 함께 가볍게 춤을 추는 것이다."라고 제시했다. 그러나 이때 "내가 주체가 되어 그림자와 춤을 춰야지 그림자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로버트 존슨도 자신의 아픔을 이겨내려하기 보다는 아픔을 직면하고 주인이되어 아픔과 가볍게 춤을 추라했다. 어린시절, 나를 괴롭혔던 '친구'라는 괴물들을 직면하고 그들이준 상처와 가볍게 춤을 추어야겠다. 나의 내면에서 울고있는 아이를 달래며 내면아이와도 함께 춤을 추어야겠다. 그리고 나의 내면아이를 끌어 안겠다. 눈물을 흘리며.....

 

  "(윌리엄 제임스) 삶이 변화되기를 원하면 이유나 변명을 달지 말고 열정적으로 살라. 지금 당장 그렇게 하라"

 

  그래, 나의 내면아이를 끌어안고 이제 열정적으로 살아가자! 지금 당장! 행동이 변해야 삶이 변하고 인생이 변한다. 가장 어려우면서도 쉬운 '이유나 변명을 달지 말고 열정적으로 살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열정적으로 살자!!

 

5. '옥의 티'를 찾아서

  이 책의 저자 '석산'은 자신의 본명을 밝히지 않고 있다. 자신의 전공도, 자신의 출신 대학도 책에는 적혀있지 않다. 아마도 경제분야를 전공한 다방면에 박식한 사람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심리학과 고려사에 대한 상당한 실력이 있음을 책을 읽는 내내 느꼈다. 그러나 '석산'의 책에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몇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첫째, 동북9성의 위치능 어디일까? 어린시절, 동북구성의 위치를 천리장성밖의 함경도 지역으로 배웠다. 그러나 이 설은 일본인 학자의 주장이며, 우리학자들은 길주설과 두만강 유역설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 영토를 축소시키려는 일본인 학자의 설을 궂이 적었어야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길주설과 두만강 유역설을 소개해주었다면 이 책이 더욱 빛났을 것이다.

  둘째, 광종은 숭유억불책을 썼는가? 이 책에는 "신정왕후 황보씨의 딸이 노골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편 광종의 아내였다."라고 적고 있다. 광종은 최승로의 시무28조에도 나오듯이 말년에 불사를 많이 일으킨 왕이다. 광종이 숭유억불책을 썼다는 말은 수정해야한다.

  셋째, 충선왕은 원나라가 좋아서 고려에 안왔을까? 이 책에서는 "충선왕은 어릴때 부터 원나라생활에 젖어 있던 터라 고려보다 원을 더 가깝게 여겼다."라고 적고 있다. 물론, 틀린말은 아니다. 그러나 충선왕이 연경에서 전지정치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원나라 생활에 젖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원의 정치변동에 따라서 왕권의 향배가 달라지는 고려의 뼈아픈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부분까지 지적해주었다면, 이 책이 더 빛났을 것이다.

  작지만, 아쉬운 '옥의 티'를 잘 닦아 준다면, 이 책은 더없이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세상이 혼란스러울 수록 절대적 카리스마로 혼돈을 잠재울 영웅을 기대린다." 바로 '알파형 리더'를 기대한다. 전통시대! 그러한 알파형 리더가 나타나길 바라며 '제왕'이라는 존재를 만백성들은 우러러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왕'들도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알파형 리더'가 나타나기를 바라기보다, 스스로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어 삶을 개척해나갈 때만이, 참다운 주인으로 살수있다.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들은 신화를 만들어 낸다. "집단 무의식에서는 신화의 진위가 중요하지 않다. 그 의미와 지향하는 바가 중요한 것이다." 신념은 집단 무의식의 영향을 받는다. '알파형 리더'를 바라는 잘못된 심리는 잘못된 집단 무의식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잘못된 집단 무의식은 '제2의 박정희'와 '제2의 히틀러'를 만들어 낸다. 우리사회는 과연 그러하지 않는지, 우리는 스스로 주인으로 살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이 책은 묻고 있다. 34명의 고려왕의 심리를 해부함으로써 그들을 저 높은 좌대에서 끌어 내어 우리 곁에 다가서게 했다. 그리고 묻는다. 민주주의 시대! 우리는 주인으로서 살고 있으며, 주인으로 살 준비개 되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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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역사에서 미래로 - 생생한 사진과 깊고 넓은 해석으로 경험하는 고구려 역사 현장 다큐멘터리
윤명철 지음, 윤명도 사진 / 참글세상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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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남편은 고구려새입니다."라고 시작하는 시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고구려새"라고 부른다. 얼마나 고구려의 옛땅을 돌아 다녔는지, "날개뼈에 금이 가도 날아다니다가 뚝 부러져버렸습니다. / 기부스통 속에서 날개는 다시 살아났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얼마나 그의 고구려 사랑이 광기에 가까웠으면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그의 아내가 그를 위해서 '고구려새'라는 시를 지었겠는가? 그의 아내로서는 속상할 수도 있지만, 윤명철과 같은 학자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행운이라 생각한다. 고구려에 미쳐서, 고구려 연구에 한평생을 바치고 있는, '고구려새' 윤명철이 말하는 고구려의 역사를 만나보자.
                                        

1.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다.

  이 책은 다른 역사책과 달리 저자의 감상이 많이 묻어난다. 마치 자신이 살았던 아름다운 고향을 기억하며 떠나버린 사람과 퇴락해버린 오늘을 못내 아쉬워하하며 발길을 돌리는 고향떠난 이의 아픔을 담고 있는 듯하다. 그의 감상은 장군총과 고구려 산성을 보면서 느낀 소감을 표현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고구려 사랑이 남다르기에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남다르다. 그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사를 바라보고 있다.

  고구려는 어느 나라를 계승한 나라일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부여를 계승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윤명철은 고구려는 원조선과 부여를 계승한 나라라고 말한다. '다물'이라는 고구려말 자체가 원조선의 땅을 회복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고구려의 원조선(고조선) 계승의식을 주장하는 윤명철의 주장에는 자못 결기가 느껴진다.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을 '부족국가'에서 출발했다고 국민을 가르쳤던 시대'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원조선의 역사를 삼국시대와 단절해서 서술하는 한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을 서술하고나서, 고조선의 역사적 경험은 깡그리 무시되고, 다시 군장국가에서 연맹왕국으로 연맹왕국을 거쳐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윤명철의 지적은 아쉽게도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고조선과 삼국의 역사를 일맥상통하도록 서술하지 못하고 단절적으로 서술하는 배경에서는, 고조선을 당당한 국가로 인정하지 못하는 고루한 자들의 인식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조선을 실체적 국가로 보고, 한나라와 당당히 맞섰던 강력한 국가로 보면, '재야사학자' 혹은 '유사사학자'라 매도하는 현실에서 어찌 고조선과 삼국의 역사를 누적적으로 발전한 우리역사로 서술하겠는가?  

  그러나 윤명철은 다른다. 그는 '삼국유사' 왕력편에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 기록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긍정한다.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임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그의 글을 읽으며, 전률이 느껴졌다. 그는 동천왕 28년조 '왕검선인의 예터'라는 기록을 인용하며 평양의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외교적 중요성을 지적한다. 고구려가 원조선을 계승했다는 그의 주장을 읽어가며, 고구려가 평양성을 중요시하고, 장수왕시기에 평양천도를한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삼국사가기 동천왕 28년조에 편양을 왕검선인의 옛터 라고 서술한 이유를 떠올려 보았다. 이는 삼국사기를 서술한 김부식조차도 고구려의 원조선 계승의식을 모두 없애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장천 1호분 벽화에 신단수 아래의 곰이 그려져있다. 또한 각저총에는 곰과 호랑이가 그려져있기도하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구려인들이 단군신화에 대해서 이미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윤명철!! 그는 우리 역사를 단절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누적적! 발전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고구려를 중심에 둔 역사 인식은 삼국통일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이어졌다.

 

  "우리 민족은 대륙을 상실하고, 해양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주도권을 일부 빼앗김으로써 동아지중해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중핵조정역할 또한 빼앗겨버렸다. 만주 지역은 우리 민족사에서 멀어졌으며, 우리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거란 선비 말갈들으이 종족들은 그 후에 오히려 우리를 압박하는 존재로 변했다. 한편 일본 열도에서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과 신라계도 참여한 '일본'이라는 국가가 670년에 탄생했다. 싸우고 갈라진 형제는 남보다 못한 법이다."313쪽

 

   남한의 많은 학자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삼국통일을 긍정적으로평가하기 위해서 당시에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삼한일통'이라는 개념도 후대에 만들어진 개념이라 주장한다. 삼국이 통일 되었기에 '민족'이라는 개념이 나타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고조선과 삼국을 계승적 관계로 이해하지 않고 단절적으로 이해하는 그들에게는 삼국은 같은 동류의식을 가진 존재로 보기보다는 서로 다른 각각의 국가로 보일 수밖에 없다. 서구의 '민족'이라는 잣대로 우리 역사를 재단하려하니, 우리에게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서구와 동남아시아는 1민족 1국가라는 개념이 근대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한반도라는 비좁은 곳에서 오랜 동안 살아오면서 일찍부터 동류의식이 싹텄다. 우리에게 동류의식과 같은 맹아적 '민족'의식이 없었다면, 과연 외적의 침입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무조건 삼국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삼국통일을 하고 신라의 영토는 3배로 늘어났는가? 통일전의 신라의 영토와 통일 후의 신라의 영토를 비교하면 신라의 영토는 3배로 늘지 않았다. 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 땅의 일부를 흡수한 것 뿐이다. 한반도 북부와 광활한 만주벌판을 중국에게 내어주고, 그속에 살았던 고구려인도 넘겨주었다. '통일'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려면 삼국의 땅과 백성을 모두 통합했어야했다. 통일이라고 보기에도 부족하며, 그로 인해서 '중핵조정역할'을 비롯한 너무도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싸우고 갈라진 형제는 남보다 못한 법이다."라는 윤명철의 말이 뼈를 때린다.

  고구려를 중심에 둔 역사서술은 발해를 거쳐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진다. 발해와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며, 조선은 고구려에 '반역'한 나라로 평가한다. 이러한 조선의 한계를 깨닫고 고구려를 다시 환생시킨 사람들이 있다. 윤명철은 그들을 '독립군들'이라 지적한다. 독립군을 가르칠 정신교육 교재를 집필하기 위해서, 독립운동가들은 고구려를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신 단재신채호 선생을 비롯해서, 발해사를 연구한 장도빈 선생은 독립군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에 주목했다. 대종교 또한 고조선을 비롯한 우리역사에 관심을 갖고 일제와 맞서 싸웠다. 우리에게 힘이 필요할때!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해있을 때! 그때 고구려는 힘을 주었다. 고구려는 사라진 역사가 아니었다. 우리와 호흡하며, 우리에게 힘이 필요할 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우리곁에 살아 있다.

 

2. 돋보이는 윤명철의 역사관!!

  역사책을 읽다보면, 비슷한 역사관과 개성없는 서술에 실망할 때가 많다. 그런데 윤명철이 바라보는 역사는 달랐다.

  '동아지중해 중핵 역할'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았는가? 보통의 학자들이 고구려를 철갑기병을 앞세워 땅을 넓힌 나라라고 바라본다. 육로교통보다 수로교통이 발달한 우리의 역사를 깡그리 잊어버리고, 육지를 중심으로한 역사인식을 하고 있는 학자들이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 윤명철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를 육지와 연결시켜 '해륙사관'을 완성했다. 땟목을 타고 고구려가 항해했을 바닷길을 탐험하기도 했다. '해륙사관'은 바다 뿐만 아니라 '강'에도 주목한다. 윤명철은 만주일대를 '수륙적 시스템'으로 바라보았다. 배가 다닐 수 있는 60여개의 강에 주목하며, 육군이 출동할 때, 강상 수군이 강을 이용해서 보급을 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고구려는 모든 강들을 자국이 계획하고 건설할 교통망 속에 편재했다 주장한다. 국내성을 비롯해서, 평양성, 한성은 항구도시라 지적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라는 사료의 틀에 갖히지 않고, 실제 고구려의 땅을 밟으며 고구려의 역사를 찾으려 노력한 그였기에 남들이 보지 못한 고구려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었으리라.

  남다른 그의 눈은 여타 학자들이 애써 무시하는 기록에도 주목한다. 5대 모본왕 49년 북평, 어양, 상곡, 태원 습격기사를 그는 부정하지 않는다. 이덕일의 지적에 의하면 강단 사학자들은 고구려 본기의 이 기록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 중국측 기록에도 나오는 이러한 기록을 믿지 않는 강단사학자들을 이덕일은 '식민사학자'라 말하며 비판한다. 그런데, 윤명철은 이덕일의 비판을 빗겨가며, '기마군단' 즉 기병을 중심으로한 진출이라는 측면에서 해당 기록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걸어다니는 농경민족의 시각에서, 면을 중심으로 한 지배에 익숙한 기존사학자들의 해석에 구애받지 않았다. 고구려는 점과 선의 지배를 했으며, 빠른 기마전술을 구사했던 나라이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를 벗어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조선 세종 시기에 4군 6진을 개척하면서도 너무도 고난을 겪어야했는데, 4군 6진보다 몇십배는 많은 영토를 광개토태왕시기 단시일 내에 확장할 수 있었던 것도 면을 지배하기 보다는 선과 점을 중심으로 지배체제를 구축했던 고구려의 점령방식 때문이 아닐까?

  연개소문을 당신은 어떻게 평가하는가? 상당수의 학자들이 연개소문을 독재자로 평가한다. 그의 대당 강경책으로 인해서 고구려가 멸망했다고 주장한다. 윤명철의 평가는 어떠할까?

 

  "시대의 흐름과 고구려인들의 자유로운 기질이 연개소문이라는 인물과 그가 지향하는 적극적인 항전을 택한 것이다." 294쪽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연개소문 개인에게 돌리는 단순한 역사인식에서 벗어난 그의 시각이 다시한번 돋보인다. 연개소문이 죽인 영류왕은 고구려 1급 군사기밀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지도 '봉역도'를 당에게 바쳤으며, 전승기념물인 '경관'을 허물어뜨리고, 당나라 진대덕이 고구려를 정탐하도록 했다.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고건무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실망스러운 모습이었다. 고구려 중심의 세계관과 중국중심의 세계관의 대결에서 고구려가 고개를 숙인다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은 통하지 않는다. 삼국이 하나로 통일 되지 못하고, 분열되어 외부의 적을 끌어들인 역사를 뼈아프게 생각한다. 만약 삼국통일이 이뤄졌더라면, 고구려는 당나라에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통일된 중국 대륙의 당나라와 분열된 한반도의 고구려의 싸움에서 당나라가 유리한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이러한 현실은 오늘날에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음을 윤명철은 지적하고 있다.

  윤명철!! 그는 우리의 눈으로 우리역사를 바라보는 몇안되는 역사학자이다. 윤명철은 중국의 시각! 서양의 시각! 미국의 시각! 심지어는 일본의 시각!으로 우리역사를 바라보는 자들과 차원이 다른 학자이다. 그는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자취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기존의 강단 사학자들이 그들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지만,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역사연구에 대해서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있었던 것과 너무도 차이가 난다. 우리 역사학계의 태두인 두계 이병도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그를 '진정한 역사학자는 이러해야하는구나'라는 가르침을 주신 분이라고 찬양하는 학자들과 너무도 차이가 난다.

 

3. 윤명철이 던져준 화두들!!

  '지식인이란 당연한 것에 시비거는 자'라는 말이 있다. 윤명철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지나쳤던 일들에 질문을 던진다. 그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삼국사기'에는 적혀있지 않은데,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등장한 것은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증거라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다. 대학시절 서영수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노교수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먼 훗날, 누군가 의도적으로 내다버린 글귀를 찾아내 우리 역사 속에 살려낸 것이다." 302쪽

 

  이 글귀를 읽으며, '열하일기', '동국통감'에 적혀있는 글귀를 믿지 않은 이유가 과연 정당하지를 생각했다. 역사책을 편찬하면서 기존의 모든 서적들을 살펴보지는 못한다. 모든 비석들을 살펴보지는 못한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모든 역사책을 보았다는 생각 자체가 위험한 생각이었다. 김부식이 당시에 있었던 삼국의 기록 모두를 '삼국사기'에 담지도 않았다. 윤명철의 지적은 나의 안일한 기존 관념에 비수를 꽃았다.

  "한국사 교과서에는 '광개토태왕'이라 하지 않고, 왜? '광개토대왕'이라 하지요?" 어느 학생의 질문이었다. 광개토태왕릉비에는 분명, '태왕'이라 적혀있지 않은가? 국사편찬 위원회에 질문을 했더니,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왕명을 적고 있습니다."라는 답년이 왔다. '삼국사기'보다 더 가치가 있고 정확한 광개토태왕에 대한 기록이 '광개토태왕릉비'아니던가? 그렇다면 '광개토태왕'이라 교과서를 서술해야하지 않을까? 윤명철은 '광개토대왕'이라 적지 않고 '광개토태왕'이라 적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고구려 부흥운동을 주도한 왕족 '고안승'을 '안승'이라고 서술한 현행교과서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윤명철은 '고안승'을 '안승'이라고 기록한 것은 '성을 뺀 하칭으로 기록'한 것이라 한탄한다. 지금도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고안승'을 '안승'이라 적고 있다. 교사의 설명이 없다면, 안승의 성이 '안'씨로 착각하기에 딱 좋다. 일부 EBS 강사는 안승이 백제 땅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며 신기하다는 듯이 설명하기도 한다. 고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한 사실을 알지 못하니, 엉뚱한 설명을 하는 일도 벌어진다.

  공자의 '정명'사상을 말하지 않더라도, 역사에서 정확한 명칭을 사용해야한다는 상식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광개토태왕'과 '고안승'에게 어울리는 정확한 이름을 불러주고 있는지 물어본다.

  윤명철은 고구려의 후예인 고선지와 이정기에 대해서도 눈길을 돌린다. 헝가리 출신의 역사학자 오렐 스타인이 '카르타고의 '한니발',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뛰어 넘는 위대한 군인으로 고선지를 평가했다. 탈라스 전투의 영웅 '고선지'를 기억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강한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망국의 후예로서 누명을 쓰고 죽는 그에게 동정의 눈길을 던진다. 윤명철은 질문을 던진다. "그의 삶속에서 고구려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대학에서 동양사 개론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고선지는 중국인이다."라고 단정하는 노교수의 말은 매정한 느낌마져 들지만,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는 '현종에게 충성'을 간직한채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덕일의 '장군과 제왕'이라는 책이 더오른다. 이덕일은 고선지와 이정기를 묶에서 '장군과 제왕'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썼다. 1권에서는 고선지를 2권에서는 이정기 일가를 다뤘다. 고선지가 당 현종의 장군으로서 억울한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면, 이정기를 고구려의 후예로서 당 조정과 맞서며 독립왕국을 건설했다. 이덕일의 탁월한 필력이 빛난 책이었다. 그렇다면, 고선지와 이정기는 자신이 고구려인이라고 생각했을까? 윤명철의 지적대로 그들은 고구려와 옷을 얼마나 입어보았을까? 한국계 미국인 골퍼가 LPGA에서 우승한 것을 보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열광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공부를 시키겠다고 언론에 밝혔다. 한국인 2세 3세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 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고선지에 대해서 씁쓸한 생각이든다. 고선지 보다는 이정기 일가에게서 고구려인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4. 동의하지 못하는 것들

  윤명철이라는 탁월한 역사가의 책을 읽으면서 못내 아쉬운 점이 몇개 발견됐다. 그중에는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몇가지를 살펴보자.

  윤명철은 장군총을 동명왕릉이라 주장한다. 장군총은 장수왕릉일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는 현실에서 윤명철의 주장은 다소 쌩뚱맞았다. 그는 평양천도 후에, 기존 기득권세력이 강력하게 자리잡은 국내성에 장수왕이 자신의 무덤을 만들리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단군신화와 주몽신화의 논리가 담긴 건축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윤명철의 주장에 나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가장 왕벽하고, 태왕릉보다 정교하게 건설된 장군총은 동명왕릉일 수 없다고 본다. 동명왕릉은 태왕릉보다 앞서 건설되었다고 본다면, 태왕릉 보다 건립시기가 늦을 것으로 추청되는 장군총은 동명왕릉일리 없다. 태왕릉 이후에 건설된 큰 규모의 무덤은 장수왕릉일 수밖에 없다. 그가 평양으로 천도하였지만, 이미 살아 있을때, 능을 건설했을 것으로 본다면, 죽어서 국내성에 묻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더욱이 국내성 세력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그는 국내성에 묻혀야했을 것이다.

  백제와 신라의 무덤에는 벽화가 없을까? 물론 신라에는 벽화가 없다. 그러나 백제의 무덤에는 벽화가 있었다. 공주 송산리 제6호분에는 사신도가 있으며,  능신리 동하총 석실분에는 사신도와 연화와 구름이 그려져있다. 비록 많이 훼손되어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말이다. '백제와 신라 조차도 무덤안에 그림을 그려 놓지는 않았다.(242쪽)"는 윤명철의 지적을 명백한 오류이다.

   신라와 발해는 서로 대립만했을까? 윤명철은 "비록 유민들의 피눈물 바다에서 발해라는 새나라가 태어났으나, 그들은 신라와는 영원히 적대적인 관계를 가졌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 관련 서적을 읽어보면, 신라와 발해는 교류를 했다고 적혀있다. 그 대표적인 근거가 '신라도'이다. 발해와 신라 사이에 길이 있었다는 사실은 두나라가 교류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어찌 옥의 티가 없는 책이 있겠는가? 윤명철의 주장에 일부는 동의하지 않고, 일부는 오류라고 생각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역사관은 나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역사는 기억하는자의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중국의 동북공정이 맹위를 떨치고 있을때,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 후, 과연 우리는 고구려에 대해서 얼마나 더 알고 있을까? 한때의 관심이 일시에 지나가고 다시 고구려를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걱정이된다. 이러한 시기에 윤명철의 책을 읽는 것은 고구려를 다시 기억하는 길이된다. 기억하자! 잊지 말자! 영화 '암살'에서 영화속 주인공들은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말했다. '암살'의 주인공들이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했던 애원은 고구려인들이 우리에게 하는 절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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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징조를 읽고 대처하는 45가지 방법 - 누군가 당신을 노리고 있다
모리 모토사다 지음, 채수환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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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날마다 흉악범죄 뉴스가 TV에서 흘러나온다. 나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의 안전이 걱정된다. 범죄의 조짐을 미리 알고 대처할 수 있다면, 큰불행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범죄의 징조를 읽고 대처하는 45가지 방법'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을 읽으면, 범죄를 미연에 예방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과연 나의 기대에 부흥했을까?

 

1. 범죄자의 표적이 되지 마라!

  범죄자가 먹이감을 선택하는데 7초면 충분하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범죄자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행동과 마음가짐을 조심하라한다. 나도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으며, 시야를 확보하며 리듬감 있게 걸으라한다. 우발적인 범죄도 많지만, 범죄자는 주도면밀히 범죄를 준비한다. 범죄자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나도 범죄자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나의 일상에 대비해야겠다.

 

2. 범죄자의 수법은 마술사와 같다.

  마술사는 관객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서, 다양한 볼꺼리와 미녀를 무대에 등장시킨다. 관객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마술을 성공시킨다. 범죄자도 마찬가지이다. 삿대질을 한다면, 삿대질하는 손만바라보면, 범죄자가하는 범죄행위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시야를 확보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이 있는 집에 돌아가겠다는 신념을 잃지 말아야한다. 상대를 자극하지 않고, 거리를 확보하고, 가족을 생각하자. 나에게는 살아야할 이유가 있으니까....

 

3. 아쉬운점.

  이 책은 나에게 물리적인 위해를 일으킬 수 있는 범죄자에게 대처하는 방법이 적혀있다. 그러나, 나가 기대했던 사기를 비롯한 금융범죄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주택 침입범죄를 예방하는 방법과 각종 사기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방법이 적혀있지 않기에 많은 아쉬움이 남는 책이었다.

 

  낯선 범죄자를 만났을 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문답식으로 적혀있어 이해하기 쉬운 책이다. 특히 4지 선다형 객관신 문제를 자녀와 함께 묻고 답하면서 놀이하듯 공부를 할 수 있어 좋았다. 아주 작고 얇은 책이라 부담도 없다. 그러나, 일본인 모리 모토사다가 일본의 현실에 맞추어 쓰다보니, 2%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한국의 현실에 맞는 책을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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