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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입 매일 철학 - 일상의 무기가 되어줄 20가지 생각 도구들
황진규 지음 / 지식너머 / 2018년 6월
평점 :
깊이 있는 생각을 하고 싶다면, 철학책을 읽어라! 한해 한해 나이를 먹으면서 철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현실과는 상관 없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만하는 학문이 '철학'이라 생각했던 적이있다. 그러나 세월은 나에게 나이를 주었고, 더 많은 사색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일상에서 만나는 당연한 일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삶을 살아가면서 느릿느릿 깨달았다. 거북이보다 느리게 깨닫는 나에게 철학책은 어려운 책이었다. 도올 김용옥, 강신주 라는 철학자를 만나면서 철학을 쉽게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의 책을 읽으며 인생의 지혜를 깨닫는 속도가 조금은 나아졌다. 그리고 팟캐스트 '철학 한입(철학흥신소)'를 통해서, 황진규라는 철학자를 만났다. 철학에 빠져 7년 동안 다닌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철학에 빠져사는 그는, 니체, 푸코, 칸트.... 무척이나 어려운 철학자들의 말들을 쉽게 설명해주었다. 황진규의 책을 읽으며, 인생의 지혜를 깨다는 행운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한입 매일 철학'이라는 책을 펼쳤다. 철학이라는 '지혜의 학문'을 안내해줄 황진규의 '한입 매일 철학'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나의 삶을 철학하다.
철학책을 읽는 이유는 철학으로 부터 인생의 지혜를 얻기 위함이다. '한입 매일 철학'은 어려운 철학자들의 이론만을 나열하기 보다, 철학자들의 말을 빌러 나의 삶을 반추하게 해준다. 그 몇가지를 살펴보자.
나는 미셸 푸코를 좋아한다. 물론, 그의 책은 어렵다. 그럼에도 그의 책을 읽는 이유는 그의 책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혜안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다음 글도 그러한 글귀중에 하나이다.
"19세기 정치적 권리에서 발생한 가장 대대적인 변화 중 하나는 바로 주권의 이 오래된 권리, 즉 죽게 만들거나 살게 내버려두는 권리가 새로운 다른 권리에 의해 대체까지는 아니더라도 보완됐다는 것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중략) 즉,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이 된 것이죠. 그러니까 주권의 권리란 죽게 만들거나 살게 내버려 두는 권리입니다. 그런 뒤에 새로운 권리가, 즉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리가 정착하게 됩니다."-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323쪽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고문)' 방법에서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감시, 훈육)'으로 억압의 방법이 정교화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고문, 체벌)' 방법의 기억이 많다. 특히, 학교에서 교사로부터 친구들로부터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방법을 많이 당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몸으로 학습되어 교사가 되고 나서 학생들을 지도할때 많이 사용했다.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방법이 얼마나 비교육적인지는 교사로 성숙되어 가면서 깨달았다. 지금 나의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면,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고 싶어진다. 과거 폭력적인 방법으로 훈육되어온 나는, 또다른 가해자가 되어 있었다.
요즘은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방법은 교육은 이뤄지지 않는다. 사회가 성숙되었기에 체벌과 같은 폭력적인 방법의 훈육은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반면,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감시, 훈육)' 방법의 교육은 강하게 남아있다. 아직도 교복과 두발을 학생통제의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는 학교가 많다. 야간 자율학습 참여율을 중요시하며, 담임 교사를 쪼는 교장들이 있다 학생을 감시하고 통제해야한다는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관리자들에 의해서 학교현장은 아직도 참된 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 물어본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나의 자녀들을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방식의 교육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임용고사를 준비하던 시절, 임용고사에 합격하면 연애도 결혼도 쉽게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임용고사에 합격하고, 교사로 발령받고 나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연애와 결혼이었다. 어머니를 비롯해서 주변의 많은 분들이 "결혼하라", "결혼은 언제하냐"고 묻기 시작했다. 수많은 소개팅을 하고 데이트를 했다. 그중에서 가장 힘든 것이, 데이트를 하면서 여성을 리드하는 일이었다. 약속장소를 물색하고, 사전 답사를 가서, 데이트 코스를 결정한다. 계획된 장소에 계획된 일정에 따라서 여성을 리드하지 못하고 버벅되다가는 여성에게 퇴자를 맞기 쉽상이다. 여성에게 결정권을 주고, 여성이 스스로 원하는 데이트 코스를 가도록 하는 '민주적'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만난 여성들은 '민주적' 데이트를 원치 않았다. 왜? 내가 만난 여성들은 그들 스스로 결정권을 가지는 '민주적 데이트'를 싫어할까? 남자에게 리드 당하는 것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여성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자 황진규는 라캉의 철학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황진규는 남자는 대체로 강박증적이며, 여성은 대체로 히스테리적이라고 규정했다. 강박증자는 "내 맘데로 할꺼야!"라는 구호를 외치는 반면, 히스테리 환자는 "네 맘대로 해"라는 구호를 외친다. 상당수의 남성과 여성이 강박증적이며,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민주적 데이트'는 설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강박증자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했다. 치밀한 계획과 사전답사를 했고, 계획이 치밀해질 수록 데이트가 귀찮아졌다. 이를 극복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까지 혼자살아야했을 것이다. 이제는 변해야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이미 젊은 세대는 변했는지도.... 여성도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고, 원하는 데이트를 남성에게 요구하는 모습을 보여야한다. 더 나아가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가 원하는 데이트를 당당히 대화를 통해서 찾아가야한다. 강박증적 남성과 히스테리적 여성이 지배하는 한국사회는 변화해야한다.
초임 교사에 발령 받았을 때, 교무부장님은 자상하게 학교일을 알려주셨다. 너무도 자상하셨고, 친절히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셨다. 교무부장에서 밀려나 짐을 꾸리는 부장님을 도와드리며 쓸쓸한 그분의 뒷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런데, 너무도 자상한 그분이 신봉하는 신문은 조선일보이며, 가장 믿는 언론인은 조갑재였다. 정치 이야기를 하면 수구 정당을 지지하는 그분과 말싸움에 가까운 대화를 하곤 했다. 대화가 불가능한 그분이 너무도 자상한 그분이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흄이 "절대불변의 진리나 법칙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자의 믿음이 있을 뿐이고, 인간은 그 믿음에 기대어 살아간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대화를 할 수 없는 존재와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저자 황진규는 비트겐 슈타인의 '언어게임'이라는 이론을 소개하며, 대화할 수 없는 존재와의 대화방법을 제시한다.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더라도 지역적 문화적 연령적 창이에 따라서 다른 언어규칙을 사용한다. 따라서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는 자신의 규칙을 버리고 상대방의 규칙으로 들어가야하다. 교무부장님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북녘땅에 지주로 살다가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땅을 빼앗기로 남으로 내려와야했던 그분의 가정사를 알고 공감해야한다. 친일파보다 공산당을 싫하는 지주의 심정을 이해해야한다. 그러하기에 진정한 대화는 사랑하는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황진규는 말한다. 그렇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려할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 상대가 미워질 때 대화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삶을 철학하려 할때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랑이다. 상대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세상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진정한 철학, 진정한 삶은 이뤄질 수 없다.
시골에 내려가 어머니를 보았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손을 떠시며, 불안한 목소리로 말하신다.
"손이... 안떨려고 하는데도, 손이 떨린다."
불안한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심각성을 깨달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대학병원에 갔다. 어머니는 파킨슨병을 앓고 계셨다. 급히 파킨슨병에 대해서 공부를 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치매'는 병명이 아니라는 사실도 이때 알았다. '치매'는 증상일뿐 병명이 아니다. 파킨슨병, 알츠하이머, 헌틴텅 무드병 등의 다양한 병들이 심각해지면, '치매'라는 증상이 나타난다. 어머니가 손을 떠는 이유는 파킨슨병을 앓고 계셨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부모의 나이는 알지 않으면 안된다, 한편으로는 오래사신 것을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나이드셨음을 두려워해야한다.(曰 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저자 황진규는 "자기의식은 기억이기에, '나'는 내가 가진 기억의 총합이다. 그게 바로 자아이고 '나'다."라고 말한다.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에게 자아란 없다. 자아를 잃어가는 노인을 보면서 가족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기에 우리의 안타까움은 더욱 커져간다. 인간은 기억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같은 기억,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리고 자아를 만들어 간다. 오래 사는 것보다는 자아를 잃지 않고 사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연히, 팟캐스트를 듣가다가 한 개그우먼의 말이 귀에 거슬렸다. "이번 주제는 '이번생은 글렀어'입니다."라는 개그우먼의 말은 '이번생은 글렀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고 다음생을 기약하라'라는 말로 들렸다. 천박한 개그우먼의 말이 한동아 귓가를 맴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리셋하길 원한다. 이에 대해서 저자 황진규는 '삶을 리셋하기 보다 삶의 아장스망을 바꿔보자'라고 제안한다. 들뢰즈가 사용한 아장스망은 '배치'라고 번역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생의 모든 것의 관계를 재배치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비단 눈에 보이는 것만을 재배치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재배치할 수도 있다. 돈을 인생의 일순위에 배치했다면, 이번에는 사랑을 인생의 일순위에 재배치할 수도 있다. 새롭게 아장스망을 한다면, 삶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어리석게 '이번생을 글렀으니, 목숨을 끊고 다음생을 기약하리라'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사람은 다음생에서도 이번생의 오류를 반복할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곳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 척박한 황무지를 탓하기 보다는 금이 이 황무지를 옥토로 변화시키자.
2. 주인으로 살수 있는 방법을 철학하다.
'다상담',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강신주의 책에서 강조하는 말은 '주인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거머쥐지 못한 우리가 주인으로 살기란 너무도 힘들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철학자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주인으로 살라했을까?
마르크스는 주인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가 달라지면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143쪽
변혁을 위해서는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켜야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아리스토켈레스보다 감동적인 마르크스의 말에 눈물이난다. 내가 상관으로 모시는 존재를 상관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와 사회적 관계를 단절시킬 각오를하며 산다면 나는 나의 상관의 노예가 될 수 없다. 사표를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라는 강신주의 말이 이해된다. 당신과의 사회적 관계를 벗어 던질 준비가 되어있다는 결기를 갖지 못한다면, 주인으로 살 수 없다. 주인으로 살려면 사회적 관계를 달리할 수있는, 때로는 사회적 관계를 단절할 결기가 필요하다.
니체라는 철학자는 주인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제시했을까? 저자 황진규는 니체의 '힘의 의지'를 당연시하지 않고 그 의도(꿍궁이)에 의문을 던질 때 '우리가 세상에 휘둘린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에게 휘둘린'다고 말한다. 즉, 나를 억압하려는 사회구조, 국가, 회사 상관의 의도를 파악하라는 말이다. '힘의 의지'는 '힘 싸움으로써의 관계 맺음'의 결과다. 우리가 '힘의 의지'에 순응한다면 히틀러가 독일인들 위에 굴림하며 유럽을 전쟁의 수렁텅이에 몰아 넣었듯이, 권력자는 우리를 암흑의 수렁텅이에 몰아 넣을 것이다. 반면 우리가 그들의 '힘의 의지'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들의 꿍꿍이를 파악하고 저항한다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촛불 혁명'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수동적으로 나에게 주인으로서의 지위가 주어지기를 바라기 보다는 능동적으로 주인이 되려 노력이 필요하다. 그 에너지를 우리는 '주인의식'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주인으로 살지 못하는 또다른 이유는 '인정투쟁' 때문이다. SNS에 집착하는 이유도, 외모에 집착하는 이유도 황진규가 지적했듯이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구 때문이다. 타인에게 인정받길 원하는 이유는 태생부터 부모라는 존재에 의존해서 생명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원초적 한계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주인으로 살고자 한다면,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기 보다는 내 자신의 양심에 귀기울여야한다. 나의 양심과 나의 욕구에 귀기울일때 우리는 타인에 휘둘리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혼자서만 살 수는 없다. 저자 황진규는 "기쁨을 주는 타자는 악작같이 찾아나서야한다. 동시에 슬픔을 주는 타자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애써야한다."고 충고한다. 기쁨을 주는 타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내가 타인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여야한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기쁨을 주는 유쾌한 존재라면, 내주변에는 유쾌한 사람이 모일 것이다. 그리고 나의 주변 사람들도 유쾌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슬픔을 주는 타자도 기쁨을 주는 존재로 바뀌지 않을까?
저자 황진규는 '브리콜뢰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계획은 우리의 믿음 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브리콜뢰르는 '손재주꾼'이나 '맥가이버'로 번역할 수 있다. 철저히 계획된 준비물을 토대로 필요한 물건을 만들기 보다는 주어진 것들로부터 필요한 것을 만드는 것이 바로 '브리콜뢰르'이다. 브리콜뢰르에 계획은 필요없다. 계획을 신봉하며 계획된 데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당황하며 급속히 무너지는 '일본인'과 임기응변에 강하지만 계획성은 다소 부족한 '한국인'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황진규는 '브리콜뢰르'를 강조하며 계획의 불필요성을 강조하지만, 나는 계획과 무계획을 자유롭게 횡단하며 째즈와 같은 삶을 제안한다. 계획성과 무계획성을 횡단하며 아무리 촘촘한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갈 때, 우리는 자유로운 주인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언어의 구조에 주목하자. 소쉬르의 말을 살펴보자.
"언어라는 구조에 의해 인간은 결정된다."
"생각이 언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생각을 만든다."
"하나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하나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제가 우리에게 말과 글을 빼앗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언어라는 구조에 의해서 우리가 결정된다면, 언어라는 구조를 바꾼다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된다. 언어를 지배하는 자가 인간 혹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독재정권이 '보도지침'을 내려서, '교통비 인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하고 '교통비 현실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한 이유도 언어를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권력자가 파놉티콘을 만들어 우리를 일망감시하려한다면, 우리는 역파놉티콘으로 그들을 주시해야한다. 모두가 중앙에 있는 권력자를 감시한다면, 파놉티콘은 다수의 감시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을 읽으면 새로운 세상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철학과 만나는 길이 너무도 어렵다. 난해한 글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 의미를 깨닫는 일이 보통의 노력이 없이는 얻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 황진규 덕분에 나는 철학자들의 글들 사이를 비교적 쉽게 헤집고 다니며 깨달음의 보석들을 발견했다. 그중에 하나가 흄의 말이다.
"인과관계는 근본적으로 논증 불가능하다."-69쪽
어제 태양이 떠오른다고 내일도 떠오를 것이라는 생각을 법칙이라 할 수 있을까? 어제 떠오른 태양이 내일 떠오르는 것을 담보하지 못한다. 태양이 50억년 이후에는 수소를 다태우고 백색외성이 되어서 수축하거나 폭발할 것이라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태양이 떠오를 수 없다. 법칙은 한정된 조건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태양이 존재하고, 지구가 태양주위를 공전하면서 자전할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철학은 우리가 당연시하는 일들에 의문을 품는다. 당연한 일들에 의문을 던지며 나의 고정관념을 철저하게 파괴한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나의 사고도 좁은 알을 깨고 드넓은 세상으로 나온다. 그래서 철학책을 읽는 맛이 난다. 함께 철학의 품에서 뛰어 놀지 않으련가?
ps. 나의 가슴에 남는 몇줄을 적어본다.
"감성이 없으면 대상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성이 없으면 대상은 절대로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지성이 없는 감성은 맹목적이고, 감성이 없는 지석은 공허하다."-칸트 95쪽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또한 노예여야만 한다."-흄, 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