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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 소셜 - 사피엔스에 새겨진 ‘초사회성’의 비밀
장대익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6월
평점 :
사피엔스가 지구의 주인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유발 하라리는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믿는 능력이라 말했다. 또한 이 능력을 이용해서 민족, 국가 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을 생산해냈고, 이를 통해서 효율적으로 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를 비롯한 여타 경쟁자들을 지구상에서 박멸시켰다. 사피엔스의 엄청난 공격성은 지구의 주인에서 그치지 않고 우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는 책에 대척점에 서있는 책이 바로 장대익 교수의 '울트라 소셜'이다.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의 주장에 대해서, 과학자인 장대익교수는 어떠한 주장을 전개할까?
1. 부당한 현실에 원숭이도 분노할까?
조국 사태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다시 평등과 정의에 대한 이야기가 대두되고 있다. 평등추구는 비단 인간만의 욕구가 아니다. 원숭이를 상대로한 실험에서도 똑같은 일을 했는데도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다를 때는 원숭이도 화를 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원숭이의 경우,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에 대해서만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인간은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안다. 장대익 교수는 이것이 바로 원숭이가 가진 공정성과 인간이 가진 공정성의 차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당한 부당함에만 분노할 줄 알지, 타인이 겪은 부당함에는 무관심한 것이 원숭이의 한계라면 인간은 타인이 겪은 부당함에도 분노할줄 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러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오히려 교묘하게 타인의 부당함을 탓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부당함에는 침묵한다. 조국에게 분노를 느끼는 젊은이들은 올바른 말을 해오던 조국에게서 오는 배신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조국은 구조적으로 기득권층에게 유리한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이용했을 뿐이다. 그것도 그가 아니라 그의 자녀가..... 어쩌면 법무부 장관을 사퇴하는 조국이 굳지 사과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당시에는 부모의 덕으로 논문 저자로 올라가고, 외고를 통해서 의대로 진학하는 것이 강남 엄마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모습이었으니까... 심지어 모 대학교의 총학생회장도 논문저자로 이름을 올려 합격했다는 것은 조국에게 분노하는 그들에게 과연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그를 비판하는 정치인들 중에 일부는 자녀가 부정입학했다는 의혹을 받기도했다. 자녀 입학을 전수조사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유야무야하는 현실을 보며, 과연 그들이 조국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든다. 자신이 누리는 특권은 침묵하며 타인이 누리는 특권에만 비난을 하는 그들은 어쪄면 원숭이보다 못한 도덕성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제를 수행하지 않은 원숭이게는 포도를 주고, 과제수행을 한 원숭이에게는 오이를 주었더니, 수행실패 및 보상 거부 비율이 90%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서 장대익 교수는 "무위도식하는 금수저 옆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짜증스러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라고 표현한다. 믿었던 조국의 자녀가 합법의 태두리 안에서 누린 가진자들의 특권에 대해서 젊은 이들이 분노하는 것도 일면이해된다. 그러나, 불법의 태두리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으며, 마약을 소지하거나 마약을 투약한 특권층의 자녀가 버젓이 거리를 활부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서는 조국에게 보였던 분노를 터트리지 않는 것에 더 큰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우리 사회는 절대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선함부터 절대악이 존재할 뿐이다. 조국이 절대선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환상일 뿐이다. 조국에게 걸었던 절대선의 믿음이 붕괴되어 허탈감에서 그를 돌던지려는 사람에게 한마디하고 싶다. 당신이 돌을 던져야할 대상은 조국이 아니라 "절대악"이라고.... 그래도 조국은 검찰을 개혁해서 사회를 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려했으며, 자신의 가족이 누린 특권에 대해서 사과했다. 그러나 "절대악"의 세력은 자신의 자녀가 누린 불법에 대해서 사과하지도 반성하지도 않았다. 원숭이의 세계보다 인간 세계는 복잡하다. 분명한 선악의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절대선을 추구하지만, 현실에서는 최악을 피하는데 우리가 주력해야한다. 그래야 오늘 한발짝 진보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거울신경 세포계(mirror neuron system)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기 전에 이미 내 뇌에서 저절로 작동하는 공감회로이다. 거울신경 세포계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자폐증의 원인이 된다. 타인의 관점에서 그의 고통에 슬퍼하고 그의 기쁨에 기뻐하는 것이 거울신경 세포계가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초사회성을 발휘할 수 있는데는 거울신경 세포계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지위가 높을 수록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지 못한다. 안전장치를 만들면 아까운 생명을 살릴 수 있음에도 돈 몇천만원이 아까워 안전장치를 하지 않고 살인적인 노동을 시키다가 안타까운 생명을 잃은 모 제철소와 모 발전소를 예로들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것은 어찌 설명해야할까? 울트라 소셜에 반하는 지위가 높은 자의 행동이 어찌하여 지위가 높은 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날까? 진화에 반대되는 행동이 유독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일까?
'구조의 모순'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경제학에서 개인으로서는 현명한 선택이 거시경제학적 입장에서는 불행한 행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개인이 소비를 줄이고 절약한다면 가정경제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현명한 행동이 국가경제의 입장에서는 소비를 위축시켜 국가 경제의 위축을 가져온다. 타인의 불행에 측은지심을 발휘하지 못하는 능력이 국가의 입장에서는 위해한 일이지만, 개인의 입장에서는 돈을 벌 수 있다. 타인을 밟고 자신이 일어설 수 있다. 조국사태를 통해서 우리는 깨달아야한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젊은이 들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조국과 자녀의 부정입학 의혹과 재단비리 의혹을 받으며, 기존의 검찰특권을 지키려 무리수를 두는 사람중에서 어느쪽이 거울신경 세포계가 살아있는 사람인지 알아야한다. 자신의 몸에 똥이 묻었음에도 겨묻은 자를 비난하는 자와 자신의 몸에 겨는 묻었으나, 사회의 똥을 치우려는 사람 중에서 누구에게 응원을 보내야하는지를 깨달아야한다.
2. 인간은 고독을 두려워해야하는가?
'마키아벨리적 지능 가설(Machiavellian intelligence hypothesis)'이 있다. 영장류의 고등 인지가 일차적으로 그들이 처했던 사회생활의 특수한 복잡성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겼다는 주장이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 복잡성 때문에 두뇌를 더욱 발전시켰다는 주장이 진실이라면, 인간은 '소외'를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우리 뇌에 있는 '배측 전대상피질'은 신체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 모두를 담당한다. 사회적인 '소외'를 하면 신체적 폭력을 당한 것과 같은 고통을 우리는 느끼게 된다. 눈으로 보이는 육체적 고통과 눈에 안보이는 정신적 고통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셈이다. 인간은 집단에서 소외 당했을 때 육체적 고통과 같은 고통을 당한다. 그래서 동조현상이 일어나는 지도 모른다. 명백히 잘못된 대답을 주변사람들이 하는데도 그 무리에서 소외되기 싫은 개인은 주변의 행동에 동조하게 된다. 집단에서 배척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에게 거짓을 말하게 한다. 전체주의 국가, 집단의 문화가 강한 곳에서 이러한 동조현상이 잘 나타난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과 스탈린 치하의 소련, 일본제국주의 치하의 조선과 일본, 박정희 치하의 대한민국에서 동조현상이 많이 나타났다. 이중에서 일본제국주의 치하의 일본은 미국에 의해서 벗어났고, 박정희 치하의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인에 의해서 벗어났다. 외부에서 주어진 민주주의와 내부의 힘으로 이뤄낸 민주주의는 순응하는 일본과 스스로 만들어가는 민주주의 대한민국으로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핵발전소가 폭발하고 제대로된 제염작업을 추진하지 못하면서도 후쿠시마 주민들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하고 있는 일본과 촛불혁명을 통해서 정권교체을 이뤄낸 대한민국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용기 있게 "NO"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교수가 진행한 추가 실험에서도 "NO"를 외칠 수 있었던 사람이 있는 경우, 자신의 주장을 용기있게 말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순응적인 성격이어서 가장 통치하기 쉬운 일본인에 비해서, "아니오"를 외칠 수 있는 대한민국사회가 더 밝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용기를 내야한다. 기래기들이 조국가족에 대한 악마적 기사를 쏟아낼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한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사법개혁", "검찰개혁"이라고.... 내주변에 나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없다할지라도 용기 있는 나의 행동이 침묵하는 수많은 개인을 일깨울 수 있음을 명심하자. 고독을 즐기며, 다수의 침묵하는 개인을 깨우자!
3. 과학의 힘으로 인간을 완벽히 해석할 수 있을까?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영역이라 말한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영역이기에 종교로 과학을 설명하려하지 말고, 과학으로 종교를 말하려하지 말라!! 라는 말이 상식처럼 회자되었다. 그런데, 과학이 종교를 분석하고 해석하려하고 있다. 종교를 '정신 바이러스'로 보는 견해부터 '감시자 역할', '인지 적응의 부산물', '진화적 적응'으로 해석하려하고 있다. 이제 과학의 힘이 종교를 앞도할 것인지 흥미롭다.
과학은 더 나아가서 인류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윤리적 소비'에도 과학이라는 매스를 들이댄다. 아라비안 노래꼬리치레의 보초 역할을 근거로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들이 번식 성공뉼이 더 높아진다는 결론을 내렸다. '짝짓기의 성공을 높이기 위해서 인간은 행동 한다.'라는 관점에서 '윤리적 소비'를 해석한다. 그러나, 자신의 선행을 평생 드러내지 않는자가 있다. 충남대학교에는 '정심화홀'이 있다. 김밥을 팔며 살아온 이복순 할머니가 자신이 모은 전재산을 충남대학교에 기증했고, 이를 기리기 위해서 충남대학교는 '정심화 국제 문화회관'을 만들었다. 정심화 이복순 할머니의 선행을 '진화심리학'적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을까? 단순히 자신의 생식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 선행을 한다는 일차원적 해석으로는 풀리지 않는 숭고함이다. 개인의 생식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행동이라기 보다는 인류애적 숭고함이 정심화 이복순 할머니의 선행을 이끌어 냈다고 설명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자살 폭탄 테러'를 과학에서는 어떻게 설명할까? 장대익 교수는 밀그램의 실험을 예로들며 권위에 복종하는 행동이라고 설명한다. 권위에 복종해서 자살 폭탄 테러를 한다면, 일제강점이 '가미카제 특공대'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일어나는 '자살 폭탄 테러'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들은 권위에 복종하기 보다는 자발적으로 자살 폭탄 테러를 하고 있다. 그들은 종교적 신념(?)이든, 개인적 원한이든 스스로 자살 폭탄 테러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를 실행했다. 자신의 자녀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팔레스타인 할머니가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한 적이 있다. 그 할머니의 사진을 보며, 타인에게 복종했다는 생각이들지 않았다.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분노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가면서 보복을 하려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자살 폭탄 테러에 대한 장대익 교수의 설명은 너무도 허술하다. 자살 폭탄 테러의 일부를 설명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나머지 전체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종교, 윤리적 소비, 자살 폭탄 테러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불완전하다. 시간이 지난다면 이부분도 명백히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과학이 모든 부분을 설명하는 것이 아름다워보이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신비로움이 필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4. 사피엔스가 침펜지와 다른 길을 걸었던 까닭은?
유발하라리는 사피엔스가 지구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을 '이야기'에서 찾는다.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스스로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통의 이야기가 있어야한다. 그러면서 신화가 만들어진다. 민족이라는 신화, 자본주의라는 신화 말이다. 장대익 교수도 이야기의 중요성을 말한다. 이야기는 가치판단을 공유하고 삶을 예행연습한다. 한국인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쾌락을 줄뿐만 아니라, 각자의 삶에 힌트를 주기도 한다.
사피엔스가 침펜지와 다른 길을 걸었던 또다른 큰 이유는 '남으로 부터 지식과 지혜를 끊임 없이 전수 받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교육 시스템은 지식의 축적과 다음 세대에게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현대 문명의 처절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20년이 넘도록 학생들을 학교에 가둬 놓고 인류의 지식을 전달한다. 인류가 지구라는 행성을 정복한 댓가는 가혹하다. 학습의 기간도 시간이 지날 수록 늘어가만가고 있다. 이제는 평생학습이라는 말이 유행한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탄생했다. 지적인 능력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앞섰다. 그렇다면 인간은 학습을 포기할 것인가? 인간이 학습을 포기한다면 인간은 AI에게 지적 종속될 것인가? 자율 주행차에게 운전대를 넘긴다면 인간은 안락해질 것이다. 그러나 지적 운전대를 인공지능에게 넘긴다면 인간은 행복해질까? 스타이넷이 인류를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상상력은 나만의 공상일까?
"인류가 초사회성을 진화시켜 지구의 정복자가 되었다."라고 장대익 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타종족을 박멸하며 지구의 정복자가 되었다.'라는 유발하라리와 대비되는 주장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장대익교수와 유발할리의 주장은 동전의 양면처럼 보인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는 초사회성을 발휘하지만, 자신이 속하지 않은 집단에 대해서는 배척과 침략, 파괴를 자행한다. 이 양면중에서 인류는 초사회성의 범위를 끊임 없이 넓혀갔다. 인종과 신분을 뛰어 넘어 일류 보편의 가치를 실현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지구 환경보호와 생물 다양성 보호로 그 관심사가 넓어지고 있다. 이것이 사피엔스의 위대성일 것이다. 물론, 초사회성의 범위를 넓혀가려는 노력에 야유와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현명한 인류는 이를 넘어설 것이다.
이글을 마치며 장대익 교수의 글을 소개하겠다.
"다른 사람과 협력하고 싶은가? (중략) 그 사람이 보는 곳을 보라, 상대의 마음을 알고 싶은가? 그 사람의 동공을 보라. 마음이 흔들렸다면 동동에도 지진이 일어났으리라."-29쪽
초사회성의 범위를 넓히려는 노력에 야유와 비난을 하는 사람에게 초사회성을 발휘한다면 인류는 그 높은 벽을 넘어 설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에 닥친 위협을 넘어설 열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