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아시아
아시아네트워크 엮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당신은 아시아인인가? 라는 질문에 '나는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라고 당당히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될까?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동아시아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볼 수 있지만, 서아시아에서 부터 시작하여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하나로 묶는 '아시아'라는 개념이 과연 타당할까? 이러한 의문을 가질 정도로 아시아라는 개념은 다양한 인종과 종교, 문화가 어우러진 광대한 지역이다. 그리고 아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조차도 타지역의 아시아인에 대해서 무지하다. 그래서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아시아네트워크)'라는 책을 꺼내 들었다.

 

1. 그것은 거짓말일까?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라는 얇은 책을 읽는데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책이 어려워서라기 보다는 한장 한장을 넘길 때마다 기존 나의 지식을 무참히 짓밟는 주장들이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그 첫번째는 '간디는 성자인가?'라는 질문이다. '간디 자서전'을 읽은 나로서는 간디는 당연히 성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지옥에 내려간 사람이 "발가벗은 마하트마 간디와 마릴린 먼로가 정을 통하고 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와, 마하트마는 행운이야. 좋은 일 한 걸 되돌려받는 모양인데, 바로 저거야. 내가 원하는 벌도...."  그러자 천사가 귀띔했다. "저건 간디가 벌받는 게 아니라 마릴린 먼로가 벌받는 거야."-16쪽

 

 '유명한 인도 우스개'라고 소개하고 있는 이 농담을 읽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위대한 성자 간디를 간디인들이 이러한 농담소재로 삼을 수 있는가? 간디를 비판하는 자들은 무슨 근거로 간디를 비판할까?

  간디를 비판하는 자들의 근거는 무엇인가? 간디에게 열악한 노동현실을 개혁할 조언을 구하러온 노동자에게 간디는 협력과 조정을 권한다. 파업과 같은 노동자들의 적극적 투쟁방법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 결과 간디의 조언을 따른 노동자들의 생활은 더욱 열악해졌고, 간디를 따르지 않은 노동자들의 생활은 개선되었다. 노동문제 뿐만 아니다. 간디는 매혹적인 젊은 아가씨를 옆에 재우면서 어떻게 자제했는지를 장황하게 묘사하는 일로 '금욕주의'를 설파했다. 그런데, 그 실험 대상이 된 여성의 인권은 짓밟은 꼴이 되었다. 간디는 종교의 벽도 넘지 못했다.자신의 아들이 이슬람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간디의 투쟁 방식이 비폭력적이었다. 이것은 영국 자본가의 눈에 과격한 노동투쟁을 하는 자들에 비해서 간디가 성자로 보일 수도 있다. 특정 인물을 영웅시하다보니, 그 인물의 어두운 이면을  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완벽한 사람은 존재할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간디가 비록 흠결이 있지만, 그의 전체적인 삶을 살펴볼때 그는 경멸의 대상이 될 정도의 인물은 아니다. 진보진영에서 과도하게 도덕성을 강조하여 탁월한 진보의 리더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간디는 완벽한 성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를 존경하지 못할 정도로 큰 잘못을 한 인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도 인간이니까?

 두번째 '인권 투사 코라손'은 과연 인권투사였는가?라는 질문이다. 1986년과 2001년 피플파워의 주인공 코라손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을 우리는 필리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과연 인권투사였는가라는 질문의 대상이 되어야만 할까? 그녀가 집권하고 나서 인권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과 성과가 미미했다. 군부세력의 쿠데타 위협속에서 군부세력과 타협하며 적극적인 성과를 이뤄내지 못했다. 이것은 그녀가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힌 결과일 뿐이지, 이를 두고 그녀를 비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1987년 '멘디올라 학살' 사건은 그녀를 더 이상 변호할 수 없었다. 토지개혁을 외치던 농부가 군이 쏜 총에 맞아 죽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보기만 했던 대통령'을 변호할 수는 없다. 더욱이 그녀의 가장 큰 업적이라 자평하는 포괄적 토지개혁법이 무력화 되기도 했다. 자신의 일가친척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지주들이 빠져나갈 구멍들을 눈감아 주었던 것이다.

  "피플 파워"를 통해서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개혁의 동력으로 삼지 못한 무능한 아키노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할까? 지금의 문재인 정권도 '촛불 혁명'을 통해서 집권했다. '촛불 혁명'의 힘을 이용해서 적폐세력을 몰아내는 개혁의 원동력으로 삼지 않는다면, 문재인 정권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문재인 정권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도록 '촛불 혁명'을 주도했던 국민들은 힘이 되어주기도 해야겠지만,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매서운 비판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의 실패를 우리의 반면 교사로 삼아야한다.
 세번째. ''킬링 필드'의 전설을 끊는다.'이다. 킬링필드는 크메르루주에 의해서 캄보디아에서 300만명이 학살당한 사건이라 기억한다. "'킬링필드'의 전설"이라는 제목 자체가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킬링필드'는 거짓이라는 말인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킬링필드는 1차와 2차로 나뉜다. 1차 킬링필드는 1969년 부터 1973년까지로 베트남전쟁 시기에 미국이 캄보디아를 폭격하면서 40만~80만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다. 2차 킬링필드는 1975년 부터 1979년까지로, 크메르루즈를 이끄는 폴 포트에 의해서 처형 10만~30만명에다가 기아와 질병, 중노동으로 사망한 이들을 합쳐 최대 약 80만~100만명이 사망했다. 1차와 2차를 합쳐 10년 동안 약 150만~160만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킬링필드는 크메르루즈에 의해서 이뤄진 학살만을 떠올린다. 강대국 미국에 의해서 이뤄진 죽음은 애써 외면한다. 국제사회가 학살자 처벌을 주장하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역사만 호출하여 재판하려한다. 강자의 학살에는 눈감고, 약자의 학살에는 단호한 것이 정의란 말인가? 강자든 약자든 '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면 모두 재판대에 올라야하지 않는가?

 이책을 읽으며 가장 읽는 시간이 많이 걸렸던 부분이다. 나의 고정관념을 수정해야했고,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라는 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시아'에 대해서 나는 너무도 무지했다.

 

2. 혁명의 시련과 고통의 아시아.

  우리에게 5월은 민주화의 시기이자, 고통의 시기이다. 5.18 민주화 운동부터 시작하여, 5.16 군사쿠데타와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5월에 일어났다. 5월은 잔인한 계절이라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다. 태국에도 5월 혁명이 있었으며, 필리핀에도 5월 항쟁이 있었고, 인도네시아의 5월도 뜨거웠다. 그러나 이들 혁명은 미완의 혁명이었다. 민주화를 위한 위대한 첫걸음을 내딛었을 뿐, 구질서를 말끔히 제거하지 못했다. 마치 5.18민주화 운동 이후에 신군부세력의 폭압정치가 이어졌듯이 그들도 계속 혁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지눌 스님이 '돈오점수'를 말하지 않았던가! 돈오! 깨달았다면, 점수! 수행해야한다. 한번의 혁명으로 시대가 바뀌지 않는다. '시민의 힘이 조직되지 않는다면 혁명은 납치 당한다.'라는 유발하라리의 말처럼, 시민은 조직되어 계속 혁명을 이어가야한다.

  이들 나라들이 혁명의 첫발을 이뤘다면, 동티모르 대통령 사나나 구스마오는 혁명의 첫발을 떼기 시작했다. 구스마오는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의 기쁨도 잠시, 인도네시아와의 독립투쟁을 해야만했다. 많은 동지와 동포들이 죽어갔고, 그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감옥에 갖혀 혹독한 심문을 받아야만했다. 국제사회의 관심으로 독립의 기쁨을 느낀 것도 잠시, 인도네시아에 매수당한 반독립파들이 동족을 죽이는 현실을 보며 울분을 토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한다.

 

  "그들이 되돌아와서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면, 우리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 게릴라 동지들이 앞장서서 국민들에게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빌 것임을 분명히 약속했다."-251쪽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없다. 진실은 승리한다." 촛불 집회 때 불렸던 노래 가사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진실이 승리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한지를 직시하면 많은 슬픔이 밀려온다. 인도네시아에 빌붙어 동족을 죽였던 반독립파를 끌어 안아야만 하는 구스마오 동티모르 대통령의 심정은 얼마나 착잡할까? 진실이 힘을 갖지 못한다면,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

  구스마오가 독립과 혁명의 기쁨을 누렸다면, 그 기쁨을 위해서 달려가는 두 사나이가 있다. 한명은 민주화를 위해서 밀림으로 간 의사 나잉옹이다. 다른 한사람은 팔레스타인 하마스 지도자 야신이다. 버마에서 안락한 의사생활을 할 수도 있었던 나잉옹은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서 밀림으로 들어가 게릴라가 되었다. 승리가 보이지 않는 투쟁을 이어가며 전우의 죽음에 슬퍼하는 인간 나잉옹의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했다. 국경지대의 소수민족과 유대를 지켜가며 자신들의 진로를 모색하는 모습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는 독립투사의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나잉옹은 민주화를 이뤄낸 한국의 관심을 촉구했다. 그러나, 한국은 타국의 민주화를 지원해줄 정도의 성숙된 모습을 가지는 못했다. 그것이 현실이다.

 아흐메드 야신! 그는 나잉옹 처럼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다. 찢어지도록 가난한 집안에서, 아버지를 일찍 떠나보내야했다. 게다가 달리기를 하다 쓰러져 불구의 몸이 되었다. 이러한 나약한 몸의 소유자가 강력한 무장단체 하마스의 지도자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1948년 "대학살"을 겪고, 고향 팔레스타인에서 쫒겨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인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만 할 것인지 고민한다. 술과 마약, 섹스로 펠레스타인 젊은 이들을 유혹하여 정보를 빼내는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책을 쓰고, 무장단체 하마스를 조직한다.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에 잡혀 자신의 눈 앞에서 아들이 고문당하고, 자신의 육체가 부서져도 그는 이스라엘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몸도 망가졌다. 그러면서 한국의 독자에게 말한다.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던 시절을 돌아보자. 한국 시민들은 자신들의 순결한 독립투쟁의 역사를 테러리스트나 극단주의자들의 난동으로 불러왔던가?"-264쪽

 

  아흐메드 야신의 이말에 나는 숨이 멈졌다. 자신의 삶의 터젼을 잃어버린 이들의 절규가 느껴졌다. 야신은 "과연 누가 테러리스트고 누가 희생자였던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답해야한다. 누가 테러리스트인지! 강자의 폭력인 전쟁, 약자의 폭력인 테러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악한가? 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인간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인권을 유린한다면 그 세력이 나쁜 것이 아닐까? 나치의 박해를 경험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면 분쟁의 역사는 자취를 감추지 않을까? 너무 큰 희망사항일까?

  아시아는 아파하고 있다. 한번의 혁명으로 세상이 완전히 바뀌지 않는다. 계속 혁명을 위해서, 혹은 독립과 혁명을 위해서 부단히 몸부림치고 있다. 아파서 울고 있는 아시아에 너무도 무지했던 우리는 이제 관심을 갖아야하지 않을까?

 

3. 아시아의 여성과 성

미투운동이 한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억눌렸던 여성들이 이제 혁명을 시작한 것이다. 아시아의 여성들은 이제 자신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당당히 밖으로 나온 것일까?

  여성의 지위를 말할때 그 사회의 대통령 혹은 수상이 여성출신이 있는가?를 물어본다. 이 질문에 아시아는 당당히 있다고 말한다. 여성을 억압한다고 평가 받아온 이슬람 사회에서도 여성 대통령과 총리가 선출되었으며, 스리랑카와 필리핀에서도 여성 대통령이 활약했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여성의 인권은 높지 않다. 왜? 일까? 문제는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는가보다 여성이 어떠한 정치를 하는가에 있다. 치마를 입은 남성이 정치를 한다면 현실정치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까?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여성다운 정치를 하지는 못했다. 스리랑카의 쿠마라퉁가는 남편이 암살된 후, 가정주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대통령이 된 그녀는 타밀 호랑이와 전쟁을 확대한다. 경제는 피폐해지고 결국, 그녀도 몰락한다. 여성이냐 남성이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여성을 위한 정치를 하지 못했으며, 남성의 마초적인 정책을 흉내내려했다. 이는 스리랑카에서만 보여지지 않는다.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다른 나라의 여성정치인에게서 나타난다. 자신의 능력으로 최고 지위에 올라가지 않고, 가문이나 혈통의 후광에 기대어 최고 위치에 올라가다 보니, 남성 정치를 흉내낼 수밖에 없다. 그녀들은 아시아의 여성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서 "하이힐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 이스라엘군을 향해서 돌을 던지는"여성이 있다. 팔레스타인 여성들이다. 독립만 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말에 안주가히 보다는 지금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 용감히 현실에 뛰어드는 모습에서 희망을 본다.  "2천개의 율법"으로 여성을 옥죄고 있는 레바논의 경우를 보면서, 여성의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서 쟁취하는 것이라는 교훈을 얻는다. 레바논 여성들은 최소한 교육에서는 외형상 성평등을 이뤘으니 말이다.

  "오럴 섹스"를 하면 종신형에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면 당신은 믿겠는가? 그것도 강소국 싱가포르에서 말이다. 아시아에서 '성'은 억압의 대상이다. 태국의 경우, 성산업을 황색 저널리즘으로 이용할 뿐, 성노동자의 인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성애 교범인 카마수트라를 남긴 인도 역시 성을 금기시한다. 서구에 비해서 아시아는 성에 대해서 억압적이고 수줍어한다. 물론, 성진국 일본은 예외이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억압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섹스를 장려할 필요도 없지만, 지나치게 억압할 필요도 없다. 건전한 성문화는 사회를 밝게 만들테니 말이다.

 

 

4. 민족주의는 악마인가?

 민족주의를 악마화 시키는 사람들이 많다. 민족주의를 말하면, 히틀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지만, 1민족 1국가의 역사가 깊지 않은 서구와 남아시아 사람들에게 민족은 만들어진 상상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민족을 순수 혈통과 동일시하는 관점에서 민족주의를 바라보면,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민족주의는 악마일까? 유발하라리는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박멸하고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거짓말을 진실로 믿기 때문이라 말한다. '종교'와 '민족'이 사피엔스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민족을 공동의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으로 규정한다면, 민족주의에 쏟아지는 비난은 달라질 것이다. 또한 아직 민족을 만들지 못한 국가의 민족 만들기는 하나의 과제이기도 하다. 마치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상대하기 위해서 민족을 호출했듯이 말이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독립투쟁을 '민족주의'를 만드는 핵심 신화로 이용했다. 그러나 수하르토가 집권하면서 1965년 9월 공산주의자 박멸을 '민족주의'를 만드는 신화로 이용했다. G35S가 인도네시아의 주요장군을 살해한 사건을 수하르토가 격퇴하면서 그는 민족의 영웅이 되어 독재정치를 한다. 기존의 인도네시아 교과서에서도 수하르토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주요 장군들이 신체 중요부위가 잘라진체 죽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주요 장군들은 공산주의자에게 신체 고문을 당한 흔적이 없으며, 신체 중요부위가 절단되지도 않았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 인도네시아 현대사이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한다. 아픈 역사를 딛고 일어설 때만이 인도네시아는 보다 성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당한 방법으로 올바른 민족만들기가 이뤄져야할 것이다.

  민족을 만드는데, 민족의 문화유산은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문화재를 돌볼 경제적 여유가 없고, 약소국이라는 이유로 문화재를 강탈당하고 있는 것이 아시아의 현실이다. 캄보디아는 물론이고, 팔레스타인은 도굴과 약탈, 파괴를 겪어야했다. 그리고 지금도 팔레스타인 땅에서 발굴되는 유물은 이스라엘의 입맛에 맛는 유물만 살아남고 있다고 이책에서는 말한다. 약자의 힘은 단결에 있다고 한다. 약소국들이 많은 아시아가 하나로 단결하여 문화재 도굴, 약탈, 파괴 문제를 다룰 때만이 해결의 실마를 얻을 것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시아의 민족만들기는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잘못된 신화와 싸워야하며, 강대국의 약탈과 파괴에 맞서야한다. 아시아의 연대는 요원한 걸까?

 

 

 6.25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기억하는가? 내전? 강대국의 대리전? 등등 수많은 평가와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6.25가 아시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일본에게는 성장의 계기를 만들어주었으며, 인도는 비동맹의 리더로서 업그레이드 되는 계기가 되었고, 필리핀은 파병을 강요당했으며, 타이의 경우 군부가 부자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많은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6.25는 아시아에서 잊혀진 전쟁으로 기억된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말이다..... 나는 질문한다. 혹시, 당신에게서 아시아도 6.25와 같은 잊혀진 존재는 아닌가? 힘있는 강대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관심 갖으면서, 우리의 이웃인 아시아에 대해서는 너무도 관심이 없다. 아시아는 제2의 6.25가 되어서는 안된다. 아시아는 바로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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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만감일기 -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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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그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는 경계인의 예민한 눈으로 한국사회를 들여다본다. 그 매서운 눈길에 때로는 감탄을 하고, 때로는 강한 반발을 하기도한다. 2002년 월드컵때 붉은 악마들에게 파시즘의 모습이 보인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했으며, 안중근 의사를 인종주의에 매몰된 인물처럼 쓴 글을 보면서 강한 반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박노자의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우물안의 개구리에서 벗어나서 밖의 드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경계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그의 글이 필요했다. 인간 박노자의 생각을 탐구해보기 위해서 '박노자의 만감일기'를 꺼내들었다. 경계인인 그의 내면속에는 어떻한 생각들이 펼쳐질까?

 

1. 여린 마음을 가진 박노자.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해서 쓰디쓴 독설을 내뱉는 박노자의 글들을 보면서, 그는 강한 투쟁정신으로 무장한 투사의 이미지를 가졌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읽기를 읽노라면, 그가 얼마나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소년인지를 알게 된다. 그가 소련과 독일이 싸운 '조국전쟁'을 소재로 만든 영화영화를 보면서 느낀 소감은 그의 여린 마음을 알기에 충분하다. 박노자는 소련군 남성이 독일군 중년 여성을 죽이는 클라이막스를 보며 '뿔쌍하게 죽은 여성'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보통의 남성들이 힘에 대한 숭배, 화려한 전투씬에 대한 감탄을 하는 것과 너무도 대조적이다. 섬세하면서도 여린 그의 심성이 군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했다. 나아가 수많은 폭력에 대한 가열찬 저항을 하게 했다.

  그는 군대에 대한 혐오뿐만 아니라, 폭력과 권위주의에 대한 깊은 혐오를 가지고 있다. 군대, 폭력, 권위주의는 전체주의라는 카테고리로 묶을 수도 있다. 그는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말하지만, 개인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저항을 하는 그의 모습에서 아나키스트의 모습이 보여진다.

 그러나, 아나키스트 단체인 의열단에 의해서 이뤄진 의열 투쟁에 대해서 박노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적의 총알받이가 된 이국의 최하급 관리를 폭사시키는 것보다 그들에게 이 세계의 실상을 설명하여 계급운동으로 이끄는 것이 도덕적인 차원이든 운동 논리의 차원이든 훨씬 낫지 않았을까."-162쪽

 

  개인을 억압하는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아나키스트 단체 의열단에 대한 그의 평가는 너무도 박하다. 박노자는 '일제 군대의 시베리아 출병 때 고려인 공산주의자들이 선전 선동을 펼쳐 큰 성과를 얻은 경우'도 있음을 근거로 폭력에 의한 투쟁보다 일본인들에 대한 '세계의 실상을 설명'하는 전략을 제시한다. 이러한 박노자의 주장을 읽으면서 그가 완벽한 '낭만주의자'임을 확신했다. '김산의 아리랑'의 주인공 장지락이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이유도, 3.1운동 시기 일제의 총칼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나약한 기독교 인들에 대한 모습을 보고 난 이후부터이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일제를 설득시키려했으나 그들은 무참히도 총칼을 휘둘렀다. 독립은 감상적인 행동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만국공법에 따라서 포로 수용소에 적군포로를 가두든지, 아니면 풀어주어야한다는 원칙을 지켰던 안중근이 결국은 자신이 풀어준 포로의 밀고에 의해서 처절한 패배를 맞이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한다. 박노자의 평화주의적이면서도 낭만적인 독립운동의 방법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평화주의적 방법이 항일 투쟁의 일부분에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나 이를 항일투쟁 전체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박노자는 의열투쟁보다 공산주의 투쟁을 더욱 효율적이라고 본다.

 

  "폭력을 주된 도구로 하는 '소수 영웅들'의 투쟁인 만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중성이 확보된 공산주의적 투쟁, 즉 노조와 당 건설, 파업 주도 등은, 이에 비해서 훨씬 덜 폭력적이면서도 더 효율적이었다."-164쪽

 

  의열투쟁보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이뤄진 투쟁방식이 더 효율적이라는 박노자의 주장도 동의할 수 없다. 공산주의자들이 조선공산당을 건설하고 노조를 결성해서 일제에 투쟁하려했으나, 그들의 분파 투쟁으로 인해서 당은 제대로 된 생명력을 갖지 못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분파를 위해서 상대 분파를 해치는 일도 있었다. 그들에 의해서 이뤄진 파업도 일제에게 큰 타격을 주지도 못했다.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박노자의 사회주의에 대한 편애가 역사를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듯하다. 그의 여린 마음이 감상적 항일투쟁이 효과적이라는 편견을 만들었다.

 

2. 그가 불교를 사랑한 이유

  박노자의 글을 읽다보면, 외국인이 이해하기 힘든 불교 용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박노자는 어려서 '법구경'과 '수타니파타' 초역본을 읽으며 마음의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나는 고교시절에 "법구경"과 "수타니파타"의 초역본을 읽고서야 자기 내면의 분노와, 그 원천인 탐욕 아집 어리석음을 없애고 자기와 남을 동일시하는 것이야말로 '남성다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제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남을 칼로 찌를 생각과 능력이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남자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덕분이었다."-48쪽

 

  폭력이 여린 소년 박노자를 괴롭혔고, 그 번뇌에서 불교가 벗어나는 길을 열어주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하나를 좋아하면 자신이 사랑하는 하나의 모든 것을 합리화하려한다. 박노자는 그러하지 않다. 그는 '불교는 평화의 종교?'라는 의문을 던지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불교를 매섭게 비판한다.

 

"'이단인'과 종교 전쟁을 하지 않는 등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승불교든 상좌부 불교든 국가의 폭력을 그대로 인정해주고 국가를 보호자로 삼는 것은 불교의 역사에서 드러나는 사실이다. (중략) 신라말기부터 있었던 한반도에서의 승병 동원 등은 어떤가?"-278쪽

 

  박노자의 철저한 비폭력주의에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임진왜란 시기 승병이 목탁을 집어던지지 않았다면 평화가 지켜졌을까? 일본군의 칼날 앞에 도륙되는 조선의 민초를 살리기 위해서 칼을 들 수밖에 없는 조선의 승병들을 박노자는 이해하지 못하는가? 집안에 강도가 들어 가족을 위협하는 상화에서도 박노자 당신은 몽둥이를 들고 대항하지 않을 것인가? 자신의 가족이 눈앞에서 유린당한다해도???

  박노자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 우리 보두에게 "나는 살인기술을 배우지 않겠다"고 외칠 용기가 생기기를' 기원했다. 군대에가서 살인 기술을 배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세상의 모든 악이 사멸되는 시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 때가 도래하기를 바래본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이 살아가야하는 현실은 이상사회가 될 수 없다. 단지 이상사회에 다가가려 노력할 뿐이다.

 

3. 박노자는 한국을 사랑하는가?

  박노자는 '한국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권력과 지배, 돈이라는 일차적인 맥락을 무시한 '한국 전체에 대한 사랑'은 아마도 성립이 될 수 없는 개념인 듯하다."-213쪽

 

  박노자는 한국이 안고 있는 폭력성과 순치되고 있는 노예성등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철학자 강신주가 한사람을 사랑하려면 그 사람의 아픔까지도 사랑해야한다고 말했다. 박노자가 한국을 사랑하려면 한국의 아픈 곳까지 사랑해야한다.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폭력성과 순치되고 있는 노예성도 보듬어야 그 아픔을 딛고 나아갈 수 있다. 폭력성과 노예성을 긍정하자는 말은 절대 아니다. 폭력성을 줄이고 노예들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보듬고 치유하려해야한다는 말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부분만 사랑하려는 박노자의 모습은 한국을 바라보는 삐뚤어진 시선으로 옮겨진다.

 

"북한 대중을 아예 염두에 두지 않은 채 통치자간의 야합을 '통일'로 생각하는 사고를 갖고 있는 것일까?  잘 모르겠지만, 노무현 정권으로서야 백낙청과 같은 현대판 '산림'의 협력은 하늘로부터의 선물일 테다. (중략) (강만길 선생이) 이름뿐인 '친일 청산'의 수장 역할을 맡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중략) '민족'까지 잘 모르지만, 개인의 '정기'를 바로잡자면 학교에서 머리를 마음대로 기르고 키스를 하는 것까지 허용하는 쪽이 더 빠르지 않은가 싶다."-126쪽

 

"노무현 정부는 남한이든 북한이든 이 한반도의 민초들을 자본의 영원한 예속민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231쪽

 

  소년시절을 소련에서 자란 박노자에게 어린시절 공산 소련사회는 추억의 장소이다. 그 추억의 장소는 빵배급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 사회이지만, 공동체 사회가 해체되지 않은 안식의 장소였다. 박노자는 그 안식의 장소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공산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보다 절대 좋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박노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없다. 거대악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미시적 악도 제거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박노자는 알고 있을까? 친일 청산을 위해서 '친일 인명사전'을 편찬하고, 북한과 화해 협력을 이뤄내려는 일련의 노력이 없이는 북한 주민들의 억압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박노자는 알지 못하는가?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남북통일을 위한 노무현정부의 일련의 노력을 '자본의 영원한 예속'으로 비춰진다는 결론을 내린 것은 나의 오만일까?

  한국사회가 일제강점기 아픔을 지금도 가지고 있으며, 그 모순을 없애지 않는다면 불의가 승리하는 추악한 역사를 끝낼 수 없다는 사실을 박노자는 알지 못한다. 한국근현대사의 아푼 역사를 어루만지는 사랑이 없다면 햇볕 정책도 친일 청산 노력도 부질 없는 것이라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아픔까지 사랑한다면 우리의 노력을 이렇게 매몰차게 비판할 수 없다.

 

4. 우리의 진정한 문제는 '민족'인가?

박노자는 '민족'과 '국가'를 비판하는 글을 많이 썼다.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박노자에게 '민족'과 '국가'는 폭력의 대상이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이천여년 동안을 나라없는 민족으로 유랑해야했다. '국가'는 그들을 학살하거나 차별했다. 같은 민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가해졌던 폭력은 그들의 생명을 위협했다. 민족이라는 단어를 꺼낼 수 없었던 스탈린 시대가 유대인들에게는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시기라는 역설이 벌어졌다. 이러한 그의 배경은 대한민국에 귀화하면서 더 강력하게 '민족'과 '국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우리에게는 그의 글이 신선함으로 다가왔지만, 그에게는 생명이 위협받는 절박함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한국사회의 진정한 문제점은 '민족'이 아니라, '마을'이라고 토로한다.

 

  "가족이든 동창이든 친한 지인이든 정말 '관계'가 있는 사이라면 한국인만큼 잘해주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완전한 타인들이 익명으로 서로 접촉하는 인터넷이라면 바로 정반대가 된다. (중략) '마을의식'이라 할가? 자기 마을 안에서는 예의범절을 다 챙기지만, 바같에 나가면 속을 풀대로 푸는 전근대적 '소속 소집단 중심의 사회적 연대'인 셈이다. 글쎄, 나 같은 사람들은 '민족주의' 등의 거대담론들을 자꾸 문제 삼지만,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범주는 사실 무슨 '민족' 보다도 이 '마을(가족, 동창집단, 친구들 등 가가운 사람들)'인 듯하다."-110족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혈연과 지연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박노자는 이를 '마을의식'이라 표현했다. 일제 식민지배와 6.25, 산업화를 거치면서 커지는 불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을 도와줄 끈이 필요했다. 그 끈을 혈연과 지연으로 대표되는 '마을의식'에서 찾았다. 이러한 '마을 의식'은 부정과 부패, 불합리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박노자의 말대로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마을의식'일지도 모른다. 이 마을 의식이 인터넷과 만나면 악성 댓글로 표출된다. 그 악성 댓글에 목숨을 끊는 연애인이 발생하기도한다.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찾는 우리의 모습을 언제쯤 찾아볼 수 있을까?

 

 

박노자의 글을 언제나 새로운 화두를 던져준다. 소련붕괴 직후의 러시아에가서 점령군 행세를 하는 한국의 유학생들과 목사들의 모습에서 통일 북한 지역에서 벌어질 통일 남한 사람들의 점령군 모습을 본다는 박노자의 견해와, 현실 정치에 관심없는 일본대중의 모습에서 일본의 평화와 안전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의문이라는 그의 견해는 나에게 많은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었다. 때로는 통쾌하기도 하지만, 박노자의 글은 항상 불편하다.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글과 불편하지만 동의하지 않을 없는 글들이 넘쳐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노자의 글을 읽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사회를 덮고 있는 껍질을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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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 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 1
조승연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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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개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두개의 영혼을 갖는 것과 같다." 샤를마뉴의 말이다. 청소년기! 영어와 일본어를 배우면서 어학공부의 재미를 알지 못했다. 언어에는 우리의 혼이 담겨 있기에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우리말을 지키려 노력했다는 말의 참의미도 깨닫지 못했다.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을 읽으며 알았다. 샤를마뉴의 말처럼, 새로운 언어를 안다는 것은 새로운 영혼을 갖는 일이기에, 우리의 언어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일이라는 사실도 이해가 갔다. 언어천재 조승연의 언어를 통해서 인문학의 재미에 빠져보자.

 

  조승연은 다양한 영어 어원들을 탐구하며 그 본래의 뜻과 그 뜻이 변천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단어에도 인문학이 녹아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조승연의 안내를 받아 탐구하는 언어 인문학의 세계는 재미와 즐거움으로 가득찼다.

  학생들에게 바로크 미술과 로로코 미술을 가르칠 때, '바로크'와 '로코코'의 뜻을 설명해준다면 학생들의 이해가 빠를 것이라 생각해서, 인터넷에서 그 뜻을 검색했던 적이 있다. '바로크'는 찌그러진 여드름'이고, '로코코'는 '조개껍질'이라는 뜻이었다. 어원을 알면 쉽게 이해되리라 생각했던 나의 생각은 역효과를 불러냈다. 결국, 어원을 학생들에게 설명하지 않고 수업을 했다. 왜? 절대왕정기의 바로크 양식과 귀족적인 로코코 양식이 이렇게 초라한 어원을 가지고 있을까? 의문을 가졌지만, 의문을 해소할 길은 없었다.

  그 의문을 해소한 것은 바로 이책을 읽고서 해소되었다. '바로크'가 포르투칼어로 '찌글찌글한 여드름 같다.'라는 뜻인데, 해녀들이 흔히 쓰는 도저히 팔수 없는 못생긴 진주라고 하는 말을 가져다 붙인 이름이고, 로코코는 '조개껍질'이라는 뜻으로 당시의 미술이 조개껍질 같다라는 의미로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한다. 즉, 미술은 한시대를 앞서가기에 기존의 미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미술양식이 추하고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미술 사조에 대한 이름이 좋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서 나의 머리는 상쾌해졌다. 어원을 통해서 한단어를 인문학적으로 탐구하며,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들의 문화와 예술, 신화, 역사에 대한 공부가 자연스럽에 이루어졌다. 새로운 언어를 안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로 걸어들어갈 수 있는 길을 아는 것이다.

   Thank you라는 말을 통해서도 서양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thank는 think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Thank you"는 네가 해준 일을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겠다.라는 뜻이다. You're welcome라는 말의 welcome는 well과  come라는 뜻이 합쳐진 말로써, 너는 손님이니 빛이 아니다.라는 듯이 담겨있다. "excuse me"라는 말에는 제발 법적인 조치에서 저를 빼주세요. 라는 뜻이 담겨있다. 학교에서 배운대로 기계적 암기를 했다면 그 숨겨진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에서는 그 어원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고, 이를 통해서 서양인들의 정신세계에는 "Give and take"가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조승연은 여기에 그들이 부부사이에도 조그만 일에 "please"와 "Thank you"를 붙이지 않으면 화났다고 생각한다는 일화를 곁들인다. 결국 외국인 남성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은 문화차이를 극복못하고 이혼한다. Do ut des.(도 우트 데스. 네가 주기 때문에 나도 준다.) "라틴어 수업"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알게된 단어다. 서구법의 기본원리가 된 이 원칙이 그들의 삶에도 녹아 있었다. 모든 것에 공짜는 없다. 상호성의 원칙이 언어와 삶에 녹아있다는 사실은 우리와 다른 점이다. 다르기에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언어 인문학을 알아야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일으면서도 왜? 영어 제목이 "The Prince"인지에 대해서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저자가 의역을 해서 우리에게 '군주론'으로 알려졌겠지.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prince의 어원이 premier이라는 사실과 The prince of Monaco(모나코 국왕), Charles, prince of wales(찰스 왕자)라는 표현을 알고 나서야 "Prince"라는 단어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Prince라는 단어가 국왕에서 왕자로 의미가 변천된 연원이 영국이 웨일스를 병합하기 위해서 즉, 에드워드 왕이 자신의 아들 찰스를 웨일스 계승자로 정하면서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모든 의문점이 해소되었다. 그 단어의 역사를 알아야 진정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Booting라는 단어를 조승연은 문차우젠 백작의 일화에서 생겨난 단어라 설명한다.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당겼 끌어올렸다는 일화에서 생겨난 단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어령 교수는 말을 타기 전에 부츠를 신어야 한다는 것에서 온 것이라 설명했다. 말을 타기위해서 부츠를 신어야하듯이, 컴퓨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버튼을 눌러야하기에 부팅이라는 단어가 컴퓨터에 사용되었다는 설명이다. 조승연의 설명보다 이어령 교수의 설명이 간단하면서도 이해가 잘되었다. 아마도, 단어의 어원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으니, 두사람의 주장은 학설의 차이로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이라는 책은 언어를 배우는 것이 새로운 영혼을 얻는 길이며,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특히, 언어를 배울 때는 단순 암기식으로 공부하기 보다는 인문학을 탐구하듯이 그 단어의 어원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해주었다. 조승연의 '비즈니스 인문학'이라는 책도 읽고 싶어졌다. 그래, 단어의 어원을 공부하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며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자.

 

ps. 옥에도 티가 있듯이, 이 책에도 약간의 오류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아테네는 간접민주국가였다."

=> 아테네는 직접 민주국가이다. 인구가 적었던 아테네는 직접 민주정치를 할 수 있었으나, 현대국가에서는 장소와 많은 인구수로 인해서 국민의 대표가 정치를 하는 간접민주정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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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가면의 제국 - 오리엔탈리즘, 서구 중심의 역사를 넘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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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진보적 역사선생님들 중에서 박노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던져주는 한국사회에 대한 촌철살인은 너무도 아프지만, 미처 보지 못했던 우리의 다른 모습을 성찰하게 해준다. 제국주의 국가의 피해자로 스스로를 자리메김하고 우리사회에 대한 비판적 지적에 대해서 히스테리적 반응을 보였던 나를 되돌아 보았다. 지금까지 읽은 박노자의 책중에서 이 책이 가장 탁월했다. 그의 조국인 러시아에서 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조국인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탐구하고, 현자 자신의 터전인 노르웨이와 그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를 심도 있게 파헤치고 미쳐 보지 못한 치부를 들춰냈다. 박노자의 매력속으로 들어가 보자.

 

1. 하얀가면을 벗는 방법.

 책장을 펼치자 "우리 모두의 스승인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칩니다."라는 글 귀가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는 그의 날카로움은 에드워드 사이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이 책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오리엔탈리즘'이다. 서구인들이 동을 바라보는 편견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오리엔탈리즘과 동양인이 서양인을 바라보는 왜곡된 편견을 뜻하는 옥시덴탈리즘이라는 창을 통해서 박노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많은 진실들을 보고 있다. 구체적으로 박노자의 글을 통해서 그가 사회를 바라보는 방법을 살펴보자.

 

"1. 우리의 통념은 대개 19세기 서구 중심적 - 그리고 보통 자본주의 옹호론적 - 사회과학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당연한 '것도 자연발생적인 것도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중략)

 2. 우리의 사회 정치적 현실을 경정짓는 가장 주용한 기구인 국가는, 사회적 폭력을 독점하는 만큼 늘 각종 폭력을 행사하거나 잠재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위험하고 몰도덕적인 것이다. (중략)

 3. 근대의 서구 중심 세계 체제 전체가 문제시된다면 근대 패러다음 속의 대립적 개념들의 이분법들 - 예컨대 '반동'과 '혁명'의 이분법 - 도 상대화, 지양돼야 할 것이다. (중략)

 4. 하얀 가면에 갇힌 눈들은 늘 '중심' - 즉 서구적인 부강 과학 합리성을 가장 가시적으로 표상하는 쪽 - 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하얀 가면을 벗어던지려면 '중심'의 주술에서 깨어나고 지배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는 '반란적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야 할 것이다.(하략)"20-24쪽

 

  박노자가 제시한 하얀가면을 벗는 방법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의 관념을 의심하고 국가를 의심하고 국가가 제시한 이데올로기를 의심하며, 중심에서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한 한다. 주입된 이데올로기를 맹신하고 국가를 절대선으로 생각한다면 아무런 고통없이 행복하게 살다가 죽어갈 수 있다. 그 죽음이 국가의 폭력에 의한 죽음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박노자가 제시한 방법에 따라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하면 우리는 기존에 겪어보지 못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느꼈던 혼란과 놀라움을 견뎌내야한다. 아이가 어머니 배속에서 나오려면 좁은 산도를 거쳐야한다. 그리고 어머니 배속을 힘겹게 나와야만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해서는 박노자가 제시한 방법을 따라가 보려 한다.

 

2. 가면을 벗은 진실들

박노자는 세상의 모든 가면들을 벗겨 버린다. 박노자에 의해서 벗겨진 가면들은 충격적이었다. 내가 미쳐 바라보지 못했던 것들을 그는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박노자가 벗겨버린 가면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홀로코스트와 유대인이 쓰고 있는 가면이다. 박노자 자신이 소련출신의 유대인이 아닌가? 유대인들에게 홀로코스트의 가면을 벗어던지는 질문 자체가 위험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데도 박노자는 당당히 홀로코스트와 유대인에게 덧씌워진 가면을 벗어던진다.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를 말할 때, '세계사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박노자는 말한다. 과연? 홀로코스트에서 벌어진 대학살이 '세계사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일까? 아니었다. 절대왕권과 자본주의 국가들이 비서구권에 대해 저질러온 학살, 유럽인들이 미주 대륙의 토착 인구에 쓴 무기와 이들을 노예화한 것, 영국의 지배로 인한 인도의 황폐화(19세기 아사자 수는 1천만 명 이상), 영국의 아편 강매로 인한 중국의 아편 중족 유행(희생자 수를 1천만 명 이상으로 추산)은 홀로코스트를 능가한다. 어디 그뿐이랴? 박노자가 예로들지 않았지만, 일제의 난징 대학살, 일제의 남한 대토벌작전, 한국의 보도연맹 사건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대규모 살육이 행해졌다.

  역사는 선택적으로 호출된다. 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서 말했듯이, 역사는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호출된다. 유대인은 이스라엘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홀로코스트 만을 호출했다. 이때 히틀러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이름없는 집시와 공산주의자들은 제외되었다. 박노자는 말한다. 절대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란 폭력을 독점한 조직이다. 이 조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한다. 그 폭력이 사회적으로 합리적 폭력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합리화된 폭력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그 많은 폭력중에서 이스라엘 건국을 합리화할 수 있는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만을 호출했다.

  박노자의 이스라엘 가면 벗기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유대인의 역사에 덧씌워진 가면마져 벗겨 버린다. 이스라엘은 서유럽에서 박해받은 유대인들의 역사만을 정통역사로 가르친다. 아랍인들과 평화롭게 지낸 세파르디의 역사를 외면하고, 동유럽에 살고 있었던 아슈켄나지의 역사도 무시한다. 특히 아슈켄나지가 쓰고 있었던 이디시어와 이디시어 문학작품을 말살한다. 이스라엘의 말살 정책은 세파르디의 갓난 아이를 유럽 출신의 시온주의자에게 입양하는 '2세 동화작전'에서 극에 달한다. 박해의 역사를 설별해서 '박해받은 유대인'이라는 신화를 만들고, 이를 반박할 수 있는 세파르디와 아슈켄나지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히틀러와 전체주의 일본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이러한 역사만들기, 아니 가면 씌우기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난민에게 쏘아올린 미사일이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광경을 보며 환호하는 비극을 낳았다. 박해의 역사를 잊지 않고 가르치는 것은 다시는 박해의 역사를 겪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집살이를 겪은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서는 더욱 간악한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어머니가 되듯이, 박해받은 민족이 힘을 가지면 더 잔혹해질 수 있는 비극을 막지는 못했다. 박해의 역사를 평화와 공존의 역사로 만들지 못한 한계를 그들은 직시해야한다.

 박노자의 가면 벗기기는 유럽과 미국으로 이어진다. 독일에 비해서 서유럽과 미국은 더 도덕적일까? 라는 질문을 한다. 우선, 히틀러가 우생학을 근거로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선전했다는 실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나치 독일의 '인종위생법률'을 미국의 우생학자들이 극찬했으며, 서구를 비롯한 일본에서 우생학의 광풍이 불어닥쳤다는 사실을 박노자는 지적한다. 우생학이 식민지를 열등하게, 백인 제국주의를 우등하게 포장하는 사이비 과학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꺼리를 던져준다. 과학은 객관적인 학문이라는 말이 얼마나 의미없는 말인지, 정치와 학자들이 유착되어 서구의 하얀가면을 강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우리는 직면해야한다. 박노자는 말한다. "아랍 문화의 후진성을 늘 들먹이는 유럽중심주의적 학자들은 지금도 정학유착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 말을 우리는 명심해야한다. 과학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가면을 벗기 위해서......

  독일에 비해서 서유럽과 미국이 더 도덕적이지 않다는 박노자의 또 다른 근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에 대한 처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 독일 포로를 '살려주기 부담스러워서' 라인 강 근처 '임시 간이 수용소'에 10만명씩을 집어 넣었다. 그결과 수많은 독일 포로들이 죽었다. 프랑스의 경우, 식량을 비현실적으로 적게 줌으로서 '외인부대'에 지원 입대를 유인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때 베트남 전에 동원된 외인부대에는 독일 포로 출신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소련의 경우는 독일인을 강제노동, 강간, 살해했다. 이 광경을 본 솔제니친은 소련 정권의 도덕성에 심각한 의심을 하게 된다. 선과 악이라는 쉬운 이분법에 익숙한 우리에게 박노자의 글을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그러나, 우리가 하얀가면을 벗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견뎌내야한다.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다는 그의 관점은 우리가 특정 역사관에 입각해서 바라보는 세상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스라엘과 서유럽에 덧씌워진 가면을 벗긴 박노자는 불교로 눈을 돌린다. 선불교라하면 동양의 정신이 서양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일으켜 전형적인 밝은면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선불굘르 서구에 소개한 스즈키와 엘리아데가 전체주의 경력이 있는 자들이라는 지적을 한다. 특히 스즈키는 '무사도 다도 선불교를 동양 정신의 최고 표현'으로 평가한다. 즉 불교를 "폭력화 어용화"하여 "복고적 수구주의적 문명론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박노자는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간다. 왜? 벽안의 백인들이 선불교에 더 관심을 갖는가? 슬럼가의 흑인들이 경제적 이유로 선불교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산층 이상의 백인들이 선불교를 접할 수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박노자는 직시한다.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긍정적 현상속에 숨겨진 어두운 면을 직면하려는 그의 날카로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러하기에 박노자의 글과 말에 한국의 지식인들이 열광하는 것이다. 빨간약을 먹은 듯한 느낌과 가면을 벗은 상쾌함을 그의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3. 가면을 벗은 후에..

박노자의 글을 통해서 세상에 덧 씌워진 수많은 가면들을 벗었다. 가면을 벗은 후에 상쾌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남모른 당황스러움도 느꼈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박노자는 소련은 전체주의 국가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는 '소련은 전체주의 국가'라는 가면을 벗겨버린다. 예전에 뉴라이트 교수가 지금의 세계사 교과서가 전체주의 국가에 소련을 빼먹었다고 지적한 적이 있었다. 그때 소련도 전체주의 국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제대로된 반박을 할 수 없었다. 박노자는 공산주의 악마화에 황금의 기회를 준 독일계 유대인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이 1968년 재판을 내면서 "소련을 더 이상 전체주의 국가로 불러서는 안된다."고 명시했다고 말한다. 즉 전체주의 사회의 특징으로 핵화돼 무기력해져 천편일률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기 꺾인 개인'이 1950년대 초 소련 사회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란다. 그런도 미국 관학자는 '사회주의에 악마의 얼굴 씌우기' 위해서 전체주의라는 용어를 남용한다. 전체주의 연구의 권위자가 소련은 더 이상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관학자들은 소련에 가면을 씌우고 있으며, 한국의 뉴라이트들도 이를 따르고 있었다.

  박노자의 가면 벗기기가 '전체주의' 용어에서 처럼 상쾌함만을 주지는 않는다. 그는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식민지 수탈론' 뿐만 아니라, '식민지 근대화론', '동학 혁명론'까지도 비판한다. 모든 가면을 부숴버리는 그의 글에 나는 당혹감을 느낀다. 모든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깨부순다면 한국사에서 무엇이 남는가?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이라는 불완전한 창으로 역사를 바라보았는데, 이마져도 부숴버리면 어떻게 역사를 바라보아야할까? 박노자는 어떠한 틀도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새로운 역사를 바라보는 창을 만든다면, 박노자는 이마져도 깨부술 것이다. 그 창도 배제와 왜곡이 있다고.....

 가면을 벗었다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할까? 박노자는 가면을 벗은 러시아 음악계의 천제 유리한인과 제국주의 국가 네덜란드의 위선을 맹렬히 폭로한 물타툴리, 스탈린 체제에 저항한 알렉슨도르 지노비예프를 소개한다. 가면을 벗어던진 용기있는 이들의 삶은 너무도 힘겹다. 때로는 박해와 가난에 시달려야했다. 우리 사회에도 가면을 벗어던진 용감한 사람이 많이 있다. 수 많은 내부고발자들이 정의로운 일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무관심과 보복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가면을 벗지 않고 살 것인가? 가면을 벗고 고통받으로 살것인가? 쉽지 않은 질문이 밀려온다.

  가면을 벗는 상쾌함과 가면을 벗은 후의 고통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가면을 벗지 않는다고 모두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박노자는 폴란드 유학생들이 노르웨이에서 보인 굴종적인 모습을 소개한다. 박노자와 수업을 들은 폴란드 급우들은 교실에서 발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은 자기 나라의 수많은 간호사와 선원, 학자들을 받아들여준 노르웨이 관민에 '뜨거운 감사'를 표했고, 자기 나라를 후원해준 유럽국가에 존경심을 표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제3세계에 대해서는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얀피부의 유럽국가에는 굴종적인 모습을 보이고, 자신보다 힘이 약해보이는 제3세계에 대해서는 거만한 지배자의 모습을 보이는 폴란드 급우들의 모습은 안쓰러워보인다. 마치 시집살이를 당한 시어머니가 시어머니가 되어서는 더욱 억척스럽게 시집살이를 시킨다는 말처럼. 소련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에게 가혹한 분할 통치를 받은 폴란드가 강대국에게는 굴종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제3세계에 대해서는 멸시를 보내는 듯하다. 서구에 의해서 띄워진 하얀 가면을 벗지 못한다면, 굴종적으로 살수밖에 없다. 떳떳하게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면을 벗어 던져야한다. 폴란드 유학생은 우리가 가면을 왜? 벗어 던져야하는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박노자의 글은 충격적이면서도 불편하다. 박노자에 의해서 가면을 벗어지만, 나에게 펼쳐지는 세계는 당혹스러운 낯선 모습이다. 이를 삶에 어떻게 녹여내야할지는 또 하나의 과제가 되었다. 나의 서재에 읽고 싶은 책이 추가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프란츠 파농의 "검은피부 흰가면"이 그 책이다. 박노자의 안내를 받아서 새로운 고전들을 읽고 나 자신도 모르는 또다른 가면들을 벗어 던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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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0-01-17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 번 읽으러 왔을 때 1번까지만 글이 있었는데, 드디어!!!^^

2020-01-17 1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딸 외우고픈 감동영어 101
열린기획 엮음, 이윤선 감수 / 열린생각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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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문장, 혹은 일주일에 한문장을 읽고 쓰기를 하고 있다. '논어'가 공자의 어록을 모아 놓은 것이라면, 영어 명문장을 모아 놓는다면 이 또한 21세기의 논어가 될 것이라 믿는다. 이 책을 읽는데 1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때로는 너무 길고 어려운 문장이라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의역한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영어 번역기를 돌려 직역한 문장을 살펴보기도 했다. 이제, 대단원의 막을 내리며 나에게 생각할 꺼리를 던져준 문장을 살펴보자.

 

1. 교육을 생각하다.

'딸딸 외우고픈 감동여어 101'에는 우리 교육을 생각하게 하는 글들이 있다. 그 몇가지 문장을 살펴보자.

 

 They come through you but not from you, and though they are with you yet they belong not to you(그들은 그대들을 거쳐 왔을 뿐 결코 그대들에게서 온 것은 아니로다. 그러므로 비록 그대들과 지금 함께 있을지라도 아이들이란 그대들의 소유는 아니니라.)

 

자녀에 대한 애착이 강한 학부모라면 결코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자녀를 자신의 아바타로 생각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길 바라는 부모를 어떻게 바라보아야할까? 자녀를 자신의 악세사리로 생각하며, 자녀의 꿈보다는 자신의 한을 풀어줄 판사나 검사를 하기를 바라는 부모를 아름답게 생각할 수는 없다. 내가 담임 했던 학생중에서 이러한 경우가 많았다. 자녀는 실업계로 전학하여 요리사가 되고 싶지만, 부모는 자신의 한을 풀어주길 바란다. 판사나 검사가 되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뤄주길 바란다. 그러면서 자녀의 요구를 "뭘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라고 무시한다. 결국, 그 학생은 징계가 누적되더니, 2학년에 올라가서 학교를 자퇴했다. 부모가 자녀를 망친 전형적인 예이다. 우리 학부모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감동영어이다.

 

One who is generous to others and strict to himself is happy while the other who is strict to others and generous to himself is unhappy.(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부드러운 사람은 행복하고 자기에게 후하고 남에게 가혹한 사람은 불행하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부드러운 사람이 행복할까? 동의할 수 없는 문장이다. 특히 이러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행복할까? 그렇지 못한 경우를 많이 보았다. 남들에게는 너무나 예의바르고 올바른 학부모인데, 자녀는 몸이 아프거나 사고를 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한예로 내가 담임했던 반의 학생이 시험 전주만 되면 아파서 보건실에 누워있었다. 상담선생님에게 학생 상담을 의뢰했다. 상담선생님은 학부모와 학생 사이에 문제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정신과 진료를 받도록 해야한다는 상담선생님의 말에 학부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학생의 증상을 자세히 설명했다. 학부모의 입에서는 "그럼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아야겠네요."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학부모에게 그래야한다고 알려주었다. 그후, 학부모를 통해서 알게된 사실은 문제는 부모에게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녀가 타인에게 폐를 끼칠까봐 엄격히 키웠고, 학부모 자신도 타인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삶을 살아왔다. 부모의 이러한 모습이 결국 학생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해서 자녀의 이상증세로 표출된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하지 않았던가! 자신에게 너무 엄격하지 말라, 그렇다고 자신에게 너무 관대하지 말라, 타인에게도 너무 엄격하지도, 너무 관대하지도 말자.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니까.

 

Try  to be better than yourself(지금의 나보다 잘하자.)

 

타인과 비교하기 이전에 과거의 나와 비교하자.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나가 발전했다면 나는 의미 있는 삶을 산 것이다. 타인과 비교하면 우리는 더욱 불행해진다. SNS를 통해서 넘쳐나는 타인의 삶은 나의 삶과 비교하며 나를 불행하기 만든다. 학교현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과 타인을 끊임 없이 비교하면서 학교현장에서는 1등 조차도 1등을 놓칠까봐 불안해한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나가 더 나아지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더 발전한다면 나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있지 않을까?

 

2. 현실의 불공평함에 맞설 것인가? 

  이 책을 읽다보면, 인생을 생각하게하는 문장들이 많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할까?

 

Life is not fair. Get used to it.(인생은 공평하지 않다. 그것을 받아들여라.)-빌 게이츠

 

유명한 인물이 한 말은 모두 옳다는 잘못된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 빌 게이츠가 마운틴 휘트니고등학교에서 한 이 말도 과연 옳을까? 인생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적응하며 살아야할까? 아니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현실에 저항할까? 빌 게이츠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숙명론자가 되거나 현실에 잘 적응한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에 반해서,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불평분자라는 말을 듣거나, 혁명가가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할까? 현실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바탕위에서 사회 변혁을 이룰 방법을 선택해야한다. 나는 그렇게 본다. 현실이 불공평하다는 진실을 보지 못한다면 현실을 변혁시킬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사람의 우리 주변에 있다.

 

Champions arent' made in gyms. Champions are made from something they have deep inside them - a desire, a dream, a vision.(참피언이란 체육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챔피언은 자신들의 내면 깊숙이 있는 - 소망, 꿈, 이상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무하마드 알리

 

불량배들에게 맞지 않기 위해서 권투를 배워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라이트 헤비급 금메달을 획득했지만, 노예 출신 흑인 이라는 이유로 백인 전용 레스토랑에서 쫓겨난 캐시어스 클레이의 말이다. 백인 전용 레스토랑에서 쫓겨난 사건은 그의 삶을 바꿔 놓는다. 현실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직면하고, 현실을 변혁하려 했다. 노예 신분으로 태어나 주인의 성을 땄던 이름을 버리고 이슬람교로 개종한 그는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더 이상 캐시어스 클레이가 아니다. 무하마드 알리로 다시 태어났다. 월남 참전 징집 명령을 거부하고, 현실과 투쟁했다. 파킨스씨병 투병중에도 세계 빈곤국과 장애인 지원 사업에 앞장섰고 2005년 유엔 평화상을 수상했다. 무하마드 알리는 현실을 변혁하고 있었다.

 

You could build the embankment stretching from the sky to the ground after you have completed a castle in the clouds. One who starts his foundation only on the ground never builds a house that reaches the clouds.(구름 위에 궁전을 지어놓은 다음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탄탄한 축대를 쌓을 수도 있다. 시작을 오로지 땅에서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구름까지 닿는 집을 짓지 못한다.)-린다 김(로비스트)

 

유명한 로비스트 린다 김의 글이 이 책에 등장할 줄은 미쳐 몰랐다. 린다 김은 구름 위의 꿈의 궁전을 짓고 그 후에 축대를 쌓아 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집을 오직 땅으로부터 지어 올려야 한다는 것은 땅을 가진 자의 논리라고 주장하는 린다 김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땅이 마땅치 않다고 꿈조차 초라할 필요는 없다는 말은 가슴을 아리게한다. 불행한 현실을 냉철하게 인정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구름위의 궁전을 짓는다는 말은 허황된 망상일 뿐이다. 로비스트 린다 김의 삶을 본다면, 더욱이 동의할 수 없다. 현실을 냉철히 바라보지 못한 삶은 행복할 수 없다. 현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한다는 진리는 앨리슨 래퍼의 삶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I cannot be mentally disabled even though I am physically disabled.(장애인이지만 정신마저 불구일 수는 없다.)-앨리슨 래퍼

 

팔다리가 없이 태어나, 생후 6주 만에 생모에게 버림받고, 장애인 보호시설에서 '괴물'이라 놀림받으며 살았던 앨리슨 래퍼의 말이다. 남편에게 버림 받기까지 했지만,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림을 그려 브라이튼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세계 여성 성취상을 수상하며 대영제국 국민훈장까지 받는다. 그녀는 자신의 암담한 현실을 직시했다. 현실은 그녀에게 너무도 불공평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의 가치를 실현했다. 타인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예술과 미소로 승화시키는 삶을 살고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심리치료를 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직면'이다. 자신의 현실을 직면하는 것, 과거의 고통과 직면하는 것이 치료의 첫걸음이다. 현실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에 직면하고 이 현실을 변혁시킬 방법을 찾아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각오를 해야한다. 무하마드 알리와 앨리슨 래퍼의 삶은 현실과 맞서 싸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그 삶이 얼마나 값진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3. 어떠한 평가를 받고 싶은가?

  인생을 살아가며, 혹은 인생을 마치고 나서 어떠한 평가를 받고 싶은가를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이 책에는 어떠한 평가를 받는 삶을 살 것인지에 관한 글들이 있다.

 

When you were born, you cried and the world rejoiced, Live your life so that when you die, the world cries and you rejoice.(네가 태어났을 때, 네가 울고 세상이 기뻐했단다. 네가 죽을 때는, 세상이 울고 네가 기뻐할 수 있도록 세상을 살아라.)-체로키 인디언 속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죽을 때 자신은 기뻐하며 죽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삶!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할까?

 

Love means to be their feet toward happiness excluding me.(사랑은 나 이외의 사람에 대한 행복을 위해서 발이 되는 것이다.)-톨스토이

 

톨스토이의 말에 동의하는가?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키는 삶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눈을 띄워드리기 위해서 공양미 300석에 자신을 팔고,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를 효녀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신 때문에 인당수에 빠진 심청 아버지는 행복할까? 가장 이상적인 사랑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이다. 자신이 행복해지면서 타인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경지가 최고의 사랑이 아닐까? 자녀가 맛있게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기만해도 좋아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어느 일방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사랑을 주는 쪽도 사랑을 받는 쪽도 모두 행복해야한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The best time to plant a tree is twenty years age; The second best time is right now.(나무를 심기에 가장 좋은 때는 20년 전이었다. 두 번째로 좋은 때는 바로 지금이다.)-중국 속담

 

매번 후회하는 학생들에게 해주면 좋은 명언이다. 아니, 우리 모두에게 해주고 싶은 명언이다. 지금 아쉬움이 있다면 지금 당장 그 일을 시작하자. 그러면, 20년 후의 자신은 행복해할 것이다.

 

We fought - we fought as hard as we could. And though we feel short, the failure is mine, not yours. I wish God speed to the man who was my former opponent and will be my president.(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싸웠습니다. 비록 아쉬움은 있지만, 실패는 나의 것입니다. 여러분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반대편에 섰던, 그리고 나의 대통령이 될 오바마의 행운을 빕니다.)-존 매케인

 

어리석은 친구보다 현명한 적이 낫다.라는 말이 있다. 오바마 대통령과 경합한 존 매케인이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 자신의 경쟁자에게 행운을 빌어주는 도량 넓은 모습을 보면서 부러움을 느낀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경쟁자에게 덕담을 건넬 수 있는 도량과 여유를 가질 때에 우리 삶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Beautiful young people are accidents of nature, but beautiful old people are works of art.(아름다운 젊음은 우연한 자연현상이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작품이다.)-엘리노어 루즈벨트

 

자신을 이롭게하면서도 타인을 행복하게 하며,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면, 지금 당장 그 일을 시작하고, 자신의 경쟁자에게 패하더라도 그에게 행운을 빌어주는 넉넉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의 노년은 예술작품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우연한 자연현상이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작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둘때, 자신은 행복해하고, 세상사람들은 슬퍼서 눈물을 흘릴 것이다.

 

 

If we do not live as we think, we think as we live.(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스콧 니어링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가슴에 남는 문장이다. 스콧 니어링은 유복한 자본가의 아들로 태어나서, 대학교수 시절 아동 노동 착취와 세계 대전에 반대했다. 1932년 미국 버몬트의 한적한 시골에 내려가서, 직접 집을 짓고, 농사지으며 검소하게 살아간다. 최소한의 생계를 위한 시간만 노동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독서와 명상으로 보낸다. 최대한 조리하지 않은 음식을 섭취하고 육식을 금하고, 적게 먹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1983년 100살에 스스로 죽음이 다가왔음을 느끼고는 일절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다. 성자와 같은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 어찌 이런 삶이 가능할까? 라는 경외감마져 든다. 아마도 해답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는다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그의 말에 있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이상적 삶을 살아가려 노력할 때만이 살아 있는 주체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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