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미술관 - 아픔은 어떻게 명화가 되었나?
김소울 지음 / 일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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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체 첸치"라는 작품을 소개하며 이 책은 말문을 연다.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는 그져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진속 첸치는 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하고 존속치사 혐의로 사형을 당하기 전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베아트리체 첸치"라는 작품에서 숭고함이 느껴졌다. 더욱이 엘리자베타 시라니라는 작가는 아버지가 스파르타식 그림 교육을 시키는 등 강압적으로 양육되었다는 사실은 "베아트리체 첸치"를 단순한 작품이 아닌, 위대한 작품으로 느끼게 했다. 단순한 그림 한조각으로 볼 수도 있는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알게 되자, 작품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자 김소울은 그 이름 처럼 나의 영혼(soul)을 흔드는 작품들을 연이어 소개했다. 저자 김소울의 안내를 받아, 우리의 영혼을 흔드는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만나보자.

 

1. 홀로선 여인과 홀로서지 못한 화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 모두가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에게 의존하는 삶은 결혼 생활을 파국으로 내몰 수도 있다. 치유 미술관에 소개된 여성화가들은 자신의 아픔을 그림으로 승화시켰다.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아픈 마음을 치유 받기도 하고, 때로는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이탈리아의 여성 화가이다. 우울증과 PTSD를 호소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화가 아버지 덕분에 화실에 다니며 그림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친구인 그림 선생은 젠틸레스키를 성폭행한다. 성폭행의 고통 속에서 젠틸레스키는 더 큰 고통을 받는다.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손가락이 으스러질 정도의 고문을 참고 견뎌야 했다. 남성 우월주의 시대는 피해자가 고통을 겪어야하는 야만의 시대였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에 의해서 강제 결혼을 당하고, 아버지와 의절한다. 그녀가 다시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은 "평화와 예술의 알레고리"를 아버지와 협업으로 완성하면서 부터이다. 미술을 통해서 그녀는 아버지와 화해하고, 진정한 예술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젠틸레스키의 고통도 보통 사람이 감당하기 너무도 힘든 경우인데, 그녀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한 여성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프리다 칼로이다. 6살 때 소아마비를 겪고, 18살에 교통사고로 30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고, 세차례 유산과 잦은 남편의 외도로 그녀는 고통을 받았다.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이라는 작품 속의 프리다 칼로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당당한 눈매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연이어서 닥치는 불행은 그녀를 너무도 괴롭게 만들었다. "헨리포드 병원""단지 몇 번 찔렀을 뿐"이라는 작품은 그녀가 얼마나 심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 쳤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침대에 누워서 생활하면서도 그녀의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희망의 나무, 굳세거라"라는 작품에는 두명의 프리다 칼로의 모습이 보인다. 한명은 수술용 침대에 누워서 칼자국이 보이는 등을 드러내고 있다. 한명은 당당히 앉아서 정면을 응시한다. 현실 속의 나는 침대에 누워 지낼 수 밖에 없지만, 자신의 영혼은 현실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살아있는 듯하다. 그녀의 그림은 그녀의 의지와 그녀의 위대성을 더욱 돋보여주었다.

젠틸레스키와 프리다 칼로와 대비되는 여성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조현병과 망상장애를 호소하고 있는 카미유 클로델이다. 그녀의 불행은 잘못된 사랑에서 시작되었다. "사쿤탈라"라는 작품에서 보이듯이, 그녀는 로뎅의 사랑을 절실히 바랬다. 그러나, 로뎅은 그녀를 육체적으로 탐닉했을 뿐, 그녀의 영혼을 사랑하지 않았다. 로뎅이 떠난 이후, 그녀는 드뷔시와 새로운 사랑을 한다. "왈츠"라는 작품에서 보이듯이, 그녀는 행복의 순간을 만끽한다. 그러나, 그녀는 남성들의 사랑을 받아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 여성이었다. 홀로서기를 할 수 없는 카미유 클로델은 드뷔쉬가 동거녀에게 가버리자, 다시 추락하였다.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다가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 홀로설 수 없는 그녀는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행복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젠틸레스키와 프리다 칼로가 그림에게 힘을 얻어 홀로서기를 했다면, 카미유 클로델은 남성의 사랑에 의지해서 자신의 소망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젠틸레스키와 프리다 칼로는 그림을 통해서 힘을 얻었지만, 카미유 클로델은 예술 작품은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도구일뿐, 작품을 통해서 힘을 얻지 못했다. 같은 예술작품도 홀로서기가 가능한 자에게만 무한한 힘을 주는가 보다.

 

2.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화가

고통이 예술을 탄생시키는 것일까? 수 많은 작품들 중에서 화가의 애절한 삶이 작품을 더욱 숭고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빈센트 반 고흐, 에드바르트 뭉크, 폴 세잔, 에드가 드가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그들의 삶의 무게가 어떻게 그들을 짖눌렀을까? 그리고 명작은 어떻게 잉태된 것일까?

치유 미술관을 읽으며, 가장 기대를 했었던 작가는 빈센트 반 고흐이다. 그는 너무도 유명하기에 그의 삶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창녀를 사랑하고 조현병과 알콜중독에 시달리다 권총 자살을 한 고흐. 그의 삶을 짖눌렀던 마음속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저자 김소울은 "태어나기 전에 죽은 형의 이름을 물려받음"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죽은 형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고흐의 가슴 속에는 울고 있는 내면 아이가 있었다. 관심과 사랑이 필요했기에 그는 사랑에 매달렸다. 그럴수록 그는 저 많은 고독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감자 먹는 사람들""구두 한 켤레"라는 작품에서 보이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사실 상처받은 내면 아이에 대한 자기애일지도 모른다. 고흐의 대표적 명작 "별이 빛나는 밤에"는 죽음을 상징하는 사이프레스 나무가 저 하늘의 별과 만날 수 있을 것 처럼 크고 높게 그려져 있다. 그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한 이상과 만나길 바랬던 것은 아닐까? 재미있는 사실은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 태호는 자신의 아들 이름을 형의 이름인 빈센트 반 고흐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태호의 아들은 미술관을 만들어 삼촌의 작품을 모두에게 선물해주었다. 태호의 아들 빈센트 반 고흐의 내면 아이는 울지 않고 인류에게 무한한 감동을 선물해주었다.

잘 알려진 빈센트 반 고흐에 비해서, 에드가 드가의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작품 "자두""카페-콩세르에서:개의 노래" 속의 여성은 우스광스럽게 그려져 있다. 드가가 여성 혐오증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어머니 때문이다. 드가의 어머니가 삼촌과 육체적 관계를 하고 있을 때, 13세의 드가가 그 광경을 목격한다. 모든 여성은 드가의 어머니의 복사판으로 보였다. 드가에게 여성은 부정한 여성일 뿐이었다. 일평생을 독신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의 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그림자 때문이다. 말년에 들어서서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후, "회복기 환자"라는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어머니의 그림자는 점점 사라진다. 여성의 얼굴을 제대로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상처가 완벽히 치유된 것은 아니다. 평생을 혼자 살았던 것에서 그의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에드가 드가가 어머니에게 상처를 받았다면, 폴 세잔은 아버지에게 상처를 받았다. 부유한 은행가의 사생아로 태어나서 아버지에게 무시를 당하며 살았다. 그 상처는 세잔의 가슴을 후벼팠다. 결국, 그는 아내와 친구 모두에게 가슴을 닫아 버렸다. 아내와 정식 결혼을 하지 못한 것도, 친구들의 말을 왜곡해서 이해하는 것도 아버지가 남긴 상처였다. 그의 대표작 "생 빅투아르산"이 탄생한 것도 타인과 교류없이 산만을 마주한 결과였다. 아버지가 남긴 상처는 "생 빅투아르산"이라는 대작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에드가 드가의 삶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에드가 드가와 폴 세잔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남긴 상처로 고통받았다면, 에드바르트 뭉크는 가족의 죽음이라는 상처로 고통받았다. 5살에 어머니가 사망했고, 13살에 누나 소피가 사망했다. 32살에 남동생 안드레아가 사망했다. 그의 대표작 "절규"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받는 내면을 드러낸 듯하다. "죽은 어머니", "병실에서의 죽음"이라는 작품은 가족의 죽음이 얼마나 뭉크에게 큰 고통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림이 가족을 상실한 그에게 치유의 힘을 주었다. "태양"이라는 작품은 죽음의 공포를 밝은 태양이 몰아내는 듯한 인상을 준다. 80세까지 살면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상처받은 조개가 진주를 잉태하듯이, 상처받은 작가는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들에게 상처는 명작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었다. 그렇다면, 상처가 없었다면, 그들은 위대한 작품을 남기지 못했을까? 상처받은 그들이 작품을 통해서 인류에게 무한한 감동을 선사한다면, 그들이 고통에 괴로운 것인 인류에게는 행운일까?

 

 

"치유미술관"은 예술 작품의 기교에 눈길을 돌리기 보다는 명작에 녹아있는 화가의 고통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서 명화에 공감하며 명화와 대화를 할 수 있게 한다. 소설가 스탕달이 산타크로체성당에서 "베아트리체 첸치"를 보고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황홀경에 빠졌다. 이를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책속에 소개된 작품을 보면서 '스탕달 신드롬'에 빠져있었다. 명화를 통해서 감동의 물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치유 미술관이 선사한 아주 커다란 선물이다. 그림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ps. 물론, 이책에도 아쉬움은 있다.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스페인 독립전쟁을 그린, 프란시스코 고야의 대표작 '180853'을 소개하지 않은 것과 베르트 모리조가 조현병과 알콜 중독을 겪은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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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속패전론 - 전후 일본의 핵심
시라이 사토시 지음, 정선태 옮김 / 이숲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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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일본은 이해하기 힘든 나라이다. 주변 나라를 침략하고 엄청난 악행을 저질렀다면, 주변국에 사죄하지는 못하더라도, 미안한 감정은 가져야하지 안을까? 강한 놈에게 덤볐다가 패배했다면, 속으로는 강한 놈에 대한 복수를 보통은 꿈꾸지 않을까? 2차세계 대전 전범국이라는 독일과 일본은 너무도 대비적인 전후 처리를 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사건은 후쿠시마 핵사고 때의 일본인들의 침착함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도 후쿠시마 식품을 먹어서 응원하자라고 외치는 그들을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가까운 나라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의 역사인식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책이 필요했다. 그러던차에 팟캐스트 '일당백'에서 이 책을 소개해주었다. 내가 읽고 싶었던 바로 그 책이었다. 책의 두께가 적어도 600페이지 정도는 될 줄 알았던 나는 너무도 얇은 두께에 놀랐다. 그러나, 이책은 얇지만 무거운 내용이 쉽게 적혀있었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미국의 속국 일본

 

'일본은 미국의 속국이다.' 라는 말은 번역 전쟁이라는 책에서 처음 보았다. 당시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번역 전쟁이라는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다른 것이 많았기에 더 많은 자료를 탐독한 후에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일본 관련 자료를 볼수록, 일본이 미국의 속국이라는 번역 전쟁의 주장은 진실로 다가왔다.

교토세이카 대학 총합인문학과 교수인 시라이 사토시는 다양한 자료들을 분석하며 일본이 미국의 속국임을 증명하고 있다. 일본이 미국의 속국임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은 놀랍게도 '북방 4개섬(구나시리 섬, 에토로후 섬, 시코탄 섬, 하보마이 제도)'에서 발생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장 제2조에 "일본국은 지시마 열도와 일본국이 190595일 포츠머스 조약의 결과로 주권을 획득한 가라후토 일부 및 이곳에 근접한 여러 섬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방기한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1956년 일소 공동선언에서 소련은 '하보마이 제도 및 시코탄 섬을 일본에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북방 4개섬 문제를 해결하고, 소련과 일본의 관계가 가까워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가만있지 않았다. 미 국무장관 덜레스는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장관에게 "이 조건으로 일소 평화조약 체결을 밀어붙인다면 미국은 오키나와를 영구히 반환하지 않겠다."라고 협박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적인 소련과 일본이 영토문제를 해결하고 가까워진다면, 일본에서 미국의 입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소련과 일본은 대립해야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첨예한 '영토 분쟁'이 분쟁꺼리로서 남아있어야했다. 일본을 주권국가로 생각한다면, 덜레스의 협박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협박에 굴복한다. 사춘기 자녀는 부모로부터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서 부모와 대립한다.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자녀는 홀로설 수 없다. 일본 극우파에게 미국은 천황제라는 '국체'를 유지시켜준 은인이다. 미국 굴종외교를 하면서도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려하지 않는 일본을 보면 측은함이 밀려온다. 그들은 영원히 홀로설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놀라운 사실은 일본이 미국의 속국이라는 사실을 일본인들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라이 사토시의 말을 들어보자.

 

"일본이 미국의 속국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정치인들은 미국과 일본의 정치적 관계가 대등하다(적어도 대등에 접근하고 있다.)고 입에 발린 말만 늘어놓는다. 이런 말은 국민에게 일본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킨다. 한편에서 '우리나라는 훌륭한 주권국가'라는 말을 들으면, 이것이 새빨간 거짓임을 은연중에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토 문제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듯이, 아시아 다른 나라와의 관계라면 '우리나라에 대한 주권 침해'라는 관념으로 과도하게 흥분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정신구조에 있다."-147

 

입밖으로 '일본이 미국의 속국이다.'라는 말을 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일본이 미국의 속국임을 인정하고 있다는 시라이 사토시의 말은 가히 충격적이다. 일본은 미국 덕택에 천황제라는 국체를 보존했다. 그리고, 미군의 오키나와 주둔에 동의하는 댓가로 경제 개발에 온 힘을 기울일 수 있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는 배부른 돼기가 되는 길을 선택한 일본은 주인이 주는 찌꺼기에 행복해하며 주인의 곁을 떠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2. 노예를 길러 내는 일본

주한미군 사령관이던 위컴이 한국민은 레밍(들쥐)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어도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한국에도 '레밍'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인의 절대 다수는 레밍이기를 거부한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어 나온 수많은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시켰다. 헌법상으로만 존재했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말을 현실에서 증명했다. 진정한 '레밍'은 일본에 있었다.

시라이 사토시는 일본이 미국과 싸우면 반드시 패배한다는 사실을 당시 일본인들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도 앞장서서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하지 않았다. 소위 '대세 순응형 일본인'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사례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버섯구름이 피어오르자,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은 '하늘이 도왔다.'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아니, 원폭을 2개나 맞았는데, '하늘이 도왔다'니 무슨 해괴한 말인가? 원폭이 본토 결전을 회피할 수 있으며, 국내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혁명'을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1억 총 옥쇄를 부르짖으며, 천황제라는 '국체'를 지키기 위해서 어떠한 희생도 치루겠다는 지배층들에게 그 누구도 '아니오'를 외치지 못했다. 그래서 "일본형 사회. 마치 레밍 떼처럼 파국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할 결의라도 굳힌 것일까?"라는 사토 에이사쿠의 푸념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일본 사회는 아무도 책임지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회의를 많이한다. 좋은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것이 회의의 목적일텐데, 일본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회의를 많이한다. 그리고 그렇게 회의를 많이 함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레밍처럼 앞사람을 따라갈뿐이다. 앞서가던 레밍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레밍들은 계속해서 절벽으로 뛰어내린다. 용기 있게 "NO"를 외치지 못하는 일본인의 노예 근성은 레밍과 절묘하게 일치한다.

일본에 왜? 레밍과 같은 노예들이 많을까? 그 이유를 나는 일본식 교육에서 찾고 싶다. 유치원에서부터 가장 강조해서 배우는 것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것이다. 가족이 죽은 상황에서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슬픔을 극도로 자제하도록 강요받는다. 같은 회사에서도 동료에게 가족의 부고를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으며, 묻지도 않는다. 같은 무리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그는 왕따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일본 기업에서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가장 중요시보는 것도 전체 조직에서 잘 융화될 수 있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섬나라라는 특성과 천년이 넘도록 사무라이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아온 일본인들은 살아 남기 위해서 타인의 눈치를 보도록 만들어졌다. 이러한 대세 순응형의 일본인들은 브레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의 모습을 띄기도 했다. 조선병합 => 만주사변 => 중일전쟁 =>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제국주의의 길을 그들은 막지 못했다. 그리고 리틀보이와 팻맨이라는 핵폭탄이 일본에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지금은 일본의 레밍 근성은 사라졌을까? 일본에는 '마스고미'라는 신조어가 있다. 번역하자면, 기레기라고 말할 수 있다. 매스미디어와 쓰레기의 합성어 '마스고미'라는 말은 일본의 언론이 얼마나 죽어 있는지를 잘 드러낸다. 아베정권의 뜻에 거스르지 않는 어용언론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언론에게서 무슨 희망을 찾을 수 있겠는가! 일본의 정치인과 학자들도 '마스고미'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일본인들이 레밍의 모습을 벗어던지기 위해서는, 노예 근성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지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나태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아니오"를 외칠 수 있어야한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성실한 아이히만이 수만명의 유대인을 홀로코스트로 보냈다는 지적을 우리는 겸허히 되새겨야할 것이다. 앞사람만 보고 앞으로 나아가다가 절벽으로 떨어지는 레밍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진실과 마주할 용기 없는 자들

'영속패전'이라는 말은 이 책의 핵심을 관통하는 말이다. 1945815일을 일본은 '패전일'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 날은 '종전일'일 뿐이라 믿는다. 일본의 극우파들은 잘못된 전쟁을 일으켜 자국민과 수많은 아시아 태평양 사람들을 죽음에 내몰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려하지 않는다.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면, 그 책임을 지고 일본 사무라이의 '영광'스런 죽음의 형태인 '셋푸쿠(할복)'를 해야한다. 그러나 그들은 패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1945815일은 '패전일'일 수가 없다. 단지 '종전일'일 뿐이다.

베를린을 여행하던 시라이 사토시는 무슬림 택시기사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절대로 용서 못해. 모든 문제는 미국이라고. 우리 무슬림이 살인자라고? 그놈들이야말로 살인자지."

"우리는 절대 용서 못 해. 너희도 그렇지? 그놈들이 원자폭탄을 떨어트렸으니까. 다음에 미국이라 붙을 때 꼭 같이하자고!"-199

 

미국에게 원자폭탄을 2개나 받은 일본은 당연히 미국에 대한 앙금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무슬림의 말에 시라이 사토시는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적국이었던 나라에 빌 붙어 적국의 군대가 주둔하기를 촉구하면서 까지 자기 보신을 도모한자들"이 바로 일본의 극우파였다. 한반도와 대만이 냉전의 최전선에서 일본을 막아주고 있었기에 미국의 군사력에 기대어 경제개발에 매진할 수 있었던 일본은 아시아 각국이 공산주의의 침략에 무너질 수 없는 군부독재국가의 탄생을 용인한다는 로스토우전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권력을 잡은 일본 극우파는 일본의 원죄와 마주하기 보다는 기억을 부정한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이기 보다는 배부른 돼지로서 살라고 일본인을 '교화'시켰다. 그리고 대세 순응형인 일본인들은 이에 충실히 따랐다. 그리고 그때의 향수에 젖어있는 일본 국우파 단체 재특회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 경제가 다시 살아난다는 망발을 서슴치 않고 짖꺼린다.

누구나 자신의 아픈 과거와 마주할 때는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아픈 과거를 마주할 때, 진실을 직면해야만 우리는 더욱 성장할 수 있다. 일본 극우파는 자신들의 원죄와 마주하기를 거부했다. 미국에 패전을 하고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종전'일 뿐이라고 믿는다. 성장통이 무서워 정신적 성장을 포기한 일본인들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어 본다.

 

 

시라이 사토시가 100%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샌프란 시스코 조약에 한국이 초청받지 못한 이유가 일본의 반대였다는 사실을 직면하지 않고, "한국은 전쟁 당시 일본의 일부"였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의 글을 인용해서 자신의 주장을 보강하기도 했으며, 미국 행정부가 미국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확인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스크 서한을 근거로 독도를 일본 영토로 주장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라이 사토시의 '영속패전론'을 우리가 읽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책의 엮자 정선태는 '옮긴이 글'에서 "일본 현대사의 구조를 관통하는 핵심이 '영속패전론'이라면 한국 현대사의 그것은 '영속식민지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라는 지적 때문이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시위에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들고 나오는 그들을 보면 '영속 식민지론'에서 벗어나길 거부하는 레밍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 전쟁이 벌어지는 속에서도 일본 의류를 입어서 응원하자고 말하는 일부 일베들과 일본편에 서서 저자세 외교를 정부에 건의하는 일부 정치인들에게서 '영속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일부분을 본다. "우리의 지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나태를 연로로 삼고"있는 "영속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 없이 지적 탐구를 하고, 불의에 대해서는 용기 있게 "아니오"를 외칠 수 있어야한다. 그래야만 전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에게 "우리는 레밍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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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 그들은 어떻게 부의 역사를 만들었는가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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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민족,유대인! 그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마빈 토케이어가 쓴 '탈무드'라는 책을 통해서 였다. 자선을 베풀줄 아는 사람들이며, 부유한 그들을 시기 질투하는 유럽인들에게 박해를 받았고, 마침내, 2천년 동안의 유랑을 끝내고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을 세운 민족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세운 것에 대해서 비판하는 친구에게 유대인 편에서 반박했을 정도로 유대인에 대한 친근감은 높았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역에 폭탄이 쏟아지는 모습을 언덕위에 올라가 감상하면 환호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유대인에 대한 우호적인 생각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환호하는 그들을 비판하는 기자가 쫓겨나는 현실을 보면서 유대인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연민의 정에서 시작하여 두려움을 주고 있는 그들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그래서 '벽돌책'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600페이지를 자랑하는 '유대인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1.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것은 정당한가?

  우리 속담에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말이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돈을 벌어서 좋은 곳에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선한 사람일까? 로마에 의해서 성전이 무너지자, 유대인들은 현실의 성전을 짓는 것보다 시간 속에 성전을 짓는 것을 중시하게 되었다. 바리세인들은 율법을 중시여기고 토라와 탈무드를 가르치고 읽었다. 중세 유럽인의 90% 이상이 문맹자였던 그때에 유대인들은 토라와 탈무드를 읽기 위해서 글을 배웠다. 자신들만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유럽 정세를 파악하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런데, 땅을 소유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천시여기는 금융업, 시체처리하는 일, 동물의 가죽을 베끼는 일 등등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일이라도 해야했다. 유대인은 항상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그들은 유럽의 금융을 장악해갔다. 때로는 밀수와 노예무역을 통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유니대인 출신의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아미스타드'에 노예무역의 잔혹함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런데, 노예무역에 유대인들이 참여했다. 수많은 흑인 노예들이 배안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때로는 바다에 던져져 죽었고, 때로는 노예시장에 팔려 책찍을 맞으며 설탕과 목화를 생산하도록 내몰렸다.

  최영장군은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을 했다. 드비어스의 창공에 있는 다이야몬드 원석 모드가 세상에 나온다면 "다이아몬드"는 "돌값으로 폭락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블러드 다이야몬드'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다이야몬드를 채취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노예처럼 다루고, 어린 소년들에게 살인을 하도록 시킨다. 그리고 다이야몬드의 유통을 장악하고 있는 드비어스가 소개된다. 드비어스! 유대인에 의해서 세워진 공룡 기업!! 그 실체를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드비어스가 '블러드 다이야몬드'를 만들도록 강요한 적은 없다. 전체 유통구조를 드비어스가 장악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다이야몬드에 피를 덧칠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탐욕의 다이야몬드를 갖기 위해서 피를 뭍히고 있다. 탐욕의 유통구조 정점에 드비어스가 있었다. 내가 결혼 반지로 다이야몬드를 거부한 이유도 영화 '블러드 다이야몬드'를 보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면서 피묻은 다이야몬드를 건네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충실히 다이야몬드의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면서 돈을 벌고 있는 드비어스는 '블러드 다이야몬드'에 대한 책임이 없을까? 우리 손에 끼워져 있는 다이야몬드가 사람의 핏값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이야몬드를 사랑하는 당신에게는 책임이 없는가?

  유대인들은 약속을 중시여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빌헬름 9세의 돈을 지키기 위해서 4만 탈레르에 달하는 자신의 재산을 포기한다. 자신의 재산보다 빌헬름 9세의 신용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러한 유대인의 신용은 그들이 금융업계의 대부가 되는데 많은 기여를 한다. 그런데, 모든 유대인이 이러한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다. 유대인 록펠러 형제는 동료 정유업자들을 설득하거나 협박하여 신디케이트를 형성한다. '클리블랜드 대학살'로 알려진 기업 인수 작전을 저자 홍익희는 '합병전쟁'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말년의 록펠러는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 개같이 벌어들인 돈을 사회를 위해서 쓴다. 상도를 지키며 돈을 벌어 사회를 위해서 그 돈을 사용한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면, 그것은 나의 지나친 욕심일까? 약자에 대한 배려 없이 스쿠루지 영감처럼 돈을 모아, 크리스마스가 지나서야 새인간이 되어서 세상을 위해서 돈을 쓰는 록펠러를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IMF라는 단어를 들으면 당신은 누가 생각나는가? 고 김영삼 대통령? 고 김대중 대통령? 고통받는 서민들의 모습? ...... 나는 조지 소로스가 생각난다. 헤지펀드들이 아시아 국가를 사냥하고 다녔고, 그 마수에 대한민국도 걸려들었다. 국가 부도 직전까지 몰린 대한민국의 현실은 너무도 처참했다. 물론, 나는 군대에 있었기에 그 고통을 직접 체험할 수는 없었다. 헤지펀드를 이용해서 영란은행을 굴복시킨 조지 소로스를 피도 눈물도 없는 약탈자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31개국에 재단을 설립하고 다양한 프로젝트로로 자선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1979년에는 '열린사회 기금'을 설립해서 옛 소련 및 동유럽권의 순조로운 체제 전환을 위해서 매년 3억 달러를 지원하고 있다. 자신이 태어난 헝가리에는 중앙유럽대학을 설립해서 해마다 2천만 달러를 기부하고 있다. 조지 소로스는 천사인가? 악마인가?

  나는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라는 속담을 좋아하지 않는다. 상도를 지키며 돈을 벌어야하며, 정당한 돈을 선하게 사용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록펠러나 조지 소로스를 존경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이는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니가 돈을 못버는 거야!" 모두가 부동산 투기에 혈안이 되어, 집값 올리는데 뛰어든다. 이를 거부하며, 그들과 거리를 두려는 나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돈이 인생의 전부일수는 없다. 돈은 나의 하인일뿐이다. 하인의 수가 많을 필요는 없다.

 

2. 유대인 성공의 비밀은?

  유대인들이 수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세계 경제를 휘어잡은 비결은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 책의 곳곳에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지만, 이러한 위기를 기회로 삼아 경제적 부를 이룩한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시기에 폴 존슨은 주택시장의 거품이 꺼질 것을 미리알고 공매도를 하여 엄청난 돈을 거머쥐었다. 성공하는 자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지만, 실패하는 자는 위기에 두려워하며 무너진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를 만나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다. 경제 위기라는 호랑이를 만나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한다. 물론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혜안은 평소 갈고 닦은 능력 여하에 달려있다. 그렇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 위기에 닥쳤을 때, 발휘할 수 있는 지혜를 평소에 준비해 놓자.

  유대인들이 성공한 또다른 이유는 없을까? 휘저우 상인에거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화교가 진출하면 그 지역의 상권을 장악한다. 중국 상인들 중에서도 휘저우 상인은 특히 유명하다. 휘저우 상니들이 자본금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상인들이 공동 출자하고, 이익을 배분하여 자본을 키운다면, 유대인들은 "헤부르이 무이자 대부업체"를 통해서 자본금을 마련한다. 휘저우 상인들의 자제들이 관료가 되어 가문의 신용을 높이고, 고급 정보를 가문에 준다면, 유대인들은 권력의 길목을 지키며 권력의 주변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높인다. 휘저우 상인들이 동향인들기리 정보를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업을 계획한다면, 유대인들은 랍비를 중심으로한 유대인 공동체를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정보를 주고 받는다. 휘저우 상인과 유대인 모두 독과점을 형성하여 경쟁자를 도퇴시키고 시장을 장악한다.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휘저우 상인과 유대 상인들이 대결한다면 어느쪽이 승리할 것인가?거대 공룡 중국을 배경으로한 중국상인이 유리할까? 미국을 움직이는 유대인들이 유리할까? 유대 상인과 중국상인의 상술 중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었일까?

  유대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경제학자의 눈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시장을 해석하는 방법을 터특했다는 사실이다. 세계적인 투자자 조지 소로스는 기존 경제학을 비웃는다. "수요와 공급이 주어졌다는 가정은 현실과 동덜여진 것이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서만이 아니라 판맨자와 구매자의 기대에 따라 좌우된다."는 그의 소신은 그를 세계적인 투자자로 만들었다. 워런 버핏이 버크셔 헤셔웨이 주주 총회에서 MBA에서 배우는 것은 현실에서 전혀 쓸모 없는 것들이라는 내용의 말을 했다.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을 어렵게 표현하고, 99%밖에 들어 맞지 않는 경제학 이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워런 버핏은 나머지 1%에 투자하여 돈을 번다. 현실과 동떨어진 상아탑의 소리를 듣기 보다는 자신의 눈으로 경제를 분석하고 현장을 읽을 수 있는 눈을 갖아야 세계적 투자자로 성공할 수 있다.

  워런 버핏은 시장과 돈의 노예가 되지말고 시장과 돈의 주인이 되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지장과 경제 학자들을 하인으로 부릴 때만이 위대한 투자자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3. 경제를 지배한 그들! 세계 정치를 지배하다.

  세계 금융을 지배하는 것은 유대인이다. 금융을 지배한 그들은 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의 정치를 지배한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심장부를 이들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다. 홍익희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대인들은 권력자들이 지나는 길목을 지키다가, 정치인들과 인연을 맺는다. 럼스펠드 국방장관부터 시작하여, 존 볼톤, 키신져 등등... 수많은 유대인들이 미국정치의 중요참모로 활약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가 유대인 쿠시너이며, 쿠시너의 머릿속에서 트럼프의 정치 외교 전략이 나온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이 책을 통해서 알게된 놀라운 사실은 유대계 자본에 의해서 설립된 골드만 삭스가 지도자를 공급하는 사관학교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금융계는 물론이고, 미국 행정부와 의회에서도 골드만 삭스 출신이 진출해서 큰 활약을 하고 있다. 집단주의를 강조하는 골드만 삭스의 문화 때문에 이들은 골드만 삭스 사관학교 후배들을 잘 이끌어 준다. 대한민국에 학연, 지연, 혈연이 만연해있고, 이것의 폐해를 수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나 볼 수있는 모습들이 골드만 삭스를 중심으로한 미국사회에서 목격되고 있다. 골드만 삭스 출신들은 미국 내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중국 인민 은행 부행장도 골드만 삭스 출신이라는 사실은 골드만 삭스가 대단해 보이는 것을 넘어서서 드려움을 준다. 사실 이러한 사실은 애교에 불과하다. 부시행정부의 실세 볼튼은 1994년에서 1999년 골드만 삭스 유럽 법인 책임자였다. 유대인들에 의해서, 유대계 금벌세력에 의해서 세계가 움직이고 있었다. 버락 오바마가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한다면,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들의 영향력은 당연히 한반도에도 미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 세계를 움직이는 유대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많지는 안다. 저자 홍익희는 '맺는 말'에서 "소송을 무기로 유대인 연구를 감시하는 유대인 비방 대응기구(Anti Defamation League, ADL) 때문에 서구에서는 유대인에 관한 자료를 구하기 힘들었다."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반유대인 정서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저작들을 싹부터 자르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살아있는 권력 그 자체였다.

  세계를 움직이는 미국을 움직이는 유대인!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할까? 말과 경쟁하기 보다는 말에 올라타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유대인과 경쟁하기 보다는 유대인의 능력을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한다면, 남북관계를 유리한 쪽으로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자유로운 상상을 해본다.

 

 

  저자 홍익희의 '유대인 이야기'는쉬운 서술이 돋보이는 책이다. 유대교에 조로아시터교가 스며든 이유를 역사적으로 잘 서술하였고, 어려운 성경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했다. 유대인의 역사만 서술하지 않고 기술의 역사는 물론이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인들이 유대인을 박해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았던 역사도 서술하고 았다. 동아시아사 교과서에서 어렵게 서술되어 있는 은과 금의 유통도 쉬운 설명으로 이해가 쉽도록 했으며, 동양에서 회취법이 발견되기 전에 유럽에서는 '수은 아말감공법'으로 은을 추출했다는 사실도 이책을 통해서 알았다. 세계사에서 빠져 있었던 유대인의 역사와 교과서에서도 빠져있는 세게 경제사의 깨알 같은 지식을을 이 책은 쉽게 서술하고 있다. 더불어, 이 책을 읽고 세상을 보는 눈을 갖는다면, 월가를 점령하라는 시위가 왜? 벌어졌으며, 그 시위가 왜? 실패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오늘의 세계를 바라보는 혜안을 얻고자하는 사람들에게 이책을 권한다.

  ps. 이 책에 '옥의 티'가 있다. 이는 수정되었으면 좋겠다.

1. 250쪽 "프랑크 왕국의 재상인 칼 마르텔이 투르 근처에서 이들을 격퇴해 프랑크 왕국을 위기에서 구했다. 카롤루스 대제 때의 일이다." => 카롤루스 대제 이전의 일이다. 마르텔은 메로베우스 왕조, 카롤루스 대제는 카롤루스 왕조 시기의 인물이다.

2. 110쪽 "헬레네스'는 "제우스의 아내이자 누이인 헤라 여신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 헬렌의 자손이라는 듯이다. 그래서 EU 깃발에 헬렌이 제우스가 변한 황소를 타고 있는 것이다.

3. 520쪽 "1917년 4월 6일 미국은 특별한 사유도 없이 1차 3대전에 참전했다." =>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미국의 민간배가 침몰하자, 이를 이유로 미국이 참전했다. 아무 이유가 없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4. 48쪽 "요즘 관광객들이 보는 이집트 신전 대부분이 그때 유대인 건설 노예들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 피라미드와 신전을 짓는데, 이집트는 노예를 상용하지 않았다. 농한기에 농민들에게 급료를 주면서 일을 시켰다. 이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기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

5. 223~224쪽 성소피아 성당 캡션 오류 "콘스탄티 누스 황제가 세운 성소피아 성당" => 불타버린 성 소피아성당을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한 것은 유스티니아 누스 대제이다.

   "콘스탄티 누스 황제에 의한 성소피아 성당 건설" => 성소피아 성당은 '콘스탄티 누스 2세때 건립되었다가 소실되었다. 테오도 시우스 2세때 다시 재건 되었으나, 니카의 반란으로 소실되어 유스티니아 누스 1세때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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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gjsrll 2023-08-12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다른 유대인책 복붙한거네요 ㅋㅋ 제가 안읽어본줄 아십니까?

강나루 2023-08-13 20:12   좋아요 0 | URL
어떤책을 붙여 넣기했나요?
읽어 보셨다면 책이름과 저자를 알려줘요.
 
독살의 세계사
미즈호 레이코 지음, 장점숙 옮김 / 해나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독살의 세계사'라는 책을 처음 펼쳤을 때는 '독살'이라는 주제로 세계사를 정리하는 재미있는 책을 기대했다. 그러나, 나에게 밀려온 것은 단순한 독살 사례 모음집이라는 회의감이었다. 기대감이 높았기에 실망의 골도 깊었다.

 

1. 망치를 들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워런 버핏이 버크셔 헤셔웨이 주주 총회에서 즐겨쓰는 표현이 있다. '망치를 들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라는 말이다. 독살이라는 주제로 세계사를 살펴보니, 모든 사람들이 독살로 죽었다는 인상을 책에서 받았다. 특히 옥타비아누스가 독살을 당했다는 글귀를 보면서, 처음 들어본 주장이라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관련 내용이 없어 신빙성이 없어보였다. 빈센트 반 고흐 조차도 독살로 죽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들었다.

  이 책의 모든 글들을 비판적으로 의심하면서 읽었다. 저자의 강한 주장은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마치 이덕일이 '조선왕 독살사건'이라는 베스트 셀러를 내자, 조선사 전공 학자들이 강한 반발을 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덕일이 '조선왕 독살사건'에서 말한 것처럼 조선의 왕들이 수없이 독살되었다면, 조선은 독살 왕조였다. 미즈호 레이코의 주장처럼 독살이 이뤄졌다면, 세계사는 독살의 역사일 것이다.

 

2. 판타지 소설을 연상시키다.

  알렉산드로스가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는 주장과 독살되었다는 주장은 들어본적이 있었다. 그런데, 미즈호 레이코가 알렉산더가 아름다운 인도 아가씨를 자신의 침상으로 데리고 와서 입을 맞추는 순간 온몸에 독이 퍼져 마침내 죽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웃음이 나왔다. 어려서부터 이불 밑에 독초를 깔아 여자 아기를 독에 달련시키고, 온몸을 독덩어리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면역력이 약한 아기가 독을 가까이 하면 어려서 죽을 것이 자명한데 이러한 판타지 소설에서나 가능한 주장을 책에다 쓰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 책은 너무도 짧은 토막들이 대다수이다. 역사적 배경과 등장인물을 파악하기에는 책에서 제공하는 정보가 너무도 적었다. 단편적인 글들에게서 책을 읽는 맛을 느낄 수 없었으며, 독살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세계사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판타시 소설을 연상시키지만, 그 판타지 소설도 성의없는 판타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식힐겸, 얇고 재미있는 책을 골랐다. 그러나, 내가 내가 원하는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단지 수확이 있다면, '오리는 독을 먹어도 멀쩡히 살아 있다'라는 글귀이다. 독극물을 먹어도 오리는 죽지않는다는 주장은 '유황오리'를 알고 있었기에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았다. 독을 먹었을 때, 오리 피를 마신다던지, 동상에 오리피를 바른다는 주장을 현실에 실천할 수는 없지만, 오리고기가 '체내의 세포나 장기 속에 침착된 독도 해독시켜준다.'는 주장은 믿기로 했다. 왜냐고? 오리 먹을 때 맛있게 먹기 위해서이다. 플라시보 효과를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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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화와 천황제 이데올로기 - 신화와 역사 사이에서
김후련 지음 / 책세상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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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하면서, 근대 일본 만들기는 시작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은 사실 근대의 창작물인 경우가 많다. 일본을 대표하는 일본 신화와 천황제 이데올로기도 근대의 창작물이었다. 일본 고대와 중세의 작품을 가져다가 근대 민족국가 이데올로기에 알맞도록 다시 창작해낸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했다. 수 많은 일본인들과 동아시아의 수많은 젊은 영혼들이 죽음을 맞이해야하는 비극을 겪었다. '일본 신화와 천황제 이데올로기'라는 책은 일본의 신화가 어떻게 천황제 이데올로기로 새롭게 태어났는가를 깊이 있는 연구로 밝혀냈다. 저자 김후련의 안내를 받아 일본 천황제의 허상을 뜯어보자.

 

1. '무형의 형태', 신도

  일본의 토착 종교는 '신도'이다. 신의 길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 신도는 우리 나라의 무속신앙과는 달리 엄청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무속신앙은 외부에서 들어온 불교와 크리스트교, 유교에 짖눌려 종교이기 보다는 '미신'으로 취급받고 있다. 이에 반해서 '신도'는 아직까지 살아남아 일본인들의 삶에 깊숙히 뿌리 내리고 있다. 합격을 기원하며 신사로 향하기도 하며, 결혼식을 신사에서 하는 일본인도 많다. '살아서는 신도, 죽어서는 불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사의 생명력은 강하다. 그 생명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신유습합'과 '신불 습합'에 있었다. 불교이든 유교이든 신도는 이들 사상을 흡수하여 새롭게 태어났다. 불교가 탁월한 철학적 체계를 가지고 각지역의 토착신앙을 흡수하면서 발전했다면, 이러한 이론적 체계가 없었던 신도는 불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사'를 만들어냈으며, 외세가 침략할 때는 그들만의 '화이'사상을 만들어냈다. 이것을 '무형의 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형의 형'의 무서운 힘은 조선을 강제 병합하면서 다시 발휘된다. 조선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1942~1944)는 스사노오노 미코토가 신라에 강림했다는 고대 천황신화를 만든다.

 

  "여기 반도 2,500만의 원민족은 틀림없이 스사노오노미코토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렇다고 하면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후손인 내지(일본) 민족과 바로 뿌리가 같고 하나라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생각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오늘날 알 수 있는 역사상으로나 그 후로나 피의 혼합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 명치 43년(1910)의 성대에 아마테르사오미카미의 후손이신 메이지 천황에 의하여 스사노오의 후손인 조선이 병합된 것은 신대 말기의 신사가 더욱 철저히 완성적으로 다시 되풀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든다."-42쪽

 

  일본신화에 우리의 단군 신화를 흡수하려하는 조선 총독의 모습에서 그들의 집요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일본의 태양신인 아마테라스의 후손이 세운 일본에 의한 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이 세운 조선 병합을 합리화하려는 그들의 모습은, '무형의 형'으로 새로운 외부의 사상을 흡수하는 신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테라스는 신도의 가장 근본적인 신이다. 일본의 신도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적혀있는 일본 신화를 호출하여 일본의 조선 점령을 합리화하려했다. 신화는 신대의 필요에 따라서 다시 호출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힘을 오용한다면 그 폐해는 가공할만한 위력을 발휘한다. 오늘 필요에 따라서 과거를 호출하고, 새롭게 신화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신화를 믿으며 침략전쟁을 합리화한다.

  만약, 우리가 일본의 '신화 만들기'에 대항할 문화적 백신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 성공했다면 어떠했을까? '2009 로스트 메모리즈'라는 영화가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처단이 실패로 끝나서,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이 성공한 미래사회를 그린 영화이다. 그러나, 우리는 '2009 로스트 메모리즈'라는 가공의 영화를 호출할 필요가 없다. 민족 말살 정책이 성공한 실제 나라가 있으니까 말이다. 바로 '류큐'국이다. 일본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류큐'왕국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 복속된다. 황국신민화 정책이 조선 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하나의 현으로 일본 영토에 편입된 류큐는 '일본인'으로서 침략전쟁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차별이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류큐 민간인들은 군부에 의해서 '옥쇄'를 강요받았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천황을 위해서 옥쇄를 했지만, 류큐인이 지키려했던 쇼와 천황은 류큐를 미군기지로 사용하도록 미국에 넘긴다. 이때가 1947년이다. 일본으로부터 버림받은 류큐는 미군 기지로 인해서 발생하는 모순에 고통스러워하며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1972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일본사회에서 류큐는 '오키나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차별을 받는다. 단일민족이라는 허상을 믿으며, '오키나와인'과 '아이누인'을 차별하는 야마토인에게 류큐인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본으로부터 차별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일본에 귀속되려는 '류큐인'을 보면서, 일제의 황국 신민화 정책의 위력이 얼마나 큰가를 새삼스레 절감한다. 문화적 백신이 없는 '류큐'인들은 계모에게 학대받으면서도 계모를 친모로 믿고 사랑을 받으려는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나 뿐일까?

 

2. 일본의 신화 만들기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이길 수 있었던 여러 이유중에서,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믿는 능력을 꼽았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신과 신화를 만들어 내고, 이를 진실로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엄청난 수의 사피엔스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다.

  일본은 유발 하라리가 말한 '사피엔스'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민족이다. 일본의 신화 만들기는 고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니 말이다. '일본서기'에는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천손이 규슈의 휴가에 강림했는데, 천손이 강림한 구지후루타케는 가야국의 수로왕이 강림한 구지봉에 해당한다. 김후련을 비롯한 많은 신화학자들이 지적했듯이, '구지후루'는 '구지'의 발음과 유사하며, '다케'는 구지봉의 '봉'에 해당하기에 일본신화의 천손강림과 가야의 김수로왕 강림신화는 같은 계열의 신화라 할 수 있다. 한반도인이 일본에 건너가 국가를 세웠다는 주장을 할수도 있는 기록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 기록을 외면한다. 일본 신화학자는 그들의 입맞에 맞는 기록만을 선택해서 호출한다.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 이야기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들 천황가의 뿌리가 한반도 일 수도 있다는 기록은 애써 왜면한다.

  '일본서기'와 '고사기'가 저술되던 시기 그들의 일본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일본은 신화를 다시 정리한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동생인 스사노 미코토는 이즈모 전승에 따른다면, 일게 지방신이었다. 절대 황조신 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이 아니었다. 제우스가 바람둥이인 이유가 해당 지역의 토착신과 그 후손들이 제우스와 연결시키려다 보니, 제우스를 바람둥이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는 연구결과를 떠올린다면, 일본서기를 집필할 당시, 천황가의 일본지배를 합리화하려는 목적에서 신화가 다시 정리되었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더욱 재미 있는 것은 일본서기 편찬시기 천황가의 일본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정리된 일본 신화가 근대시기에 다시 재해석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외팔주 사관'이다.

 

  "국토 창조 신화가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면 일본은 세계를 축소해 놓은 것이라는 '외팔주사관'으로 재생산된다. (중략)외팔주사관은 기무라 다카타로가 주장한 것으로 (중략) 고대 세계사의 인명과 지명에 일본의 그것을 조합시켜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에 군림하는 거대 국가 일본을 창조해낸 것이다.기무라의 주장에 따르면 태고의 일본은 결코 극동의 작은 섬이 아니었으며, 현재의 일본은 옛날에 세계 전체에 걸쳐 있었던 일본의 지리를 세밀하게 축소해 일본 열도에 투영시킨 것이다."-33쪽

 

  군국주의 시대, 일본의 침략주의를 합리화하려는 목적에서 탄생한 주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본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신화를 다시 정리하고 새롭게 해석해오고 있다. 문제는 이를 진실로 믿는다는 것이다. 일본 천황가가 중요시 여기는 '삼종신기'라는 것이 있다. 천황가가 하늘의 후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옥과 청동검, 거울을 뜻한다. 그러나, 남북조시기 삼종신기 일부는 사라졌다. 엄밀히 말하면 삼종신기는 중세에 다시 말들어진 것이다. 더욱이 '삼종시기'라는 말은 에도시대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삼종신기'는 중세의 신국 사상과 근세의 국학과 미토학, 근대 천황제 국가의 이데올로기로서 끊임 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말이 있다. 전통은 필요에 의해서 근대에 만들어진 산물이다. 만들어진 전통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화에 의해서 인간이 노예가 되어 죽어가는 비극을 우리는 직시해야한다.

 

3. 만들어진 '신화'가 인간을 잡아 먹고...

  SF영화에는 인간이 만든 바이러스 혹은 생명체, AI가 인간을 지배하거나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설정이 흔히 있다. 인간이 만든 창조물이 도리어 인간을 해친다는 설정은 SF영화에서만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인간이 만든 '신화'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 일이 인류 역사에서는 실제로 발생했으니까 말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 군국주의 광기에 휩싸인 '카미카제 특공대'를 떠올리며,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이 대단하다고 감탄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카미카제 특공대'가 태어나기 위해서 일본은 중세 시기부터 준비를 했다. 하야시 라잔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타고나지도 않은 부귀와 수명을 바라는 것은 이에 어긋난다. .... 이루어지지도 않은 소원을 꾀하고 이루어지지 않은 희망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소행이다. 그런 자는 돼먹지 못한 일을 생각해내고 도리에 어긋난 일을 행하여 죄를 지음으로써 결국에는 몸을 망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라서는 안 될 도리가 되는 까닭이다."-(삼덕초)1643년 이후-하야시라잔

 

  '바라서는 안될 도리'라는 말은, 각자 자신의 신분에 맞게 행동해야한다는 것이다. 한번도 왕조교체가 일어나지 않은 나라 '일본'은 각자 자신의 신분에서,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려했다. 우리처럼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서 상승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만세일계'라는 신화는 일본의 안정성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정체된 사회 모습을 보여준다. 하야시 라잔이 말했듯이, 자신의 신분에 벗어나서 '바라서는 안될 도리'를 바라지 않았다.

  근대에는 니토베 이나조에 의해서 '일본의 영혼, 무사도'라는 책이 씌여진다. 서구인들에게 일본을 소개하기 위해서 영어로 씌여진 이 책을 통해서, 일본인들은 새로운 신화를 만든다. 주군의 명령에 목숨을 내놓는 사무라이의 모습을 '무사도'라 포장하고, 생명력이 가득한 '핀사쿠라'의 모습이 아닌, 천황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죽음으로 뛰어드는 '지는 사쿠라'로 행동하길 강요받는다. 그리고 수 많은 일본인들을 '지는 사쿠라'가 되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광기에 미토학의 국체론이 한몫한다. 후지타 도코(1806~1855)는 "세번 죽음을 각오하면 죽지 않는다."라고 시작하는 '회천시사'를 남긴다. 이 시는 막부말기 지사들이 즐겨 낭송했으며, 태평양 전쟁 시기 '회천(가이텐)'이라 불렸던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에게 전승된다.

  군국주의 광기는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았다. 군국주의 광기를 만들려는 자들에 의해서 과거의 불행한 유산들이 소환된다. 여기에 시류에 영합하며, 순응하는 일본의 국민성이 더해진다. 여기에 신공화후 신화와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신화가 다시 등장하여 침략전쟁에 힘을 불어 넣는다. 국가 통치권의 주체는 국가자체이고 천황은 국가의 최고기관으로서 통치권을 행사할 권능을 갖는 것에 불과하다는 미노베 다쓰기치의 천황기관설 마져도 불경죄로 여겨졌고, 급기야는 우익인사의 통탄을 맞기도 했다. 이것이 일본의 광기에 부레이크를 사라지게 했다. 단테의 '신국론'-지옥편에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기에 중립을 지킨 자들에게 예약되어 있다."  (The hottest places in hell are reserved for those who, in times of great moral crisis, maintain their neutrality).”라는 말을 우리는 되새겨야한다. 수많은 젊은이 들이 사람을 죽이기 위한 전쟁에 내몰렸다. 잘못된 방향으로 돌진하는 일제를 바로잡지 못한 댓가는 일본의 시민과 동아시아의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으로 막을 내렸다.

 

4. 광기를 죽이는 방법

  아베내각이 한국에 대한 경제적 침략에 날을 세우고 있다. 아베는 그의 외할아버지인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가 되고 싶은 지도 모른다. 일본의 광기를 죽이는 방법이 없을까?

  일본의 침략적 망언들을 들을 때 마다, 우리는 정부가 강하게 일본에 대응해주기를 바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을 때,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우리 땅 독도에 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 김후련은 이것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고 말한다. 왜? 일까? 이명박 전 대통령은 '천황이 한국에 오려면 과거사에 사죄하라'라는 내용의 말을 한적이 있다. 김후련의 지적에 따르면 이는 쇼와 천황과 헤이세이 천황을 구분하지 못하고, 일본의 극우들이 준동할 수 있는 빌미를 주었다고 한다. 즉, 헤이세이 천황은 '천황가의 혈통에 백제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어 한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고 밝힌 사람이다. 헤이세이 천황을 한국에 초대하고 그로 하여금 서대문 형무소에 참배하게 하는 노련한 외교력을 발휘했다면 한일관계는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우경화에 반대하는 그를 비난함으로써, 우리의 우군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을 적군으로 돌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일본인 모두를 적으로 삼지 않고, 일본의 양심있는 시민과 연대하여 일본사회의 광기를 누그러 뜨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셈이다.

 "NO Japan"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중에 하나는, 아베를 중심으로한 일본 극우파를 우리의 적으로 삼고, 일본 시민을 적으로 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일본인 모두를 적으로 만드는 과거의 행동방식으로는 일본의 광기를 없앨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성숙된 대처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김후련은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시기, 한국과 중국이 반발하자, 야스쿠니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던 일본인들이 야스쿠니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본의 망언과 망령된 행동에 우리가 과도하게 대응한다면 결과적으로 일본 극우세력에게 힘이 된다는 주장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극한 분노가 일본극우를 살찌운다는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한국의 언론은 외교의 장과 학문의 장에서 논리적이고 냉철하게 다룰수 있도록 비켜나 있어야 한다." - 51쪽

 

 일본 정치가들의 말령된 행동을 한국인들에게 알리는 것은 언론의 당연한 책무이다. 적절한 시기에 망언을 하고, 이를 통해서 주변국의 반반을 유도하여 일본내의 극우파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효과를 얻는 그들을 상대하려면 우리는 그들보다 더욱 성숙해야한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논리적이면서도 냉철하게 일본에 대응해야한다. 극도의 자제력이 필요한 장기전에 대비할 준비가 우리는 되어 있는가? 스스로 자문해 본다.

 

 

  헤이안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천황은 일본을 직접다스렸다. 그러나, 막부시대가 개막되면서 천황은 막부의 등살에 기를 펴지 못했다. 특히 에도 막부시기가 되면, 천황은 황궁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다이묘가 직접 천황을 만날 수 없었으며, 정치에는 일체 관여할 수 없었다. 천황의 세력은 날로 약화되어 즉위식 조차 제대로 치룰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마치 가정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이 아내의 친구를 비롯한 주변인과의 관계를 끊어 놓가 고립시키듯이, 막부의 쇼군은 천황을 세상과 단절시켜 놓았다.

  고립된 천황을 다시 세상밖으로 끌어낸 것이 사쓰마번과 죠슈번의 사무라이들이었다. 그들은 천황이라는 신화를 다시 소환하여 동아시아를 전쟁의 광기로 몰아 넣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갓다. 천황제를 지키기 위해서 오키나와에서는 옥같이 부서지라는 '옥쇄'작전이 전개되었다. 오키나와의 히메유리 위령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우리 본토 일본인이 오키나와에 가면 꼭 히메유리 탑을 찾아 머리를 조아리는 까닭은 오키나와가 본토를 위해 산화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 피해의 궁국적인 모습을 거기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중략) 전쟁을 겪은 세대에게 그것은 자신의 '무죄증명'이며 용서의 장소이고 감미롭고 감상적인 장소, 이제는 평화의 눈물을 흘리 수 있는 장소이다."-418쪽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다. 천황제의 광기 속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침략전쟁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피해자로 볼 뿐, 가해자로 직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김후련은 강연이 끝날 때마다.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일본은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진심으로 과거사를 직시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한국은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의연하게 과거사를 털어내고 한일의 미래를 향해 일보 앞으로 전진하기 바란다."-552쪽

 

 

 김후련의 말에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이다. 김후련의 말이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후련하게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해결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기에 우리는 그녀의 말에 귀기울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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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20-06-07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후련의 말을 다시 읽어봅니다. 아쉽게도 의연함과 냉정함을 요구하는 이들이 불매운동을 자제력 없는 감정 대응으로 치부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강나루 2020-06-07 17:45   좋아요 1 | URL
냉정과 열정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네요
암튼 노재펜은 냉정하고도 의연한 대처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