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 수업에 날개를 달아 줌 - 줌 기초부터 학생 중심 온라인 수업까지 - 온라인 수업 사례 90
김란 외 지음 / 테크빌교육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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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 연수도 받아보고, 관련 서적을 찾던 중 이책을 보았다. 초등학교 수준의 수업사례라 중고등학교 수업을 준비해야하는 나에게는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줌 수업을 이렇게 활용할 수 있구나! 하는 힌트를 얻은 것은 큰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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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충돌 - 세계질서 재편의 핵심 변수는 무엇인가
새뮤얼 헌팅턴 지음, 이희재 옮김 / 김영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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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붕괴했을 때,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소련은 왜? 붕괴하였는가?'라는 질문이 커다란 화두였다. 그리고, 그 시절에 공산주의가 붕괴된 이후의 세계 질서에 대한 다양한 서적들이 출간되었다. 그많은 서적 중에서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과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가장 대표적 서적이다.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책은 자본주의의 오만이 서려있는 책이라 읽을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즉,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책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싸움에서 자본주의의 승리를 만끽하기 위한 자위행위에 불과한 서적이다. 반면, 새뮤얼 헌팅텅의 '문명의 충돌'은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문명은 교류하는 것인가? 충돌하는 것인가?라는 화두를 나에게 던지며 나의 머릿속에서 '문명의 충돌'이라는 책은 자주 소환되었다.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언젠가는 '문명의 충돌'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문명의 충돌'을 한장 한장 읽어 내려갔다. 이미 고인이된 새뮤얼 헌팅턴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을 제공했을까?

 

1. 헌팅턴의 편협한 문명관

  새뮤얼 헌팅턴은 역사학자가 아니다. 당연히 문명사학자도 아니다. 그는 정치학자이다. 역사학자가 치밀한 사료 비판을 통해서 신중히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데 반해서, 정치학자인 새뮤얼 헌팅턴은 너무도 엉성한 자신의 도식으로 세계를 재단하고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 헌팅턴은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서 세계를 서구,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이슬람, 중화, 힌두, 정교, 불교, 일본 문명으로 나눈다. 이렇게 문명을 나누면서 문명을 나누는 기준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지극히 자의적으로 세계의 문명을 나누고 있다.

  그가 문명을 나누면서 기준을 제시하지 않다보니, 이해할 수 없는 문명들이 눈에 띈다. 그중에서 일본을 독자적인 문명으로 따로 떼어내어 구분한 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일본을 중화문명권에 넣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헌팅턴은 일본을 독자적인 하나의 문명으로 구분하고 있다. 물론 그 이유도 서술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배웠듯이, 당나라 시기, 한자, 유교, 불교, 율령이라는 공통의 문화 요소가 성립도었다. 이러한 공통요소들은 동아시아 사람들이 만나서 한자를 이용한 필담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긴밀이 서로 문화를 주고 받은 동아시아의 특징을 이해하지 않고, 일본을 독자적인 문명으로 독립시켜 서술한 헌팅턴의 시각에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새뮤얼 헌팅턴은 왜? 일본은 독자적인 문명으로 독립시켜 서술했을까? 후쿠자와 유키치는 '탈아입구'를 왜쳤다.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며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려 혈안이된 일본의 위정자들은 서구에 유학생을 파견하면서 부디 '백인 여성'과 결혼하여 귀국하라 당부했다. 백인과 혼혈을 통해서 일본인을 개량시키려는 일본인들의 노력은 청일전쟁을 통해서 아시아의 맹주가되고, 러일전쟁을 통해서 서구 제국주의 반열에 들어선다.

  일찍이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가 서구에 소개되면서 서구인들은 일본을 서구의 기사도를 갖춘 나라로 인식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도와 맥아더도 '무사도'를 읽고 일본에 대한 호감을 갖았다. 이러한 미국내의 친일적인 흐름들이 새뮤얼 헌팅턴에게 이어져 온 것이 아닐까?

  새뮤얼 헌팅턴의 일본에 대한 과대평가는 일본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를 예측하는 부분에도 나타나있다. 헌팅턴은 일본은 자주성을 추구하는 독자적인 문명으로 전제하였기에 떠오르는 중국과 저물어가는 서구사이에서 중국을 선택할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일본의 아베정권은 트럼프에게 뒤통수를 맞으면서도 친미적인 외교를 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우리는 흔하게 보아왔다. 일본은 독자적 외교를 하기 보다는 미국에 종속적인 외교를 하였다. 그런데도 일본이 미국을 떠나 중국을 선택한다는 시나리오를 헌틴턴이 상상했다는 것은 일본에 대한 그의 무지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을 이용할 것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 헌팅턴은 첫째, 일본의 재무장을 강화시키고, 둘째, 핵무기를 확보하고, 셋째, 아시아 국가의 지지를 둘러싸고 중국과 일본이 경합을 벌이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헌팅턴의 주장은 가능성은 낮지만, 오바마 행정부 시기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를 재편하고 일본 밑에 한국을 위치시키려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헌팅턴의 개인정 망상으로 그칠 정책이 아니란 점을 알 수 있다. 오바마 행정부를 계승한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일본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재편 정책이 재개될 가능성이 있음을 우리는 유념해야한다.

  새뮤얼 헌팅턴은 들로르의 말을 인용하여 '미래 갈등은 경제나 이념이 아니라 문화적 요인에 의해 촉발될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면서 헌팅턴은 무신론자가 증가하는 한편에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토착종교 혹은 새로운 종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젊은층은 현실을 살아가야한다. 그들에게 경제가 문화보다 영향력이 낮다고 볼 수 있을까? 경제적 요인이 문화적 요인과 결합하여 갈등을 촉발할 수 는 있으나, 문화적 요인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세상을 너무도 단순하게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젊은 층에서 무신론자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본다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경제적 요인이 아닐까?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서 갈등을 촉발 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문명'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것이 그의 주장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다. 


2.  '문명의 붕괴'가 쓰여진 이유

  편협한 문명관을 가진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의 붕괴'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이 나온 1990년대는 동구권이 몰락하고 소련이 해체되던 시기이다. 세계 초강대국으로 미국만이 남아 있던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에 새뮤얼 헌팅턴이 이 책을 쓴 목적을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물론 나의 개인적 분석이다.

  첫째, 미국이 절대 강자로 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적이 필요하다. 소련이라는 절대악이 사라진 상황에서 새로운 악인 필요해졌다. 특히 미국을 움직이는 군산세력에게는 새로운 적은 필수적이다. 헌팅턴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민족성을 재창조하려는 민족에게는 적수가 반드시 필요하며 잠재적으로 가장 위험한 적대감은 세계 주요 문명들 사이의 단층선에서 불거진다."라고 말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적들이 반드시 필요함을 헌팅턴 스스로 이 책에서 인정한 샘이다. 악마는 자신이 악마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새로운 악마를 만들어낸다. 군산세력은 자신의 악마성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악마를 찾아야한다. 새뮤얼 헌팅턴은 그 악마를 문명에서 찾았다. 

  둘째, 냉전이 붕괴되면서 서구의 쇠락과 중국과 이슬람을 비롯한 비서구세력의 부상에 백인 서구사회가 위기감을 갖는다. 산업혁명을 주도하며 앞선 과학기술로 동양을 지배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서구의 절대적 힘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제 동양이 각성하면서 서구를 무섭게 추격하고 있다. 이에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미국과 서구 세력의 결속을 희망하고 있다. 추락하는 백인 중심 문명이 계속되길 바라는 그의 얇팍한 바램이 이 책의 곳곳에서 묻어난다. 

  이러한 이유에서 쓰여진 '문명의 충돌'에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문명의 적이 설정되어 있다. 바로 중국과 이슬람 문명이다. 그중에서도 새뮤얼 헌팅턴은 이슬람 문명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적대감이 도를 지나칠 정도로 강하다. 


 "전투성 화합 불능성, 비이슬람 교도 집단과의 물리적 근접성은 이슬람의 지속적 특성이다. 그리고 이것들로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이슬람 교도의 분쟁 성향(만일 이런 것이 존재한다면)을 설명할 수 있다."-359쪽


  이슬람을 전투성과 화합 불가능성이라는 '지속적 특성'을 가진 문명으로 규정짓는 것 자체가 무척 충격적이다. 적어도 하버드 대학의 교수라면 특정 문화에 대한 편견을 가지면 안되며, 가졌다하더라도 이를 드러내놓고 글로 쓰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 아니다. 이슬람세력이 아라비아반도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까지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요인은 '관용'에 있었다. 지즈야라는 인두세를 낸다면 비이슬람 교도라 할지라도 자신의 종교를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오스만 제국 시기에는 밀레트제가 실시도어 유대교는 물론이고 크리스트교도들도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용정책이 오스만제국을 강성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이슬람을 폭력의 종교로 규정하는 새뮤얼 헌팅턴에게 무척 깊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이슬람교를 믿는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데 반해서 서구의 크리스트교 신자들의 증가는 이에 따라오지 못하는 현실에서 서구 백인들은 위기감을 갖는다. 그리고 서구 대 이슬람이라는 문명의 대결구도를 구상하게된다. 이 책은 세상을 바로 보는 패러다임을 제공하는 책이라기 보다는 편협한 서구인들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책이라할 수 있다. 

  이슬람에 대한 헌팅턴의 두려움과는 달리, 2020년대에는 중국이 무서울 정도로 부상하고 있다. 미중무역전쟁이 벌어질 정도로 중국의 부상은 무서운 속도로 이뤄지고 있다. 헌팅턴은 중국의 부상에 대해서 경계심을 이 책에 나타내고 있으나, 이슬람 세력만큼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책의 430쪽에는 중국과 미국이 문명전쟁을 벌이는 가상시나리오가 적혀있다. 3류 판타지 전쟁 소설이라고 표현하기 힘들정도로 천박한 헌팅턴의 상상에 실소가 나올 정도이다. 

  헌팅턴에게, 아니 미국과 서구의 백인들에게 이슬람과 중국의 부상이 그리도 두려움의 대상인지 몰랐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서구의 극우 백인 지식인들의 세계관을 알게 되었다. 9개의 문명으로 세계를 나누기 보다는 미국을 대표하는 서구 패권주의와 이에 도전하는 비서구세력(러시아와 중국, 이슬람), 그리고 다수의 방관자들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보다 솔직한 태도가 아닐까? 문명이라는 외피를 씌워 자신들의 패권을 지키기 위한 패러다임을 만들려는 헌팅턴의 노력이 매우 가소롭다. 


3. 문명의 소통과 화해는 불가능 한가?

  새뮤얼 헌팅턴은 미국의 다문화주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의 책에 한부분을 살펴보자. 


  "(문화적 중추도 없는) 그렇게 이루어진 나라는 응집력 있는 사회로 오래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 준다. 다원 문화주의의 미국은 통일된 국가라기 보다는 민족들의 각축장이 될 것이다."-420쪽


  헌팅턴은 미국의 다문화주의를 비판한다. 아시아계와 이슬람 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가 미국에 흘러들어 만발하기를 바라기 보다는 미국이 서구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헌팅턴의 얇팍한 문화관은 하버드 대학의 교수라는 직함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한심한 수준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초강대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여러가지 이유중에 하나는 문화적 다양성이다. 에이미 추아가 쓴 '제국의 미래'에서도 소개되어 있듯이, 강대국으로 지속한 제국의 공통점은 개방성에 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일개 정치학자가 미국이 강대국으로 존속할 수 있는 힘을 무시하고 있다. 

  다원 문화주의에 부정적인 새뮤얼 헌팅턴은 한 나라의 문화 정체성을 고치는 것에도 매우 부정적이다. 


  "자기 나라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에 젖어 있는 정치 지도자는 반드시 실패한다. (중략) 정치 지도자들은 역사를 만들 수 있지만 역사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그들은 분열국을 만들 수는 있어도 서구 사회를 만들지는 못한다. 그들은 자기 나라를 문화적 정신 분열증에 감염시켜 그 수렁에서 좀처럼 빠져 나오지 못하게 만들 뿐이다."-206쪽


  새뮤얼 헌팅턴은 보편문화를 부정한다. 세계 정치는 근대화의 자극을 받으면서 문화의 경계선을 따라 재편되고, 비슷한 문화를 가진 민족과 국가끼리 뭉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기 나라의 문화를 서구식으로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새뮤얼 헌팅턴이 그토록 좋아하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급속히 서구화하였고 그결과 근대화에 성공한 사실을 헌팅턴은 무시하고 있다. 자가당착적인 편협한 문명관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같은 문화권에 있어도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헌팅턴은 보지 못하고 있다. 베트남과 중국이 같은 '중화문명권'이지만 사이가 좋지 않으며, 역사적으로 수많은 전쟁을 하였다. 같은 이슬람 문명권이지만, 이집트가 이슬람의 적인 이스라엘과 관계를 개선하는 현실을 그는 보지 못하고 있다.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고, 개 눈에는 똥만보이나 보다. 

  


  헌팅턴은 이 책에서 자신의 견해가 패러다임으로 받아주길 기대하고 있다. '문명의 충돌"을 페러다임으로 보길 바라는 헌팅턴의 주장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다면 어떤일이 펼쳐질까? 서구 백인중심의 문명이 계속되길 바라는 새뮤얼 헌팅턴의 세계관이 전세계를 뒤덮는다면 전세계는 분쟁과 대립으로 뒤덮일 것이다. 문명간의 대립과 오해는 더욱 심해져서 폭력이 폭력을 낳고, 보복이 보복을 부르는 아마게돈이 펼쳐질 질것이다. 그의 위험한 세계관이 우리의 두뇌를 점령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우리가 어떠한 세상을 만드는가와 긴밀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평화롭고 소통하는 문명세계를 만들길 바란다면, 문명을 대립과 충돌의 관계로 바라보기 보다는 교류와 소통의 관계로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아니, 문명은 교류하기도하고 때로는 충돌하기도 했다. 만약 문명이 충돌한다면, 문명의 충돌을 막기 위한 교류와 화해의 방법을 찾는 것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제 서구 백인의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서, 화해와 공존, 번영을 바라는 우리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PS. 헌팅턴의 관점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의 글중에 일부는 마음에 들어 적어둔다. 


강력한 사회는 보편화하며 허약한 사회는 특수화 한다. 

물질적 성공은 문화적 자기 주장을 낳고, 단단한 힘은 부드러운 힘을 낳는다. - 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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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라면 정조처럼 - 정조대왕의 숨겨진 리더십 코드 5049
김준혁 지음 / 더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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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독살되었는가? 이 질문에 독살 되었다고 말하면 주류의 역사학자들에게 뭇매를 맞게 된다. 이덕일이 책을 많이 팔아 먹기위해서 주장한 것을 무비판적으로 믿는다는 비난을 받기에 딱좋다. 이덕일의 책을 많이 읽은 나로서는 이덕일을 변호하면서도 굳이 정조 독살설을 비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던 차에 문재인 대통령이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에 '리더라면 정조처럼'이라는 책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칭 정조변호라라고 말하는 김준혁 교수의 책이기에 그를 통해서 정조를 새롭게 만나고 싶었다. 시중의 자기 개발서의 냄새를 풍기는 책제목을 보며, 과연 인간 정조의 모습을 얼마나 새롭게 발견할지 궁금하다.

 

1. 정조의 개혁과 문재인의 개혁

"문재인 보유국"이라는 말이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코로나 19 펜데믹 상황에서 초강대국 미국을 비롯한 소위 '선진국'들이 너무도 처참한 사태를 맞이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문재인 보유국"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박근혜 정권 시기 메르스 사태와 같은 대처를 코로나 19 펜데믹 상황에서 했다면 너무도 비참한 일들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인상 깊게 본 정조의 리더십은 무엇이었을까? 문재인 대통령은 정조가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경제개혁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고 한다.

  신혜통공을 실시하여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자유로운 상업발달을 도모하는 경제 개혁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용한다는 전교를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의 승지가 국왕의 전교를 대돌리며 반대했다. 마치, 조국을 비롯한 추미애, 박범계 법무장관을 임명하려하자, 야당이 무척이나 반대한 것과 유사하다. 특히, 조국 전 법무장관의 경우에는 검찰청이 상상을 초월한 고강도 압수수색을 했다. 검찰이 가지고 있었던 특권을 내려 놓는다는 것이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정조가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하는 것을 관철했듯이, 조국을 법무장관에 앉혔으며, 추다르크라 불리는 추미애와 판사출신의 박범계를 법무부 장관에 앉히며 개혁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마치 한화의 김인식 감독이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강팀들을 상대할 때, 계투 작전을 방불케하는 용인술이다. 조국과 마찬가지로 추미애와 박범계도 사소한 일들을 침소봉대하여 엄청난 부정부패를 저지른 추악한 사람으로 몰아붙인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들이 받은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신혜통공을 추진했던 채제공도 마찬가지이다. 시정잡배들이 채제공의 집에 와서 야유를 하는 무례한 짖들을 서슴치 않았다. 이러한 모든 고난을 극복해야만 개혁은 완성된다. 문재인 정권도 정조가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혜통공을 반포하여 조선의 상업을 발전시켰듯이, 검찰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우리의 검탈이 국민의 검찰로 다시 태어나길 기대한다.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을 하는데, 기자라는자들이 대통령에게 소통이 부족하다고 하자, 대통령은 "저는 반드시 기자회견만이 국민들과의 소통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통의 한 방법이죠."라고 일갈한다. 기자들의 얕은 생각으로는 자신들과의 소통이 국민들과의 소통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기자들에 대한 신뢰도가 많이 낮아졌다. 박근혜에게 질문한번 제대로 못하고,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기자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자들은 질문한번 제대로 못했다. 그러면서 기레기라는 말들이 시민들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 정권에서 질문도 제대로 못하는 기자들이 대통령에게 소통을 못한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그런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그럼, 대통령은 국민과 소통하고 있는가?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소통의 방법이 '국민청원'이다. 과거 정권에서는 상상도 못한 일들이 문재인 정권에서 벌어지고 있다. 국민이 자신의 목소리를 '국민청원'에 올리면 20만의 시민이 동의하면 청와대가 답변한다. 청와대가 해결할 수 없는 요청도 올라온다. 억울한 시민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청와대가 해결은 못해도 들어주기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정조가 화성행차를 하면서 수많은 격쟁을 받았던 사실을 떠올린다면 문재인 정권의 국민청원은 현대판 경쟁이요. 상언이다. 일본의 경우, 격쟁을 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한다. 다이묘에게 격쟁을 하면 다이묘는 농민의 억울함을 듣고서 그 농민을 죽여버렸다. 말그대로 목숨을 내놓아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정조대왕은 수많은 격쟁을 받아들이고, 백성의 고통을 해결하려했다. 왕의 행차를 징이나 꽹과리를 치면서 가로막고는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행위는 관점에 따라서는 무례한 일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소통의 한방법으로 정조는 활용한 것이다. 정조의 이런 소통의 방식은 맥이 끈기지 않았다. 정조의 '격쟁'은 문재인 정권에서 '국민청원'으로 부활하여 국민과 소통하고 있다. 이를 기레기들만 모르고 있다.

  김준혁 교수가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최고의 보물은 무엇일까? 김준혁 교수는 '하마석'이라 말한다. 양반이 말을 탈때, 양반은 노비를 밟고 말을 탄다. 인간이 인간을 밟는다는 것은 참으로 치욕스러운 일이다. 정조는 하마석을 설치하여 양반이 노비를 밟고 말을 타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없애려했다. 만백성을 아끼는 애민군주 정조의 모습이 빛나는 부분이다.

  오늘날의 애민정치는 어디에서 부터 시작해야할까? 코로나 19 펜데믹을 극복하고 있는 오늘을 생각해보자. 코로나 19 펜데믹 상황을 극복하는데 많은 의료인력들의 노고가 가장 크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료인력의 노고만으로는 지금의 K-방역이 성공할 수 없었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비대면 사회에서 택배 노동자의 활약이 없었다면 K-방역은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택배 노동자의 과로사 소식이 연이어 뉴스를 장식하고 있는 요즘, 택배 노동자에 대한 노동 상황을 개선하는데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아울러, 코로나 19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대한민국의 그늘진 노동현장을 들여다보고 개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애민군주 정조의 리더십을 보면서 문재인 정부가 배워야할 가장 큰 덕목이지 않을까?

 

2. 정조는 독살되었을까? 

정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정조는 왜? 죽었는가?"이다. 역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정조 독살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정조 독살설을 대중에게 퍼뜨리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바로 '이덕일'이다. 역사관련 서적 분야에서 이덕일은 엄청난 베스트 셀러를 연이어서 내놓고 있다. 억울하고 원통해하는 패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이덕일의 역사관은 한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강한 흡입력을 불러 일으킨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정조가 왕이되어 개혁정치를 추진하지만, 정순왕후로 대표되는 노론세력의 반발로 독살 되었다는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이다.

  이덕일의 "조선왕 독살사건"의 공전의 히트는 많은 강단 사학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특히 노론 중심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조선시대 전공자들은 이덕일을 열심히 비판했다. TV에 자주나오는 신00 교수는 독살설에 대해서 '조선이 그정도로 허술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역사관련 연수를 갔을 때, 충남대학교 모교수는 '어느 작가는 조선의 모든 왕들이 독살되었다는 듯이 서술한 사람도 있다.'라며 비꼬기도 했다. 정조 독살설은 이덕일을 비판하는데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이다. 삼인성호라는 말이 있다. 한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하면 믿지 않지만, 세사람이 말하면 호랑이가 시장에 나타났다는 말을 믿는다. 나도 정조 독살설을 믿지 않았다. 정조는 화병과 과로가 겹쳐서 죽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리더라면 정조처럼"을 읽으며 생각이 달라졌다.

  "정조는 독살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정조는 화병과 과로사 겹쳐 죽었다는 기존입장이 왜? 정조는 독살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바뀌었을까? 정조를 둘러싼 주변 상황이 정조 독살을 의심하기 충분했다. 정조의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영조는 정조를 효장세자에게 입적시킨다. 그런데, 효장세자가 죽은 이유를 아는가?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효장세자는 '화흉(和兇)'으로 죽었다. 무신난 이후, 소론과 남인이 영조의 대를 끊어 놓기 위해서 죽은 사람의 뼈를 가루내어 효장세자의 밥에 넣고 궁궐주변에 묻어두었다. 이러한 죽음은 효장세자로 끝나지 않았다.

  정조가 3번이나 청혼한 끝에 결혼한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의 죽음에도 석연치 않았다. 문효세자의 죽음은 홍역 때문인 것으로 추측하였으나, 문효세자가 죽은 후 2년 뒤 밝혀진 사실은 구선복에 의한 독살이었다. 문효세자의 어머니이 의빈  성씨도 구선복에 의한 독살이었다. 구선복은 누구인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죽을 때, 사도세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던 자이다. 이를 12살의 정조는 똑똑히 보았다. 그럼에도 왕이 되어 구선복을 죽이지 않았건만, 구선복은 정조가 사랑하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를 독살했다. 정조 주변에는 노론세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조를 노리고 있었다. '명의록'에는 정조가 왕세손 시절에 갑옷을 입고 잠을 잤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한나라의 왕세손이 자객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갑옷을 입고 잠을 잤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정조가 즉위하고 나서 사흘만에 자객이 궁궐에 난입한 사실만 보더라도 정조 주변에는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많았고, 정조 주변의 소중한 인물들이 독살되었다.

  정조의 죽음에도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약을 잘못 사용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나는 여기에 주목하지 않는다. 정순왕후가 기력이 좋아지고 있는 정조의 방에 들어와서 신하들로하여금 무러나게한다. 얼마후 곡소리가 난다. 정조는 "수정전"을 외쳤다. 수정전은 정순왕후를 뜻한다. 기력이 회복되고 있는 정조를 여성이 독대한다는 것은 조선시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조사후, 권력을 잡은 것은 정순왕후이다. 정조의 죽음을 통해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정순왕후이다. 그렇다면 정순왕후를 의심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가?

  결정적 증거가 없기에 노론 세력에 의해서 정조가 독살 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조와 정조를 둘러싼 사람들의 죽음은 '정조 독살설'을 허무 맹랑한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도록 만든다.

 

 

  정조는 무명옷만 입었으며, 옷이 해지거나 버선이 구멍나면 이를 버리지 않고 꿰매 입었다. 침전 영춘전이 하도 낡아 비가 오면 빗물이 스며들어 곰팡이가 피기도 했다. 조선의 모든 것이 그의 것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모두 누리려하지 않았다. 자신이 누리면 백성의 삶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너무도 검소해서 방안에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다면 자신의 건강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도 알았을텐데 말이다.

  지존의 자리에 있지만 자신을 낮추며 몸으로 낮은 곳에 임하는 삶을 살았던 정조 대왕! 그의 삶을 통해서 나도 한가지를 배웠다.

 

  "일은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말고, 말은 다하려고 하지 말라!"

 

  탁월한 리더일 수록 아랫사람의 일처리가 미숙해보인다. 내가 리더에 있을지라도 절대 완벽을 요구하지 말자. 부족한 점이 있으면 리더인 내가 채워주자! 리더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면 아랫사람은 입을 다문다. 아랫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도록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말자. 이것이 '리더라면 정조처럼'을 통해서 배운 정조의 리더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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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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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연기'라는 말이 있다. 이말을 쉬운말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인연이라는 그물로 연결되었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 박태균 교수의 '베트남 전쟁'이라는 책을 읽기 시작한 것도 역사라는 그물에 베트남 전쟁은 어떻게 포획되었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나간 전쟁, 잊혀진 전쟁으로 기억하기에는 베트남 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역사는 기록하는 민족의 것이며,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다 . 베트남 전쟁은 우리에게, 동아시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1.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

 나비의 날개짓이 지구 반대편에 가서는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사실들이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실을 종종 발견한다. 우리의 비극인 6.25전쟁의 날개짓은 바다건너 베트남에 커다란 폭풍을 일으켰다. 

  6.25전쟁의 전쟁 전개 양상은 베트남 전쟁의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흔히, 베트남 전쟁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전선을 형성하여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을 것으로 상상한다. 6.25전쟁에 대한 교육을 받은 우리로서는 '전쟁'이란 당연히 전선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는 전선이 없다. 보이지 않는 적과 전쟁을 치뤄야하는 기이한 전쟁이 베트남 전쟁이다. 베트남 전쟁이 전선이 없는 기이한 양상을 띄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6.25전쟁의 날개짓 때문이었다. 미군이 38선을 돌파해 북진하자, 중국군이 참전하여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후 전개되는 지루한 공방전의 아픈 기억을 미군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중국군도 가지고 있는 기억이었다. 북위 17도선을 돌파하면 중국군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할 것을 미국은 두려워했다. 중국도 미군이 북위 17도선을 돌파하지 않기를 바랫을 것이다. 결국, 북위 17도선을 유지한채, 남베트남의 베트콩과 전투개 전개되었다. 밀림 속에서, 구찌터널에서 출몰하는 베트공은 미군을 괴롭혔다. 

  뗏대공세와 펜타곤 페이퍼가 공개되면서 베트남 전쟁의 추악한 민낯이 보여지자, 반전운동이 들불처럼 일이났다.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전쟁비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미국의 곳간은 비어있었다. 결국 닉슨은 북베트남에 평화협상을 제안한다. 이는 6.25전쟁에서도 보았던 모습이다. 남북의 전쟁에 중국군과 소련군, 미군을 비롯한 UN군이 개입하면서 6.25는 국제전쟁화하였다. 휴전협상에 남북한이 마주앉지 않고, 북한군과 중국군 VS 미군이 마주앉았다. 강대국들의 휴전협상이 이뤄지면서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무수한 소모전 속에서 알토랑 같은 젊은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무수한 화력을 쏟아부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얇팍한 생각은 베트남 전쟁에서도 계속되었다. 6.25전쟁의 휴전협상 시기에 쏟아진 화력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었다고 판단한 미국이 선택한 협상전략이었다. 이시기 우리의 한국군의 젊은이들도 많이 생명을 잃었다. 

  이렇듯, 6.25 전쟁은 베트남 전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평화'라는 6.25전쟁의 교훈을 배우기 보다는, 전쟁을 이길 수 있는 얕은 방법만을 그들은 배우려했다. 진정한 교훈을 역사를 통해서 배우지 못한 댓가는 이길 수없는 전쟁에 수많은 젊은이들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들이 귀국했을 때, 특히 미국에서는 전쟁범죄자 취급을 받도록했다. 전쟁에서 배울 수 있는 최고의 교훈은 '평화'라는 가치란 사실을 깨달아야할 것이다. 


2. 전쟁에서 배워야할 것.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에 어느 여군의 회고담이 있다. 끔찍한 전쟁이 끝나자, 그 여군은 이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서로를 아끼며 살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녀에게 장난감 무기를 안겨주었고, 사람들은 다시 서로를 미워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에 나오는 소련 여군의 느꼈던 아이러니를 역사에서 흔하게 목격한다. 끔찍한 전쟁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교훈을 얻지 못했다. 과연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교훈을 얻어야할까? 

  6.25 전쟁에서 무수한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듯이, 베트남에서도 미군과 한국군에 의해서 민간인 학생이 이뤄졌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정권의 대통령이 베트남에 사과를 했다. 그러나, 미국을 상대로 승리한 베트남 정부는 한국의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다. 베트남 정부의 입장은 미국의 용병으로 온 너희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는 이야기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의 피해자들은 우리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저자 박태균이 지적했듯이, 우리가 일본에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면, 미군에 노근리 학살의 사과를 요구하면, 그들은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과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다며 반박한다. 한국도 그러한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니, 우리에게 반성을 요구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나의 눈에 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탓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일본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듯이, 미국에 '노근리 학살' 사건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듯이, 베트남전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용기있게 사과해야할 것이다. 잘못이 있다면 이를 인정하고 사과해야 우리는 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고통과 직면해야만 우리는 과거의 고통에서 치유될 수 있다. 

  저자 박태균이 생각하는 베트남 전쟁의 교훈은 무엇일까? 박태균은 "국민이 지키고 싶은 정부가 되어야한다. 그것이 곧 암보다."라고 규정한다. 그렇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 지지한 정권이 허무하게 무너진 역사를 우리는 무수히도 보았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미국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앞도적인 화력의 우위속에서도 마오쩌둥의 공산당에게 쫓겨 났다. 한국과 태국, 필리핀까지 끌어들이면서 천문학적 전쟁비용을 쏟아부어서 남베트남정부를 지원했지만,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했다. 미군없는 남베트남정부는 너무도 허무하게 북베트남에 무너졌다. 국민이 지키고 싶지 않은 정부는 아무리 강한 세력이 유지시키고 싶더라도 유지될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는 깨달아야한다. 저자 박태균은 여기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간다. 베트남 전쟁에 알토랑같은 젊은이들을 밀어 넣은 박정희 정권도 결국 남베트남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몇년후에 붕괴된다. "대통령인 내가 발포명령하는데 누가 날 죽이겠나!"라던 그도 김재규의 총탄에 허무하게 저세상으로 갔다. 어리석은자들은 역사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배운다. 진정으로 현명한 자라면 역사에서 참된 교훈을 얻어야한다. 위정자들은 "국민이 지키고 싶은 정부"를 만들어야한다. 이것이 베트남 전쟁의 참된 교훈이다. 

  베트남 전쟁은 우리에게 반성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에게도 반성과 사과를 요구할 수 없다. 그러한 용기가 모여 이 사회를 움직인다면, "국민이 지키고 싶은 정부"를 만드는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 



 한신대학교에서 1급 정교사 연수를 받을 때, 박태균 교수를 처음 만났다. 젊고 실력있는 교수라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다. 역시나, 그의 책 '베트남 전쟁'은 쉬우면서도 수많은 생각할 꺼리를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하수는 쉬운말을 어렵게 설명하고, 고수는 어려운말을 쉽게 표현한다는 말이있다. 학문적 내공이 상당한 박태균 교수는 어렵고 복잡한 베트남 전쟁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베트남과 어떠한 관계를 모색해야할지를 고민하려면 먼저 이 책을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ps. 한홍구 교수의 책 '유신'에는 박정희 정권이 베트남 전쟁에 위안부를 보내려했으나, 다행히도 보내지 않았다고 씌여있다. 과연 베트남에 한국군이 관리하는 위안소가 있었는지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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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삶을 만나다
강신주 지음 / 이학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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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벙커1'을 통해서 강신주를 처음 만났다. 그가하는 상담을 들으며 강신주라는 철학자의 내공이 상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생을 많아 살아본 할아버지도 아닌데, 상담 심리학을 정공한 사람도 아닌데, 일개 철학자가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꿰둟어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그후, 강신주의 동영상 강의와 서적들을 살펴보며 그가 말하는 논리의 핵심이 무엇인지 긍금했다. 지난번 강신주의 정신적 아버지 김수영을 위해서 쓴,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책에 이어서 '철학 삶을 만나다.'를 펼쳐들었다. 강신주식 철학의 비밀을 이 책을 통해서 파헤치고 싶다. 


1. 강신주식 철학적 사고의 매력

  강신주가 쓴 철학책들은 쉽다. 대학에서 '철학 개론'을 들으며 무슨 내용인지 이해되지도 않는데 시험을 보기 위해서 철학 용어와 철학자들이 한 말들을 무조건 암기했던 기억이 남는다. 대학에서 배운 철학은 이해되지 않는 말들을 무조건 암기하는 탁월한 암기과목이었다. 이에 반해서 강신주가 말하는 철학은 우리 삶을 철학하게한다. 철학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특히,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에서는 일상적인 우리 삶에서 어떻게 철학적 사유가 일어나는가를 풍부한 사례와 친절한 설명으로 풀어낸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왜? 이러한 철학 수업을 하지 않고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만 쏟아냈는가?, 교수가 학생과 대화하기는 커녕, 교수 혼자 독백을 했가? 라는 질문이 연속으로 쏟아졌다. 

  강신주가 소개한 철학적 사유의 비밀들은 철학적 사유가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낯설게 볼 때 철학적 사유는 시작된다. 3단 논법대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3단 논법의 역순으로 우리의 사유는 일어난다. 어찌보면 평범하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한 우리의 사유에 강신주는 도끼를 휘두른다. "당연하다."라는 생각의 위험성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옆에 있어주는 것이 당연하기에 우리는 부모에게도, 아내에게도, 우리 딸들에게도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나의 몸과 마음에게도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존재가 내 옆을 떠나거나, 사랑하는 존재가 아플때에야 비로소 그들을 낯설게 보면서 소중함을 안다. 강신주가 다상담에서 "'내옆의 아내와 언제던지 헤어질 수 있다.'라고 생각해야 아내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던 이유를 지금에서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3단 논법대로 사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3단 논법의 역순으로 사유한다. 나의 행동과 결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3단 논법을 끌어들여합리화한다. 강신주의 날카로운 지적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까지도 인간은 3단 논법으로 사유한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뇌 과학적으로 살펴보아도,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유발 하라리가 지적했듯이, 인간이 역사적 사례를 소환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당연한 사실들을 철학적 사유를 하지 않았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철학적 사유의 위대함은 '우연성의 철학'과 '필연성의 철학'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의 모든 일들이 유연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사유와 신과같은 존재의 계획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유의 대립이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역사를 발전론적으로 보고, 역사의 필연성을 밝혀내는 것을 역사학에서는 무척 중요시한다. 그리고 그러한 논문들을 우수한 논문으로 대우한다. 반면 우연에의해서 발생한 사건들의 나열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역사적 사유를 하지 않는 존재로 취급당한다. 역사는 과거 사실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다. 라고 교육받았던 나로서는 세상은 필연적이기 보다는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이라는 주장이 낯설기는하다. 

  강신주가 소개한 철학적 사유의 비밀들은 단순히 철학이라는 학문의 고담준론에 갖힌 사유가 아니었다. 우리 삶을 철학하게하는 소중한 지혜였다. 


2. 강신주의 철학을 넘어서.

  강신주는 '사랑과 가족', '국가' 그리고 '자본주의'를 낯설게 만든다. 강신주의 철학적 사유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지며 철학적 사유를 유발시킨다. 

  우리의 사랑은 남녀가 사랑한다면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야 완성된다는 헤겔식 철학의 고정관념에 가깝다. 반면, 강신주는 바디우의 철학을 끌어들여 '둘'의 사랑을 '둘'로 정의 내린다. 둘이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인 '눈부처'를 보면서 서로를 독립된 개체로 볼 것을 제안한다. 그렇다. 우리는 '둘이 하나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신화에 갖혀 우리를 옥죄고 있었다. 

  이러한 강신주의 철학적 사유에 항상 맞짱구만 칠수는 없다. 나의 전공이 역사이다보니, 강신주가 근거로 제시하는 역사적 사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강신주는 '국가'도 낯설게 본다. 인디언 사회를 문명화된 사회로 묘사하며 국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국가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디언 들에게 서구 문명의 총아인 '총'을 주었다면 그들은 그러한 평화를 누릴 수 있었을까? 재레드 다이야몬든 교수가 말했듯이, 태평양의 부족들에게 총기를 주자 그들은 잔인한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대표적인 왕국이 하와이 왕국이다. 물질적 토대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의 모습을 문명화로보는 것도 문제이지 않을까? 그들의 물적 토대가 강력한 집권자가 나오기에는 너무 허약했기 때문에 원시공산사회가 유지되었던 것은 아닐까?

  강신주는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개념을 국가에 확장시켜 인질=국민, 국가=인질범이라는 도식으로 국가를 낯설게 본다. 강신주식 사고가 무척 신선해보인다. 그러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에서 개인의 생존은 위태롭다. 시리아 내전을 본다면 국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곳의 주민들은 생존 자체에 커다란 위협을 느끼고 목숨을 걸고 시리아를 탈출해서 유럽으로 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독재자가 주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유도, 생명을 위협받는 무질서보다는 안정된 독재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강신주는 한발자국 더 나아가 국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국가는 수탈과 자본에 따른 역동적 교환관계로 유지되는 기구"라고 규정하고 '국가'의 민낯을 보여준다. 강신주의 글이 이해가 가면서도 불현듯 반론을 제기해본다. 국가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 국가는 개인을 일방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복지를 제공할까? 북유럽의 복지국가를 보라! 국가라는 시스템이 있기에 개인은 무정부상태에서 벗어나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않는가? 강신주의 지적대로 국가가 개인을 수탈하기 위해서 복지를 제공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역으로 그러한 국가의 속성을 개인이 이용해서 복지의 혜택을 누리며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있지 않은가! 공기의 매서운 저항을 이용해서 우리가 행글라이드를 보다 재미있게 탈 수 있듯이, 국가의 속성을 꿰뚫어보고 국가를 이용해서 우리 삶을 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특정 지배층이 국가를 이끌어가던 시대라면 강신주의 주장은 정확히 들어맞는 지적이다. 그러나, 민주화된 사회에서 깨어있는 시민들이 권력을 감시하며 국가를 제대로 움직인다면 국가라는 '리바이어던'은 시민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기능하지 않을까?



  '대학에서 철학과가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느 철학자가 '철학과가 없어지는 것은 괜찮지만, 철학적 사유가 없어지는 것은 걱정이 됩니다.'라는 대답이 기억난다. 그때는 '철학적 사유'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철학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철학자들의 말들을 외우는 학문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철학적 사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강신주의 '철학 삶을 만난다.'라는 책을 읽으며 '철학적 사유'가 무엇인지 감을 잡았다. 철학이 우리 삶과 전혀 관계 없는 학문이기 보다는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소중한 학문임을 강신주의 책 '철학 삶을 만난다.'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철학을 공부하려고 생각하는 학생과 일반인들이 입문서로 읽는다면 삶이 풍성해지리라는 믿음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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