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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충돌 - 세계질서 재편의 핵심 변수는 무엇인가
새뮤얼 헌팅턴 지음, 이희재 옮김 / 김영사 / 2016년 2월
평점 :
소련이 붕괴했을 때,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소련은 왜? 붕괴하였는가?'라는 질문이 커다란 화두였다. 그리고, 그 시절에 공산주의가 붕괴된 이후의 세계 질서에 대한 다양한 서적들이 출간되었다. 그많은 서적 중에서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과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가장 대표적 서적이다.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책은 자본주의의 오만이 서려있는 책이라 읽을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즉,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책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싸움에서 자본주의의 승리를 만끽하기 위한 자위행위에 불과한 서적이다. 반면, 새뮤얼 헌팅텅의 '문명의 충돌'은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문명은 교류하는 것인가? 충돌하는 것인가?라는 화두를 나에게 던지며 나의 머릿속에서 '문명의 충돌'이라는 책은 자주 소환되었다.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언젠가는 '문명의 충돌'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문명의 충돌'을 한장 한장 읽어 내려갔다. 이미 고인이된 새뮤얼 헌팅턴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을 제공했을까?
1. 헌팅턴의 편협한 문명관
새뮤얼 헌팅턴은 역사학자가 아니다. 당연히 문명사학자도 아니다. 그는 정치학자이다. 역사학자가 치밀한 사료 비판을 통해서 신중히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데 반해서, 정치학자인 새뮤얼 헌팅턴은 너무도 엉성한 자신의 도식으로 세계를 재단하고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 헌팅턴은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서 세계를 서구,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이슬람, 중화, 힌두, 정교, 불교, 일본 문명으로 나눈다. 이렇게 문명을 나누면서 문명을 나누는 기준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지극히 자의적으로 세계의 문명을 나누고 있다.
그가 문명을 나누면서 기준을 제시하지 않다보니, 이해할 수 없는 문명들이 눈에 띈다. 그중에서 일본을 독자적인 문명으로 따로 떼어내어 구분한 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일본을 중화문명권에 넣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헌팅턴은 일본을 독자적인 하나의 문명으로 구분하고 있다. 물론 그 이유도 서술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배웠듯이, 당나라 시기, 한자, 유교, 불교, 율령이라는 공통의 문화 요소가 성립도었다. 이러한 공통요소들은 동아시아 사람들이 만나서 한자를 이용한 필담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긴밀이 서로 문화를 주고 받은 동아시아의 특징을 이해하지 않고, 일본을 독자적인 문명으로 독립시켜 서술한 헌팅턴의 시각에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새뮤얼 헌팅턴은 왜? 일본은 독자적인 문명으로 독립시켜 서술했을까? 후쿠자와 유키치는 '탈아입구'를 왜쳤다.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며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려 혈안이된 일본의 위정자들은 서구에 유학생을 파견하면서 부디 '백인 여성'과 결혼하여 귀국하라 당부했다. 백인과 혼혈을 통해서 일본인을 개량시키려는 일본인들의 노력은 청일전쟁을 통해서 아시아의 맹주가되고, 러일전쟁을 통해서 서구 제국주의 반열에 들어선다.
일찍이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가 서구에 소개되면서 서구인들은 일본을 서구의 기사도를 갖춘 나라로 인식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도와 맥아더도 '무사도'를 읽고 일본에 대한 호감을 갖았다. 이러한 미국내의 친일적인 흐름들이 새뮤얼 헌팅턴에게 이어져 온 것이 아닐까?
새뮤얼 헌팅턴의 일본에 대한 과대평가는 일본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를 예측하는 부분에도 나타나있다. 헌팅턴은 일본은 자주성을 추구하는 독자적인 문명으로 전제하였기에 떠오르는 중국과 저물어가는 서구사이에서 중국을 선택할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일본의 아베정권은 트럼프에게 뒤통수를 맞으면서도 친미적인 외교를 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우리는 흔하게 보아왔다. 일본은 독자적 외교를 하기 보다는 미국에 종속적인 외교를 하였다. 그런데도 일본이 미국을 떠나 중국을 선택한다는 시나리오를 헌틴턴이 상상했다는 것은 일본에 대한 그의 무지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을 이용할 것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 헌팅턴은 첫째, 일본의 재무장을 강화시키고, 둘째, 핵무기를 확보하고, 셋째, 아시아 국가의 지지를 둘러싸고 중국과 일본이 경합을 벌이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헌팅턴의 주장은 가능성은 낮지만, 오바마 행정부 시기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를 재편하고 일본 밑에 한국을 위치시키려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헌팅턴의 개인정 망상으로 그칠 정책이 아니란 점을 알 수 있다. 오바마 행정부를 계승한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일본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재편 정책이 재개될 가능성이 있음을 우리는 유념해야한다.
새뮤얼 헌팅턴은 들로르의 말을 인용하여 '미래 갈등은 경제나 이념이 아니라 문화적 요인에 의해 촉발될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면서 헌팅턴은 무신론자가 증가하는 한편에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토착종교 혹은 새로운 종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젊은층은 현실을 살아가야한다. 그들에게 경제가 문화보다 영향력이 낮다고 볼 수 있을까? 경제적 요인이 문화적 요인과 결합하여 갈등을 촉발할 수 는 있으나, 문화적 요인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세상을 너무도 단순하게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젊은 층에서 무신론자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본다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경제적 요인이 아닐까?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서 갈등을 촉발 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문명'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것이 그의 주장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다.
2. '문명의 붕괴'가 쓰여진 이유
편협한 문명관을 가진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의 붕괴'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이 나온 1990년대는 동구권이 몰락하고 소련이 해체되던 시기이다. 세계 초강대국으로 미국만이 남아 있던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에 새뮤얼 헌팅턴이 이 책을 쓴 목적을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물론 나의 개인적 분석이다.
첫째, 미국이 절대 강자로 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적이 필요하다. 소련이라는 절대악이 사라진 상황에서 새로운 악인 필요해졌다. 특히 미국을 움직이는 군산세력에게는 새로운 적은 필수적이다. 헌팅턴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민족성을 재창조하려는 민족에게는 적수가 반드시 필요하며 잠재적으로 가장 위험한 적대감은 세계 주요 문명들 사이의 단층선에서 불거진다."라고 말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적들이 반드시 필요함을 헌팅턴 스스로 이 책에서 인정한 샘이다. 악마는 자신이 악마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새로운 악마를 만들어낸다. 군산세력은 자신의 악마성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악마를 찾아야한다. 새뮤얼 헌팅턴은 그 악마를 문명에서 찾았다.
둘째, 냉전이 붕괴되면서 서구의 쇠락과 중국과 이슬람을 비롯한 비서구세력의 부상에 백인 서구사회가 위기감을 갖는다. 산업혁명을 주도하며 앞선 과학기술로 동양을 지배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서구의 절대적 힘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제 동양이 각성하면서 서구를 무섭게 추격하고 있다. 이에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미국과 서구 세력의 결속을 희망하고 있다. 추락하는 백인 중심 문명이 계속되길 바라는 그의 얇팍한 바램이 이 책의 곳곳에서 묻어난다.
이러한 이유에서 쓰여진 '문명의 충돌'에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문명의 적이 설정되어 있다. 바로 중국과 이슬람 문명이다. 그중에서도 새뮤얼 헌팅턴은 이슬람 문명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적대감이 도를 지나칠 정도로 강하다.
"전투성 화합 불능성, 비이슬람 교도 집단과의 물리적 근접성은 이슬람의 지속적 특성이다. 그리고 이것들로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이슬람 교도의 분쟁 성향(만일 이런 것이 존재한다면)을 설명할 수 있다."-359쪽
이슬람을 전투성과 화합 불가능성이라는 '지속적 특성'을 가진 문명으로 규정짓는 것 자체가 무척 충격적이다. 적어도 하버드 대학의 교수라면 특정 문화에 대한 편견을 가지면 안되며, 가졌다하더라도 이를 드러내놓고 글로 쓰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 아니다. 이슬람세력이 아라비아반도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까지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요인은 '관용'에 있었다. 지즈야라는 인두세를 낸다면 비이슬람 교도라 할지라도 자신의 종교를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오스만 제국 시기에는 밀레트제가 실시도어 유대교는 물론이고 크리스트교도들도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용정책이 오스만제국을 강성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이슬람을 폭력의 종교로 규정하는 새뮤얼 헌팅턴에게 무척 깊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이슬람교를 믿는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데 반해서 서구의 크리스트교 신자들의 증가는 이에 따라오지 못하는 현실에서 서구 백인들은 위기감을 갖는다. 그리고 서구 대 이슬람이라는 문명의 대결구도를 구상하게된다. 이 책은 세상을 바로 보는 패러다임을 제공하는 책이라기 보다는 편협한 서구인들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책이라할 수 있다.
이슬람에 대한 헌팅턴의 두려움과는 달리, 2020년대에는 중국이 무서울 정도로 부상하고 있다. 미중무역전쟁이 벌어질 정도로 중국의 부상은 무서운 속도로 이뤄지고 있다. 헌팅턴은 중국의 부상에 대해서 경계심을 이 책에 나타내고 있으나, 이슬람 세력만큼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책의 430쪽에는 중국과 미국이 문명전쟁을 벌이는 가상시나리오가 적혀있다. 3류 판타지 전쟁 소설이라고 표현하기 힘들정도로 천박한 헌팅턴의 상상에 실소가 나올 정도이다.
헌팅턴에게, 아니 미국과 서구의 백인들에게 이슬람과 중국의 부상이 그리도 두려움의 대상인지 몰랐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서구의 극우 백인 지식인들의 세계관을 알게 되었다. 9개의 문명으로 세계를 나누기 보다는 미국을 대표하는 서구 패권주의와 이에 도전하는 비서구세력(러시아와 중국, 이슬람), 그리고 다수의 방관자들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보다 솔직한 태도가 아닐까? 문명이라는 외피를 씌워 자신들의 패권을 지키기 위한 패러다임을 만들려는 헌팅턴의 노력이 매우 가소롭다.
3. 문명의 소통과 화해는 불가능 한가?
새뮤얼 헌팅턴은 미국의 다문화주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의 책에 한부분을 살펴보자.
"(문화적 중추도 없는) 그렇게 이루어진 나라는 응집력 있는 사회로 오래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 준다. 다원 문화주의의 미국은 통일된 국가라기 보다는 민족들의 각축장이 될 것이다."-420쪽
헌팅턴은 미국의 다문화주의를 비판한다. 아시아계와 이슬람 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가 미국에 흘러들어 만발하기를 바라기 보다는 미국이 서구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헌팅턴의 얇팍한 문화관은 하버드 대학의 교수라는 직함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한심한 수준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초강대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여러가지 이유중에 하나는 문화적 다양성이다. 에이미 추아가 쓴 '제국의 미래'에서도 소개되어 있듯이, 강대국으로 지속한 제국의 공통점은 개방성에 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일개 정치학자가 미국이 강대국으로 존속할 수 있는 힘을 무시하고 있다.
다원 문화주의에 부정적인 새뮤얼 헌팅턴은 한 나라의 문화 정체성을 고치는 것에도 매우 부정적이다.
"자기 나라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에 젖어 있는 정치 지도자는 반드시 실패한다. (중략) 정치 지도자들은 역사를 만들 수 있지만 역사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그들은 분열국을 만들 수는 있어도 서구 사회를 만들지는 못한다. 그들은 자기 나라를 문화적 정신 분열증에 감염시켜 그 수렁에서 좀처럼 빠져 나오지 못하게 만들 뿐이다."-206쪽
새뮤얼 헌팅턴은 보편문화를 부정한다. 세계 정치는 근대화의 자극을 받으면서 문화의 경계선을 따라 재편되고, 비슷한 문화를 가진 민족과 국가끼리 뭉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기 나라의 문화를 서구식으로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새뮤얼 헌팅턴이 그토록 좋아하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급속히 서구화하였고 그결과 근대화에 성공한 사실을 헌팅턴은 무시하고 있다. 자가당착적인 편협한 문명관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같은 문화권에 있어도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헌팅턴은 보지 못하고 있다. 베트남과 중국이 같은 '중화문명권'이지만 사이가 좋지 않으며, 역사적으로 수많은 전쟁을 하였다. 같은 이슬람 문명권이지만, 이집트가 이슬람의 적인 이스라엘과 관계를 개선하는 현실을 그는 보지 못하고 있다.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고, 개 눈에는 똥만보이나 보다.
헌팅턴은 이 책에서 자신의 견해가 패러다임으로 받아주길 기대하고 있다. '문명의 충돌"을 페러다임으로 보길 바라는 헌팅턴의 주장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다면 어떤일이 펼쳐질까? 서구 백인중심의 문명이 계속되길 바라는 새뮤얼 헌팅턴의 세계관이 전세계를 뒤덮는다면 전세계는 분쟁과 대립으로 뒤덮일 것이다. 문명간의 대립과 오해는 더욱 심해져서 폭력이 폭력을 낳고, 보복이 보복을 부르는 아마게돈이 펼쳐질 질것이다. 그의 위험한 세계관이 우리의 두뇌를 점령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우리가 어떠한 세상을 만드는가와 긴밀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평화롭고 소통하는 문명세계를 만들길 바란다면, 문명을 대립과 충돌의 관계로 바라보기 보다는 교류와 소통의 관계로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아니, 문명은 교류하기도하고 때로는 충돌하기도 했다. 만약 문명이 충돌한다면, 문명의 충돌을 막기 위한 교류와 화해의 방법을 찾는 것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제 서구 백인의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서, 화해와 공존, 번영을 바라는 우리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PS. 헌팅턴의 관점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의 글중에 일부는 마음에 들어 적어둔다.
강력한 사회는 보편화하며 허약한 사회는 특수화 한다.
물질적 성공은 문화적 자기 주장을 낳고, 단단한 힘은 부드러운 힘을 낳는다. - 1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