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학 중국 특강 - 하버드 석학들의 36가지 질문, 중국의 현재와 미래를 묻다
하버드대학 중국연구소 지음, 이은주 옮김 / 미래의창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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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국제 정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종종 국제정치를 평론한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에서 정치학을 배웠을 뿐이라 미국 중심의 국제정치라는 시각에서 국제정치를 바라본다. 아무리 유명한 대학을 나왔을 지라도 그의 시각이 특정국가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는 외눈박이 평론가에 지나지 않는다. '하버드대학 중국 특강'이라는 책을 집어들면서 미국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랬다. 그렇다면 이 책은 나의 기대를 충족 시켰을까?


1. 외눈박이 평론가

  미국인의 시선에서 중국을 바라보니, 그들의 생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첫째, 역사를 목적론적 시각에서 바라보며 아시아 여러나라들이 도달해야할 최종 목표를 서구의 사회라는 그들의 선입견이 짖게 묻어난다. 아서 클라인만이 쓴 '고령화와 정신건강 문제를 해결할 수있을까'라는 주제의 글에서 그는 중국이 "정치적 자유화가 실현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지금 그들에게 지금도 그러한 생각에 변화가 없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의 대답은 어떠할까? 

  중국인들은 서구의 민주주의를 비웃는다. 선거를 통해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고, 실력 이하의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 놓고는 탄핵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민주주보다 중국의 공산당 일당 독재를 더 좋은 제도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중국 공산당은 철저한 교육을 통해서 당원들의 실력을 키우고 있다.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능력있는 사람을 지도자로 배출한다고 자부하고 있다. 

  중국이 서구의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낭만적 생각을 지금도 고수하는 학자들은 드물다. 최첨단 안면인식 기술을 이용해서 축구경기장 안에 있는 지명수배범을 단시간 내에 찾아내는 것이 중국이다. 최첨단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중국 공산당 일당 독재를 더욱 견고하게 하고 있는 것이 지금 중국의 현실이다. 글쎄, 중국 경제가 붕괴하여 민중 혁명으로 새로운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지 않는 이상, 경제 발전이 민주화로 이어진다는 서구의 발전 단계론적 시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둘째, 중국의 독자성을 보지 못하고 소련의 하수인으로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페리는 '중국 공산 정권은 정당성이 있는가'라는 글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이념과 정치제도의 뿌리가 전부 소련에 있는데 정작 소련은 혁명 전 중국의 모습과 닮은 점이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엘리자베스 페리는 중국 공산당이 대장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소련과 연락이 두절되었고, 서구식 도시 폭동 전술을 버리고, 광대한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는 전술로 노선을 바꾼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오쩌둥은 무조건 마르크스-레닌 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국의 현실에 맞도록 이를 변형시켰다. 그랬기 때문에 광대한 중국 대륙을 차지할 수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이념과 정치제도의 뿌리가 전부 소련에 있"다는 주장은 중국의 독자성을 무시하고, 소련에 종속된 국가로 보는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다. 

  이러한 시각은 북한을 소련의 괴뢰정권으로 보는 시각과 닮아 있다. 서구의 시각에서 혹은, 적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차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바라보기에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 어느 나라이든 외부의 새로운 제도를 받아들일 때에 자신에 맞도록 제도를 변형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제도를 제대로 정착시킬 수 없다. 그러하기에 중국의 모든 이념과 정치 제도의 뿌리가 소련일 수는 없다. 또한 소련의 상황이 혁명 전 중국의 모습과 닮을 필요도 없다. 미국의 학자는 중국을 바라볼 때 있는 그대로의 중국을 바라보려 노력해야한다. 

  셋째, 동아시아인의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에즈라 보겔은 '중일 관계는 개선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글에서 일본이나 중국이 "영토 그자체로는 별 가치도 없는 섬이" 양국간의 가장 큰 갈등 요소라고 지적했다. '댜오위섬/센카쿠열도'의 가치와 그 섬에 얽힌 역사적 의미를 미국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댜오위섬/센카쿠열도' 근해에 묻혀 있는 자원과 청일 전쟁 이후 굴욕적으로 '댜오위섬/센카쿠열도'를 청나라가 일본에 넘겨 주어야했는지를 기억한다면 절대 '별 가치도 없는 섬'일수가없다. 

  타인의 뼈를 애는 고통보다 나의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아픈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세계 최강 천조국에서 중국과 일본이 '댜오위섬/센카쿠열도'이라는 작은 섬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 우수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작지만 큰 섬이 '댜오위섬/센카쿠열도'이다. 이 섬에 대한 영유권을 일본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일본은 중국인들에게 가했던 '난징 대학살'로 대표되는 만행을 반성하지도 않으며 이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고 볼 수 없다. 

  넷째, 중국인의 내면일 이해못한다. 엘리자베스 페리는 '중국 공산 정권은 정당성이 있는가'라는 글에서 시진핑 정부가 추진하는 반부패 운동의 핵심 설계자이자 집행자인 왕치산이 "중국 공산당의 합법성(정당성)은 역사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는 인심(민심)의 향배에 따라 결정된 것이자 인민의 선택이기도하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인인 그의 입장에서는 베버가 말한 전통, 카리스마, 합리성을 들먹이며 정권의 정당성을 논해야하는데 왕치산을 베버의 이론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서구의 이론에 입각한 설명이 아니면 논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서구중심주의에 물들어 있는 서구인의 귀에 왕치산의 논리가 논리적인 설명으로 들릴리가 없다. 

  서구인들이 기독교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죽어서 신의 심판을 두려원한다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인들은 역사를 두려워한다. 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선비들에게 역사에 오명을 남기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역사에 어떻게 기록되는가를 중시여기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역사를 새로 쓰는 일들이 흔하다. 우리 나라도 보수 정권이 역사 교과서를 자기 입맛데로 다시 쓰려했기에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지 않은까!

  중국을 연구하는 전문가라는 사람이 중국인의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해서 '역사적 정당성'이라는 개념으로 공산당 정권의 권위를 설명하려는 "발상 자체가 매우 흥미"롭고 "본질적으로 매우 모호한 개념"이라고 표현한 것은 실망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미국 학자라는 한계는 이책 곳곳에 묻어있다. 하버대학 페어뱅크 중국연구소의 탁월한 학자들도 서구 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현실이 못내 씁쓸하다. 


2. 중국 예외주의

  "중국인의 피속에는 남을 침략하는 유전자가 없다."는 시진핑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중국의 역사를 살피지 않고, 한국의 역사만 살펴보아도 이 말의 허구를 잘 증명할 수 있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무수히 고구려를 침략한 기록을 시진핑과 중국인은 모르고 있는 것인가? 

  만약 '중국인의 피소게는 남을 침략하는 유전자가 없다.'는 말이 맞다면, 중국이 타이완을 무력 침공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또한 중국이 티벳을 점령하고 티벳 문화를 파괴하는 일도 발생하지 않았어야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레파토리는 힘이 약한 우리 민족만 사용하는 수사라고 생각했다. 힘이 없어서 타국을 침략하기 보다는 타국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급급했던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미화하기 위해서 만든 구호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중원을 호령하며 세상의 중심이라 자칭한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자부한다는 사실은 놀랍기만하다. 

  우리 민족은 타 민족과 다르다는 관념은 자신들을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믿게했다. 재미 있는 것은 이러한 '중국 예외주의'는 중국인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 예외주의' 신봉자도 있으니 말이다. '중국 예외주의'를 신봉하는 자와 '미국 예외주의'를 신봉하는사람일수록 외교적 강경 노선을 선호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또한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미국 예외주의를 신봉하는 자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군국주의적 성향이 더 높다고 한다. 자신은, 자기 나라는 타인(타국)과 다르다는 관념이 타인에게 보다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 혹은 우리 나라가 예외적인 존재라는 독선적 관념을 갖기 보다는 보편적 인간으로 우리 모두를 바라볼 수 있어야 너그러움이 생길 수 있다. 너그러움이 생겨야 폭력을 줄일 수 있다. 그러한 너그러움은 '전랑'외교를 포용외교로 바꿀 수있다. 지금 중국을 세계 여러 나라는 두려워하지만 존경하지 않는다. 진정한 패권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주변 여러 나라에게 두려움만 주어서는 안된다. 유학에 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섬기는 '사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큰나라가 작은 나라를 섬기고 보살피는 '사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해야한다. 

  어쩌면 중국 정부가 티벳을 비롯해서, 신장.위그루 자치지역에서 소수민족의 문화를 말살하려고 하는 모습도 '중국 예외주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일본 처럼 단일 민족을 만들고 싶어하는 중국이 '한족 예외주의'에서 벗어나 소수민족의 '위대한 문화 유산'을 잘 보존하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는 길을 걷기 소망해본다. 


  이 책에는 사드가 "한국의 안보 상황에 별 보템이 되지 않는다."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보수파는 북한의 핵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사드를 설치해야한다고 괴변을 늘어 놓았다. 그런데, 정작 미국의 석학들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대와 남한 내 공격 표적의 거리가 너무 짧아 사드는 북한에서 발사한 미사일을 요격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국익보다는 미국의 국익에 매몰되어 국민을 속이고 국가의 안보를 위태롭게하는 협잡꾼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러한 협잡꾼들은 박근혜 정권 시기보다 더 활개를 치고 있다. 남중국해 문제로 국제 상설 중재 재판소에서 승리한 필리핀이 자국의 국익을 위해서 친미일변도의 외교술을 펼치기 보다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현란한 외교술을 펼치는 것을 우리 정부도 배워야할 것이다. 중국관한 미국 석학의 글을 엮은 책을 읽으면서도 암울한 우리의 외교 상황을 떠올리며 걱정하는 것은 나도 한국인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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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붉은 별 - 개정판
에드가 스노우 지음, 홍수원 외 옮김 / 두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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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붉은 별'의 원제는 "Red Star of China"가 아니다. "Red Star Over China"이다. 즉, 'of China'이 아닌, 'Over China'이다. 직역하면 '중국 위에 떠있는 붉은 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에드거 스노는 중국 공산당의 중심지 바오안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홍비' 대장 마오쩌둥을 만났다. 에드거 스노가 직접 만난 마우쩌둥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홍군은 '홍비'가 아니었다. 중국 인민의 지지를 받는 항일의식이 투철한 군대였다. 그가 책 제목에 'of'를 사용하지 않고 'over'을 사용한 이유를 그가 만난 중국 공산당원들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에드거 스노가 만난 수많은 중국 공산당원과 그들을 이끄는 마오쩌둥을 바라보면서 나는 질문을 던진다. 마오의 실험은 성공했는가?

 기자 정신이 투철한 에드거 스노는 목숨을 걸고 '홍비' 지역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오쩌둥과 수 많은 공산당원을 만난다. 에드거 소노는 그들에게서 진정성을 발견한다. 지주와 자본가들로부터 노동자 농민을 해방시키고,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겠다는 그들의 열의는 책 곳곳에 묻어난다. 붉은 비적이라는 뜻의 '홍비'라는 단어는 '홍군'에 대한 멸칭이지만, 어쩌면 그들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단어일 수도 있다. 왜일까?
 마오쩌둥은 어려서부터 중국의 고전 소설들을 탐독했다. 그중에는 '수호전'도 있었다. 양산박을 중심으로 108 두령이 펼치는 이야기는 참으로 재미있다. 나도 그 재미에 푹빠졌던 시절이 있다. 억울함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서 송강을 중심으로 뭉친 그들의 의리와 전략은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로 잡겠다는 중국 공산당과 닮아있다. 세상은 그들을 산적들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스스로 '하늘을 대신하여 의를 행한다'고 자부했다. 민중이 그들을 지지한 것도 소설과 당시 중국의 상황이 비슷하다. 
 그래서일까? 홍군이 구사하는 전략과 전술이 '수호지'와 비슷하다. 마오쩌둥이 창안했다는 16자 유격전술도 어쩌면 '수호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수호지' 속의 108 두령은 탐욕스러운 관리와 부호를 혼내주고 그들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홍군은 지주의 곳간을 털어 가난한 농민에게 나눠주고, 지주의 토지를 소작농들에게 나눠준다. 심지어는 '백비'라 불리는 국민당 군을 잡아서 죽이지 않고 그들을 재교육 시켜서 공산주의자로 만든다. 이 부분은 요괴들을 뉘우치게 만들어 바른 길로 인도하는 '서유기'와 비슷하다. 이러한 홍군의 전략을 에드거 스노는 '로빈후드 전략'이라고 부른다. '로빈후드 전략'은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대장정을 하면서 수많은 홍군이 죽어갔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홍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그들은 대장정을 완수했고, 국민당군을 괴롭혔다. 
  고단한 홍군의 생활 속에서 그들은 이에 불평을하지 않는다. 에드거 스노가 만난 홍군병사는 자신이 홍군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는다. 특히, 자신이 홍군에 들어오고 나서 글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병사의 삶과 활동 전체가 그들의 끊임없는 발전에 기여하도록 해야한다."(371쪽)는 홍군의 원칙은 중국농민에게 엄청난 매력이었다. 일자무식인 중국농민에게 홍군에 입대하는 것은 학교에 입학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가지도록 했다. 군사훈련뿐만 아니라, 한자공부 2시간, 노래와 그룹모임 등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개인의 발전을 이루도록 노력한 홍군의 모습은 참으로 놀라웠다.  
  홍군은 '수호지' 속의 108 두령과 다른 슬로건을 내건다. 바로 항일 투쟁이다. 에드거 스노는 이를 "이들의 투쟁은 제국주의라는 외부의 종양과 계급적 억압이라는 내부의 암을 동시에 도려내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547쪽)라고 칭찬한다. 마오쩌둥의 홍군은 정확히 현실을 인식하고 민중이 원하는 항일 전쟁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에드거 스노가 홍군지역을 벗어난 직후에 시안사건이 발발한다. 드디어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다. 
  에드거 스노의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질문이 밀려온다.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에 읽었던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그려진 대장정의 모습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설산을 임신한 마오쩌둥의 아내도 같이 걸어서 넘었고, 마오쩌둥이 일반병사보다 더 갖고 있었던 것은 모기장 하나 뿐이었다는 서술은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유시민이 쓴 '거꾸로 읽는 세계사' 보다 더 감동적인 '중국의 붉은 별'을 읽으며 그때의 경이로움을 느낄 수 없다. 왜일까?
  책에 회족 청년에 관한 서술이 있다. 마홍쿠이와 일제타도를 위해서 홍군에 입대한 회족 청년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에드거 스노는 그들의 뜨거운 열정을 책에 잘 담아 놓았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홍군이 되어 공산 중국이 건설되는데 일조한 회족 청년과 그 후손들은 지금 어떠한 삶을 살고 있을까? 뉴스 보도에 따르면, 신장 위그루 자치지역에서는 심각한 인권탄압이 이뤄지고 있다. 그들은 종교의 자유를 박탈 당하고 있다. 교화소에 끌려간 회족은 심각한 인권유린을 당한다. 과연 이것이 회족 청년이 바라던 이상적인 중국의 모습이었을까?
  마오쩌둥은 '수호지'를 읽으며 항일투쟁과 국공내전의 전략과 전술을 습득했다. 그리고 중국대륙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수호지'에서 투쟁의 교훈을 얻을 수는 있으나, 바른 통치의 교훈은 얻을 수 없었던가 보다. 마오쩌둥은 독재자가 되었다. 대약진 운동으로 2천만에서 3천만명의 중국인이 아사했다.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의 전통을 말살하고 수많은 영웅을 홍위병의 노리개감으로 만들었다.  
  "중국의 사회혁명 운동은 (중략) 앞으로 계속 성장할 뿐만아니라 변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결국엔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550쪽)라고 에드거 스노는 마오쩌둥의 승리를 예견해다. 묻고 싶다. 그 승리는 중국 인민의 승리일까? 중화민국의 승리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마우쩌둥 개인의 승리였을까?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종교를 밀어내고 새로운 종교의 자리를 차지했다. 공산주의는 새로운 종교가 아니었을까? 이 책에서 볼 수 있듯이, 국공내전 상황에서 중국의 농민들은 소비예트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으며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모습도 보였다. 장제스를 중심으로하는 국민당의 탄압을 받았을 때 가장 순수한 모습을 공산주의는 보였다. 이는 박해받는 그 시기가 가장 순수하며 이상적인 모습을 보이는 종교와 닮아있다. 그리고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자 부패하고 독재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권력을 얻는 순간 타락하는 종교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래서 묻는다. 중국 공산당은 언제쯤 종교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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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붉은 별 - 개정판
에드가 스노우 지음, 홍수원 외 옮김 / 두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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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통의 이곳 체류가 길어지는 것은 우리 탓이 아니다. 지난 월요일 도널드 씨15가 이곳에 도착한 직후부터 총통은 자신의 당연한 분노와 대화를 기피하는 감정을 다소간 억제하고, 우리 모두가 당면한 문제를 침착하게 충분히 협의했으며, 화요일에는 우리가 목표로 삼고 있으며, 또한 고(故) 쑨원 박사의 유지와 합치되는 몇 가지 논점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나는 총통의 의견을 듣고 그와 함께 사태가 내전으로 진전되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한 안전조치를 타협할 수 있는 사람을 난징에서 파견한다면 누구라도 환영할 것이라는 뜻을 타전했다. 총통이 자신을 석방하여난징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총통이 자신의 약속을 이행할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확신하고 있음에도 불 - P519

구하고 그가 난징에 도착한 후 내전을 계속하도록 설득당할 위험이 있다는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이 점을 묵시적으로 인정해서 그후부터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 (즉 내전을 중지한다는 적절한 보장책을제시하는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누군가가 난징에서 와서 총통이 수도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다렸으나 지금까지는 허사였다.
이것이 전부다. 왜 이처럼 지체되는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가 왔다면 그는 며칠 전에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장쉐량 - P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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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에게 물에 관해 묻는 일 뒤란에서 소설 읽기 1
캐서린 라이언 하이드 지음, 이진경 옮김 / 뒤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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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중한 것을 당연시하는 경우가 많다. 물고기에게 물이 없으면 물고기는 살 수 없고, 우리에게 공기가 없다면 우리는 살 수 없다. 너무도 소중하지만 항시 우리 주위에 있기에 우리는 이를 당연시한다. 그리고 그 소중한 존재를 때로는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그 소중한 것에는 우리의 특권도 있다. 이책은 특권을 당연시여기며 형성된 사회적 편견에 맞선 따뜻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흑인 청소년 레이먼드와 시각장애인 할머니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밀리 할머니는 루이스라는 청년을 찾고 있었다. 레이먼드는 할머니를 도와주던 루이스라는 청년을 찾아 나선다. 할머니가 부탁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친구인 할머니를 돕고 싶어서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 여정은 이혼 가정에서, 흑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서, 성정체성에서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위대한 여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밀리 할머니는 인생의 친구이자 선배로서 좋은 조언을 한다.

 

"그들한테 상대의 인종에 따라 다르게 처신하는지 물어봐, 그럼 아니라고 대답해. 많은 경우 그 사람들은 자기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것은 마치 물고기한테 물에 관해 묻는 것하고 같은 거야".-140

 

힘이 있는 자는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그가 휘두른 주먹에 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특히, 물리적 힘보다는 보이지 않는 힘을 휘두르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친구와 불법 이주자 문제를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대화 도중 그 친구는 "불법 이주민들에게 우리는 기득권이야!"라는 말을 했다. 순간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힘든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우리 소시민들이 무슨 '기득권'을 갖고 있겠는가! 그런데, 불법 이주민들에게 대한민국의 소시민들은 대한민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기득권 세력이었다. 우리가 당연시 여기고 있었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시민권은 대한민국으로 불법 이주를한 자들에게는 커다란 특권이었다. 우리에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시민권은 공기나 물과 같은 존재였다. 없으면 대한민국에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예멘 난민이 제주도에 불법 입국을 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표명했다. 우리의 독립운동가들도 우리의 조선인들도 중국으로, 일본으로, 미주로, 러시아로 불법 입국을 했다. 나라없는 설움을 견뎌가며 삶의 터전을 일구고 독립운동을 했다. 그런데, 이제 기득권자가 되어 난민에게 많은 거부감을 표명한다. 일말의 연민이나 미안함도 없이....

소설은 갑자기 법정 소설로 옮겨간다. 루이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두고 벌어진 재판이다. 재판이 과정에서 죄없는 루이스를 총으로 쏘아 죽인 부인은 유죄 판결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지 않았다. 배심원들은 부족주의에 휩싸여 있었다. '부족주의'는 물고기에게 물에 관해서 묻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 단어이다. 같은 백인인 그녀가 라틴계 젊은이를 쏜 것은 실수이며, 라틴계 젊은이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는 편견을 배심원들은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미국의 배심원제도가 부족주의에 휩싸인 배심원들에 의해서 왜곡된 판결을 내린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O. J. 심슨 사건을 예로 든다. 그는 백인 아내(니콜 심슨)와 아내의 친구(론 골드만)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검찰이 제시한 여러 증거는 그 혐의를 입증해 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배심원은 무죄를 결정했다. 12명의 배심원중에서 9명이 흑인이었다. 결국, 당시 언론은 배심원제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심슨은 여론에 의해서 죄인 취급을 당했다.

현실은 소설 처럼 명확하지 않다. 9명의 흑인 배심원들이 부족주의에 빠져 있을 수 있고, 미국의 주류 언론이 부족주의에 빠져 백인 여성을 죽인 흑인 남성을 단죄하지 않았다고 매도했을 수도 있다. 물고기에게 물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힘든 것은, 우리 현실에서 수많은 물고기들이 자신의 물은 보지 못하면서 다른 물고기의 물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소설 속의 밀리 할머니가 레이먼드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도 아픔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대서양을 건너온 그녀의 가족은 엘리스 아일랜드에서 이민심사를 받는다. 인간이기 보다는 가축과 같은 취급을 받은 그녀에게 그때의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녀는 백인으로서의 특권을 누렸지만, 유대인이기에 또 다른 종류의 차별을 격어야 했다. 그래서 그녀가 ''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을 볼 수 있을까? 물을 보지 못하는 물고기에게 ''에 대해서 대화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양서류가 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물을 볼 수 없다. 양서류가 되어 물을 벗어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물을 볼 수 있다. 두세계를 알아야 물 밖과 물 안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물 밖을 나온 적이 없는 물고기에게 양서류만이 다가가서 말을 할 수 있다. 그들은 물 속에서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기득권자로 있지만 사회적 약자의 마음을 헤아리려 스스로 낮은 곳으로 가서 그들의 삶을 체험하고 그들과 대화하는 사람! 사회적 약자이지만 피나는 노력을 통해서 사회의 기득권자가 되지만,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잊지 않는 사람! 그들이 바로 우리사회가 필요로하는 양서류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양서류와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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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사도들 - 최재천이 만난 다윈주의자들 드디어 다윈 6
최재천 지음, 다윈 포럼 기획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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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심상치 않다. '다윈의 사도들(Darwin's 12 Apostles)'은 다윈을 절대 틀리지 않는 교주로 모시며 일생을 바쳐 다윈의 말이 진리임을 과학적인 근거로 증명한다. 원래는 13명의 사도를 다룰 계획이었으나 하버드 대학교 에드워드 윌슨 교수와의 인터뷰 내용이 인터뷰 후에 무자비하게 난도질 당하는 바람에 이 책에 싣지 못했다. 다윈주의자 최재천이 만난 12명의 사도들에게 다윈은 어떠한 매력이 있기에 그들은 기꺼이 다윈의 사도가 되었을까?

 

최재천이 만난 사도들 중에서 나의 흥미를 끈 첫번째 사도는 헬레나 크로닌이다. 그녀는 페미니스트들과 논쟁도 불사하는 전투적 여성이다. 한국에 미투 열풍이 불어닥치면서 차기 대권그룹에 있었던 정치인들이 줄줄이 낙마하는 사태를 겪으며 한국에서는 페미니스트에게 부정적 발언을 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사회적 매장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반박할 수 없었다. 성적 피해를 당했다는 증거를 요구하는 말조차 2차 가해로 뭇매를 당했다. 석연치 않은 의심을 지울 수 없지만 나 또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성인 그녀가 페미니스트와 설전도 불사하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페미니즘을 정치 쟁점화하는 것은 세상을 더 공평한 곳으로 만들고, 여성에 대한 부당한 처사를 바로 잡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성이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 어떻게 더 나은 세상을 구축할 수 있겠습니까? 애초부터 과학적 정보를 바탕으로 한 고려를 배제한다면 어떻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이것이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거행된 것들이라면, 저는 정치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은 타당성을 잃었다고 말하겠습니다."-86

 

과학문명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과학에 근거한 판단을 해야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과학적 진실보다는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을 만들려고 과학이라는 지식을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경우가 많다.

1정 연수 때의 일이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설명하는 강사가 여성이 남성보다 수학이나 과학을 못한다는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그 강사는 강의 중에 남성이 여성보다 수학과 과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인다고 말했다. 그래서 질문을 했다. "남성이 여성보다 수학과 과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인다면 이를 인정하고 그에 맞도록 수업을 해야하는데, 여성이 남성보다 수학과 과학을 못한다는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된다라는 말은 모순이 아닌가요? 남성이 여성보다 수학을 잘하는 현실을 인정해야 올바른 교육이 되지 않나요?" 나의 질문에 그 강사는 짜증나는 목소리로 "그건 알아서 잘 이해하세요."라고 말했다. 그때 페미니스트는 감정적일뿐 이성적 사고는 상당히 박약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성적 두뇌로 이해되지 않으면 그 주장을 납득할 수 없다. 페미니스트 강사는 여권신장이라는 목표에 눈이 멀어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그 강사는 헬레나 크로닌의 책을 읽었어야했다. 헬레나 크로닌이 나의 질문에 답한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멍청이도 많지만 노벨상 수상자도 많네"라고 단순 명쾌하게 말했을 것이다. 경쟁이 많은 남성에게 변이가 많다. 그렇기에 노벨상을 타는 사람 중에 남자가 많지만, 멍청한 사람들 중에도 남자가 많다. 그에 비해서 여성 집단은 서로 비슷하다. 중간층이 두텁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과학과 수학 점수의 상위권자들 중에는 남성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상위권 학생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하위권에 머물고 있는 다수의 남성은 무시된다.

헬레나 크로닌의 설명은 오랜 동안 해결되지 않고 나의 머릿속을 맴돌던 의문을 깔끔히 정리해주었다. 우리 학교에 남학생들의 학업 성취가 낮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설명해주었다. 우리 현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과학적 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럴 때만이 하위권의 남학생을 중위권으로 끌어올리고 중위권의 여학생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교수학습 방법을 개발할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헬레나 크로닌이 소개한 남녀의 차이를 더 살펴보자. 신생아 중에서 남아는 경쟁적이며, 모빌을 더 선호한다. 그에 비해서 여아는 협력적이며 인간 얼굴을 더 선호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현실을 부정하며 부모의 양육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예외적인 사례를 말한다. 남아인데도 협력적이며 인간 얼굴을 더 선호하는 아이가 있으며, 여아인데도 경쟁적이고 모빌을 선호하는 아이가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며 남녀의 차이를 규정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매도한다. 헬레나 크로닌은 이에 대한 반론도 제시했다. 가끔 남녀의 차이가 반대로 나오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자궁에 있는 동안 남성 호르몬에 노출된 여아는 전형적으로 말괄량이 같고 여성 평균 공간 지각 능력을 초월한다. 남아도 정반대가 성립한다.

나는 역사를 배우면서 ~주의, ~이즘(ism)의 위험성을 많이 보아왔다. 주의와 주장에 매몰되면 진실을 보지 못한다. 자신의 주장과 반대되는 근거는 무시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근거들만 본다. 이른바 확증편향이 형성된다. 우리나라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이러한 확증편향이 보인다. 과학적 진실을 직시하고 이에 바탕을 둔 활동을 할 때만이 페미니스트들은 확증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떤 페미니스트는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정설이 변했듯이, 과학적 진실도 바뀔 수 있지 않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 과학적 진실도 변화할 수 있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세계의 진실을 모두 볼 수는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진실을 직시하고 그 범위 내에서 올바른 판단과 정책을 집행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결정이 잘못된 결정일 수도 있음을 잊지 말고 신중히 판단하고 정책을 집행해야 한다. 우리는 시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나의 흥미를 끈 두번째 사도는 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 마이클 셔머를 비롯한 종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도들이다. 사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리처드 도킨스가 진화론의 신봉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 제목 때문에 그의 책을 읽기를 꺼려했다. 인간을 선악설에 근거해서 바라보는 삐딱한 학자로만 생각했다.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까지 쓰면서 종교에 선전포고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다윈의 사도들 중에서 한국에 많은 기독교 신자가 있으며 해외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사실을 거론하며 매우 부정적인 의견을 표명했다. 나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크리스트교는 서양 사상의 기둥이다. 과학문명이 지배하는 시대라 할지라도 크리스트교를 드러내 놓고 비판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선입견이었다. 더욱이 서양에서는 말이다.

 

"무조건적인 찬양 또는 숭배가 그렇습니다. 믿음의 대가로 무언가를 가져가는 것을 숭배하고 찬양하게 만드는 것이나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찬양하기만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종교의 부적절한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주 강력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그런 것들을 빼 버린다면 더 이상 무엇이 남겠습니까?" -205

 

대니얼 데닛의 이 말은 종교에 대해서 평소 내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역사를 전공한 나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수많은 신화와 설화를 그대로 믿지 않고 그 안에서 역사적 의미와 사실을 끄집어 내려 노력한다. 그런데, 대학에서 한국 사상사 수업을 듣던 중에 교수님이 갑자기 기독교 이야기를 했다. 기독교 신자인 한국사 교수에게 나는 질문했다. "종교 위에 우리의 현실이 있어야합니까? 종교 밑에 우리의 현실이 있어야합니까?" 그런데, 교수님은 나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질문을 바꾸었다. "시대가 변하면 종교의 교리도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합니까? 시대가 변해도 종교의 교리는 변하면 안됩니까?" 교수님은 "그것은 함부로 말할 수 없네, 부활 처럼 영적인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교수님께 다시 질문했다. "신비한 종교의 이야기는 해당 종교를 포교하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 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교수님은 "그렇다면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거짓을 오랫 동안 믿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럴 수가 있나요."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 교수님은 단군신화를 신화로 가르치면서도 서구 종교의 신화는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고 있었다. 근대 과학문명의 세례를 받은 학자가 종교에서 벌어지는 신이한 기적들을 그대로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이 책에 소개된 대다수의 다윈의 사도들은 종교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그 관점은 상당히 논리적이며 나의 관점과도 일맥상통했다. 그런데, 종교와 과학은 조화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인가? 아무리 과학적 진실이 진화론이 옳음을 말해도 많은 인간들이 창조론을 믿고 있다. 심지어 인도에서는 11, 12학년 이외의 학년에서는 진화론을 가르치지 않기로 했다. 진실을 직시하기 보다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믿으려하는 사람을 과학의 진실 앞으로 끌고 올수는 없다. 강제로 과학의 진실 앞으로 끌고 오려할 때 과학은 또 다른 종교로 변질 될 수 있다. 골턴에 의해서 정립된 우생학이 열등한 사람으로 지목된 사람에게 단종수술을 행하고 열등한 민족을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보냈던 죄악을 다시 저지를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지구상에서 바이러스를 박멸시킬 수 없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다. 절대자에게 나약한 자신의 정신을 의탁하고 싶어한다. 그런 의미해서 칸트가 말했듯이 신은 요청되어진 존재이다. 스티븐 핑커는 "왜 이 지구에 보내졌는가?"라는 질문에 "아무런 이유도 없다."라고 대답했다. 스티븐 핑커의 대답이 과학적 관점에서는 정답일 것이다. 그러나, 나약한 인간은 조약돌에서도 우주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사피엔스는 자신들의 존재가 "아무런 이유도 없다."라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을 고통스러워한다. 결국, 나약한 사피엔스는 종교를 버릴 수 없다. 그렇다면, 나약한 사피엔스를 위해서 과학과 종교의 건전한 공존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만들어진 신'을 나의 독서 리스트에 올려 놓은 것도 이 책을 읽으며 얻은 수확이다. 좋은 책은 다음에 읽을 책을 연쇄적으로 읽도록 한다고 말한다. '다윈의 사도들'이라는 책은 내가 리처드 도킨스의 책들에 입문하도록 나를 인도했다.

책장을 덮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다윈이 이렇게도 중요한 인물인지 새삼스럽게 알았다. 다윈의 두번째 사도 헬레나 크로닌의 말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다윈의 핵심적인 이론은 영원히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생물학은 영원히 다윈주의적일 것이라는 말입니다."-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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