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 어디다 대놓고 묻기 애매한
장웅연 지음, 니나킴 그림 / 담앤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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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품은 디테일에 강하다고 한다. 불교관련 책을 좀 읽었지만, 불교에 관해서 잘안다고 자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소한 질문에 제대로 대답못하는 자신을 보며, 불교라는 거대한 산을 오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체감할 뿐이다.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는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모아 놓았다. 정말 사소하지만 불교에 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없다면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모아 놓았다. 불교에 관한 책을 좀 읽었기에 목에 힘주던 내가 사소한 질문에 대답못하며 무너졌던 기억을 떠올리며 한장 한장 재미있게 읽었다.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질문 중에서 나에게 깊은 울림을 준것은 4가지 이다. 

  첫째, "불교에서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라는 질문이다. 일반적으로 종교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절대자와 내세관이 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잣대로 한국의 무속 신앙과 불교를 살펴본다면 종교라 할 수 없다. 절대자와 내세관이라는 기준은 서구의 기준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독교의 잣대이다. 절대자가 없이도, 내세관이 없이도 종교는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이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종교가 될 수 있다. 무속과 불교가 바로 그 예이다. 특히, 불교는 철저히 신을 부정한다. 


  "불교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스스로의 성찰로 완성되는 종교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신이란 인간의 나약과 미망을 먹고 자라는 헛것에 불과하다. 미안하지만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다."(13쪽)


  '만들어진 신'을 쓴 리처드 도킨슨이 이말을 듣는다면 너무도 기뻐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우주적 종교로 불교를 지목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불안을 먹고 사는 타종교와는 달리, 당당히 스스로 성철하며 주인이 되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도 감동적인 가르침이다. 

  개인적으로 사찰에 가면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 나의 생각과 일치한다. 물론 심오한 불교의 이론을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불교의 가르침이 나의 생각과 일치하기에 불교를 만나면 마음이 편안했던 것이다. 

  반면, 성당이나 교회에 가면 불편했던 이유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성탄절에 교회에 가서 방백을 하는 신도들을 보면서 몹시 불편했다. 사이비 종교인을 만난듯이 너무도 불편해서 자리를 떴다. 신의 종이되라는 말도 몹시 불편했다. 인생을 주인으로 살고 싶은 나에게 신의 종으로 살라니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신도를 노예로 만드는 종교보다는 모두가 주인으로 살기를 바라는 불교가 우리를 더 가치있게 만든다. 

  둘째, "절은 왜 산속에 많은가?"라는 질문이다. 선생님들과 절에 갔던 기억이 난다. 한분이 "이곳은 예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곳인가봐, 조선의 숭유억불책으로 절이 산속에 갔다잔아"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한분이 "글세요. 불교가 원래 속세를 떠나서 스님들이 수도하는 산속에 있지 않나요?"라고 맞받아쳤다. 역사를 전공했다고 자부하던 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열심히 불교 서적을 읽었지만, 절은 왜 산속에 많은가라는 질문에 의문을 던지지 않았다. 책속의 불교 지식을 흡수할 궁리만 했지, 당연한 것에 의문을 던지며 그 이유를 탐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의문이 해소되었다. 절이 산속에 많은 이유는 탈속주의와 풍수지리 때문이란다. 속세를 벗어나 수도를 하는 불교의 원래 모습을 떠올린다면 절이 산속에 많은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여기에 풍수지리설이 더해져 마치 인체에 뜸을 놓듯이, 기운을 북돋기 위해서 절과 탑을 세웠다. 여기까지 읽고 조선의 숭유억불책 때문에 절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장웅연은 절이 산속에 많은 마지막 이유를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 때문이라 말한다. 그랬구나! 불교의 탈속주의와 풍수지리, 여기에 조선의 숭유억불책이 더해져서 절이 산속에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만들어졌다. 저자는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으로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을 꼽고 있으나, 나의 생각으로는 숭유억불책은 부차적 원이으로 보인다. 지금 남아 있는 사찰들이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에 중건된 것들임을 떠올린다면 사대부들은 숭유억불을 했을지 몰라도 서민들의 삶속에 불교는 녹아들어 있었다. 

  셋째, "천도제인가, 천도재인가?"라는 주제는 제와 재의 심오한 차이를 깨닫게해주었다. 


  "불교에는 '재'만 있지 '제'는 없다. 자세히 살펴보면 '제'는 조상의 보이지 않는 도움을 받고 싶다는 일종의 투자에 가깝다. 이와 반대로 재는 철저하게 나를 버리고 비우겠다는 다짐이 먼저다. 아울러 제사상은 여인들의 명절 증후군을 발판 삼아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리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잿밥은 맨밥이어도 괜찮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눈물을 닦아 줄 수만 있다면."(233쪽)


  유교의 '제'가 조상의 음덕을 바라며 지내는 것이라면, 불교의 '재'는 죽은자와 산자 뿐만 아니라, 짐승을 포함한 만물을 위해서 지낸다. 불교의 하해와 같은 만물에 대한 사랑이 느껴진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러한 심오한 차이를 알기나 했을까?

  넷째, "무아를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윤회가 가능한가?"라는 주제에 대해서 저자 장웅연은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단지 '밀린다왕문경'의 메난드로스 왕과 학승 나가세나의 문답에 제시한 논리를 제시해주었다. 


  "촛불은 금방이라도 꺼뜨릴 수 있지만, 한 촛불이 다른 촛불로 옮겨 붙을 수도 있다. 촛불이라는 '존재'는실체가 없으나, 촛불이란 '현상'은 영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174쪽)


  '밀린다왕문경'을 소개하면서도 저자 장웅연은 '딱히 결론이 없는 주제'라고 얼버무린다. 그러나, 나는 이를 설명할 수 있다.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 윤회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별이 폭발하면서 많은 원소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원소들은 우리몸을 이루는 일부분이 되었다. 사람이 흙으로 돌아가면, 사람의 육신을 이루던 원소들은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들은 음식물을 통해서 다시 사람에게 흡수된다. 우리의 원소는 과거 수많은 위인들의 몸을 이루었다.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원소는 미래 새로운 세대의 몸을 이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윤회한다. 불교의 윤회는 과학적으로 다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책의 49가지 질문에 완벽히 대답할 수 있는 내공을 가진 사람이 몇펴센트있을까? 교사인 나에게 불교의 심오한 이론을 묻는 학생은 거의 없다.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는 학생들에게 이 책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해야하는 역사교사에게 많은 도움을 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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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추리반 - 청소년을 위한 그림 속 세계 역사
송병건 지음 / 아트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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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 수업을하면서 그림이나 사진 자료를 많이 활용한다. 학생들에게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안내하며 흥미를 유발시키는데 사진과 그림은 매우 유용하다. 서가를 거닐다가 '세계사 추리반'이라는 책이 눈에 띄였다. '청소년을 위한 그림 속 세계 역사'라는 주제가 눈에 띄여 책장을 넘겼다. 수업시간에 많이 활용했던 그림들이 눈에 띄였다. 세계사 수업 준비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책장을 넘겼다. 


  책의 수준은 높지 않았다. 중고등학생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문안한 수준의 책이다. 또한 그림을 제시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세계사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필치는 대단했다. 또한 기존에 알지 못했던 그림속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첫번째 분서갱유 관련 그림이다.분서갱유를 묘사한 그림은 모의고사 문제의 자료로 제시되기도했다.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았던 그림인데, 앗불싸! 여기에 옥의 티가 있다니 놀라웠다. 진시황제 시기의 책은 서책이 아니라 죽간이었다는 점. 진시황제의 복장이 명, 청 대의 황제 복장이라는 점 등의 오류는 참으로 유용하면서도 신선했다. 그림에 대한 세심한 분석과 관련 설명은 친절한 해설을 듣는 듯하다. 

  둘째, 1780년 '건륭제를 알현하는 매카트니경'이라는 그림에 담긴 이야기 또한 매력적이다. 조지 3세가 파견한 외교관 중에 부사 조지 스타운턴과 그의 열한살 아들 조지 토마스 스타운턴은 나의 눈길을 끌지 못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열한살 조지 토마스 스타운턴은 중국어를 배워 인사를 했을 정도로 총명한 아이였다. 그런데, 반세기 후인 1840년 중년이된 조지 토마스 스타운턴은 영국 의회에서 전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강성 정치인으로 성장하였다. 어린시절 조지 토마스 스타운턴의 눈에 비친 중국은 힘으로 짖밟아도 저항할 기력이 없는 쓰러져가는 초가집이었나 보다. 


  세계사와 그림에 관심이 있는 중고등학생이라면 재미 있게 읽을 만한 책이다. 아무런 부담없이 세계사를 즐기고 싶어하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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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 사유하고 판단하지 않는 시민에게 정치적 자유는 없다!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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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의 의미는 자유이다.(The meaning of politics is freedom)" 책의 표지에 한나 아렌트의 말이 적혀있다. 그리고 이 말은 이책의 핵심이다. 한나 아렌트에게 정치는 자유를 뜻하며 정치가 없다면 자유는 보장되지 못한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서 미국으로 탈출한 한나 아렌트에게 전체주의 탐구는 그가 밝혀야할 수수께기였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고 그녀의 지적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지난 겨울, 그녀의 또다른 대표작 '전체주의의 기원1'을 읽으며 쉽게 그녀의 아름다움을 정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지적 아름다움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정복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이진우 교수의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가의'가 나의 손에 잡혔다. 이 책을 디딤돌 삼아 그녀의 '전체주의의 기원2'를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갖았다. 그리고 그 디딤돌은 생각보다 유용했다. 


  좀비를 소재로한 영화와 드라마가 유행이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서 움직인다. 총이나 칼로 혹은 주먹으로 그들을 물리치려하지만,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며 덤벼든다. 


  "복종하면서 꼭두각시처럼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인간들의 행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31쪽)


  한나 아렌트는 그러한 좀비들을 보았다. 아무런 저항없이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가스실로 순순히 걸어들아가는 유대인과 레벤스라움을 건설하기 위해서 전차를 몰고 소련 국경을 넘는 독일인들을 보면서 한나 아렌트는 좀비를 실제 목적한 것 처럼 두려웠을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도 좀비들이 있었다.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인간 폭탄이 되어 출격했던 가미가제 특공대도 무서운 좀비들의 행렬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주변에는 좀비들이 없는가? 불행히도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좀비들이 있다. 탐욕에 눈이멀어 대한민국호를 버뮤다 삼각지대로 끌고가는 선장을 뽑은 좀비들이 있다. '나라 팔아 먹는 이완용이 출마한다고 해더라도 우리는 XXXX을 뽑겠다.'는 어리석은 아줌마의 인터뷰를 보며 우리 사회의 좀비를 보았다. 

  이들보다 더 무서운 좀비가 있다. 정치에 관해서 대화를 하려하면 '모른다.', '관심 없다.'는 말을 하며 더러운 정치에는 관심없는 순수한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좀비가 있다. 한나 아렌트의 입장에서 그들은 탄생성과 다원성이 전제되는 자유로운 사회를 스스로 부정하는 좀비들이다. 


  "현실을 생각하지 않으면 악을 불러오고 악은 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9쪽)


  선거에 관심 없고, 현실에 떨어져 사는 것을 고귀한 것처럼 생각하는 좀비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악을 불러오면서 현실을 고민하지 않는다. 또는 고민기 싫어 무조건 XXXX를 뽑거나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켜줄 악마에게 한표를 행사한다. 


  "희생자들을 실제로 죽인 것에서 알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있었던가하는 것은 그의 책임의 기준과 관련된 한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략) 살상 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71쪽)


  세월호 안에서 구조될 것이라 믿으며 죽어갔던 단원고 학생들, 즐거운 저녁을 보내려 이태원에 갔다 압사된 청년들!! 그들의 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학교 폭력을 조장하며 자신의 똘마니를 시켜 약자를 괴롭히는 일진이 있다. 좀비 똘마니가 손에 피를 뭍혔지만 자신의 손은 깨끗하다며 처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일진을 보며 한나 아렌트의 단호한 이 말이 떠오른다.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을 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

  너무나도 암담해 보이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는 없을까? 좀비들로 가득찬 대한민국호에서 좀비를 시민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우리의 사회가 아무리 부패하고 불의로 가득차 있다고 하더라도 자발적으로 행위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58쪽)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 처럼, 좀비를 시민으로 만들 수 있는 희망은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있다. 탐욕과 부정 부패가 넘쳐나는 현실을 바로잡으려 깨어있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행위'할 수 있다면 암담한 우리 현실을 바꿀 수 있다. 

  우리 주변의 좀비를 깨어있는 시민으로 일깨우고, 암담한 현실을 밝게 비추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갈등과 충돌이 두려워 절대적 진리를 구한다면, 그것은 곧 정치를 떠나는 일이다."(121쪽)


  한나 아렌트는 갈등과 충돌을 견뎌내고 조정할 줄 알아야 정치는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시기에 방송에 수 많은 토론 프로그램이 있었다. 대통령이 검사와의 대화를 하면서 갈등과 충돌을 견뎌내면서 대화와 타협으로 우리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했다. 그러나, 독재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노무현을 만만하게보았다. 민주주의라는 정치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는 말잘하는 사람이 이기는 시스템이다. 강력한 리더가 이끌어주었으면 좋겠다.'며 독재로의 회기를 갈망하기도 했다.


 "정치는 많은 사람이 지닌 차이와 이들에게 공동으로 주어진 공간을 전제한다.(111쪽)


  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주어진 공간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권위적 지도자를 불러들였다. 친일적 발언을 하는 사회 지도층 인사가 늘어났다.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일베'들이 늘어났다. 독재를 찬양하고 친일을 미화하며 독립운동가 가족을 비하하는 악마의 졸개들이 늘어났다. 


  "다원성이 버거울수록 여론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의견만 절대화하는 전체주의의 유혹이다."(127족)


  친일을 미화하는 악마의 졸개들도 다원성을 존중한다는 측면에서 그들을 존중해야할까? 5.18을 모독하는 인간 말종들의 의견마져도 존중해야할까? 아마 아닐 것이다. 유럽에서 나치를 미화하고 히틀러를 찬양하며 처벌받는다. 홍세화가 말했듯이, 똘레랑스가 허용되는 정치의 장, 자체를 뒤흔드는 무리까지 똘레랑스를 허용해서는 안된다. 

  어둠을 헤치고 좀비들 사이에서 희망의 빛을 쫓는 일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힘들다. 


  "'뿌리 뽑힌 대중'은 전체주의 운동의 자원이다. 전체주의 운동은 원자화되고 개인화된 대중의 특별한 조건에 의존하기 때문에 전체주의 운동은 이런 저런 이유로 정치조직에 대한 욕구를 가진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26쪽)


  '뿌리 뽑힌 대중'이 되지 않으려면, 뿌리 내린 대중에 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연대를 해야한다. 원자화되고 개인화된 대중은 제2의 히틀러에게 좋은 먹이감이 된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길러야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님일 깨달아야한다. 좀비 이웃과 대화하며 그들이 깨어있는 시민이 될 수 있도록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한다. 그럴때 우리는 불의의 권력에 맞설 수 있다. 


  "어떤 정권이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일 때 우리는 더욱 정치적 행위를 해야한다. 왜냐하면 "모든 권력의 감소는 폭력에 대한 공개적인 초대이기" 때문이다."(175쪽)


  검찰 폭력에 연대로 대응해야한다. 조국을 짖밟는 무리에게 우리는 연대로 대응해야한다. 그들은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자유로운 공간과 다원성을 전제로하는 정치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든다. 과연 우리의 판단은 정확한가? 소수 엘리트의 세뇌에 우리가 현혹된 것은 아닐까? 한나 아렌트의 마지막 화두는 '판단'이었다. 그녀는 '정신의 삶'이라는 책의 제3부 '판단'을 쓰려 타자기 앞에 앉았다. 타자기에 '판단'이란 제목과 두 개의 머리 인용문을 쓰고는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했다. 그녀는 '판단'의 문제를 우리에게 숙제롤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 

  이진우 교수는 그녀가 채우지 못한 빈 공간을 그녀의 이전 저서를 토대로 '판단'문제를 추론했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적 판단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관찰자'를 강조했다. 현실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한걸음 뒤로 물러섯 전체를 조망해야한다. 대중에 매몰되지 않는 관찰자이면서 현실과 유리되지 않는 참여자가 되어야한다. 한나 아렌트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아니, 다원성과 자유의 공간이 전제되는 정치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정도 비용을 지불해야한다. 댓가 없는 열매는 기대할 수 없다. 



 책장을 덮으려할 때 쯤,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인민에게 배출된 엘리트에 의한 인민의 정부"(222쪽)


  우리의 현실을 너무도 잘 설명하는 문장이다. 선거 때만 국민이 주인으로 대접받는다. 어느 거리의 철학자는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며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직접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투표할 필요를 부정하는 괴변까지 '철학자'라는 간판을 걸고 짖어댄다. 투표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완벽한 노예가 될 뿐이다. '인민에게 배출된 엘리트에 의한 인민의 정부'라 할지라도 그 공간에서 자유라는 이름의 정치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투표해야한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한다. 관찰자와 참여자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참여자가 되어야한다. '복종하면서 꼭두각시 처럼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관찰자 이면서 참여자가 되어야한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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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 완결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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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자연인일까? 어느날 28세의 청년은 도끼를 빌려 월든 호수가에 작은 집하나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 30세가 되는 해까지 살았다. 약 2년 여를 살고 '월든'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 한권으로 그는 유명 사상가의 반열에 올랐다. 텔레비젼을 켜면 재방송을하고 있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떠올리며 그의 책장을 넘겼다. 자연인 소로우를 상상하며....


  보통 5년은 넘어야 자연인 초보를 벗어났다고 평가받는다. 20년 이상 깊은 산중에서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는 자연인이 많다. 그런데, 소로우는 고작 2년여 동안 월든 호수가에 살았다. 1845년부터 1847년이라는 짧은 시기에 월든 호수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살았으니, 자연인 치고는 초보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그가 월든에 있는 2년 동안을 자연인들처럼 세상과 교류를 단절하며 살지는 않았다. 콩코드 문화회관에서 강연하고 '콩코드강과 메리맥강에서의 일주일'이라는 원고도 집필했다. 제6장 '방문객들' 편을 보면 소로우의 통나무 집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와 대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속세를 떠난 존재가 아니며 월든에서 살아가는 2년 동안 그는 여전히 세속의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완벽한 자연인이 아니라 반만 자연인이었다. 세상과 교류하며 호수가에 살았는데 그를 대단한 인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보통의 자연인들이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을 남기지 않았으나, 소로우는 글을 남겼기 때문이다. 

  '월든'은 총 18장으로 되어 있다. 이중에서 소로우의 사상을 알 수있는 부분은 제1장과 18장이다. 나머지 장들은 월든 호수가에 살면서 그가 겪거나 관찰한 자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부분은 대단히 지루하다. 그렇기에 차라리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는 것이 보다 재미있고 더 가치있을 수도 있다. 

  그의 책 이곳 저곳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동양의 고전을 인용한 글들이 많다. '논어', '맹자', '바그바드기타' 등등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동양의 철학에 의지하여 서양의 언어로 표현했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볼때 '노자'나 '장자'라는 고전을 인용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들지만, 왠일인지 소로우는 '노자'와 '장자'를 인용하지 않았다.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자연인들은 자연을 살피고 누릴뿐, 자연과의 삶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과의 인연을끊을 생각도 없고 끊지도 않았다. 월든이라는 대자연에 의탁해 살면서 경험한 내용을 소재로 책을 내어 유명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는 검소한 삶, 소박한 삶을 주문한다. 


  "우리가 털갈이하는 시기는 날짐승의 그것처럼 인생에 있어 위기의 국면일때 여야만 한다."(46쪽)


  나도 이렇게 생각했던적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살면 왕따 당하기 딱좋다. 학창시절, 허름한 옷을 입고, 기워입은 바지와 양말을 신고 초등학교에 갔다. 나의 모습을 보며 손가락질하며 비웃던 선배와 친구들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허름한 모습의 나는 여성들에게도 인끼가 없었다. 대학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내옷을 사입었다. 나름 괜찮은 옷이라 생각했으나, 친구들의 눈에는 역시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는 옷차림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옷을 사기 위해서 옷을 차려입고 백화점에 가야한다. 허름한 옷을 입고하면 매장직원은 '당신이 비싼옷을 사겠어'라는 경멸의 눈초리로 우리를 대한다. 소로우의 옷에 대한 철학은 자연인이 되어야만 실천할 수 있는 주장이다. 

  소로우의 집에 대한 생각도 알아보자. 


  "나는 철로변에 놓여있는 큰 상자를 바라보곤했다. 저런 상자를 사서 비가 올때나 밤에는 그 속에 들어가 뚜껑을 내리면 영혼 깊숙이 자유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52쪽)


  소로우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당신의 상상을 실천에 옮겼는가? 어린시절, 나의 집은 초라했다. 겨울에는 벽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와서 수건으로 구멍을 막아 놓아야했다. 벽지도 찢겨져 흙벽이 노출되었다. 아버지는 집을 다시짓지 않았다. 그당시는 이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다. 가난 때문이다.

 소로우의 상상을 읽으며 가진자의 행복한 상상이라는 생각이든다. 소로우 당신은 그렇게 살았습니까? 월든 호수에서 2년밖에 살지 않은 초보 자연인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자, 소로우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의 내 생활에 별 불편이 없다고 대답했다."(202쪽)


 이러한 그의 대답에 다시 질문하고 싶다. 아무런 불편이 없다면 당신은 왜? 월든에서 2년 밖에 살지 못했습니까? 나의 질문에 그는 아무런 대답도해주지 않았다. 그는 진정으로 월든에서의 2년을 행복하게 기억했을까? 혹시, 월든에서의 삶을 소재로 책을 출판해서 명성을 얻으려한 것은 아닌가?

소로우는 서구의 기계 문명에도 반감을 드러낸다. 


  "우리의 발명품은 흔히 진지한 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빼앗아가는 예쁘장한 장난감일 경우가 많다."(85쪽)


  우리의 발명품이 우리를 옥좨고 있다. 스마트폰이 인간의 사유를 말살하고 있다. 그런데도 미국인 소로우의 말이 달갑게 들리지는 않는다. 서구의 과학 기술문명에 아시아 아프리카인은 굴복했다. 지구상의 3분의 2의 국가가 식민지가 되었다. 먼저 서구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인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은 우리로서는 과학기술을 배우는 것은 또 다른 독립투쟁이었다. 이러한 우리에게 서양인 소로우의 말은 배부른 투정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소로우의 글이 나에게 적대감만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다. 


  "집을 마련하고 나서 농부는 그 집 때문에 더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실은 더 가난하게 되었는지 모르며, 그가 집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집이 그를 소유하게 되었는지 모른다."(58쪽)


  영끌족, 하우스 푸어가 많은 우리 현실을 생각한다면 소로우의 지적은 날카롭다. 집이 거주의목적이 아니라 투기의 대상으로 여겨지지고 있다. 탐욕은 끝이 없어서, 자기 집값이 오르길 바라면서도 종부세가 나오면 길길이 날뛴다. 속물적 속성이 역역한 우리의 자화상이다. 


  동양사상에 심취하여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했던 소로우의 삶이 나에게는 부잣집 도련님의 외출로밖에는 다가오지 못했다. 서구의 과학문명으로 동양을 식민지로 삼은, 가진자들의 여유 혹은 가진자들의 사치일 뿐이다. '월든'을 내려 놓으며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나는 자연인이다.'를 즐겨보면서 나도 자연이이 되는 것을 상상했다. 그러나, 내가 상상했던 자연인은 가진자의 투정도 아니요. 부자집 도련님의 외출도 아니었다. 


ps. 어느 정치인에게 소로우의 글귀를 헌정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무런 존경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 애국심에 불타서 소를 위해 대를 희생시키는 일이 있다. (중략) 이런 사람들에게 애국심은 그들의 머리를 파먹고 있는 구더기라고 할 수 있으리라"(4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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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2-15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봤습니다!

강나루 2023-12-17 11:4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디케의 눈물 - 대한검국에 맞선 조국의 호소
조국 지음 / 다산북스 / 2023년 8월
평점 :
품절


    검사출신 대통령이 등장했다. 매스로우가 '망치를 든 사람은 모든 것이 못으로보인다.'라고 말했듯이, 그에게는 모든 것이 수사의 대상으로 보이나 보다. '법치'의 깃발 아래, 가짜뉴스를 없애기 위해서 언론사 앞수수색이 이뤄졌다. 그렇게 언론의 자유를 말하던 언론인들도 대통령의 '법치'에 동조하듯이 숨죽이며 엎드려있다. 야당 대표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뤄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야당 대표를 '잡범'이라고 말하는 XXX도 등장했다. 정권이 바뀌고 법치는 강화되었는데 우리는 법치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러한 걸까? 왜 법치가 강조되는 사회에서 법치가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일까?


  조국 교수는 '디케의 눈물'에서 오0준 대법관의 판결을 소개한다. 그는 2011년 12월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 재판정 재직 시절 800원 을 횡령한 버스 기사를 해임한 고속버스 회사의 처분은 정당하다는 판결했다. 버스기사는 2010년 승객에게 받은 요금 6400원 중 6000원만 회사에 내고 나머지 400원을 사용해 자판기 커피를 두 차례 사셨다.(6400-6000=400원인데, 조국 교수는 800원을 횡령했다고 서술했다.) 아니, 800원 횡령했다고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기사분을 해고하다니!! 

  오0준 대법관의 판결을 읽으며 춘추 전국 시대 법가가 생각났다. 춘추전국시대! 법가들은 혈연 중심의 보수적 세력을 없애고 부국강병을 위해서 엄격한 법을 제정하고 이를 집행했다. 조그만 잘못도 국법에 따라서 처벌되었다. 그 처벌은 우리의 눈에는 참으로 가혹한 것이었다. 법에는 예외가 없었다. 귀족이라도 법에 따라 처벌받고 상을 받았다. 신분이 낮더라도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우면 상을 받았다. 법가에 따라 개혁을 하고 부국강병을 이룬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오0준 대법관의 판결에서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 단호함을 기대한 것은 나의 욕심이었을까? 조국 교수는 "오 후보자가 85만 원 상당의 접대를 받은 검사의 면직에 대해 "가혹하다"고 한 판결"했다고 소개했다. 이것 억강부약 (抑强扶弱)이라는 통치의 기본에 거스르는 판결이 아닐까? 어찌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가혹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법가가 추구했던 법치에 어긋나는 판결이다. 

  그렇다면, 조국 교수가 생각하는 '법치'는 어떠해야할까? 조국 교수는 뉴욕 시장을 세번이나 연임한 피오렐로 라과디아 뉴욕시 치안판사의 예를 소개한다. 배가 고파 빵을 훔친 어는 노파에게 10달러 벌금형을 선고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배고픈 사람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좋으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 도시 시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하며, 방청객 모두에게 각각 50센트 벌금형을 선고합니다."(133쪽)


  라과디아 판사는 벌금으로 걷은 돈으로 노인의 벌금을 냈다. 그리고 남은 돈을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이러한 판결은 법가의 판결에서도, 대한민국의 오0준 대법관에게서도 기대할 수 없는 판결이다. 나는 라과디아 판사의 판결을 읽으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법치'를 보았다. 그동안 법은 우리에게 인간의 얼굴이기 보다는 사형집행관의 얼굴이었다. 우리가 바라던 "법치"는 강자의 정의가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사랑이었다. 이를 김상준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법치는 인본을 근간으로할 때 가치가 있다. 이점에서 법치는 법가의 통치와 궤를 달리한다."(148쪽)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법치란 법가의 법치를 뜻했다. 지배의 망치로 사용될 뿐,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지팡이는 아닌 존재였다. 조국이 인용한 마르크스주의 명제 즉, (법은) '지배계급의 도구'일 뿐일까? 현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약자에는 가혹한 논리를, 강자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논리를 들이대었다. 법가 사상가 한비자도 울고갈 정도의 잣대이다. 

  플라톤은 "법이 정부의 주인이고 정부가 법의 노예라면 그 상황은 전도유망하고, 인간은 신이 국가에 퍼붓는 축복을 만끽할 것이다."(100쪽)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법이 정부의 주인이고 정부가 법의 노예'가 될 수 있게할 수 있을까? 조국은 지방 검찰청 검사장 직선제를 주장한다. "주권자 국민은 자신이 선출한 권력에 의해서만 지배받는다."(96족),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런데, 현실은 비관적으로 보인다. 나라가 망할 것 같다는 걱정을 주변사람들도 공유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나라가 망할 것 같다는 걱정을 하는 현실이 너무나도 서글프다. 이런 우리에게 조국은 무어라 말할까? 아마도 조국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을 인용해서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210쪽)라고 말할 것이다. 세상은 차가운 이성의 눈으로 바라보고 삶은 따듯한 감성으로 살아가야하지 않은까? 어둠 속에서 빛을 보는 것이 희망이 듯이, 어두운 현실 속에서 한줄기 희망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우리가 살아갈 방도이다. 


  글을 마치며 조국 교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을 소개하며 자신의 다짐을 말한다. 


  "날지 못하면 뛰어라, 뛰지 못하면 걸어라. 걷지 못하면 기어라. 무엇을 하든 계속 전진해야한다." 등에 화살이 박히고 발에 사슬이 채워진 몸이라 날지도 뛰지도 못하지만, 기어서라도 앞으로 가려고 한다.(325쪽)


  그가 기어서라도 앞으로 가길 바란다. 그가 가고자하는 길이 인간의 얼굴을 한 따뜻한 법치의 길이라면, 우리 모두 그 길을 같이 가야한다. 법치가 더 이상 강자의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당하지 않고, 시민을 보호하는 지팡이가 되는 그날까지....


ps. 조국 교수는 윤석렬 당선에 미약하나마 기여한 것으로 보이는 진중권의 말을 이책에 인용했다. 

  "윤석렬 정부는 과거 이명박, 박근혜 정부보다 더 심하다. 속았다는 느낌이 든다."(65쪽)

  이글을 읽으면서, 한때나마 지식인이라고 믿었던 진중권에게 실망했다. 진중권이 윤석렬 정부에게 속았다는 말은 진심일까? 진중권의 사람보는 눈이 나보다도 형편없는 것일까? 아니면 속은 척하면서 자기 변명을 하는 것일까? 그의 속마음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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