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살의 세계사
미즈호 레이코 지음, 장점숙 옮김 / 해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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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살의 세계사'라는 책을 처음 펼쳤을 때는 '독살'이라는 주제로 세계사를 정리하는 재미있는 책을 기대했다. 그러나, 나에게 밀려온 것은 단순한 독살 사례 모음집이라는 회의감이었다. 기대감이 높았기에 실망의 골도 깊었다.

 

1. 망치를 들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워런 버핏이 버크셔 헤셔웨이 주주 총회에서 즐겨쓰는 표현이 있다. '망치를 들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라는 말이다. 독살이라는 주제로 세계사를 살펴보니, 모든 사람들이 독살로 죽었다는 인상을 책에서 받았다. 특히 옥타비아누스가 독살을 당했다는 글귀를 보면서, 처음 들어본 주장이라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관련 내용이 없어 신빙성이 없어보였다. 빈센트 반 고흐 조차도 독살로 죽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들었다.

  이 책의 모든 글들을 비판적으로 의심하면서 읽었다. 저자의 강한 주장은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마치 이덕일이 '조선왕 독살사건'이라는 베스트 셀러를 내자, 조선사 전공 학자들이 강한 반발을 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덕일이 '조선왕 독살사건'에서 말한 것처럼 조선의 왕들이 수없이 독살되었다면, 조선은 독살 왕조였다. 미즈호 레이코의 주장처럼 독살이 이뤄졌다면, 세계사는 독살의 역사일 것이다.

 

2. 판타지 소설을 연상시키다.

  알렉산드로스가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는 주장과 독살되었다는 주장은 들어본적이 있었다. 그런데, 미즈호 레이코가 알렉산더가 아름다운 인도 아가씨를 자신의 침상으로 데리고 와서 입을 맞추는 순간 온몸에 독이 퍼져 마침내 죽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웃음이 나왔다. 어려서부터 이불 밑에 독초를 깔아 여자 아기를 독에 달련시키고, 온몸을 독덩어리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면역력이 약한 아기가 독을 가까이 하면 어려서 죽을 것이 자명한데 이러한 판타지 소설에서나 가능한 주장을 책에다 쓰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 책은 너무도 짧은 토막들이 대다수이다. 역사적 배경과 등장인물을 파악하기에는 책에서 제공하는 정보가 너무도 적었다. 단편적인 글들에게서 책을 읽는 맛을 느낄 수 없었으며, 독살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세계사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판타시 소설을 연상시키지만, 그 판타지 소설도 성의없는 판타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식힐겸, 얇고 재미있는 책을 골랐다. 그러나, 내가 내가 원하는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단지 수확이 있다면, '오리는 독을 먹어도 멀쩡히 살아 있다'라는 글귀이다. 독극물을 먹어도 오리는 죽지않는다는 주장은 '유황오리'를 알고 있었기에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았다. 독을 먹었을 때, 오리 피를 마신다던지, 동상에 오리피를 바른다는 주장을 현실에 실천할 수는 없지만, 오리고기가 '체내의 세포나 장기 속에 침착된 독도 해독시켜준다.'는 주장은 믿기로 했다. 왜냐고? 오리 먹을 때 맛있게 먹기 위해서이다. 플라시보 효과를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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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교수의 의학세계사 - 주술사부타 AI 의사까지, 세계사의 지형을 바꾼 의학의 결정적 장면들!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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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학사를 재미있게 쓴다? 이런 기대는 처음부터하지 않았다. 코로나19 펜데믹시대에 의학에 대한 기초 교양을 쌓기 위해서 책을 펼쳤을 때, 갑자기 '외치'라는 신석기인을 등장시켜, 시간여향을 한다는 발상은 수준 낮은 책으로 보이기 까지 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 의학서적의 딱딱함을 사라지고, 재미있는 의학사가 펼쳐졌다. 기존 의학사 책에서 볼 수 없는 방식의 서술은 이 책이 다른 책들과 달리 재미있는 책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자, 이 책만의 독특한 아이디어였다. 서민교수가 글을 잘 쓴다는 세간의 평가가 헛소문이 아니였음을 눈으로 확인했다. 재미와 알찬 내용이라는 두가지 토끼를 잡은 '서민 교수의 의학 세계사'라는 책의 매력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오늘의 진보적 지식이 내일도 진보적 지식일 수 있을까?

 갈레노스라는 의학자를 아는가? 갈레노스는 고대의학을 완성하고, 실험 생리학을 창시한 사람이다. 그는 로마시대 위대한 의사였다. 그의 의학은 르네상스 시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의학지식이 쌓여가는데도 갈레노스가 주장한 이론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이에 대항하는 학설을 철저히 무시하는 카르텔이 형성되었다. 갈레노스가 체액 불균형이 질병을 일으키며, 사혈을 통해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주장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사람이 파라셀수스다. 그는 갈레노스에 대항한 댓가로 바젤대학교수 자리에서 쫓겨냐야 했다. 용감히 자신의 주장을 하는 고집강한 파라셀수스는 외치가 보는 앞에서 경비원에 의해서 대학밖으로 쫓겨났다.

  한시대의 진보적 학자의 주장이 다음 세대에서 기득권자의 이익을 지키는 보수의 성벽으로 변한 못브을 바라보며,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학문은 끊임 없이 토론과 대화가 오고가야한다. 비판이 허락되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다. 파라셀수스는 죽어가는 의학에 생명을 불어 넣으려 발악을 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무시 뿐이었다.

  산욕열의 원인이 부검한 의사가 손을 씻지 않고 산모를 만졌기 때문이라 주장한 제멜바이스도 파라셀수스아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이라는 책에서는 제멜바이스가 동료들로 부터 무시를 당한 것이, 산모의 죽음이 의사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라고 주장했다. 반면, 서민교수는 제멜바이스의 성격탓으로 돌리고 있다. 파라셀수스와 갈레노스는 앞선 의료 지식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으며, 오만하고 화를 잘 냈기에 동료 의사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어느 글 맞을까? 두 입장이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으로 판단된다. 잘못된 기존 의학지식에 도전하려면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말할 수 밖에 없으며, 자신의 기존 지식이 틀렸다고 말하는 동료 의사를 좋은 모습으로 볼리 없다. 한비자 '세난편'에 유세의 힘듬을 지적한 글이 있다. 상대를 설득하려면, 상대의 심리를 비롯한 갖가지 것들을 고려하여 조심스럽게 말해야한다. 이것은 유세가가 군주에게 하는 말에만 해당하지 않았다. 동료의사들에게 새로운 의학지식을 말할때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직장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이 일이라가 보다는, 인간관계라는 푸념이 있는 것처럼, 좋은 의학지식을 개발하는 것 못지 않은 것이 바로 그 의학지식을 동료 의사들에게 잘 설명하는 것이었다.

 

2. 누구를 위한 의학 발전인가?

의학이 발전하면, 많은 인류가 보다 건강하게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의학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생체실험을 보면, 과연 누구를 위한 의학 벌전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나치나 일제에 의해서 행해진 생체실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1945년 미국 테네시주에서는 829명의 임산불르 대상으로 한 방사능 실험이 있었으며, 1932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600명을 대상으로 매독실험을 시작했다. 무려 40년 동안 진행된 이 실험 기간 동안 그들은 페니실린이라는 치료제가 있다는 사실도 모른체 고통을 당해야했다. 과학자나 의사들이 '의학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비윤리적인 생체심험을 현대에도 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과학은 발전하는데, 인간의 윤리는 과연 발전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그렇다면, 지금은 의학계의 비윤리성이 사라졌을까? 세계적 제약 회사가 제3세 국가에게 남몰래 행하는 신약 실험을 비롯해서, 중국 사형수 장기적출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의학계의 아니, 인간의 윤리의식은 발전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중국 사형수의 몸에서 적출된 장기는 서구의 돈많은 사람들에게 이식된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덕성 조차 무시하는 현실을 바라보면 심한 자괴감을 갖게 한다. 특히, 중국 사형수의 장기를 밀매매하는 소위 '서구 선진국'이라는 사람들에게 제3세계의 인류는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가 보다. 미국에서 싼값에 장기 이식을 받을 수 있다는 꾐에 빠진 '외치'는 장기 밀매 업자에게 납치되어 서서히 정신이 혼미해져간다. 사실은 정신이 혼미해져가는 '외치'의 모습이 우리 인류의 도덕의식은 아닐까?

 

3. 민간요법에서 새로운 신약을 얻을 수는 없을까?

대학시절 의대를 다니는 형과 기숙사에서 한방을 썼을 때가 있다. 그형에게 한의사와 손을 잡고, 한의학을 현대화 할 생각은 없는가? 라는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한의사가 뭘안다고 그들과 손을잡나?"라는 말을 했다. 병원에 잘못된 한약을 먹고 실려온 사람이 많고, 한약재들의 상당수가 몰핀계열이기에 당장은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부작용이 많다는 주장이다. 어려서부터 침과 한약으로 치료를 받아온 나로서는 의대생 형의 말이 매우 낯설었다. 사실 한의학과 양의학의 싸움이 심한 곳이 우리 대한민국이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양의사와 한의사의 목표라면, 질병과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힘을 합쳐야할 텐데 둘의 사이는 너무도 멀다. '세계 인구의 4분의 3이 약초로 치료하는 전통의학에 의존하고 있다.'는 세계 보건 기구의 발표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의학은 인류에게 현대의학이 미치지 않는 곳에 의료 혜택을 주고 있다.

  현대의학이 한의학을 비롯한 민간요법을 현대화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서민교수는 시간과 돈의 문제도 보고 있다. 민간요법이 '이 식물을 먹어 몸에 좋대'라고 표현한다면, 현대 의학은 '이 식물에서 추출한 A라는 성분을 먹으면 암이 나을 확률이 70%야'라고 표현한다. 이것이 과학적 표현일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보다 정교한 연구와 광범위한 실험이 있어야한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양의사가 한의학적 처방을 할 수 없다.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에 의해서 세계적 펜데믹 상태에 빠져든 지구인을 위해서, 기존의 한약재 속의 치료물질을 추출하여 의학발전에 기여하는 방법이 계속되길 바란다. 전통적 한의학의 언어를 현대 의학적 언어로 바꾸어 인류의 질병을 치료하는데 기여한다면 해볼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4.  제너가 종두법을 개발한 것인 사실일까?

제너가 종두법을 개발했다는 영애를 누리는 것은 당여하다고 생각한다. 보통은 말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벤저민 제스터라는 농부가 그의 가족에게 종두법을 접종했으며, 존 퓨스터도 "우두도 천연두를 막아주는 게 아닌가?"라고 동료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벤저민 제스터와 존 퓨스터에게 당연히 돌아가야할 종두법 개발자라는 영예가 제너에게 돌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벤저민 제스터는 가족에게만 우두 접종을 했으며, 존 퓨스터는 마마접종으로 돈버는 일에만 몰두하여 우두백신에 대한 연구는 하지 않았다.

  반면 제너는 영국 전역을 돌며 자신의 이론을 증명했고 논문으로 발표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라는 법학 격언이 있다. 아무리 우두를 처음 개발한 자가 벤저민 제스터와 존 퓨스터라 할지라도, 자신의 업적을 인류를 위해서 보급시키지 않았다면, 종두법 개발자라는 영예를 누릴 자격이 없다. 우리는 의술을 자기 가족만의 안정을 위해서, 혹은 자신의 부를 위해서만 사용하는 자까지 기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세계적 영예를 얻기 이전에 이미 가족과 부로써 충분히 혜택을 누렸을 테니까 말이다.

 

 

심장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서 시간여행을 시작한 '외치'는 대한민국에서 수술을 받는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이 탁월한 의료시스템과 세계 최고의 의료보험제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에 가는데 돈이 들지는 않지만, 의사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서 너무도 오래 기다려야하는 영국, 민간의료보험에게 의료현장을 맡긴 미국의 경우는 치료를 받는데 너무도 돈이 많이 들어 가난한 사람은 제대로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의료보험 시스템은 코로나 19가 일으킨 혼란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의료인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질본의 활약, 그리고 의료보험 시스템이 한국을 구했다. 만약 의료 민영화를 하려했던 보수 정권이 계속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면, 우리도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아갈 뻔했다.

  의학기술은 계속 발전한다. 그러나, 의료 윤리와 의료 시스템이 계속 발전한다고 장담할수는 없다. 선진국의 돈많은 부자를 살리기 위해서 제약회사가 돈없는 제3세계에서 신약실험을 한다던가, 앞선 의료 시스템에라 믿었던 유럽과 미국의 의료시스템이 코로나 19앞에서 무기력한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제 무엇을 위해서 의학과 의료시스템을 발전시켜야하는가?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해야할 때이다.  

ps. 서민교수가 재미있는 의학사 책을 썼지만, 옥의 티가 보인다. '외치'가 시간 여행하는 모습들이 SF 소설에 비해서 조금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이책이 SF소설이 아니기에 이쯤은 애교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의학사 책인데, "유의태 밑에서 배우겠다고 간청했던 허준"(80쪽)이라는 표현은 심각한 오류이다. KBS 역사스페셜에서 다루었듯이, 유의태는 유이태가 본명이며, 허준이 태어난진 백여년 이후에 태어난 의원이었다. 전설을 사실로 믿고 의학사를 서술한 점은 심각한 문제점이다. 이 옥의티를 수정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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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치 세계사 - 세상을 설득한 명연설 50편으로 현대사를 읽다
앤드루 버넷 지음, 정미나 옮김 / 휴머니스트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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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많은 대중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현명한 리더는 명연설로 그들을 행동으로 이끈다. 베나지르 부토는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인용해서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키는자들에게 예약된 자리이다."라고 말했다. 현실의 불의를 보면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복지부동하는 대다수의 대중들에게 이 말은 강한 힘을 발휘한다. 세상이 변하려면 대다수의 대중을 움직여야한다. 그들이 자신의 가슴속에 담겨져 있는 정의에 대한 정의라는 불꽃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스피치 세계사'에서는 나약한 대중들의 가슴속에 잠들어 있는 거인을 일깨우는 명연설 50편이 실려 있다. 때로는 수준이 낮고 지루한 연설도 있지만, 때로는 나의 가슴을 활활 타오르게 만기도 했다. 그 연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우리의 가슴과 심장을 깨우는 연설.

 

"나의 재능을 모르겠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요즘 학생들이 진로 관련된 상담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들이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회에서 요구하는 안정된 직업, 혹은 사회에서 선망하는 직업을 선택한다. 자신의 가슴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기 보다는 사회나 부모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도구로 삶을 살아가는 학생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 사회가 열망하는 의사라는 꿈을 이루고도,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혁명가가 된 사람이 있다. 체 게바라!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 평했다.

 

"우리는 한 인간의 생명이 세계 최고 갑부의 모든 재산을 합한 것보다 백만배는 더 귀하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깨닭았습니다."-177

 

사회적 명성과 돈을 벌기 위한 도구로 의사가 되기보다는, 생명을 살리는 숭고한 일에 종사하기 위해서 의사가 되었고, 보다 많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해서 혁명의 길을 선택했다.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세계의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그는 살아 있다.

우리사회에는 체 게바라와 같이 생명을 존중하는 숭고한 의사가 얼마나 될까? 뉴스에 나오는 함량 미달의 의사들과, 동료 여학생을 성추행하는 의대생들을 보며 절망감을 가졌다. 그런데, 코로나 19 사태가 벌어지고, 대구가 위기에 빠지자, 병원문을 닫고 대구로 달려간 의료진들을 보며 세상은 살만하다는 생각을 갖았다. 묵묵히 자신의 삶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인술을 펼치는 그들의 숭고함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아마도, 사회적 명성을 따라서, 사회적 부를 따라서 의대에 진학한 학생이라 하더라도, 학생의 가슴속에 잠들어 있는 숭고함이 위기의 상황속에 빛을 발했으리라.

가슴을 고통치게 만드는 일에 자신의 운명을 바친 사람이 또 있다. 바로 스티브 잡스이다.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상세히 말한다. 자신이 입양아였으며, 양부모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노동자였다. 결국, 평생 모은 돈을 자신의 대학 학자금으로 써야하는 양부모를 생각해서 6개월만에 대학을 중퇴한다. 그후, 자신의 가슴을 끌어당기는 캘리그라피 수업을 듣는다. 이는 매킨토시 설계에 유용하게 쓰여진다. 돈이 되는 일을 쫓아다니는 평범한 학생들에 비해서 그는 자신의 가슴을 끌어당기는 일에 열정을 불살랐다.

 

"사소한 일들이 이어져 길을 내준다고 믿으면 가슴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자신감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351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살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355

 

사회적 욕망과, 부모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삶을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연설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은 스스로 많은 시간과 열정, 노력을 쏟아 붓게 된다. 비록 많은 돈을 벌어주지는 못할지라도, 자신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준다. 스탠포드 대학생들에게 스티브 잡스는 내가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고, 들려주고 있는 말을 그의 삶에 녹여서 말하고 있었다.

 

2. 대중을 악의 길로 이끄는 연설의 힘

 

우리의 열정을 일깨우는 명연설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명연설로 독일인을 비롯한 유럽의 무고한 시민들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은 사람이 있다. 바로 히틀러다. 그리고 그의 밑에서 앞장서서 독일인을 전쟁터로 떠민 사람이 있다. 이 책에 소개된 하인리히 힘러도 그중 한사람이다. 그는 친위대 장교를 모아 놓고, 유대민족을 말살하겠다고 당당히 연설을 한다.

 

"이런 과업을 끝까지 완수해 나가면서도 인간의 나약함은 벗어던진 가운데 인간성을 지키기란 우리로서도 힘든 일이지만, 그것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영광의 한 페이지를 역사에 남기는 일이다."-96

 

이미 인간성을 잃어버린 나치가 인간성을 말하니 참으로 가소로울 뿐이다. 이 연설을 들으며, 용기 있게 "아니요"를 외친 사람은 없다. 독일의 상당수 시민들은 나치편이 되어 '신념'을 갖고 행동했다. 대중 선동에 놀아난 사람도 있고, 나치의 신념을 자신의 신념으로 만든 사람도 있다.

니체가 '악마와 싸우는 사람은 악마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우리가 악마를 들여다보면, 악마도 우리의 심연을 들어다 본다.'라는 말을 했다. 히틀러와 싸우는 스탈린도 히틀러와 닮아가고 있었다. 아니, 이미 히틀러와 스탈린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노동자는 독일 파시즘에 대항하는 이 애국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자유와 명예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분발해야합니다."-85

 

이오지프 스탈린은 독일 히틀러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노동자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스탈린은 재능 있는 군 지휘관을 숙청하고 독일 침공 가능성을 말하는 자를 죽였다. 스탈린 자신의 잘못은 말하지 않고 독일의 공격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가 '모든 노동자는 독일 파시즘에 대항'하라는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세계 대전이 끝나고, 히틀러가 죽음으로서 악의 세력은 사라졌을까? 니체의 말처럼, 나치에 혹독히 당한 유대인은 나치가 유대인에게 했던 죄악을 학습했다. 2천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을 힘으로 몰아내고 장벽을 쌓고 심지어는 폭격을 당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언덕에 올라 바라보며 환호한다. 나치라는 악마와 싸우면서 나치가 유대인의 심연을 바라보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이 책에 다비드 벤구리온의 연설이 실려 있다. "오늘 우리는 이 용맹의 길을 개통합니다."라는 연설을 설명하며, 팔레스타인인들이 무침히 짓밟히 있는 현실을 '현장 속으로'에서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단순히 연설만을 모아 놓는다면, 잡탕을 면치 못한다. 제대로 된 관점을 가지고 진실을 말해야한다는 점을 저자가 유념하길 바란다.

제국주의자의 추악한 모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영국 총리 앤서니 이든은 "국가로서 우리의 존립은 석유에 달렸"다고 강조하며, 수에즈 운하를 지키기 위해서 군대를 파병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평화주의자로 살며 평화를 위해 힘쓰고 평화를 위해 투쟁하고 평화를 위해 협상"해왔다고 강변한다.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유산인 '수에즈 운하'를 지키기 위해서 침략전쟁을 하면서도 자신을 '평화주의자'라고 말하는 영국 신사의 위선적인 모습에 구역질이 난다. 중국에 아편을 팔았던 잘못을 뉘우치기 보다는 자유무역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중국을 공격한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전형적인 제국주의자들의 모습이다. 보수당 당수 해럴드 맥밀런의 연설은 오만한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식민지 영토 곳곳에서는 현재 자치제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중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상황에 자부심을 가져 마땅합니다. 바로 우리가 그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그 길로 들어서게 해준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156

 

수많은 제3세계 국가를 침략하고 자원을 약탈하고, 그들을 노예로 만든 대영제국이 과거의 반성과 배상을 하기는 커녕, 자신들의 침략 덕분에 피식민지 국가가 잠에서 깨어나 앞으로 아가고 있다고 괴변을 펼치고 있다. '백인의 짐'이라고 영국 제국주의를 미화시켰던 제국주의 유산을 그들은 청소하지 않고 있다. 반성이 없는 오늘은 과거의 잘못을 내일에 펼쳐 놓을 것이다.

 

3. 대중에게 희망을 주는 리더의 말

희망은 어둠속에서 빛을 보는 것과 같다. 현실은 어둠속에 있지만, 리더는 그곳에서 한줄기 빛과 같은 말을 해야한다. 리더가 어떠한 비젼을 제시하느냐에 따라서, 대중은 절망할 수도, 희망을 발견할 수도 있다. 1939년 네빌 체임벌린은 라디오 방송으로 독일과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영국국민에게 설명했다. 국민들로서는 1차 세계 대전의 악몽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을 것이다. 연설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이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한 것은 대공항 시기 프랭클린 루스밸트의 연설일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단 하나, 두려움 그 자체뿐입니다."-47

 

노변담화로 알려진 루스밸트의 연설은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미국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들었다. 연설을 하는 루스밸트 자신이 소아마비를 앓았기에 미국인들은 그의 말에 더욱 신뢰감을 갖았을 것이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세계는 제2의 경제 대공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이 어둠의 터널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루스밸트가 말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단 하나,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는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효율적인 방역을 통해서 안전한 대한민국, 방역 선진국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고 있는 지금, 한국의 지도자들도 우리가 세계의 리더가 될 수 있으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우리가 선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국민들 가슴에 심어주어야할 것이다. 현실이 아무리 캄캄하더라도 한줄기 희망이 주어진다면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말로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경우도 있다.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는 처칠로 부터 제대로 인정을 받지도 못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밸트는 처음에 비시 정부를 인정하기도 했다. 비시 정부를 중심으로 프랑스를 바라보면, 프랑스는 나치의 피해국가가 아니라, 나치 협력국가라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 프랑스군이 파리에 먼저 입성하면서 샤를 드골은 프랑스 역사에 남을 만한 명연설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파리를 장악했던 적이 우리에게 항복을 선언했으므로 프랑스는 다시 파리의 보금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102

 

연합군의 압도적인 힘에 의지해서 파리를 해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가 머뭇거리는 사이 파리를 점령한 샤를 드골은, 이 명연설을 통해서 그들만의 '신화'를 완성했다. 이 신화로 인해서, 프랑스는 나치 협력국에서, 나치 피해국으로 자리 이동을 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비해서, 우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독수리작전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샤를 드골이 했던 명연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고, 강대국의 손아귀에 한반도의 운명을 내맞길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샤를 드골을 보면서 우리는 왜? 그러하지 못했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냉전시대가 도래한다. 같은 공산주의 국가라 할지라도, 소련과 북한의 모습은 너무도 다르다. 소련이 스탈린 개인 숭배를 비판하며 독립국가 연합으로 재탄생했다면, 북한은 지금도 김일성 개인숭배를 거쳐서, 백두혈통이라는 신화를 통해서 북한인민을 다스리고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니키타 흐루쇼프의 연설에서 찾을 수 있다.

 

"스탈린은 설득하고 설명하고 끈기 있게 협력하는 식이 아니라 자기 개념을 강요하고 자기 의견에 절대적 복종을 요구했습니다."-128

"차르들 조차 본인의 이름을 딴 상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133

"동지 여러분, 개인숭배를 단호하고 확실하게 뿌리 뽑아야 합니다."-134

 

스탈린 치하의 혹독한 폭압정치 속에 살아던 민중들로서는 스탈린이 죽었다 하더라도 스탈린을 비판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이때, 용기 있는 리더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이겨내야 홀로 설 수 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격하시킴으로서, 소련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공산주의라는 과거의 사슬에서 벗어나, 새롭게 독립국가 연합 혹은 러시아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반면, 북한은 3대 세습을 하면서 김일성의 그림자에 그대어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다. 소련이라는 껍데기를 버리고 러시아로 다시 태어났듯이, 북한도 새롭게 태어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그늘에 안주한 아들은 아버지를 뛰어 넘어 홀로설 수 없다. 리더의 용기 있는 한마디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을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북한의 물줄기는 바뀌지 않을 것인가?

 

4. 희망을 주는 약자들의 외침

강자의 명연설에는 힘이 있지만, 약자의 명연설에는 감동이 있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회적 약자가 있다. 그들의 외침이 사회를 바꿔 놓기도 하지만, 공허한 메아리만을 남길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약자의 메아리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사회적 약자를 꼽자면, 여성을 빼 놓을 수 있다. 물론, 남성보다 더 많은 힘과 권력을 쥔 여성도 있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에 비해서 사회적 약자인 것은 사실이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드높힌 여성이 있다. 바로 애멀린 팽크허스트이다.

 

"국가의 통치에 여성의 관점이 반영될 수 있도록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져야 합니다."-16

"남성 유권자와 남성 입법자 들은 남성의 욕구를 우선시하며 여성의 욕구는 무시하고 있습니다. 여성이 투표권을 얻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이런 현상이 계속될 것입니다."-20

 

투표권은 권력이다. 투표권이 없는 존재는 정치인으로부터 아무런 관심을 얻지 못한다. 시골 경로당에 밥을 해먹으라고 돈과 쌀이 정부로부터 나온다. 경로당에 대한 복지가 이렇게 잘되어 있는 것은 노인들이 투표권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투표권이 없었을 때, 여성의 일에 관심을 갖을 정치인이 몇이나 되었을까? 그들은 여성의 일에 관심도, 이해도 할 수 없었다. 이 연설에 소개된 일화에 따르면, 어떤 미혼모가 가정부 일을 다니느라 아이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식을 유기한 죄로 3개월 형에 처해졌다. 남자들로 구성된 치안판사단은 미혼모의 급여에도 관심이 없었고, 미혼모의 남편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미혼모가 자녀를 양육해야한다는 사실만을 생각할 뿐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한계였다.

미혼모의 사례는 사회적 약자가 자신을 대변할 대표를 국회에 보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려준다. 고양이가 쥐를 위한 법을 만들리 없다. 한나 아렌트도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말했듯이,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비참한 일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이 괴로울수록 사회적 약자는 정치에 관심을 갖아야한다.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현실은 더욱 괴로워질 것이다.

국제사회의 약자로 눈을 돌려보자. 국제사회의 약자는 팔레스타인을 꼽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폭력 앞에 무참히 당하고만 있어야하는 팔레스타인의 비극에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는 해도 도움의 손길을 내주지는 않는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국가 수반은 비정부기구 대표로서는 최초로 유엔 총회에 연설자로 초청받았다.

 

"오늘 저는 올리브 가지와 자유 전사의 총을 들고 왔습니다. 이 가지가 제 손에서 떨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243

 

누가 자신의 몸에 폭탄을 짊어지고 스위치를 누르고 싶겠는가? 우리는 테러라는 현상만을 보고 폭력을 비난한다. 그러나, 그 폭력 너머에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은 보지 못한다. 돌과 불타는 타이어를 던지는 팔레스타인 어린이에게 소총사격을 하는 이스라엘 병사를 보라. 팔레스타인 사람이 자고 있는 집을 갑자기 포크레인으로 밀어 버리는 이스라엘인들을 보라. 팔레스타인을 폭격하는 모습을 보며 환호하는 그들을 보면서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을 던져본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제발 우리가 테러라는 수단을 사용하지 않도록 도움을 달라고 절규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여성 정치인 베나지르 부토는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유엔세계 여성회의에서 국제사회의 약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정의는 정치적 자유이자, 경제적 독립이자, 사회적 평등입니다."-322

 

그렇다. 팔레스타인은 정치적 자유가 없고, 여성은 경제적 독립과 사회적 평등이 제공되고 있지 않다. "민주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라는 부토의 말이 옳다. 우리는 일제로부터 정치적 자유를 되찾고 나서, 민주주의만을 외쳤다. 민주화만 되면 모든 것이 완벽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만으로는 부족했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이상향으로 가기위한 다리에 불과했다. '스피치 세계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명연설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이다. 더 이상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꿈꾸게 하는 연설이다. 모두가 함께 평등하게 어울려 행복하게 사는 미래를 꿈꾸는 것이 더 이상 꿈이 아닌 세상이 도래하길 바래본다.

 

'스피치 세계사'는 세계적 명연설을 모아 놓았다. 같은 명연설이라 할지라도, 강대국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없는 명문장이지만, 우리의 눈으로 바라볼 경우, 제국주의적 냄새가 물신 풍기는 상한 음식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이 책의 서평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사회를 보다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할 한문장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겠다.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아일랜드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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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 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 1
조승연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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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개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두개의 영혼을 갖는 것과 같다." 샤를마뉴의 말이다. 청소년기! 영어와 일본어를 배우면서 어학공부의 재미를 알지 못했다. 언어에는 우리의 혼이 담겨 있기에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우리말을 지키려 노력했다는 말의 참의미도 깨닫지 못했다.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을 읽으며 알았다. 샤를마뉴의 말처럼, 새로운 언어를 안다는 것은 새로운 영혼을 갖는 일이기에, 우리의 언어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일이라는 사실도 이해가 갔다. 언어천재 조승연의 언어를 통해서 인문학의 재미에 빠져보자.

 

  조승연은 다양한 영어 어원들을 탐구하며 그 본래의 뜻과 그 뜻이 변천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단어에도 인문학이 녹아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조승연의 안내를 받아 탐구하는 언어 인문학의 세계는 재미와 즐거움으로 가득찼다.

  학생들에게 바로크 미술과 로로코 미술을 가르칠 때, '바로크'와 '로코코'의 뜻을 설명해준다면 학생들의 이해가 빠를 것이라 생각해서, 인터넷에서 그 뜻을 검색했던 적이 있다. '바로크'는 찌그러진 여드름'이고, '로코코'는 '조개껍질'이라는 뜻이었다. 어원을 알면 쉽게 이해되리라 생각했던 나의 생각은 역효과를 불러냈다. 결국, 어원을 학생들에게 설명하지 않고 수업을 했다. 왜? 절대왕정기의 바로크 양식과 귀족적인 로코코 양식이 이렇게 초라한 어원을 가지고 있을까? 의문을 가졌지만, 의문을 해소할 길은 없었다.

  그 의문을 해소한 것은 바로 이책을 읽고서 해소되었다. '바로크'가 포르투칼어로 '찌글찌글한 여드름 같다.'라는 뜻인데, 해녀들이 흔히 쓰는 도저히 팔수 없는 못생긴 진주라고 하는 말을 가져다 붙인 이름이고, 로코코는 '조개껍질'이라는 뜻으로 당시의 미술이 조개껍질 같다라는 의미로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한다. 즉, 미술은 한시대를 앞서가기에 기존의 미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미술양식이 추하고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미술 사조에 대한 이름이 좋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서 나의 머리는 상쾌해졌다. 어원을 통해서 한단어를 인문학적으로 탐구하며,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들의 문화와 예술, 신화, 역사에 대한 공부가 자연스럽에 이루어졌다. 새로운 언어를 안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로 걸어들어갈 수 있는 길을 아는 것이다.

   Thank you라는 말을 통해서도 서양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thank는 think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Thank you"는 네가 해준 일을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겠다.라는 뜻이다. You're welcome라는 말의 welcome는 well과  come라는 뜻이 합쳐진 말로써, 너는 손님이니 빛이 아니다.라는 듯이 담겨있다. "excuse me"라는 말에는 제발 법적인 조치에서 저를 빼주세요. 라는 뜻이 담겨있다. 학교에서 배운대로 기계적 암기를 했다면 그 숨겨진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에서는 그 어원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고, 이를 통해서 서양인들의 정신세계에는 "Give and take"가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조승연은 여기에 그들이 부부사이에도 조그만 일에 "please"와 "Thank you"를 붙이지 않으면 화났다고 생각한다는 일화를 곁들인다. 결국 외국인 남성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은 문화차이를 극복못하고 이혼한다. Do ut des.(도 우트 데스. 네가 주기 때문에 나도 준다.) "라틴어 수업"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알게된 단어다. 서구법의 기본원리가 된 이 원칙이 그들의 삶에도 녹아 있었다. 모든 것에 공짜는 없다. 상호성의 원칙이 언어와 삶에 녹아있다는 사실은 우리와 다른 점이다. 다르기에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언어 인문학을 알아야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일으면서도 왜? 영어 제목이 "The Prince"인지에 대해서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저자가 의역을 해서 우리에게 '군주론'으로 알려졌겠지.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prince의 어원이 premier이라는 사실과 The prince of Monaco(모나코 국왕), Charles, prince of wales(찰스 왕자)라는 표현을 알고 나서야 "Prince"라는 단어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Prince라는 단어가 국왕에서 왕자로 의미가 변천된 연원이 영국이 웨일스를 병합하기 위해서 즉, 에드워드 왕이 자신의 아들 찰스를 웨일스 계승자로 정하면서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모든 의문점이 해소되었다. 그 단어의 역사를 알아야 진정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Booting라는 단어를 조승연은 문차우젠 백작의 일화에서 생겨난 단어라 설명한다.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당겼 끌어올렸다는 일화에서 생겨난 단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어령 교수는 말을 타기 전에 부츠를 신어야 한다는 것에서 온 것이라 설명했다. 말을 타기위해서 부츠를 신어야하듯이, 컴퓨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버튼을 눌러야하기에 부팅이라는 단어가 컴퓨터에 사용되었다는 설명이다. 조승연의 설명보다 이어령 교수의 설명이 간단하면서도 이해가 잘되었다. 아마도, 단어의 어원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으니, 두사람의 주장은 학설의 차이로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이라는 책은 언어를 배우는 것이 새로운 영혼을 얻는 길이며,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특히, 언어를 배울 때는 단순 암기식으로 공부하기 보다는 인문학을 탐구하듯이 그 단어의 어원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해주었다. 조승연의 '비즈니스 인문학'이라는 책도 읽고 싶어졌다. 그래, 단어의 어원을 공부하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며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자.

 

ps. 옥에도 티가 있듯이, 이 책에도 약간의 오류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아테네는 간접민주국가였다."

=> 아테네는 직접 민주국가이다. 인구가 적었던 아테네는 직접 민주정치를 할 수 있었으나, 현대국가에서는 장소와 많은 인구수로 인해서 국민의 대표가 정치를 하는 간접민주정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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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가면의 제국 - 오리엔탈리즘, 서구 중심의 역사를 넘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진보적 역사선생님들 중에서 박노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던져주는 한국사회에 대한 촌철살인은 너무도 아프지만, 미처 보지 못했던 우리의 다른 모습을 성찰하게 해준다. 제국주의 국가의 피해자로 스스로를 자리메김하고 우리사회에 대한 비판적 지적에 대해서 히스테리적 반응을 보였던 나를 되돌아 보았다. 지금까지 읽은 박노자의 책중에서 이 책이 가장 탁월했다. 그의 조국인 러시아에서 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조국인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탐구하고, 현자 자신의 터전인 노르웨이와 그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를 심도 있게 파헤치고 미쳐 보지 못한 치부를 들춰냈다. 박노자의 매력속으로 들어가 보자.

 

1. 하얀가면을 벗는 방법.

 책장을 펼치자 "우리 모두의 스승인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칩니다."라는 글 귀가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는 그의 날카로움은 에드워드 사이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이 책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오리엔탈리즘'이다. 서구인들이 동을 바라보는 편견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오리엔탈리즘과 동양인이 서양인을 바라보는 왜곡된 편견을 뜻하는 옥시덴탈리즘이라는 창을 통해서 박노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많은 진실들을 보고 있다. 구체적으로 박노자의 글을 통해서 그가 사회를 바라보는 방법을 살펴보자.

 

"1. 우리의 통념은 대개 19세기 서구 중심적 - 그리고 보통 자본주의 옹호론적 - 사회과학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당연한 '것도 자연발생적인 것도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중략)

 2. 우리의 사회 정치적 현실을 경정짓는 가장 주용한 기구인 국가는, 사회적 폭력을 독점하는 만큼 늘 각종 폭력을 행사하거나 잠재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위험하고 몰도덕적인 것이다. (중략)

 3. 근대의 서구 중심 세계 체제 전체가 문제시된다면 근대 패러다음 속의 대립적 개념들의 이분법들 - 예컨대 '반동'과 '혁명'의 이분법 - 도 상대화, 지양돼야 할 것이다. (중략)

 4. 하얀 가면에 갇힌 눈들은 늘 '중심' - 즉 서구적인 부강 과학 합리성을 가장 가시적으로 표상하는 쪽 - 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하얀 가면을 벗어던지려면 '중심'의 주술에서 깨어나고 지배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는 '반란적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야 할 것이다.(하략)"20-24쪽

 

  박노자가 제시한 하얀가면을 벗는 방법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의 관념을 의심하고 국가를 의심하고 국가가 제시한 이데올로기를 의심하며, 중심에서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한 한다. 주입된 이데올로기를 맹신하고 국가를 절대선으로 생각한다면 아무런 고통없이 행복하게 살다가 죽어갈 수 있다. 그 죽음이 국가의 폭력에 의한 죽음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박노자가 제시한 방법에 따라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하면 우리는 기존에 겪어보지 못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느꼈던 혼란과 놀라움을 견뎌내야한다. 아이가 어머니 배속에서 나오려면 좁은 산도를 거쳐야한다. 그리고 어머니 배속을 힘겹게 나와야만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해서는 박노자가 제시한 방법을 따라가 보려 한다.

 

2. 가면을 벗은 진실들

박노자는 세상의 모든 가면들을 벗겨 버린다. 박노자에 의해서 벗겨진 가면들은 충격적이었다. 내가 미쳐 바라보지 못했던 것들을 그는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박노자가 벗겨버린 가면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홀로코스트와 유대인이 쓰고 있는 가면이다. 박노자 자신이 소련출신의 유대인이 아닌가? 유대인들에게 홀로코스트의 가면을 벗어던지는 질문 자체가 위험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데도 박노자는 당당히 홀로코스트와 유대인에게 덧씌워진 가면을 벗어던진다.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를 말할 때, '세계사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박노자는 말한다. 과연? 홀로코스트에서 벌어진 대학살이 '세계사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일까? 아니었다. 절대왕권과 자본주의 국가들이 비서구권에 대해 저질러온 학살, 유럽인들이 미주 대륙의 토착 인구에 쓴 무기와 이들을 노예화한 것, 영국의 지배로 인한 인도의 황폐화(19세기 아사자 수는 1천만 명 이상), 영국의 아편 강매로 인한 중국의 아편 중족 유행(희생자 수를 1천만 명 이상으로 추산)은 홀로코스트를 능가한다. 어디 그뿐이랴? 박노자가 예로들지 않았지만, 일제의 난징 대학살, 일제의 남한 대토벌작전, 한국의 보도연맹 사건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대규모 살육이 행해졌다.

  역사는 선택적으로 호출된다. 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서 말했듯이, 역사는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호출된다. 유대인은 이스라엘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홀로코스트 만을 호출했다. 이때 히틀러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이름없는 집시와 공산주의자들은 제외되었다. 박노자는 말한다. 절대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란 폭력을 독점한 조직이다. 이 조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한다. 그 폭력이 사회적으로 합리적 폭력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합리화된 폭력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그 많은 폭력중에서 이스라엘 건국을 합리화할 수 있는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만을 호출했다.

  박노자의 이스라엘 가면 벗기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유대인의 역사에 덧씌워진 가면마져 벗겨 버린다. 이스라엘은 서유럽에서 박해받은 유대인들의 역사만을 정통역사로 가르친다. 아랍인들과 평화롭게 지낸 세파르디의 역사를 외면하고, 동유럽에 살고 있었던 아슈켄나지의 역사도 무시한다. 특히 아슈켄나지가 쓰고 있었던 이디시어와 이디시어 문학작품을 말살한다. 이스라엘의 말살 정책은 세파르디의 갓난 아이를 유럽 출신의 시온주의자에게 입양하는 '2세 동화작전'에서 극에 달한다. 박해의 역사를 설별해서 '박해받은 유대인'이라는 신화를 만들고, 이를 반박할 수 있는 세파르디와 아슈켄나지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히틀러와 전체주의 일본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이러한 역사만들기, 아니 가면 씌우기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난민에게 쏘아올린 미사일이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광경을 보며 환호하는 비극을 낳았다. 박해의 역사를 잊지 않고 가르치는 것은 다시는 박해의 역사를 겪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집살이를 겪은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서는 더욱 간악한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어머니가 되듯이, 박해받은 민족이 힘을 가지면 더 잔혹해질 수 있는 비극을 막지는 못했다. 박해의 역사를 평화와 공존의 역사로 만들지 못한 한계를 그들은 직시해야한다.

 박노자의 가면 벗기기는 유럽과 미국으로 이어진다. 독일에 비해서 서유럽과 미국은 더 도덕적일까? 라는 질문을 한다. 우선, 히틀러가 우생학을 근거로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선전했다는 실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나치 독일의 '인종위생법률'을 미국의 우생학자들이 극찬했으며, 서구를 비롯한 일본에서 우생학의 광풍이 불어닥쳤다는 사실을 박노자는 지적한다. 우생학이 식민지를 열등하게, 백인 제국주의를 우등하게 포장하는 사이비 과학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꺼리를 던져준다. 과학은 객관적인 학문이라는 말이 얼마나 의미없는 말인지, 정치와 학자들이 유착되어 서구의 하얀가면을 강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우리는 직면해야한다. 박노자는 말한다. "아랍 문화의 후진성을 늘 들먹이는 유럽중심주의적 학자들은 지금도 정학유착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 말을 우리는 명심해야한다. 과학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가면을 벗기 위해서......

  독일에 비해서 서유럽과 미국이 더 도덕적이지 않다는 박노자의 또 다른 근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에 대한 처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 독일 포로를 '살려주기 부담스러워서' 라인 강 근처 '임시 간이 수용소'에 10만명씩을 집어 넣었다. 그결과 수많은 독일 포로들이 죽었다. 프랑스의 경우, 식량을 비현실적으로 적게 줌으로서 '외인부대'에 지원 입대를 유인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때 베트남 전에 동원된 외인부대에는 독일 포로 출신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소련의 경우는 독일인을 강제노동, 강간, 살해했다. 이 광경을 본 솔제니친은 소련 정권의 도덕성에 심각한 의심을 하게 된다. 선과 악이라는 쉬운 이분법에 익숙한 우리에게 박노자의 글을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그러나, 우리가 하얀가면을 벗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견뎌내야한다.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다는 그의 관점은 우리가 특정 역사관에 입각해서 바라보는 세상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스라엘과 서유럽에 덧씌워진 가면을 벗긴 박노자는 불교로 눈을 돌린다. 선불교라하면 동양의 정신이 서양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일으켜 전형적인 밝은면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선불굘르 서구에 소개한 스즈키와 엘리아데가 전체주의 경력이 있는 자들이라는 지적을 한다. 특히 스즈키는 '무사도 다도 선불교를 동양 정신의 최고 표현'으로 평가한다. 즉 불교를 "폭력화 어용화"하여 "복고적 수구주의적 문명론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박노자는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간다. 왜? 벽안의 백인들이 선불교에 더 관심을 갖는가? 슬럼가의 흑인들이 경제적 이유로 선불교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산층 이상의 백인들이 선불교를 접할 수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박노자는 직시한다.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긍정적 현상속에 숨겨진 어두운 면을 직면하려는 그의 날카로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러하기에 박노자의 글과 말에 한국의 지식인들이 열광하는 것이다. 빨간약을 먹은 듯한 느낌과 가면을 벗은 상쾌함을 그의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3. 가면을 벗은 후에..

박노자의 글을 통해서 세상에 덧 씌워진 수많은 가면들을 벗었다. 가면을 벗은 후에 상쾌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남모른 당황스러움도 느꼈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박노자는 소련은 전체주의 국가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는 '소련은 전체주의 국가'라는 가면을 벗겨버린다. 예전에 뉴라이트 교수가 지금의 세계사 교과서가 전체주의 국가에 소련을 빼먹었다고 지적한 적이 있었다. 그때 소련도 전체주의 국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제대로된 반박을 할 수 없었다. 박노자는 공산주의 악마화에 황금의 기회를 준 독일계 유대인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이 1968년 재판을 내면서 "소련을 더 이상 전체주의 국가로 불러서는 안된다."고 명시했다고 말한다. 즉 전체주의 사회의 특징으로 핵화돼 무기력해져 천편일률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기 꺾인 개인'이 1950년대 초 소련 사회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란다. 그런도 미국 관학자는 '사회주의에 악마의 얼굴 씌우기' 위해서 전체주의라는 용어를 남용한다. 전체주의 연구의 권위자가 소련은 더 이상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관학자들은 소련에 가면을 씌우고 있으며, 한국의 뉴라이트들도 이를 따르고 있었다.

  박노자의 가면 벗기기가 '전체주의' 용어에서 처럼 상쾌함만을 주지는 않는다. 그는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식민지 수탈론' 뿐만 아니라, '식민지 근대화론', '동학 혁명론'까지도 비판한다. 모든 가면을 부숴버리는 그의 글에 나는 당혹감을 느낀다. 모든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깨부순다면 한국사에서 무엇이 남는가?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이라는 불완전한 창으로 역사를 바라보았는데, 이마져도 부숴버리면 어떻게 역사를 바라보아야할까? 박노자는 어떠한 틀도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새로운 역사를 바라보는 창을 만든다면, 박노자는 이마져도 깨부술 것이다. 그 창도 배제와 왜곡이 있다고.....

 가면을 벗었다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할까? 박노자는 가면을 벗은 러시아 음악계의 천제 유리한인과 제국주의 국가 네덜란드의 위선을 맹렬히 폭로한 물타툴리, 스탈린 체제에 저항한 알렉슨도르 지노비예프를 소개한다. 가면을 벗어던진 용기있는 이들의 삶은 너무도 힘겹다. 때로는 박해와 가난에 시달려야했다. 우리 사회에도 가면을 벗어던진 용감한 사람이 많이 있다. 수 많은 내부고발자들이 정의로운 일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무관심과 보복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가면을 벗지 않고 살 것인가? 가면을 벗고 고통받으로 살것인가? 쉽지 않은 질문이 밀려온다.

  가면을 벗는 상쾌함과 가면을 벗은 후의 고통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가면을 벗지 않는다고 모두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박노자는 폴란드 유학생들이 노르웨이에서 보인 굴종적인 모습을 소개한다. 박노자와 수업을 들은 폴란드 급우들은 교실에서 발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은 자기 나라의 수많은 간호사와 선원, 학자들을 받아들여준 노르웨이 관민에 '뜨거운 감사'를 표했고, 자기 나라를 후원해준 유럽국가에 존경심을 표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제3세계에 대해서는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얀피부의 유럽국가에는 굴종적인 모습을 보이고, 자신보다 힘이 약해보이는 제3세계에 대해서는 거만한 지배자의 모습을 보이는 폴란드 급우들의 모습은 안쓰러워보인다. 마치 시집살이를 당한 시어머니가 시어머니가 되어서는 더욱 억척스럽게 시집살이를 시킨다는 말처럼. 소련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에게 가혹한 분할 통치를 받은 폴란드가 강대국에게는 굴종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제3세계에 대해서는 멸시를 보내는 듯하다. 서구에 의해서 띄워진 하얀 가면을 벗지 못한다면, 굴종적으로 살수밖에 없다. 떳떳하게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면을 벗어 던져야한다. 폴란드 유학생은 우리가 가면을 왜? 벗어 던져야하는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박노자의 글은 충격적이면서도 불편하다. 박노자에 의해서 가면을 벗어지만, 나에게 펼쳐지는 세계는 당혹스러운 낯선 모습이다. 이를 삶에 어떻게 녹여내야할지는 또 하나의 과제가 되었다. 나의 서재에 읽고 싶은 책이 추가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프란츠 파농의 "검은피부 흰가면"이 그 책이다. 박노자의 안내를 받아서 새로운 고전들을 읽고 나 자신도 모르는 또다른 가면들을 벗어 던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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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0-01-17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 번 읽으러 왔을 때 1번까지만 글이 있었는데, 드디어!!!^^

2020-01-17 1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