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위안부가 아니다 - 아시아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 여성 21인의 목소리
안세홍 지음 / 글항아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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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위안부'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많은 사람들은 조선인 피해여성을 떠올린다. 조선 출신이 가장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인만 피해자였던 것은 아니다.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고 현지에서 중국인 여성을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로 만들었다. 일제가 동남아시아를 침략하면서 동남아시아 일대의 인도네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등의 국가의 여성도 일본군 '위안부'로 피해를 입어야했다. 심지어는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배던 네덜란드 출신의 여성도 일본군 '위안부'로서 고통을 당해야했다. 자칫 조선인 여성만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보다 넓은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안세홍 작가의 '나는 위안부가 아니다.'라는 책은 커다란 의미가 있는 책이다. 겹겹사진전으로 유명한 그는 전세계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자신이 가장 잘하는 사진으로 그분들의 기록을 남기는 일을 하있다. 이 책을 통해서 그와 그의 책속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분들을 만나러 가보자. 


1. 깊게 패인 주름

  "국제법은 미성년의 경우 본인의 승낙 여부와 관계 없이 매춘업에 종사하는 것을 전면금지하고 있다."(48쪽) 그러나 일제는 미성년자를 동원했다. 이 책에 소개된 대부분의 피해자 분들은 13살~16살의 꽃다운 소녀들이었다. 소녀들을 강제로 끌고가서 일본군의 성욕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한 이유는 그녀들이 임신할 염려가 없다는 사실이다. 즉, "콘돔이 부족해지자 일본군은 성노예 여성을 동원할 때 임신이 되지 않는 여자를 끌고" 갔던 것이다. 일본군에게 상식과 인권을 바란다면 너무도 헛된 바램이었을까? 

  동티모르 베코 출시의 이네스는 일본군에 끌려가 밤에는 성폭력에 시달리고 낮에는 노역을 해야했다. 성폭력을 당한 그녀들에게 일본군은 춤과 노래를 부르도록했다. 도망치고 싶어도 부족장이 그녀들을 감시해서 도망칠수도 없었다. 부족장이라면 부족민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해야했지만, 부족장은 일본군에 협력하며 부족민을 짖밟는데 앞장섰다. 이네스는 성폭력을 당하고 일본군의 딸을 낳았으나 아이를 빼앗겼다. 그리고 그 딸의 생사도 알길이 없었다. 

  필리핀 팜팡가 출신의 루시아는 "항상 강간을 당하는 꿈"을 꾼다고 한다. 12살에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서 성폭행을 당하고 온몸이 부서졌다. 너무도 가슴 아프고 분통터지는 이야기를 계속 읽기가 힘들었다. 얇고 사진이 많아 쉽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책을 덮고 잠시 머리를 식혀야했다.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었다. 사진속 여성들의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은 그녀들이 살아온 과거를 말해주고 있었다. 주름에 새겨진 고통과 통한의 역사를 그냥 넘길 수 없어 다시 한번 사진속 여인들을 바라본다. 중국 아이난 출신의 왕즈펑의 모습은 울부짖는 듯한 표정이었다. 일제에 대한 원망과 하소연이 담겨 있으며, 침묵하는 일본과 외면하는 중국 정부에게 보내는 또다른 외침으로 보였다. 과연 우리는 그녀들의 외침에 귀기울이고 있는가?


2. 한숨과 탄식

  중국 하이난 출신의 황유량은 1941년에 13세의 나이로 일본군에 성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2년간 지옥과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살아돌아온 그녀를 주민들은 르번구냥(일본처녀)라며 무시했다. 일본군에게 피해를 입은 그녀가 마을 주민들에게 놀림을 받고 심지어는 그녀의 자녀들도 마을 주민들로부터 눈총을 받았다. 결국 자녀들도 그녀를 탓했다. 가해자인 일본인들은 뻔뻔하게도 피해자인 그녀들을 창녀라고 몰아붙이고, 피해자들은 숨죽이며 살아야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니.... 한숨과 분통이 터져나온다. 

  더욱 문제인 것은 유교의 영향이 강한 한국에서는 그녀들을 화냥년이라며 무시했고, 이슬람의 영향력이 강한 인도네시아에서는 명예살인의 위험속에서 피해사실을 숨기며 숨죽여 살아야했다. 약자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강자의 폭력에는 침묵하는 양아치 윤리를 강요하는 어이없는 현실이 우리의 현실이다. 미투 운동이 있기 전까지 우리 사회는 성폭력에 대해서 얼마나 야만적이었는가! 피해자가 신고를 해야 처벌을 받고, 피해자가 2차가해를 우려해서 숨죽여 살아야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었다. 

  중국 산시성 출신으로 13살 때 일본군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지옥과 같은 시간을 보낸 런란어는 "난 이일이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중국 정부가 더문제에요."라고 울붑짖는다. 중국에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우리 처럼 적극적으로 이슈화 시키지 않는다. 대국이라고 불리는 중국은 힘없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보다. 중국이 미국을 넘어서는 세계 패권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한다.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굴림하는 양아치리더십으로는 세계의 패권을 가질 수 없음을 중국 정부는 알아야할 것이다. 


3. 회한과 끝없는 고통

  전라도 출신의 박차순 할머니에게 안세홍 작가가 무엇이 가장 갖고 싶냐고 물었다. 박차순 할머니는 "엄마! 갖...고...싶...다."라고 대답했다.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몸이 망가졌고 아기를 낳지 못해 양달을 데리고 사는 그녀에게 어머니와 같은 안식처는 없었다. 어머니의 따스한 품처럼 그녀를 따스하게 안아줄 안식처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전쟁이 끝났지만, 그녀들에게 삶이 곧 전쟁이었다. 주변의 시선과 싸워야했으며, 뻔뻔하게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정부와도 싸워야했다. 

  중국 광시좡족자치구 출신의 웨이사오란은 유부녀임에도 불구하고 24세의 나이로 일본군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딸을 살리기 위해서 일본군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살아돌아온 그녀는 딸을 잃고 일본군의 아이를 낳는다. 시댁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바로 죽이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들을 낳자 농사짓는데 쓰겠다며 죽이지 않았다. 아이가 자라자 마을 사람들은 "아이가 일본군을 닮았다고 멸시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들은 일본군을 닮았다는 비아냥을 들으며 직업도 얻지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모시며 살아야했다. 2010년 12월 일본 의회가 주최한 '위안부' 피해자 공청회에 참석한 아들은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그동안 하지 못한 울분을 토로했다. 일본군이 뿌린 불행의 씨앗은 대를 이어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필리핀 팜팡가 출신의 파우스트 고메즈는 12세의 나이에 일본군에 끌려가 깊은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2000년 '롤라스 컴패니아 성노예 생존자 그룹'에 들어가 해외 언론이 올 때마다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그저 우리가 싸우는 것을 위한 정의가 세워지길 바라요. 그리고 공식적인 보상과 사과를 원합니다." 정의가 세워지고 일본인들이 진심으로 반성하는 그날을 고대하며 그녀는 삶의 마지막 힘을 다해서 일제와 맞서 싸우고 있다. 그러나 그녀들의 이러한 투쟁에 일본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대동아 전쟁'이라고 부르면서, 일본이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로 부터 아시아 국가들을 해방시켰다는 망발을 한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국 등지의 여성을을 일본군의 성노예로 만들고 그 가족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고서 어찌 이런 망발을 한단말인가! 반성할줄 모르는 그들에게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필리핀 코레히도르 섬을 방문한 일본 여행객은 이곳에서 묵념을 하며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기 보다는 "자기네 일본군들이 명예롭게 싸우다 죽음을 맞이한 것에 존경심을 표했다." 같은 역사를 겪었지만, 기억하는 것은 너무도 다르다. 일본은 그들이 행한 침략전쟁과 전쟁과정에서 그들이 벌인 만행을 가르치지 않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맞은 것을 빌리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며 기억하는 자를 위해서 존재한다. 우리가 아픈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다면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역사만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픈 역사는 또다시 반복되기 마련이다. 아프고 괴로울 수록 기억하자! 우리 자녀들에게 이 책을 권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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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 -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도시의 역사로 보는 인류문명사
벤 윌슨 지음, 박수철 옮김, 박진빈 감수 / 매일경제신문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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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에서 자라서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다. 나는 시골이 싫었다. 답답했다. 무엇을 하려해도 할 수 없는 기회가 박탈된 곳이 시골이었다. 그래서 기어코 도시로 도시로 가려했다. 도시는 나에게 기회가 있는 곳이다. 그 기회는 대도시로 갈 수록 더 커진다. 수원에서 살았을 때, 나는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사박물관의 특별전을 보러 갔고, 국립 중앙박물관 주변을 산책삼아 걸어보기도했다. 오페라와 콘서트를 즐길 수 있는 축복의 장소가 도시였다. 다락방 '교사와 수업 사이'의 두번째 책으로 메트로폴리스를 선택했다. 책을 받아들고 650페이지라는 두께감이 무겁게 밀려왔다. 그러나 재미 있는 책이라면 두께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책속으로 들어가 보자.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벤 윌슨이 한국의 도시에 대해서 서술한 부분이 등장하면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벤 윌슨은 송도 신도시를 최첨단 도시로 소개했으며, 도시 녹지를 복원하는 훌륭한 사례로 서울의 청개천을 소개했다. 송도 신도시는 어느 가정의 수도꼭지가 잠겨있지 않은지도 파악할 수 있는 도시라며 긍정적이기 보다는 다소 어두운 미래도시를 보는 듯이 서술했다. 반면 청개천 복원에 대해서는 도시 열섬효과를 낮추는 긍정적인 성과를 거둔 사례로 소개하고 있다. 자원의 낭비를 막는 스마트한 도시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전시행정의 대표적인 사례인 청채천 복원공사를 긍정적으로 소개한 것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청개천에 물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 모터를 돌려 한강물을 끌어들인다. 청개천 바닥은 흙이 아니라 돌이 깔려있다. 전형적인 인공하천이다. 이것을 어찌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도시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기회의 장소라는 이미지와 함께 범죄와 공해라는 이미지가 같이 떠오른다. 도시라는 공동체는 다양한 인간들이 모여 만든 집합체이기에 기회도 있지만,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도 짙을 수밖에 없다. 벤 윌슨은 "도시에는 위생처리가 필요한 만큼 오물도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성인용품점, 도박장, 스트립쇼장 등등이 필요악임을 서술하고 있다. "도시는 유토피아인 동시에 디스토피아"이다. 그렇다면 디스토피아를 없앨 수는 없을까? 이를 없애려한다면 미국에서 제정한 금주법이 오히려 마피아 세력을 확대시킨 결과를 낳았듯이 도시의 디스토피아적 요소를 강화시킬까?

  도시의 디스토피아적 요소를 없애려한 도시계획이 있었다. 지금의 파리를 만든 오스만의 도시계획이 바로 그것이다. 오스만의 도시계획에 대한 평가는 서로 대립적이다. 구불구불하고 도시의 오염물을 제대로 배출하지 못하는 파리를 오스만은 방사선의 깔끔한 도시로 개혁했다. 파리의 디스토피아적 요소를 없애 지금의 아름다운 파리를 만든 오스만의 도시계획을 비판할 이유가있을까? 그런데, 시인 샤를 발레트는 오스만을 "잔인한 파괴자"라고 말했다. 파리의 조그만 산들을 없앴다. 그 산에 있었던 유적들도 같이 없어졌다. 고풍스러운 파리는 획일적인 파리로 바뀌었다. 오스만의 도시계획은 급속한 산업화 속에서 많은 유물과 공동체가 파괴된 우리의 도시들과 비슷하다. 오스만에 대한 평가는 우리의 도시팽창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와 연결되어있다. 오스만의 도시계획을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도시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인류 역사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도시도 많다. 그러나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 도시들이 전쟁의 포화속에서도 다시 살아난다. 1945년 포로 수용소의 독일 장교는 "쾰른에는 여러번 분산 명령이 내려졌지만, 여전히 국민들은 한때 '집'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잡석 무더기로 되돌아 간다."고 했다. 자신의 도시, 삶의 터전에 대한 회귀 본능은 불가사의한 힘을 부러일으킨다. 죽음을 목도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인간은 삶의 터전인 도시로 회귀한다. 그래서 도시는 빠르게 재건된다. 

  불가능한 부활을 이룬 대표적 도시가 있다. 바르샤바가 바로 그 대표적 도시이다. 히틀러는 바르샤바를 철저히 파괴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도시 건물 하나하나를 파괴했고 사람들을 포로수용소로 이송했다. 그런데, 생명이 위태로운 그 순간에도 바르샤바인들은 도시가 파괴될 것을 예측하고 문서를 대조하고 역사적 건물도면을 남겨두었다. 이러한 도시 재건을 할 수있는 자료를 암호화하여 외부에 반출하거나, 수도원 혹은 포로 수용소에 숨겨두었다. 전쟁이 끝나자 도시를 재건하기기 위해서 바르샤바인들은 문서, 엽서, 사진, 도면, 그림등의 모든 자료를 수집해서 그들의 바르샤바를 재건했다. 생명이 위급한 상황속에서도 자신의 삶의 터전을 기억해두고, 전쟁이 끝나자 예전 모습대로 재건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불가사의하면서도 경의감을 불러 일으킨다. 도시의 생명력은 강했다. 그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인간이었다. 


  도시의 삶에 젖어 있으면서도 인생의 말년은 시골에서 보내고 싶다. 그러나 나이가들수록 병들어가는 몸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큰병원 가까이에 살아야하기에 그 소망은 소망에 그칠 수밖에 없다. 도시는 디스토피아이면서 유토피아이기에 도시를 떠나고 싶지만 도시를 떠날 수없다. 전원생활이 아름다워보이는 것은 도시를 떠날 수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기에 더욱 아름다워보일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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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책을 명화와 같이 살펴본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 `그림 쏙 세계사` 는 그림과 세계사라는 두마리 토끼를 잘잡은 책이다. 쉬운 문채라 청소년들도 쉽게이하할 수있다. 그렇다고 얕은 내용서술 만으로 가득찬 것도 아니다. 시중의 청소년 대상 세계사 책과는 달리 깊이 있는 설명도 이뤄졌다. 세계사를 가르쳐 본 교사 출신이라서 그런지 쉬우면서도 재미 있는 서술은 이 책을 단숨에읽게 만들었다. 청소년들과 교양을 쌓고 싶어하는 일반인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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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3-14 21: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무척 흥미 갑니다!

얄라알라 2021-03-14 22: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찜하고 갑니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 세계 문화유산 약탈사
김경임 지음 / 홍익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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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문화재 환수 프로젝트'는 반크(VANK) 동아리 학생들이 많이 선택하는 활동주제이다. 빼앗긴 우리 문화재를 소개한 플래카드를 제작하여 시민들에게 홍보하는 활동을 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대견하지만, 한편으로는 논리의 빈약함에 안타까움을 많이 느꼈다. , 우리 문화재를 환수해야한다는 당위성만을 강조할 뿐, 문화재 환수의 국제법적 당위성에 대한 논리적 증명은 부족했다. 사실 문화재 환수에 대한 지식을 전문적이면서도 재미있게 설명해줄 수 있는 책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우리 현실이다. 그러던 차에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실무 경험을 쌓은 김경임 저자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는 책을 만났다. 재미있으면서도 전문적인 지식을 소개하는 그의 필치가 나를 책속으로 빨려들게 했다.

 

1. 문화재를 예술품으로 만들기.

학교에 세워져있던 단군상을 일부 종교인들이 우상이라며 단군상의 목을 베고, 거대한 바미안 불상을 파괴하는 탈레반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 예술품으로 보지 않고, 우상숭배라며 배격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문화재를 예술품으로만 보려는 시각에는 제국주의자들의 사악한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지적하고 있다.

<밀로의 비너스>는 너무도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밀로의 비너스>는 팔이 없다. 나의 중학생 시절, 미술선생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재미있는 설명을 하셨다. ‘<밀로의 비너스>의 팔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려보았는데, 팔이 있는 것 자체가 무척 어색하여 아마도 처음부터 팔이 없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이 생각한다.'라는 미술 선생님의 설명이 그럴듯하여 <밀로의 비너스>는 원래 팔을 제작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했다.

그러나, <밀로의 비너스>는 왼팔과 사과를 쥐고 있는 왼손, 조각상의 받침대 파편이 있었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소중한 이들 문화재의 일부분을 없애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적 효과를 위해서 반쯤 매달린 왼팔을 떼어내는 야만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서구인들은 그들의 뿌리라고 하는 헬레니즘 시대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훼손하는 일을 서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에게 <밀로의 비너스>는 예술품이지 문화재가 아니다. 아니, 문화재가 아니어야만했다. <밀로의 비너스>상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는 받침대를 파손시켜야 <밀로의 비너스>는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그래야만, <밀로의 비너스>는 예술품으로만 남는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문화재는 학술적 가치가 없어진다. 그래야만,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지의 예술품을 소유하는 것이 편해진다. 그래서 패티 거스튼블리스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화재를 예술품으로 보는 것은 문화재를 그 역사적 맥락에서 분리시키는 방법이며, 제국주의 유럽 문화가 비유럽 문화재를 소유하는 방법이기도 하다."-패티 거스튼블리스<예술과 문화유산>, <클레오파트라의 바늘>68쪽 재인용

 

역사적 맥락을 제거하고 미적 가치만 남겨놓아야 <밀로의 비너스>는 그리스의 밀로스 섬에서 뿌리 뽑혀 제국주의자의 품에 앉길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은 인류의 예술품을 소장하며 인류에게 기여한다.’고 말하지만, 진실은 인류의 문화재를 파괴하여 문화재를 단순한 예술품으로 전락시키는 죄악을 저지른 박물관이었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역사적 맥락을 제거하고 문화재를 예술품으로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인간의 사체를 모으는 야만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뉴질랜드의 토이모코(죽은 자의 머리), 호주 태즈메이니아 인골, 남아프리카의 호텐토트 비너스를 전시하고 수집한 사례는 제국주의자들이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람의 사체는 수집과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는 인간이 고귀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기초적인 전제이다. 죽은 자의 시신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내져야한다. 그들의 역사적 맥락에서, 그들의 역사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하고, 죽어간 그들의 사체를 더 이상 제국주의자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소장품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학교에서 있는 단군상이든, 세종대왕 동상이든 모든 인간의 창조품들은 역사적 문화적 맥락이 있다. 그 맥락을 떠나서 문화재를 논할 수 없다. 문화재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파악하며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는 보편 윤리가 자리 잡아야만 다시는 야만적인 제국주의 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2. 문화재 가치 깍아 내리기

인류 최초의 인권 문서 '키루스 칙령'의 복제품이 유엔본부 2층의 안전보장이사회와 경제사회이사회 중간의 복도에 전시되어 있다. 세계가 인정한 인권 문서가 '키루스 칙령'이다. 그런데, '키루스 칙령'도 제국주의 국가들의 검은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이란인의 조상이 건국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서아시아를 통일했다. 대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대왕은 피정복민을 관용과 포용으로 다스리겠다는 포부를 '키루스 칙령'에 담아 반포하였다. 그리고 이 '키루스 칙령'이 다시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발견 국가는 영국이고, 발견 장소는 이라크이다. 발견당시 오스만 제국이 이라크를 다스리고 있었다. 이란은 '키루스 칙령'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대영제국 박물관은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발견 장소를 기준으로 본다면, '키루스 칙령'은 이라크에 돌려주어야하고, 발견 당시 지배국을 기준으로 본다면, 지금의 '터키'에 돌려주어야한다. 그러나, 키루스 대왕을 계승한 국가는 이란이기에 대영박물관은 '키루스 칙령'을 이란에 돌려주어야한다. 그런데, 반환을 반대하는 학자들이 '키루스 칙령'을 돌려주지 않으려고 내놓은 논리가 참으로 치졸하다. 그들은 '키루스 칙령'의 가치를 깍아 내리는 방법을 사용했다.

 

"정권이 바뀌면 지도자들이 개혁을 공약하기 마련이다. 키루스 대왕의 관용 정책은 광대한 제국의 다수 이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펼친 현실적인 대안으로 실용주의의 산물일 뿐이다.

이는 피정복민을 다스리는 키루스 대옹의 채찍과 당근 정책으로, 정복자가 민심을 얻을 목적으로 발표한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이것을 인권선언이라고 믿는다면, 프로파간다의 희생자는 오늘날의 우리가 될 것이다."-30

 

현란한 문체로 '키루스 칙령'을 깍아 내리고 있는 학자에게 영국이 자랑하는 '대헌장'의 가치를 묻고 싶다. 영국 민주주의 역사에 '대헌장'의 가치는 참으로 대단하다. 그런데, '대헌장'은 귀족들이 왕을 굴복시키고 자신들의 특권을 보장받기 위해서 만든 문서이다. 이 문서를 가지고 민주주의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프로파간다이다. 그러나, '대헌장'의 가치는 이후 민주주의 역사에서 확대 해석되었다. 그에 따라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하는 문서에서 민주주의를 이루는데 기여한 문서로 가치가 상승했다. '키루스 칙령'도 마찬가지이다. 키루스 대왕이 정치적 목적에서 '키루스 칙령'을 발표했다하더라도, 오늘날의 인권발전에 기여를 하고 있다면, '최초의 인권선언문'이라 평가해도 손색이 없다. 문화재는 그 문화재가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되느냐가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을 무시하고 '키루스 칙령'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문화재를 이란에 되돌려 주지 않으려는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키루스 칙령'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그들이 '키루스 칙령'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키루스 칙령'에 대한 모욕일 것이다.

 

3. 문화유산의 관련성 부정하기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서아시아에서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나폴레옹의 군대가 발견한 로제타석이다. 2005, 하와스 박사가 이집트가 반드시 돌려받아야할 문화재 다섯 점 중에서 가장 첫번째로 꼽은 것이 대영 박물관에 있는 로제타석이다. 샹폴리옹에 의해서 로제타석에 기록되어 있는 상형문자가 해독되면서 비로소 이집트의 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이집트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귀중한 문화재를 대영 박물관은 이집트에 돌려주지 않고 있다. 여기에 제국주의시기에 반출된 수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세계의 박물관들이 이에 호응하고 있다. 시카고 박물관장 제임스 쿠노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 이집트와 파라오 시대 이집트오의 관련은 무엇인가? 고대 유물은 이슬람 국가들이 생겨나기 훨씬 이전에 제작된 것들이다. 고대 유물을 문화재로 규정하는 국내법이나 국제법은 150년 전에 태어난 것이다. 이들 국가들은 영토 내에서 발견된, 또는 발견되었다고 믿는 고대 유물을 민족의 정체성과 자부심으로 파악한다. 민족의 유산만 중요하고 세계 문명에 대한 중요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132

 

문화재는 그 문화재를 창조한 국가가 소유하거나, 문화재가 최초로 발견된 영토의 소속국가에서 소유해야한다. 이러한 점에서 로제타석은 이집트가 소유하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의 이집트와 현대의 이집트가 관련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영국의 아더왕 전설은 현대 영국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역사와 문화는 유형무형으로 해당지역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배웠던 슐리만이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되어 트로이를 발굴한 예를 보듯이, 수천년 전의 역사와 전설은 그 후손들에 의해서 기억될 때 유형 무형의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다. 이집트인들은 이집트의 역사 현장에서 태어나고 살면서 이집트의 역사와 문화를 몸으로 채득했다. 그들이 파라오시대의 이집트와 관련이 없다는 주장은 제국주의의 유산인 약탈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얕은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시카고 박물관장 제임스 쿠노는 "민족의 유산만 중요하고 세계 문명에 대한 중요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영박물관이 내놓은 반응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집트의 문화재를 소장한 게 아니다. 세계 문명의 일부로서 이집트의 유물을 갖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유물의 보존이다."

 

우리나라의 '외규장각도서'를 프랑스가 반환하지 않을 때도 이러한 논리를 내세웠다. 제국주의 시절 탈취한 문화재를 소장한 세계 유수의 박물관이 이러한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그들의 논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바로 '인류 보편의 박물관 선언'을 분석해보자.

 

4. '인류 보편의 박물관 선언'의 함정.

문명국이라 자처했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이 야만인이라 취급했던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의 문화재를 약탈해서 고가에 거래했다. 나이지리아의 베닌 브론즈를 소장한 대영박물관은 "응징 전쟁"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마치 병인양요 시기, 우리가 프랑스 신부를 처형했기에 외규장각도서를 약탈한 것은 정당하다는 논리이다. 그들에게는 작물을 거래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정의는 통용되지 않는다.

제국주의라는 야만의 시대에서 벗어나, 정의와 인도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가 세계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요즘, 약탈문화재를 반환해야한다는 공감대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공유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 윤리가 제국주의 시기의 영광을 기억하는 박물관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200210, 독일 민휀에서 대영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한 세계 40개의 박물관 미술관 관장들이 '인류 보편 박물관의 중요성과 가치'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비조 클럽'이라 불리는 이들 박물관은 21세기 문명 세계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선언을 당당하게 발표했다.(물론 얕쌉한 대영 박물관은 엘긴 마블에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서명하지 않았다.)

 

"과거 취득한 문화재는 구입, 기증, 또는 파르타지를 통해서 이들을 관리해 온 박물관의 일부가 되었고, 이들을 소장한 국가의 유산의 일부가 되었다."-404

 

작물을 취득한 제국주의 박물관의 일부가 되어버린 문화재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참으로 놀라운 주장이다. 개인의 소유권을 엄청난 가치로 여기는 서구인이 약소국의 소유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마치 거울뉴런이 사라져버린 사이코패스 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중요시할 뿐, 문화재를 약탈당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약소국의 아픔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인류 보편 박물관의 중요성과 가치'라는 문서는 더욱 황당한 논리로 끝을 맺는다.

 

"박물관은 끊임없는 재해석 과정에 의해 지식을 촉진시키는 임무를 행함으로써 문화 발전의 담당자를 자임한다. 각각의 문화재는 이러한 과정에 공헌하고 있다. 따라서 다양하고 다면적인 문화재를 소장한 박물관의 차원을 제한하는 것은 모든 관람자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다."-405

 

제국주의 박물관만이 문화재를 '끊임없는 재해석 과정'을 수행할 수 있다는 오만한 주장을 하고 있다. 해당 문화재의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국가는 해당 문화재의 소유국이다. 우리나라의 '외규장각도서'가 프랑스에서 중국문서로 분류되어 훼손된 채 서고에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제국주의 박물관에서 썩어서 사라지는 수많은 문화재에 대해서 그들은 침묵하고 있다.

제국주의 박물관은 약소국에서 약탈한 '다면적인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세계의 수많은 약소국이 자국의 문화재를 보기 위해서 제국주의 박물관을 방문해야한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관광수입을 얻으며 이를 '모든 관람자의 이익'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제국주의 박물관의 이익만이 중요할 뿐, 문화재 원소유국의 이익에는 관심이 없다.

일찍이, 나폴레옹전쟁을 정리하기 위해서 빈회의가 열렸다. 이때, 국제적 차원에서 최초로 전시 약탈 문화재 반환이 결정되었고, 향후 국제 관습법으로 약탈문화재 반환이 정립되었다. 1970년 유네스코 협약, 1995년 유니드로아 협약이 체결되면서 불법 문화재의 반환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었다. 국제 관습법과 국제법이 이들 제국주의 박물관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아니, 인류 보편의 가치를 부정하고 있는 제국주의 박물관이 세계적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사실 자체가 인류의 비극이다.

 

힘이 정의라고 떼를 쓰는 일 처럼 우리를 분개하게 하는 일은 없고, 정의가 힘의 뒷받침을 받지 못해 정의로 의연히 서지 못하고 불의로 몰리는 일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다.”라는 파스칼의 말처럼, 아직 국제사회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힘 있는 제국주의 박물관이 자신을 정의라 외치고 있다. 약소국은 힘이 없어 정의로 의연히 서지 못하고 있다. 정의가 바로서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 학생들은 '반크' 동아리를 만들었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사랑과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동아리 활동은 열정적이고 대견해보인다. 그러나, 반크 동아리 활동을 지켜보면서 항상 2%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학생들의 열정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탄탄한 논리가 필요했다. 학생들의 열정에 역사적, 국적법적 지식과 논리가 뒷받침되어야 보편 정의에 힘이 실린다. 이러한 의미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은 재미와 의미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는 책이라 평가할 수 있다. 저자 김경임이 이 책에서 약속한 대로 약탈문화재 반환 운동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관련 서적을 더 많이 저술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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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역사 - 세계의 문명 이야기
아서 코터렐 지음, 김수림 옮김 / 지와사랑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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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시아에 살지만, 아시아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한국사로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아시아를 어떻게 아느냐는 반문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아시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서 씌여진, 아시아 역사 책이 없는 상황에서 영국 출신 역사학자 아서 코터렐이 쓴 '아시아 역사'를 집어들었다. 아시아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었지만, 잔인한 제국주의 국가 영국 출신의 백인 학자가 바라본 아시아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다. 아서 코터렐은 아시아를 균형감 있게 조감하고 있을까?


  아서 코터렐은 탁월한 시야를 가지고 아시아를 지역별로 나눠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서술하였다. 그의 폭넓은 연구는 박수를 보낼만하다. 방대한 역사서술이기에 그도 인정했듯이 개략적인 내용을 서술할 수밖에 없었지만, 유려한 필치로 가독성 높은 글을 써서 우리를 기쁘게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제국주의 국가 영국 출신의 백인이 바라본 아시아 역사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첫째, 영국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 변호하는 듯한 서술이 눈에 띈다.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자고해도 바꿀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 표현은 셰익스피어를 높이는 표현이자, 인도를 멸시하는 표현이다. 인도를 200년 동안 식민지배하면서 고혈을 빨아먹으며 해가지지 않는 제국으로 우뚝선 영국이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는 사회를 해야한다. 영국인이 역사를 서술한다면 이에 대한 반성의 표현은 반드시 해야한다. 그러나, 아서 코터렐의 책에는 깊은 사과의 표현보다는 영국을 변호하고 지지하는 글들이 많다. 

  대표적인 표현이 세포이 항쟁을 '반란'으로 서술한 것이다. 그리고 세포이항쟁의 근본원인을 인도인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영국 동인도회사의 무지한 정책에서 찾지 않고 "(세포이 항쟁은) 사실 탄약통에 발라진 윤활유가 무엇이냐하는 문제와는 상관 없는 것이었다."라는 무지한 표현을 서슴없이 서술하였다. 아서 코터렐이 세포이 항쟁의 원인으로 제시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격차"로 사건의 원인을 단순화하기 보다는 동인도 회사의 인도식민지배라는 모순 자체를 비판했어야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서 코터렐이 "1786년 영국 장교의 혼혈 자녀들이 부친이 사망했을 경우 영국에 갈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을 제정한 것을 "인종차별이나 적대감 때문은 아니었다."고 변명한 것이다. 지극이 영국중심의 인종차별적 정책을 인종차별이나 적대감 때문이 아니라는 주장에 분노가 끌어오른다. 아서 코터렐은 이 법을 제정한 이유를 혼혈 사회가 수익성 좋은 고용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고, 인도 공무에 발언권을 가진 현지 이익 단체의 출현을 우려했기 때문이라 변명한다. 그러나, 혼현인을 영국인으로 보았다면 이러한 법안 자체를 만들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 아서 코터렐의 아시아 인식의 큰 문제이다. 

  인도가 분리 독립하는 과정에 대한 서술을 하면서도, 인도가 분리 독립할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700,000명의 사상자와 1000만명이 종교에 다라 국경을 넘어야하는 근본 원인이 바로 영국에게 있다는 사실을 그는 직시하지 못했다. 영국의 벵골분할령을 비롯한 영국의 분할 통치 정책이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갈등을 격과시켰고, 결국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리독립하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영국은 인정해야한다. 

  영국은 중국을 상대로 '아편 전쟁'이라는 야만적인 전쟁을 했다.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전쟁을 '신사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영국이 중국을 상대로 일으켰다. 중국은 임칙서를 광둥에 파견하여 아편을 단속했다. 이를 두고 아서 코터렐은 "아편제고를 어떤 보상 없이 폐기"했다고 서술했다. 분명 임칙서는 그들에게 보상을 해주었는데도 이를 제대로 서술하고 있지 않으며, 영국의 입장을 변호하기에 급급한 서술을 하고 있다. 

  둘째, 아시아에 대한 편견이 느껴지는 서술이 있다. 서구 백인들은 이슬람 포비아를 가지고 있다. 이 책에서도 이슬람에 대한 편견이 드러난다. "유일신 문제에서 만큼은 유독 빡빡하게 구는 이슬람교도"라는 서술이나, "벽창호 같은 칼리프에게"라는 표현은 객관적인 역사서술을 해야하는 학자라면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리상 이슬람이 우상숭배에 대해서 크리스트교보다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이베트남 통치가에게서 프랑스의 침략에 항거할 의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라는 감정적 표현을 아서 코터렐인 사용하고 있다. 지극히 서구 백인 우월주의가 느껴지는 표현이다. '너희들은 미개해, 그래서 식민지배를 받아야해'라는 인상을 주는 표현이다. 서양인이 쓴 역사책에 서양인의 편견이 너무도 심하게 묻어 있다. 


  학부시절 교수님이 "영국에서는 아시아인에게 학위는 주어도 아시아인이 영국의 역사를 영국인에게 가르치게 하지는 않는다."라는 말씀하신적이 있다. 왜? 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아시아인이 가르치지 못하게 할까? 아시아의 관점에서 영국을 바라본다면, 영국의 역사는 도덕적으로 떳떳한 역사로 그려질 수 없다. 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반면, 우리는 한국사를 우리가 연구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지만, 세계사 만큼은 외국의 번역서적에 의존해서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세계사에 대한 우리의 학문수준이 깊지 않은 것이 근본 원인이겠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은 제법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의 눈으로 아시아를 바라보지 못하고 서구 백인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아시아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는 세계사를 우리의 눈으로 바라볼 시기가 되지 않았을까? 창밖으로 지나가는 자동차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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