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사생활 - 우리 집 개는 무슨 생각을 할까?
알렉산드라 호로비츠 지음, 구세희 외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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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짐승보다는 식물이 좋고, 가축 중에서도 특정하게 개를 좋아하거나 하는건 아니지만 짐승들의 언어에는 관심이 간다.

어릴 때 부터 '지금 이 행동은 짐승의 이런 메세지'라는 얘기들을 당당히 하는 애견인이나 사육사들을 보면 '과연 그런걸까?'라는 의문이 들곤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짐승들의 표정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있고 모든 것은 행동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데 어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지 그건 인간은 영장류 중 우수하다는데서 오는 오만함은 아닌가하고 말이다.

 

같은 언어와 문화를 나누는 남자와 여자도 대화를 나누는데 있어 많이 다르며 수많은 오해를 불러오는데 하물며 개와 인간이 소통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은 당연하며 지금까지 알려진 학설을 너무 당연시하게 받아들이지말고 새로운 연구성과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개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고 하면 말도 안 통하는데 일단 귀속된 '을'의 입장에서 나름 사랑해준다고 하는 인간의 몇몇 무지한 행동들이 얼마나 귀찮고 짜증스러웠을까를 생각하면 사랑받는 개의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과연 우리는 우리가 가장 잘 알고있다고 생각하는 짐승 중 개의 특성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접근하며 배려하고 있을까?

우리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돌봐준 일들이 그들에게 배려로 전해질 수 있을까?

좀 더 효과적인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서로를 잘 알아야함이 분명하다.

 

가축 중에서도 개는 우리에게 반려견이라 불리며 다른 가축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받아왔다.

저자는 스스로도 애견인이며 키우고있는 '펌프'라는 애정을 듬뿍 담아 키우는 개도 있으며, 개를 키우면서 자연스럽게 그 관심으로 연구 자체에 애정을 가지고 진행시켜왔으니 꽤 신빙성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알려진 학술적인 내용이나 개의 행동에 대한 특성에 대해 저자는 상당부분 오류적인 부분을 바로잡아주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잘못 알았던 내용들을 바로잡아지는 것 같다.

아마 스스로 애견인이라 자부하며 생각했던 사람들은 많은 사고의 전환의 동기가 될 텐데 그동안의 상식들은 아마 인간이 인간적인 입장에서 개를 바라본 탓에 생긴 오류들일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배려란 내 입장에서가 아닌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했을 때 진정한 효과를 내듯이, 우리도 우리의 입장에서 쾌적함이나 안전함을 인지하는 정도를 판단하는게 아니라 실제적인 개의 행동연구 결과 등을 꾸준히 공부하여 개의 입장에서 개의 특성에 맞춰 생각하고 배려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듯 싶다.

비단 개 뿐만이 아니라 사육되어지는 다른 가축 또는 짐승들에 대해서도 꾸준한 연구가 이뤄져 그들을 보호하고 배려해 줄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사랑해줄 수 있을 것이다.

 

애견인들에게는 '아...우리 개가 이럴 때는 이렇게 배려 해 주어야겠구나.'하는 배려해 줄 수 있는 행동의 폭을 넓혀주는데 도움이 많이 될 책이다.

뿐만 아니라 좀 더 넓게 생각하면 다른 짐승들에 대한 배려에 대해 생각 해 보게하며, 다른 개체의 의사소통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에 있어서도 '관계'함에 있어 어떤 태도로 임해야할지 다시 생각 해 보게하는 책이었다.

 

당신은 당신의 반려견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세요?

그 눈높이가 제대로 개의 위주로 흘러가고는 있나요?

이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질문이 던져진다.

 

앞으로도 개의 행동양상에 대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궁금하고 새로운 결과들이 도출되겠지...

지금의 상식도 전복이 되는 순간이 오겠지만 중요한건 상식과 상관없이 개와 눈을 맞추며 그래도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을 전하는게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도서의 힘을 빌어 배려해주려는 노력은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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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33 - 세상을 울린 칠레 광부 33인의 위대한 희망
조나단 프랭클린 지음, 이원경 옮김, 유영만 해설 / 월드김영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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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고를 때 내가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부분은 바로 '채광'이다.
몇년 전에 아파트들을 너무 빽빽하게 지으며 집에 빛이 잘 안드는 집들이 난무했었는데 사람이 건강하게 생활하기 위해서는 썩 좋은 환경이 아니기에 그런 건축유행이 달갑잖았다.
아늑한 공간은 좋지만 24시간 빛이 없는 그런 밀폐된 공간에서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건강하게 생활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나마 개폐의 자유가 주어진 집에서도 '빛의 결여'는 사람의 행동양상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한데 개폐의 자유가 없는 밀폐 된 공간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껴가며 69일간 갖혀있어야 한다는건 상상만으로도 몸서리처지는 일이다.
69일이라는 것도 플랜A,B,C의 꾸준한 진척상황에 대한 성공의 결과로 빚은 기간일 뿐, 더 연장되었을지도 모르는(어쩌면 그 와중에 붕괴위험이 있을 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이성적인 행동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일 것이다.
 
그런 말도 안되는 기적같은 일이 작년 8월 칠레에서 일어났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THE33>에서는 광부들이 스스로의 삶에 새 희망을 부여한다.
69일간의 긴 기간동안 최소한의 마찰로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냈다. 최소한이라고는 해도 당시에는 문제가 생길 때 마다 큰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일 이었겠지만 일반적으로 목숨이 결부된 그런 위험한 밀폐성 공간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부작용들에 비한다면 거의 기적적이라고 볼 수 있을만큼 평화스러웠다.
 
사람은 끝까지 가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하는데 평소에 근엄하고 상식적으로 행동하던 사람들도 극한 상황이 닥치면 본연의 모습일지는 몰라도 약하거나 실망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기 쉽다.
<THE33>의 33명의 광부들은 그동안 만족스럽지 못했던 아들, 책임감이 부족한 아버지, 미래를 위해 투자하기 보다는 하루하루의 쾌락을 위해 돈을 쓰는게 일반화 된 그룹이었다.
 
비단 이들만이 그런 삶을 살아가는게 아니라 법률적으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현장에서의 노동자들은 대부분이 안전보다 돈을 택할 정도의 동기가 되는 생계를 이끌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69일간의 그들이 보여준 민주적인 생활방식은 지금까지의 그들이 보여준 그 이상의 가능성을 새로 발견하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통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33인의 광부들은 땅속에 '묻혔다가' 구출되는 과정 속에서 전보다 더 나은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며 진정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물론 밝히고 싶지 않은 사생활을 칠레 전역에 드러내게되어 괴로울 조니같은 광부들은 안타깝지만 그 외 대부분의 광부들은 이번 사건을 통하여 좀 더 가족의 소중함과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 재조명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사회적 인망이 높은 엘리트 집단이라 하여도 이렇게 침착하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는건 거의 불가능일 것이다. 그들은 광산의 위험을 알기에 대처하는데 있어 유리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위험성을 실질적으로 알고 있기에 정신적 불안을 심하게 느낄 수 있는 상태에서도 소사회를 구성하는데 성공했고 지상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잠재적인 재능들을 일깨우며 모든게 기계화 된 현대에 휴머니즘적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아마 그들은 그들의 성공적인 구출작전이 가지는 그 이상의 의미에 대해 상상도 못했겠지만 1명도 좌초되지않고 절박한 상황을 희망으로 이끌어낸 그들의 기지와 이성은 앞으로도 전례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 상황이기에 책의 마지막장을 덮는 그 순간까지도 내가 밟고 서 있는 땅이 불안정하게 느껴지며 조마조마하던 그 순간들.
광부들과 구조대원, 의사들은 모두 협심하여 구조작전을 최선의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지만 구출되기 전 까지는 완전히 안심할 수 없었던 탓에 가슴을 졸여가며 읽었기 때문에 모두 구출이 되었을 땐 나도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타인조차 그들의 생존에 대해 응원을 하고 가슴을 졸였는데 가족들은 얼마나 악몽같은 시간이었을지....
그들 가족에게 다시는 이런 끔찍한 시간이 없도록 정치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라인이 제대로 펼쳐지길 바랄 뿐이다.
 

우리나라도 생계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위험한 현장에서 일할 수 밖에 없는 분들이 적지않게 계신다.

외국의 이런 사례들을 발판삼아 조금이라도 그분들과 그 가족들이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들을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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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해요 2011-03-10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 ~♡☆
 
실행이 답이다 - 생각을 성과로 이끄는 성공 원동력 20
이민규 지음 / 더난출판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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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행이 답이다>는 획기적인 제안을 하는 책은 아니다.
누구나 알고있는 사실에 앞서 '실행'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좋은 의미도 빛을 보지 못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다시한번 주지시키고있다.
그럼에도 많은 자기계발서 중에서도 추천 할 만한 이유는 저자가 한국인이다보니 우리나라 정서를 잘 반영하여 지금 좋은 취지와 의욕은 가득하지만 정리가 부족하고 열정만 가득한 젊은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꺼라 생각해서다.

보통의 자기계발서는 '결심'할 수 있도록 부추기는 내용 위주로 편찬됐었다면 <실행이 답이다>는 '결심'보다 '실행'에 중점을 두고 서술하고 있다.
이 마저도 독자가 받아들일 때 효과를 낼 수 있겠지만 21세기에 진정으로 필요한 말이 아닌가?
80~90년대의 지나칠 정도의 실행능력이 다소 완화되면서 이젠 너무 축소되어 실행에 대한 약화로 현대인들의 실천력은 많이 퇴화 된 상태이다.

물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니까 늘 실행위주의 삶을 살기는 힘들다.
하지만 적어도 의지를 가졌으면 실행을해야 마땅하다.
너무나도 고운 삶의 방식에 젖어 의지와 실행의 적절한 조화를 이룬 시점을 지나 이제 더이상 실행력이 의지를 따라주기엔 게을러져 버렸기 때문에 서점에 자기계발서가 그렇게 난무하는 지금도 끊임없이 열정을 부추기는 서적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 좋은 말들 중에 단 하나라도 '실행'해야 한다는 중요한 지침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계발서 코너 앞에서 방황하기만 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기획회의에서 종종 회자되는 말이다.
특히나 '소통'을 부르짖는 이 때에 스스로의 실천의지 없이 '좋은말'만 내뱉는 상사를 보면 어김없이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변화를 바라면서 좋은 말씀들을 하시지만 정작 본인의 태도에 대한 개선의지는 전혀없는 사람들을 보면 대체 수직적인 관계의 조직에서 어떤 혁신적인 기적이라도 바라는 느낌이다.
주옥같은 그 말씀들을 잇는 '실행'이 없이는 그 자체로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

변화를 위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이만 읽고 이제 실행에 옮겨야 할 때이다.
나도 <실행이 답이다>의 당연한 내용들을 정리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읽음에도 문득문득 얼마나 찔리고 흠칫했는지 모르겠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훌륭한 구절들을 가슴에 새기지만 얼마나 실천을 했나?
좋은 문장들과 서정적인 문체를 음미하며 소설을 보지만...
정작 글을 쓰고싶은 마음에 비해 얼마나 많이 작문을 했었나?
겁만먹고 두려워서 아직도 배울 때라며 스스로를 속이며 책을 읽는다는건 '아직 준비가 안 되어서'가 아니라 글을 쓰기 두려운 맘에 '글을 안써도 되는'이유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책을 읽는지도 모른다.

만약 내 의지와 열정을 그대로 실행했던 시기가 없었다면 <실행이 답이다>가 이렇게 뜨끔하게 다가오진 않았을 것이다.
전공에 올인했던 대학4년 내내 결심보다 실행이 앞설 정도로 열심했던 전공과목에 대한 과정과 결과들이 다시금 떠오르면서 저자가 말하는 내용들을 증명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때 당시의 나는 뭐든 할 수 있었고, 뭐든 했다.
하다보니 원하는대로 됐고, 그러다보니 스스로 자기암시에 걸려 이미 성과가 눈앞에 보여 과제를 하면서도 당연히 A+만 머리에 있었기 때문에 
"어차피 A+겠지만 그 점수에 합당한 결과가 되어야 다른 학생들이 납득 하겠지."
란 생각으로 했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었다.
흡족한 결과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그를 위한 증명을 위해 '미리'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그때의 나는 자기계발서는 곁에 두지도 않았지만 이미 체험으로 충분히 터득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자기계발서를보며 단지 공감할 뿐일 정도로 말이다.

나 홀로 갑자기 '실행'의 중요성을 깨달아 처음부터 열심히 임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교양으로 듣던 국사관련 교양의 교수님의 한 말씀이 '실행'에 충실한 나를 만들어 주셨다. 
"'이만하면 적당하다.'가 아니라 '이정도면 더 이상 최고일 수 없다.'의 상태일 때 과제를 제출해라. 그래도 너희가 최고의 점수일지 알 수 없다."
그때 머리를 한방 맞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누구나 최고의 점수를 받고 싶어 과제를 제출하지만 다같이 최고가 될 수는 없다.
그 상황에서 '적당히'라는 안일한 생각은 이미 만족할 만한 결과와는 결별할 수 밖에 없게한다.
결과엔 승복하지만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서운한 결과가 나와도 적어도 스스로에게 부끄러움과 후회가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나의 한계를 보려면 그만큼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다행히 학생 시절 너무 독하게 임했는지 사람이 결심을 하고 '실행'을 하면 한계점엔 끝이 없다는 것을 체득하게 되었다.

강의 중에 들은 많고많은 말씀 중에 한말씀이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관점을 바꿔놓을 정도이니 저자를 비롯한 교수님들은 이런 사례를 접할 때 참 많은 책임을 느끼시겠다.
하지만 같은 시간에 같은 말을 듣고도 흘려듣는 학생도 있으니 아름다운 구슬을 잇는 실이 없이는 그 구슬은 단지 아름다울 뿐 목걸이나 귀고리 등 아름다움 이상의 '가치'를 실현해내지 못하는 안타까움만 연출 할 뿐이다. 

학생때는 후회가 없을 정도로 열심히 임했었는데 <실행이 답이다>의 중간점검에서 이제 더이상 최선을 다하기 보단 적당한 삶을 살아가는 내 현실을 뼈져리게 느께 됐다.
하지만 저자도 말했든 '한번 해 본 사람'은 지금 못하는 것을 다시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실행하기에 좀 더 수월한 위치에 있다. 
올해의 목표인 언어, 건강에 있어 과거의 실행과 결과를 되새기며 '실행'해야지.

사람이 하고자하는 뜻을 품고 설정한 목표대로 전략적인 계획을 잡아 실행한다면 안될 일, 못할 일이 없다. 
이 당연한 진리는 누구나 듣거나 느껴서 알고는 있겠지만 느끼지 못해서, 혹은 타성에 젖어서 더이상 '실행'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에 고르게 기회가 돌아가는 것이 아닌 '행하는 자'에게 전폭적인 지원이 돌아가게되는 것이다.
가끔은 사회가 불공평하게 느껴질 수 도있겠지...
하지만 내가 있는 자리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 했는지 한번 돌아보는게 더 중요할 만큼 '실행'이 많이 부족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많이 공부하고 계획했는데 아직도 만족할만한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가?
'실행이 답이다'
뭐든 계획을 세웠다면 실행에 옮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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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스토리콜렉터 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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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드>의 스토리콜렉터 시리즈1이었던 <키켄>을 접한 뒤로 그 후속편인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에 대한 욕심이 일었다. '청춘이란 이런거야!'라고 외치는 듯 경쾌했던 <키켄>은 시종일관 가만히 있는 몸이 저절로 움직이게끔 했기에 그 후속작이 가져올 재미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장르는 다르지만 역시나 잘 짜여진 구성과 방대한 캐릭터들을 산만하지않게 묶어 전개해가는 작가의 능력이 가미되어 읽는내내 책장을 덮는게 아쉽게했다.

출근하거나 밥을 먹는 시간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계속 앉아 탐독했을텐데 업무에 대한 책임감(푸핫!)과 어쩔 수 없는 식탐으로 잠시 쉴 때면 어찌나 손이 안 떨어지던지....!! 

 

애초에 제목을 보고 추리소설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범인을 유추해가는 과정은 가히 쉽지 않았을 뿐더러 추리하는 과정과 함께 간간히 사건과 캐릭터의 사생활로 보여지는 작가의 목소리는 새로운 구성임에 신선하다.

독일문학인지라 등장인물, 건물과 장소의 명칭이 입에 익지않아 초반엔 발음의 불편함에 술렁술렁 읽히는데 장애적 요소가 되기는 하지만 상당한 두께임에도 불구하고 시시각각 의심되는 인물들에 대한 추리에 독서의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형성되는 '신뢰'는 어떤 경우에 가능한 것인가?

책장을 덮으며 바로 옆 사람조차 믿을 수 없게하는 작가의 구성력이 섬뜩하다.

애초에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나디야가 그 정도로 토비아스의 눈을 가릴 줄은 몰랐다.

사랑의 표현은 다양하지만 결국 나디야는 토비아스의 입장이 아니라 본인에 대한 연민이 더 컸기 때문에 그의 인생이 파괴되는 순간을 방관하고 스스로의 전망을 세워 계획을 성사시키는데 일이 어그러질 경우에 보여주는 그녀의 히스테리도 무섭지만 그런 식으로밖에 사랑을 할 수 없는 그녀에게 아주 조금은 연민의 감정이 느껴진다.

 

나디야 뿐만이 아니라 타우누스의 구성원들에겐 11년 전의 사건과 관련하여 각자의 이기적이기도 하고 연민이 가기도 하는 입장이 있다. 물론 그 어떤 입장도 토비아스에겐 변명거리조차 되기 힘들지만......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던 사건이었는데 집단의 응집력이 모였을 때 어떤 반응력이 나올지에 대한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으며 폐쇄성이 보여주는 위험을 체험할 수 있다.

 

개개인의 동기는 단순하지만 그것들이 집단을 이뤘을 때의 결과는 무시무시하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에서는 다소 어이없는 동기까지 합세한 집단적 모의에 한 개인의 인생과 그 가족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다.

결과적으로 빼앗긴 재산이야 반환받는다는 의미를 넘어설 정도로 막대한 상속을 받는 토비아스이지만 빼앗기고 망가진 10년은 어떻게 보상받는단 말인가? 가족들은? 정신적인 피해는?

 

범인이 한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무섭진 않았을까?

아니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집단이기주의의 한 형태를 보여주며 무섭다기 보다는 마을 구성원들의 징그러울 정도의 그 뻔뻔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소집단을 예상하던 나였으나 너무 광범위한 그 세력에 놀라 책을 덮으면서 토비아스가 앞으로 살아가는데 트라우마로 작용할 인간관계에 대한 부작용을 생각하니 소설 속 캐릭터임에도 한없는 연민이 느껴진다.

    

백설공주를 질투할 수 밖에 없었던 왕비가 불쌍하긴 하지만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사고했더라면 왕비의 인생자체가 불쌍하진 않았을 것이다.

순탄한 가정을 바탕으로 외모부터 성적에 이르기까지 최고에 자리하는 토비아스를 질투했던 친구들, 마을 사람들.

평소의 피해의식이 도화선이 되어 개인들의 다양한 동기를 만나 집단이기주의로 폭팔해 안타까운 상황을 연출한 것도 모자라 10년 후에 다시 재현이 될 뻔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늘 공평할 수 없기에 누군가는 불합리한 상황에서 적의를 품게 된다.

그렇다고 누구나 그 적의를 표출한다면 사회가 유지되기 힘들겠지.

누군가는 느끼는대로 적의를 표출하겠지만 누군가는 사고의 전환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본인에게 좀 더 나은 상황을 연출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인간이 지녀야할 최소한의 윤리적의무와 책임을 바탕으로 이기심을 자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사람과 짐승이 구별되는 특징이 아닌가?

관점이란 스스로 잡아가기 나름이다.

본인이 불합리한 입장이라 생각된다해도 긍정적인 부분에 관점을 둔다면 그 질투심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뿐더러 개인의 발전까지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에서 보여지는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난 얘기였지만 작가가 하려는 말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겐 자기연민에 앞서 윤리의식이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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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선물한 여섯 아빠
브루스 파일러 지음, 박상은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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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이기에 가능했던 상상력의 결과물인걸까?

부르스 파일러는 자신의 죽음에 앞서 눈앞의 예쁜 딸들을 위해 앞으로도 본인이 필요한 부분들에 대해 충족시켜주지 못함에 안타까워하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을 마련한다.

바로 자신을 온전히 대신할 순 없겠지만 그 역할을 틈틈이 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딸들과 소통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그것도 한사람이 짊어지기엔 버겁기도 하고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 제대로 이뤄지지않을 것임이 분명하여 여섯가지 성향의 스스로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선별한 것.

 

편모슬하에서 자라게 될 아이들을 걱정하는 임종 직전의 아빠들은 많지만 지금껏 그 역할을 분담하여 부탁하는 아빠는 없었다.

특히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부모라는 역할에 큰 의미를 두는 동양에서는 그래서 시도조차 없었는지 모르겠다.

대부,대모라는 개념은 있지만 한 사람을 대신할 수 있게 체계적으로 특징들을 세분화하여 준비했던 적이 없었는지라 <아빠가 선물한 여섯 아빠>에서 보여지는 부성애의 표현에 대한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리라.

 

젊음은 한 개인을 유한성과 다양한 성공가능성을 부여하기에 자신감과 활력을 발산하게 하지만, 한 개인이 '죽음'이라는 문제에 당면해서는 한없이 초라해져 그때서야 자연과 세상의 거대함을 느끼게 된다. 인생의 끝을 준비해야하기에 초라해지는 것인지 본인의 초라함을 느끼게 되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거대하고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할지라도 남은 시간이나마 지금껏 돌보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선물로 보낼 수 있을 것인지, 남은 시간마저도 낭비하게 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죽음이라는 공포에 맞서기 전에 부르스는 본인의 삶에 대해선 충분히 감사하여 본인의 삶의 유한성에 대한 안타까움에 가슴아파하기 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않은 소중한 딸들의 남은 인생에 본인이 필요할 순간들에 대해 준비하는 과정을 택했다.

부모란 절망의 끝에서도 본인보다 자식을 더 생각할 수 밖에 없나보다.

자녀가 없는 나에게도 부르스의 선택에 우리들의 부모님들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같은 느낌이 들었다.

 

딸들이 앞으로 겪게될 다양한 인생에 대한 준비로 시작한 일이지만 이 과정에서 부르스는 딸들로 하여금 본인의 역할에 대한 되새김질과 인생에 대해 전반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됐다.

워낙에 단조로운 인생을 살아온 것이 아니라 남들과는 다른 '걷는자'이기에 그만큼 추억과 경험이 풍부하여 많은 사람에게 전해주어야 할 인생담이 남다르다. 그의 인생에 대한 자세와 마음가짐이 어땠을지가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는 계기는 썩 유쾌하지 않지만 <아빠가 선물한 여섯 아빠>라는 결과는 우리에게 다방면으로 감동과 동기를 부여한다.

 

삶은 참 감사한 일이지만 앞만 보고 걷기엔 주변의 눈부심에 가끔 방향을 잃게 된다.

이런 방황 중에 <아빠가 선물한 여섯 아빠>는 부르스의 부성애의 표현에 대한 감동뿐만 아니라 우리가 삶을 대하는 자세와 감사하는 마음을 갖을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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