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마찬가지로 죽음 또한 자신만의 간주곡과 계절을 지니고 성장해간다. 오늘, 우리는 봄의 문턱에 있다. 내일이면 라일락과 벚꽃이 축제를 벌일 것이다. 지슬렌, 너를 보기 위해 네가 죽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하지만 너는 언제나 그 이전, 그 앞에 있었다. 그러니 돌아간다는 건 적당한 단어가 아니다. - 소나기를 맞으며 눈부시게 웃음 짓던 생기 가득한 너를 볼 수 있으리라. 그리운 너의 미소. 우리는 그리움 속에서 시들어가고, 그 안에서 켜켜이 쌓이는 삶을 깨닫기도 한다.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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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저항의 축
어느 날, 미크가 린테에게 위조 신분증을 이용해 헤이그의 란 판메이르데르보르트의 식량사무소에 다녀오길 요청했다. 사무소에 동지가 있다고 했다. 미크는 동지의 생김새를 자세히 묘사하며 일렀다.
"잊지 마. 무조건 그 사람이어야 해. 혹 다른 사람이 근무 중이거든 바로 돌아서서 나와."
린테가 할 일은 위조 신분증을 이용해 다음 달 배급카드를 수령하는 일이었다. 배급카드를 구하면 조직원들이 이를 품목별 교환티켓과 거래했다. - P74

자그마한 사무소로 들어서는 린테의 심장은 터질 듯 뛰었다. 린테는 미크가 설명한 사람을 알아봤고 그에게 위조 서류를 건넸다. 그가 린테를 쳐다봤을 때 린테는 모든 것이 들통났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남자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무심히 배급카드를 넘겨 줬다. 린테는 그 순간을 평생 기억했다. - P74

... 일면식도 없는 두 사람이 그저 서로를 믿어야만 했던 그 순간을. 더 큰 위험에 처한 타인을 돕기위해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의연하게 행동했던두 사람의 모습을. - P75

8. 구금
브릴레스레이퍼르 가 사람들이 거취를 재정비하는 가운데, 나치는 인구 정책의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네덜란드 거주 유대인의 대다수를 암스테르담 일대로 이주시킴으로써 네덜란드 국가위원장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유대인 강제 추방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무직이거나 비非 네덜란드 국적인 유대인은 모두 베스테르보르크 수용소로 이송됐다. 베스테르보르크 수용소는 인접 국가의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한 용도로 1938년 지어졌으나, 
나치는 이 수용소를 다른용도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유대인들을 각국의 수용소로 보내기 전 환승 거점으로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 P97

베스테르보르크에서 약 1,126km 떨어진 
폴란드의 작은 도시 오시비엥침. 엄청난 수의 폴란드 유대인을 수용하기 위해 나치는 1940년 오시비엥침의 전 병영에 수용소를 건설했다. 도시의 이름은 곧 독일식 발음인 ‘아우슈비츠 Auschwitz‘로 더 유명해졌다. 

이 수용소의 벽돌 건물들은 대략 1만 5,000명에서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턱없이 작은 규모였다. 히틀러는 해당 수용소의 증축을 명했고, 1941년 3월 기존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제2수용소, 즉 아우슈비츠 ㅡ 비르케나우 수용소가 지어졌다. 전쟁이 이어지면서 아우슈비츠 주변에 약 40개의 보조수용소가 증축됐고 수감자들은 공장
일에서 농사까지 다양한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 - P97

한편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에서는 독가스인 ‘치클론B‘ 상용화를위한 실험이 한창이었다. 수용소의 화장장 한곳에서 소련군 포로와건강이 심하게 악화된 수감자 1,000여 명이 실험 쥐로 전락했다. 과립 형태의 독성 물질을 화장장 내부에 흩뿌린 후 화장장을 완전 밀폐하면 공기와 접촉한 과립이 기화하면서 사이안화 수소, 즉 청산을방출했다. 모든 수감자가 사망하기까지는 불과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 P99

1941년과 1942년 사이, 나치는 더 많은 실험을 통해 집단 학살에최적화된 독가스의 정량을 확립했다. 실험 희생자 대부분이 폴란드의 강제 거주지에서 끌려온 유대인과 소련군 포로였다. 1942년, 유럽전역에서부터 유대인을 실은 열차가 수용소로 밀려들어 왔다. 이는나치가 고안한 대규모 공장식 살상을 향한 첫걸음이었음이 드러났다.
곧 기존 아우슈비츠 수용소 인근, 인구 약 10만 명의 소도시 비르케나우에 더 큰 규모의 제2수용소 개설이 허가됐기 때문이다. 바로 이곳에서 최종 해결책인 ‘절멸‘이 벌어졌다. - P100

수용소의 구조를 살펴보면 모든 요소가 유대인 절멸 목표를 위해 고안됐음을 알 수 있다. 수도관도 연결돼 있지 않고 몸을 씻을 수 있는 공간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수용소 내 질병 감염율이 비약적으로 높았다. 독일 내 수용소는 의례적으로 1인 1실이 원칙이었으나 아우슈비츠에서는 4인 1실이 기본이었다. 그렇게 수용소의 수감가능 인원이 약 13만 명으로 늘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옆에는 4개의 거대한 가스실과 화장터가 지어졌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유대인의 수는, 5대 유대인 처형장 중 두 곳인 트레블링카와 베르제크 수용소에서 목숨 잃은 유대인을 합한 수를 금세 뛰어넘었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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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쟁의 아이들

1941년 여름, 네덜란드 거주 유대인들의 소재를 파악하는 작업이절정에 다다랐다. 유대인 등록제 이후 유대인의 이동의 자유는 제한됐을 뿐 아니라 더이상 시장이나 수영장, 해변 등 공공장소에도 출입할 수 없었다. 유대인 소유 회사들은 국가에 강제로 귀속됐고 라디오방송사는 압류됐다. - P60

8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는 암스테르담 시의 공무원들은 점묘도작성에 동원됐다. 암스테르담 지도에 유대인 거주지의 정확한 위치와거주민 숫자를 점으로 표시하는 작업이었다. 점 하나가 유대인 열 명을 뜻했다. 어디서 얼마나 더 검문해야 할지가 한눈에 보였다. 어떤지역은 점이 빽빽한 반면 어떤 지역은 드문드문하거나 일정했다.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네덜란드 정부의 별다른 저항 없이 유대계시민들은 네덜란드 사회에서 격리되고 상세하게 기록되며 기본권과존엄성을 빼앗겼다.
이진수있다 - P60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됐다. 전쟁 이후 나치의 테러에서 벗어나 맞이하게 될 밝은 미래를 꿈꾸며 사람들은 매일을 살아갈 힘을얻었다. 심지어 자매의 동료들 중에는 출산을 앞둔 부부도 많았다.
안타깝게도 린테와 에베르하르트는 결혼식을 치르지 못했다. 1935년 제정된 뉘른베르크 법으로 인해 유대인과 독일인 간의 혼인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린테는 여전히 연인과 사이가 좋았고 그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 P60

... 야니와 보프는 저항활동에 헌신하는 와중에도아들을 기르며 큰 행복을 느꼈다. 미케와 하콘 스토테인 부부 역시 딸 레네를 낳고 기쁨을 누리는 중이었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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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다시, 정원으로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자신이 다른 무엇보다 ˝땅의 창조물˝임을 상기해야 한다!

오늘날 같은 가상 세계와 가짜 뉴스의 시대에, 정원은 우리를 현실로 되돌려준다. 알려지고 예측 가능한 종류의 현실은 아니다. 정원은 늘 우리를 놀라게 하고, 우리는 거기서 다른 종류의 ‘앎‘을 경험한다. 감각적이고 물리적이며, 우리 존재의 정서적, 영적, 인지적 측면을자극하는 앎이다. 이런 의미에서 원예는 오래된 것인 동시에 현대적이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두뇌와 자연의 진화적 협력 때문이고, 채집과농업 사이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 삶의 방식은 장소와 애착을형성해야 하는 우리의 깊은 필요를 표현한다. 현대적이라는 것은 정원이란 기본적으로 앞을 내다보는 일이고, 원예가는 언제나 더 좋은 미래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 P315

경작은 양방향으로-외적 방향뿐 아니라 내적 방향으로도 작동하고, 정원을 돌보는 것은 인생에 대한 태도가 될 수 있다. 기술과소비의 지배력이 점점 커지는 세상에서, 원예는 생명이 태어나고 유지되는 현실, 생명의 연약함과 찰나에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해준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자신이 다른 무엇보다 땅의 창조물임을 상기해야 한다.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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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갈색 역병






1940년 11월 26일 아침, 메이에르스의 강의를 대체하게 된 클레베링아는 레이던 대학으로 향했다.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했던 학생들 앞에서 그는, 지금까지도 네덜란드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연설로 손꼽히는 저항 연설을 펼쳤다. 자신의 스승이자 동료인 에두아르트 메이에르스에 대한 헌사로, 메이에르스의 연구 업적이 네덜란드 법체계에 어떻게 생명을 불어넣었는지 논했고, 
나아가 법 분야의 초석이 된 개념들에 그의 이론이 어떻게 적용됐는지를 밝혔다. 메이에르스의 기라성 같은 업적을 증명한 클레베링아는 젊은 관중들의 정의감과 양심, 이성에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 P38

학자이자 학생들의 아버지, 훌륭한 이웃이자 우리 네덜란드의 고귀하고 참된 아들이며 국민인
 메이에르스, 그를 연구실에서 쫓아낸 것은 바로 적의에 가득 차 우리를 통치하고자 하는 외국인들입니다!
나는 오늘 내 감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내 감정이 들끓는 용암처럼 모든 균열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리며 머리와 가슴에서 터져 나올 것만 같아도, 나는 내가 한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하지만 정의를 지키고 따르는 것이 선생의 의무이기에, 나는 진실이 묵과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습니다. 그 진실이란 바로 네덜란드의 전통을 계승한 네덜란드 헌법은, 모든 네덜란드인이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에 봉사할 수 있으며 어떤 직위에도
임명될 수 있고 존엄성을 인정받으며 종교에 관계없
이 동등한 시민권을 누릴 것을 명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P38

한편 야니는 독일군의 자비도, 네덜란드인의 도움의 손길도 기대하지 않았다. 공직자들의 아리아인 혈통 증명이 시행되고 몇 개월 후인 1941년 1월, 시행령 대상이 네덜란드에 거주 중인 모든 유대인으로 확대됐을 때에도 야니는 증명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그녀 주변의 몇몇 지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자신의 신분증에 ‘유대인‘을 뜻하는 
검은 알파벳 J가 새겨지는 것을 거부했다.  - P40

훗날, 그녀가 이 결정에 대해 유일하게 후회한 부분은 바로 더 많은 사람들이 등록제를 거부하도록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부 방침을 순순히 따르던 언니에게도 숨기지 않고 얘기할걸. 그래서 네덜란드의 16만 유대인들처럼 신분증에 표식이 새겨지는 일은 극구 말릴걸. 독일인들이 그토록 칭찬하는 ‘네덜란드인 특유의 효율성과 전문성‘이 낳은 이 별것 아닌 듯한 행정 절차가, 이후 벌어지는 유대인 강제 이주 및 추방 정책에 엄청난 효율을 더했다.
- P40

암스테르담에서만 7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등록됐는데 이는 당시 암스테르담 인구의 10퍼센트에 달하는 숫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기에 다다르면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유대인 이민 중앙사무소에서는 단순한 인적 사항이 적힌 카드만으로 누가 수용소로 이송됐고 누가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는 게 가능해졌다. 수용소행 기차가 출발하면 승객 명단 사본이 중앙사무소로 전달됐고, 사무소 경리는 각 승객의 이름과 일치하는 카드를 한쪽 상자에서 다른 쪽 상자로 옮겼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 명당 한 장,
그렇게 ‘암스테르담에 등록된 유대인‘ 상자는 텅
비어 갔고 ‘이송 완료된 유대인‘ 상자는 꽉 차 버렸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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