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사른 호수
내가 케스터를 처음 본 것은 정(情) 실잣기 때였다. 신기한 발명품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듣기로 어느 지역에서는 작물 가을걷이와 풀 깎기에도 기계가 사용된다는 이 최신 문물 시대에 우연히 이 글을 읽게 된 독자가 혹시 정 실잣기가 무언지 몰라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잰시스 비가일디의 정 실잣기로, 잰시스는 스물세 살, 난 그보다 두 살 어렸을 때의일인데, 내 이야기가 거기서 시작하는 건 아니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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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자매> III. 생존








1. 동쪽으로
무려 1,000명이 넘는 사람이 소환되다니, 믿을 수 없다는 웅성거림끝에 수용소 전체가 대혼란에 빠졌다. 이번 추방 열차는 어디로 향하는 걸까? 아비규환이 시작됐다. 어떤 이들은 미친 듯 돌아다니며명단에서 빼내 줄 사람을 찾고,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발버둥쳤다. 어떤 이들은 무얼 할지 몰라 황망하게 가족들을 찾았다. 같이 붙어 있는 게 좋을까? 오늘밤에 도망을 칠까? 베스테르보르크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차라리 기차에 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송 중에 뛰어내리는 게 나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
아이들을 숨길 만한 곳이 있을까? 그나마 운이 좋아서 절멸수용소가 아닌 노동수용소로 가게 된다면 아이들도 함께 데리고 가서 해방될 때까지 버티는 게 낫지 않을까? - P329

린테와 야니는 손을 꽉 맞잡은 채 줄을 섰다. 
기차에서 내내 풍기던 악취를 잊으려 노력했지만 숨쉴 때마다 냄새가 느껴졌다. 자매는알 수 있었다. 
그 냄새를 평생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1944년 9월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는 밤. 
네덜란드에서 해방이 머지않았음을 확신한 사람들이 국기와 국장을 꺼내 걸었던 ‘광란의 화요일‘ 바로 다음 날, 브릴레스레이퍼르 가 사람들이 아우슈비츠에 도착했다. - P344

2. 그 무젤만을 아시나요?
몇 시간이고 점호가 이어졌다. 중간에 숫자가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수백 명이 거대한 체스판 위의 폰처럼 늘어섰다. 도중에누군가 풀썩 쓰러지면서 대열에 구멍이 생기기도 했다. 야니는 제 앞에선 여자의 등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카포나 나치 여성 교도관들에게 저항하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빗줄기도, 허기도, 벌벌 떨리는 몸을 타고 흐르는 고통도 애써 무시했다. 사람들은 그야말로 양파가 손질되듯, 본질만 남을 때까지 한 꺼풀 한 꺼풀 발가벗겨졌다. 시작은 직장이었다. 뒤이어 학교에서, 집에서, 고향에서 쫓겨났다. 이웃을 잃고 친구를 잃었다. 가족을 빼앗기고 자유를 빼앗겼다. 종래에는 옷도.
머리칼도, 그림자까지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본질이었다. 내가 지켜야 할 것, 나의 본질, 나 자신. 그것만은 뺏기지말자 - P353

4. 라 마르셰예즈
1944년 10월 30일,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최후의 선별작업이 끝났다. - P382

5.별 수용소
베르겐-벨젠이었다.
자매는 마주본 뒤 서로를 힘껏 끌어안았다. 긴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반짝이는 우박 덩어리가 머리칼을 타고 뺨 위로 떨어졌다.
첼레 역에서 누군가 베르겐-벨젠에 가는 게 아니냐고 말했을 때만해도 믿지 않았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다. 좋은 징조였다. 베르겐-벨젠은 조건이 괜찮은 곳이었다. 이곳에는 가스실이 없었다. 말 그대로수용소에 불과했다. - P389

8. 망자의 도시
야니와 안네가 헤어지고 얼마 후, 마르고트가 침대에서 떨어지며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리고 더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이미 부모님도 돌아가셨다고 여겼던 안네는 언니마저 잃자 더이상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안네도 삶의 끈을 놓았다.
며칠 후, 린데와 야니가 프랑크 자매를 만나러 갔을 때 자매의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두 사람은 시체 더미를 뒤져 마르고트와 안네의 시신을 찾아냈다. 다른 여자 두 명의 도움을 받아 자매의 시신을담요로 감싸 시체 매립지로 향했다. 그리고 한 명씩 천천히 구덩이깊숙이 떠나보냈다. - P416

9. 마지막 여정
골목으로 접어들며 차가 속도를 줄였다. 왼쪽으로는 운하가, 오른쪽으로는 주택가가 이어졌다. 카레 극장에 닿기 직전에야 자매는 비로소 잠잠해졌다. 오른쪽으로 펼쳐진 니우어 아흐테르 운하에 부모님이 살던 집이 있었다. 차가 천천히 좁은 길을 지나자 자매는 마치 무언가를 발견한 듯 동시에 밖을 바라봤다. 아버지가 팔을 활짝 벌리고 가슴을 당당히 편 채 딸들을 마중 나왔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카레 극장을 지나 가파른 다리를 건넜다. 문득 린테가 야니의 팔을 움켜잡았다.
"봐 봐! 너 헤이그 집에서 쓰던 커튼이야!" 린테가 다리 건너 모퉁이에 자리한 집을 가리키며 외쳤다. "보프가 보여!"
차가 미처 멈춰 서기도 전에 린테가 문을 왈칵 열고 달려나갔다.야니는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머리를 푹 숙이고 손을 무릎 사이에 감췄다. 몸이 고장나 버린 것 같았다.
보프가 달려와서 문을 열고 아내를 안아 들었다. 그는 마치 깃털 다루듯 조심스럽게 야니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로비가 신이 나서 고함을 지르며 두 사람 주변을 빙빙 돌았다.
"봤지? 우리 엄마가 돌아왔어요! 다들 와 봐! 우리 엄마가 왔어요!"
로비가 두 사람을 따라 들어왔다가 다시 거리로 달려나가서 외쳤다. - P432

자동차 한 대가 머뭇대며 엠말란으로 들어섰다.
호기심 어린 얼굴들이 창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가용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지난 몇 년간 군용 차량밖에 본 적이 없었다. 한적한 일요일 오후,하콘의 오보에 소리가 집밖까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순간 차가 황급히 멈춰 섰다. 뒷문이 활짝 열리고 누군가 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P435

피트의 손가락이 물 흐르듯 건반 위를 날았다. 바흐의 민속 음악에맞춰 상체가 앞뒤로 흔들렸다. 만족스러운 눈길로 사람이 가득한 거실을 둘러봤다. 모두 눈을 감고 음악을 한껏 즐기는 중이었다. 바로그때, 거실 창밖으로 머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커다란 갈색 눈동자와 밤송이 같은 머리, 피트-아니, 에베르하르트가 의자 위로 뛰어올라그랜드 피아노 너머로 몸을 날렸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현관으로 달려가 린테를 품에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펑펑 눈물을 흘리며 입을 맞추며 으스러질 듯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품에 안은 린테는 뼈밖에 없었다. 린테가 겪었을 고통이 에베르하르트의 뼈에 사무쳤다.
두 사람은 손을 꼭 맞잡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 기적 같은 재회를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린테를 맞이했다. 하콘이 친구를 꼭 안아줬다. 연주회가 막을 내렸다. - P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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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쓸모 - 흙 묻은 손이 마음을 어루만지다
수 스튜어트 스미스 지음, 고정아 옮김 / 윌북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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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로서의 임상 경험, 그리고 정원, 텃밭을 가꾸는 정원사로서의 경험이 어우러진 글. 사람들의 다친 마음을 치유하는 실제 사례들이 폭 넓게 제시되어 퍽 읽기 좋았다. 무엇보다 손바닥 정원과 텃밭을 가꾸는 나와 공감대 형성이 넘넘 잘된다는 점에서 읽는 동안 뿌듯하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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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 - 러시아대표단편문학선 세계단편문학선집 2
니콜라이 고골 외 지음, 최병근 옮김 / 써네스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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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의 제목도,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동명의 단편도 가슴 벅찬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러시아 단편 문학 거장들의 작품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푸시킨, 고골, 체호프, 부닌, 알렉산드르 쿠프린, 레오니드 안드레예프, 미하일 숄로호프 등 모두 기억하고 싶은 작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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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5-27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좋죠! 숨어있는 명작이 많이 담긴 보물 깉은 책입니다!

은하수 2024-05-27 17:58   좋아요 0 | URL
정말요!!!
진짜 작품마다 다 개성이 다르고 어쩜 하나같이 좋은지.. 버릴 작품이 하나도 없어요. 이런 단편집 또 만날수 있을까 싶어요~~!!!^^

페넬로페 2024-05-27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러시아는 왜 이리 위대한 작가가 많은 걸까요?
이 책도 읽고 싶어지네요^^

은하수 2024-05-27 23:18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 우리와 비슷하게 머리?가 참 중요한거 아닐까 생각하게 되죠^^
이 책 읽으며 ... 그 미운맘이 좀 희석이 되네요. 좋은 작품입니다.
읽으시면 후회 안하실거에요!

singri 2024-05-27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는 참 .
미운데 미워할 수 없는 입니다.ㅎ

은하수 2024-05-27 23:20   좋아요 1 | URL
ㅎㅎ
역시 같은... 맘이시네요.
저도 이 책 선택할 때 그런 맘이었는데...뛰어난 작품, 작가가 넘 많아서 진심 미워하게 되질 않아요^^
 

<아우슈비츠의 자매> II. 하이네스트






1. 숲 속의 저택
1943년 2월부터 유대인 은신처이자 지하활동의 중심지인 하이네스트에서, 브릴레스레이퍼르 가의 놀라운 행보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42년 7월을 기점으로 네덜란드 전역에서 베스테르보르크 및 동쪽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는 쉼없이 운행됐고 유대인들은 은신처를찾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 3년 차, 폭력을저지하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고 나치의 이데올로기는 독일군의 압력 없이도 순조롭게 굴러갔다. 어느 앳된 네덜란드 경찰이 이렇게말했듯이 "유대인 한두 명쯤 곤죽이 되도록 패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일요일을 보냈다고 할 수 없지." - P165

물론 핍박받는 이들을 돕는 비유대인 네덜란드인 역시 존재했다.하지만 이 경우 사달이 나기가 너무 쉬웠다.
은신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호해 주는 이들의 제한된 식량을 얻어먹고 살며 충분치 않은 공간에 얹혀 지낸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이들에게 맡겨진 아이들은 절대 말썽을 부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금방 알아챘다. 보호처를 제공하는 이들의 호의가 그들에게는 곧 생명줄이었으나 그 생명줄은 언제고 쉽게 끊어질 수 있었다. - P166

야니와 보프는 두 자녀와 함께 공식적으로 나르던에 전입 신고를 했으나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은 불법 체류자에 수배령까지 내려져 있었다. 피트에와 요세프는 거주지로 등록된 암스테르담을 이탈한 상태였다. 야피는 유대인인 데다 자전거 보관소 사업을 통해 저항활동을 한 반국가 세력이었다. 
에베르하르트는 독일군 탈영병이었고, 유대인 여성과 자식을 낳음으로써 아리아인 핏줄을 더럽힌 민족의 수치였다. 린테는 유대인이자 에베르하르트의 탈영을 도운 공범이었다. 야니의 경우, 유대인 등록을 하지 않은 것도, 법적으로 유대인과
비유대인 간의 결혼이 금지되기 전에 남편을 만난 것도 모두 천운이었다. - P166

완벽한 행정력과 빈틈없는 통계 수치는 네덜란드의 유대인 추방이매우 효율적이고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줬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나치 독일은 행방이 묘연한 유대인의 수가 무시하기 힘들만큼 많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약 2만 5,000여 명의 유대인의 행적이 묘연했다. 대부분이 등록 신고를 하지 않았고 거취도 불분명했다. - P166

5. 동료
미크는 나르던행 기차에 올라 어슴푸레해지는 암스테르담의 정경을바라봤다. 지난번 하이네스트를 방문했을 때보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너무나 많은 것이 변했다. 활동 노선은 정해졌다.
행동이나 관망 그 어떤 것도, 결정이 되돌리기 힘들게 굳어지는 걸막을 수 없었다. 저항투사들은 비정한 현실과 마주하는 중이었다. 순진하면서 다소 즉흥적이기도 했던 활동 방식은 점점 조직적이고 야심찬 계획으로 발전했다. 독일군 역시 더 폭력적으로 저항투사들을진압하기 시작했고,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야 한다는 저항군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렸다. 초기의 저항 운동은 문서 위조, 은신처 제공, 지하 언론과 방해 공작에 집중돼 있  숫자가 날로 늘어났다. 그리고 보복당하는 사례도 급증했다. - P211

점점 더 많은 동지를 잃기 시작했고 미크 앞에 놓인 선택지는 그의 마음을 한층 무겁게 짓눌렀다.  나는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도 헤릿 판데르베인과 등기사무소 테러에 대해 의논 중이었다.
이 작전은 여러모로 엄청난 후폭풍을 초래할 것이 분명했다. 그가 몸담고 있는 또 다른 저항단체인 CS-6는 유대인 강제 이송이 시작된이후 무력 대응으로 노선을 변경했고, 친구 헤릿 카스테인은 나치 부역자 살생부를 추렸다.
미크는 자신이 전하는 소식이 브릴레스레이퍼르 자매에게 큰 충격을 줄 것임을 알았다.
- P211

불과 몇 년 사이 암스테르담 거리 풍경은 상상하기 힘들 만큼 변해 버렸다. 물론 로테르담과 달리 암스테르담의 역사 지구는 아직 폭격당하지 않고 보존돼 있었고 운하와 강도 변함없이 중앙역에서부터카레 극장까지 묵묵히 흘렀다. 하지만 도시에 색채를 입히는 주역이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자취를 감췄다. 상인과 일꾼, 점원, 배우와 악사, 지식인과 밤마실을 즐기는 사람들, 도서관 사서, 매일같이 술에취해 비틀거리는 단골손님들,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동물원 사육사까지 수만 명의 암스테르담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집을빼앗기고 기차에 실려 베스테르보르크로 보내졌다. 그저 그뿐이었다유대인 이름 카드가 보관된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이민 중앙사무소에도 빠른 변화가 찾아왔다. 1943년 한 해를 지나며 ‘암스테르담‘이라고적힌 상자는 거의 텅 비게 됐다. - P222

5월과 6월, 대규모 유대인 검거가 마지막으로 시행됐다. 5월 26일,암스테르담 중심가에서 검거된 
유대인들은 마위데르포르트 역으로 이송됐다. 아끼는 인형을 꼭 껴안은 아이들과 아름다운 모자를 쓴여성,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은 남성, 갓 파마를 한 할머니.... 몇 시간의 기다림 끝에, 그들을 베스테르보르크로 데리고 갈 기차가 역에 도착했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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