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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0년 전부터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정확히 해두자면 30년 전에 그 사실을 당당하게 
밝혔다고 말해야겠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믿음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는 없다지만 내 경우에는 꼭 그렇지도 않았다. 몇 가지 낌새와 사소한 조짐, 그리고 애당초 무시해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부차적인 일들이 나타났었다. 마치 자그마한 씨앗 하나가 내 안에서 싹을 틔우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머지않아 땅을 가르고 나와 아직 연약하지만 꿋꿋하게 자라날 이에게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아요!"라고 고함치는 초록의 여린 줄기를 드러낼 것 같았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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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IR-5
고대 도시에서 살아난 역사적 상상력
-에페수스 유적지-

에페수스 유적지
에페수스Ephesus는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에 가장 큰 항구 도시 중 하나로 여행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탁월한 위치 덕분에 아테네의 이오니아 식민지 개척자들은 아시아 내륙으로 물품을 운송하기 
위한 무역의 거점 도시로 삼았다.

에페수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헬레니즘 시대에 크게 부흥했지만 최고의 전성기는 로마제국의 전성기인 기원전 100년부터 서기 200년대까지였다. 이때 로마제국은 공화정에서 황제시대로 바뀌었고 오현제의 시대를 통해 팍스로마나를 구가하고 있었다. - P113

당시 에페수스는 로마속주의 수도였고 인구 25만 명이 넘는 대도시로, 소아시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카이스트로스kaysition 강 하구의 충적작용은 인공수로를 건설해 항구를 보존하려던 에페수스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늪으로 변했다. 이후 항구는 폐쇄되었고 대규모 지진과 말라리아로 인한 전염병의 창궐로 도시는 그대로 버려졌다. 그 덕분에 오히려 도시의 유적은 온전히 남을 수 있었다. - P113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곳을 직접 방문하고 싶은 마음은 여행자라면누구나 갖고 있는 로망이다. 하지만 막상 방문한 뒤 역사적인 유적지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나뉜다. 그것은 아마도 방문했던 유적지의 보존 노력에 따른 것 같은데, 기대에 못 미쳤다는 평가가 상당하다. 특히 유적인지 잔해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면 어렵게 찾아온 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도 지난번 바스바네 지역의 아고라 유적을 보고 아쉬움이 많았다. - P114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공간이나 유적들을 찾아볼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공간의 가치는 남아 있는 유적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물길이 바뀌어 폐허가 된 도시도 있고 기후변화로 젖과 꿀이 흐르던 곳이 황무지가 된 곳도 있다. 그런 곳을 보고 오늘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곳을 굳이 찾아가는 건 그곳에 가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역사적 공간감‘이다. 이 역사적 공감감이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비록 오늘날의 모습이 전혀 다른 곳으로 변모했다 하더라도 그곳 주변의 풍경과 공기를 느끼고 나서야 비로소 가질 수 있는 역사적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 P115

그렇다고 모든 역사적 공간이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폐허가 된 유적 근처의 작은 나무 그늘에서 쉴 때 잠시 불어 온 미풍에 불현듯 과거 속 이미지가 그려져 감흥을 돋울 수도 있고, 폐허가 된 도시를 보며 인류 문명과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순간적인 깨달음에 닿을 수도 있다. 이 모두는 역사적 공간을 방문해야만 가 닿을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먼 길을 돌아 힘들지만 역사적 공간을 찾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 P115

ANTALYA-1
지중해를 품은 안탈리아
-칼레이치-

지중해 연안의 안탈리아

새로운 곳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것은 언제나 
낯설다. 안탈리아에서 머물 숙소는 버스터미널과 
역사지구의 중간쯤 안탈리아 주민들이 사는거리에 있었다. 어제 도착해 짐을 풀고 있는데 숙소 직원이 근처에 맛있는 빵집이 있다고 소개해 주었다. 짐을 정리하고 나가 찾아가 보니 튀르키예 빵들이 가득한 동네 빵집이었다. 빵을 고르자 주인은 낯선 여행자에게 홍차를 한 잔 대접해 주었다. 안탈리아의 첫인상이 푸근해졌다. - P142

안탈리아는 아나톨리아의 남서부 해안에 위치하여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큰 도시다. 안탈리아는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150년경에 페르가몬의 왕 아탈루스Attalus 2세가 도시를 창건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아탈레이아Attaleia‘라고 불렀다. - P142

오랫동안 그리스어로 불리던 도시의 이름은 이후 튀르키예어인 ‘안탈리아Antaya 로 바뀌었다. 도시는 로마제국에 편입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고 번영했지만 역사의 굴곡을 비껴갈 수는 없었다. 1207년엔 셀주크 튀르크로, 1391년에는 확장하는 오스만 제국으로 바뀌는 등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3년 동안 이탈리아에게 점령당했지만 튀르키예 독립전쟁 때 탈환되었다. - P143

안탈리아는 기독교 역사 초기에도 등장한다. 1세기에 사도 바울로와 바나바가 전도여행을 할 때 안탈리아를 방문했다. 또한 위대한 여행가들의 여행기에도 등장하는데, 14세기에는 중세 아랍인 여행자 이븐 바투타Ion Battute가, 17세기 후반에는 오스만 제국의 여행자인 에블리야 첼레비Evliya Celebi가 방문해 기록을 남겼다. 물론 오늘날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중해의 휴양도시로 알려져 있다. 안탈리아 주변에는 유명한 고대도시들이 많이 있지만 이번 안탈리아 여행은 구시가지인 칼레이치를 중심으로 역사적 지구를 살펴보고 오늘날의 튀르키예를 살펴볼 예정이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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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TOLIA-3
KONYA

2주 후로 다가온 튀르키예 여행 때문에 그렇겠지만
뭔가 모르게 마음이 바쁘다. 여행 가기 전부터 폭풍 쇼핑을 거의 끝내고 이제 조금 여유가 생겼다.
매일 이스탄불과 안탈리아 지방 즐겨찾기 해놓고 날씨를 보고 있는데 튀르키예와 우리나라는 거의 같은 위도여서 기온이 비슷하지만 약간 낮은 듯하다. 얇은 긴팔과 블라우스, 바람막이 점퍼, 반소매, 아이스블루 진, 진청, 그레이진, 스커트, 베이지 면바지 등등을 준비해 놓고 이렇게 저렇게 코디해보고 있다. 여행 일정이 9일이나 되기 때문에 다양하게 준비하고 있다. 이스탄불과 지중해에 면한 안탈리아 지방은 기온이 약간 차이난다.
나의 여행일정과는 반대로, 그리고 계절도 겨울인지라 아예 책을 거의 거꾸로 읽고 있는데
그게 맞는 거 같다.
콘야에서는 메블라나박물관만 책과 겹쳐서 좀 아쉽다...


메블라나 루미의 도시
-메블라나 박물관-

콘야의 역사
콘야에 도착한 날 아침 창문의 커튼을 걷자 바로 앞에 커다란 모스크가 보였다. 어젯밤에 자는 동안 큰소리에 놀라 깼는데 아마도 무에진Müezzin이 새벽기도를 알리는 에잔Ezan 소리였나 보다. 이렇게 가까이에 모스크가 있었으니 크게 들릴 만도 했다. 그러고 보니 한 달 넘게 튀르키예를 여행하면서 에잔 소리를 별로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새벽의 에잔 소리는 메아리가 울리듯 계속 이어져 좀 특별하게 들렸다.
그 울림이 에잔의 도시, 모스크의 도시에 온 걸 환영해주는 것 같았다. - P172

중앙 아나톨리아 고원의 남서쪽에 위치한 콘야konya는 튀르키예에서 가장 큰 면적을 가진 주(州)이면서 일곱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다. 신석기 유적지 차탈회위크 Cerealhoyak 가 근처에 있는 것으로 보아 역사적으로 오래 전부터 인류가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히타이트와 프리기아 왕국을 거쳐 리디아, 페르시아, 알렉산드로스의 침략을 차례로 받다가 끝내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이때는 ‘이코니움‘conium‘이라고 불렸다. - P173

메블라나 박물관

모스크를 나와 메블라나 박물관으로 향했다. 두 모스크 사이에 있는 긴 담을 한참 돌아 박물관 입구로 갔다. 당연히 입장료가 있는 줄 알았는데 간단히 소지품 검색만 하고 입장했다. 박물관 앞에는 아담한 크기의 정원이 있었다. 원래 셀주크조 술탄의 장미 정원이었는데 루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묘지가 되었다. 그리고 루미도 사망 후에 아버지 곁에 함께 묻혔다. 계절이 겨울이니만큼 정원의 꽃과 나무들은 한껏 움츠려 있었다. 구경하는 사람들도 추위를 타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손이 시리고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따뜻한 지중해에 있었는데 내륙 분지인 콘야의 추위가 이렇게 매서울 줄은 몰랐다. - P176

메블라나 박물관 Mevlana Müzesi은 원래 메블라나의 영묘와 함께 메블레비교단의 테케가 있던 곳이었다. 1273년 메블라나가 죽은 후 그의 절친한친구이자 후계자인 후사멧딘 첼레비 Hüsameddin Celebi는 메블라나를 따르는 ‘메블레비‘의 수장이 되었다. 그가 메블라나의 영묘를 지었다. 후사멧딘 첼레비가 사망한 후에는 메블라나의 장남인 술탄 왈라드Sultan Walad가 유지를 이어받아 교단을 조직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P176

메블라나의 묘를 직접 보니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소박한 묘일 것이라 기대했는데 영묘가 좀 화려해 보였다. 물론 후대가 꾸민 묘소이겠지만 평소 그의 성품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메블라나도 생전에 아버지의 영묘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하늘 돔보다 더 웅장한 것을 지을 수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묘소에 의미를89두지 않았다. 하지만 메블라나의 아들 술탄 왈라드는 메블라나의 무덤위에 영묘를 지으려는 사람들의 소원을 받아들였다. - P177

흥미롭게도 박물관의 상징물인 초록색 돔은 메블라나 관 바로 위에 설치되었다. 메블라나가 세상을 떠난 후 120여년이 지난 1397년에 녹색타일로 덮인 16면의 원뿔형 돔이 만들어졌다. 그후 영묘는 초록색 돔을 의미하는 ‘쿱베이 하드라 Kubbe-i Hadra‘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쿱베이하드라는 오늘날 콘야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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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내가 고래를 아무리 해부해보더라도 피상적인 것
이상은 알 수 없다. 고래에 대해서는 지금도 모르고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ㅡ허먼 멜빌, 『모비 딕』

텍스트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나? 그것을 꿰뚫지 않으면, 그것을 해방시키지 않으면 번역은 불가능하다. 번역은 텍스트를 투명해질 정도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렇게 벽 너머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고 해도, 그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텍스트 너머의 침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것인가? - P20

아니, 번역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투명하다는 말조차 사람들이 서로 다른 뜻으로 쓰는데(사실 나도 이 글에서 같은 말을 두 가지 이상 다른 뜻으로 썼다)? 그래서 번역에 관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번역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같은 용어와 개념을 가지고 저마다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다 보니 번역이란 무엇이다, 번역은 어떠해야 한다는 논쟁은 특수한 상황과 개별 사례를 아우르지 못한 채 엉뚱한 곳에서 맴돌고 만다. - P20

나는 번역을 명료하게 정의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자신은 없으니, 비유를 통해 비스듬하게 다가가려 한다. 내가 이 책에서 하려는 이야기는 흰 고래를 정의하려는 이슈메일의 시도 같은 것이 될지 모른다. 이슈메일이 그랬던 것처럼, 번역의 사례를 들고, 번역을 분석하고, 번역을 해부하고, 번역을 설명하려다가 결국 실패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 쓴 글들은 사람들이 저마다 번역을 어떻게 (같은 말로) 다르게 말하고 있느냐는 이야기이자, 번역이라는 실체 없는 행위를 말로 설명하려는 기도이자, 불가능한 번역을 정의하려는 불가능한 몸짓이자, 흰 고래를 그리려는 시도다. - P21

이슈메일이 열거한 흰색의 의미만큼, 바벨과 연관된 의미들도 다 합하면 흰색이 될 만큼 한없이 다채롭다. 바벨은 이렇듯 다양한 의미를 띠며 종교, 문학, 정치, 기술, 언어 등 숱한 분야에서 우뚝 선 상징이 되었다. 바벨의 의미가 탑처럼 끝없이 쌓여 무한으로 뻗는다. 바벨은 은유적 잉여다. 의미가 겹치고 겹치면서, 기호는 한 가지 의미를 안정적이고 고정적으로 띨 수 없다. 의마가 벽돌처럼 하나하나 쌓였다가 스르르 무너져 내린다. 바벨은 흰 고래처럼 모든 것을 표상하지만 아무 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 P30

바벨탑 이전에는, 모든 사람이 한 가지 언어를 썼을 뿐 아니라 단어의 의미가 하나였다. 아담이 이름 붙인 대로 사물과 이름이 일대일로 대응했고 언어는 명징했다. 바벨의 등장과 함께 그런 명징함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바로 바벨이라는 단어가 보여주듯이.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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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한참을 기다려 예약 도서로 빌려왔다.
도서관 신간을 보려고 신청하고 기다리고 받아오는 긴 시간에 지친다.
한참이 지난 후 받았을 땐 책을 읽고 싶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지고...

그래도 평소 좋아하는 번역가인 홍한별 님의 책이라 힘을 내어 읽어보려 한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미술 선생님이 하얀 석고상을 그리라고 시킨 일이 있었다. 아니, 그 선생님은 말 같은 것을 하는 분이 아니어서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교실에 석고상을 들고 와 교탁위에 올려놓았다. 미술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한숨을 토하듯
‘아그리파‘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게 갓 태어난 것처럼 순결하고 눈부신 하얀 머리의 이름이었다. 선생님이 말없이 내어준 과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새하얀 형체를 종이 위에 그림으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 P9

그날의 준비물인 스케치북과 4B 연필만을 가지고, 흰 도화지와 시커먼 연필을 가지고 어떻게 하얀 것을 그리라는 걸까. 막막했지만 흰 종이에 더듬더듬 선을 그어 형상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을 댈수록 석고상 그림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흰색을 그린다는 불가능한 과제.
수업 종이 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나를 포함한 예순 명의 아이들이 전부 시커먼 형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 P9

수업 종이 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나를 포함한 예순 명의 아이들이 전부 시커먼 형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저마다의 좌절감을 담은 그림 예순 장. 흰 석고상을 그린 검은 그림은 번역 불가능성의 증거다. 이게 이렇게 생겼는데, 눈에 뚜렷이 보이는데, 왜 종이에 그대로 그려지지 않나. 이게 이런 뜻인데, 너무나 빤한데, 왜 글로 옮겨지지 않나.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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